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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동의보감(하) [이은성 저]
작성자 이종운 (ip:)
  • 작성일 2017-01-21 15: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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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114
평점 0점

  도서명: 소설 동의보감(하)
  저자명: 이은성
 

    [  13. 정면대결 ]
    1
  그날 퇴청과 함께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는 허준을 이공기가 불러세웠다.
  "이명원이 오늘 꼭 그대를 만나자 하네."
  "꼭이라고?"
  "그렇네. 그 과묵한 사람이 꼭이란 말을 분명히 붙였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령 대기중이던 내의원에서 그중 뜻이 통했던 세 사람이었고 황오복의 직소사건 어부지리로 내국에 옮겨앉게 된 자신의 행운을 자축하여 술 한상 차려낼 터이니 서로 말미를 내자는 기별은 듣고 있던 터였으므로.
  "안 그래도 그 동안 얼굴 본 지 오래여서 만나보고 싶네만 꼭 오늘이래야 한다고 하던가?"
  "오늘 무슨 일이 있나?"
  집에는 지금 여러 사람의 병자들이 와서 자기의 퇴청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애고개 그 황량한 비탈 외딴집에 사는 관원이 혜민서 의원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요즘 허준의 집에는 한둘씩 환자들이 찾아들고 있었고 약재를 지니지 못한 허준은 약첩에 대신할 수 있는 단방을 일러주고 더러 침을 놓아주었다.
  그러나 굳이 침값을 흥정하지 않는 허준의 그 존재가 특히 삼개나루의 뱃사공들의 입을 통하여 번져나가 퇴청 후의 허준은 남 몰래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병자들이 불어나는 까닭은 또 있었다. 근자 혜민서 개폐시간 안에 진찰 순번을 타지 못한 병자들이 퇴청하는 의원들에게 매달려 별진을 사정하다가 퇴짜맞고 울먹이면 그 난감해하는 병자들을 동정한 의녀들이 너나없이 저 허의원을 잡고 매달리면 뿌리치지 아니할 거라고 귀띔한 뒤론 허준을 미행하여 집으로 들이닥치는 병자가 날로 불어나던 차였다.
  일찍 돌아가야 하는 사유를 간단히 얘기하자 이공기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건 자살행월세."
  "자살행위라니? 의원집에 한둘 병자들이 찾아드는 건 인지상정 아닌가."
  "정말 한둘인가?"
  "무슨 소릴 들었소?"
  "소문은 한둘이 찾아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법 많이 몰려들고 있다고 퍼져 있네."
  "하여튼 이명원의 얘길 들어보세. 내국에 박혀 있는 명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면 이미 소문은 좨나 퍼진 걸세."
  내의원 소속의 의원으로서 임의로 의원을 개설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내의원 의원의 소임은 왕실의 존귀한 분들을 위한 의료행위가 목적이요 전부다. 그중 혜민서로 배치되어 일반 서민들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나라의 이름으로 실시하는 것이지 개인의 욕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때로 나라 안에 돌림병이 돌고 민간의 힘만으로 치유하지 못하여 임시로 내의원 의원들이 병이 창궐하는 지역으로 파견되는 그런 혜민서 밖에서의 의료행위도 나라의 명분과 정책으로 시행되는 것이지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내의원 의원은 배치받은 부서에서 직책을 수행하는 외 남는 시간은 지정된 의서의 의무량을 읽고 그 진도를 한 달과 석 달 간격으로 보고하고 그밖에도 자기가 꼭 토구해야 할 과제가 있으면 부서의 책임자인 제조와 의술의 책임자인 수의께 계획을 상신하고 허가를 득해야 한다.
  내의원 의원도 국록을 먹는 관리인 이상 그 직책이 개인의 이익이나 영달에 이용될 기회는 일체 배제돼 있는 것이다.
  예외가 하나 있다. 고관들의 아비나 어미가 중병에 누웠을 경우 민간의 치료만으로 차도가 없을 때 더러 사정을 전해 들은 왕의 특지로 내의원의 전문의나 어의를 보내줄 때가 있으나 그것도 왕은으로 시행되는 것일 뿐이다.
  그밖에 사사로이 내의원의 전문의를 청하는 고관대작이나 명문거족의 청 또한 수의의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그러나 ... '
  허준은 태연했다.
  자신의 신분이 내의원의 관원임을 백번 알고 있으나 사사로이 이익을 챙긴 적이 없다는 자신의 양심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건 양심의 문제가 아닐세. 나라의 법도를 얘기하는 거지."
  남대문 칠패 모퉁이 목로집 어둑한 호롱불빛 속에서 먼저 와 있던 이명원이 한 순배 모주가 돌아가기까지 허준의 주장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지체 높은 사람끼리 통하는 것을 예로 들진 마시게. 아무리 그런 일들이 일상 다반사로 행해져도 그건 지체 높은 사람들의 세상 얘기지 그대의 경우는 변명거리가 되지 않네."
  "그럼 찾아드는 사람을 쫓아내란 말인가?"
  "그대가 온전히 버텨날려면 ..."
  "나는 못하네."
  "그렇거든 내의원을 떠나 사사로운 의원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지."
  그건 혼자 두 잔째 잔을 비우고도 자작하는 이공기의 말이었다. 허준의 입에서 신음이 샜다.
  돌아갈 수 없었다. 내의원에서의 영달 때문이 아니다. 허준은 내의원에 옴으로써 또 하나의 욕심을 품고 있었다.
  내의원 어의 양예수의 방과 서고에 가득차 있는 의술에 관한 진본들을 모조리 머릿속에 넣고 싶었고 가능하면 필사해서 가지고 싶었다.
  그밖에 허준의 욕심을 일게 하는 또 하나의 얘기 ...
  내의원 서고의 책 외 왕실 서고에 먼지를 쓰고 비장돼 있는 더 많은 희귀본의 목록을 안 것은 어의를 수행하여 그 왕실 서고에서 제 눈으로 보았노라 자랑하던 김응택을 통해서였다.
  그때 허준이 선망을 담아 물었었다.
  "어떤 책이더이까?"
  "저자의 이름은 이시진이고 책명은 '본초강목'이라 써 있었네. 난 그 발문만 보았고."
  "본초강목?"
  "지난번 동지사의 사행에 별견어의(대신 행차를 따라가는 의원)로 갔던 정판관이 용케 그쪽 사람과 닿아 그 초벌 몇 권을 필사한 것을 다시 필사한 것인데 전체 52권이나 되는 대저의 일부라더군."
  "의술에 관한 52권짜리 저서!"
  "27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인데 전체의 줄거리가 16부, 그 세분된 내용엔 동물, 식물, 광물 1,892종의 약효와 처방을 망라했다네."
  허준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길로 왕실 서고로 달려가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52권에 이르는 의서! 비록 내 나라 사람이 아닌 대륙 멀리 명나라 사람일지라도 바로 자기가 산 동시대에 똑같은 의학을 위해 필생에 걸쳐 그러한 대작을 엮어낸 인물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허준은 자신의 눈이 한꺼풀 눈곱을 털고 새로 떠지는 충격이었다.
  언젠가는 보리라. 사신 행차에 묻어들어오는 중원의 새 지식과 왕실 서고에 비장된 모든 책을 내 눈으로 보리라.
  그건 자기가 내의원 관원이기에 꿈꿀 수 있는 기회며 특권일 것이다.
  어찌 그 책들뿐이랴. 장차에도 끝없이 외국의 새로운 지식을 접촉하고 받아들이는 외국과의 유일한 창구와 연결된 이 내의원의 행운을 결코 쉬 포기할 수 없다.
  '적어도 내 머릿속에 이제는 되었노라는 충족감이 오기 전에는.'
  이명원이 허준의 참담한 침묵을 위로하듯이 말했다.
  "내의원에 적을 두려거든 다른 욕심 부리지 말게. 아직은 어의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나 어의에게 아첨하는 길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날 인종들이 도처에 깔려 있네. 공연히 작은 고집 피우다가 몸 다칠 필요 없어."
  "작은 고집 ..."
  "큰 고집을 위해서 작은 고집은 버릴 줄도 알아야 하지. 그게 뜻을 품은 사내의 태돌세."
  "내 직접 어의를 만나뵙겠네."
  허준이 결심한 어조로 말했다.
  "만나선?"
  이명원이 물었고 이공기가 주시했다.
  "돈이나 명예를 낚자는 것이 아니요 인근에 의원을 차린 사람도 없으니 그 정도 시술은 허락될 수 있다고 보네. 내일 가 뵙겠네."
  "정 뜻이 그렇거든 정판관을 먼저 만나 의논 여쭈게. 그대에게 호의를 지닌 사람은 적어도 내의원 상급자 중엔 정판관뿐인즉."
  그러나 사건은 더 빨리 닥쳐왔다. 어의를 만나리라 결심한 허준이 다음날 유시 근무를 마치고 관복을 입고 내의원 본청에 입궐할 준비를 할 때였다.
  어의께서 당도하셨다는 의녀들의 다급한 전갈이 들려와 고개를 들었을 때 어느새 김응택 들을 거느린 양예수의 얼굴이 눈앞에 닥쳤고 허준을 발견한 그 손은 마루 위에 놓인 걸레짝을 집어 그대로 허준의 얼굴에 내던졌다.

    2
  "네가 허준이냐!"
  아름다운 수염 속에서 성난 양예수의 목소리가 쩌렁! 하고 나며 그 손가락이 창날처럼 뻗어왔다.
  허준은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네가 허준이냐니 그가 자기의 얼굴이나 성명을 모를 까닭이 없을 터이다.
  "소인이 허준이옵니다."
  "오너라!"
  양예수의 얼굴에 조롱이 어리고 그가 앞장서 간 곳은 혜민서 안 약재 창고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멍해 있던 의원들과 의녀들이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바쁜 척 병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기별을 들은 이 공기가 달려나와 두 사람을 좇았다.
  "꿇어라!"
  허준이 약재창고 바닥에 무릎을 꿇자 이미 오가며 얘기가 있었는 듯 김응택이 어의 양예수 못지않게 강경한 어조로 약재의 출납을 맡은 부봉사와 도약사령을 불러들였다. 이어 지시받은 서리가 장기책 서너 권을 찾아들고 득달같이 나타나 김응택에게 바쳤다.
  "투서된 그 당귀의 조목을 일용한 수량과 맞춰보게."
  양예수의 말이었고 곧 김응택이 부봉사와 서리를 채근하여 한쪽에 쌓아놓은 당귀뿌리의 남은 근수를 일일이 달며 장기의 수량과 대조했다.
  '투서.'
  허준은 영문을 알 것 같았다.
  집에서 병자들을 받아들일 경우의 뒤탈은 이명원으로부터 경고를 받은 뒤였으나 몇 대 침으로 인정을 썼을 뿐 김응택이 뒤지고 있는 당귀뿌리는 도대체 쌓아놓은 적이 없다.
  "수량이 세 근 반이 모자랍니다."
  김응택이 장기를 양예수에게 바치며 긴장된 소리를 냈다.
  "이 자의 집에서 가져왔다는 수량은 얼마이냐?"
  "집에서 회수해온 것은 반 근 남짓이옵고 세 근이 간곳없습니다."
  허준이 놀란 얼굴을 들자 양예수가 가차없는 소리로 결론지었다.
  "이 잘 내의원 정청으로 연행하게."
  일어난 허준이 두 발을 버터며 두 사람 앞에 섰다.
  "소인의 혐의가 어떤 것인지 더 소상히 일러주소서."
  "발명할 것 없다. 혜민서 안에 온갖 협잡질이 횡행한다는 투서가 있어 그간 은밀히 내사하던 중에 가장 수상쩍은 자로 네 이름이 드러났고 특히 네가 사사로이 의원을 차리어 혜민서의 약재를 빼돌린다는 내용도 있어 이미 너의 집안을 사실한 뒤니라. 바로 이 다래끼가 너의 집 마루벽에 매달려 있던 것을 부인할 셈이냐."
  허준은 그 다래끼를 보았다.
  눈에 익었다.
  삼개 조선소의 황자성 영감이 어느날 발을 접지른 손자를 들쳐업고 달려왔었고 허준이 아침저력 침을 놓아 낫우어준 적이 있었다.
  그뒤 그 영감이 답례차 잉어와 쏘가리 몇 마리를 담아들고 온 다래끼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허준은 또 알았다. 그 다래끼 속에 당귀 반 근이 왜 담겨 있는가를 ...
  당귀, 그 승검초의 뿌리는 의원의 손에서는 보혈약재로 쓰이나 그건 또 여인들의 밑화장에 없어서는 아니 될 물건으로 여인들은 그 당귀의 뿌리와 잎을 말린 가루를 주머니에 달아 대야에 담가놓고 그 우러 나오는 물로 얼굴을 씻으면 피부에 탄력이 생기고 잔주름이 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허준의 아내 이씨도 지리산 비탈 산청에 있을 적부터 늘 당귀뿌리를 떨어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것을 허준은 알고 있었다.
  "그건 직처에서 가져간 물건이 아니올시다."
  허준이 소리쳤으나 두 사람은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날 내의원 정청에 연행된 허준에게 집에서 가져온 당귀와 혜민서에서 사용하는 당귀가 산지가 다르다는 것이 감별되어 직처의 약재를 유용했다는 혐의는 벗어졌으나 '내의원 의원이라는 위세를 업고' 사사로이 의원을 열었다는 그 대목만은 용서가 되지 않았다.
  관기를 흐린 인물에 대한 내의원의 징벌은 독특했다.
  그건 중문에 걸린 어필 현판과 정청에 내걸린 어필 현판 사이를 오가며 어필을 외는 혹독한 것이었고 그 징벌 회수는 100번 왕복에서부터 300번, 많아서 500번, 가장 무거운 것이 1,000번 왕복인데 과차에 첫째로 뽑히고 혜택받은 구임관이라는 이유로 허준에게 내린 징벌은 1,000번 왕복이었다.
  중문서 정청까지의 거리는 100보에 못미치는 짧은 거리이다. 그러나 중문에 내걸린 '화제어약 보호성궁' 여덟 자를 높이 외고 돌아서 정청까지 달려가 거기 달린 혈판 '조섭수양 약석차지기' 여덟 자를 다시 외고 그렇게 중문과 정청 사이를 연달아 뛰어 오가며 1,000번을 반복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개 100번을 못 채우고 비실거리고 300번을 넘으면 웬만한 다리힘을 지닌 자도 다리가 꼬이고 목이 갈라지기 마련이다. 지난날 의녀를 희롱 했다는 죄로 500번 징벌을 받은 자는 400번을 넘기지 못한 채 중도에 쓰러져 실려나갔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당일로 횟수를 다 채우지 못한 자는 여러 날 앓아누웠다가 다리의 근육이 풀려 다시 등청해선 나머지 횟수를 마저 채우도록 내의원의 '어필 외우기'의 징벌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자기의 소임이 덜 끝났음에도 미사를 시켜 정청으로 불려간 허준의 뒷소식을 알아오게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공기는 파랗게 질린 미사가 달려와 허준이 현판 외우기 1,000번의 징벌을 받고 있다는 전갈을 듣자 격분했다.
  혜민서의 부패는 환자들의 입진 순서를 조작하며 잔돈푼이나 뜯어쓰는 것만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당귀가 화장용이라는 데서 그것을 기생집에 들고 나가면 항상 술 한상을 청해 먹을 수 있는 인기있는 약재였기에 마누라 세수시켜준다며 이놈 저놈 한 봉지씩 차고 나가는 것은 아무도 말리지 않던 관행이라는 것도.
  그래서 내의원에서 혜민서의 기강을 잡는다는 수단으로 쩍하면 당귀 검사가 나왔고 그 일에만은 너나없이 공범들인지라 늘 약점을 잡혀 죽어 지내는 것이 내의원 의원들이었다.
  "1,000번 ..."
  특히 미운털이 박히지 않곤 그런 가혹한 숫자가 나올 리 없다.
  '어의도 어의려니와 허준을 경계하는 김응택의 감정도 섞여 있어.'
  이공기는 허준이 이미 3백 회 왕복을 하고 있으며 얼굴은 창백하고 비지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더라는 미사의 말을 다 듣기 전에 퇴청을 서둘렀다.
  아직 차례가 남은 환자가 몇 밀려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공기가 이명원을 통해 정작에게 내의원 정청에서 벌어지고 있는 허준에 대한 징벌을 알리고 세 사람이 함께 내의원 정청에 달려왔을 때는 1왕복마다 바를 정자의 획을 그어대는 허준의 왕복 횟수가 7백 회를 넘고 있었다. 허준의 다리는 마비된 중풍병자의 다리처럼 뻣뻣해져 질질 끌리고 있었고 정청 높은 마루 위 어의의 방앞에는 양예수가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그 허준을 굽어보고 있었다.
  "칠백예순다섯이오."
  서리가 바를 정자의 획을 또 긋고는 새 종이를 좌악 펼쳐들었다.
  "... 조섭수양 ... 약 ... 석 ... 차지 ..."
  허준이 칠백예순다섯 번째 정청의 어필을 뇌고 돌아서 중문 쪽으로 돌아서 갔다.
  그 정청과 중문의 좌우에는 내의원의 상하 의원들이 줄줄이 서서 금방 쓰러질 듯이 쓰러지지 않는 그 허준을 숨을 삼킨 채 지켜보고 있었다. 중문 앞에 이른 허준이 다시 뇌었다.
  "... 화제어 ... 약 ... 보 ... 호성 ... 궁."
  허준이 칠백예순여섯 번째 어필를 외기 위해 다시 정청 쪽으로 흔들흔들 왔다. 눈이 충혈돼 있었고 발목이 자꾸 접히며 기우뚱거렸다.
  "말려주소서!"
  이공기가 정작에게 소리쳤다.
  "기강을 잡는 일에 인정을 호소할 순 없네."
  정작이 조용히 뇌며 눈앞을 지나가는 필사적인 허준을 보았다. 그 허준의 한쪽 코에서 코피가 비치고 있었다.
  이공기가 내달아 그 허준을 부여안았다. 동시에 좌우에 섰던 내의원의 눈들이 그 두 사람과 당상 높이 굽어보고 있는 양예수를 번갈아.보며 숨을 죽였다.
  "그대로 눕게. 오늘 못 채운 건 뒤에 다시 채워도 되리."
  이공기가 허준의 귓속에 거푸 그 말을 소리쳤으나 허준이 그 이공기를 밀어내고 정청으로 비실거리고 갔다.
  그 두 사람을 양예수는 미동도 않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조섭 ... 수 ... 양 ... 약석 ... 차 ... 지."
  허준이 칠백예순예섯 번째로 어필을 외고 돌아섰다. 그리고 몇 발 돌아서오던 두 발이 정지했다.
  그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은 떼어놓으려는 의지에 반해 떼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코에서 코피가 한가닥 입술로 타 내리고 있었다.
  이공기가 무어라 외치며 내달았다. 아니 그 이공기가 허준에게 다다르기 전에 허준의 몸뚱이가 짚동이처럼 앞으로 구겨박혔다.
  이공기가 그 허준을 쓸어안았고 이명원도 달려와 허준을 붙잡았다. 한 덩어리가 된 세 사람의 머리 위에 양예수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남은 횟수가 몇 번인지를 단단히 적어두도록 하거라."
  그 양예수에게 정작의 눈이 칼날처럼 카악 떠져서 가 박히고 있었다.

    3
  그날 뜻 아니하게도 내의원 의원들이 들이닥쳐선 이 집이 혜민서 의원 허준이의 집이냐 확인한 뒤 불문곡직 일용하는 당귀가 담긴 다래끼를 들고 가버리자 허준의 가족은 도시 영문을 가늠할 길이 없었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허준의 아내는 그래도 찾아온 인물들이 아들의 동관이라고 개울 건너까지 따라나가 전송하는 시어머니를 진정시킨 후 집을 나섰다.
  그러나 이씨는 애고개 고갯마루 돌서낭길 앞에 이르러 걸음을 세웠다.
  설사 찾아왔던 사람들의 언동이 수상쩍었다 한들 그들이 내의원 관원임이 틀림없다면 퇴청시각도 먼 이 시각에 남편 직처에 달려간다는 것은 아녀자의 행위가 아니라 여겨진 것이다.
  '곧 돌아오시겠지 ... '
  애써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가라앉히며 되돌아온 이씨와 함께 이날 허준 일가는 애고개 위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해가 졌다.
  "어머님 먼저 돌아가 계십시오."
  "나야 돌아간들 아니냐. 저 등불들이 모두 애비를 보려고 온 병자들인데 내가 미리 가 있은들이지."
  고부가 막막한 눈길을 들었을 때 발밑이 이미 어두운 오솔길 쪽에서 관복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자세히 보니 그건 허준을 들쳐업은 이공기와 이명원이었다.
  "애비 아니냐!"
  놀란 손씨가 내달았고 뒤따르던 김씨가 문득 남편의 동관들에게 내외하며 걸음을 세웠다.
  코피는 멎었으나 자꾸만 다리가 꼬이는 허준은 걸음을 걷지 못했다.
  영문을 물으며 손씨가 울음을 터뜨렸고 이명원이가 이공기의 등에서 허준을 부축해 내렸다.
  "별일 아니올시다."
  친구에게 부액받아 선 허준이 어머니의 눈물을 향해 거푸 그 말을 되풀이했으나 다가온 허준의 아내는 남편의 물을 뒤집어쓴 관복과 그 진흙 바닥을 기어다닌 참담한 흔적들을 향해 숨을 삼켰다.
  "마당의 병자들을 보아주오."
  친구들의 부축으로 방안에 뉘어지며 허준이 말했다. 믿었던 의원이 오히려 업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마당 가득히 몰려 있던 병자와 가족들이 수런거렸고 그 난감해하던 얼굴 하나가
  "모두 내의원 의원들이여."
  하고 숨통이 터지듯이 외쳤다.
  방으로 안내받은 이공기가 허준의 가족에게 물을 데울 것을 지시하고 가져온 쑥주머니를 풀어 기해(배꼽 아래 1촌 5푼)와 중완( 배꼽 위)에 뜸뜰 준비를 서둘었다.
  이어 이명원이 손씨에게 동전 두 닢을 건네며 술과 갱엿을 구해올 것을 이른 후 허준의 수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매 맞아 피멍든 데 엿과 술을 달여먹인다는 들은 말이 있더니 애비가 혹 뭇매라도 맞은 게 아니냐?"
  엿도가가 삼개나루 가까이 있다는 얘기를 마당의 병자 가족들에게 전해 들은 손씨가 통행하는 손자와 사립 밖으로 나갔고 따라나서는 며느리에게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이날 이공기와 이명원이 허준의 곁에서 함께 밤을 새웠다.
  한밤중 엿을 탄 술 두 잔을 허준에게 먹이고 잠을 재운 후 방문을 열어 방안의 진한 쑥냄새를 갈아낼 적에야 아직도 궁금하고 안타까운 얼굴로 마당에 서성이는 병자들을 본 두 사람이 허준을 대신하여 병세를 문답하고 단방을 일러주어 돌려보냈으나 허준이 업혀오게 된 동기만은 두 사람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내의원 관기를 빙자하여 운수 나쁜 날엔 항용 있는 일올시다."
  애써 웃으며 그 말 한마디를 했고 허준 스스로도 궁금해 견딜 수 없는 그 어머니에게 "말은 곧 잊기 쉬운 것이라 몸으로 깨우침을 받았을 뿐." 이라며 더 긴말을 하려 들지 않았다.
  '내의원에서는 항용 있는 일.'
  그러나 그 항용 있을 수 있는 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내의원에 있었다. 정작이었다.
  '양예수는 어의 자리를 너무 오래 했어 ... 망육십이면 의당 후계자를 길러야 하거늘 ... 사람을 보는 데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이대로 더 두고 보아선 안돼.'
  이번 허준에 가해진 1천 회의 어필 송독은 다분히 지난날 유의태에 향한 구원과 허준의 과차성적 특히 허준의 장기가 침임에서 그 새 사람에 대한 양예수의 견제 심리에 있다고 단정하는 정작은 역시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이 문제를 표면화시킬 것을 결심했다.
  허준이 이공기와 이명원의 우정에 힘입어 체력을 회복하고 남은 어필 송독 230여 회를 마친 날 정작은 혜민세 제조 정종영을 집으로 찾았다.
  현직 한성 판윤으로 있으면서 혜민서 제조를 겸하는 그 정종영은 18세에 사마시에 올라 부수찬, 지평, 교리 등 출세가도를 달리면서 청백리로 녹선되는 등 주위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고 정작의 죽은 형 정렴의 친우이기도 했다.
  같은 정씨이되 그는 초계, 자신은 온양으로 비록 본관은 달라도 정종영은 친구의 아우인 정작을 친아우처럼 알았고 그 정작이 자신의 재주만큼 피지 못하고 한낱 유의로서 지내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는 처지였다.
  그러나 정종영도 발벗고 나서서 도울 그런 사정이 아니었다.
  정작의 아버지 정순붕은 인종 때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까지 지낸 조정의 거물이었으나 그가 속한 당파가 소윤으로서 윤원형, 이기 등과 함께 윤임, 유관 등 대윤파를 제거하는 데 활약, 그 공으로 보익공신 1등 온양부원군에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다시 세상이 곤두박질치자 임백령, 정언각과 함께 을사사화의 삼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몰락했다.
  그 집안의 비극 속에서 정작과 그의 형 정렴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했으나 정순붕의 죽음 후 그 자식들을 아끼는 이들의 조심스러운 천거 속에서 형 염은 사마시 합격 후 장악원 주부와 혜민서 교수를 거쳐 포천 현감을 끝으로 벼슬길을 버리고 산수 그림이나 그리며 한 세월했다.
  그 27세 위인 형을 따라다니며 세상에 눈을 뜬 정작도 벼슬길에 들어서 한때 예조 좌랑까지 지냈으나 더 이상의 출세엔 마음두지 않고 내의원에 적을 두며 여력을 술과 시에 탐닉하며 한세월 보내는 처지였다.
  '출세해선 안된다!'
  아버지의 비참한 말로가 남 위에 올라서려는 그 출세에서 비롯됐기에 형 염은 어린 아우 작에게 그 말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주던 터였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출세의 길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정작의 핏줄 속에는 포기한 벼슬길에선 피우지 못한 세상 됨됨이에 대한 강렬한 관심만은 수그러지지 않고 불타고 있는 건가. 뜻 아니하게도 허준을 위채 얼굴을 내밀려 하니 정작 그 자신도 알지 못할 충동이었다.
  "모른 체할 수 없어서 나선다?"
  "그러합니다."
  "나도 허준이란 아이의 이름은 들은 바 있네마는?"
  올해 64세가 되는 정종영의 온화한 얼굴이 44세 장년인 전직 우의정의 아들이요 친구의 아우를 건너보았다.
  "좀더 소상히 말해보게."
  "한마디로 내의원 인사가 너무 정체되어 있사옵고 그나마 그 인재들이 공정한 평가로 적재적소에 박히지 아니하고 어의의 주견 하나로 좌지우지되고 있습니다."
  "그건 탓할 일 아닐세."
  "...?"
  "내의원 인사는 본시 그러했네. 의원이란 무언가. 여타 벼슬길하곤 달라. 궁내가 무병하면 존재도 없는 것이요 내버려두어도 조정의 문무의 반열엔 함부로 끼어 들어오는 존재들도 아닐세."
  "아옵니다."
  "하여튼 의외로구먼, 평소 궐내에서 말수 적던 그대가 나서는 것이."
  "꼭 허준을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옵고 내 의원의 장래를 위한 충정올시다."
  "그 말도 듣기 좋네. 하나 의원의 존재란 무언가? 궁내에 환후가 있으면 그때 비로소 책임을 지고 그 환후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때 또 책임을 추궁할 뿐 오늘까지 대과없이 지내왔다 할진대 굳이 현재의 인선이 이렇다저렇다 괘념할 거리가 못돼."
  "더구나 양예수가 책임을 진 후 양대에 걸쳐 큰 실수가 없다는 것이 조정의 공론인즉."
  "...?"
  "물론 나보다 가까이서 더 자세히 보고 있는 그대의 눈에는 양예수의 인사나 자의가 눈에 거슬리기도 하리. 그러나 어의라는 막중한 직책을 지닌 인물에게 제 휘하의 자잘한 의원들의 인사쯤 자유로이 할 권한은 있는 걸세. 그중 누구의 눈에 억울하게 보이는 일이 띈다 해도 저희네 요량에 맡기고 모른 체 덮어주는 것이 제조로서의 내 소임이고 또 내 방침이로세."

    4
  혜민서 제조 정종영을 만나고 돌아오며 정작은 우울했다.
  "양예수와 조석으로 상종하는 그대의 눈에는 어의의 독단이 불복스럽다 할지라도 왕실의 수의라는 그의 직책으로 봐서 그 정도 독단은 족히 허락된 범주의 것이네."
  정작이 입을 열려 하자 정종영은 그 입을 막듯이 거듭 말을 이었었다.
  "전조에서부터 양대에 걸쳐 큰탈 없이 왕실의 의약 일체를 책임져온 터요 그 인사가 정치적 파당에 관련된 내용도 아닌데 누가 그 잘못을 꼬집어 논란할 수 있나. 그리고 그 발설자가 그대인 것을 알면 그대의 가계를 기억하는 인물들로부터도 결코 좋은 말은 나오지 않으리."
  마지막 말이 아팠다.
  그대의 가계의 그 가계란 우의정이요 온양부원군에 봉작되었던 그리고 말년에는 을사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병사한 후 관작이 추탈된 아버지의 존재를 일깨우는 말이었다.
  그 어두운 집안의 역사로 인하여 형 정렴은 정작이 16세에 술병으로 죽으면서 유언했었다.
  "벼슬길에 끼여들지 말아라!"
  "세상의 됨됨이에 관해 간여하지 말아라."
  그 형도 자기도 한때는 어엿한 우의정이요 부원군의 자식들이면서 입신양명의 길목과는 거리가 먼 길을 걸으며 집안의 몰락과 함께 각오했어야 할 참화로부터 비켜나 여명을 부지해온 것은 너무도 뼈아프게 정작도 안다. 그 형 염이 죽고 28년 ... 44세에 이른 지금 자신의 나이로 새삼 '세상의 됨됨이에' 끼여들고자 하는 자기는 대체 뭔가 ...
  정작은 생각한다. 자신의 입신이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아닐지나 재주 있는 자가 쓰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사원에 의해 배척을 당하는 광경을 끝내 못본 체 못 느낀 체 눈감고 지나가야만 하는가!
  '그것도 세상에 대한 관심인가? 그 정도도 끼여들어서는 아니 되는 자기는 그런 인생으로 끝나는가.'
  하긴 일체를 모른 체하는 것만이 가장 확실한 보신책일 것이다. 대체 허준이가 자신에게 무엇이기에 그에게 닥친 일들에 자기의 가슴이 끓어야 하는가.
  세상에 대한 관심은 아득한 옛날에 접어버리고 더 이상 타오를 미련도 없는 잿더미가 된 가슴으로 알았거늘 ...
  '그러나 ... '
  그건 허준이 때문만이 아닌지도 모른다.
  양예수와 구침지희로 대결했던 유의태의 기백을 목격했던 많지 않은 사람 중의 하나인 정작에게 있어, 왕실과 정계의 고관대작들에게 굴신하고 칠묘하게 헤뒷장치며 출세의 길을 닦아가는 양예수와 출세의 길을 내던지고 한바탕 조소의 웃음 끝에 산청 시골로 돌아간 유의태의 강렬한 인상 속에서, 처지는 다르나 벼슬길을 단념한 자신의 인생에 위안을 찾았었는지도 ...
  그리고 그의 수제자인 허준을 보며 자신이 포기한 출세의 욕망을 의탁해보는 한가닥 인생에 대한 미련인지도 ...
  그 미련은 또 자기만의 미련이 아니리라.
  사마시(진사와 생원을 뽑는 과거)에 올라 26세에 포천 현감에 이른 후 더 이상의 출세를 포기, 어느날 병을 칭탁하여 동헌 기둥에 인수를 걸어놓고 초야로 묻혀버린 형인들 그 가슴에 타오르던 것은 '벼슬하지 말아라' '세상 됨됨이에 관심하지 말라'는 달관의 심정이 아니라 그치려 해도 그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새파란 원념의 몸부림이었음을 정작은 안다. 벼슬을 버린 그 형이 광주 청계사 골짜기에서 술취해 눈 속에 얼어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을 때의 절망감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 형님과 내 못다 핀 소망을 꽃피워보거라.'
  이미 자기 집 대문 앞에 당도한 정작은 설렁줄을 당겨 하인을 부를 것도 잊은 채 그런 결심을 했다.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왕이요 내의원에는 양예수가 호랑이다.
  삼사 의원들과 의녀들의 그 말이 아니더라도 양예수의 위엄과 존재가 가히 그 정도 막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정작이 알고 있었다. 아직 그 허준을 양예수의 대항마로 내세우기에는 어쩌면 싹수 있는 한 의원의 장래를 미리 꺾어버리는 우행이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자일지라도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결의에 찬 그 한마디를 뇌면서 정작은 자기 집 설렁줄을 힘있게 흔들었다.
  단오절이 왔다.
  천중절, 중오절 또는 수릿날로도 불리는 이 단오절은 1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로 여기는 날이며 특히 이날 궁중에는 두 가지 평화로운 행사가 생긴다. 하나는 임금이 공조에 명하여 부채를 만들어 정승으로부터 요로 백관들에게 나누어주는 단오선의 하사 잔치요 둘은 내의원이 주관이 되어 제호탕과 옥추단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치면 임금이 그것들을 문무백관을 비롯 궁살이하는 내시, 상궁, 나인, 심지어 5,6세 어린 항아들에게까지 고루 나누어주는데 제호탕은 청량제이고 옥추단은 구급약이다.
  특히 이 옥추단은 급환 때 꺼내 먹기까지는 가운데 구멍을 뚫어 예쁜 노리개 주머니에 넣어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장식품으로서보다 그건 귀신을 쫓고 제화초복을 비는 벽사의 효험이 있다고 믿어서이다.
  허준과 이공기도 궐내 행사에 참여하고 내의원에 내려진 사찬을 먹던 때 였다.
  약국 근무인 이명원이가 조용히 다가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지난달 자기를 혜민서에만 붙박아놓는다 인사에 불만을 품고 직소했던 황오복이 명나라에 가는 사신 행차를 따라가는 별견의원으로 뽑혔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그 황오복이 어제 어의를 찾아가 어의와 내 의원 욕을 바가지로 퍼부은 끝에 사직서를 내던지고 고향으로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후임은 뉘라던가?" 
  "유도지라네."
  허준이 번쩍 눈길을 들었다.
  이명원도 이공기도 숨을 삼킨 채였다. 사신 행차를 따라가는 의원을 별견의원이라 부른다.
  말할 것도 없이 사신 행차의 병을 돌보는 것이 소임이다.
  말인즉 나라 밖 구경도 하고 호강스러워 보이나 한양서 의주 그 국경을 넘어 봉황성, 요동, 산해관, 북경까지로 3천6백 리를 약 40일로 주파하는 고행의 길이요 왕복 7천 리를 넘는 그 행차에 말단 의원에게는 말도 없이 30켤레 짚세기와 미투리를 짊어지고 허위허위 쫓아가는 지옥의 노정일 뿐이다.
  게다가 정사이하 짐꾼까지 총 200명에서 300명에 이르는 집단 행동 속에서 내의원 얕은 의원이야 오가며 대우받을 구석도 없다.
  "국사를 수행한다는 사명감이나 문물이 앞선 나라에 가본다는 탐구심이 없는 인물에게는 죽기보다 괴로운 길일 뿐이지."
  침묵 끝에 이명원이 말했고,
  "유의원은 간다던가?"
  하고 허준이 되물었다.
  "모르지. 둘 중 하나만 결심하면 가겠지."
  "둘 중 하나라니?"
  "명나라의 선진문물을 견학하려는 욕심이든 이런 때 아니면 나라 밖 구경은 못해본다는 호기심이거나."
  허준이 신음했다.
  일전에 들었던 그 명나라 이시진이 찬술했다는 본초강목에 대한 궁금증이 불같이 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공기의 말은 엉뚱했다.
  "어의가 정말 집요한 사람이로세. 황오복이를 별견의원으로 꽂은 것은 지난날 자기의 인사에 반기를 든 데 대한 제재임에 틀림없어!"
  캐물을 것도 없었다. 묻지 않아도 그건 세 사람의 가슴에 확실히 와닿는 직감이었으므로.
  그 세 사람의 눈이 멀리 내의원 정청에서 느긋이 도제도며 제조들과 한담과 웃음을 흘리는 양예수 쪽에 박혔다.
  의지인이라 엮은 글자가 보이는 커다란 발 너머에서 그 내의원 고관들의 모습은 한껏 평화로웠다.
  "대궐 쪽은 넘보지도 말고 혜민서 근무도 감지덕지하며 시키는 대로 해라. 몸 편하려거든 반심 품지 말라는 우리네 모두에 대한 경고겠지."
  이공기가 조롱기 어린 눈빛인 채 뇌었고 그 거침없는 언행을 이명원이 눈짓으로 말렸을 때였다.
  정청으로 급히 다가드는 내시와 몇마디 얘기가 오가던 김응택이 보였고 곧이어 발이 들춰지며 방안에 동석해 있던 정작이 밖으로 나왔다.
  곧이어 방안에서 양예수가 황황히 나와서 내시의 얘기를 듣는 것이 보였다.
  무슨 사태가 일어난 듯했다.
  양예수가 내시에게 되묻기도 전에 방안의 제조와 도제조가 역시 경황없는 모습으로 나왔다.
  이어 내시를 앞세운 일행이 황황히 정청을 빠져나갔다.
  "공빈 처소의 내신데."
  이명원이 그간 궁안에서 안면을 넓힌 듯 뇌었다.
  정통 왕자 아니 계시고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를 생산한 공빈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의기양양한 선조의 첫째 애인이었다.
  정청 가까이 있던 미사가 다가오자 이명원이 그 미사에게 연유를 물었고 미사가 조심스레 주위를 돌아보았다.
  "공빈마마 처소에 급한 문후가 겝시다 하옵니다."
  "어떤 환후관데?"
  "얼핏 듣기 구안와사라 하더이다."
  "구안와사?"
  "공빈마마가 말인가?"
  "자세히 듣지는 못하였사오나 모두 경항없이 나가시는 걸로 보아 아마도 ..."
  미사가 귀한 이들의 병을 함부로 입에 올리기를 저어하는 양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그건 운명의 기묘한 마주침이었다. 입과 눈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그 구안와사의 병증이 공빈에게 온 그날 혜민서에도 똑같은 구안와사 병자 하나가 찾아들어와 직숙이라 돌아와 있던 허준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마치 서로의 의술을 견주어보기라도 하라는 듯이 똑같은 병의 두 병자가 양예수와 허준에게 한 사람씩 배당된 것이다.

    5
  내의원을 나서 그 동쪽 예문관 담을 좇아 달리며 양예수는 급했다. 공빈이 뉜가? 비록 후궁일지라도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가례 후 8년이 지나도록 생산을 못하는 왕실에서 임해군, 광해군 두 왕자를 낳은 여인이요 임금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온 조정의 주목을 한몸에 받는 여인이었다.
  '공빈의 소산인 두 왕자 중에 보위가 이어질지 모른다!'
  아직 왕비의 보령이 스물셋, 감히 조심스러워 함부로 후사에 관한 말은 못할지라도 열다섯에 시집와 8년이나 결혼생활을 거친 왕비의 몸에서 생산의 기미가 없고 보니 차대 이 정권이 누구에게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조정 대신들에게 있어 너무나 민감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문제는 비록 국정 일반에 관여할 수 없는 어의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양예수에게도 무시할 수 없는 관심사였다.
  명종대에서 현 선조조에 이르기까지 그 양대를 이은 어의로서의 명예를 다음대까지 잇고 못 잇고는 바로 공빈의 눈에 들고 안 들고의 여부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삼대를 이어 어의!
  역대 의원 중에 그토록 찬란한 명예를 지닌 인물은 있질 않았다. 있다면 앞으로의 자기일 뿐이다. 누가 감히 왕실에서 내게 향하는 돈독한 신뢰를 대신할 수 있는가 ...
  운 또한 얼마나 좋았는가.
  사람 있는 곳에 병이 없을 수 없고 왕족들이라 한들 병고, 병사가 없을 수 없으니 자신이 어의가 된 뒤로도 굵직한 사건이 여러 차례 있었다.
  13년 전인 명종 19년 상의원 판관에서 예빈시 판관으로 자리가 옮겨질 때 예빈시 판관이면 조회에도 꼬박 참여하는 직첩이라 하여 근본이 의원인 자에겐 외람된 승진이라며 조정 대신들로부터 양반 출신 아닌 수모를 얼마나 받았던가.
  그러나 당시 병석에 있던 대왕대비의 병을 필사적으로, 정말 필사적인 의료로 낫우어 그 조정의 시비에서 벗어났었다.
  그리고 다음해 대왕대비가 승하하셨을 제는 함께 의약을 상정하고 같은 어의인 김세우가 선임자로서 탄핵되고 자신은 후임자라는 덕분에 그 서슬퍼런 추궁에서 벗어난 적도 있었다. 사건은 또 있었다. 10년 전 명종이 34세 젊은 나이로 승하할 제도 박세거, 유지번 등 역시 당시의 선임 어의들이 금부에 인행되어 엄중 처단되면서도 자기는 죽은 이가 마지막 먹던 때의 의약을 상정할 때 다른 약을 짓기를 주장했던 탓으로 무사했었다. 그리곤 오늘까지 출세의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새 임금 선조가 즉위한 후 수의로 발탁되어 이름 그대로 삼의사의 실권을 거머쥔 것도 그때로부터다.
  그간 김민세라는 자신이 대부 노릇까지 자청하여 후계로 꼽은 인물이 있었으나 화제의 천재였던 그는 살인의 죄로 괴로워하다가 내의원을 떠났고 그 뒤 유의태의 친구가 되어 떠돌아다닌다는 풍문을 듣고는 마음속에 인연을 끊은 지 오래다.
  더 이상 거리낄 인물이 없었다. 양예수는 자신의 그 창창한 운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동안 평안도 쪽에 돌림병이 창궐하여 수천 명이 죽어나는 아찔한 사건이 한 차례 있었으나 몇십년 주기로 찾아드는 그 난리도 아득히 북쪽지방에서 떠들썩하다가 1년여 후에 가라앉았고 지금 왕실도 왕족들도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다.
  "삼대를 이은 어의!"
  양반 신분도 아니다. 오르고 올라 정승이 될 것도 아니고 보면 의원 중의 의원이란 칭송을 받으며 세 임금을 모신 삼대를 이은 어의의 명예로서 그는 만족한 것이다.
  예문관 앞 돌다리를 건너며 양예수는 걸음을 세줬다.
  어의라는 지체에 어울리지 않게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서였다.
  "차비 대령할 아이들은 어찌 아직 보이지 않느냐?"
  따라나선 김응택이 수목에 싸여 매미소리가 어우러진 내의원 쪽을 초조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내의원 돌담을 돌아 차비를 마친 선임의녀 다섯 사람을 거느린 내의원 직숙과 기별 가지고 왔던 내시가 급행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공빈마마 처소로 달리게."
  양예수가 김응택에게 명령하고 정작과 함께 대조전 쪽으로 길을 잡았다.
  병자가 공빈이고 보면 사태를 임금께 먼저 아뢰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대조전은 임금의 침전이다.
  6간 대청을 가운데로 왕의 침실을 동온돌 왕비의 침실을 서온돌이라 부르며 왕부부의 합방을 주선하는 날 외에 낮시간엔 임금이 들르지도 않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 단초절을 맞아 조정 대신들의 하례를 받은 임금이 대조전에 납셔 계시다는 기별은 아까 이미 들었었다.
  이성이 그리울 때면 으레 공빈 처소로 들르는 임금이 이날따라 낮시각에 대조전에 들른 것은 생산하지 못한 아내라 하여 의무적인 날 외엔 돌아보지 않는 지아비에 대한 무언의 시샘인지 스물세 살 왕비는 대조전 숲이 아름답다는 핑계로 임금의 거동이 기별되지 않는 날에도 서온돌에 자주 들렀고 특히 오늘 단오절을 맞아 궁안의 어린 항아(이제 5, 6세의 장차의 궁녀 예비생들)들을 모아 추천(그네)놀이를 벌인다 듣고 잠시 말벗삼아 들러준 모양이었다.
  대조전에 항아들의 그네놀이가 한창이었다.
  그걸 구경하며 사실 이상으로 흥겨워하는 왕비 곁에 왕비보다 두 살 위인 25세의 청년 선조가 서 있었다.
  양예수와 정작이 정감(대조전의 호위직) 앞에 읍해 기다리자 두 사람을 발견한 수행승지가 다가왔다.
  양예수가 찾아든 연유를 전하자 이미 들은 바 있는지 승지가 침착하게 정정했다.
  "공빈마마의 환후가 아니고 본곁(친정) 식구 중에 마마의 동생이라 하오."
  "공빈마마가 아니라구요?"
  양예수의 가슴에 실망의 그림자가 지났고 임금 선조가 다가왔다. 임금의 움직임과 함께 그네가 멎으며 왁자 떠들썩하던 대조전 뜰이 조용해졌다.
  승지가 선조께 아룄다.
  "아까 주달했던 그 일이옵니다."
  "소인은 공빈마마의 문후인 줄로 알고 달려왔사옵니다."
  선조가 말수 적게 입을 열었다.
  "병자가 왕자들의 외숙이 되는 인물이니 각별히 살펴주오."
  양예수가 또 한번 허리를 굽혔다.
  대조전을 나선 양예수의 가슴에 잠시 전의 실망이 환희가 되어 되살아났다. 직책이 어의라 하나 환후 곕시기 전엔 임금과 말 한마디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직접 자기를 향해 내린 옥음을 들은 것이다.
 ... 병자가 왕자들의 외숙이 되는 인물이니 각별히 살펴주오.
  각별히, 분명 각별히라고 말했다. 왕의 그 특별한 관심에 대해서 감격했다. 구안와사는 까다롭긴 하되 어려운 병은 아니다.
  적어도 어의의 소임에선 쉽고 간단한 병에 속한다.
  그런데 별로 어렵지 않은 작은 병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임금의 특별한 관심을 담아서 ...
  자기 운이 창창하다는 데 대해서 실감했다.
  임금뿐 아니고 공빈의 지극한 관심 속에 자기 이름이 또 한번 오르내릴 것이라는데 절로 걸음이 날듯한 기분이었다.
  병자는 공빈의 남동생 19세의 김병조였다.
  공빈 처소인 진숙궁 뜰엔 공빈을 위시 그의 생부이자 임금의 장인인 사포서 별제를 지내는 김희철이 보였다.
  그 김희철은 양예수도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본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인 김희철이었으나 그 늠름한 모습에 반한 선조가 사냥길에 동행시킨 것이 오늘의 공빈이 있게 된 인연이었다. 그날 사냥길의 귀로에 김희철의 집에 들렀다가 그 딸의 미모에 이끌린 선조는 그 딸을 청하여 후궁을 삼았다.
  그러나 결벽한 김희철은 그날 이후 임금 사위와 왕자인 외손주가 있는 대궐 쪽은 애써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도 엄명을 내려 궁출입을 막았다.
  뒷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조헌의 휘하에서 비장으로 출전, 금산 싸움에 전사, 영천의 방산서원에 제향받는 그는 "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할 만큼 아직 평화로운 이 시절에도 그런 고집을 가진 충의지사이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아버지의 결벽을 원망한 건 공빈 쪽이었다.
  특히 여러 남매 중 병조에 대한 우애가 깊어 공빈은 무시로 동생을 진숙궁에 불러들였고 그렇게 불려온 막내처남을 선조도 사랑했다.
  그러나 문무 어느 쪽이 되었건 떳떳이 과거를 치러 등방하기 이전엔 결코 궐내 출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김희철의 고집이었다.
  그런 장인의 고집을 들으며 무관인 김희철을 대궐 내 정원을 관리하는 사포서 별제로 만든 건 조정 안에서도 흔치 않은 미담으로 알았으나 병조는 누님과 자형의 위세를 자주 드러내는 좀은 망나니였다.
  그 병조가 동생의 병을 나라 안 최고의 의원에게 고치고자 앞장선 공빈을 따라 진숙궁 뒷방에 유유히 들어서는 양예수를 발견하고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적의에 찬 눈을 뜨자 누이 공빈이 달랬다.
  "이분은 상감마마의 옥체를 돌보시는 어의시다. 나라 안 첫째가는 의원이니 그 수건 떼고 다가앉거라."
  "싫소? 이놈 저놈 만나는 자마다 침을 찌르고 약을 퍼먹이니 낫울 수없는 의원이거든 그 침통 끄르기 전에 돌아가오!"
  "제가 어의오이다. 비록 어려운 병이라 하나 고치지 못한 병이 없는 사람이니 증세를 보이소서. "
  하며 병자에게로 다가앉았다.
  같은 시각. 혜민서의 허준도 입도 눈도 돌아간 흉측한 남편의 얼굴에 눈물을 떨구는 아내와 노모를 따라온 농부의 눈을 까뒤집어 보고 있었다. 그 역시 구안와사 환자였다.

    6
  "나을 수 있사온지 ... 수의께선 우선 그 대답부터 들려주소서."
  초조해하는 공빈의 안색을 대신 읽고 있던 지밀상궁이 재촉했다.
  그녀는 공빈도 공빈이려니와 상감의 관심이 지극하게 쏠린 병자임을 알기에 상감을 모시고 섰던 큰방상궁의 눈짓을 받아 양예수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대답은 서두를 것 없다. 대답은 천천히 ... '
  양예수가 지밀상궁의 재촉을 묵살한 채 노회한 타산으로 .마음속에 뇌었다.
  닷새면 족하리라. 그렇게 암산된 병세일지라도 일단 뱉어버린 날짜는 병자와 그 가족에게 절대적인 기간으로 기억되고 만다.
  그 닷새를 넘길 경우의 실망과 비난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 의원이다.
  '한 ... 열흘이면 되오리다.'
  그러나 양예수는 열흘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업은 아닐지라도 대신들 속에는 의서를 왜 깊이 읽은 인물들이 많은 걸 그는 알고 있다. 의서의 기본조항인 정기편이나 양생편이 특히 그 선비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관심사이므로 ... 만일 열흘이라고 말했을 경우,
  "그만 증세에 열흘씩이나 성총(임금의 생각)을 어지럽혀 드린단 말인가."
  "병자가 병자인만큼 신중히 대처하려니 그 날짜는 잡아야지."
  궐내의 이목이 그렇게 두 갈래로 나뉠 것도 양예수는 안다.
  "한 ... 이레면 차도를 보오리다."
  초조해하는 이들에게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양예수가 날짜를 제시했다.
  병자의 지체가 높은 이일수록 더구나 왕실의 고귀한 분들의 관심이 쏠려 있을수록 어의를 비롯 내의원 의원들은 이때야말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최대한으로 내세울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닷새로 암산한 완쾌를 이틀을 더 여유 있게 이레로 잡으며 양예수는 자신이 만만했다.
  지밀상궁이 그 양예수의 언약을 입에 물고 임금에게 달려갔고 곁에 숨을 삼키고 있던 공빈이 안도의 숨을 내쉬고 양예수에게 다짐의 말을 물었다.
  "그 이레면 정녕 이 아이의 얼굴이 온전히 돌아오리까?"
  "이레면 되오리다."
  양예수가 자신있게 다시 다짐의 말을 하자 공빈이 아름다운 눈 속에 감사의 눈물을 담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어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레씩이나 ...?'
  정작은 불만이었다. 정작이 시진한 증상으로는 닷새면 되었다. 눈이 돌아가고 입이 비틀어져 보는 이를 긴장시키긴 해도 그건 중병이라 일컬을 환증이 아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양예수가 상감과 공빈이 마음 졸이는 판국에 이레씩이나 날짜를 잡는 것이 그의 눈에는 가증스러워 보였다.
  이레라 선언해놓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게 해놓고 엿새나 닷새 만에 낫우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의술을 돋보이게 하려는 양예수의 저의가 환히 들여다 보여서였다.
  '간물들!'
  정작은 아름다운 수염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왕실에서 위엄과 인자함을 꾸민 어의가 자신의 소매 속에서 화사한 손수건을 꺼내 병자의 흐르는 침을 손등과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아첨 어린 모습을 쏘아보았다.
  청담순기탕, 그 구안와사를 다스리는 약재를 시종들에게 준비시키는 것을 보며 정작은 그 자리를 떠났다.
  정작은 양예수가 지시한 청담순기탕을 조제하기 위해 약재의 양을 상정하는 회의에 끼여야 할 자신을 잊고 진숙궁 화려한 화원가에 우두커니 서서 간살떨며 교묘히 살아가는 인간사의 너저분한 욕망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전별감(임금의 호위대장)이 갑자기 닥쳤고 그 뒤로 청년 왕 선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황황히 물러나 허리를 굽히는 정작에게 임금이 낯을 기억한 듯 걸음을 멈추고 옥음을 울렸다.
  "사태가 어떠하오?"
  "구안와사올시다."
  "중증인가?"
  "어의가 이레면 완치하리라 다짐하옵니다."
  "그 말을 막 들었소만 애초 증상은 어디서 오는 병인가. 눈동자도 입도 돌아갔다 들리거늘."
  "풍이 혈맥 속에 스미면 발생하는 병올시다."
  "풍?"
  임금이 의아한 눈길을 들었다.
  이때 혜민서에도 같은 문답이 오가고 있었다.
  허준이 지레 죽을 상을 한 농부애게 구안와사의 원인을 천천히 설명했다.
  "풍도 풍이려니와 원인은 위에서 기인합니다."
  "밥먹은 걸 삭이는 위?"
  "그러하오이다. 밥주머니, 허허허."
  "의원께서 웃으시는 걸 보니 이 양반 병이 낫기는 낫는 병인지요?"
  병자의 아내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허준에게 묻자 허준이 아직 조금 웃음을 머금은 채 대답했다.
  "장담이라 할 것은 없되 제가 하라는 대로 따르면 사흘이면 본모습이 되오리다."
  "정말 사흘이오니까? 믿어도 되올지 ...?"
  허준이 좀더 자세히 설명했다.
  "사람의 건강은 오장육부가 실하여 그래서 팔다리를 마음대로 놀리는 것인데 때로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먹고 땀을 내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쐬거나 혹은 준비행위 없이 힘을 써 땀을 내다가 갑자기 찬바람을 맞을 때 무리한 부분에 마비가 오는 것올시다. 물론 댁처럼 바위 위에서 잠을 자다가 돌이 지닌 그 냉한 기운이 몸에 스며 이리 된 경우도 마찬가지 이치고 ..."
  "... 사흘 ..."
  하고 병자 부부가 또 한번 이구동성으로 뇌었을 때 공빈의 처소에서도 임금이 지켜보는 속에서 양예수가 병자에게 조신한 어조로 자신의 의술의 지식을 피력하고 있었다.
  "습한 바람과 찬 기운 또 눅눅한 공기가 모두 사람의 몸을 해치는 기운인데 풍이란 기운과 혈이 허한 곳에 달겨드는 법올시다."
  "더구나 사냥을 나가 말을 타고 달리며 갑자기 땀을 내고 또 짐승을 쫓느라 야심한 산속을 헤매는 일들이 다 몸의 준비행위 없이는 조심해야 할 행동올시다. 게다가 한기를 쫓느라 술을 마시는 것은 잠시 몸을 따습게 할 순 있으되 술이 깨면 더더욱 한기가 심해지니 산속에서 한기를 술로 쫓으려 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이미 지난 실수야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그래 이런 증상이 나타난지는 며칠이나 되었는고 ?"
  병자가 손수건으로 돌아간 입을 가린 채 말을 못했고 공빈이 상감께 대신 아뢰었다.
  "오늘이 닷새째 된다 합니다. 처음엔 곧 나으려니 집에서 인근 의원을 불러 대처했사온데 더더욱 입이 돌아가니 그제야 마음들이 급해서 기별을 해왔기에 ..."
  혜민서의 허준이 고개를 저었다.
  "사나흘이란 말을 믿기 어렵습니다. 제 보기 병을 숨긴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귀신처럼 아십니다. 그래요, 이 양반 처음엔 턱이 뻣뻣하니 눈이 아프니 하던 게 벌써 열흘도 넘었습니다. 아, 자세히 말씀드리세요, 지발."
  "그럼 한 보름 됐나부네 ... 근데 사흘이면 참말 낫겠습니까? 들일도 벌여놓은 게 많구 내가 나서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지금 들일 걱정할 때유. 제발 덕분에 사흘 만에 고쳐주시면 그 은혜 평생 안 잊을 거여요."
  "그렇게 하오리다. 핫핫 ..."

  선조가 말했다.
  "이레면 낫는다니 못 기다릴 기간도 아니다. 어의만 믿고 기다리거라."
  "이레 만에 낫기만 한다면 ..."
  공빈이 동생을 대신해 또 대답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운명은 또 한번 우연을 만들어 허준의 본모습을 정작의 눈에 띄게 했다.
  퇴청한 정작이 집으로 돌아가려 육조 앞 십자로에 이르렀을 때 길 건너 혜민서에 시선이 박힌 것은 우연이었다.
  모두 퇴청한 시각이었다.
  대문은 육중하게 닫혀 있었고 해진 시각의 혜민서 문전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조용한 모습이었는데 우연히 쪽문을 열고 등불을 든 의녀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자그마한 모습만 보아도 눈에 익은 허준이 있는 침구과의 의녀 미사 알 수 있었다.
  정작은 문득 그 미사에게 요즘의 허준의 동정을 묻고 실은 충동에서 혜민서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정작이 혜민서 문이 열리거나 말거나 내다보지도 않는 직숙자를 소리쳐 부르려 할 때였다. 안에서 찢기듯한 비명이 연거푸 났다.
  정작이 그 비명을 쫓아 뛰어들어간 곳은 침구과였고 들여다본 그 안엔 겨드랑이의 커다란 종기를 앓는 병자를 눕혀놓고 의원이 야차처럼 달려들어 고름을 빨아내고 있었고 그때마다 종기병자가 까무러치듯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고함치려던 정작이 걸음을 세웠다. 의원은 허준이었다.
  정작의 눈빛이 감동으로 바뀌었을 때 허준과 병자를 둘러싼 이웃 병사의 병자들 속에 구안와사 병자도 정작의 눈에 띄었다.
  정작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환자의 고름을 빠는 허준의 처절한 의료 행위도 행위려니와 의녀들 뒤로 멍청히 선 구안와사 환자가 허준의 병자인 건 한눈에 짐작이 간 것이다.

    7
  "그와 똑같은 병자가 혜민서에?"
  우의정 노수신이 열흘에 한번씩 내의원 업무의 진행사항에 대한 의례적인 보고차 들르는 정작에게 흥미있는 얼굴을 하며 되물었다.
  "그러합니다."
  하고 정작이 우연히 꺼내는 말처럼 노수신을 수행하는 친구 채공조에게 향하던 얼굴을 노수신에게 향했다.
  "혜민서 병자면 상민 아닌가?"
  노수신의 관심이 움직이자 채공조가 대신하여 되물었고 정작이 대답했다.
  "물론 상민이지. 그러나 병증이야 신분의 귀천 따라 오는 건 아니잖은가. 병은 똑같네. 그걸 다루는 의원의 솜씨는 매매인이 달라도."
  "의원의 솜씨가 매매인이 다르다니?"
  "도제조께서도 공빈마마의 동생이 구안와사로 어의의 치료를 받고 있는 것을 들으셨사오니까? "
  모를 리 없었다. 상감이 공빈 처소에 와 있는 처남을 위로해주고자 어제 그제 연이틀 진숙궁에 납셨고 그 거동 따라 노수신 또한 자신이 겸한 내의원 도제조의 체면으로 따로 어젯밤 임금을 수행했던 터였다.
  "한데?"
  "저도 우연히 그 양쪽 병자를 보았사온데 너무나 흥미로워서 얼핏 한 얘기올시다."
  "흥미롭다?"
  "한 사람은 내의원을 대표하는 어의이옵고 한쪽은 신진기예의 젊은 의원이다 보니 우연 그런 장난스런 생각이 났습니다."
  "젊은 의원이라면?"
  "허준이라고 연전에 과차에 첫등으로 뽑힌 인물인데 몇 가지 자기 모습을 갖춘 준재올시다."
  "그래 ... 이름이 무어?"
  "허준올시다."
  정작이 재삼 그 이름을 댔으나 노수신의 반응이 더 이상 없자 "어느 쪽에 걸겠나?" 하고 채공조에게 정작이 웃음을 띤 채 물었다.
  혜민서의 허준을 보고 감동한 것은 자기다. 정작은 오늘까지 그러한 치열한 의료행위를 본 적 없다. 정작은 그 감동을 인사권이 있는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이 기회에 양예수의 내의원에서의 독선과 그가 약삭빠르게 쌓아올린 어의의 허상을 허준을 통해 깨부수고 싶은 것이다.
  '썩은 봇둑을 트고 새논에 새물을 대기 위하여!'
  그건 정작 나름의 정의감에서지 결코 양예수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어서가 아니다.
  '마땅히 그 자리에 있을 사람이 있는 것.'
  비록 벼슬길이 막힌 자기라 할지라도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그러한 맑은 기풍이 진작되는 걸 보고 싶은 일념뿐이다.
  "걸고 말고가 있나. 양예수를 능가할 의원은 없네."
  채공조가 말하자,
  "그럼 어의께 거시게. 난 허준 쪽을 택하리, 무슨 큰 내기라기보다 잘못 짚은 쪽이 술 한병 선사하는 정도의 심심파적 삼아서."
  "핫핫, 사양 않겠네. 대신 헛짚은 사람은 꽤 좋은 술을 구해야 하네."
  "아무렴."
  이미 두 사람의 화제에 관심 없는 노수신을 의식하며 정작이 채공조에게 웃었다.

  허준의 병자가 갑자기 도시 허준을 믿을 수 없는 의원이라는 듯이 짜증 섞인 얼굴이 됐다.
  "돌아간 건 이쪽 뺨인데 왜 자꾸만 요짝 반대쪽에다 침을 찌릅니까."
  "혈이 움직이니 자꾸 입놀리지 마시오."
  허준이 주의 주자 성깔이 있는지 병자가 불끈했다.
  "왜 말도 못하게 하시우. 사흘 기한을 잡았으니 오늘은 벌써 웬만치 나아가는 징조가 있어야 하는데 여직 그대로 아닙니까?"
  "병자는 시키는 대로 가만 기소서."
  허준을 보조하는 미사가 병자를 달랬으나 병자는 그 미사에게 눈을 흘기고 나서 또 허준에게 불평했다.
  "... 자꾸 침만 찌르고 ... 정말 오늘 해 안으로 낫긴 낫는 겁니까?"
  "오늘이 아니고 내일 아침 나절까진 가야 본모습이 돌아오리다."
  "내일이면 나흘째 아닙니까. 왜 애초 사흘이라 해놓구선 ..."
  "내가 늦춘 적 없소. 애초 사흘 말미를 정했을 때 내 하라는 대로 한다는 약조였는데 그 약조를 어긴 건 당신이오."
  "지가 언제 약조를 어겼습니까. 혜민서 들어온 뒤 난 한 발자국도 안움직이고 병사에서 여기만 오갔는데."
  "핫핫."
  "하이고 이 양반, 왜 못 낫우는 핑계를 나한티 떠밀고 웃기만 하오."
  "어제 침 놓을 시각에 맥을 짚어보니 맥이 고르지 않았소. 그건 뱃속에 음식이 가득 들은 맥이었지. 정녕 예서 지시하는 음식 외 딴 음식을 몰래 먹은 적 없소?"
  "그야 하도 배가 고파서 마누라 시켜 군것질을 했지만."
  "핫핫, 것 보시오. 어젠 그래서 침을 걸른 겁니다. 배부르면 맥이 고르지 못하니 잠시 기다리려 했더니 내가 다시 돌아와 맥을 짚었더니 그 사이 또 무얼 몰래 먹은 맥이었소."
  그제야 병자가 두려운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허준이 가짜가 아닌 걸 믿는 그런 눈이었다.
  같은 시각 양예수도 발 너머 윗방서 지켜보는 공빈의 주시 속에서 병자의 돌아간 반대쪽 뺨에 침을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직하나 윗방 공빈의 귀에 충분히 들리는 소리로 위엄을 담아 말했다.
  "이제 사흘, 이삼 일만 더 견디시오."
  "이삼 일이라면? 처음 말씀한 날짜보다 하루 앞당겨지는 겁니까?"
  "마땅히 하루 한시라도 빨리 차도를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전하와 마마께오서 연일 걱정하고 계시오니."
  "정말 고맙기 이를 데 없는 말씀올시다."
  발 너머에서 공빈의 감격 어린 음성이 났다.
  청년 선조는 무척 부지런한 성품이었고 아침잠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 꽃잎에 아침이슬이 마르기 전에 대궐 화원을 거니는 것이 그날 일과의 첫행사였다.
  화원에 그 때아닌 시각에 진숙궁의 백상궁이 뛰어들어와 잠시 체통도 잊고 외쳤다.
  "상감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숙궁에 있는 병자의 양볼이 밤 사이 제자리로 돌아왔사옵니다."
  "밤 사이? 그렇게 빨리?"
  "처음은 이레로 작정했사온데 어의의 의술이 정말 신기와 같사와 새벽녘 그러한 천행이 있었사옵니다. 하도 반가운 소식이오라 공빈께서 속히 상감마마께 기별하라 하기 달려왔사옵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로고."
  "하와 공빈과 병자가 어의와 함께 이리로 오고 있는 줄 아옵니다."
  수행했던 대전별감과 내시들이 상감의 관심을 대신하여 화원 입구로 내닫고 벌여서다가 경사방대감(내시의 제일 윗자리)이 외쳤다.
  "공빈과 어의가 입내하고 있사옵니다."
  선조의 용안에 기쁜 화색이 돌았다.
  곧이어 공빈이 제 얼굴을 찾은 동생을 데리고 나타났고 뒤따라 의기양양함을 안으로 감춘 양예수가 나타나 임금께 허리를 굽혔다.
  "정말 어의는 애썼소."
  양예수가 또 한번 허리를 굽힌 그때였다.
  무어라 감격의 치사를 선조에게 하던 병자가 갑자기 턱을 떨며 방금 온전했던 얼굴이 다시 흉하게 일그러졌다. 주위가 놀라고 공빈이 비명을 질렀다.
  "또 왜 이러느냐. 새벽내 기뻐 날뛰면서 온전하더니."
  양예수가 다급하게 병자를 부축하며 당황히 변명했다.
  "아직 좀더 차도를 보아야 한다 했사온데 속히 전하께 아뢴다 하더니 ... 아직 새벽 공간이 습한 기운이 찼사와 ... 하오나 이미 본모습이 거의 돌아온 증거올시다. 하루이틀 안에 꼭 본얼굴을 찾을 수 있사옵니다."
  선조가 조용히 응대했다.
  "병은 뿌리까지 뽑아야 진실로 나았다 할 수 있는 것이니 조급히 굴지말고 천천히 낫우도록 하오."
  울상이 된 공빈이 동생을 다시 부축해 화원을 떠날 때 선조가 양예수에게 분부를 보탰다.
  "잘 구완해주오. 공빈의 얼굴을 보니 동생의 병으로 인해 얼굴이 반쪽이 되었소."
  "앞으로 이삼 일이면 기필코 온전한 모습을 되찾을 수 있사오니 성려를 거두오소서."
  끄덕이는 선조께 다시 허리를 깊이 숙인 양예수가 공빈 처소로 뒤따라갔다.
  그로부터 반 시각쯤 후에 혜민서에 하나의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 소세를 마친 병자가 미사가 내미는 면경 속에서 기적같이 돌아온 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비명을 질렀고 그 거울 속 자기 얼굴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제 뺨을 잡아당기고 또 반대쪽으로 잡아당기며 하다가 돌연 내 얼굴 돌아왔다고 혜민서가 떠나가라 고함고함 질러대기 시작한 것이다.

    8
  이젠 내 병이 다 나았다고 길길이 뛰는 구안와사 병자를 보며 혜민서의 여타 병자들이 부러움과 축복을 담아 손뼉을 쳐주건만 허준의 대답은 냉담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이제 잠시 제 얼굴이 돌아왔다 하나 다음 조목들을 깊이 유념하고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다."
  "그게 뭔데요?"
  "우선 진정하고 내 얘길 들으시오."
  "그럼 아직 덜 나았단 말인가요?"
  남편보다 더 똘똘해 보이는 병자의 아내가 나섰다.
  "허의원께서 일러주시는 대로 꼭 그대로 지키도록 하겠으니 그 조목들을 일러주세요."
  "건네주어라."
  하고 허준이 미사에게 이르자 미사가 준비한 언문 종이쪽지를 병자의 아내에게 건넸다.
  그러자 펴보던 병자의 아내가 갑자기 난감한 얼굴로 허준과 미사를 쳐다보았다.
  "... 어쩝니까 ... 저도 아이도 눈만 떴지 글은 읽지도 못하는 청맹과니들인걸요 ..."
  "돌아가면 마을에 언문쯤 깨친 사람들은 많을 게요. 그러나 당장 볼 줄 모른다 하니 대충 내용을 일러주리니 귀담아 들으시오."
  병의 회복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마 하자 구안와사와 상관이 없는 병자와 가족들까지 허준을 둘러쌌다.
  허준이 다음 사항을 찬찬히 일러줬다.
  첫째 처음 한 달은 밤이슬을 맞거나 젖은 옷을 입지 말 것. 특히 우중에는 결코 나돌아다니지 말 것. 또 과도히 땀을 흘리거나 방사도 삼갈 것.
  구경꾼들이 와르르 웃었다.
  둘째 향후 두 달 동안 음식을 가리는데 비린내나는 생선, 굴수, 술, 식초, 닭고기, 돼지고기, 그밖에 맵고 짠 음식을 열거한 다음 덧붙여서 명심시켰다.
  "이 일곱 가지 음식은 비단 구안와사뿐만 아니라 모든 풍병에 조심해야 할 음식임을 염두에 두시오."
  "술은 한잔도 안됩니까?"
  병자가 그것만은 억울하다는 듯이 물었고 구경꾼의 웃음 따라 허준도 웃었으나 곧 정색해 말을 이었다.
  "음복술도 아니 되오. 처음에는 괴로울 것이지만 가히 이 약조만 지킨다면 같은 병증으로 다시 이곳에 찾아올 일은 없을 거외다."
  아직도 좀은 억울한 사내의 허리를 찔러 그 아내와 아이들이 허준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했다.
  "잘 가거라."
  허준이 병자의 두 아이에게 미소지었다.
  양예수를 위시 공빈과 그 아우 김병조가 병이 나았다고 상감에게 하례차 몰려갔다가 병이 재발하여 다시 진숙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정작은 고개를 저었다.
  양예수는 그렇게 서투른 사람이 아니다. 필시 그건 사가의 신분이면서 누이의 배려로 궁안에 들어와 언감생심 상감의 관심까지 받아가며 어의의 치료를 받게 된 그 황공무지함을 모르고 진득하지 못한 성격대로 잠시 돌아온 얼굴을 자랑하고자 달려나갔다가 벌어진 소란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김병조의 병이 재발되었다는 소식에 정작의 가슴속에 지나간 건 아쉬움이 아닌 안도의 감정이었다.
  유의도 의원이다. 비록 자기의 소임은 양예수를 비롯한 문식이 모자란 의원들과 혜민서 제조와 내의원 도제조 사이에서 다리를 놓고 탕약화제를 의논하며 의원들의 비망기를 정리하고 또 새로 수입된 외국 의서의 번역 등이 소관일지라도 한 사람 의원의 자격과 양심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왜 없으랴.
  그러나 자기의 이상의 세계를 펼쳐보고자 어렵사리 찾아갔던 혜민서 제조 정종영은 분명한 실수를 저지른 바 없는 양예수를 굳이 문제삼으려 할 기색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런 자기를 만류했었다. 또 엊그제 찾아간 도제조 노수신도 정치의 세계와 멀리 떨어진 내의원 인사에 관한 화제쯤 귀에 담는 기색이 아니다.
  "그 아이 이름이 허준?"
  하고 잠시 관심을 보인 이외에는 ...
  양예수가 재발한 김병조를 놓고 임금 앞에서 앞으로 사나흘의 말미를 다시 제시했다면 그건 애초 양예수가 제시한 '이레'를 넘기는 날짜가 아니다.
  적어도 그는 아직 아무 책잡힐 다짐을 한 적이 없다.
  허준의 병자가 이미 성한 얼굴을 되찾아 혜민서를 떠난 것을 알지 못한 채 정작이 혜민서로 향하고자 진숙궁을 나섰을 때였다.
  그 정작의 눈에 공빈의 생부 김희철과 형조참판 유자신(후에 광해군의 장인)이 오는 것이 보였고 그 뒤로 20이 채 안된 청년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 청년은 지난 나흘 동안 조석으로 병조의 병을 문안오는 청년으로 공빈도 임의로운 동생 대하듯 대우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었다.
  같은 사내로서도 한번쯤 더 돌아보게 하는 이목이 수려한 그 젊은이의 성명이 이이첨이란 걸 안 것은 진숙궁 궁녀들이 넋나간 듯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소곤대는 소리를 들어서였다. 또한 어의 양예수가 시술에 방해가 되니 문병객들은 협실로 물러가 달라 했을 때 김병조가 나와 친동기간 같은 벗이니 이 사람일랑 놔두오 하고 감싸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이첨뿐 아니단. 김희철을 따라 친구 자식의 병문안 오는 유자신을 위시, 요즘 부쩍 권문세가들이 한낱 백면서생인 병자에게 위로와 문안을 핑계한 진숙궁 출입을 자주 했고, 이들을 적잖은 사람들이 비아냥 섞인 눈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아침 나절에 다 나아서 돌아갔어?"
  전작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이공기에게 물었다.
  "제 눈으로 분명 보았습니다."
  "온전한 제 얼굴을 되찾고서?"
  "그러합니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나았다 할 수 있으리까."
  "흠 ... 며칠 만인가?"
  "나흘 만올시다."
  "나흘."
  "소인의 기억으로는 그러합니다. 허봉사를 부르올지?"
  "어디 갔는가?"
  "점심 나절에는 병자들이 밀리어 이제야 허기를 때우려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올시다. 불러오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리. 그저 잠시 지나가다 들른 것뿐인즉."
  이어 정작이 본원 높은 상사가 왔으므로 하던 일을 젖히고 몰려선 혜민서 의원들을 돌아보았다.
  "가 소관들 보시게. 온 김에 난 잠시 병자들 안색이나 보고 가리니."
  타동 의원들이 흩어져갔고 이공기가 정작을 안내하여 침구파로 향하는데 미사의 전갈을 받았는지 허준이 급히 나타났다.
  그러나 그를 궁금해 찾아왔으면서도 정작은 반가운 낯빛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근자 그대가 다룬 병 환자들에 대한 비망기를 보여주게."
  순간 미사도 이공기도 긴장했다.
  혜민서의 약재를 빼돌려 집에서 쓴다는 오해를 받은지 오래지 않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곧 허준이 비망기를 가져다 보였다.
  어의의 오해를 받은 이후 출납하는 일체의 약재의 근량을 직접 기재하던 그로서는 언제 누가 무엇을 보자 해도 당황할 까닭이 없었다.
  "문자는 언제 이 정도 익혔던가?"
  뒤적여가던 비망기가 구안와사 병자에게서 멎은 채 정작이 문득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 부드러운 눈및에 이제야 미사가 남모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미사는 이미 허준의 숭배자였다. 허준의 의술의 경지는 다 짚어볼 길이 없으나 환자의 고름뿌리를 입으로 뽑아내던 허준을 보며 이제 초조가 시작된 소녀 미사에게 허준의 존재는 하늘 아래 둘도 업는 이성의 대상으로 비치고 있는 것도 요즘의 변화였다.

  어의 양예수가 방안에 몰려와 있는 고관대작들과 발 너머의 공빈을 의식하며 의에 관한 고담준론을 꺼내고 있었다.
  "옛날 누르 황자 황제가 의성 기백과 문답한 고사가 있사온데 그 내용이 풍병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입 돌아간 것도 풍이라 보오?"
  "당연 합니다."
  유자신이 물었다.
  "어떤 내용이오?"
  "황제가 묻기를 본시 사람의 몸이 급작히 뒤틀리면 죽기도 하고 오래 끌기도 하며 쉽게 낫우기도 한다 하니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에 기백이 답하여 왈, 몸이 뒤틀리는 증세가 장에 들어가면 목숨을 잃으며 골수에 침범하면 오래 끌며 살갖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면 쉬 고칠 수가 있습니다."
  순간 방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병자에 관해 생사의 얘기가 나오자 공빈이 체통을 버리고 발을 들치고 대청으로 나와 선 것이다.
  아비 김희철을 비롯, 방안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서 경의를 표했다.
  홀로 일어서지 않은 것은 어의의 체통을 지닌 양예수뿐이었다.
  공빈이 외쳤다.
  "하오면 그 아이의 병이 지금 어디에 어느만치 침범했사오니까!"
  공빈의 젖은 눈을 본 채 그러나 양예수는 잠시 대답을 늦추고 말을 하지 않았다.
  양예수의 타산 어린 침묵이 길었다.
  입은 화도 복도 불러들이는 인간의 됨됨이를 불러들이는 구멍이다.
  왕조 삼대의 어의를 꿈꾸는 그의 필생의 꿈.
  태산반석과도 같다 여겼던 양예수의 자만 어린 권위가 골수의 병 운운한 그 과장된 한마디로 인해 마침내 소리내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9
  김병조가 울음을 터뜨렸다,
  "난 얼굴이 이런 꼴로는 살지 않겠어. 차라리 이런 모습으로 살 바에는 비상이라도 먹고 죽을게요."
  공빈이 따라서 울음을 머금었고 김희철이가 일순 아비로서의 엄한 호통을 쳤다.
  "궐내에서 죽느니 사느니 이 무슨 무엄한 언동이냐!"
  양예수가 유유히 입을 열었다.
  "아직 손쓸 길이 있으오리다. 이 양예수 전조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왕실의 온갖 병을 퇴치했으며 완쾌시켜온 터이니 소직을 믿으소서, 반드시 수삼 일 안으로 병세를 돌이키고 병을 낫우어 보이오리다 ... 반드시!"
  "어의의 말씀만 믿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어의의 말씀만."
  김병조가 다시 울먹였고 양예수가 그 아름다운 수염의 얼굴을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여 주는 양예수의 내심은 지금 달랐다.
  '명문세가의 떨거지들?'
  양예수뿐 아니라 내의원 의원들에게 있어 그 문신들을 향한 포한은 깊다.
  내의원 의원들에겐 출세의 한계가 판관이라 불리는 종오품이다.
  출신이 양반이면 그 종5품직은 현감의 직첩으로 한 고장의 사또로 군림할 벼슬이되 내의원 의원 출신의 종5품직은 한낱 자기 혼자의 명예요 더 이상의 출세를 가로막는 건 조정 대신들이었다.
  설사 임금의 병을 완치시키는 공을 세웠다 해도, 그래서 왕명으로 그 공 있는 의원에게 가자(승급)의 영이 내려도 그 품계가 종5품 이상의 반열에 해당할 경우 출신의 미천함을 들어 마치 세상에 큰 이변이나 난 듯이 외람되다 어떻다 일제히 들고일어서는 것이 조정 백관들인 것 이다.
  설사 임금이 그대로 시행하라 재차 어명이 내려도 이 신분문제만은 붕당의 동서가 일치단결하여 가로막고 반대하는 금기사항으로서 재차 삼차 오차의 반대상소로 이어지기 마련이라 결국은 그 아우성을 귀찮게 여긴 임금이 벼슬 품계의 승진 대신 말 한필 옷 한벌 따위의 은사로 낙착되기 마련이었다.
  '그 신분의 멸시를 깨야 하리! 그건 이 양예수말고 누구리요.!'
  진숙궁에서 어의의 언동이 어쩐지 못마땅했던 형조참판 유자신이 적선방에 있는 형조에서 퇴청해 나가다가 우의정 노수신의 행차와 마주친 건 우연이었다.
  땅거미가 끼는 그 시각이면 퇴궐하고 퇴청하는 고관대작들이 대궐 주변에 범람하여 그 벽 소리에 일일이 피해 서고 허리 굽히기 귀찮은 소소한 관리와 주민들은 아예 그 시각엔 대궐 언저리에 나다니기를 기피하며 현란한 청사초롱을 앞세워 오가는 두 사람의 행차는 그 텅 빈 거리에서 멀리서도 서로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예만 오가고 지나칠 유자신이었으나 상대가 내의원 도제조라는 것이 생각났고 또 자신이 임금의 장인인 김희철과 막역한 친구며 오늘도 공빈 처소에 다녀온 것을 과시하고 싶은 충동이 났다.
  육조를 두루 거친 온화한 인물이며 시임 우의정이되 곧 좌의정에 승차하고 멀잖아 영의정 감으로 온 조정이 주시하는 노재상께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켜 두고 싶기도 했다.
  유자신이 공빈 처소에서 본 일들을 말하고 상감도 납셨었다는 얘기와 구안와사의 병이 그토록 어려운 병인 줄 몰랐다는 얘기에 노수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왕자 없는 왕실에 아무리 두 왕자를 낳고 상감의 총애가 지극하다 할 지라도 그걸 빙자하여 친정 아우를 불러들여 어의의 의술까지 빌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노수신이었다. 또 자기도 알아본 바 구안와사쯤 여항의 의원들일지라도 고쳐내는 환증인데 그만 일로 성총을 어지럽히다니 양예수의 과장도 너무한다 싶은 것이다. 노수신은 행차를 돌렸다.
  유자신의 말대로 이 시간 상감이 진숙궁에 납셔 계시다면 내의원 도제조로서 모른 체 집으로 갈 수 없다 생각한 것이다.
  그 노수신이 임금이 거동해 곕시는 진숙궁으로 향할 때 마주친 것이 정작이었다.
  마침 잘됐다 싶어 노수신은 그 정작에게 방금 듣고 온 병자의 용태와 함께 구안와사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물었다.
  한 시각 후 ...
  임금에게 풍병에 관한 여러 위태로운 병증을 세세히 설파하고 또 공빈의 간절한 부탁을 등뒤로 하여 내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양예수는 하늘에 솟아오르는 승리감에 취해 있었다.
  결과를 극적인 감동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김병조의 증세를 과장한 것이 주위에 먹혀든 것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사나흘이라 적당히 흐렸으나 오늘밤 다시 진숙궁으로 돌아가 밤샘하여 내일 아침 나절에는 병자를 낫우어낼 생각이었다. 잔뜩 겁을 주었고 사나흘이라 말로리를 흐렸는데 내일 당장 병자가 온전한 얼굴이 되어 있다면 자기의 의술에 대한 성망은 궐내뿐 아니라 온통 도성 안으로 번져나가리라.
  그리고 공빈에게도 영원히 잊지 못할 은인으로서 또 장차 세월과 함께 보좌를 향해 자라가는 임해, 광해 두 왕자에게도 외숙의 어려운 병을 낫운 명의로서 두고두고 기억되리라.
  삼대를 이어내릴 자신의 어의로서의 찬란한 꿈이 이제야 확실하게 자기 손안에 잡힌 감격이 그의 가슴에 출렁거렸다.
 ... 어디서 뜨르르르 ... 여치의 맑은 울음소리가 났다.
  "무엇인가 이건!"
  양예수가 정작이 내놓은 비망기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건너보았다.
  "혜민서 허준이 제 손으로 적은 시술기올시다."
  "허준?"
  "혜민서 기강이 잡히고 근자 그의 인술에 관해 제법 칭송이 자자합니다."
  "병 낫우는 의원이 칭송받는 것은 혜민서 전체 의원들의 명예지 왜 유독 허준을 내세우는가."
  "그대가 허준의 어디를 보고 그를 찍어서 말하는지 모르나 편애하지 마시오. 본시 덜 영근 의원들이란 헛소문 내길 좋아하는 것들이오. 한때 이목을 끄는 일은 점쟁이들도 하는 짓거리들인즉슨!"
  대화를 포기한 정작이 시술기의 한 대목을 접어 말없이 내밀었다.
  "혜민서에서 허준이가 다룬 병자 중에 구안와사 병자가 있었는데 그를 낫우기까지 사용한 약재와 세세한 시술내용올시다."
  "구안와사 병자?"
  "하루를 허비하고도 나흘 만에 완치한 내용올시다."
  "완치?"
  "그러하오."
  끼여들던 김응택이 입을 다물며 반사적으로 어의를 돌아봤다. 양예수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병자도 병자 나름, 병명이 같을지라도 마른 사람 뚱뚱한 사람, 시술 대상이 다르고서야 어찌 나았다 안 나았다 기일이 화제거리일 수 있소?"
  대답 대신 정작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는 걸 보고야 당황한 양예수가 말을 이었다.
  "진숙궁 환자는 내가 낫우어 놓을 게요. 그대도 아다시피 이 양예수가 주상전하께서 관심하는 병자를 못 낫운 일이 있었소?"
  "왜 그러오!"
  정작의 침묵을 향해 양예수의 호흡이 가빠졌다.
  "아니 그럼 이 양예수가 미리 고칠 수 있는 병을 일부러 미루고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렇겐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 소임은 전하께오서 관심하는 병자가 있을 경우 병세가 어떠하며 어떤 의원이 필요하다는 걸 어의께 천거한 의무가 있습니다. 하여 진숙궁 환자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것뿐올시다."
  "그대에게 천거할 의무가 있다면 내겐 그 제안을 아니 들을 권한도 있네. 아시는가?"
  "아옵니다."
  "안다?"
  눈과 눈이 마주쳐 불꽃을 튀겼다.
  "도제조와 만나겠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태를 간파한 양예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때 정작이 여전히 앉은 채로 나직이 일렀다.
  "도제조께선 지금 진숙궁에 가 계십니다."
  "진숙궁엘 왜 ..."
  "도제조께서 전하께 주청하여 허준이 이미 공빈마마의 처소에 가 있는 줄 아옵니다."
  "무엇이!"
  양예수의 안색 속에서 핏기가 걷혀갔다.
  그때였다.
  어의의 방 앞으로 급히 닥친 목소리가 큰소리로 아뢰었다.
  "어의께 아뢰오. 혜민서로부터 전갈이 왔사온데 좀 전 도제조께서 기별을 보내어 봉사 허준과 의녀 하나가 진숙궁으로 문안을 갔기로 아뢰옵니다."
  방문을 박차고 나온 양예수는 이미 급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행자를 부를 사이도 없이 공빈 처소로 달리기 시작했다.

    10
  궁정을 가로질러 오던 양예수가 걸음을 세웠다.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숨이 턱에 닿아 있었다.
  일을 꾸민 것은 저 정작이다.
  그 말고 도제조와 제조를 유인할 인물이 누가 있을까.
  저 정작의 자기에 대한 미움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 내의원의 인사에 관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를 무시하지만 않았던들 그와의 갈등은 이처럼 심화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걸 후회한들 늦었다. 아니, 늦고 말고 이전에 그가 천거한 인물이 허준인 이상 들어줄 수 없는 제안이었다.
  애초 허준 따위로 심사가 틀렸던 게 아니다. 자기 또한 전도 촉망되는 새 아이를 곁에 두며 기르고 싶은 욕망이 없었던 게 아니니까.
  하나 파장에서 첫등으로 뽑힌 그 발군의 시험지를 제출한 청년이 다른 사람 아닌 유의태의 입김을 씌운 수제자임을 알았을 때 그 기대는 증오로 변하던 것을 어쩌랴.
  '헌데! 헌데!'
  엉뚱하게도 유의 정작이 허준을 업고 나선 것이다.
  을사사화의 삼간의 하나로 지목되는 아비로 인해 몰락한 집안이로되 출세와 영달의 길에서 멀리 비켜선 내의원 판관인 그에게는 아직도 한때 정승의 자식이었다는 동정과 경원에 싸인 눈이 많고 더구나 그는 자기의 인사권한 밖의 문관이고 또 그가 어엿한 양반 가문의 인간임에서 비록 직급은 자기의 하급자로되 자신의 임의로 어쩌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착잡한 감정에 부글거리며 진숙궁 수석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서던 양예수는 아차 숨을 삼키며 걸음을 세웠다. 오늘도 상감이 납셔 계셨다.
  상감을 호종해온 대전별감과 내시들의 일행이 보였고 막 그 안쪽에서 이미 납셨다가 돌아가는 모습의 선조를 따라 공빈 그리고 도제조 노수신, 혜민서 제조 정종영 등이 따라나오는 것이 보인 것이다.
  양예수가 재빨리 황공한 모습으로 다가갔으나 잠시 시선이 날아왔을뿐 선조는 공빈의 말만 경청해 듣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 하와 직시 본곁 식구들로 하여금 혜민서 젊은 의원이 낫우었다는 병자의 마을로 찾아가게 하였삽더니 틀림없이 허준이란 의원의 시술로 나흘 만에 말짱하게 낫운 사람을 확인했사옵니다."
  "흠 ..."
  "소인도 남의 말을 쉬 듣는 쪽은 아니오나 같은 병인데 한쪽은 어려운 말만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토록 쉬 낫우었다니 제가 애써 노정승께 청하여 저 허준이란 의원을 불렀습니다."
  "병을 낫우는 것은 때로 약일 수도 있고 솜씨일 수도 있소만 아무튼 성심도 있고 술도 정예하다면 그 의원이 공빈의 근심을 쉬 덜어줄지 모르겠구먼."
  사랑하는 여자의 수척한 모습을 돌아보며 선조의 미소 어린 얼굴이 그렇게 태평했다.
  "황공무지하옵니다."
  공빈이 그 사랑하는 남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양예수는 다급했다. 역시 임금을 배웅하고 돌아서는 노수신과 정종영에게 급히 다가서는데 먼저 입을 연 것은 혜민서 제조 정종영이었다.
  "그러잖아도 정청으로 가 어의를 만나보고자 하던 터요만 이미 얘기를 들었소?"
  "따로 하문하실 얘기가 계셨사오니까?"
  "공빈께서 아우의 병으로 인해 노심초사하고 전하께오서도 자주 심병하시는 터라 미상불 나 또한 괘념치 않을 수 없던 터에 마침 정판관 말이 우리 혜민서의 봉사 하나가 구안와사를 낫우는데 남다른 솜씨를 지녔다 들리기로 데려와 병자를 보였소이다."
  "저도 막 기별을 들었습너다. 잘하시었습니다."
  "잘했다니? 난 어의가 기왕에 시한을 두고 맡은 병자라고 들었기에 어의가 손을 놓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성급하니 좀더 기다리자 이의를 내던 차요만."
  갑자기 양예수의 말이 유창했다.
  "구안와사는 병이 아니올시다. 임부는 병자가 아니듯이 그건 보할 것 보하고 사할 것 사하면서 참고 기다리면 반은 절로 낫는 하나의 증올시다."
  "증?"
  노수신이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구안와사는 풍이노라. 그리고 공빈과 병자에게 병이 골수에 침노했느니 해놓고 이제 와선 무슨 엉뚱한 소리요?"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 풍은 풍올시다."
  "헌데?"
  "구별을 하면 엄연히 풍병임에 틀림없으나 또 골수 운운은 작은 병도 조심하지 않으면 큰 병이 되는 것이라 ... 그런 뜻에서 엄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뜻으로 얘기한 것이옵고."
  "이보오!"
  "정말 더 들어보소서."
  갑자기 노수신의 어조가 카랑했다. 문득 그 눈빛이 국징을 논단하는 우의정의 관엄한 안색으로 바뀌고 있는 걸 양예수는 보았다.
  "신하의 언사는 분명한 것으로 기본을 삼는 법인데 주상전하께오서도 관심하옵시는 병세에 어찌 힘부로 과장이 있을 수 있소."
  "과장이 아니오라 말씀드렸듯이 ..."
  "됐소, 그만하면. " 노수신의 불쾌한 얼굴이 혀를 찼고 정종영이 무마하듯이 말했다.
  "병자가 왕실 사람도 아니고 보매 사전에 의약상정까지 안거치다 보니 말이 와전된 듯합니다. 좌우간 기왕사 새로 부른 아이로 병자를 맡게 하겠다는 것이 공빈마마의 뜻이니 이번 일은 허모라는 그 아이에게 그대로 맡깁시다."
  "제가 낫우마 기한 둔 날짜가 아직 닿지 아니했습니다만."
  "이미 공빈께서 그 사람으로 작정한 모양이외다. 새삼 논란할 일 없소이다."
  양예수의 발밑이 휘청했다.
  떨어져 있던 정작이 다가서 왔다. 어조는 조용했으나 양예수를 향한 눈빛은 냉랭했다.
  "어의께서 골수에 든 병 운운하신 후 공빈께서 하도 비통해하시기에 제가 위안의 말을 아뢰는 뜻으로 일전 혜민서에서 허봉사가 같은 병을 고쳐낸 사례를 전해 드렸사온데 이에 그 허준에 관해 하문 곕시기로 제가 아는 대로 허준에 관한 몇 가지 소문을 말씀드렸습니다."
  "몇가지 소문?"
  "연전에 제 취재길 버리고 연로의 빈한한 병자들을 돌보아준 일, 그밖에 혜민서에서 종기 환자를 제 친동기간에게 대하듯 헌신하던 일, 또 퇴청 후엔 인근 마을의 병자들을 돌보아준다는 그런 사실들올시다."
  양예수의 아름다운 수염이 떨리고 있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일세."
  "과장이 아니라 제가 직접 목격한 일과 확인한 일들만 골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을 하셨소. 허나."
  "허나라니요?"
  "진실로 의원이고자 하는 자라면 그만 일을 무에 소문낼 거리가 되오? 누구나 행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오."
  하고 도제조가 계속했다.
  "그리고 의업에 그 정도 굳센 심지를 지닌 아이거든 진작 내국(궐내 약방)에 불러들여 궐내 제반 법도에 익숙케 하고 또 윗분들의 정시입진(7일에 한번) 때 수행케 하여 눈과 귀를 열어줘야 한다 여기오만, 과차에 첫등까지 한 아이라면서 어째 혜민서에부터 내보냈소?"
  양예수가 웃음부터 보였다.
  "그건 제 욕심올시다."
  "무슨 욕심?"
  "일시 취재 성적이 뛰어났다 하여 내국에 불러들여 놓으면 젊은 나이에 교만하기 십상이옵고 또 혜민서에서 직접 여러 병증에 관한 임상의 체험을 쌓게 한 연후에 데려다놓으려는 제 나름의 깊은 포석올시다. 하하하!"
  정작의 눈이 치떠졌으나 양예수가 또 한번 웃고 있었다.
  "어의께서 듭시옵니다."
  하고 방문 밖에 대령해 있던 미사의 맑은 음성이 났다.
  엎드린 병자의 목 뒤와 어깻죽지의 구석구석을 압진하고 있던 허준의 귀가 열렸다.
  진찰할 때, 맥 짚을 때, 약 지을 때는 어떤 상전에게도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의원의 특권이다.
  방문이 열리고 양예수가 들어섰다. 병자의 친구 이이첨이 일어서 예를 표하여 맞았고 허리를 일으키는 허준에게 양예수가 일렀다.
  "멈출 것 없다."
  허준이 김병조에게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압진을 계속했다.
  순간 양예수는 '앗!' 소리를 내지를 만큼 놀랐다.

    11
  '이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양예수의 안색이 흙빛이 되어 허준을 보았다.
  허준의 동작이 묘했다. 그 왼손 손바닥과 오른손 손가락이 병자의 코와 이마 사이 윗니와 입을 끼고 입술을 돌아 턱 뒤, 다시 젖꼭지와 배꼽을 껴서 기충 가운데서 멎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건 자기가 시행한 바 없고 가르친 바도 없는 독특한 행동이었다.
  아니 한번 본 기억은 있다. 아득히 오래 전 자신이 어의의 뒷재목으로까지 꼽았던 김민세가 행하던 진법.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압진이라고나 부를 그 방법은 속병조차 손가락 하나로 고치려 드는 양예수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양예수의 노기 어린 소리가 터졌다.
  "무얼 하는 것이냐!"
  "위경의 허실을 짚어보고 있습니다."
  "위경의 허실 !"
  김민세와 유의태가 막역한 사이였다는 기억이 양예수의 머리에 되살아 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유의태의 진법이다!'
  양예수의 눈 속에 파란 불이 일었다. 그러나 무심한 허준의 말은 나직했다.
  "병이 위 쪽에 많이 머물고 있사와 이 수법으로 대처코자 합니다."
  "무슨 소리!"
  양예수의 어조가 튀었고 방안의 눈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주시했다.
  양예수의 손가락이 창날처럼 허준의 얼굴에 향해 왔다.
  "병자가 일각이 여삼추로 회복을 원하는 터에 한낱 시골 용의의 흉내 따위로 이목을 현혹시키려 들어!"
  그제야 허준이 몸을 일으켰다.
  "이 법은 제가 모셨던 두 분 옛 스승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온데 지난날 팔도를 유력할 제 시험하여 늘 효험을 보았던 진법올시다."
  "무어라?"
  "하와 우선 압력과 약재로 위를 깨게 한 연후에 뜸으로써 병뿌리를 훑어낼 생각이옵니다."
  "네가 미쳤느냐."
  "...?"
  "이 병증엔 침밖에 방법이 없다. 내가 술이 일천하여 아직 못 깨닫는 모양이다만 혜민서 병자이든 예 누운 병자이든 병명이 같다 하여 처방 또한 같은 게 아니다. 병명은 한가지일지라도 평소 먹고 지내는 음식에 따라 병자의 몸이 기름지기도 하고 메마른 것인데 어찌 한가지 방법만으로 아무에게나 다루려 드는 게냐. 내 말을 알아듣느냐!"
  "아옵니다."
  "안다?"
  양예수의 눈꼬리가 사납게 치켜올랐다.
  허준이 호흡을 가다듬어 아뤘다.
  "혜민서 병자도 구안와사 병자였사오나 그 병자는 위가 허약하기는 해도 무력하지는 아니했사와 침을 썼사옵고 이 병자는 위의 무력증이 이미 깊었다고 보아 화제와 뜸으로 효력을 보려 하옵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 ... 위 운운은 나도 아니한 말인데 어째서 네 입에서 나오느냐."
  순간 방문 밖의 김응택이 오히려 눈에 불을 켜며 목청을 돋우었다.
  "허봉사는 듣게. 대체 구안와사에 침을 젖혀놓고 손바닥만 쓰는 건 듣기가 처음이며 더구나 어의께서 아침까지 줄곧 침을 써온 터이어늘 수하의 인간이 되어 침을 아니 쓴다 큰소리치니 그건 어의의 방법을 일부러 능멸하는 수작인가 뭔가!"
  "어찌 추호인들 그런 마음을 먹으리까. 소인은 어의께오서 밝히셨듯이 이 병자가 혜민서 병자와는 체질이 다르다 하는 것과 병원이 위의 무력함에서 왔다 여기어 차제에 위병까지 낫우려 하와 ..."
  "궁중의 의술은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일일이 의정하고 허락받아 행하는 것이다. 제 작은 재주를 드러내고자 병명을 부풀려 조자룡 헌칼 쓰듯 마구잡이로 날뛰는 데가 아니야."
  "어의는 새 의원을 너무 핍박하지 마소서."
  또랑 하고 공빈의 목소리가 난 건 그때였다. 발 밖에 공빈이 서 있었다.
  일제히 허리를 굽히는 인물들에게 공빈이 말했다.
  "새 의원이 이미 병자를 수월하게 낫운 공이 있는 터요. 나도 그걸 믿어 특히 청한 사람이니 그 수단에 관해서는 어의도 누구도 핍박하지 말아주오."
  "핍박이 아니오라 금지옥엽 같은 병자에게 서툰 의원이 자칫 실수가 있을까 염려되어 ..."
  "의술에 대해선 모르나 저 아이가 어릴 적부터 배앓이가 잦았던 것은 내가 아는 터이니 난 새 의원의 진단을 믿소."
  "하오나 위보다 급한 것이 얼굴 쪽이옵니다."
  "새 의원은 듣소. 새 의원이 처음 병자를 보고 두 가지 다 결코 어려운 병이 아니라 한 말을 나는 믿고 있는 터이니 그대의 소견대로 행하오."
  양예수가 다급하게 외쳤다.
  "신 양예수 아뢰옵니다. 마마! 제가 오늘토록 근 30년에 이르도록 왕실의 탕제를 전담하와 결코 낫우지 못한 병환이 없었음은 온 나라가 아는 터이옵고 조정이 믿는 바이옵니다 ... 그리고."
  "어의의 솜씨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의원도 특히 잘 보는 병이 있다 여기어 일임한 것이니 다른 얘길랑 말아주오."
  "마아마!"
  눈에 불을 켜고 양예수가 외쳤으나 공빈은 발 너머 자기 처소로 사라진 후였다.
  방안의 침묵이 길었다.
  갑자기 양예수가 옷자락을 떨치며 방을 나갔고 뒤따라 김응택이 따라나갔다. 방 안팔에 벌어진 광경을 숨을 삼킨 채 보고 있던 미사가 긴장에 못이겨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히 본 것이다. 고개를 떨군 허준을 도끼 같은 눈으로 쏘아보고 마침내 돌아선 어의의 눈빛을 ...
  "허봉사는 앉으오."
  정작의 태평한 소리가 났다.
  "이미 도제조와 제조께서도 하명이 계신 터이니 다른 일은 괘념치 말고 그대의 소신껏 병자를 보오."
  '소신껏!'
  이제야 어의 양예수와 피할 수 없는 정면대결임을 허준은 깨달았다.
  내의원 정청으로 돌아온 김응택은 흥분해 떠들었다.
  양예수의 후광에 우쭐하여 평소 돌아도 안 보던 동관들과 아랫것들에게도 들으란 듯이 사태를 과장해 마구 떠들었다.
  허준이 어의의 의술을 능멸하고자 일부러 침을 쓰지 않고 특히 어의가 입도 벙끗하지 않은 병자의 위병을 거론한 사실을 침을 튀기며 분해했다. 모여든 의원들이 덩달아 "그런 무엄한 놈이 어디 있느냐." "죽일 놈이다." 등 따라서 맞장구쳤다.
  그러나 그건 표면상의 소동이었다. 그들도 난다긴다하는 저마다의 의술을 지닌 의원들이다. 한낱 구안와사 따위 작은 병이요 종친도 아닌 병자라면 자기들 하급자에게 맡겨 작은 공을 쌓게 해도 남을 일을 병자가 공빈의 아우라 하여 몸소 맡은 어의의 저의가 속 빤하게 보이던 차라 그 어의와 공빈 사이에 무언가 탈난 것이 신명이 났다.
  구안와사의 병원이 위에까지 이어졌다 운운하더라는 허준의 주장까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되 이 기회에 허준이 어의의 콧대를 왕창 꺾어 주기를 그들은 내심 후원했다.
  방안에 쑥 태운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허준이 약을 달이러 가기까지 그가 직접 약국에 가서 내국담당 이명원에게 3월초에 캐어 음건한 쑥을 지정하여 타와서는 불 당겨 직접 약효를 시험한 그 쑥냄새였다. 쑥냄새에 속이 뒤틀린 병자 김병조가 "냄새가 독하니 밖에서 태워주오." 했으나,
  "약을 다 마신 후 뜸을 뜰 것이오니 그 안에 쑥냄새는 미리 맡아두는 게 좋습니다."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나가는 허준의 과묵한 모습이 누이 공빈의 위세를 보더라도 자기 앞에 이르면 웃음부터 튀어오는 여타 의원의 태도와는 달라서 불쾌했다.
  "재주는 어떨지 모르되 위인이 꽤나 무뚝뚝하구먼."
  눈치를 안 이이첨이 간단히 김병조에게 아첨했다.
  "예 바둑판이나 마련해주오."
  김병조가 비뚤어진 입으로 문밖 누이의 방 앞에 거행하는 늙은 상궁에게 부탁하고.
  허준이 달인 양위이공탕이 은보시기에 담겨 다시 은쟁반에 얹혀 그 위에 노란 보자기가 씌워져 있었다. 그 쟁반에는 또 은 숟가락도 하나 올려 있는데 그건 달여온 약은 반드시 그 처소에 거행하는 상궁이 미리 한 입씩 기미를 본 연후에 진어하는 게 궁중 법도라서 올려진 것이었다.
  허준이 병자의 방 앞에 서자 미사가 최상의 궁중언어로 방안에 아뢰었다.
  "아뢰옵니다. 탕제 대령이옵니다."
  방안은 대답 대신 바둑판에 돌이 놓이는 맑은 소리만 거푸 났다.
  "열어라."
  하고 허준이 마사에게 명령했다.

    12
  "탕제 대령하옵니다."
  은제 약보시기를 역시 은제 쟁반에 받쳐든 허준이의 한발 뒤에서 미사가 김병조의 방안을 향해 해맑은 음성을 다시 한번 냈다.
  그러나 방안은 의연히 바둑알이 놓이는 소리가 울렸을 뿐 가타부타의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허준이 기척을 냈다.
  "봉사 허준 탕약 대령이옵니다."
  의녀인 미사는 탕제라는 궁실에서 사용하는 최고의 존칭을 했으나 허준은 탕약이라고 표현했다.
  공빈의 동생이되 병자가 왕실 사람이 아님에서 그가 누이의 위광을 업고 내의들을 턱으로 부리는 데 대한 마뜩치 않은 심정이 묻어나온 것이다.
  영에 의하여 거행하고는 있되 큰병이라 할 수 없는 자잘한 병까지 지체 높은 이들의 이름을 팔아 궐내에 들어와 고치려 드는 저들의 특권의식에 대한 힐난도 그 속에는 섞여 있었다.
  딱 ... 하고 다시 바둑알이 놓이는 소리가 났다.
  허준은 초저녁 그 방을 나설 때 병자가 약을 마실 시각을 상정하고 미리 위증을 다스릴 초벌약을 들여놓으면서 그 바둑판을 보았었다. 두다가 잠시 밀어놓은 그 바둑알은 오랜 세월 해수에 닦이고 씻겨 옥돌처럼 반짝이는 희귀한 조약돌들이었고 그 돌들이 어우러지는 바둑판은 더욱 눈부셨다.
  김병조도 이이첨도 젊은 나이에 비해 바둑수는 고수들인 듯했다. 한점 놓이고 응수의 또 한 점이 놓이기까지의 간격이 꽤나 길었다.
  그 두 사람의 바둑이 일여덟 수 계속됐을 때 멀리 성루 쪽에서 시각을 알리는 쇠북소리가 들려왔다.
  "탕약 대령이옵니다."
  허준이 다시 아뢰고 미사에게 눈짓했다.
  미사가 발을 걷어올리고 허준이 방안에 들어서는데 그 허준에게 항해 오는 김병조의 눈자위가 벌써 사나웠다.
  "무엇인가?"
  "시각이 되었기로 탕약 대령이읍니다."
  "시각이라니? 아까 마신 약은 무엇이고?"
  "그건 본약을 들기 전에 뱃속을 달래는 초벌약올시다."
  "이자가 째진 입으로 잘도 떠벌이는구먼."
  허준은 흠칫 정지했다.
  병자가 갑자기 사나워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약도 본약이 있고 미리 먹는 약이 있다는 겐가?"
  "그러합니다."
  "뭐라? 도대체 네가 지어낸 약이 무엇으로 조제했기에 소태처럼 쓰기만 하단 말이냐. 또 그걸 간신히 삼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약?"
  "쓴 약은 위의 기능을 촉진시키고 입안의 무딘 미각을 일깨우는 효력이 있기로 권한 것이옵고, 또."
  "...?"
  "환약이 아닌 탕약일 때는 병파의 몸이 약을 받아들이는 준비를 하도록 그건 의원이 반드시 지시하는 복용법올시다."
  몰리고 있는 반상의 바둑수를 읽던 이이첨이 고개를 들었고 김병조의 입가에는 조소가 띄워졌다.
  "그래서 일부러 쓴 약을 골라서 주었단 말이냐. 내 뱃속을 깨우고자?"
  "그러합니다."
  "난 그 약 다시 먹고 싶지 아니해!"
  "기왕 의원에게 몸을 맡겼으니 이 기회에 위병도 고치소서."
  "위?"
  "마침 시각올시다. 오늘 내일 양일간은 매 두 시각마다 약을 듭셔야 하오리다."
  "이자가 듣도 보도 못한 소태 같은 약을 먹여놓고 미안타 말은커녕 말만 번드르르하잖은가! 한 번도 지겹거늘 하루 여섯 차례 이틀에 열두차례?"
  "첫약이 쓸 뿐 곧 견딜 만하오리다. 하옵고 ..."
  "하옵고 뭣이고 간에 넌 약을 지을 뿐이다만 그 약을 넘기는 건 내 목 구멍이다. 또 애초 그 약이 그토록 쓴 것이거든 좀 먹기 좋게 하는 것이 의원의 소임일 터이고 ..."
  "병자를 위하여 약맛을 맞출 순 없습니다. 병을 속히 낫우려거든 의원의 지시에 따라야 하오리다."
  "다른 약으로 짓게. 목구멍에 넘길 수 있는 약으로."
  "병도 긴 눈으로 보면 하나의 수양올시다. 왜 병이 내 몸에 들어왔는 지 돌이켜 반성하여 긴 앞날에 대비해야 하오리다."
  "한낱 의원인 네가 감히 누구 면전에서 수양 운운하느냐!"
  "긴말 필요없이 아까 그 약 아닌 걸로 다시 지어 들여라."
  허준이 한 호흡 쉬고 말했다.
  "가시에 찔린 상처가 아닌 이상 드러난 하나의 병증은 반드시 연관된 작은 병이나 그 원인을 거느리고 있기 마련올시다. 하와 이 약은 본병을 낫우기 위해 미리 작은 병을 달래는 순차의 하나요 또 약이란 시각을 맞추어 복용치 않고선 약효를 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이오니 ..."
  "긴말 필요없다지 않느냐. 황차 어의도 밤중에 약을 달여오지도 아니했고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복용 이상은 권한 바 없는 터인데 네 방법대로 매 두 시각마다라면 하루에 대체 몇 차례 약을 먹으란 말이냐!"
  "소인의 처방은 하루 여섯 차례올시다."
  "나가거라."
  "탕약이 식습니다."
  갑자기 이이첨이 허준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자가 보자 하니 정령 본데도 들은데도 없는 자가 아닌가! 감히 뉘 안전인 줄 알고 꼬박꼬박 말대꾸냐!"
  준수한 외모에 비해 말투가 야했다. 허준은 손가락질하고 있는 이이첨을 무시한 채 김병조에게 다시 말했다.
  "제게 병을 낫우라 하신다면 제 요량을 따르소서."
  김병조가 말했다.
  "좋다, 내 누님의 낯을 보아 이번 차례만은 먹을 것인즉 게 두고 나가 거라."
  허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서 있는 허준에게 다시 바둑판을 향하던 김병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게 두고 물러가라는데 귀가 먹었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
  이이첨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병자가 두고 가라면 알아서 먹겠다는 뜻인데 이자가 정녕 해변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자로고."
  "의원은 병자의 약을 짓는 것만이 아니라 병자가 음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소임올시다. 더 식기 전에 드소서."
  "나가, 썩!"
  물러나오는 허준에게 숨을 삼키고 있던 미사가 얼른 발을 쳐들었다. 방문을 나서는 그 허준의 뒤통수에 방문이 깨어지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허준이 손등으로 약보시기의 온기를 쟀다.
  "허봉사님 ..."
  물러갈 기색이 아닌 허준에게 미사가 불안한 눈매를 보냈다.
  "오늘밤은 거른 후 내일 공빈마마와 그밖에 병자에게 약먹기를 권하는 분들이 계실 적에 다시 권하면 어떨지요?"
  방안에서 딱 ... 딱 ... 또 가래나무 바둑판이 세 번 울렸다.
  허준이 다시 그 김병조의 방을 향해 섰다.
  "소인 허준 병자께 아뢰오. 지금이 탕약을 드실 마땅한 시각인 줄 하와 다시 대령했사옵니다."
  문득 바둑판이 울리던 방안의 소리가 멎고 정적이 길었다.
  "발 들쳐라."
  허준이 이르고 미사가 방문 앞에 다가설 때였다.
  "이 발칙한 놈을!"
  노려보고 있었던 듯한 김병조의 고함소리가 터졌고 이이첨의 분격한 소리도 뒤따랐다.
  "뭐 저 따위 해괴한 놈이 있단 말인가!"
  "허봉사님."
  발을 들치던 미사가 와들와들 떨었으나 그 미사에게 허준이 명했다.
  "열어라, 방문!"
  "병자가 격해 있사오니 내일 공빈마마께서 납실 적에 다시 찾아와 ..."
  "시키는 대로 하거라!"
  허준의 그 말과 방안에서 김병조의 억누른 소리가 들린 건 동시였다.
  "오냐, 들어올 테면 들어오너라! 이 벼루통으로 네놈의 골통을 바수어버릴 것이다!"
  "허봉사님."
  미사의 눈이 또 한번 허준에게 애원했다.
  "이미 들어오라 했으니 열거라."
  미사의 떨리는 손이 방문을 열었다.
  허준이 방안에 들어선 그 순간이었다.
  "이 발칙 한 놈!"
  김병조의 고함과 함께 날아온 벼루통이 허준이 받쳐든 약보시기에 명중했고 방바닥에 은제 약보시기가 굴렀다.
  동시에 탕약을 뒤집어쓴 허준의 가슴 앞자락에 벼룻돌의 먹물로 새까맣게 흘러내렸다.

    13
  아닌밤중에 관복을 빌러 내국에 나타난 미사의 사정을 듣고 이명원은 놀랐다.
  "다친 데는 없는가?"
  "다치지는 아니하셨으나 탕제와 먹물을 뒤집어쓰시고 그 옷을 그대로 입으실 순 없는 사정인데 다시 약을 달여 병자예게 간다 하시기에."
  "다시?"
  이명월이 내준 관복을 싸든 미사가 총총히 사락졌다.
  '한심한 사람.'
  서둘러 내국을 나서며 이명원이 탄식했다.
  지체 높은 이들의 판단이 반드시 경우바르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요, 자칫 제 피붙이에게 거스른 사실을 들어 공빈이 악감정이라도 품는 날이면 허준의 존재 따위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비리의 인간사를 왜 생각지 못한단 말인가.
  이번 일 비록 판관 정작이 물래 거간을 들었으나 허준이 자력으로 궐내 문후에 참여한 것은 비단 그 혼자의 영광이 아니요, 내의원 인사에 독재를 써온 어의 양예수의 20여 년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하나의 시작이어야 할 것이다.
  그 기대가 있기에 빛 못 보는 내의원 모든 하급 의원들의 희망이 허준의 거취에 쏠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결코 허준 혼자의 사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명원은 중부 정선방을 향해 거의 달리듯이 가고 있었다. 그가 만나고자 하는 정작의 집이 그 정선방 초입에 있는 통례원 뒷골목에 있었다.
  초저녁까지 허준을 격려하여 함께 있던 그가 허준이 도제조의 지시로 공빈의 진숙궁에 불려갔다는 소식으로 발칵 뒤집힌 내의원의 분위기를 전해 듣자 자신이 허준의 곁에 있음으로써 일이 성공한 후 허준의 공이 자기로 인해 반감될지 모른다 여기어 스스로 자리를 피해 집으로 돌아간 것을 이명원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일은 잘 되었네."
  때아닌 시각에 숨이 차서 찾아든 이명원을 사랑으로 인도해 마주앉은 정작은 사태의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도 오히려 여유있는 미소를 띠었다.
  "오히려 일이 잘 되었다니요!"
  "그 병자를 허봉사가 그냥 소문 없이 낫우고 끝난다면 일은 허봉사가 공빈마마의 가슴에 그저 고마운 기억 하나 남기는 정도로 흘러가버릴 수 있네. 공빈마마 외 주위 몇몇 사람에게 허봉사가 구안와사를 잘 고친다는 소문 하나쯤 곁들여서 ... 더구나 병자가 무슨 병에 언제 누가 어떻게 고쳤다 기록하는 왕실 사람이 아니고 보면 더 말할 것도 없지."
  "...?"
  "...!"
  "이 사건이 보다 많은 사람이 주시하고 어의와 허봉사가 더 좀 첨예하게 대립하는 그런 사건이 되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 여기네."
  "그래서 허준이 어의만큼 의술이 정예하지 못한 것이 판정되면 허준은 끝장이지. 그를 애써 천거한 나 역시."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정작의 눈에 일고 있는 불꽃을 이명원은 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사람, 위로 고관대작들에게도 결코 예 이상 허리 굽히지 않으며 아래로 의녀들이나 하급의원이 내의원 정청 마당에 비질을 할 제도 길을 비켜가는 그 부드러운 사람이 오늘따라 눈빛이 형형했다.
  그 정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본인도 깨닫지 못한 채 그 선봉에 나서고 있는 허봉사에겐 가혹한 시험이 될지 모르나, 그가 이 내의원에 뿌리를 박으려면 그건 또 조만간 싫어도 한번은 부딪쳐야 할 벽일세. 나 또한 관운이라 할 것도 없는 내 관운을 걸었으나 후회하지 않네. 내게도 이 일은 내 관운을 걸 만큼 가치 있는 일인즉."
  이명원은 노복이 끓여내온 작설차를 다 비우지 못하고 정작의 집을 나섰다.
  정작의 뜻은 안다. 그의 각오도 알고 내의원의 비리를 깨고자 오늘에 이르도록 그가 노력한 본심도.
  그러나 허준에 대한 이명원의 우정은 허준 본인이 이 시험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른다는 그 점이 안타깝고 불안했다.
  건강할 때야 그 존재가 어느 구석에 박혔는지 돌아도 안 보는 것이 의원이다.
  그 의원들을 감독하고자 왕실의 병자면 어의가 주재하는 의약상정회의를 열고 지혜와 술을 모으기도 하나 그런 정성 그런 세심함은 공빈의 동생이라는 존재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
  필경 양예수도 그러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위병 따위는 뒤에 천천히 고쳐도 될 것이요, 우선 눈에 확연한 눈과 입이 돌아간 증세만 고쳐보이면 그것만도 감지덕지 치사를 받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 인물에게 따로 약첩을 넌지시 건네주며 "위가 허해 보이니 보중하셔야 하오리다. 이건 정으로 따로 마련했으니 장복하소서," 이쯤 너스레 한마디 덧붙이면 그 인물 그 가족은 두고두고 그 자상함과 고마움에 철따라 세찬쯤 보내오기 마련이다. 때론 귀한 명나라 비단 한 감쯤도 덧끼워서 ...
  생각이 이에 이르자 이명원의 뇌리에 허준의 의업 일변도로 사는 과묵한 눈매가 떠올랐다.
  "난 그래서 그가 좋아. 그래서 난 그를 평생의 지기로 여기고 있어."
  이명원의 발걸음이 다시 바빠졌다. 이번 일 허준이 실패할 경우 자신도 허준과 정작과 운명을 함께 하여 이 내의원을 떠나도 좋다고 마음속에 다졌다. 야금의 거리 멀리 나졸들의 등불이 가로질러 가다가 또 멀리 어둠속 동패들에게 변고가 없다는 신호인지 등불을 들어 원을 그리는 것이 보였다.
  육조 앞 넓은 거리에 나선 이명원은 길 건너 불 꺼진 혜민서의 닫힌 문을 보았다. 허준이 진숙궁으로 차출되었음에서 그의 몫까지 떠맡은 이공기가 오늘도 퇴청하지 못하고 허준의 침구병사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났다. 생각 같아서는 함께 힘이 되어 허준에게 달려가자 권하고 싶었으나 혜민서 의원이 웃전의 지시 없이 궐문을 통과할 길은 없었다.
  내국에 들어온 이명원은 내국의 도약사령(약초를 썰고 환약 재료를 만드는 내의원의 하급 관원)을 두들겨 깨워 함께 진숙궁을 향했다.
  영문 모를 그를 동행하는 것은 궐내 법도가 해가 진 후엔 궐내에 여하한 사유라도 단독보행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국 의원임을 밝히고 마치 공무인 양 진숙궁 시위상궁으로부터 출입을 허가받았으나 허준도 미사도 다시 약을 달여 들고 병자가 있는 진숙궁 별채로 들어가고 보이지 않았다.
  "별채라면?"
  "게까지는 두 대문을 더 가야 하오. 그리고 공빈마마의 처소와 담 하나 둔 사이라 유시 이후에는 부르는 이 이외는 아무도 들이지 아니하오."
  "하오면 의원이 나오기까지 예서 잠시 기다리겠습니다."
  이명원은 정말 급한 공무로 나온 듯이 소매 속에서 찾아온 용건과 상관도 없는 파지가 된 약방문을 꺼내 저만치 더 이상의 범접은 허락치 않을 눈으로 서 있는 노상궁의 의심을 얼버무렸다.
  혹시 병자가 찾을지도 모를 야참을 시중하고자 건너와 있던 말쑥해 보이는 40대의 상궁이 이 밤중에 약을 받쳐들고 찾아드는 허준과 미사를 졸리는 눈으로 건너보았다.
  "병자가 탕약을 듭실 시각이라 대령했습니다."
  허준이 용건을 전하자,
  상궁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방에 불이 꺼진 지 오래요, 이미."
  "제가 깨우겠습니다."
  다시 앞장서는 허준에게 미사가 불안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뒤를 따랐다.
  김병조의 방은 불이 꺼져 있고 잠든 두 청년의 숨소리가 나직이 새나오고 있었다.
  아랫목 숨소리는 김병조요, 윗목 숨소리는 이이첨일 것이었다.
  허준이 세 번 네 번 기척을 냈을 때야 방안의 숨소리 하나가 멎었다.
  "뉘오?"
  잠에서 깬 그 목소리는 김병조였다.
  "봉사 허준 탕약 대령했사옵니다."
  "탕약?"
  졸리는 듯이 뇌던 김병조가 튕겨 일어난 듯 격분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자가 또 왔어!"

    14
  방안의 정적이 길었다.
  재차 찾아온 허준을 거부하는 외도적인 침묵일시 분명했다. 아무래도 불안한지 미사가 한발 앞에 선 허준에게 낮은 소리를 냈다.
  "기침하지 아니하신 게 아니실지요? ..."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이었다.
  김병조가 궁사람이 아닌 이상 상감마마를 비롯, 왕실의 시탕을 받드는 내의원 의원을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터이다. 그런데도 누이 공빈의 위세를 업고 벼룻돌을 던져 대령해간 탕제를 둘러엎은 방안 사태의 패악이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니 미사가 겁내는 것은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해를 겁내서가 아니라 16세, 그녀의 작은 가슴속에 사랑하는 대상으로 뚜렷이 자리잡고 있는 허준 그 사람에게 닥칠 위해를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허준은 물러서지 않은 채 침묵한 방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다시 아뢰옵니다. 의약이란 그 자체 조제도 치밀해야 하나 시각에 맞추어 들지 아니하면 약효가 반감되는 것이오니 등촉을 밝히시고 문을 열어주소서. 공빈마마뿐 아니라 위로는 전하의 지극한 관심도 겝시온데 어찌 약을 들 시각을 천연하려 하시오니까."
  방안에서 소리가 났다. 잔뜩 뒤틀린 조소 어린 이이첨의 목소리였다.
  "전하 운운 이자가 협박을 하는 건가 보군."
  "병자 아닌 사람은 나설 일 아니오이다!"
  드륵 방문이 열리며 이이첨이 나타났다. 역시 잠 안 자고 깨어 있던 눈이었다.
  "...!"
  "너 지금 뭐랬느냐?"
  미사가 숨을 삼켰으나 허준의 눈은 그 이이첨의 눈길을 무시, 김병조를 향한 채 미동도 않고 말했다.
  "불 밝혀주소서."
  "네 약은 먹지 않기로 했어."
  "이미 공빈마마의 허락이 계시옵고 전하의 관심 또한 곕신 터오니 임외로 퇴하지 못하옵니다. 들어가 불 밝히겠습니다."
  "전하 전하 말끝마다 이자가 ... 어디 들어올 테면 들어와봐라!"
  "들어오너라."
  허준이 미사에게 명하고 방안에 들어섰다.
  김병조와 이이첨의 눈이 칼날처럼 허준에게 박히고 있었다. 미사가 따라 들어왔다. 미사에게 허준이 말했다.
  "항아리 곁에 유황 까치가 있을 것이다. 촛대에 불 당겨라."
  미사가 움직인 순간이었다.
  김병조가 무어라 외치는 욕설과 함께 번쩍 들린 바둑판이 날아 허준의 가슴팍에서 또 한번 약쟁반을 둘러엎고 그 육중한 가래나무 바둑판 모서리가 허준의 발등을 찍고 나뒹굴었다.
  바둑판에 박혀 있던 서랍이 빠지며 검고 횐 바둑돌이 온 방안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방안에 약냄새가 진동했다.
  "허봉사님!"
  미사가 비명을 지르며 허준을 싸안았다. 발등을 잡고 고꾸라진 허준은 '으윽' 신음소리뿐 더 움직이지 못했다.
  "썩 나가."
  김병조가 방문을 가리키며 고함쳤다. 일어서려던 허준이 다시 주저앉았다.
  "괜치 않으시오니까?"
  다급하게 묻던 미사가 자지러졌다.
  "피올시다, 피!"
  가래나무 그 육중한 바둑판에 찍힌 허준의 발등 그 버선 위로 검은 피가 배나오며 그 자국이 자꾸 퍼지고 있었다.
  "이것들이 뉘 앞에서 소란을 떠는 게냐! 썩 물러가지 못하느냐!"
  미사의 부축을 물리치고 일어선 허준이 마주 김병조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음성은 나직했으나 그 눈은 불을 뿜듯이 격해 있었다.
  "시각을 늦추면 그대의 병이 완치될 시각도 늦추어질 뿐이오이다. 또 그대는 명심하오. 궁안에서 조제하는 의약은 그 하나하나가 일일이 왕실의 경비로 계정된 것, 삼가 황공하게 받을 수는 있되 어찌 임의로 내쏟을 수 있단 말이오."
  "무어라고?"
  "약은 다시 달여오리니 기다리시오."
  그 눈빛 앞에 이제야 김병조가 좀은 압도당한 듯했다. 그러나 상대가 신분 낮은 의원이란 멸시 어린 조소는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불 밝히고 어지러진 것 치워라."
  허준이 명령하고 미사가 움직이는데 방문 밖에서 노상궁의 소리가 났다.
  김병조의 수발을 들어주고자 건너와 있던 노상궁이었다.
  "공빈마마께서 납시었습니다."
  이이첨이 다급히 의관을 정제했고 김병조도 매무시를 바루었다.
  쏟아진 약 속에 범벅이 된 바둑돌을 미사가 황급히 주워담는데,
  "방안에 등촉부터 밝히오."
  노상궁이 명했다.
  미사가 구석 불씨 항아리 속에 유황개비를 찔러 불을 붙여 쌍촛대에 당겼다.
  이때 발 너머로 네 사람 상궁을 거느린 공빈이 나타났다.
  미사도 황급하게 허리를 들었다.
  공빈이 방안에 산란하게 어질러진 것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의원은 발을 많이 다치지 아니했소?"
  "...!"
  "저 아이와 의원이 주고받은 말 밖에서 다 들었소. 잠시 저 아이가 궐내 법도를 잊고 행한 일이니 의원은 내 낯을 보아 불문에 붙여주오."
  "황공하옵니다."
  "물러가 상처를 돌보시오. 그리고 날이 밝은 연후 저 아이가 약 먹을 시각이 되면 내게 연통을 주오. 내가 동행할 것이니."
  김병조가 소리쳤다.
  "궐내의 의원이 저자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자가 병자를 알기 도시 뭐처럼 알고 교만 떠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일 어의를 만나 새 사람을 지정해달라 청할 것이니 누님께선 괘념치 마소서."
  "여기는 궐내지 너의 집이 아니다. 딴 의원 딴 의원 하나 이 의원들이 왕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이지 오로지 너를 위해 있는 사람이냐!"
  "네?"
  "어째 그토록 모를꼬!"
  한숨이 묻어 있었으나 공빈의 눈이 서릿발처럼 매웠다.
  "누님 ..."
  "병이 났다 하여 네가 함부로 내의원 의원을 하인 부리듯 부릴 사람인가를 말하는 게다."
  "... 음."
  "내 잠시 정에 매여 앞뒤 재어보지도 못한 채 상감마마께 청하여 네 병을 내의들께 보이게 하는 데까진 허락을 받았으나 이를 뒤늦게 아신 아버님에서 나와 너를 싸잡아 공사도 가리지 못하는 자식을 두었다. 어머님께 꾸중이 심하신 얘기 들었을 터."
  "또 기왕지사 일이 그리 되었으면 내 요량에 따라 하루 속히 병이 나아 집에 돌아갈 생각은커녕 왕실 시탕을 받드는 내의께 유혈의 상처까지 입혔으니 그건 곧 네 누이의 발등을 찍은 행위와 무엇이 다를꼬!"
  방 안팎에 정적이 길었다.
  공빈이 다시 한숨 끝에 허준에게 말했다.
  "의원은 돌아가 어서 상처를 돌보오. 그리고 어렵사리 아뢰어 의원을 바꾼 건 나인 터에 이런 소동이 소문나면 내 경망도 경망이려니와 그 또한 상감마마의 심기를 흐려 드리는 일이 되리니 큰 상처가 아니거든 내일 다시 와주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황감하오신 분부시옵고 이미 소인이 맡은 병자이오매 굳이 내일로 미룰 일이 아니라 곧 약을 다시 대령하오리니 심려치 마오소서."
  "지금 말씀이오?"
  김병조가 소리쳤다.
  "저도 순순히 약을 받아먹으려 했사오나 듣자니 저 의원이 아직 병자를 보기엔 경력도 미천할뿐더러 내 눈치를 보니 어의의 신임도 채 받지못한 자올시다. 그가 지어준 약이 도대체 약인지 독인지 듣도 보도 못한 ..."
  공빈이 김병조의 변명을 다 듣지 않고 수행한 상궁들께 일렀다.
  "방을 치우오. 그리고 의녀는 의원을 부축해 물러가거라."
  노상궁과 수행한 두 상궁이 방에 들어와 바둑알을 줍고 걸레질을 하자 허준은 방을 나섰다.
  공빈의 언사가 경위가 밝았음에서 허준의 분격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찍힌 발등은 심줄이라도 끊겼는지 천근처럼 무겁고 칼날 위를 걷듯이 아팠으나 지켜보는 공빈을 위해 애써 태연해하며 미사의 부축도 물리쳤다.
  그러나 그 멀어져 가는 허준을 향해 김병조는 이를 악물었다.
  무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개 이름 없는 의원놈에게 친구 앞에서 그리고 아무리 누님을 수행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여러 상궁들 앞에서 누님에게 받은 그 모든 무안이 저 허준이란 놈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허준의 상처는 심상치 않은 듯했다.
  등 뒤에 공빈의 시선을 느끼며 애써 복도를 벗어난 허준은 겨우 세 계단의 툇돌로 내려서다가 그대로 구르며 정신을 잃었다.
  미사가 부축하며 울부짖듯 '허봉사님'을 외치자 담 너머 서성이던 이명원이 달려들었다.
  이명원에게 업혀 담밖 숙소로 옮겨진 허준의 발은 건드릴 수 없도록 선혈이 낭자했다.
  버선을 벗기고 피를 닦아내던 이명원이 소리쳤다.
  "뼈가 상한 듯해."
  "뼈 ...?"
  핼쓱해지는 미사에게 막 정신을 차린 허준이 한발로 버티고 일어나며 말했다.
  "약 다시 달여갈 것이니 불 피우거라."
  "약을 다시 달여가다니?"
  "이미 첫 약 때보다 한 시각이 지났으니 처음 처방대로 다 하되 인삼만 반 푼을 줄여서."
  말끝에 허준이 다시 정신을 잃었다.

    15
  김병조가 던진 육중한 바둑판의 모서리는 허준의 발등에 엄지손가락의 첫마디가 파묻힐 정도로 큰 상처를 내고 있었다.
  고함쳐 도약사령을 내국에 달려가게 하여 응급처치의 약재를 가져오게 한 이명원은 자초지종을 얘기하는 미사와 말에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제아무리 가문의 권세를 업었다 한들 인간이 어찌 이토록 잔인할 수 있으랴 싶은 것이다.
  비록 상대가 저희들에게야 눈아래로 깔아보는 미천한 의원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허준이란 사람이 그 시각에 왜 그곳에 있었는가 ... 그 또한 잠을 아니 자고 약을 대령한 것은 제 지병을 낫우어주려는 의무와 지성에서 일 터이다.
  그러나 분노해본들이요 한탄해봤자다.
  "혹 ... 허봉사 발이 여의하오리까?"
  신음을 흘리는 허준을 뒤로부터 안은 채 미사의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심줄이 상하지 않았는지 ... 등촉 더 가까이 대게."
  이명원이 말하자,
  "아무래도 내가 잡아야겠소."
  하고 도약사령이 미사를 밀어내고 신음하는 허준의 상체를 꽉 잡았다.
  미사가 등촉을 허준의 발치에 비친다.
  이명원이 일변 피를 닦으며 상처를 헤쳐보다가 허준에게 말했다.
  "내 방법대로 하겠네."
  "... 고마우이."
  "발을 잡게."
  도악사령이 다시 허준의 상처난 왼발을 잡았다,
  "꽉!"
  이명원이 또 한번 명령하자 마디 굵은 도약사령의 우악스런 아귀힘이 허준의 발을 잡아눌렀다.
  이명원이 빠른 손놀림으로 엉겅퀴즙이 섞인 소주를 허준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엉겅퀴즙은 지혈에 특효가 있고 독한 소주는 소독의 효험이 있었다.
  악문 잇사이로 비명이 물리는 허준을 보며 등촉을 든 미사의 손은 그것이 자신의 고통인 양 자꾸만 떨고 있었다.
  이명원이 허준의 상처 속에 짓이긴 약초를 발라 붙이고 무명천으로 감싸 맸다.
  "심줄보다 뼈가 상한 듯하이."
  부어오르고 있는 허준의 발등을 보며 이명원이 새삼 분격해 소리쳤다.
  "이 일 간과하지 않겠네. 밝는 길로 정청에 들어가 도제조를 뵙고 문제를 삼겠네."
  "왕실의 방계친도 아닌 자가 내의로부터 심병의 기회를 받은 것도 송구스러워해야 하거늘 왕실의 시탕을 받드는 의원에게 이런 폭행을 가해?"
  "견딜 만하오."
  "무어라?"
  "발가락이 움직이네. 뼈는 무탈한 듯하이."
  세 사람의 눈이 일제히 허준의 발을 들여다보았다. 상처를 싸맨 무명천은 벌써 또 피가 흥건히 배고 있었으나 과연 허준의 발가락은 가냘프게 움직이고 있었다.
  "살점이 좀 찢겼을 뿐이네."
  호흡을 가다듬은 허준이 다시 그렇게 나직이 말했다. 미사가 이번엔 안도의 울음을 터뜨렸다. 성루 쪽에서 시각을 알리는 쇠북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불 피우거라."
  "불은 또 왜오니까?"
  "새로 약 달여야지."
  "다시 가오니까?"
  미사가 비명처럼 외쳤고 이명원도 부릅떴다.
  "허봉사!"
  "명심할 것은 날이 반 시각이 더 밝았으니 인삼 한푼을 더 줄여야 하리. 내용은 이의원이 상정해 주오."
  "그 발로는 걷지 못해!"
  그러나 허준은 미사에게 한가지 지식을 일러주듯 자기 말을 이었다.
  "병자도 성한 이도 마찬가지. 사람의 기운은 초혼(해진 뒤) 이후 점차 양에서 음으로 옮겨가다가 자정을 고비로 다시 양으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그 인체의 변조에 대응하여 약제의 가감이 꼭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숯불도 괄한 것으론 쓰지 못한다."
  "말씀 명심하옵니다만 공빈마마의 말씀이 계셨으니 병자의 처소엘랑 날이 밝은 후 공빈마마께오서 납신 연후에 찾아감이 어떠하올지요?"
  "의원이 병자의 기색을 일일이 살필 까닭 없다. 병을 낫우고 난 연후엔 아무리 독한 병잔들 어찌 의원을 원망하겠느냐. 가 준비하여라."
  미사가 나갔고 이명원이 한숨을 쉬었다. 겉으론 한숨이었으나 그 허준에게 대찬 외경의 염 때문이었다.
  어의 양예수의 인허 하에 자기가 입궐한 것이 아니란 것쯤 익히 짐작할 그가 당면문제인 구안와사의 완치면 됐지 자청하여 드러나지도 않은 지병인 위병까지 낫우려 일을 벌인 것은 비록 의원으로서의 순수한 욕망이라고는 할 것이로되 과연 양예수와 허준 두 사람 중 어느 쪽이 낫울 것이냐 허다하게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면 사서 일을 크게 벌인 그가 안타까웠다.
  그 밤 파루의 쇠북소리가 울려 도성의 통금이 풀리던 시각, 허준은 이명원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김병조의 방에 이르러 그가 조제한 약을 병자로 하여금 먹게 했다.
  그때 다시 안 오리라 여겼던 허준이 세 번째 약쟁반을 미사에게 들려 나타났을 때 고함과 함께 방문을 박차고 나타났던 김병조는 허준의 그 발등의 피투성이가 된 상처를 보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 처참한 모습에 기함을 하고 물러서 직숙상궁이 공빈께 아뢰고자 안으로 달렸고 뒤이어 공빈이 방문 밖으로 시위상궁들과 함께 나타난 것을 보자 잠시 그 누이의 비난 어린 눈빛에 맞서보던 그는 허준이 하는 약을 갑자기 벌꺽벌꺽 냉수나 마시듯이 단숨에 비우더니 물러가는 허준이 뒤통수에 방문이 깨어지라 메붙여 닫으며 원한 어린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독한 놈!"
  "상처가 어떠하오?"
  공빈의 아름다운 얼굴이 차마 허준의 상처를 정시하지 못하는가 조용히 물었다.
  "막 얘기를 들었소. 본시 약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이라 신경이 곤두섰던 것 같소. 내 동생의 허물을 용서하오."
  "개의치 않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소. 이젠 다 끝난 게요?"
  "한 시각 후에 다시 탕제를 음복해야 하옵는데 우선 약기운이 몸에 퍼진 후 뜸으로써 위맥을 깨워야 하옵니다."
  "위맥을 깨우다니?"
  "큰뜸은 약을 다 먹은 후에 본격적으로 떠야 할 것이나 우선 첫뜸은 잠시 후 시행코자 합니다." 
  벌컥 방문이 열리며 김병조가 달려나왔다.
  "너 지금 무어라 했느냐! 뜸이라니! 이자가 정말 갈수록 태산인 자가 아닌가!"
  "병자는 오랜 위병이 있습니다. 차제에 그 병도 고치지 아니하면 진실로 완쾌했다 할 수 없습니다."
  "누님, 이자의 말을 들었습니까! 이자가 상감께서 성려를 기울여주시고 누님께서 지켜보시니 병 낫울 자신이 없어져서 점점 엉뚱한 말로 사람을 못살게 합니다. 도대체 구안와사에 침이란 말은 들었어도 침에 약에 뜸까지 뜬단 말 들어나보셨습니까!"
  공빈의 아름다운 눈이 문득 허준을 의심하는 쪽으로 흔들린 듯했다.
  "허의원은 듣소."
  "예."
  "내야 의술에 관해 아는 바 없는 사람이오만 처음 구안와사를 낫우어 달라 청한 터에 이제 와선 청하지도 않는 위병까지 운운하니 나 또한 허의원 말에 현혹함을 느끼오."
  "현혹이다 뿐입니까? 이자가 처음 지어낸 약부터 도시 쓰기만 할 뿐 이상했는데 이젠 이도 저도 자신이 없어 횡설수설하는 겝니다. 물으나마나올시다."
  "허의원!"
  "분부하소서."
  "좋소. 다른 사람 아닌 내가 직접 허의원을 청한 장본인이터 이제 와서 허의원을 믿는다 못 믿는다 하진 않겠소. 그러나 병자인 당사자도 이토록 불신하고 나 또한 영문을 짚어보지 못하겠으니 다짐을 둘 수 있소?"
  "다짐이라 하오면?"
  "구안와사와 위병을 언제까지 확실히 고치겠다, 분명한 약조를 둘 수 있소?"
  "의원은 병을 두고 다짐은 않는 법올시다."
  "발명하려 말고 대답해라!"
  "정 믿는 바 있는 일이라면 날짜에 다짐을 못 둔다는 것도 우습지 않소. 다짐을 둘 수 있소 없소?"
  미사도 이명원도 주위의 모두가 숨을 삼키고 있었다. 김병조의 얼굴에 조소가 어렸다.
  "왜 못하느냐! 그토록 자신만만하던 자가 왜 갑자기 못해!"
  "할 수 없거든 아니해도 되오. 못 고치는 병 억지로 고쳐내란 말은 아닌즉."
  허준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소인의 의견을 반드시 지킨다면 다짐을 두오리다."
  "물론 그건 내가 지키게 할 것이오. 의견이란 무엇이오?"
  "아까 보니 이 방에서 물러가는 상에 국수 그릇이 보였습니다. 면이란 풍병에는 기피하는 것이오니 음식 또한 일일이 제 지시를 받고 지킨다면 완쾌까지 사흘로 다짐을 두오리다."
  "사흘?"
  "위병까지?"
  "그러합니다."
  공빈이 말했다.
  "궁중에는 희언이 없는 법이오."
  "아옵니다. 만일 향후 사흘 소인의 지시와 처방으로 완치가 아니 됐을 경우 제 목을 내놓겠습니다."
  "오냐. 네 입으로 나온 그 말 명심하여라. 그리고 누님 여기 계신 모두는 이자의 다짐에 증인이 되어주시오 ..."
  승리자처럼 김병조가 소리쳤다.
  허준도 말했다.
  "굳이 증인 필요 없습니다. 만일 병을 못 낫우어 마마를 기망했다면 그 죄 소인이 아오니,"
  "좋소. 나도 믿으오. 사흘 손꼽아 허의원의 장담이 이루어지기를 나 또한 기다리리다."
  말은 부드러웠으나 공빈의 눈및은 차고 엄정했다.

    16
  "이젠 돌아가보오."
  함께 밤을 새우고 다시 자신의 상처를 처매주고 허리를 드는 이명원에게 허준이 감사의 염을 담아 말했다.
  "너무 세게 매지 않았나 ... 디뎌보오."
  "한결 수월해졌어 ..."
  허준이 애써 편안한 얼굴을 했다.
  발등의 상처에선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상처를 처맨 천으로 인해 신고 있던 목화를 당혜로 바꾸어 신었으나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면 하루쯤 행보를 삼가고 누워 안정하라고 권할 상처였다.
  "잠시 얘기가 있소."
  이명원이 문득 그 말을 하고 앞장서 뜰 저쪽 연못가로 향했다.
  쩔룩, 하고 발을 끌며 따라서는 허준을 나타난 미사가 부축할 듯이 급히 다가왔으나 허준은 그 미사를 무시한 채 이명원을 따라 연못가에 섰다.
  "궁중에는 희언이 없다, 공빈이 한 그 말 무슨 말인지 생각해보았소?"
  "..."
  안다. 궁중에는 희언이 없다. 서슬 푸른 대궐의 권위와 법도를 내세운 공빈의 그 한마디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결코 무사하지 아니하리란 막중한 다짐을 담은 한마디일 것이다.
  "병을 낫우면 다행이려니와 못 낫우었을 경우의 결과를 왜 생각지 못했단 말이오. 사흘 안에 병자를 낫울 수 있소?"
  새벽을 맞은 새떼들이 연못가 나뭇가지 사이로 연못 속에 고기떼도 잠을  소란하게 지저귀었다. 연못 속에 고기떼도 잠을 깬 듯했다. 이슬 머금은 연꽃 사이로 크고 작은 파문이 일었다.
  "허봉사도 더러 생각을 하리라 보오만 난 우리가 내의원 의원인 이상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보오."
  "누구요?"
  "하나는 우리 개개인의 재주를 파악하고 그 개개인의 앞날을 펼쳐갈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꽂아줄 인사의 권한을 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고관대작들과의 원만한 교류요."
  "고관대작들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소?"
  "있소. 오히려 그게 더 중요할 때가 많소. 우리 내의원 의원이 여타 관원처럼 한품 한품 세월 따라 승진하는 것도 아니요, 그때 그때 왕실의 중요한 병자를 낫우어내어서야 왕지에 의거 승진의 기회를 잡는데, 세속의 그 출세란 관품이 종5품 판관에 이르러야겠지. 하나 그 종5품을 받아낼 제는 반드시 조정의 승인이 있어야 가능한테 그때 힘써 줄 사람들은 조정의 유력자들이오."
  "출세라 ..."
  "그러기에 그 앞날을 위하여 내의원 의원이 되면 고관대작이나 요로의 유력자들에게 철따라 보약을 싸보내고 사비 들여 귀한 약재를 구하며 상납하는 무리가 한둘이 아닌 터, 처음 듣소?"
  "그 말도 듣지 못한 바 아니나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얘기요."
  "부정할 일이 아니오. 허의원은 인생의 기회를 너무 빨리 잡은 걸세."
  "그건 또 무슨 소리지요?"
  "취재에 첫등을 해 혜민서에 밀려날 전 불운인가 여겼더니 다시 거기서 이름을 드날려 게다 청을 넣은 바도 없는 터에 정판관 같은 이가 발벗고 나서서 궐내입진의 기회를 마련해 ... 그리고 맡은 병자가 공빈마마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곧 하늘의 별을 딴 것보다 더한 행운을 잡은 거요."
  "하늘의 별?"
  "감히 남이 들으라 발설하진 아니해도 정통 왕자 아니 계신 왕실에서 공빈만이 왕자를 생산했소. 그것도 두 사람이나. 그건 무얼 말하오? 공빈이 낳은 임해 광해 두 분 왕자 중 누군가가 장차 이 나라의 보위를 잇게 된다는 것쯤 불을 보듯한 짐작이지."
  "헌데?"
  "그렇다면 생각해 보오. 지금 허봉사가 맡은 저 병자는 미구에 임금의 외숙이 될 인물이오. 역대 부원군 가계의 외척처럼 막강한 권신들이 없다는 건 너나없이 아는 이야기."
  "거기까지 짐작이 가는 얘기거든 저 사람과 만나게 된 이 기회를 소중히 하라는 것이오.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결국 우리는 상대의 부름을 받고야 쓰임을 받는 한낱 의원이오. 우리를 기억해주고 밀어주는 이가 없이는 결코 마음대로 클 수 없다는 세상의 얽히고설키는 이치를 일깨워 주고 싶은 게요."
  "이의원."
  "내 말 마저 들으오."
  "말뜻을 아오만."
  "그댄 말뜻을 다 모르고 있소. 난 그게 안타깝소. 왜 하늘이 준 이 기회를 소홀히 하는가 하고 ... 그자의 인간 같지 않은 구석이나 잔혹한 행위도 보았소. 그러나 그런 자도 이용할 줄 아는 것이 긴 세상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는지. 난 그 말을 하고 싶소."
  "이용이라."
  "맞소, 이용이오. 사귀어두어 손해될 게 없지 않소,"
  "이의원이 말하는 그 기회 소중한 거겠지. 허나."
  "허나?"
  "난 밀양 천황산에서 스승의 죽음 앞에서 맹세한 바가 있소."
  "밀양 천황산?"
  "난 병을 볼 뿐 병자의 신분을 보지 아니하고 그 병세를 구할 뿐 그 대가로 내 영예를 탐하지 아니하리라 ..."
  "허봉사!"
  "더구나 장차 지체가 높이 되리라는 사람을 미리 사귀어두고자 없는 말로 아첨을 떨 순 없소."
  "앞으로 사흘, 병자를 낫우어 보겠소. 더 이상 다른 생각 하고프지 않소."
  이명원이 한참 침울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무 높은 데다 목표를 두었소. 그 맹세를 다 지킨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지,"
  동녘에 한 점 붉은 구름이 떠 있었다. 그리고 꺼져가는 어둠속에서 삼태성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미사가 조용히 다가와 서는 것이 보였다. 병자가 다시 약을 먹을 시각이었다.
  간밤의 허준과 김병조의 승강이가 내의원에 전해지가 내의원은 아침부터 수군거렸다.
  이명원을 수행했던 도약사령이 약탕관이 깨지고 바둑판이 날아간 간밤의 허준과 김병조의 대결을 미사로부터 듣곤 자신의 상상력까지 동원하여 떠벌여놓은 것이다. 들은 자들은 신났다.
  애초 어의가 맡은 병자를 허준이 중간에서 가로맡은 사실부터가 흥미진진했는데 감히 공빈 처소에서 공빈의 동생과 한판 붙은 허준이 우선 통쾌한 것이다.
  말은 퍼져서 허준의 약탕관이 먼저 날아갔기에 바둑판이 날아왔다느니 우직한 허준이 굳이 약을 먹이려다가 바둑판이 날아오자 마주 대항해 약탕관을 던졌느니 멋대로들 사태를 상상해 떠들었다. 등청한 양예수에게도 김응택을 통해 소문이 전해졌다.
  양예수는 서둘지 않았다. 소문의 발원지가 도약사령인 걸 알자 도약사령을 불러들였고 다시 내국의 이명원을 불러들였다.
  불러는 들였되 김응택이 대신 질문했고 양예수는 질문하지 않은 채 냉랭했다.
  들을 말은 별로 없었다. 몇 마디 듣고서도 사태가 눈에 선했다. 지켜보는 양예수의 눈 속에는 딴 생각이 오락거렸다.
  이번 일에 허준과 자기가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됐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 그가 자신의 시선이 안 닿는 곳에서 허준을 도와 밤을 새웠다는 사실이 자꾸 목구멍을 치받았다. 그러나 양예수는 허준의 문제에 끼워 그의 직처 무단이탈을 추궁하도록 단순하지 않았다.
  '이자뿐이 아니리라.'
  굳이 변명 않고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물러나가는 이명원을 보며 이번 일을 통해 내의원의 돌아가는 공기며 확실하게 자기에게 적의와 불복을 내비춘 면면들을 속으로 짚어내고 있었다.
  '미구에 다시 한번 솎아내야 하리라.'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어.'
  노회한 양예수는 그렇게도 생각했다.
  양예수의 입가엔 승리자의 웃음도 번지고 있었다. 허준이 위병까지 포함하여 사흘 안에 고친다 했다면 그건 그 자신이 제가 놓은 덫에 스스로 발목을 잡힌 것이나 다름없다.
  김병조의 위의 증세는 자기도 짚어낸 터이다. 그건 반위의 초기 증세에 해당했다.
  처음 문진 때 김병조는 말했었다. 평소 자주 배앓이를 느끼며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뱃속이 부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잦고 또 식후나 공복시에 갑자기 찌르듯한 통증과 토기 등은 반위의 병증의 하나 일터이다.
  또 입속에서 맡아지던 구취는 분명 장차 '반하사심탕' 정도를 장복하고서야 다스려질 심상찮은 병이었다.
  그러나 우선은 구안와사였고 길게 봐야 할 병세를 미리 꺼낼 필요 없어 그 증세는 뒤로 미루어둔 바인데 용케 허준이가 병자의 그 신체적 이상을 짚어낸 듯했다.
  '그걸 알아낸 건 예민한 노릇이나 사흘!'
  양예수가 고개를 저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 편작이 살아와도 어림도 없는 소리고 말고.
  양예수의 입가에 웃음이 또 번졌다. 정말 전화위복이다. 이제 사흘 안에 병자를 낫우겠다 맹세했다는 허준을 걸어 그를 천거한 정작 그리고 경망되이 허준을 진숙궁으로 들이기를 용허한 혜민서 제조와 내의원도 제조 등 그 고까운 문신들에게 공빈 면전에서 큰 무안을 안겨줄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암, 궁중에는 희언이 없는 법이고말고!'
  자신이 오랜 주부의 직품에서 판관으로 승차하던 때인 명종19년 대왕대비전의 사랑을 받았던 의녀 애엽이가 종친 이귀와 문란한 행위를 즐기다가 발각되자 이귀가 급병을 대어 약을 지어달라기에 구완했을 뿐 문란한 행위는 없었다고 자기가 지어주었다는 약방문을 대어 변명했다. 종친과의 소문이요 애엽이도 구해주려고 대왕 대비가, 그럼 그 결백의 증거로 네가 써준 그 약방문을 여기서 써보면 용서하마 했다.
  그러나 다급한 김에 들은 풍월로 약방문을 둘러댔을 뿐 애엽은 약방문 속에 포함될 약재의 이름까지는 대지 못했다.
  이에 궁중에는 희언이 없는 법이라며 의녀 애엽은 붓을 든 그 손목을 잘리어 궁밖으로 내쫓김을 받았다.
  이후 윗전에 실언하는 내의원 의원에게는 손목을 자른다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 내려오는 터이다.
  '애석한 일이되 궁중에 희언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 내의원 기강을 세울 기회가 되리로다.'
  양예수는 사흘 후에 허준에게 닥칠 운명을 생각하며 소리없이 또 한번 웃었다.

    17
  전날 밤 이명원이의 돌연한 내방에서 허준이 진숙궁에서 처해 있는 상황을 전해들은 정작이 내의원 정청에 나타난 것은 관리들의 등청 시각인 진시 정각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이명원과 이공기가 그 정작에게 새벽까지 있었던 허준의 '사건'을 얘기하고 지금 내의원의 분위기도 낱낱이 전했다.
  "그래 허준의 소식을 들은 어의의 태도는 어떠하던가?"
  "묵묵하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는 듯하더이다."
  "웃다니?"
  "허봉사가 적시해낸 반위의 증이 정말 바로 본 것이라면 그걸 사흘 기한하여 고쳐내리란 것은 애당초 허욕올시다. 그러니 이번 일로 자신의 명예가 깎였다 생각하는 어의로선 차제에 허봉사를 위시, 그를 천거한 모든 이를 되잡아 족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여기고 있지 않겠습니까?"
  "병증이 반위라 하던가?"
  이번엔 이명원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이공기가 대답했다.
  "분명 허봉사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합니다. 반위의 초기 증세라고."
  "약은 무슨 약을 쓴다던가?"
  이명원이 소매 속에서 쪽지를 내밀었다.
  "반하사심탕?"
  "그 한 가지만이 아니고 날이 밝아오는 시각에 따라 약재를 조금씩 바꾸는데 뒷장을 보시지 또."
  정작이 뒷장의 잡다한 약재를 훑어보았다.
  "알 수 없는 노릇이군."
  정작이 뇌었고 두 사람도 침묵했다.
  위는 말할 것도 없이 인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을 받아들이고 삭여내는 기관이다. 그 위가 온전하지 아니하고는 여타 어떤 기능도 원활할 수가 없다. 하나 그것을 알고는 있되 수혈의 지식을 지니지 못한 의원들은 병자의 몸에 병증을 감지하면서도 해부라는 직접적인 방법을 시도할 염을 못낸 채 투약만으로 대처하며 반위라는 증세를 관망해왔다.
  관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반위라 이름붙인 그 위병은 산해진미다 보약이다 안정이다 여러 방법에도 불구하고 점차 토악질이 심해지다가 위의 부위에 딴딴한 굳은 혹이 만져지면서 마침내는 목숨을 떨구는 괴병으로 치부해왔고, 여러 의원들은 또 그 괴병을 지닌 병자가 나타나면 이것이 그 반위라는 것이구나 알면서도 자신이 병을 못 낫운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기피하여 가벼운 속병인 양 쉬운 변명을 달아 소화약 따위 투여하는 것으로 시치미를 떼어왔다.
  그건 항간의 이름없는 의원들만의 행실이 아니다.
  내좌원 의원이라 할지라도 맡은 병자가 죽거나 자신이 병을 못 낫운다는 것은 명예에 치명적인 것이 되므로 괴병을 지닌 병자가 찾아들면 자기의 전문이 아닌 쪽 병명을 침소봉대하여 딴 의원을 찾아가게 만들거나 겉으로 보이는 작은 증상만으로 가볍게 처리, 모면할 길부터 찾는다. 한데 허준이 병자조차 부인하는 그 병증을 끄집어내어 목숨 걸어 사흘 안에 낫우겠다 어리석은 언약을 한 것이다.
  "어쩌면 좋으리까?"
  이공기가 안타까이 물었으나 정작은 냉랭했다.
  "믿어야지. 다른 방법 없잖은가."
  "일차 저도 허봉사를 믿고자 하옵니다. 만 ...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공빈마마와의 약조에 유예를 얻어낼 수 있도록 미리 그 병의 어려움을 설득해두는 것이 허봉사를 구할 방법이 아니올지."
  "설득을 한다 ... 누구에게? 궁중에는 화언이 없다, 먼저 다짐을 꺼낸 공빈에게? 아니면 어의에게?"
  정작이 고개를 저었다.
  "천거한 사람은 나로세. 허봉사가 공빈에게 다짐한 것 못지 않게 나 또한 이번 일 실패할 경우 도제조의 질책을 면할 길 없겠지. 물론 난 그 질책이 두려운 게 아니라 내가 믿었던 사람을 끝까지 믿고 진퇴를 함께 한다 스스로 다짐하고 있어. 사흘 기다려 보세. 내 심정은 그뿐."
  아직 이파리에 아침이슬이 매달린 시각인데도 기승을 부리듯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세상은 가뭄으로 메말라 있는데 비구름 한조각 떠 있지 않고 오늘도 불볕더위가 대궐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타난 정작이 도제조를 찾아간 일과 살피고 온 진숙궁의 동정까지를 김응택이 아뢰자 삼의사의 약재 출납 장부들을 검사하는 양예수는 허준이 일으킨 소동쯤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뿐올시다."
  쉬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어의의 냉담한 눈빛 아래 김응택이 오히려 당황했다.
  "그 아이가 내국에서 가져간 약재의 내용은 보았던가?"
  "예, 적어왔습니다."
  김응택이 이명원에게서 필사해온 약방문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제 눈에는 도시 종잡을 수 없는 내용올시다만."
  김응택이 자신도 잔뜩 궁금한 눈인 채 약방문을 양예수의 앞에 놓아드리고 손을 오므렸다.
  양예수의 눈은 여전히 출납 장부에 쏠려 천천히 한 장을 넘겼을 뿐 조용했다.
  "반하사심탕이 어떻게 쓰이옵니까? 반위에도 과연 효험을 보옵니까?"
  "세상에 약방문이 없어 병을 못 고치는 법이 있던가? 반하사심탕을 쓰기에는 병자의 체질이 달라."
  "체질이 다르다 하오시면?"
  "가 일 보게."
  김응택이 일어나 조신한 태도로 허리 굽혀 보이고 뒷걸음으로 방을 나서 툇돌 아래로 사라지는 것이 발 너머로 보였다.
  그제야 양예수는 김응택이 가져온 허준의 약방문을 집어들었다.
  "어리석은 놈."
  양예수가 싸늘하게 혼자 웃었다.
  "이것이 출세의 기호인 양 여겨 반위가 어떤 병인 줄 알고 있는 말 없는 말로 다짐을 놓고 달겨들다니!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판다더니 ..."
  양예수의 손끝에 들려 있던 허준의 약방문이 구겨져서 서탁 아래 타구가에 던져졌다.
  그 시각 진숙궁의 허준은 약조대로 김병조에게 시각과 일조량을 가늠해 약을 먹인 후 김병조를 돗자리 위에 엎어놓고 있었다.
  이어 허준은 옷을 벗은 병자의 지회, 백회, 곡회, 곡지, 풍현, 풍지 등에 쌀알만한 쑥뭉치를 붙이고 향봉으로 불을 당겼다. 순식간에 각 부위의 쑥들이 불꽃을 반짝이며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방안에 쑥 타는 냄새가 충만해지자 김령조가 소리쳤다.
  "대관절 몇 군데에나 불을 붙였는지 말해라."
  "계속 쑥을 뭉치거라."
  허준이 일변 다시 쑥알갱이를 병자의 목 부위에 붙이며 미사에게 일렀다.
  "뭉치고 있사옵니다."
  "햇솜 준비됐느냐."
  "준비돼 있사옵니다."
  미사가 재빨리 움직였다.
  "박하정을 가까이."
  "박하정 가까이 놓았습니다."
  "뜨겁지 않도록 미지근하게."
  "뜨겁지 않도록 미지근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점점 뜨거워지고 있지 않으냐."
  김병조가 방바닥에 소리 쳤다.
  "편안히 사지를 푸십시오. 옛날 천렵놀이 가서 즐거웠을 적 생각이나 하며."
  "누굴 놀리느냐!"
  "움직이지 마소서."
  "이자가!"
  "끝내 움직이려 들면 사람을 불러 껴누르오리다."
  "뜨거워 뜨거워!"
  허준이 뒤채려는 병자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뜸이란 불꽃이 살속에 파고들어서 꺼져야 약효가 있는 것이오."
  "뜨 뜨 뜨거워."
  다음 순간 튕겨나는 김병조의 허리를 허준의 무릎뼈가 찍어누르며 올라타듯한 모습으로 허준의 완강한 두 손이 병자의 어깨를 찍어눌렀다.
  "이자가 ... 네 이놈! 잇잇!"
  "잡아라!"
  허준의 고함에 미사도 병자의 허우적이는 두 손을 잡았다.
  "네 이년!"
  껴눌린 어깨와 허리에 김병조가 악을 쓰고 욕을 퍼부었으나 미사도 목숨을 다짐해 나선 허준의 일조가 되고자 필사적이었다.
  방바닥에 턱이 찍어눌린 채 김병조가 발버둥질쳤다.
  "이 연놈들이 ... 누님 ... 누니임 ..."
  그러나 남정네가 웃옷을 벗으면서 물러나 있던 공빈 처소의 상궁들이 달려와 병자를 올라탄 허준의 야차와 같은 모습에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지 차마 뛰어들지 못했다.
  "누님을 부르오. 이 연놈들이 날 죽이려 들고 있어! ... 놓아라놓아. 내 살이 타! 으으으 ..."
  상궁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복도를 달려나갔고 병자에게 맞받아 고함친 건 허준이었다.
  "뜸이란 한 장 두 장이라 세오. 그 장자가 무슨 장잔지 아시오! 씩씩할 장자올시다!"
  "온몸이 타고 있지 않으냐, 이놈!"
  "왜 씩씩할 장자로 세는지 아시오? 뜸 한 장 뜨는 것이 장정 한 사람의 힘만이나 세다고 해서 씩씩할 장자로 세오!"
  "뜨거 워 ... 뜨 ... 뜨거 워."
  "당신 몸에 숨은 병을 내몰기 위해 장정 스무 명이 힘을 쓴다고 생각하오."
  "머리 놓아라, 네 이년!"
  "꽉 잡아!"
  허준이 또 소리쳤다.
  "병자를 어찌 이토록 무지막지 다룰 수 있소!"
  방 밖 덜덜 떨고 있던 상궁이 마침내 소리쳤고,
  "병자 아닌 사람은 말시키지 마오 ..."
  허준도 마주 소리쳤을 때였다.
  "그건 의관 말이 옳다."
  소스라친 허준이 한손으로 병자의 어깨를 누른 채 허리를 들자 그 방문 밖에는 공빈과 함깨 선조가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그 임금이 이어 말했다.
  "의관은 하던 일을 계속하라."

    18
  이날 임어한 임금 선조와 공빈의 주시 속에서 허준은 시술을 끝냈다.
  "의관의 시술이 용이하도록 도우오." 임금의 그 한마디 옥음에 수행했던 대전별감과 내시들이 사지를 잡고 늘어졌다. 이를 악물고 뜸의 뜨거움을 견뎌내던 김병조도 마침내 까무러쳐 버렸고 허준은 계속 자기가 원하는 병자의 혈 위에 뜸을 떴다.
  쑥과 동생의 살타는 냄새에 차마 정시하지 못한 공빈이 상궁들의 부액을 받아 물러간 후에도 선조는 계속 그 자리에서 허준의 시술을 지켜봤다.
  그리고 허준에게 사사로운 관심을 담은 몇 마디를 물어왔다.
  "과인이 듣기 침과 뜸을 동시에 행하지 아니한다 들은 듯한데 반드시 그런 건 아닌가? "
  "반드시 그러한 건 아니올시다."
  "소상하게 듣고 싶네."
  "침에는 물론 보와 사가 있어 병자의. 몸을 보할 수도 있고 사하는 기능도 있사오니 침 그것 자체가 사람의 몸을 공격하는 충격을 지녔사옵고 뜸 또한 그 공격하는 힘이 독하여 병자가 두 고통을 함께 치러낼 수 없다고 보아 두 가지를 함께 쓰는 것을 삼가라는 경구이옵니다."
  "사태에 따라서는 병행할 수도 있다?"
  "그러하옵니다. 병자의 체력이나 마음이 창일할 때와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된다 판단되는 위급할 때는 반드시 옛말에만 구애될 수 없사옵고."
  "그럼 의관이 보는 바는 지금 이 병자가 위급한 경우로 치부한 겐가? 병자의 반발을 한사코 억누르고 시술하는 양을 본 듯한데 ...?"
  "외양으로 나타난 병증은 아니오나 병자가 지닌 오랜 지병을 몰아내기 위해선 시기를 놓칠 수 없다 보았습니다."
  "병자의 오랜 지병?"
  허준이 반위에 대해 설명하자 선조의 눈이 놀라운 듯이 허준을 지켜보았다.
  "반위란 병이 예사 난치병이 아니란 말은 들은 듯한데 의관은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니 전에도 같은 병을 다룬 바가 있던가?"
  "오래 전 소인의 스승이었던 유의태가 다루는 것을 본 바가 있사옵니다."
  선조가 유의태의 존재를 묻지 않고 결과에 관심해왔다.
  "그때 병자가 나았던가?"
  "실패했습니다."
  "하오나 첫번째 병자는 이미 기력을 많이 소모한 중증의 병자였사옵고 또 일이 실패한 후 스승이 한가지 미처 행하지 못한 실수를 탄식한 바가 있사온데 이후 수소문 끝에 같은 반위병자를 찾아 그 두번째 병자는 낫우었습니다."
  "어디의 누구인가 그 의원은?"
  "영남 산음인이옵는데 성명은 유의태이옵고 기묘년에 타계 했사옵니다."
  "반위를 낫울 만큼의 명의라면 그가 백성들에게 끼친 공이 적지 아니할 터인데 그는 무슨 병으로 낙명하였는가?"
  "그의 병명도 반위였사옵니다."
  "?"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 또한 반위임을 알면서도 구명도생에 급급하지 않고 반위에 잠식당한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병증의 변화를 시시각각 극명하게 기록하고 스스로는 자진했사옵니다."
  "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실험하며 병의 발전과정을 알고 그 기록을 후대에 남기고자 한 것이 그의 유언이었사옵니다."
  "그럼 의관에게는 이번 일이 스승이 남긴 기록에 의거, 유지를 실천하는 첫 행사가 되는 것인가?"
  허준은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눈이 벌겋게 젖고 있었고 입이 열리지 않았다.
  밀양 천황산의 그날 그 빙곡에서의 거센 바람소리가 계속 허준의 귓속에 울리고 있었다.
  임금과 누이가 물러간 방안에서 정신이 깬 김병조의 성깔은 가라앉지 않았다.
  쑥불이 꺼지고 미사가 박하당으로 아직도 욱신거리는 상처를 달래곤 있으나 두 개의 거울로 비춰본 등은 십여 군데의 불구멍 흔적이 흉하게 나 있었고 온몸에 오한이 느껴지도록 열이 끓고 있었다.
  게다 그 고생을 치르게 하고도 돌아간 입의 헝태는 제대로 잡히긴커녕 더욱 돌아간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틀 후에 온전한 얼굴이 돌아오란 보장은 어느 한구석에도 비쳐 있지 않았다.
  김병조는 다시 뜸뜰 준비를 하는 방 밖 태연한 얼굴의 허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앞으로 이틀.'
  그 이틀만 지나면 자기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태연한 저자의 뜸뜨던 손모가지를 부러뜨릴 생각이었다.
  '저놈뿐 아니라 저년도!'
  무지렁이 병자들의 피고름이나 짜서 먹고 사는 천한 연놈들이 등판을 깔고 앉아 뭉갠 짓거리며 뒤통수를 눌러 옴쭉달싹 못하게 힘을 쓰던 그 의녀년의 행위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또 한번 어금니를 앙다무는 김병조에게 점심상을 대령한 상궁이 나타나자 노려보는 김병조의 눈쯤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허준이 다가와 상궁에게 밥상보를 벗길 것을 말없이 명령했다.
  사흘 기한을 두는 대신 병자가 먹는 일체의 음식은 허준이 지정하는 것외 들이지 않기로 한 것이 약속이었다.
  허준의 눈길에서 통과된 밥상은 고기기름 한 방울 떠 있지 않은 두부국에 백합 두어 개가 건져질 뿐이고 나머지는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은 나물반찬에 밥 한 공기뿐이었다.
  소리지르며 밥상째 들어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견딘 후 김병조는 더이상 밥상을 돌아보지 않았다.
  '불에 볶아먹을 기세더니 이젠 굶겨 죽이려들어?'
  시장기를 위해선 두부국이라도 마시고 싶었으나 김병조는 참았다. 허준에 대한 증오를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였다.

  들어오라는 목소리 대신 기침소리가 나자 김응택이 어의의 방에 들어섰다.
  들어오는 김응택에게 입을 열진 않았다. 그는 하룻밤 사이 부쩍 말수가 적어져 있었다.
  김응택이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진숙궁에 다녀왔습니다."
  "왜?"
  양예수가 제 위엄을 내세워 애써 무관심한 듯이 반문했다.
  "아침 나절 상감께서 납셨다 들었기로."
  "진숙국에 전하께서 납시는 거야 항용 있는 일인데."
  "그렇긴 하오나 상감께오서 허준이 시술하는 방에 들렀다 들리기로 ..."
  "누가 그러던가?"
  양예수가 묻고 싶지 않은 말을 물었다.
  "여의치 않은 모양올시다. 수 차례 뜸을 사용한 후 해질녘부턴 침을 쓰는데 침이 꽂혀 있으면 입이 돌아오지만 침을 뽑으면 곧 또 입이 돌아간다 하옵니다."
  "꽤 낫우었군."
  칭찬이 아니라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김응택이 놀라는 척했다.
  "침을 뽑으면 다시 돌아간다 하니 그건 촌치도 나은 증거가 아니지 않습니까."
  "큰소리쳤으니 낫우어놓겠지."
  "어의께서도 그렇게 보시옵는지?"
  "애초 난 그 아이한테 관심 없네. 유의 정작도 이번 일에 한몫 끼었으니 저희들에게도 복안이 있다 여길 뿐 ..."
  "정판관도 섣불리 허준을 천거는 해놓고 뒤가 타는지 종일 나타난 적도 없다 하옵니다. 하와!"
  "하와라니?"
  "지금 내의원 상하가 그 두 사람에 대한 의문으로 들끓고 있사옵니다."
  "들끓고 있다니?"
  그런 일은 없다. 그건 양예수의 불편한 심기를 헤아린 김응택이 만든 말이었다.
  "내의원의 상하가 들끓다니 누구누구의 동정이 그러하단 말인가?"
  "딱히 누구누구라기보다 소인부터도 그러합니다. 도시 있을 법이나 한일이오니까? 사람을 천거한다는 일만 해도 꼭 그럴 일이 있으면 미리 어의께 품하여 결정할 것이옵지 도제조와 상통한다 하여 일 꾸미고 나서 어의께 알린 일도 괘씸하옵고 또 설사 그런 지명이 왔다 해도 허준이 그 사실을 어의께 아뢴 후 병자를 맡는 것이옵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진숙궁에 달려간 일하며 너나없이 허준 그자가 용납이 안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습니다."
  "..."
  "게다 굳이 어의께서 적발하지 아니하신 위병까지 있다 없다 거론하고 주위의 이목을 끌려 하니 병자를 낫우고 못 낫우는 일 이전에 내의원의 위계와 명령을 문란케 하며 그 기강에 일대 반기를 든 행위올시다."
  우쭐하는 김응택의 말을 양예수가 막고 웃어보였다.
  "물론 자네의 말이 정론일세. 허나 굳이 말하자면 병자가 왕실 사람도 아니요 공빈이 사사로이 지명한 걸로 돼 있으니 소란히 굴 것 없어."
  "하오면 저대로 허준을 용서하오니까!"
  "굳이 내가 용서해주지 아니해도 제가 웃분들께 다짐을 둔 일이 있으니 추궁이 있겠지. 물론 나도 차제에 내의원의 해이해진 기강도 바로잡을 겸 묵과하지 아니할 작정이고 ... 이틀 기다리면 자명해질 일, 소란히 굴 것 없네."
  양예수의 그 어조는 딴때없이 단호했다.
  이틀 기다리면 자명해질 일이라는 양예수의 말에 자기가 어의라는 의발을 이어받기에는 너무도 큰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허준을 이미 멀찌감치 밀어내기나 한 듯이 김응택은 마음이 푸근했다.
  임금이 관심하는 병자가 수시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기회가 허준에게 유리하게 진행된다면 자기의 출세에도 절대적으로 지장이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틀!'
  김응택은 속으로 뇌었고 과연 허준이 공빈과 '사흘째'가 왔다.

    19
  약속한 사흘째.
  허준이 공빈과 생살여탈권을 걸고 병자의 구안와사와 반위를 낫우어 놓겠다 한 그날 ...
  연 나흘 낫 사흘 밤을 꼬박 허준의 곁에서 그의 시술을 도우며 가슴을 옥죄고 있던 미사는 절망했다. 낫는 낌새가 없는 것이다. 낫기는커녕 나아가는 조짐조차 병자의 안색이나 거동 속에서 찾아낼 수 없었다.
  뜸을 놓은 열두 군데 혈이 짓무르고 부어오른 채고 부위마다 박하탕으로 식히곤 있으나 돌아간 입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침이 꽂히면 바로 돌아오던 입도 새벽녘부턴 꽂으나 뽑으나 돌아간 채였다.
  또 하나 불길한 현상은 사흘째인 이 새벽부터 병자의 전신이 불덩어리처럼 열을 뿜고 그건 가위 살인적이라 할 바깥 더위 때문이 아닌 제대로 아물지 않는 뜸의 부작용 같았다.
  김병조는 더위와 뜸뜬 상처의 욱신거림, 그 모든 고통을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허준에게 향한 눈빛이 전점 살기를 띠어갔다.
  "허봉사님 ..."
  미사가 김병조가 소피를 보러 가느라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안타까운 얼굴로 허준에게 말했다.
  "반위란 낫는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오니 그 처치는 뒤로 미루더라도 구안와사부터 확실하게 고쳐지는 처치를 취하심이 어떠하오니까?"
  "가서 한숨 눈붙이고 돌아오너라."
  "제 고통을 아뢰는 것이 아니오라 먼저 구안와사만 바로잡는다면 허봉사님의 처치가 정당한 것이라 신임이 될 것이옵고 그 한 가지를 해결한 뒤엔 반위를 완치한다는 약속을 다만 며칠이라도 말미를 얻을 구실이 되지 아니하오리까."
  "내가 아는 대로 시술할 뿐. 그러고도 낫지 아니한다면 아직 내가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모자란 증거일 것이다."
  미사가 소리쳤다. 당돌한 목소리였고 그 눈빛이 필사적이었다.
  "의원이라 하여 세상 모든 병을 어찌 다 고칠 것을 기필하오니까!"
  "세상 모든 병을 다 고친다고 한 적 없다. 내가 아는 병이기에 고쳐낸다 했을 뿐."
  "소녀가 듣기 의원이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난치의 병이 반위라 들었사옵고."
  "세상 떠도는 말이야 여하하건 내가 가장 자신있게 그 내용을 아는 병은 반위란 병이요, 반드시 고쳐내리라 맹세한 병인즉."
  "하오나 병자나 공빈마마와 주고받은 날짜가 이미 찼사오니 우선 입돌아간 것만이라도 바로잡아 신임을 회복한 연후에 ..."
  허준은 미사의 말을 더 듣고 있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미사의 눈이 젖어가는 것을 보았는지 자기 말을 이었다.
  "반위를 일명 바위 암자 암병이라고도 한다. 그건 몸속에 든 바위를 으깨는 만치 어려운 병이란 뜻인데 그러나 병이 있으면 반드시 낫울 방법도 있다 여기는 것이 내 심지인즉 아직 남아 있는 시각을 믿어볼뿐."
  김병조와 밖에서 만난 듯 문병 온 이이첨이 들어왔다. 자리에 좌정하자 이이첨이 입을 열었다.
  "뜸뜬 것은 너의 고집인데 뜸뜬 자국마다 화농하는 것은 미리 예상했던 것인가?"
  "화농은 병이 아니외다."
  "뭐라?"
  "병자는 머리를 동으로 하여 누우시오."
  지시받은 김병조가 조소했다.
  "이자가 이젠 무당의 흉내내어 피방까지 시키는군,"
  "시키는 대로 하오!"
  "암 하다마다. 허나 바로 오늘이 네가 장담한 사흘째라는 것을 잡아떼진 못하리."
  "알고 있소."
  "눕게."
  이이첨이 허준을 조소하며 김병조에게 권했다.
  김병조가 눕자 이이첨이 이죽거렸다.
  "됐구먼. 이자가 이토록 큰소리치니 해 떨어지기까지 더 믿어보는 수 밖에!"
  "난 믿지 않아!"
  김병조가 허준과 미사를 한꺼번에 노려보며 말했다.
  "단지 구안와사일 땐 입은 돌아가도 몸 하난 편했거늘 이자가 있는 병 없는 병 끌어대어 내 온몸에 불구멍을 내놓고 조석으로 혈변을 쏟게 하니 오히려 생병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세."
  "그건 혈변이 아니라 자라고 있는 반위의 종양을 삭여내는 증좌외다."
  김병조가 이를 악물었다.
  "기다리고 말고. 나흘 낮 사흘 밤을 기다렸는데 마지막 두세 시각 못기다릴 리 없지."
  허준이 몸을 일으켰다.
  방문 밖에 공빈이 시위상궁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예를 표시하는 허준과 미사에게 공빈은 냉랭했다. 약속이 사흘이거든 이틀 전이나 하루전이면 그만치 눈에 띄는 차도가 있어야 함에도 차도가 보이지 않으니 공빈 또한 허준에 대한 불신이 단단히 자라 있는 듯했다.
  노상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병자가 어제 저녁부터 속을 비우고 있어 화채 대령했소만 이는 먹어도 되오니까."
  허준은 알아들었다.
  사흘 약조를 할 때 허준이 내세운 약속, 병자가 접하는 일체의 음식을 자기가 용인하는 것에 한한다는 자신의 조건을 공빈이 일깨우고 있다는 것을.
  꿀을 탄 오미자 국에 과일을 썰어넣고 잣과 얼음이 띄워진 그 화채 그릇을 들고 비뚤어진 입에 반이나 흘리며 떠마시던 김병조가 갑자기 공빈께 호소하듯이 말했다.
  "입안도 뱃속도 온몸이 불덩어리올시다. 물을 마시려 들어도 물이 모래알 같아서 목구멍으로 넘아가질 않습니다."
  "그 고통도 오늘로 끝나지 않겠느냐. 의원이 그토록 다짐한 날짜가 바로 오늘이요, 유시까지인즉슨?"
  공빈이 그 이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언중유골의 말을 내뱉었다.
  여름날 긴긴 해가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해가 졌네."
  미처 안 진 석양을 보며 이이첨이 흥미진진한 얼굴이 되어 김병조에게 말했다.
  "아직 반 시각쯤 남았다고 하겠지."
  김병조가 뇌까렸을 때였다. 도제조 노수신과 혜민서 제조 정종영 그리고 정작이 나타났다.
  예를 표하는 허준에게는 시선도 줌이 없이 세 사람의 눈이 곧장 김병조에게 날아갔다.
  순간 허준에게 분기를 드러낸 건 노수신이었다.
  "경과가 대체 어찌 돼가고 있기 여직 병자의 안형이 저 모양인가!"
  미사가 얼른 말했다.
  "허봉사가 연사흘 낮밤을 꼬박 뜬눈으로 병자의 수발을 들고 있사옵고 ..."
  "병자 수발들 사람 없어 의원을 갈았더란 말인가!"
  "전하께서도 유념하시는 병자요, 그토록 호언장담하고도 여직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미상불 일은 컸네! 소란만 떨었지 한치도 병자가 차도가 있는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정작이 말했다.
  "만일 허봉사의 의술에 효험이 없다면 허봉사를 천거한 책임을 소직도 지고자 하옵니다."
  "낫우지 못하면 의당 책임이 아니 지워질까 자청인가! 의원부터 말하거라. 병은 낫고 있는 건가 아니 낫는 겐가!"
  "낫고 있다 여기옵니다."
  "낫고 있다? 이 모습이 낫고 있는 모습이더란 말인가."
  도제조가 조소 어린 김병조의 눈빛을 발견하고 물었다.
  "병자가 느끼기 감이 어떠한가. 이 사람이 맡은 후 종래의 고통이 많이 덜어졌다 여기는가?"
  "난 속았습니다."
  "속다니?"
  "병을 고치러 궁에 들어왔다가 이제야 제가 여기서 죽어나가는구나 여길 뿐올시다."
  김병조가 등을 돌려 흉하게 자국난 몸뚱이를 보였다. .
  "도제조께선 이 의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마소서. 그간 소인이 더러 토악질을 하고 먹은 걸 토하고 어지럼증을 겪은 적은 있으나 그것으로 인해 숨이 찬 적도 아파한 적도 없을뿐더러 연이틀 혈변까지 보는 이런 일은 애초부터 있질 않았습니다."
  "혈변? 피똥 말인가!"
  "이럴 수가 ..."
  도제조 정종영도 탄식했다.
  허준이 말했다.
  "몸을 째어 병자의 종양을 뜯어내지 못하니 그 종양을 삭여내리는 약을 쓰고 있사옵고 혈변은 곧 소인이 예기한 대로 병이 나아가고 있는 증자올시다."
  "병이 나아가고 있다는 증좌? 도대체 모를 소리! 혈변이란 가장 위급한 병자의 증좌가 아니고?"
  "아니옵니다."
  "그럼 왜 돌아간 입은 조금도 바로잡힌 모습이 아닌가?"
  "반위에 비하면 구안와사는 작은 병올시다."
  "무에라!"
  "낫는 경과가 생각보다 더디긴 하오나 소인의 보는 바대로는 병자는 두어 번 혈변이 더 계속된 후 그칠 것이옵고 수삼 일의 어지럼증을 겪고나면 회복된다 보옵니다."
  "그대가 호언장담한 날이 오늘 아닌가?"
  "병의 뿌리는 이미 빠지고 있다 보옵고 남은 일은 안정과 회복이라 그건 소인이 수발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 아뢰는 것올시다."
  "긴 말 필요없으니 시술기 보이게!"
  "시술기는 아직 정리해 적지 못했사옵고 병자에게 사용하고자 약재를 타낸 약방문은 내국에 내놓았습니다."
  "정판관이가 그 약방문을 가져오게."
  노수신의 어조에 쩡! 하고 노기가 묻어났다.
  초조히 오락거리던 양예수의 발이 멎었다.
  시각을 알리는 바라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유시다!'
  양예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틀림없는 유시를 알리는 바라 소리가 바앙 ... 바앙 ... 한껏 평화롭게 울려오고 있었다.

    20
  허준이 공빈과 주고받은 유시 그 약속의 시간을 대어 오느라 혜민서 근무를 반 시각 앞당겨 끝내고 궐내로 달려오던 이공기가 급히 걸음을 세웠다.
  내의원 쪽 아름드리 적송 숲속 돌계단을 자기와 같은 내의원 복장의 사내가 구를 듯이 달려내려소고 있었다. 이명원이었다.
  "허봉사가 장담한 시각이 지났네."
  이명원이 달려온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소리쳤다.
  시각을 알리는 소리야 왜 자기만 들었으랴. 대궐안, 아니 대궐 높은 담 너머까지 그 시각은 거침없이 울려퍼져 나갔었다.
  "만일 제때 제 시각에 병자의 차도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여 혹여 정판관이 사전 공빈마마께 양해의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는가?"
  "그런 말 듣지 못했네. 그런 말을 정판관 그분이 미리 꺼낼 사람도 아니고."
  "병자에게 차도가 있다 없다 그 얘기는?"
  "유시에 반 시각쯤 전 도약사령을 시켜 병자의 차도를 수소문해 오라 했더니."
  "그랬더니?"
  "이번 일 아무래도 허봉사가 오진한 듯하이."
  "오진?"
  "장담이 컸으니 이제 와 병을 잘 짚었다 못 짚었다 이언할 수 없잖은가."
  "그건 아네. 헌데?"
  "다른 건 몰라도 우선 안형을 바로잡아 놨어야 했어. 먼저 입이나 확실하게 돌아올 기미가 보이면 그걸 빌미삼아 하루 이틀 말미를 더 줍시사 사정을 꺼낼 수도 있지만 돌아간 입이 여전히 그대로인 채고 보면 설득시킬 길이 없잖은가. 한가지 혈변의 증상을 놓고 병에 차도가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반위를 고쳐본 사람이 없고 보면, 그것도 허의원의 변명으로만 들을 뿐이요, 무엇보다 병자 스스로가 혈변의 증상은 허의원이 독한 약을 대중도 없이 먹인 탓이라 무기고 항변하고서야 공빈도 이 모든 사태가 허의원이 공명심을 앞세워 일을 벌인 일로만 여기는 눈치라네."
  "일은 컸네."
  "허봉사가 반위의 증좌로 지적한 배 윗부분에 만져진다는 딴딴한 멍울은?"
  "그도 그대로 남아 있다네."
  "그대로 ... 그럴 수가 ..."
  "내가 들은 바는 거기까질세. 아무튼 허봉사가 장담한 시각은 다 지났으니 더 이상 누굴 내세워 발명할 길도 없네. 오로지 어의가 나서서 한사코 대신 죄를 청하면 공빈의 노여움을 풀어볼 길이 있을지 모르나 자기를 뒤돌려 세워놓고 일을 꾸민 일인데 그 사람도 발벗고 나설 리가 만무네."
  "게다가 병자가 끝내 허봉사에게 앙갚음을 할 양으로 벼르니 허봉사가 일을 너무 크게 벌였어. 이번 일만 성사되면 그 성가가 하루 아침에 어의를 능가할 수 있다 여겨 나도 정말 내 일 못지않게 성원했는데 ... 어쩌면 좋은가?"
  허준이 공빈 처소 앞에 꿇어앉았다. 유시의 시각을 알리는 소리가 진숙궁 모든 궁금한 이들의 귓전을 한참 동안이나 울리고 잦아든지 반 시각이 지나도록 공빈은 내다보지 않았다.
  안타까이 입술을 깨물고 있던 미사가 허준의 뒤에 역시 꿇어앉아 함께 죄를 청했으나 공빈의 처소에서 흘러나온 건 흐느낌소리였다.
  차라리 터져나오는 것이 분통 어린 호통이었다면 무언가 말 붙일 구실이 되었을 것이나 신출내기 의원을 철석같이 믿고 휘둘린 분함일지 그 소리 죽인 흐느낌소리는 섣불리 허준을 천거한 죄를 청하려 진숙궁 마당에 들어서 있던 도제조 노수신과 제조 정종영 그리고 판관 정작의 입을 더욱 얼어붙게 했다.
  그 무안하고 민망한 모습으로 허리 굽히고 선 세 사람께 입을 연건 김병조였다.
  "허준인지 ... 나 좀 보자. 지금 시각이 몇 시인지 어디 네 성한 입으로 말해봐라."
  허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내의원 의원으로서 자기는 할 일을 다했다. 그리고 김병조와의 사이에 약속이 오가지 않은 바 아니나 그가 지금 죄송해하는 건 김병조가 아니라 공빈에게이다. 분노에 찬 손가락을 흔들고 있는 김병조를 무시, 흐느낌이 새나오는 발 너머에 조신하게 아룄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오늘 유시까지 소인이 아는 모든 시술을 다했사오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사와 그 죄를 아옵니다. 이에 직처로 돌아가 투약에 사용한 약재와 시술 내용을 제시하고 대죄하고 있겠습니다."
  공빈의 기척이 없었다. 다시 나선 건 또 김병조였다.
  "우는 소리 말아라. 애초 궁중에선 희언이 없다, 누님이 다짐을 하였고 너 또한 목숨을 내놓으마 장담을 했더니라. 설마 그 약졸 일부러 말꼬리에 감추는 건 아니렷다!"
  "장부의 약속이니 일구이언 있을 턱 없고 내 소신껏 시술했으니 후회 또한 없소이다."
  "암 여부가 있느냐. 허나 나는 용서하고프나 내 몸이 용설 안해. 내 몸 구석수석 벌집처럼 불구멍을 내놓고 입도 그대로인 채 네놈 혼자 성하길 바랄 수 있으랴."
  "아오 ..."
  "기왕 다짐을 두어 내게 맡긴 목숨이라 하니 당장 쳐죽이고 싶으나 상감과 누님의 위엄을 보아 죽이진 않으리라, 대신!"
  "애초 낫우지도 못하는 병 고쳐내마 웃전을 기망한 죄와 그 함부로 놀리던 네 손모가지 하나는 잘라낼 것이다."
  미사가 울음을 터뜨리며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섰다.
  "아뢰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네가 나서느냐, 이 발칙한 것!"
  미사가 발 너머로 필사적으로 공빈을 외쳤다.
  "마아마, 허봉사를 용서해주소서. 허봉사 또한 병을 낫우고자 나흘 낮 사흘 밤을 한숨도 편히 눈을 못 붙인 채 무진 애를 썼사옵고 ..."
  쩌렁 하고 공빈의 소리가 났다.
  "바깥 소란히 굴지 말고 모두 물러가라 이르오."
  방문 밖 발을 내리고 올리고 하던 노상궁이 공빈의 말을 복창하듯이 도제조와 제조들을 건너보았다.
  두 노신이 허리를 굽혀 보였을 때 이미 울음을 삼킨 공빈의 소리가 다시 났다.
  "그리고 김상궁은 들으오. 병자의 차도를 상감께옵서도 궁금히 여기서는 바니 내가 주변의 헛말을 들어 어리석은 의원으로 하여 병자를 보게하여 그로써 시일을 천연시켜 상감마마의 천총을 흐려 드린 죄는 내가 복죄할 것이나 재주도 없이 거짓 약속을 밥먹듯이 하는 의원을 궁중에 둔다면 여러 피해가 다시 있을 것이라 그 의원과 나 사이에 오간 사정을 어의께 직접 일러 그 조치의 결과를 듣고자 한다고."
  노상궁이 공손히 받드는 대답 소리를 했을 때였다.
  김응택을 데린 양예수가 나타나 발 내린 공빈의 처소에 허리를 굽혔다.
  "소인 수의 양예수 대령해 있사옵니다."
  뜰의 도제조와 정작이 그 양예수를 돌아보았다.
  도제조에게 의례적인 인사로 허리를 굽혔으나 양예수의 눈은 곧 발이 드리워진 공빈의 방으로 향했다.
  그 양예수에게 김병조가 애원하듯 말했다.
  "어의께선 이 허준이란 자가 오늘까지 여기서 나나 누님을 능멸한 여러 얘기를 듣고 계셨을 것이오. 마마의 뜻도 이미 들었을 것이니 오늘 중으로 그 하회를 듣게 해주오."
  양예수가 답지 않게 허리를 조금 굽혀보였다.
  "구안와사가 결코 어려운 병이 아니기 누가 조치를 하건 범상한 일로 여기고 구애치 않았는데 오늘 결과를 듣고 크게 분개하고 있는 터올시다. 아무튼 내의원 기강에 관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매 소인이 엄히 조치하오리이다."
  김병조에게가 아니라 말의 마디마디를 발 너머의 공빈께 하고 있는 말이 었다.
  "이잘 정청으로 끌어가지 않고 뭘 하는가."
  갑자기 양예수가 목소리에 위엄을 띠었다. 김응택이 허준의 팔을 우악스레 움켜잡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미사를 보자 김병조가 다시 양예수에게 소리쳤다.
  "병자를 함부로 대하고 능멸하는 건 고 어린 의녀년도 매한가지였으니 같이 죄를 물어주오 ..."
  "함께 끌어가거라."
  그 말 이전에 미사가 허준의 뒤를 급히 따랐다.
  그 모습엔 자기도 죄를 청하리라는 태도보다 죽어도 허준과 함께 행동하리라는 어린 나이로는 상상할 수 없는 당돌함이 보였다.
  정청에 죄정한 양예수가 칼날 같은 눈으로 허준을 손가락질해 소리쳤다.
  "네가 네 죄를 모른다 할 수 없으리라."
  "아옵니다."
  "암, 부인한다 하여 어찌 벗어날 수 있는 죄리!"
  이어 양예수의 고함소리가 잇따라 터지는 속에서 내의원 안팎 의원들이 뛰고 달리며 허준이 꿇은 무릎 앞으로 커다란 작두를 가져다 놓았다.
  "너 같은 자를 다스리는 전례가 있느니라. 썩 날 위에 손을 놓아라!"
  모두 끔찍하여 눈길을 돌리고 턱을 떨고 있었다.
  허준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침을 놓고 뜸을 뜨던 손이라 했으니 분명 오른손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손 올려놓아라,"
  "어서!"
  작두의 손잡이를 잡은 김응택도 재촉했다.
  허준의 오른손이 떨고 있었다. 이윽고 그 떨림이 멎고 허준의 아이처럼 맑은 눈이 허공을 향하다가 양예수에게 멎었다. 그리고 그 마디 굵은 손이 시퍼렇게 날이 선 작두의 칼날 위에 조용히 놓였다. 

    [  14.면 천 ]
    1
  김응택의 호통 같은 명령 속에 내의원 뜰이 횃불로 대낮같이 밝아지며 허준의 손목이 올려진 작두의 서슬이 소름끼치게 빛났다. 그 잘려나갈 허준의 손목을 보며 함께 꿇어앉은 미사가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고 있었다.
  저 손, 혜민서에 찾아드는 그 많은 가난한 이들의 온갖 병을 낫우어주던 그 손목이 김응택이 잡고 있는 작두의 손잡이가 아차 내려지는 순간 허준의 몸뚱이로부터 잘려나갈 생각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젠 끝이라고 생각했다.
  허준이라는 남자를 자기의 꿈이요 목숨처럼 사랑하는 자신의 인생도 ...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운명도 ... 부인이 있고 자식이 있고 그 허준이라는 남자를 자기는 영원히 차지할 수 없다는 건 스스로 알고 있는 미사였다.
  그러나 그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더욱더 많이 꾼 자기의 꿈.
  허준의 저 자랑스러운 손이 어느날 자기의 손목을 덥석 잡아주고 다독거려주는 꿈을 얼마나 꾸었던가.
  "살려주소서!"
  돌연 미사가 작두의 손잡이를 잡은 김응택의 앞으로 내달으며 소리쳤다.
  "네 이년!"
  김응택이 소리쳤고 정청 높은 마루 위 양예수의 서릿발 같은 눈빛이 날아왔다.
  "살려주소서. 허봉사님 대신 소녀의 손목을 잘라주소서,"
  "이 발칙한 것! 물러나지 못하느냐!"
  "제 소원이옵니다. 제 소원 ... 이옵 ... 니다 ..."
  기어이 미사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내치지 않고 무얼 하느냐!"
  "내쳐라!"
  두엇 신참 의원이 달려들어 미사의 가녀린 목덜미를 잡았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머리를 휘어잡고 내던졌다.
  미사는 더 움직이지 못했다. 내던져진 충격보다 자기의 소원이 거부되었기에 그 순간 그녀는 이미 혼절한 것이다.
  허준이 눈을 감고 있었다. 전대에 있었다는 이야기. 대왕대비의 총애를 받던 의녀 애엽이 웃전을 기만했다는 벌목으로 역시 손목이 잘려야 했던 그 비정한 궁정 비사.
  이제 자기가 그 서러운 주인공이 되어 불구가 되는 것을 막고자 몸을 던져 울부짖는 미사가 고마웠다.
  이성을 운위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되 나이보다 훨씬 숙성함을 느끼게 하는 그 서늘한 눈빛에 오히려 당혹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허준은 그녀의 존재를 관심하지 않았다.
  '귀여운 아이 ... '
  생모가 충청도 예산 관아의 관기였음을 알 뿐 생부가 누구인지 알 리 없는 그녀가 생모와 사별한 후 예산 관아의 관비의 적에 오른 것은 아홉 살 때였다던가. 그런 미사가 내의원 의녀가 된 것은 그 당시 의녀를 뽑는 요건이던 '천출이되 사물의 판단에 영리한 아이'라는 조건에 합당해서 차출되었다는 과거를 허준의 과묵함과는 달리 상하의 말을 트고 지내기를 즐기는 이공기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그 가여운 소녀가 언감생심 하늘같이 높은 상전들 앞에서 자기의 구원을 울부짖다가 혼절한 모습 앞에서 허준의 가슴이 불현듯 따뜻해졌다.
  그러나 그 미사의 생각이 허준의 머릿속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공빈의 노여움. 김병조의 발악에 대한 원망도 없다. 오늘 이 순간 이후 영영 침을 놓을 수 없는 불구가 될지라도 자기의 시술에 의문도 후회도 없다. 단지 손목이 잘린 죄지은 의원으로서 궁을 쫓겨나 새로운 삶을 생각할 뿐이다. 가족들의 비탄, 어머니의 절망이 눈에 선했다.
  미사가 정신이 깨어난 듯 다시 울부짖는 소리에 허준은 눈을 떴다. 도약사령이 그 미사를 잡아끌며 어필이 굽어보는 중문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허봉사니임 ..."
  미사의 마지막 외침이 들려왔을 때 화제어약 보호성궁의 어필 밑으로 정작과 이명원, 이공기가 들어서고 있었다.
  "시행하거라!"
  양예수의 명령에 불끈 작두의 손잡이에 힘을 주던 김응택이 멈칫했다.
  "김판관은 그 손을 멈추시오!"
  엎어질 듯이 닥치는 정작이 고함치자 정청의 모든 동작들이 정지했다.
  "이미 어의의 영이 곕시오."
  김응택이 몰려온 세 사람에게 적의를 드러내며 맞고함쳤다.
  정작의 눈이 양예수에 낱아가며 따지듯이 물었다.
  "정령 이 방법밖에 없사오니까! 이 방법밖에 없사오니까!"
  양예수 입가에 조소가 지나갔다.
  "이미 웃전의 영이 곕신 터에 새삼 방법 운운은 무엇이오!"
  "허봉사는 어서 작두에서 손을 내리시오."
  "그 손 내려놓지 못하리!"
  양예수가 일어나며 정작의 눈을 맞받았다.
  "내의원의 영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 그대가 어째서 내 영을 가로막는 게요."
  "가로막는 것이 아니오이다. 하나 양대감!"
  정작의 최상의 존대를 양예수가 무시했다.
  "정판관은 듣소. 그대가 이 내의원에서 비록 유의로서 예우를 받고 있다 하나 이번 일만은 함부로 나서지 못하리다. 첫째 이는 공빈마마의 내락을 받아 시행하는 일이며, 둘째 이 일은 내의원의 추상 같은 기강을 상하에 일깨우는 본보기로 삼으려 하는즉슨!"
  "공빈마마께 비는 일은 내가 맡으오리다."
  "그래 용서하라는 영을 맡아왔소?"
  "여직 빌다가 오는 길이오이다. 그러나 대감께서 이 일을 두고 내의원의 기강을 바룬다 하시나 그렇다면 이번 일을 꾸민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니 그 벌을 내가 받고자 자청하옵니다."
  "난 이번 일 누가 꾸미고 아니 꾸민 건 생각지 않소. 분명한 것은 허준 저자가 제 신분이 내의라면 구안와사 따위 쉬운 증세쯤 3, 4일의 말미를 받았다면 능히 고치고도 남아야 할 터인데도 공연히 병자가 반위라며 기한까지 정하는 등 웃전들의 이목을 현혹시켜놓은 뒤 병은 한치도 호전시키지 못한 채 스스로 장담한 기한을 넘겼으니 그 행위가 전 내의원 상하 의원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 굳이 공빈마마의 이름을 빌지 않더라도 내가 용서할 수 없소!"
  "양대감 ..."
  "저자를 용서할 수 없는 사유가 또 있소이다 ! 내 사람 시켜 저자가 행한 뜸을 위주로 한 시술내용과 약방문을 보았소만 이는 내가 여직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처방이요 시술일뿐더러 가만히 생각건대 그 저의인즉 애초 어의인 내가 처방하고 시술한 모든 방법을 능멸하는 행위가 분명하니 ... 만일 이러한 행위를 간과할 경우 장차 내의원의 기강을 어찌 바로잡을 수 있겠소? 더구나 지존과 금지옥엽 같은 왕실의 시탕을 받드는 우리의 소임으로 볼 때 저자의 교만과 자만을 벌하여 저들의 막중한 임무를 미리 엄히 일깨워야 하외다. 사리가 이러할진대 어찌 정판관이 나서서 사정을 쓸 수가 있소!"
  "그 뜻도 아오나 ..."
  "더 긴말 필요 없소이다. 김판관은 무얼 하는가! 썩 저놈의 손목을 잘라라!"
  "손목 더 가까이 바로 대거라!"
  김응택이 작두의 손잡이를 고쳐 쥐며 소리쳤을 때 이명원과 이공기가 동시에 김응택의 앞을 가로막았고 이어 그 이명원이 양예수가 있는 정청 마루 아래 무릎을 끓고 외쳤다.
  "어의께서 들어주소서. 소인이 허봉사가 시술하는 첫날을 함께 밤을 세웠사온데 허봉사의 시술이 비록 특이하오나 허봉사 또한 굳은 신념이 있어 행한 일이오니 손목을 잘라 그의 전도를 끊는 중벌을 다만 수삼 일만이라도 늦추어주시도록 탄원하옵니다."
  양예수가 마루를 구르며 그 이명원을 손가락질했다.
  "이 자리가 어찌 너희것들이 나서서 소란을 떨 자리란 말인가!"
  이공기도 달려와 이명원 곁에 꿇었다.
  "불과 수삼 일올시다. 그 수삼 일의 말미에도 병자에게 차도가 없달 때 허봉사 또한 스스로 자기 입으로 다짐한 터이니 그때야 어떤 중벌도 기피할 수 없다 여기오니!"
  "수삼 일 아니라 수삼 개월을 늦춘다 한들, 기대할 것 없다. 여직까지 병이 반위인 이상 그걸 낫운 의술은 없었은즉!"
  순간 정작의 눈이 번쩍 들렸다.
  "하오면 양대감 또한 병자의 증세가 반위인 것은 판정해 계셨단 뜻이온지?"
  양예수가 실언한 낯색을 얼른 수습했다.
  "분명 그렇게 보셨사온지?"
  "어찌 보면 그 초기의 증세와 닮지 않는 배 아니나 그렇다면 더더구나 그 병을 낫우겠다 떠든 건 저자의 교만 외 아무것도 아니오. 더 미루지 말고 잘라라, 손!"
  "잠깐 기다리시오! 그리고 허봉사는 들으오. 어의께서 그대가 보는 바와 안목이 일치했다니 공빈마마께 달려가 그대의 구명을 탄원할 빌미는 잡았다 여기오만 정녕 그렇거든 그대가 믿는 바 병이 나아가는 증거를 한가지 주장해주오."
  허준은 침묵한 채 눈을 뜨지 않았다.
  "답답하오. 양대감이나 공빈마마를 믿게 할 나아가는 증상 말이외다."
  "걸렸다 하면 나은 이가 없는 병을 두고 다시 또 무슨 허황한 말로 웃전을 속인단 말민가 ..."
  허준이 눈을 뜨며 그 양예수를 보았다.
  조용한 눈빛이었다. 잘려나갈 손목을 작두의 칼날 위에 두고도 그 눈은 확신에 차서 조용히 말했다.
  "그 병은 낫습니다. 틀림없이!"
  양예수가 소리없이 웃었다. 그 양예수에게 허준이 다시 말했다.
  "그 나아가는 증거는 병자의 토혈올시다. 그 토혈이 끝나 마지막 썩은 살덩이들을 뱉어내는 것을 고비로 한 후 죽을 길에서 살길로 들어서옵니다."
  "썩은 살덩이를 뱉어내?"
  "그렇게 믿사옵니다. 밀양 천황산 빙곡에서 소인은 스승님이 뱉어내놓은 그 썩은 살점들을 보았사옵고 그 나아가는 증거에 이르는 스승님이 손수 적은 처방의 전모를 제 눈으로 읽었습니다."
  "네 스승이라니 ... 유의태?"
  양예수가 실언하고 있었다. 들어본 적도 없다던 천적 유의태의 이름이 그의 입에서 뱉어졌고 평생의 원한을 담은 조소가 소리가 되어 터져나오고 있었다.
  "핫핫핫 ... 고작 유의태가 네 의술의 근거더란 얘기렷다? 짐작할 수 있는 일이로다. 내 알기 그자도 교만과 허세로 뭉쳐진 자였더니라, 핫핫핫 ..."
  순간 허준의 눈빛이 칼날이 되어 양예수에게 날아갔으나 양예수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핫핫핫."

    2
  어의 양예수를 향한 허준의 눈이 점점 강렬한 눈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유의태 ...
  그 사람은 과연 자기에게 어떤 존재였던가 ...
  의에 대한 지식일랑은 반드시 유의태로부터 다 배웠다고 할 수 없다.
  의원의 길로 들어선 인연이 어찌 작은 인연일까마는 허준은 그 인정만으로 유의태를 스승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
  차라리 의원으로서의 길을 손짓해주고 내다보게 한 이는 김민세 쪽이 크다.
  그러나 의원이 무엇인가, 의원은 어때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가르쳐준 이는 유의태다.
  천만 마디 훈도보다 더욱 준열하고 확실하게 의원의 참모습과 그 존재를 보여준 이는 유의태 그분이다.
  자신의 온몸을 흔쾌히 던져 인간 내부의 구석구석 뼈마디의 가닥가닥을 보여주었던 사람 ...
  자신의 집도 속에 전신이 갈가리 찢기어질 줄 알면서도 그 피바다 속에서 태연했던 이여 ... 피비린내도 없었다. 쏟아지는 눈물과 온몸을 떨리게 하던 감동이 있었을 뿐 ...
  어찌 그것이 의원의 눈만을 뜨게 한 사건이었으랴 ... 그에 못지않게 큰 것, 인간이 자기 아닌 타인을 위하여, 특정한 누구가 아닌, 세상 모든 병고에 신음하는 이를 위하여 거침없이 자기의 살아 있는 몸뚱이를 천가닥 칼날 아래 뉠 수 있었던 그 모습에서 허준은 전율했었다.
  인간이 그토록 위대한 존재임을 증명해 보인 유의태 ...
  김민세 또한 어찌 범인이었으리.
  그 또한 미천한 출신이었고 갈망해 마지않던 어의라는 최고의 명예와 영광을 보장받았건만 그 보장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악질(문둥병)에 신음하는 이들을 돕고자 야에 묻힌 그 행동도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감동이었다.
  유의태를 떠올리며 벌겋게 젖어가던 허준의 눈자위에서 다시 눈물이 메말라갔다.
  양예수의 노기 어린 삿대질과 고함이 자기의 머리 위에 계속되고 있었고 한마리 변명 없는 허준에게 정작, 이공기 그러고 이명원의 안타까운 눈빛들이 쏠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허봉사님'을 절규하는 미사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딴 세상의 소리처럼 멀었던 양예수의 노성도 문득 눈앞 현실의 소리로 되살아났다.
  "더 발명하지 못하고 입을 봉한 것은 네 죄를 네 스스로 인정한 것. 더 지체할 것 없다!"
  "예잇!"
  김응택이 긴 대답을 또 한번 했다. 그러나 그 작두날보다 더 퍼런 살기를 띤 이공기가 양예수에게 고함쳤다.
  "어의께선 다시 한번 허봉사에게 말미를 주소서."
  "언감생심 감히 항명에 앞장서는 것이냐!"
  "의원이 팔이 잘리고야 어찌 의술을 계속할 수 있사오니까. 그토록 장담한 일이오니 사리로 보거나 인정으로 보거나 어찌 하루 이틀 기다리지 아니하고 전도창창한 한 생명을 끊으려 하시오니까."
  이공기의 말투가 다부졌다. 그도 더 내의원에 미련을 두지 않는 듯했다. 감히 어의를 향해 맞받아 고함치고 있는 모습이 그랬다. 양예수의 손가락질이 이번엔 이공기를 향해 뻗어갔다.
  "생명을 끊으라 한 적 없다. 죄지은 손목 하나를 자르라 했을 뿐!"
  "그 영이 그 영 아니오니까!"
  "하잘것없는 촌구석 의원의 방술 하나 믿고 내의원 전체의 얼굴에 먹칠을 했으니 감히 목숨을 부지함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어늘 어찌 손목 하나 잘리는 걸로 억울타 할 것이냐. 더구나 전하께오서도 관심하옵시는 병자이고 보매 용서의 길이 없다! 잘라라!"
  김응택이 지체없이 작두의 손잡이를 가득히 잡아 그대로 힘주어 눌렀다. 보고 있던 내의원 의녀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휩쌌고 내 의들과 도약사령들도 고개를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내의원이 일제히 숨을 삼킨 그 순간 좌정해 앉았던 양예수가 튕겨 일어나며 "네 이놈!" 고함쳤다.
  그대로 허공을 잘라낸 둔탁한 금속성이 울렸을 뿐 작두날이 떨어지기 전에 이공기가 작두날 위에 놓인 허준의 손목을 걷어찬 것이다.
  허준이 몸을 가누었을 때 김응택이 이공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미쳤느냐?"
  "왜 내가 미치오. 보다 못해 한 짓이오. 그게 죄거든 뜻대로 하시오."
  "저자도 허명만 요란한 유의태란 자의 방술을 믿는 자로다. 같은 죄로 함께 꿇려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유의태니 뭐니는 본 적도 없는 사람이나 허봉사의 의술은 믿는 사람이오니!"
  일동의 아연한 눈길 속에서 이공기가 허준과 나란히 앉아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저자의 치죄는 뒤에 내가 감당할 것이로되 허준의 손목을 다시 올려라 ..."
  "다시 손목 올려라!"
  김응택이 작두의 칼날을 다시 올렸고 허준의 손목이 다시 칼날 위에 놓이자 이번엔 이명원이 허준의 옆에 꿇었다.
  "소직도 허봉사의 의술을 믿어 약재를 공급한 죄를 자청하옵니다."
  양예수의 폭발할 듯한 분노가 이글이글 그 눈에 몰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 너희들의 자복을 기다리고 있었더니라!"
  "죄지은 기억이 없는데 자복이란 어인 분부시온지 ...?"
  그 이공기의 비아냥거림을 듣자 자리를 박찬 양예수가 달려내려와 이 공기를 비롯, 함께 꿇은 세 사람의 반당 굽어보며 와들와들 떨었다.
  나직나직 애써 위엄을 내세우는 평소의 어의답지 않았다. 그 양예수의 떨리는 손가락이 세 사람의 반항 어린 눈빛을 하나하나 꼽았다.
  "죄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정할 일! ... 일전 너희가 혜민서로 떨어진 후 그간 조용하던 혜민서가 날로 소란해지고 그 내용 또한 약재를 빼돌렸네 어쩌네 추잡한 소문에다, 또 병자에 대한 시술과 간병이 험상궂다느니, 투서와 진정이 잇닿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어찌 모면하려 드느냐 ?"
  "그 말은 나도 아니 믿소!"
  지켜보고 있던 정작이 좀 전까지의 존대를 거둔 대꼬창이 같은 말투로 양예수를 쏘아보았다.
  "이 초출나기들이 누굴 믿고 내의원 기강을 깨고 이토록 방자한지 아오? 이 모두 당신이 이자들을 비호하기 때문이오."
  "감춘 적 없소. 처음부터 내가 주장했은즉! 허나!"
  "허나고 무어고 더 이상 무슨 긴말이 필요한가! 쩍하면 그대가 주장하는 의원을 천거하는 의무에서 저 따위 촌구석 방술이나 믿는 자를 천거하여 오늘 이 지경에 이른 사태의 책임을 나 또한 끝까지 추궁할 것인 즉슨!"
  "피할 생각 없소이다! 내 또한 어의가 무어라 강변하건 내의원 인사에 대한 온갖 의문을 바루어 보고자 결심하고 있는 사람인즉!"
  "그래야겠지. 허나, 똑똑히 들으시오? 내가 어의의 직책을 맡아 삼대에 이르는 오늘까지 실수가 없었던 사람임은 온 왕실이 증명하는 터이오. 턱없이 나를 의심하고 신출나기들을 선동, 오늘의 이 분란을 일으킨 그대의 행위는 저자의 잘라진 팔목을 증기로 온 대궐에서 증명이 될 것인즉. 더 무얼 하느냐! 작두날 내려쳐라!"
  김응택이 전의만만하여 아귀에 힘을 주었을 때 여지껏 묵묵하던 허준이 입을 열었다.
  "어의의 심기를 흐려 드렸음을 사죄하옵고."
  "사죄는 이미 늦었더니라!"
  "이제 와 내 손목이 잘림을 구해달라 하는 것이 아니옵고."
  "내려쳐라!"
  "그러나 소인에게 대한 처분은 감수할 것이오나 제 스승님의 의술을 촌구석 방술 정도로 매도하는 것은 정정해주소서."
  "어째?"
  "반위는 낫습니다."
  "그래서 낫우었다는 말이냐?"
  "소인은 스승님의 처방을 굳게 믿습니다."
  "어찌 공빈마마뿐이리. 전하께서도 관심하시는 병자이기, 나 또한 내 눈알에 공이가 박히도록 네가 사용한 처방을 뜯어보고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 그러나 네 스승이 가르쳤다는 그 처방은 도대체 믿을 구석이 없던 처방이었느니라. 또 나를 원망도 말 것이 너는 네 스승에게 배운 대로 다했다 강변하고 네 죄를 모면하려 하나 네가 장담한 시간은 분명히 다 지나간 터이요 그렇다면 그 따위 방술을 믿는 자를 그대로 응징 않고 두었다가는 장차 네 그 솜씨에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날 것이요 또 네가 내의원 출신이었음이 인구에 회자되면 그 또한 내의원의 명예가 실추되는 길이니 앞으로의 억울한 희생자를 막고자 네 그 죄 많은 손목을 자를 뿐. 할 말 더 없으렷다."
  "있사옵니다. 소인은 세상 누가 무어라 해도 제 시술을 믿습니다."
  "반위를 고쳐? 사람의 위의 모양을 똑똑히 본 적도 없는 자가 반위를 고쳐? 어 ... 리 ... 석 ... 은 ... 놈."
  "어의께선 너무 장담치 마소서. 이 세상 의원치고 반위의 모습을 소인처럼 똑똑히 본 사람은 없을 것이오니,"
  "반위의 모습을 보았다? 언제? 어디에서? 반위는커녕 네가 위의 참 모습이나 안다면 반위를 고친다 대들진 못했을 터이다."
  허준은 어의의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스승님을 더 이상 욕되게 하고 싶지 아니하니 손목 자르시오."
  "여부가 있느냐. 이미 네 거짓말은 다 드러났은즉, 네 스승이 어떻다 저떻다 해도 그 유의태란 자의 허세도 다 까발겨진 것이다! 핫핫핫."
  "...!"
  "네가 영리하여 의서의 내용을 남보다 더 기억하여 비록 취재를 보는 과장에서의 성적이 뛰어났을지 모르되 네가 유의태의 수하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네 얄팍한 재주를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더니라, 훗훗훗."
  "... 위의 모습은 ..."
  하고 양예수의 웃고 있는 얼굴을 정시한 채 허준이 말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허준의 온몸에 피비린내가 풍겨나기 시작했다. 나흘 밤 사흘 낮 천황산 빙곡의 바위굴에서 맡고 맡고 또 맡았던 스승 유의태의 몸에서 쏟아지던 그 뜨거운 피비린내가 ...
  "사람의 위는 목구멍으로부터 한 자 여섯 치를 내려가면 심창골과 배꼽 중간에 각 네 치에 뻗쳐 위치했으며 ..."
  일동이 숨을 삼키기 시작했다.
  "위의 길이는 한 자 여섯 치며 꾸불꾸불한 것을 모두 펼치면 두 자 여섯 치이며 크기는 한 자 다섯 치요 지름이 다섯 치로서 물과 곡식 서 말 닷 되를 받을 수 있고 늘 차 있는 음식물이 두 말이요. 저장된 물이 한 말 닷 되올시다."
  양예수의 얼굴에서 조롱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허준이 계속했다.
  "또 이 위는 물과 음식 서 말 닷 되가 차면 배가 부른 형상이 되며 무병한 사람이 하루 한 번 대변하면 쏟아지는 양이 두 되 반이요 때문에 일체를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배설하면 두이레 만에 서 말 닷 되 저장된 것들이 모두 쏟아져 가두어 둔 물과 음식이 동이나 죽는다, 이것이 소인이 아는 위의 모습올시다."

    3
  양예수의 핏기 가신 안색이 떨고 있었다.
  내의원 정청이 정적에 빠져들고 있었다. 모든 눈과 입이 얼어붙어 있었다.
  이때였다. 진숙궁에서 공빈의 시중을 들던 노상궁과 임금 선조를 수행하던 노란 눈을 한 꺽다리 내시가 함께 엎어질 듯이 굴러들어오며 숨가쁘게 소리소리 질러대기 시작했다.
  "형벌을 멈추시오! 병자가 나았소이다."
  "병자가 나았으니 형벌을 멈추시오."
  일동이 모두 두 사람을 둘러쌌고 정작이 고함쳤다.
  "병자가 나았다니?"
  달려온 둘은 그 정작도 양예수도 무시한 채 꿇은 허준을 부축해 일으키며 허준의 두 손을 싸쥐었다.
  "병이 나았습니다. 공빈마마 아우님의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갑자기 누군가의 입에서 환성이 터졌고 흥분한 얼굴들이 몰려들었다.
  왕사인 내시가 거푸 말했다.
  "어서 가십시다. 상감마마께서 몸소 부르고 계시오이다!"
  오히려 이 마당에서도 냉정한 것은 허준이었다.
  "병자가 어떻게 나았는지 그 증상을 말해주오!"
  노상궁이 달려온 숨찬 호흡에 아직도 흥분을 담아 빠른 어조로 말했다.
  "의원께서 돌아간 뒤 격분한 병자가 속았다 하며 스스로 얼굴의 침을 뽑아던지고 밀어놓은 밥상을 당겨 음식을 먹었습니다. 도저히 말릴 기세가 아니었고 또 술까지 가져오라 고래 고함을 질러댔는데 그 입놀림 끝에 불현듯 보니 얼굴은 어느새 온전한 모습이 되어 있었사옵고 눈알도 제 모습이었더이다. 이에 놀란 공빈마마께옵서 양볼을 이리 땡겨보고 요리 땡겨도 제 모습이었더이다. 의원이 말하던 가슴 밑 딴딴한 멍울도 어느덧 만져지지 않사옵고 그때 상감께서 납시어 자초지종을 들으신 후 공빈마마와 함께 병자의 흔적을 수십 번 확인한 끝에 그제야 나았다 믿으시고 의원을 부르라 하시어 어명을 받들어 달려오는 길올시다."
  "똑똑히 가슴 아래 멍울이 없더이까?"
  "거푸 말하오나 괴질의 흔적을 만져본 건 소인뿐이 아니라 상감께오서도 손수 어수를 대어 확인하오시고 공빈마마께오서도 만져보았는데 신기하다 놀랍다 하시며 ... 어서 어서 가십시다."
  허준이 얼굴을 싸고 꿇었다.
  그 입에서 터져나온 건 유의태의 이름이었다.
  "스승님 ..."
  허준의 울음 앞에 잠시 숙연하던 내의원 정청이 다시 숨을 돌리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술렁거림은 곧 환호로 이어졌고 이제야 환호를 지로는 사람들의 숫자로 보아 양예수는 고립되어 있었다.
  "전하께오서 기다리시오니 더 지체하지 마오."
  내시가 허준의 팔을 잡고 채근했다.
  허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쓸어안을 듯이 눈앞에 다가서 있는 정작의 얼굴이었고 그 얼굴 곁으로 이공기와 이명원의 얼굴도 있었다. 이공기가 자기 일처럼 감격해 울고 있었다.
  그토록 냉정한 정작의 눈에 물기가 어린 채 화안히 신뢰의 미소를 담아 웃고 있었다.
  "속히 가오. 가서 그대의 처방의 결과를 그대의 눈으로 확인해야 하리."
  이공기와 이명원이 자기 일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이제야 아직도 서 있는 양예수에게 아뢰었다.
  "소인 물러가도 되오니까?"
  양예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두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이미 그 존재는 허깨비처럼 공허했다. 모두의 시선이 오로지 허준에게만 향해 있었다.
  "소인 물러가도 되오니까 ..."
  양예수는 말없이 돌아서 정청에 오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사라졌다.
  김응택도 갈 바를 모르고 어기적거리다가 뒷전으로 물러났다.
  "속히 가보시게."
  정작이 상급자의 모습으로 말하자 내시가 허준을 이끌듯이 하며 앞장섰다.
  "다녀오게."
  "다녀오오."
  이공기와 이명원이 허준의 뒤를 몇 발 따라가며 격려했다. 허준의 모습이 정청 밖으로 사라졌을 때 미사가 달려나왔다. 소식을 들은 의녀 하나가 재빨리 갇혀 있던 그녀를 끌어내온 것이다.
  "너도 쫓아가거라. 허의원과 함께 너도 병자의 수발을 들었으니 함께가 마땅하지 않느냐."
  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뻤다. 그러나 문득 불안도 했다. 허봉사의 성공은 다시 옛날 혜민서에서처럼 자기와 허봉사가 함께 일할 기회가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그녀의 가슴으로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준은 더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또 두 사람의 내시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기도 부르는 것인가?'
  그 미사의 기대 속에 달려온 내시 두 사람은 눈에 익었다.
  상감마마의 거동을 조석으로 수행하는 신체 우람한 내시들이었다. 허의원을 천거한 정판관을 찾아 그 내시들은 정작과 함께 허준이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급히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 미사의 쓸쓸함을 아무도 관심할 이가 없었다.
  허준을 도와 결연히 나섰던 이공기와 이명원을 둘러싸고 이제야 내의원은 축제 분위기였다.
  도약사령이 겁도 없이 허준의 손목을 자를 뻔했던 작두를 냅다 걷어찼다. 김응택의 눈이 돌아보거나 말거나 그도 이젠 노골적으로 허준편이었다.
  김응택의 눈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임금 선조가 물었다.
  "본관은 양천이라 ..."
  "황공하옵니다."
  허준이 깊이 시선을 깔았다.
  "과인이 그대의 이름을 늘 기억해 두리로다. 의원이라 해도 병자를 다 낫운다 기필할 수 없는 것임에 설사 두 왕자의 외숙의 병이 낫지아니했다 할지라도 그대의 정근하는 모습을 과인이 보았고 모두 증언하는 터임에 체벌을 가하는 건 가혹하다 여기던 터인데 입 돌아간 흔적도 바루고 그 괴병의 뿌리를 뽑았다 하니 이토록 기꺼울 수가 없어."
  "황공무지 하옵니다."
  "허나."
  "예."
  "하늘이 뛰어난 재주를 내심은 부디 좋은 일에 쓰라는 뜻이니 더욱 정진하여 난병과 괴질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하도록 애쓰라."
  "황공무지 하옵니다."
  들어올 제 툇돌 아래까지 내려가 몸소 허준을 맞았던 공빈이 아직도 벌겋게 감격에 상기한 얼굴로 허준을 바라보며 사과했다.
  "다시 말하오만 내가 참을성 없는 동생의 말만 듣고 허의원을 오해한 일 용서하시오."
  "황공하옵니다. 하오나 ..."
  "말하오."
  "모습이 돌아왔다 하여 다 나았다 여기는 것은 이른 일이옵고 회복기의 섭생이 까다롭사오니 본인은 물론 간병하는 이들이 감당할 일들이 남았다 여기옵니다."
  "다 시키는 대로 하리다. 허의원이 하라는 대로. 그 아이도 이 은혜를 평생을 두고 잊지 아니할 게요."
  허준이 다시 시선을 깔았다.
  병을 낫운 것도 내 힘이 아닌 스승님의 죽음을 대가로 처음으로 반위의 실체를 적발해 낫운 것이 스스로도 더없는 감동을 맛보고 있었다.
  밖에서 노상궁이 조신하게 아뢰는 소리가 났다.
  김병조가 다른 방에서 옷을 갈아 입고 의원께 감사의 치사를 하고자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기쁨 앞에서 임금 선조도 그 용안을 활짝 펴고 발 밖에 호종해 선 승지에게 일렀다.
  "들으니 의관에게 노모가 있다 하니 과인의 기꺼운 뜻을 사찬을 내려 대신 전하도록 하고 의관 또한 여러 날 정근하느라 피곤할 것이라 속히 귀가케 하여 편히 쉴 수 있도록 어의의 허락을 받아주오."
  허준이 허리를 굽혔고 선조가 다시 영을 보탰다.
  "과인이 본 바도 그러하고 이번 일 의관과 함께 애쓴 여러 인물들이 있을 것이라 내의원에도 사찬을 내리어 과인의 기쁜 뜻을 전해주오."
  이날 내의원은 때아닌 사찬을 감격해하며 한판 잔치가 벌어졌다.
  너나없이 허준을 화제삼았다. 모두 허준의 시대가 열린 것을 의심치않았다.
 ... 그랬다.
  허준이 쌓아온 의업에 대한 성심과 정열, 집념이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요구하며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4
  궐내외의 의약과 시탕을 총괄하는 삼의사 중 내의원과 혜민서에 인사 이동이 일었다.
  공빈이 두 어린 왕자의 잦은 병치레의 수발을 들 의원으로 애써 허준을 꼽았으므로 허준이 두 품계를 승차하여 종7품 직장이 되어 선임 이명원과 더불어 내국(관내의 약재출납과 내의원으로부터의 주야 붙박이 파송의원) 근무가 되었고 혜민서로 나간 김응택을 대신하여 내의원 사무를 관장하게 된 정작이 자신의 보좌역으로 지명한 이공기 또한 내의원 근무가 된 것이다.
  "네 반골이 우리를 밀어내고 대궐을 차지했다."
  양예수를 붙좇으며 다음 대의 어의라는 달콤한 환상에 빠져 있던 김응택은 무참하게 깨진 자신의 꿈 앞에서 공공연히 정작 이하 허준, 이공기, 이명원을 거명하며 그렇게 비방했으나 그 자신 내의원에서 자기 신세가 끈 끊어진 두레박 신세임은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어의라는 위명과 함께 양예수가 삼의사 중 최고기관인 전의감에 버티고 있었으나 내의원이며 혜민서의 업무보고가 정작을 거치도록 도제조가 결정하고서야 양예수야말로 이번 사건으로 가장 외로운 처지로 전락한 셈이었다.
  "어의의 소임이 주야로 막중하고 보니 어찌 일일이 아랫것들의 됨됨이까지 고루 살필 수가 있었겠소. 다행히 정판관이 삼의사의 젊은 의원들과 교류가 잦은 듯하니 소소한 일들일랑 정판관에게 떼어 맡기시오."
  말인즉 부드러웠으나 그건 지난날 주위의 추천을 묵살하고 허준을 혜민서로 내보낸 질책이었고 도제조 노수신의 그 말 한마디로 양예수는 태산반석처럼 믿었던 자기의 시대가 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물론 전의감은 어의, 태의(어의의 자간역), 수의(발생한 병증에 대한 전문의)들이 왕실에 병자가 발생하면 수시로 회동하는 막중한 기관이다.
  그러나 임금과 그 지친이 늘 의원을 필요로 하는 병자들이 아니고서야 위엄은 있되, 왕실에 병자가 없을 제는 전의감의 어의직 같은 한직이 없다.
  병자는 없어야 하나 병자가 없음을 한가롭다 투정하는 것은 불경에 속할 것이다. 그 한가로움을 장차에 대비한 의약의 토구에 시간을 보내어 유유자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바빠도 좋다. 어의라는 서슬 푸른 자신의 권위 앞에 아랫것들이 무시로 찾아들어 이런 일 저런 일 부지런히 아뢰고 지시 받아가고 보고해오는 그 번잡함 속에서야 진짜 살아 있는 자신의 권위가 느껴진다 할 것이다.
  더구나 유달리 명예욕이 치열한 양예수로는 갑자기 타의에 의해 바쁜 생활이 거두어지고 날마다 찾아드는 그 한정함은 견딜 수 없는 굴욕으로만 느껴지는 것이다.
  더구나 내리 세 임금을 받든 삼대의 어의라는, 역대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영예를 이미 보장받았다 여겨 추호도 의심 않던 그로서는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한 허준이란 존재에 침식을 잃을 정도로 증오심이 끓었다.
  허준 따위 어쭙잖게 보았었다.
  지난날 유의태로부터 받은 수모도 자기 손아귀에 거머잡은 삼대 어의라는 영예로 잊을 수 있었다. 인생의 승리자는 자기라는 확신과 함께 ...
  그러나 사태는 역전된 것이다. 오늘 전의감에 고적하게 틀어박혀 있는 자신의 모습은 정작과 허준의 모해에 의해 천애고도에 귀양살이하는 모습에 무엇이 다르랴 싶은 것이다.
  집에서 문밖을 나서면 또 대궐에서 정청 밖을 나서면 마주치는 얼굴들이 지난날과 다름없이 읍해 물러서고 허리를 굽히는 것은 여일하다. 그러나 어딘가 그 모습들은 지난날들과 다르게 느껴져서 양예수는 뒤돌아 보기가 불안하다.
  허리는 굽혔으되 돌아본 순간 그 얼굴들은 이미 고개를 돌리거나 비아냥거리고 있는 얼굴로 바뀌어 있을 것만 같아서다.
  "허준이와 의술 경쟁을 한 끝에 어의가 졌다네."
  "허준 그 사람의 의술이 어의보다 한두 수 위라네."
  들리지도 않으나 자기의 뒤통수에 달라붙은 눈들이 모두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듯해서였다.
  "차대의 어의는 허준으로 이미 낙점이 찍혔다네."
  누웠거나 앉았거나 양예수는 자신의 고막을 울리는 그 환청에 경기를 할 지경 이었다.
  '이 양예수 이렇게 끝날 수 없다!'
  터수는 틀려도 유일한 말벗이요 입에 혀처럼 충복이던 김응택조차 궐밖 혜민서로 내쫓겨나가고선 이젠 호통칠 부하도 말벗도 없는 자기의 몰락이 또한 미칠 지경으로 조바심났다.
  "기회를 잡아야 해! 내 주인은 공빈이 아니고 상감인즉 상감의 내게 대한 신임이 더 빛 바래기 전에 기어이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아야 하고말고."
  늦여름 전의감을 둘러싼 울창한 참나무숲에서 끝도 시작도 없는 소란한 쓰르라미 소리에 딴때없는 적막감을 느끼며 양예수는 앙다물었던 입 안에서 카악! 가래침을 긁어올려 타구에 내뱉었다.
  임금이 병이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온 대궐이 발칵 뒤집히고 숨을 죽이고 주시하는 속에서 자기의 시술에 의해 기적적으로 소생시키는 그 길만이 자기의 운명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처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청년 선조는 연일 건강했다.
  김응택은 절망했다.
  내의원 높고 좋은 자리에 있을 때엔 꿈에도 돌아보지 않던 혜민서였으나 석 달째를 넘기면서 그는 이곳에조차 자기가 맘놓고 설 자리가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새벽부터 몰려드는 병자와 그 가족들이 너나없이 허준과 이공기를 찾는 것이 분해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 여러 날은 그 두 사람이 궐내로 직처를 옮겨갔음을 애써 태연한 낯색으로 일러주었으나 어디에서 소문을 얻어들었는지 병자와 그 가족들은 두 사람이 없음을 알자 벌써 혜민서에 찾아올 이유가 반감됐다는 얼굴을 했다.
  "허준이만 의원이 아니요, 우리도 어엿한 내의원 의원이오!"
  더러 다혈질의 젊은 의원들이 진찰패를 받아들자 마자 허준과 이공기의 재실 여부를 물어오는 환자들에게 볼멘 소리를 내질렀으나 허준과 이공기가 베푼 미식(헌신적인 의료행위)을 맛본 병자들은 눈을 부라리는 의원들의 첫인상에서부터 혜민서에 낙망하는 눈치였다.
  거기에 미사가 더러 사정이 딱한 병자들에겐 허준의 집 위치를 일러준 뒤로는 아예 혜민서를 젖혀놓고 애고개 허준의 집으로 찾아가는 인수가 많다는 소문도 김응택을 조바심치게 했다.
  허준을 능가하지 아니하고서는 어의의 자리를 영영 넘겨볼 수 없다. 김응택은 처음 혜민서에서 수집한 허준과 이공기의 행적을 본떠 병자의 고름도 빨고 퇴청 시각을 무시, 병자의 간병을 위해 밤샘도 해보았으나 하루 이틀도 아니요 날이면 날마다 밀려드는 병자들 앞에선 마침내 의지가 꺾이고 만 것이다. 더구나 누가 주시해주는 이도 없으며 자기를 밀어주던 양예수도 제 코가 석자나 빠진 이 마당에 내일에의 보장도 없는 헌신을 언제까지나 계속한다는 의욕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고 나니 더더욱 앞길이 막막했다.
  침에는 누구 못지 않게 자신이 있다 자부하는 김응택이되 자기의 솜씨를 선보일 병자가 왕실 안에 아니 나타나고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또 이미 저토록 요란하게 성망을 드높인 허준이 버티고 있는 한 천행으로 왕실에 병자가 발생했다 한들 그 병자의 입진이 허준을 건너뛰어 자신에게 맡겨지리란 기대는 실현될 성부르지가 않았다.
  갑자기 양예수도 밉기 시작했다. 그가 주고자 했다면 벌써 오래 전에 자신의 침술을 드러내보일 기회는 무수히 있었을 터이다.
  그가 정작이 허준에게 보이는 관심의 열에 하나만큼, 백에 하나만큼이라도 쏟아주었다면 자기 또한 오늘 이 지경에 이르지 아니했을 터이다.
  왕실의 귀한 이일수록 자신이 독식하고 자기만의 명예를 드높여간 양예수의 약삭빠름을 멀잖아 당연히 굴러온 자기의 자리로 여겨 한마디 보채지도 못한 채 참고 지내온 지난날의 자신의 어리석음도 한이 되었다.
  '포기를 해? ... '
  종5품 판관이면 문무관의 터수로 치면 한 고을의 원이다.
  병을 고친 공이 있어야 오르는 내의원의 품계이고 보매 비록 그들과 동격이라 우길 수는 없다 해도 내의원 판관이었다는 관품을 지닌 채 낙향하면 눈먼 재물 따위 꽤나 모을 수 있으리라.
  내의원 판관까지 지낸 의원이란 소문 하나로 인근 돈 많은 병자 집에서 다투어 가마를 대령하여 모셔가는 세태인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으므로 ...
  그러나 어의를 눈앞에까지 바라보던 그로서는 허준과 의술로 정면대결도 벌이지 못한 채 이제 여기서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세상에 병이 반위만 있는 건 아니잖은가!'
  그리고 지존이나 왕실에서 반드시 허준이 낫울 수 있는 병만을 앓을 리도 없잖은가.
  비록 앞으로 허준을 천거하는 주위 인물들이 많을 것이로되 허준이 그 모든 병을 모두 고쳐낸다는 법도 있을 리 없다.
  "환고향하는 결심이야 언제든지 늦지 않은 일이니 내게 올 기회를 기다려야 하리!"
  가난한 병자들로 악머구리 끓듯 바글대는 혜민서 각 병동의 광경을 흘겨보며 김응택은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다잡았다.
  내국이 관심해야 하는 각전과 각궁에 혹시 병고의 낌새가 없나 두루 저녁 문안을 마친 허준은 하루 해 무탈한 대궐을 감사한 마음으로 돌아보며 퇴청길에 나섰다. 애고개 호젓한 산비탈길은 찬가위를 앞둔 소슬바람이 상쾌했다. 그 허준이 집 앞 개울을 건넜을 때였다.
  자기 아들 겸이를 앞세우고 한 인물이 사립 밖에 서 있는 걸 보고 놀랐다.
  사신 행차를 따라 명나라에 파견되었던 유도지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근자 스승 유의태의 면영이 가뜩이나 자주 뇌리에 떠오르는 허준은 스승의 혈육이 문득 자기의 눈앞에 나타난 사실에 놀라움을 느끼며 도지의 손을 굳게 잡았다.
  "사행이 돌아왔다는 소문은 수일 전에 들은 듯합니다만 수토 불편한 대륙길에 얼마나 고생이 되시었소?"
  "관품이 이미 유별한 터에 말 놓아 해도 되오리까?"
  "무슨 소릴 하오."
  허준이 다시 찬번 유도지의 손을 힘있게 흔들고 집안으로 이끌었다.

    5
  도지의 눈매가 전일과 달라져 있었다. 가고 오고 4개월이 넘는 머나먼 대륙길에서 겪은 고생을 허준이 위로했을 제도 딴때없이 말수가 적었고 1년 늦게 내의원에 들어왔건만 자기보다 이름을 더 드러낸 경쟁자에 대한 지난날의 시샘 어린 눈빛도 섞여 있지 않았다.
  "고맙다니 무슨 말씀이오니까?"
  동년배이건만 도지에 대한 존대는 근자 스승 유의태에 대한 새삼스런 존경과 그가 스승의 일점 혈육이라는 데 대한 새삼스러운 예우였다.
  "근자 있었던 얘기를 다 들었소. 어의가 허직장의 의술을 내 아버님의 성명과 싸잡아 매도할 제 한사코 반박했다는 그 말을."
  "난 아버님의 기대만큼 자라지 못한 인간이었소. 사람으로도 의원으로도."
  "무슨 말을 하오니까?"
  "더구나 내가 상경할 제 어의 양예수 앞에 내가 누구의 자식이노라 밝히지 말아라 하셨을 제도 귀담아 듣지 아니했소. 그건 넓은 세상에 나와 보지 못하고 산음 촌구석 의원인 아버님이 애써 자기의 존재를 어의와 빗대어 내세워보려는 허욕 섞인 말쯤으로 치부했소. 더구나 양예수 그 사람과 목숨을 걸고 맞섰다는 과거사일랑은 애당초 꾸며낸 얘기지 사실이라 여기지도 아니했고 ... 그러나 이번에 직장과 어의 사이에 오간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선 알게 되었소 ..."
  "비록 지난날이라 하나 나는 아버님의 의술이 양예수 저 사람과 필적 할 만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음을 믿지 아니했던 사람이오. 바로 내가 자식이면서 말이오."
  유도지의 말소리가 목안에서 잠겼다. 그러고 곧 감정을 추스른 도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자랑스러운 아버님을 앞장서 비웃고 앞장서 의절하고 음신을 끊고 마친내 임종조차 외면해 산 나는 ... 이제야 천하에 ... 불효 ... 막 ... 급한 인간인 ... 걸 깨달았 ... 소."
  허준이 유도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시울도 뜨거워지고 있었다. 또 한번 눈물을 삼킨 유도지가 천장을 향해 회한 어린 한숨을 길게 토했다. 허준이 위로의 말을 잊은 채 자기의 눈을 가렸고 그 손바닥도 눈물에 젖어 있었다.
  그 유도지보다 1년 뒤 내의원 관원이 되면서 맨 처음 찾아보고 스승의 별세를 알렸을 때 그 무덤의 위치조차 물어오지 않던 유도지였었다.
  그 스승의 무덤, 뭇 이름없는 민중의 병고를 더는 지름길이 될 오장육부를 담은 인체의 참모습과 그 생명체를 버팅긴 360가닥의 골격의 신비를 자기 몸으로 증명해 보이고자 자수로 목숨을 끊었던 사람 ...
  그 얼음골이 있는 골짜기를 넘어서 오르고 오른 천황봉 아래 서늘한 바람이 불고 첫새벽 첫햇살이 종일 양지를 이루는 촛대봉 아래 묻힌 이여 ...
  출사 후 혜민서에 떨어겨 낮도 밤도 없이 영일없는 날을 보낼 제 다가오는 첫 한식을 꼽으며 스승의 성묘를 애태우는 그에게 문득 찾아온 김민세가 위로했었다.
  "산 이를 위해 바쁜 터에 죽은 이를 위해 애태울 것 없다. 근자 내가 재약산 표충사에 발길이 잦고 그곳과는 길이 멀지 않으매 그 사람 무덤에 솟는 접풀은 내가 뜯어주리니 괘념치 마라."
  한양 밀양이 하루이틀길이 아님에서 김민세의 그 위로의 말을 믿고 아직 찾지 못한 무덤이나 지금 그 유의태의 넋이라도 살아 생전 돌아보지 않던 친자식이 스스로 끊었던 부자지연을 다시 잇고자 피눈물을 뿌리는 것을 안다면 그 또한 작은 위안은 될 것인가 ... 그 침묵한 두 사람이 마주 않은 방안에 아내가 술상을 보아왔으나 스승을 화제삼으면서 차마 술잔을 기울일 수 없는 허준에게 유도지는 자청하여 서로가 말미를 내어 아버지의 무덤에의 동행을 부탁했고 허준 또한 감격해 약속을 주고받았다.
  이날 허준은 유도지가 가져온 선물 앞에서 밤을 지새웠다. 금값 못지않게 귀물로 치는 중국비단 한 감은 허준에 대한 유도지의 깊은 감사와 우의를 드러낸 것이었을 것이나 허준이 놀란 건 그 비단 옷감이 아니라 유도지가 북경에서 객관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사보았다는 책 한 권이었다.
  중원의인전이라 이름한 그 책 내용은 중국을 중심한 인간 세상에 의술이 비롯된 역사와 그 수천년 사이에 명멸한 빼어난 의인들의 약전이 적혀 있었다.
  귀중한 인명을 다루는 지고한 업이건마는 베풀되 대가를 청구하는 업이다 하여 의를 천업으로 여기는 조선의 풍속에선 의업에 현저한 공이 있는 이도 기명해 기리고자 않는 터요, 아예 의원을 뽑는 자격에서부터 중인 이하의 신분으로 못박는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의업에서 공적을 이룬 이를 일일이 기록하고 기린 그 책은 면천이라는 신분상승의 집념으로 의원의 길에 들어선 허준에겐 하나의 새로운 경이요 환희고 자각이었다.
  책의 첫장은 의원의 시발을 신화에 두고 서술하고 있었다.
  우선 당나라 사마정이 쓴 삼황본기에선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의 오제본기와 더불어 복희씨, 신농씨를 같은 위에 두고 그 치적을 적기를 농, 상, 의의 개조요 인신우수의 모습을 한 신농은 인간 세상에서 처음으로 농구를 만들고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날을 정하여 저자를 열어 서로 필요한 물자를 교환하여 편리하게 사는 법도 일러주었고 또 채찍을 들고 다니며 풀과 나뭇가지를 쳐 그 즙을 일일이 맛보아 마침내 인체에 유익한 약초를 발견했는데 약초 아닌 독초를 씹고 하루에 70회나 중독되어 사경을 헤맨 적도 무수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신화 같은 얘기보다 허준의 눈을 부릅뜨게 한 것은 후한 말기 사람으로 한 병에 한 가지 약만 고집하지 않고 여러 약초의 효력을 혼합하여 최대의 약효를 자아내게 하는 탕약의 지혜를 발견하고 발전시킨 장본인이자 한의술의 불후의 명저로 꼽히는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저자 장중경이 장사 태수라는 고급관리였다는 사실과 또 됫날 이 장중경의 상한론을 정리하고 10권의 맥경을 저술한 왕숙화 또한 서진 때 태의령이라는 고급관리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밖에 놀라운 인물은 또 있었다. 신체 각 부위별로 침과 뜸의 효력을 해설한 일명 갑을경이라고도 불리는 황제삼부침구경을 쓴 황보밀의 천재성은 그의 불우한 청소년 시절 싸움을 밥먹듯 하고 돌아다니며 인간을 치고 때릴 때 신체의 급소가 어디라는 것을 알게 된 데서 비롯하였다는 일화 등은 허준의 가슴을 밤새 두근거리게 했다.
  이미 천수백 년 전 옛사람들의 일화집에 불과한 그 내용일지나 입지한 그 인물들이 모진 운명의 시련으로부터 마침내 의업에 정진해간 여러 모습에 비해 자기는 과연 무엇을 새로 찾으려 노력했는가 하는 자성이 그를 괴롭혔다.
  자기가 지금 의에 잔해 아는 것이 어디까지며 무엇을 더 알고자 애쓰고 있는가 돌이켜볼 때 아직 의원으로서 눈을 다 뜨지 않은 자신의 왜소함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찾아오는 병자와 맡겨지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고 정성은 기울이되 사람의 능력이 세상 모든 병자를 다 만날 수 없고 모든 환자를 찾아갈 수 없다 할진대 그 모든 이에게 병을 이겨내는 지혜를 가르치는 방법은 자기 또한 세상 모든 이들이 만병의 치료법을 찾아내는 책을 만드는 길 밖에 없다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1천여 년이 지나도록 하나도 낡지 않는 방법으로 쓰임을 받는 책을 내기에는 자신의 의원으로서의 지식과 경험이 아직도 너무나 보잘 것 없다 여겨진다.
  더 배워야 하리. 더 배우고 더 겪고 해야 하리.
  벼름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그 말을 무수히 뇌며 꼬박 날을 밝힌 허준은 그 새벽 뚜렷한 하나의 결심을 했다.
  "일차 중국을 다녀오리라!"
  잊고 있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사행에서 돌아온 인물이 전해준 얘기.
  이시진인가 하는 중국 의원이 저술하고 있다는 본초강목인가 하는 책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마치 눈앞의 불길이나 되는 듯이 허준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게 했다.
  "일차 다녀와야 하리!"
  그 방법은 생각 않고 허준은 그 결심부터 재삼 자신에게 일렀다.
  "꼭 다녀와야 하리!"
  어느덧 날이 밝아 아침 새소리가 소란히 지저귀는 소리를 한귀로 들으며 허준은 이날 따라 입궐을 서둘렀다.

    6
  그날 밤 술시, 하루 업무의 마지막 임무인 각전과 각궁의 저녁 문안을 돌 때 일행을 선도하는 정작에게 허준은 중국행에 대한 자신의 강한 욕구를 토로했다. 동행하던 이공기가 놀란 얼굴로 그 허준을 돌아보았고 정작도 걸음을 세워 그 자세한 진의를 듣고자 했다.
  허준이 일시적인 충동에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의 소망임을 얘기하자 정작은 그 허준의 손을 잡고 힘있게 흔들었다.
  그 아귀힘 속에는 전폭적인 지지와 만강의 경의가 담겨 있었다.
  "유념해주시오니까?"
  정작이 즉답했다.
  "이를 말이오. 사행에 배행하는 기회를 한 품계 승차하는 길로 여기는 문신들이나 한밑천 벌어들이려는 장사치들의 꿍심이 없고선 지원하는 인물이 없는 터인데 허직장이 솔선한다면 또한 내의원에서 모범이 될뿐더러 나 또한 작은 근심을 하나 더는 길이 되오."
  허준은 그 말뜻이 뭔지 알았다.
  한 차례에 2백 명을 오르내리는 사신 행차요 그 일행의 무사 귀환까지의 발병을 막고 병치레의 수발을 맡아 동행하는 배행 의원은 한 사람이 고작이다.
  길은 또 얼마나 먼가. 편도 3천1백 리 왕복 6천2백여 리가 되는 그 고된 노정을 나귀 한 마리 배당되지 않은 의원의 신분으로 온갖 상비약통을 둘러메고 죽자살자 좇아가고 오는 그 보행길은 난생 처음 이국 풍정을 구경한다는 호기심 외 건져지는 것이 없다.
  더구나 내의원 의원의 출세는 궐내의 왕족들의 발병과 치료에 있는 것이지 외국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따윈 술상머리의 안주감이 고작이다. 뿐이랴. 한번 무사히 다녀오면 그 경험을 사 2차 3차 다사 선발되는 달갑잖은 선례가 있고 보면 내의원 의원들에게 있어 사행 배행은 자신의 출세를 방해하는 악운으로 두려워한다.
  "순차도 무시하고 불쑥 청하는 것이 딴 사람의 질시를 자청하는 일 같사오나 ..."
  허준의 말에 정작이 강하게 고개를 젓고 다짐했다.
  "의원의 길이 어찌 의서 속에만 있다 하겠소. 마음을 세우기 따라선 타국의 수토를 밟아보고 맛본다 함은 결코 값싼 경험이 아닐 줄 아오. 내 꼭 허직장으로 하여금 절후가 순탄할 제 떠나는 사행 속에 끼어 가도록 애써보리다."
  같은 사신 행차라도 혹서와 엄동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그 시기를 선택할 수 없는 하급 관원으로서는 행운에 속한다.
  허준은 그 세심한 정작의 배려가 고마웠다. 또 새벽녘의 결심이 불과 하루 사이에 성사가 된 데 더더욱 기뻤다.
  세상살이를 한낱 구경꾼과 같은 호기심만으로 살 수 있으랴만 조선 사람에게 있어 중국은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외국이었다. 더구나 그 중국의 문명을 수없이 젖줄처럼 빨아들여온 조선으로서는 선비들은 선비들대로 공자가 태어난 나라, 주자학의 본산인 중국의 실체를 보기를 평생 소원으로 삼았다.
  선비가 아닌 신분일지라도 온 세상의 중심에 위치한 나라라 자처하며 국호 또한 중국으로 부르는 대국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더구나 의술에 관한 많은 지식을 그 중국에서 받아오는 데 관심을 품은 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육지로 이어진 나라요, 개인의 욕망이 아무리 치열할지라도 개인의 자격으로 국경을 넘는 일을 쌍방이 사죄로 다스리고 있는 한 조선 사람 중 무사히 국경을 넘는 자격은 극도로 한정돼 있다.
  그 국경을 넘는 명분이 엄격히 말하여 대등한 나라 간의 대등한 자격으로의 교류가 아닌, 한쪽은 황제가 파견하는 칙사요 한쪽은 왕이 파송하는 사신인 것이고 더 사실대로 말하면 조공행차라 하여 과언이 아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에 이은 우리의 국호를 조선으로 할지 화녕으로 할지 품신한 끝에 명태조 주원장이 찍어준 대로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조선'으로서는 사대모화는 곧 부동의 국시였음에서 개국 후 중국에 보내는 사신 행차는 조선 조정으로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최중요한 국가행사이기도 했다.
  물론 그건 조선에 대한 중국의 직접 지배를 의미하기보다 정치적 복종과 견제를 뜻하는 것이지만 사행 내왕의 명칭, 구성, 여정, 의식, 활동, 교역행위 등은 세밀한 규정으로 묶어 통제되고 있었다.
  그 통제의 내용은 정기적인 것으로는 한 해가 저물기 전에 가 뵙는 동지사, 새해가 열리는 정초에 가 뵙는 정조사, 황제의 생탄일을 축하차 참례하는 성절사, 황실의 중요 제사에 맞추어 가는 천추사 ...
  그밖에 감사할 일로 가는 사은사, 무언가 청할 일이 있어 가는 주청사, 축하할 일로 가는 진하사, 위로할 일로 가는 진위사 등등이 잇따르고 아울러 사신 행차의 삼사로 칭하는 정사, 부사, 서장관은 임명과 함께 한 품계가 특진하는 것이 관례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항시 2백 명을 오르내리는 구성원들 속에는 이 모처럼의 허가받은 외국 나들이를 돈벌이나 귀한 물품을 사들여오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오가는 동안의 식량은 물론 마소의 먹이조차 자체 부담이요, 그 허드렛 짐들을 운반해 가는 아랫것들의 머릿수는 제한하되 인물의 선택은 삼사의 재량이었기에 그 수많은 사신 행차는 또 공공연히 대륙의 문물을 수입해오는 유일한 기회에 속했다.
  그러나 비록 어떤 명목의 사신 행차라 할지라도 화약의 원료인 염초, 허가되지 않은 서적 그러고 지도의 밀반출은 극도로 엄한 범금사항이었다.
  그 소국에 대한 대국의 독선과 편협함은 여말 문익점이 몇 톨의 목화 씨앗을 숨겨 들어오기 위해 붓대통을 이용해야 했던 시대로부터 결코 더 너그러워져 있지 않다.
  "이시진이라 ..."
  각전에 대한 밤문안이 끝나고 정작과 함께 정청으로 돌아가야 할 이공기가 허준의 직처인 내국으로 따라와 퇴궐하는 모습의 이명원을 앞에 두고 말했다. 허준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의서 속에 본초란 말이 운운된 것이 일이백 년 전 얘기도 아니요, 양나라 때 도흥경이 저술한 본초집주, 당 때 퍼진 신수본초도 귀에 익었고, 또 ..."
  "암 많지. 북송 말년 경사증류대관본초 또 당시 태의국의 검사역을 지냈다는 구종석이가 쓴 본초연의도 그 실용적인 가치는 오늘날에로 알아주는 바고 전의감에 가면 몇 권 결락되긴 했으나 필사한 10여 권은 내 눈으로 본 바도 있네."
  이명원이 퇴궐을 미루고 두 사람 사이에 끼여 앉았다.
  "헌데 왜 갑자기 본초 얘기가 무성한 겐가?"
  "허직장이 북경에 가고자 자청했어."
  "무슨 소린가. 자청을 해?"
  두 친구의 시선 앞에서 허준이 말했다.
  "지난번 사행을 배행하여 북경에 다녀온 유봉사로부터 중원의 인전이라는 책을 하나 얻어 보았는데 그 속에 보제방과 구황본초를 저술한 주숙의 얘기가 있었소."
  "주숙이야 불과 100여 년 전 사람 아니오?"
  "대개의 의서들이 몇백 년 혹은 천 년도 넘는 고서들로 오늘날에도 참고하는 것이 많은데 불과 170년 전의 책이라면 보다 쌔로운 것들을 다시 망라했다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보아도 되겠지."
  이명원의 대답에 이공기가 물었다.
  "헌데?"
  "그 주숙의 보제방에 집록된 처방이 모두 몇 가진지 아시오니까?"
  "그거야 알 수 없지 않소. 그건 왕실 서고 안에도 전질이 없다고 들었고 남아 있는 권수 속에서도 산일되고 결락된 책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터에."
  "이번에 난 알았습니다. 그 보제방 전질에 집록된 각종 처방이 무려."
  "무려?"
  "...?"
  "육만천칠백삼십구 종에 이른다는 것을."
  말끝에 허준이 소매 속애서 중원의인전을 내놓자 이명원의 손이 책으로 뻗었다.
  "내가 말을 잘 못하고 있는 게 아니오이다. 다시 말하오만 각 병에 대한 처방이 육만 천칠백삼십구 종이 적힌 책, 상상이 되시오니까?"
  주숙의 난을 찾아 책장을 넘겨가던 이명원의 손이 정지했고 함께 들여다보던 이공기가 말했다.
  "생전의 공적을 기리어 시호도 내렸군, 주정왕이라. 의원이라면 상놈의 사촌쯤으로 여기는 우리 신세에 비해 왕자 붙은 시호를 내리다니 의원의 씀씀이를 알아주기는 알아주는 땅이로군. 그래 이젠 중국에 가서 왕자 붙은 의원 노릇도 하고 싶소?"
  이공기가 자조와 농담을 섞어 책을 다시 이명원에게 남겼다.
  "농담이 아니오이다."
  "나도 농담이 아니오. 왕자가 붙건 무슨 자가 붙건 그건 중국에서의 얘기고 조선 땅에 태어나고서야 고작 바라볼 수 있는 높이란 정해져 있는 터요. 암튼 혼자 육만 종이 넘는 처방을 써냈다는 것만도 보통 의원이 아님은 짐작이 가는군."
  허준이 본론을 꺼냈다.
  "놀라운 것은 주숙의 보제방이 나온 지 불과 100여 년인 지금 새로운 의서가 저술되고 있다는 사실이오."
  "새로운 의서?"
  "이시진의 책명도 나와 있소. 본초강목."
  "책 속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소만."
  이명원이 책장을 되넘기며 묻자 허준이 말했다.
  "책장 첫머리 저자의 서문에 언급이 돼 있소."
  책장을 되넘기는 이공기와 이명원의 시선이 책장에 박혔다.

    7
  그 두 사람에게 허준이 계속했다.
  "문맥은 간략하나 이 책의 저자가 그 이시진을 만나본 모양으로 아직 완성은 아니했으나 작자의 의도를 부연하여 그 완성된 책의 목표에 의할진대 세상 만병의 발단과 진행을 열여섯 줄기로 대별한 후 이어 1,892종의 동, 식, 광물을 망라한 약물의 각 효험을 상술하려는 방대한 계획인 걸 알 수 있소."
  "천팔백아흔두 가지라 ..."
  "시진?"
  "지금 그 이시진이 전대미문의 방대한 의서의 완성을 위해 저의 나라 천지를 10여 년째 채집 여행중인데 그 완성의 시기는 앞으로 다시 몇 년의 세월을 더 쏟아야 할지 모른다 적고 있소."
  "그래서 북경에 가서 이시진을 만나보려는 계획이오? 만나서는 어쩌려오?"
  "십수 년째 나라 안을 여행해 다닌다는 인물이라면 내가 바란다 하여 어디서 마주치리란 행운을 바랄 수 없으나 혹 이 책의 저자를 만난다면 의에 일생을 바치는 이시진에 대한 더 좀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합니다. 적어도 이 저자는 그 이시진과 더러 음신을 주고받은 느낌이 드니만큼."
  "욕심이오."
  자조도 농담도 지운 이공기의 말이었다.
  "욕심이라니?"
  "그건 의술을 떳떳한 생업으로 보아주는 고장에서나 꿈꾸어볼 수 있는 욕심이지."
  "난 의원을 세상이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오이다. 세상 병든 동족들의 병고를 덜어주고자 자신이 살아 있을 제 자신의 의술을 뽐내는 의원은 많으나 자신의 의술과 체험을 책으로서 남겨 후손들의 병고를 치유할 손잡이가 될 책자를 남긴 이는 없다는 그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는 것올시다."
  "...!"
  "...?"
  "더러 학문을 지닌 사람 중에 의술에 대해 저술한 이들이 없다 하진 않으나 넒은 세상을 위하는 데 뜻을 두지 않고 제 문중 제 족벌에나 이용하는 옹색한 발상이 태반인 건 우리도 아는 일 아니오."
  "분개할 것 없지. 당연한 일인즉."
  이번에는 이명원이었다.
  "당연하다니?"
  "글깨나 알아서 무엇을 기록하노라 끄적이는 학문은 양반이나 누리는 특권이요 사람 축으로도 안 보는 세상 까막눈들뿐인 병자를 상대로 양반이 책을 왜 짓소? 더러 장삿속으로 지어봄직하지만 손에 돈때 묻히는 걸 부끄러이 여기는 그들이 그런 수고를 자청할 까닭도 없소. 차라리 그런 일은 나라에서나 할 일이오만 그런 아름다운 모습도 향약구급방이다 뭐다 펴낸 세종임금대 얘기지. 물론 양반 아닌 사람도 결심할 수 있으리다. 그러나 그 많은 세월 그 빛볼지 말지 한 일에 누가 일생을 걸어 이루고자 하겠소. 처자식 계량은 누가 맡으며 수만 장 소용될 종이값은 누가 대고 오만 가지 약효를 증험하는 그 노력은 아무나 결심할 수 있는 일이오? 일상으로 사용할 수십 가지, 많아서 수백 가지 정도의 기록이면 모르되 보제방이니 본초강목이니 그 어마어마한 중국의 규모에 견주는 책을 꿈꾼다면 뜻은 갸륵하되 그건 꿈이오. 의원을 사람대접하는 중국땅에서나 있음직한 꿈."
  세 사람 모두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중원의인전을 들쳐보는 이공기가 한숨을 가만히 내쉬는 소리를 들으며 허준이 허공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그 눈이 자신에게 되풀이 자문하고 있었다.
  그래 꿈이다. 물론 꿈이다.
  '그러나!'
  하고 허준은 자신에게 반문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의업에 일생을 바치고자 하는 누군가가 ...
  의술이 아무리 정예해도 그 의원이 생명이 있는 동안의 술이요, 또 인간의 능력이 한계가 있는 것이라면 한 인간의 의술이 삼천리 방방곡곡 모든 이의 병을 살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럴수록 직접 의원이 달려가지 않아도 고칠 수 있는 방법, 그 의원이 죽은 후에라도 그 의술이 맥맥이 살아 있는 방법은 이 나라의 누군가도 중국의 주숙처럼 이시진처럼 보제방이나 본초강목에 뒤지지 않는 책을 적어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할 일이다!'
  방법과 수단은 뒷전이고 그 뜨거운 결심이 먼저 허준의 온몸을 불덩이 처럼 달구고 있었다.
  이날부터 허준은 앓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태평한 대궐을 건너보며 무사안일하게 날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세월이 귓전을 구르는 수fp바퀴 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피치 못할 무슨 일이 있사온지?"
  끙끙거리는 남편의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들으며 아내 김씨가 물었고 그 아내에게 허준이 자신의 소망과 결심을 얘기한 것은 정작에게 중국행을 간원하고 두 달이나 앓고 난 후였다.
  억지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안달한다 하여 단숨에 갈 수 있는 길도 아니었다.
  그런 어느날 내국 밖 감나무에 홍시가 서리를 이기 시작했을 때 드디어 진위사 명목의 사신이 조직되고 있음을 소문들었다. 북경 명의 대궐 황후의 전각에 대화가 일어 그겻을 위문해 가는 행차라 했다.
  이제나저제나 정작으로부터의 지명을 기다리던 허준은 고직, 노자, 일산봉지, 인로, 쇄마영장 등 사신 행차의 각 부서가 날로 구체적으로 짜여지는 걸 듣다 못해 스스로 정작을 찾아갔다.
  정작은 반가이 맞았고 그 대답은 정에 겨운 것이었다.
  이미 동절에 접어드는 시절인데 북방 대륙을 간다는 것이 평소의 몇 갑절 호된 고생이 되리라는 점에서 다음 차례를 생각하고 있노라는 것이었다. .
  허준이 간청했다.
  어차피 오가고 5개월의 노정이다. 갈 때 추위에 당하는 고생을 무릅쓰면 돌아오는 귀로는 춘삼월이니 귀로의 편안함으로 가는 길의 고생은 달가이 겪겠노라는 말과 함께.
  그 허준에게 어의 양예수가 사행 배행의원의 허락을 내려준 것은 시일이 길게 걸리지 않았다.
  또 뒤늦게 허준과 동행을 청원한 이공기가 의원의 정수가 한 사람뿐임에 교부속(가마꾼)으로 부서를 바꾸어 동행이 인정된 것은 어의 양예수가 전에 없이 아랫것들에게 베푼 온정일 것이라 할 것이었다.
  사행 일행이 떠나는 날 허준이 당분간 세 살과 네 살이 된 두 왕자의 수발을 떠나 향명 인사를 드리고자 진숙궁에 나타났을 때 이젠 허준을 동기간의 한 사람만큼이나 어여삐 보는 공빈은 두 왕자에 이어 세번째 아이를 포태한 행복한 얼굴로 노자에 보태라 순은 열 냥을 내리었다.
  배례하고 하직해 대궐을 떠나는 허준은 행복했다.
  인정전 넓은 뜰에서 사행 일행이 임금께 기정(출발)을 아뢰고 궐문을 나섰을 때 뒤늦게 미사가 나타나 허준의 짐 속에 작은 짐을 보태었다.
  그것이 북로 3천 리를 갈 허준이 몸에 걸칠 방한 목도리요 겹옷 한벌인 걸 허준이 안 것은 조선의 국경 관문인 의주에서 고국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짐을 정리할 때였다.
  다행히 서장관에게 정작이 부탁하였기 가마잡이인 이공기도 여타 가마꾼과 떨어져 허준과 기거를 함께 했다.
  대륙의 밤은 추웠다. 밤뿐이 아니라 낮도 마찬가지였다.
  세모를 맞이한 섣달의 대륙은 눈바람이 아우성을 치며 사행 일행을 몰아쳤다.
  그러나 온몸에 휘감기는 눈보라와 살을 에는 듯한 북풍 속에서 허준도 이공기도 고생 아닌 상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일망무제의 들 ...
  누런 황토의 광활한 대지에 떨어지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두 사람은 지금은 옛전설이 되고 만 지난날 선조 고구려의 천군만마가 치닫던 옛 화제도 흥겨웠다. 압록강을 건너 첫잠을 잔 곳이 봉황성. 다시 사행 일행에 섞인 허준이 연산관, 요동, 심양, 광령, 사하, 산해관, 통주를 거쳐 명치 수도 북경에 닿아 명의 예부에서 영접 나온 관리들의 안내로 사신들의 객관인 북경 회동관에서 여장을 푼 것은 고국에서 아들 겸이 녀석들이 삼개 강나루에서 신나게 쥐불을 돌리며 놀 정월 보름 밤이었다.
  북경의 밤은 소란했다.
  넓고 화려한 황궁 하늘로 잇따라 솟아오르는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조선 사신을 영접해서가 아니었다. 북경의 설은 정월 보름이 지나도록 신년 축제가 계속되는 탓이었다.
  3천여 리 걸어온 노독을 앓으며 모두 곯아떨어진 객관에서 그러나 허준은 자지 않고 있었다.
  이국의 선율, 그 호궁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본초강목 ... 그 아직 보지 못한 방대한 의서의 모습과 역시 한번도 면식이 없는 그 저자 이시진이란 중국 의원의 얼굴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대기 때문이었다.
  "꼭 보고 말리라!"
  그것이 왕복 7천여 리를 걸어 오가는 목적이라는 듯이 다시 결심을 뇌었다.

    8
  허준을 포함한 조선의 사행이 북경에 도착, 명의 예부 관리들로부터 하마연의 환영잔치를 받은지 달포, 다행히 사행 중에 가벼운 배탈이 난 자 외는 큰 병자가 없어 허준의 행동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가 바라는 목적은 쉬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의사일반을 총괄하는 태의감 관리들과 수인사를 하고 말문도 터봤으나 속국시하는 조선 내의원 직장이라는 하품직 의원을 상대로 따분한 의업에 관한 화제를 성의를 지니고 상대하는 이가 없었고 허준이 시종 꺼내는 중원의인전의 저자의 존재나 본초강목이라는 저서를 쓰고 있다는 이시진이라는 의원의 이름도 두 손 바닥을 저으며 금시초문이라는 형용뿐이었다.
  "뇌물이 없어 딴전을 피우고 있는 게 아닌가?"
  노심초사하는 하루하루가 오늘도 소득없이 지나갈 기미이자 줄곧 동행하던 이공기가 말했다.
  조선 사행을 보고 중국관리가 물어오는 관심사의 첫째는 으레 인삼의 매물이 있는지 여부였다.
  허준 들의 안내를 맡은 예부관원 정대안의 관심도 그랬다. 자신이 인삼을 지참하지 않았으며 대신 수달피 한 장을 가져왔노라며 선물로 내놓았을 때 상대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수달피 가죽은 고국에서 김병조의 병을 완치해준 데 치사하여 공빈이 따로 내려준 선물이었고 이곳에서도 인삼 몇 근의 시가에 견줄 진품이었다.
  그러나 그 정대안도 뜻밖의 선물에 되풀이 감사함만 연발할 뿐 허준이나 이공기의 질문에는 '부따이칭주(잘 모르겠다)' 그 한마디로 고개를 외로 꼴 뿐이었다.
  "아무래도 며칠 더 기다렸다가 역원을 대동하여 상세히 물어봐야겠소. 소속이 확실한 인명이라면 몰라도 야인의 모습으로 떠돌아다닌다는 이시진이란 이름을 필담만 가지고는 우리의 본의를 제대로 알아듣기나 할지 그것부터 의문이오."
  과연 정대안은 우호적인 미소만 얼굴 가득 띠고 원로의 객을 건너다볼 뿐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조선말은 제대로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역원을 대동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는 타국임에서 공무 이외에도 통역을 필요로 하는 관원들이 한둘이 아닌데다 허준이 지닌 의원이라는 직분이 통역들이 되돌아볼 만큼 대단한 존재도 못되어 개별 행동을 엄히 금하는 사행의 규율을 고집하기 때문이었다.
  그 두 사람의 초조한 심정을 살피고 정대안이 오히려 앞장서서 짐작되는 의사 관계의 여러 인물들을 자기 집에 초치해놓고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그들의 입에서도 이시진이란 이름 앞에서는 '부따이칭주'가 나을 뿐이었다.
  허준의 초조가 더해갔다. 말단 의원일지라도 사행에 끼인 이상 사행으로서의 공적인 일정이 있다. 황제의 나라의 황궁 참배, 의원과 관련되는 태의감 예방 따위로 시일이 여러 날 녹아났다.
  "이 꼴로 불려만 다니다간 황궁 구경이나 하는 걸로 일정을 소일하고 말 텐데 무슨 수가 없으리이까?"
  "나도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소만."
  "황궁 구경이 끝나면 다시 도성 내외의 명소와 고적 등을 탐방하고 유람할 일정이 또 기다리고 있다는데 ..."
  "그거야 병이라도 칭탁하여 그 일정에서 빠질 수도 있겠지만 ... 그래서 우리 두 사람 거리에 나가련들 적어도 이시진의 이름 정도 알고 있노라는 안내자부터 만나야 할 터인데 어딜 가야 그런 인물을 똑바로 만날 수 있을지 그것 또한 난감한 일 아니겠소."
  "그러니 ...?"
  "금명간 어떤 결단이 없고서는 오가는 6천여 리 이 길은 허행이 될 게 뻔하오."
  허준의 입안이 또 메말라왔다. 양국이 인정하는 화급한 현안 문제가 개재되지 않는 한 사행의 북경 체류 기한은 엄격하게 40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 제한된 40일 중 28일이 속절없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아니 앞으로 남은 열이틀도 귀국에 앞서 잡다한 준비를 빼놓을 수 없고 보면 정작 허락된 북경 체류의 날짜는 열흘도 남지 않았다 함이 옳다.
  "어쩌리까?"
  이공기가 또 물어왔을 때 문득 허준이 대답했다.
  "서장관을 만나볼까 하오만."
  "서장관을 왜?"
  "당돌한 행위이긴 하되 정판관 그분과 교분이 있는 분이라 그걸 빌미 삼아서."
  이공기가 재빨리 허준의 말을 알아들었다.
  "부탁하고자 하는 일들이 그분의 임무와 상치된다는 것을 생각해보시었소?"
  물론이다. 생각했다 뿐이랴.
  지금 자기가 부탁하고자 하는 내용은 실사 미리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식 있는 인간이면 차마 꺼낼 수 없는 얘기에 속한다.
  서장관이 비록 임시직이긴 하되 정사 부사에 이은 사행의 세번째 큰 책임자요 행대어사라는 서슬 푸른 직책을 겸해 있다. 그 행대어사 직책이란 출발 후 귀국까지의 사행의 모든 동정과 공무에 관한 사안을 기록하는 것을 필두로 사행 구성원들이 허락없이 지정된 주거를 떠나거나 조선 사신의 일원으로서 함부로 품위를 해치는 행동에까지 감시하고 기강을 독찰하는 소임도 가졌다.
  바로 그 서장관에게 지정된 공무일랑 병을 칭탁하여 빠져서 그 시간에 산사로운 관심을 채우고자 숙소를 이탈할 내락을 청할 수 있는가 ...
  "만나보겠네."
  갑자기 허준이 자신의 결심을 서두르듯 강하게 말했다.
  "...!"
  "이번 길 이대로 허행할 순 없어."
  묵묵하던 이공기가 이윽고 찬의의 뜻으로 허준의 손을 굳게 잡았다.
  그러나 찾아간 두 사람은 서장관을 만나지 못했다. 정, 부사와 함께 예부에 들어간 서장관은 아마도 밤이 늦어서야 숙사로 돌아오리라는 호위영장으로부터의 전갈을 전해 들은 것만도 해가 한낮이나 기운 시각이었다.
  저녁에 다시 찾아올 것을 기약하고 대국의 경관을 구경하는 일정에 끼여 만리장성으로 향했다.
  북경성을 나설 때 싸락눈이던 일기는 일행이 장성에 이르는 동안 점차 눈발을 더해가더니 장성 성벽에 오를 때는 온 천지가 백설로 뒤덮이는 장려한 눈보라로 바뀌었다.
  장히 한 시각은 넘게 여름날 소나기처럼 눈보라가 퍼붓고 지나간 그 장성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고색창연한 검붉은 성벽들이 구름이 벗겨지는 하늘에 봉우리마다 치솟아 대륙의 야산을 끝간데 없이 휘감고 꾸불꾸불 이어간 광경이며 그 성벽의 돌쩌귀 하나하나엔 역사의 피비린내가 맡아지는 듯했다.
  천수백 년간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대륙의 패자들이 저마다 쌓고 꿰어 이어 탄생시킨 그 장성은 처음 북쪽에 웅거한 전쟁의 주력인 기마전단의 침입을 저지하고자 하는 게 목적이었으나 인간의 행복과는 한치도 상관없음을 그 목적에 얼마나 많은 죄없는 인간들의 눈물과 한숨에 묻어 완성된 것인가 ...
  서로는 고비사막의 초입인 지아유이관에서 동으로는 발해만의 샨하이관에 이르는 1만 5천리 뺏고 죽이고 스스로 도망해간 인간사의 어리석은 증거가 거기 뻗어 있었다.
  "크긴 크군!"
  두 키도 세 키도 넘을 굉장한 눈더미 속으로 이어간 검은 장성의 성벽의 끝을 쫓던 이공기가 시선을 거두어 허준을 돌아보았다.
  '이시진 ... '
  허준이 또 한번 얼굴도 모르는 중국 의원의 성명을 가슴속에 뇌며 이공기와 나란히 앞서가는 안내자인 정대안 뒤를 따랐다.
  몰아쳐 오던 북풍이 성벽을 들이치며 회오리바람처럼 눈가루를 흩날리다가 성벽을 타넘어왔다. 허준과 이공기의 도포자락이 역풍을 맞은 돛폭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날 밤 ...
  허준과 이공기로부터 내방한 사유의 자초지종을 들은 서장관 이동형은 안색을 바꾸었다.
  유해 보이다가도 시선을 박고 정색을 하면 금방 호상이 되는 그런 얼굴이었다.
  예기치 못한 방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낱 말단 관원의 입에서 꺼내는 간청이기엔 너무나 당돌한 것이다.
  과연 입을 연 그의 어조는 차가운 위엄이 온 얼굴에 서려 있었다.
  "서책은 금수의 항목인 걸 아느냐?"
  "아옵니다."
  허준이 대답했다.
  "인허를 아니 마치거나 공판되지 않은 책을 가져가려는 것은 더구나 중죄가 되는 것도?"
  "아옵니다."
  이공기가 고개를 조아린 채 부연했다.
  "서책도 서책이려니와 이시진으로 알려진 그 인물이 관원이 아닌 야인임은 확실한 듯하옵니다."
  허준도 말했다.
  "이시진이란 인물을 만나려 함이 결코 사리를 도모함이 아니옵고 의원으로서 세상을 위해 쓰여질 의서를 펴낸다 함은 너나없는 소망이오나 일차 그를 만나 그 방법과 경험 등을 들어보고자 함이옵니다."
  "그 점 믿어주시옵소서."
  이동형이 두 사람을 한꺼번에 보며 말했다.
  "내가 조선 사람이요 너희가 조선 사람이니 우리가 믿고 아니 믿고는 논할 것이 못된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너희들의 뜻이 아무리 사심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곳에선 관허를 얻어서 보고 듣고 만나는 것은 막지 아니하되 그 외의 행동, 사사로이 이 나라의 서책을 국외로 반출하는 행위가 발각될 제는 자칫 목숨도 떨구는 수가 있어. 이도 아느냐?"
  "그토록 심하게 제재하는 이유가 무엇이오니까!"
  "자국의 문화는 곧 기밀로 여기고 있는 때문이다."

    9
  그날 두 사람의 개인 경력까지 일일이 묻고 나서야 서장관 이동형은 두 사람의 진심을 이해한 듯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격려였다.
  "너희들의 행위가 조선의 민서들에게 보탬이 되는 길이라면 막지 않으리라."
  그러나 조선의 사행의 일원인 이상 자신이 사람을 놓아 이시진의 행방을 수소문할 인물을 찾아주기까지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당부한 끝에 한 가지 상징적인 말을 덧붙였다.
  "국경을 오가는 물목 일체를 책임진 나로서 앞장서 너희들의 소원을 거둘 순 없되 내 알기 책은 책이되 규방의 소일거리나 되는 전등신화 따위 책자는 더러 서사에서 구한 이들이 겉장을 바꾸고 들여온단 말은 들었다."
  "겉장을 바꾼다 하오면?"
  "논어의 겉장이라도 좋고 당시의 겉장도 ... 한족들이 자랑으로 삼는 책인즉 까탈을 걸지 아니해."
  "...!"
  또 그런 따위야 설사 내용이 드러났다 한들 오가는 길에 심심파적삼아 보았노라든가 객사에서 읽던 중 미처 다 보지 못하여 들고 왔노라 하면 굳이 따지지는 않는 수도 있다니 허준도 이공기도 서장관이 무슨 말을 들려주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두 사람은 서장관에게 깊이 고개 숙여 감사했다.
  상마연은 출발 이틀 전에 있었다. 안내받았던 각 부서별이 아닌 사행에 속한 전원에게 직위의 높낮이대로 자리가 정해지고 역시 역할의 높낮이대로 명의 조정에서 내리는 기념품과 선물이 각자에게 배당되었다.
  그리고 이날은 사행에 속한 모든 인물이 저마다 바쁜 날이기도 했다.
  예부에서 주관한 그 공식적인 송별잔치가 파하자 문신들은 그 동안 사귀게 된 명의 조정의 요로 관원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그 신분이 아닌 인물들은 거리 구경을 나가고 그것을 겸하여 고국에 가져갈 선물을 사들일 마지막 기회였다.
  사신 일행 속에 묻어온 장사치들도 이날은 바쁘다. 도착하면 으레 겪는 현지 장사치들이 후려때리는 값에 불만, 아예 안 판다는 대답으로 물건을 내놓지 않은 그들도 이날쯤에는 그 동안 틈틈이 알아둔 그쪽의 장세를 근거로 짐을 털어 팔고, 돌아가 또 한 행보 이문을 남길 물건들을 꾸리기에 밤들을 새운다. 또 한패거리. 이국의 마지막 밤을 청루에 올라 꾸냥들의 술시중을 받으며 객지에서의 호기를 부리는 날도 이날이었다.
  허준은 오랜만에 취해 있었다. 이시진이라는 인물을 얼마나 그리며 이곳에 왔던가.
  만나보리라, 얘기해 보리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도 일었다.
  도대체 자기는 본초강목이라는 책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왜 그토록 빠져들어갔던가. 굳이 생각컨대 자기의 마음 깊숙이 언제부턴가 지금 이시진이가 행하고 있는 새로운 의서 찬술이라는 꿈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건 언제부터일까, 고향 용천을 떠나 동서남북 어느 곳 하나 갈 곳도 없이 오로지 호구를 위해 지리산 그 숱한 골짜기를 헤매던 때부터일까.
  모른다. 아니 그러한 꿈은 혜민서에서 만난 저 수많은 가난한 병자들을 접하면서부터 인지 모른다.
  어렵게 씌어진 의서의 조목을 짚어주며 굳이 한자로 씌어진 오만 가지 어려운 약초이름을 항간에 통용하는 쉬운 우리말로 풀어주던 그런 어느날부터의 잠재했던 욕망이었을까.
  콩나물을 일러 대두황권이라고 표현한 의서 속에서 오히려 내 나라 말의 아름답고 정겨운 표현을 상기하며 싹트기 시작한 내 나라 산천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세종임금이 창제했다는 내 나라 문자를 언문이라 일컫되 그 언자를 일러 자전은 상말 언자로 부른다.
  상것들이 쓰는 문자 상말 언자 언문이라 불러 시비거리야 될까마는 그 언문에 비해 진서로 우대받는 한자는 분명 내 나라 글이 아니다. 혜민서에 찾아든 그 수많은 가난한 병자들이 부르기 쉽고 알기 쉬운 콩나물 대신에 대두황권이라는 어머어마한 표현에 주눅부터 들어서 그 약재가 비싸고 귀한 약인가 하여 주저주저 물어오다가 그것이 우리 말로 콩나물임을 알자 가가대소하던 웃지 못할 모습에서 장차 조선의 모든 약초에 제 이름을 찾아주어야 하리라 잠시 잠시 마음먹었던 그러한 아쉬움들이 한겹 두겹 쌓여 마침내 만가지 의초들을 망라했을 법한 본초강목이라는 책이름 앞에서 자기는 서둘러 이곳 중국땅에 이시진을 찾아온 건지 모른다.
  허준은 그 소득없이 돌아가는 허허한 가슴속에 자꾸만 술을 채웠다. 그리고 그 가슴에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은 자성이었다. 의약에 관해서 이치나 그 응용에서 이 중국이 더 유식하고 더 활발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유는 많으리라. 의원을 번듯한 생업으로 보지 않고 천시하는 조선이라는 토양에서 뛰어난 의원, 번듯한 의서가 태어날 수 없다는 사정도. 그러나 따지고 보건대 내 나라 조선인들 의약의 역사가 결코 중국에 비해 짧은 것이 아니잖은가.
  환웅천왕이 신시를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배포하고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 명, 병, 형, 선악 등 다섯 강목으로써 360여 가지에 이르는 인간사의 모든 일을 주재하였다.
  때에 한 곰과 한 호랑이가 있어 같은 동굴에서 살고 싶다고 간원하거늘 이에 환웅께서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고 이르되 "너희가 이것을 먹어라. 그리고 백 날을 일광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으리라."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믿어 실천, 세이레 만에 곰은 여자의 모습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금기를 다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모습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웅녀는 다시 신단수 아래서 혼인의 상대를 간절히 비니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모습을 빌어 웅녀와 혼인,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
  삼국유사에 유래한다는 그 얘기를 허준에게 들려준 것은 김민세다.
  그리고 그때 곁에서 김민세를 거들던 안광익의 격렬했던 말 ... 생각하면, 아름다운 것은 모두 중국 땅에서 시작되어 건건이 우리가 고개숙여 받아들인 듯이 여기는 사대모화에 찌든 조정의 체통없는 모습을 그때 안광익은 침을 뱉으며 매도했었다.
  또 기억이 있었다.
  스승 유의태를 천황산에 묻은 후 내의원 취재를 앞두고 김민세의 권에 따라 내 나라의 동서남북을 유력하러 떠나려던 날 ... 아니 그 유력의 어느 길모퉁이에선가 김민세가 한 말 ... 쑥과 마늘을 주어 짐승을 사람으로 바꾸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대대 자손을 퍼뜨리게 한 환웅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나라 의약의 창시조라 했던가 ...
  또 생각난다.
  땅의 남북은 기후가 다르며 땅의 동서가 물맛이 다를진대 같은 병이라도 어찌 약이 같을손가 하던 스승 유의태의 생전의 그 말
  '그렇다면!'
  수만 년 바다로 막히고 아득히 대륙이 수천 리로 떨어지게 한 남의 나라 중국의 의약이 어찌 내 나라 사람들이 오로지 한가지로 본받아야 될 보전일 것인가. 내가 정작 찾아야 될 것은 이 대륙 누구에게도 아닌 바로 내 나라 내 산천에서 얻어져야 할 해답이 아니던가.
  그 허준의 상념을 깬 건 뜻밖에도 서장관 이동형의 출현이었다.
  설핏 잠에 떨어져 있던 이공기도 튕겨 일어났고 허준도 급히 몸을 가누어 이동형을 맞았다.
  놀란 건 또 있었다. 이동형은 혼자가 아니라 '내가 수소문할 자를 찾을 것이니 기다리라'는 그 약속대로 중국 관원을 대동해 온 것이다. 왕오라는 그 중국 관원이 이동형이 대동해 온 역관의 통역으로 들려준 얘기는 허준이 그토록 궁금해한 이시진의 편린이었다.
  이시진은 호북현 기주 사람이며 자는 동벽으로 한때 금릉(지금의 남경)의 관리였다가 종래의 의서나 선학들의 업적에 비판을 가해 마침내 주위로부터 고립되어 관직을 내던진 고집불통의 일간인데 그러나 그 아들을 끝내 지지하는 역시 같은 의원인 아비와 그리고 역시 그 아버지를 따르는 그의 아들 그렇게 삼대가 독자적으로 전 중국땅에 약초 채집차 유랑해 다니는데 그의 귀향이나 귀경을 그 누구도 예측치 못한다고 했다.
  아비와 자신과 아들, 그 고집쟁이 삼대의 모습이 더욱 허준의 뇌리에 감동적인 그림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허준은 듣기만 할 뿐 더 이상 이시진에 관해 캐묻지 않았다. 지금 허준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이시진보다 김민세와 안광익이 그리고 스승 유의태의 모습이 더욱 크게 자리해 있기에 ...
  모르는 것보다 좀이라도 안 것은 반가운 소식의 하나다.
  그러나 이젠 되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허준이 내리고 있는 결론은 이시진은 이 나라 이 중국의 의약을 위해 평생을 건 사람이라는 것이요, 자신은 이제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의 의약??을 위해 일생을 던질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 자각은 허행에 끝난 이 중국행에서 이시진을 만난 것 못지않게 허준에게 새로운 용기를 북돋고 있는 것이다.
  이밤 허준의 심정의 일단을 들은 이동형은 대동했던 중국 관원과 역관을 돌려보낸 뒤 다시 허준의 객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수행하는 종자는 주안상을 받들어 따라들어왔다.
  술잔들을 굳이 한상 위에 놓게 한 것은 이동형이었다.
  벼슬의 높낮이가 너무나 현격하고 세상을 살아온 연륜도 아득히 높다. 그러나 이동형은 기분이 좋은 듯했다. 잠시 의원들의 세계에 화제가 맴돈 후 곧 분방한 화제로 허준의 세상에 대한 안목을 시험했고 웃음과 맞장구 속에서 좌석은 나이도 신분도 떠난 파탈의 주석이 되었다.
  그 이동형을 보며 허준은 세상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고 있었다. 양반이요 지체 높은 관리의 가슴속에 이토록 말과 행동으로 세상의 격식을 깨고 스스럼없이 가까워지는 인물을 처음 본 것이다.
  이날 세 사람은 바이갈을 통음했다.
  허준은 세상이 오늘처럼 아름답게 보이기가 처음이었다.
  허준은 자기가 알게 된 모든 이를 위해 감사하며 술잔을 들었다.
  김민세를 위하여.
  안광익을 위하여,
  스승 유의태를 위하여.
  또 낯모를 중국의 의원 이시진 그 삼대를 위하여.
  또 형제 못지않은 정으로 동행하여 더더욱 우정이 쌓인 이공기를 위하여.
  북경에서의 초조했던 40일. 허준에게 있어 그 중국의 마지막 밤이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10
  명의 예부가 베푼 상마연을 끝으로 조선의 진위사 일행이 귀국길에 올라서 스무 날쯤. 아직 북방의 삼월은 바람이 찼다. 대륙의 땅거풀은 그제도 두꺼운 얼음을 박은 채 인마의 발길을 자주 미끄러뜨렸고 잠시 파란 한천이다가도 금방 때아닌 눈보라가 한바탕 휘몰아쳐 가기도 했다.
  그러나 허준도 이공기도 지루하지 않았다. 요서와 요동벌 곳곳에 옛 조선족의 국운이 치성하던 때의 고성과 고적의 흔적이 심심찮게 나타나고 그럴 적이면 전승돼오는 그 시대의 얘기들이 주위의 입에서 다투어 되살아나기 때문이었다.
  귀국의 노정이 3분의 1쯤에 이르는 금주에 이르기까지 한족들이 고려구라 비칭하는 괴수의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허준은 그것들을 처음 보았다.
  이미 성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아득하게 넓은 땅. 누런 잡초가 잔설과 함께 뒤덮인 언덕 위에 화려한 무늬로 조각한 석대를 깔고 완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양어깨 밑으로 뻗은 두 앞발을 버틴 이상한 괴수는 한때 한족들이 장성을 쌓아 두려워할 만큼 공포의 대상인 고구려의 상징으로 지금도 강변과 언덕과 산맥의 곳곳에서 그 퉁방을 같은 돌눈을 부릅떠 한족들의 거점인 서쪽 중원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나운 기골은 이 대륙의 옛 임자가 누구인가를 아직도 외치고 부르짖는 기세였다.
  해태를 닮았되 해태가 아니다. 사자를 닮았되 사자도 아니다. 지혜를 상징하는 반듯한 이마와 송곳니는 괴수의 앞모습이요, 솔방울 모양으로 딴딴하고 총총하게 얽은 머리카락 밑으로 무한한 생산의 힘을 느끼게 하는 두꺼운 허리는 뒷모습이다. 또 금방이라도 포효할 듯 억센 턱에서 이어지는 옆모습을 이룬 전체의 생동감 있는 각흔과 골마다에 푸른 이끼를 돋운 각수의 솜씨는 어떤 예지, 어떤 상상력에서 북풍한설 2천 년 시련의 시공을 넘어 아직도 이 대륙에 뜨거운 입김으로 숨쉬고 있는 고구려의 성수로 쪼아냈던가.
  '고구려 ... '
  지금 와서 상기한들 허황할 수밖에 없는 옛나라의 이름이되 그러나 허준에게 있어 이번 길은 의서다 이시진이다 하는 직분과 관련지을 목표는 이루지 못했어도 이땅에 와서야 더더욱 자신은 조선 사람이라는 자각이 가슴속에 솟아났고 오늘날 이 대륙에서 밀려나 반도 안에 오므라든 국운에 대한 포한을 일깨우기도 했다.
  더구나 이미 산도 강도 땅덩이의 이름조차 한족화한 저 흙더미 속에 저 수많은 고려구를 배치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조상들의 피가 흘러 배어 있으며 뼈가 묻혔을 것인가.
  그리고 지금 옛 자랑스럽던 조상의 땅을 밟아 상국이라 일컫는 이민족의 대궐의 화재 따위로 진위사란 이름으로 수백 명 떼지어 몰려갔다 몰려오는 수모.
  조선족이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는 중에 한족과 가장 접촉이 먼저 된 것은 고구려다. 요동별 너머로 국세를 확대했던 고구려는 자연 육속된 한족의 문화와 접촉이 잦았고 수의 문제 때 강남 오의 의원 지총이 의약서인 내외전, 약서, 명당도 등을 지니고 고구려에 들어와 머물다가 다시 왜로 건너가기까지 그 중국의 의학이 고구려의 의술과 접목되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고구려가 의학적인 모든 지식을 한족으로부터 전수했다는 것과는 다르다. 적어도 그보다 102년 전인 고구려 장수왕 47년에 왜가 양의를 구하여 백제에 사자를 보냈을 때 백제가 자국에 와 있던 고구려의 명의 덕래를 왜에 보내주었고 그 덕래는 왜의 난파란 곳에 주거를 정하고 자손 대대 의업을 행하여 왜인들로부터 난파약사라는 존칭까지 받은 것은 허준이 김민세한테서 들은 얘기였던가.
  아무튼 고구려인 덕래의 의술이 섬나라 왜에서 꽃핀 것은 병의 치유를 무주의 방식이나 신불의 가호에 빌던 원시적 행위로부터 약과 시술에 의해 병의 원인을 다스리려는 고구려의 진일보된 의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의지식을 중국에서만 구하려 한 것은 경박한 생각이다.'
  천년 전 고구려 의원 덕래를 떠올리며 허준의 생각이 다시 거기에 미쳤다.
  '한의란 한족을 위주로 한 의술이요 조선족엔 조선의 의술이 있을 터이다.'
  요동벌을 통과해가는 허준은 갑자기 조선이라는 내 나라의 모습이 다시 보이고 있었다.
  오늘의 한의라는 말아 지금의 명은 물론 몽고족이 지배하던 원, 그 이전의 한, 초, 송, 당, 수 그밖의 잡다한 송, 오, 위 등 그 모든 의술을 포함하여 종족을 대표한 한의라는 명칭이라면 우리의 역사를 통틀어 조선족을 상징하는 한마디는 무어겠는가. 근역이란 말도 생각났다.
  의서의 여러 항목을 포함한 고서 산해경이라는 중국인의 지리책에 조선 산천의 가는 데마다 무궁화가 피어 있어 목근화의 나라라 이르고 이를 줄여 붙인 이름이 근역이다.
  진이란 말도 생각났다. 진이란 동북방을 의미하는 문자로 고구려를 승계했다고 자처한 발해의 본이름이 진이며 역시 고구려를 다시 일으킬 것을 자처하여 신라말 궁예가 세운 태봉국도 마진 즉 동쪽이란 의미를 포함했다. 또 있다.
  조선을 이르는 또 하나의 말 청구라는 말도 본래 동쪽바다 밖 신선이 사는 세계를 일컬었고 또 하늘에 청구라는 조선땅을 맡은 별이 있어 조선을 청구라 부르게 되었으며 글자의 뜻 또한 청은 오색 중 동방을 나타내는 빛이며 동방세계를 의미한다 할 때 조선의 상징은 모두 동려 동자에 합일되는 것을 알았다.
  그럼 중국의 한의에 대칭하여 조선의 의술은 당연 동의라는 말로 집약된다고 허준은 생각했다.
  이시진의 중국의 의약술을 망라한 책과 같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허준의 머릿속에는 책명의 머리를 동의라는 두 글자를 붙여야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1,892종에 이르는 동, 식, 광물의 약효를 망라하리라는 이시진의 방대한 본초강목이라는 소문을 다시 머리에 떠올리며 그에 필적하는 조선의 조선 사람을 위한 상상 속의 대저를 꿈꾸며 허준은 다시 한번 동의라는 말을 머릿속에 뇌었다.
  수삼 일 전에 본 요서땅에 떼지은 고려구들의 모습은 옛 고구려 전사들의 전진기지였을까?
  요동땅에 들어서며 보이지 않던 고구려 석수들의 무리지은 모습이 다시 한번 보고 싶다고 아쉬워하는데 홀연히 또 한 쌍의 석수가 저 멀리 언덕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허준은 반가웠다. 이미 그 석수의 모습에는 관심을 지운 일행으로부터 벗어나 그 언덕 아래로 다가간 허준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민 후 합장했다.
  석상들은 의연히 서녘을 부릅떠 본 채 천 년 만에 나타나 알은체를 하는 후손을 돌아보려 하지 않았다.
  5개월을 사흘이나 넘긴 사행이 도성 경계에 당도했을 때 한양의 초목은 긴 겨울살이를 마치고 수목의 가지마다에 신록의 새 순이 무리무리 돋아 초여름을 맞고 있었다.
  회정의 소식이 전해졌는지 이명원이 무악재 밑 모화관어귀까지 마중나와 주었으나 그 얼굴은 어두웠다.
  오랜만에 만난 우정들이 이윽고 그 어두운 눈빛을 발견하고 영문을 물었을 때 이명원이 전한 얘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공빈이 산병으로 몸져 누웠는데 회생이 가망이 어렵다는 설이 떠돈다고 했다.
  "대체 초산도 아닌 분이 산병으로 위독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좌우간 진숙궁은 지금 숨쉬는 소리 하나도 없이 긴장해 있네. 병명은 심하통으로 밝혀졌네."
  "심하통!"
  심하통은 중증의 위병이다. 허준은 믿어지지 않았다. 사행을 떠날 제 두 왕자 생산하고 세번째 아이를 포태한 더없이 행복한 모습으로 여로에 보태 쓰라며 순은 열 냥을 내려주던 화사한 얼굴이 어제의 일인 듯 선명한 것이다.
  서장관 이동형께 아뢰어 남 먼저 입궐해 가며 허준과 이공기가 이명원에게 물었다.
  "그 위독한 원인이 심하통이 주라던가, 태아가 원인이라던가?"
  "심하통도 갑자기 도진 모양이고 태아의 위치는 역산이라고 들었네."
  "아이가 거꾸로 들어앉은 것쯤 어려운 병으로 여길 건 없잖은가. 또 심하통이라 하여 아무리 당월(해산시기)과 겹쳤다 한들."
  허준은 말을 맺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내노라 하는 의원과 왕실의 해산을 맡아보는 산실청 여의들이 무수히 있을 터이다. 이미 위독하다는 병자를 놓고 자기의 자신만을 내세울 일이 아니다.
  오랜만에 보는 대궐은 오월의 신록에 싸여 평화로웠다.
  진숙궁으로 가는 연못을 긴 돌다리 위엔 어머니의 위급함을 알 리 없는 세 살, 네 살의 임해군과 광해군 두 왕자를 데리고 나온 궁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허준은 이명원을 돌아보았다. 진숙궁의 위기가 믿기지 않아서였다.
  "전하를 비롯, 어의 양대감도 정판관도 계시네. 공빈이 여러 날 전부터 그대를 찾았었으니 이대로 나타나도 허물이 없을걸세."
  "나를?"
  "산실청 수발은 여의원들이 할 것이나 심하통에 관한 한 공빈께서 그대의 처방을 원했던 듯하이."
  그러나 모든 것이 갑자기 닥치고 있었다.
  허준 들이 진숙궁 첫문을 들어서 화원에 이르렀을 때 산실처라 일러준 진숙궁에 딸린 별채에서 상궁들의 곡성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11
  산실청의 곡소리가 아무래도 불길했다.
  왕자면 더 바랄 나위 없되 설사 옹주라 할지라도 군왕의 핏줄을 이은 자식이면 다다익선이라는 것이 왕실의 소망이다.
  그건 항간에서 해석하듯 군왕이 호색해서가 아니라 정통 왕자는 서열을 따라 보좌를 잇고 여타 왕자, 공주와 서계의 군과 옹주까지 명문거벌들과 사돈이라는 혈연으로 엮어 왕실의 울타리를 삼는 왕가의 전통은 자식의 생산은 곧 보좌를 이어받은 이의 첫째 가는 의무요 왕실의 첫째 가는 관심사인 것이다.
  그 축복받은 산실청에서 누가 감히 곡성을 터뜨릴 수 있단 말인가. 잠시 곡성이 멎었으나 그 정적은 오히려 더 불안했다.
  산실청 앞 얕은 담 너머로 김병조의 모습이 비쳤고 공빈의 생부 김희철도 보였다.
  그 주위에 어의 양예수와 조산 수발을 맡은 여의 몇 사람과 제조상궁과 경사방대감의 우람하고 껑충한 모습도 나타나 구수회의를 하는 모습이다가 흩어졌다.
  뒤이어 담을 돌아서 산실청으로 건너온 내시 두 명이 세 사람을 발견했으나 그대로 화원 쪽으로 사라졌다.
  잡인의 근접을 금기하는 산실청 가까이 선 세 사람이 눈에 익은 내의원 사람들이기에 지나쳤으나 그 내시 또한 경황이 없는 걸음걸이였다.
  "돌아가세."
  이공기가 말했다.
  그 길밖에 없다. 문밖에 정판관이 있다면 사행의 회정 인사 겸해 공빈의 차도를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나 해산에 얽힌 병인데야 소임도 없는 그들이 더 이상 기웃거릴 핑계도 없다.
  그러나 허준은 선뜻 그 자리를 못 떠나고 있었다.
  산병에 관해서라면 자기의 소관사도 아니요 그 일에만 전념하는 이들이 줄을 선 터에 섣불리 끼일 수 없다.
  그러나 공빈이 잠시 자기를 찾은 연유가 심하통 때문이란다면 그녀의 병세를 짚어보고 싶은 것이 반드시 의원의 입장에서만도 아니다. 사행을 떠나며 노자를 도움받았대서도 아니다.
  다섯 달 전 사행을 떠나면서 본 그녀의 모습, 완연히 불러온 배를 안고 세상 더없이 행복해하던 그녀가 지금 곡성에 묻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아연해서였다.
  초산도 아니다. 이미 건강한 두 왕자를 생산한 여체가 새삼 세번째 출산이 죽을 고비일 수 없다.
  하기야 속말에 여자에게 있어 해산은 사잣밥을 떠놓고 치르는 행사라고도 한다.
  허준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마 두 친구 앞에서 말을 못 꺼내나마 지금 공빈에게 닥친 저 난산의 원인은 다른 데 있을 터이다.
  "정녕 심하통이라 하던가?"
  허준이 다짐하듯 이명원에게 물었다.
  이명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신 '가세' 하고 돌아가는 발길에 앞장을 섰다. 그도 공빈의 난산의 이유를 아는 기색이었다. 위병을 일러 고서는 심하통이라고 부른다. 생략하여 심통이라고도 부르되 심자가 붙어 있다 하여 심장병이 아니다. 심장병은 진심통이라 표현하며 때로 용렬한 의원이 그 양자를 혼동하기도 하나 약이든 의원이든 무엇하나 아쉬울 바 없는 공빈이 왜 그 병을 감추어왔단 말인가. 허준은 고개를 저었다. 공빈이 정녕 일상에 자신도 모르는 위병을 앓았는가는 시위상궁들로부터 그녀가 평소 먹고 마시는 음식의 내용을 물어보면 짚어질 일이다.
  역사 속에 그 심하통으로 죽음에 이른 두 유명인이 있다. 남자는 제갈 공명이요 여자는 오왕 부차의 여인 서시다.
  월의 저라산 아래 한낱 헐감나무를 해 이어다 팔던 절세의 미녀 서시의 병세는 심하작통 봉심무위라는 것으로 심장 아래가 수시로 뜨끔거려 항시 심장 언저리를 쓰다듬으며 그 아픔을 달랬는데 그 한손을 허리께에 얹고 서거나 걷는 모습이 너무도 아리따워서 때의 궁정과 세상 여자들은 모두 허리에 한손을 얹고 서거나 걷는 모습을 흉내냈다고 사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 공빈은 그 심하통의 고통으로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허준은 그것을 확신했다.
  어쩌면 심하통이라는 병명이 그녀가 돌이킬 수 없는 위급한 지경에 온 것을 안 왕실 내부에서 짐짓 만들어낸 병명이라고 ... 또 한번 곡성이 터지며 산실청 쪽에서 궁녀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진숙궁을 호위한 내시들의 움직임도 혼란했다. 경사방대감과 제조상궁이 상감이 납실 적이면 좌정하던 별채 쪽에서 산실청 쪽으로 두세 번 오가더니 마침내 경사방대감의 영을 받은 키 큰 내시가 다시 구를 듯이 달려와 산실청의 호위상궁에게 무엄하도록 큰소리를 냈다.
  "두 분 왕자께선 어디 곕시요!"
  호위상궁도 마주 소리쳤다.
  "마마의 용태가 어떠하시오?"
  내시가 신경질적으로 또 고함쳤다.
  "두 분 왕자 곕신 곳을 속히 대오!"
  "화원 쪽에 곕시오."
  내시가 그쪽으로 달렸고 뒤이어 제조상궁이 울고 있는 시위상궁을 데리고 나와 침착하게 일렀다.
  "거 지체하지 말고 너는 즉시 달려 공빈마마의 본곁 분들께 급히 예절하도록 여쭈어라."
  공빈을 모시던 시위상궁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하오면! 공빈마마께오선 정녕 가망이 없사오니까?"
  제조상궁이 짧게 대답했다.
  "이미 편안하오시다."
  시위상궁이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산실청 내외가 곧 울음바다로 바뀌었다.
  "마마 눈을 뜨소서. 두 왕자분을 보고 갑소서."
  외마디소리와 울음소리가 잇닿고 시위상궁들도 산실청 툇돌 아래로 몰려들어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돌아가던 허준 들의 눈에 화원 쪽에서 세 살, 네 살 두 왕자를 안은 내시와 늙은 궁녀가 엎어질 듯이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두 품 속에 안겨 달리며 어린 두 왕자는 손을 휘저으며 웃고 있었다.
  공빈을 죽음에 이르게 한 병인은 사관에 의해 산병으로 기록되었음을 허준은 정작에게서 들었다.
  산병이라는 막연한 병명 뒤에 왕가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모체의 생명조차 앗고 스스로도 죽은 두 왕자의 누이가 될 태아의 모습은 역산의 형국이었다.
  역산이란 산도로부터 먼저 발을 드러내는 것이요, 횡산이란 먼저 손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 그런 형국은 순산으로 이끌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건 부인병에 전문이 아닌 허준도 아는 일로 만약 발을 먼저 드러내는 역산이면 세침으로 발바닥을 일이푼 들어가도록 3, 4차 찌르고 소금으로써 그 위를 바른 뒤에 가볍게 천천히 밀어넣으면 아이가 아픔을 느끼고 놀라서 몸을 한번 굴리고 오므리며 이때 다시 소금으로써 아이의 각심을 바르고 또 소금으로써 산모의 배 위를 마찰하면 태아는 신기하도록 정상분만 체위로 바뀐다.
  허준은 처음 공빈의 증세가 난산이라 불린 것으로 다시 상기했다.
  해산의 모습은 열둘로 나눈다.
  정산, 좌산, 와산, 횡산, 역산, 편산(태아의 머리가 편벽스럽게 한쪽으로 기우는 형태), 의산(머리가 나왔는데 몸이 못나오는 형태), 반장산(자장이 먼저 나오고 아이가 따라나오는 형국), 열산(더위 타는 체질에게 방안을 시원하게 해주는 법), 동산(추위 타는 체질에게 따뜻이 몸을 살펴주는 법), 상산(1년 혹은 심하면 3,4년씩 해산하는 일), 최산(해산달을 넘겨 약으로써 해산을 재촉하는 법) 등이다.
  그러나 이중 어느 산법도 내의원이 감당하지 못할 해산은 없다. 오히려 내의원에서 난산이라 지칭하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묻어 있다. 그건 항용 젊은 부부가 빠지기 쉬운 탐색 즉 해산 한두 달을 앞두고도 그치지 않는 성행위의 결과를 이르는 말이다.
  성행위라 하여 그것이 반드시 호색도 탐음도 아니다. 더구나 그 남녀가 부부라면 아름다운 사랑의 다짐 등도 있으리라.
  또 그것은 열이면 열 모두가 죽음과 태아의 사산에 직결되는 행위라 단정할 순 없다.
  그러나 -
  허준은 생전의 공빈의 그 기품 있고 아름다운 또 때로는 더없이 화사한 얼굴을 떠올렸다.

    12
  선조 10년 5월 공빈이 죽었다.
  15살에 시집와 8년 동안 태기 한번 보이지 않는 왕비를 보며 후사 보기를 단념한 왕실에 임해군, 광해군 두 왕자를 연년생으로 낳고 세번째 포태한 그녀의 말년의 몇 달은 표현 그대로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도 두렵지도 않는 생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양주 진건 군장이라는 곳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눕고서는 그녀가 생전에 누리던 세상의 선망이나 영화도 한낱 덧없는 물거품 같은 것임을 세상 사람에게 일깨웠을 뿐이었다.
  생전엔 두 왕자의 생모로서 대궐 3백 궁녀들의 시샘과 부러움을 모았고 대권 안 오로지 유일한 남성인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생전의 화사한 모습에 비해 너무도 쓸쓸했다.
  양주 군장골에 조성된 그녀의 유택은 그녀가 왕비가 아님에서 능이라는 이름이 붙지 못했으며 그저 양지바른 언덕 위에 성묘라는 생소한 이름이 지어졌을 뿐 규모라고도 이를 수 없는 좀은 그런 무덤의 모습으로만 남은 것이다.
  아직 생모와의 사별의 아픔을 다 알지 못하는, 때에 세 살이던 광해군은 뒤에 보좌에 오르자 어머니의 무덤이 너무 초라한 것을 슬퍼하여 그 즉위 5년에 성릉이라 무덤이름을 높여 어머니를 기렸으나 인조반정을 만나 그 성릉은 다시 성묘로 강등당하고 유배지 제주에서 그 소식에 접해 대성통곡하던 광해군은 그 자신도 한라산 아래서 숨을 거둔 지 21년이 지나 군장골 어머니의 낡은 무덤 곁에 이장되어 백골이나마 함께 누울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공빈에게 얽힌 후일담의 하나이고 아직 울 줄도 모르는 세 살 네 살 두 어린 상주를 뒤로 공빈의 상여가 대궐을 떠날 때 잠시 눈물을 뿌리며 애도하던 민심도 곧 그녀의 죽음을 잊어갔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의 원인을 두고 내의원 일각에서는 자주 화제로 되살아나곤 했다.
  특히 그녀를 죽음으로 몬 원인을 왕실은 산병이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흘려버렸으나 그것이 산병이랄 때 그녀의 조산과 구명에 참여한 인물들의 책임이 따라야 하고 그건 그녀의 왕실에서의 위치, 임금 선조의 깊은 사랑으로 해서 당연한 후속 조치여야 했고 내의원 또한 자체 기강을 위해 묵과할 수 없는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산병이라는 흔하고 막연한 병명 외 더 추궁의 말이 없었고 잠시 이명원의 입에서 나온 심하통이라는 병명도 허준이 관심하여 살펴본 처방전에선 엉뚱하게도 심하통과는 상관없는 천골을 주로 쓴 약이름 두 가지였다.
  얕은 개울이나 늪에서 자라는 다년초인 그 천골은 가을에서 이듬해 2월 중순까지 파낸 뿌리 줄기를 잘라 그늘에서 말려 끓여 마시면 임산부의 산전 산후에 보양제로 쓰이는 것이니만큼 임부였던 공빈의 처방에서 의심스러울 것이 없다.
  하나 동행한 이공기와 허준이 놀란 것은 또 하나의 약방문 내용으로 그 약들은 음양곽을 주로 한 것인데 효능은 강정과 최음촉진에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일명 삼지구엽초 또는 선령비라고도 불리며 산간의 응달에 자생하는 다년초인 이 풀은 봄에 꽃이 피되 아래로 향해 피는 것이 특징인데 이 음양곽이 주조가 된 약은 한결같이 방사를 촉진 하는 데 쓰여 의원들 사이에서도 약이름을 숨기고 쓰는 것이다.
  특히 이 풀에 음양곽이란 이름이 붙은 연유가 옛날 중국 사천지방에 음양이란 동물이 있었는데 하루 능히 37여 회의 교합을 하는데 그 정력의 출처가 이 풀을 뜯어먹기 때문인 걸 알고 시험한 결과 사람의 경우에도 현저히 약효가 있다 하여 이름이 음약곽으로 바뀌었으나 그 쓰는 방법이 고도로 정교하지 않으면 여자를 버린다 하여 양가의 부녀들에게는 애써 이 약재의 사용을 기피하는 것이다.
  "여자가 아름다워지려는 욕망과 남자의 관심을 이끌 양으로 더러 밝히는 기집들이 사향 주머니를 숨겨 차고 다닌단 말은 들은 법하지만 음양곽을 주로 하는 약을 상용한다는 건 의욀세."
  "누군가 전해줬겠지. 그보다 ...?"
  "그보다?"
  "내 알기 사람의 정욕이란 대차가 있는 게 아닐세. 젊은 체력에 오가는 마음이 풋풋하면 더 좀 만족하고 즐거운 것이지. 약으로 일구는 강정이란 말도 실제 몸속 어느 부분을 부서뜨려 가능한 것이고 더구나 최음이란 신체 일부분의 이상을 촉진하거나 마비를 혼합한 현상인데 그것이 쌓이면 독성을 뿜는 것이지."
  "몸에?"
  "몸에도 마음에도."
  허준의 대답에 이명원이 말했다.
  "심각할 것 없네. 유념할 거리도 아니고."
  "무슨 말인가?"
  "내국에 있어 보면 용색 아리따운 젊은 궁녀일수록 은밀히 그런 약을 청하지. 찾아오는 구실은 배앓이니 어지럼증이니 하지만 증상을 묻노라면 슬며시 헝겊쪽에 음양곽 이름 따위 쓴 것을 내밀어."
  "궁녀란 모두 처년데 왜 그런 약이 필요한가. 또 용색 아리땁다는 궁녀란 말은 그대가 직접 봤단 말인가?"
  "문밖까진 함께 오되 내국 안엔 의녀들을 대신 들여보내지."
  "의녀?"
  "늙은 의녀 중에 궁녀와의 한통속이 많아."
  "그렇게까지 해서 약을 구하는 이윤 뭔가?"
  "기회를 기다리는 걸세, 일생에 한번 있는 기회를."
  "알겠군 ..."
  이공기가 웃었고 허준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알 것 같았다.
  대궐의 엄격하고 온갖 세심한 법도도 인간의 숨은 욕망조차 일일이 묶고 엮을 순 없을 것이다.
  더구나 대궐 안에 사는 그들에게 자기 인생이 피어날 방법이 외가닥 단 한길뿐이라면 목숨 걸고 그 외가닥길을 건너려는 마음을 대궐 밖에 사는 인간들의 자로 잴 순 없을 것이다.
  말없는 허준에게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여긴 이명원이 한마디 보탰다.
  "상궁들도 나인들도 여자지, 임금도 남자이듯 ..."
  "그 대궐 안 여자들이 기다리는 생애를 건 단 한번의 기회란 뜻을 아직 모르겠는가?"
  "아니 아네. 허나 그것이 공빈의 죽음과 어떻게 연관지어진단 말인가?"
  "그분의 죽음은 산병으로 하세. 그밖의 궁 사람들의 여러 모습이야 우리가 입에 올릴 일은 아니잖는가."
  허준은 침묵했다. 먼저 화제를 담은 이명원도 동의의 뜻으로 입을 다물었다.
  허준은 이미 임자가 없는 진숙궁으로 두 왕자와 함께 하루 한 번씩 소요삼아 들른다는 젊은 임금의 슬픈 모습을 떠올렸다.
  자의나 무소불능과 구별되는 절대 권위가 물론 임금에게 붙어 있는 것이나 특히 여자 문제에 있어 임금은 부자유하고 외롭다.
  얼핏 보기 대궐 안 3백여 여자들은 임금의 재량 속에 생살여탈이 맡겨진 자기의 여자이되 임금에게 있어선 그 여자들이 결코 환락의 대상만일 수 없다.
  왕실의 혈통을 이어가야 하는 절대의 의무와 적통이 아니라도 보다 많이 낳아 그 왕자녀를 때의 명문과 거족과 대벌들에게 고루 혼척을 맺게 하여 왕실에의 충성기반을 확대해갈 정략이 따른다.
  이 혼척의 확대는 역대 왕실이 최중요시하는 정책으로 조선의 국기를 다진 태종 이방원은 아들 세종이 왕비 소헌왕후와 너무나 다정하여 후궁을 들이지 않자 앞장서 다산하는 가문을 뒤져 미색의 잉첩(가까이서 시중드는 시녀)을 뽑아 아들에게 맡기는 극성을 떨었고 그 세종은 왕위 32년 수 54넌의 생애 중 왕후 심씨와 다섯 빈 사이에서 18남 4녀를 낳아 왕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그 왕가의 전통이 이 대에 와서 퇴색한 게 아니다. 물론 그렇게 맺어진들 남녀의 교접이 어찌 의무만 있고 욕망은 없었으랴만 그러나 욕망과 환락만을 추구할 수 없도록 임금의 용종을 뿌리는 침전의 규범은 엄격한 감시 속에 놓여 있으니 동온돌이라 불리는 왕의 침전의 구조부터가 우물 정자로 된 한복판 방이며 주변 장자로 가로막힌 사방 여덟 개의 방마다에는 상궁들의 우두머리인 제조상궁을 위시, 연로한 상궁들이 각방마다 한 사람씩 들어가 앉아 신시(오후 4시)부터 진시(아침 8시)까지 꼬박 눈을 뜨고 호위하는 속에 임금의 방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뿐이랴. 날짜 또한 자신이 선택하는 재량 없이 대개 이레에 이틀을 일관이 일진을 짚어 길일을 가리어 지정하는데 이 일진과 길일이란 것은 여체가 가장 임신의 가능성이 있는 날로 연구된 것이다.
  엷은 장지문 너머 사방 여덟 개의 방에서 호위하는 타인들의 포위 속에서 치러지는 남녀의 가쁜 숨소리가 대궐의 일상성의 관행으로 받아들여지기야 하겠지만 그러나 남녀의 행위가 오로지 핏줄을 퍼뜨리려는 미물들의 생식본능과는 확연히 다른 것. 애정의 교감이란다면 왕의 침실의 이 비인간적인 구조는 임금이 여자를 보는 눈을 더더욱 메마르게 했을 것이 틀림없다.
  또 이 왕의 침실의 살풍경한 광경.
  왕을 가해하는 흉기로 쓰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간살이는 일체 놓여 있지 못하며 오로지 밤의 어둠을 밝히고 끄는 촛대와 요강과 타구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다.
  적어도 그것은 여자 남자가 서로의 사랑을 북돋고 확인하는 정서적 조건과는 일체의 상관도 없는 비정하고도 살풍경한 것이다.

    13
  물론 임금의 잠자리가 반드시 동온돌에 한정된 것일 수 없고 궁중 법도라 하여 임금의 자유로운 사랑의 편력조차 모조리 막는 것은 아니다.
  궁중에서 벌어지는 여러 행사와 모임에서 혹은 뜰을 소요할 제 해당 처소의 상궁과 나인들은 임금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마련이고 그 말씨 그 맵시 그리고 눈빛들이 임금의 거동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남성이요 자신의 운명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임금인데야 그 가까이 다가서는 기회에서 그의 관심을 자신에게 모으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욕망이다.
  그 기회가 어떤 기횐가.
  아무리 바쁘고 안타까워도 조용히 움직여야 하며 함부로 목청도 높이지 못하며 시선 또한 상감마마의 어깨 위로 쳐드는 것은 방자에 속한다.
  게다가 임금이 새 여자를 찾을 때 자칫 임금이 방탕에 빠져 함부로 정기를 허비할까 경계하여 애초부터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는 젊거나 아리따운 궁녀들의 배치가 허락되지 않으니 그 수많은 감시의 틈새에서 임금에게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또 설사 그 천신만고의 기회를 잡았다 한들 '아까 그 아이가 어느 처소에서 무슨 소임을 맡아보는 아이냐' 이런 지명이 떨어졌다 한달 때 그러나 그녀들은 몸떨리는 환희보다도 결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되리라는 긴장으로 숨을 삼키기 마련이다.
  우선 지목된 여인은 근무하는 처소에서 격리되어 제조상궁과 경사방대감 지휘 속에 넘어가는데 비녀를 포함, 흉기가 될 수 있는 모든 쇠붙이며 옷섶에 매달았던 노리개, 몸에 붙은 옥이나 유리장식까지 떼어낸 뒤 여의를 시켜 지병을 앓고 있는 것이 없는지를 살핀 후 자장에 월경 유무를 확인하고서 몸을 씻기고 실오라기 하나 감기지 않은 알몸인 채 천에 싸여 임금에게 인도되어 시침케 한다.
  그리고 승은이라 일컫는 하룻밤의 교접이 이루어진 것만으로 그녀들이 곧 후궁의 지위에 오르는 것도 아니다.
  승은을 입어 다행히 왕자녀를 가질 때야 그 태어나는 아기가 왕자냐 왕녀냐에 따라 또 때로는 왕의 총애의 깊고 얕음에 따라 숙원인 빈(정1품)으로 봉해지기도 하고 귀인(종1품), 다시 더 아래 소의(정2품), 숙의(종2품) 등으로 봉해져 처소에서 해방되어 독립된 처소를 하사받아 따로 임금과의 사랑의 보금자리를 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평생에 임금의 눈에 띄지 못한달 때 그녀들은 대다수 궁녀들의 운명이 그랬듯이 소속된 처소의 잡일을 하며 고스란히 처녀로서 늙어죽을 수밖에 없다.
  또 일차 승은을 입고도 임신하지 못한 여체도 운명은 마찬가지 ... 궁녀들에게 봉사한 연공의 연수를 따져 지체의 상승은 있을지라도 함부로 임금과의 재회를 기약할 수도 없다.
  이런 비정한 대궐의 법도이기에 3백여를 헤아리는 대궐 안 궁녀들이 하늘 아래 단 한 사람 온전한 남성인 그 임금의 눈에 들고자 향을 구해 몸에 바르고 자며 살결을 가꾸는 등 보다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고자 결사적인 것이다.
  '딸 덕에 부원군'이라는 속담이 있듯 뽑히기만 하면 부모에의 영광은 물론 집안 일가의 운세를 일변시킬 수 있고도 남으나 그 기회를 기다리는 나날들의 참담함은 상상을 절하는 고역인 것이다.
  그 모든 난관을 뚫고 승은을 입고 다행히 왕자녀를 생산했다 한들 그 날로부터 그녀들은 그 어렵사리 얻은 사랑을 이젠 잃지 않기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공빈으로서는 주위의 질시나 암투가 아무리 치열하다 한들 대궐을 떠받드는 두 가닥 대들보와 같은 두 왕자를 연년생으로 생산한 그녀이기에 자신의 장래는 탄탄하게 보장받았다 여겨 의심할 바 없다.
  자신의 동갑네 왕비는 15살에 왕비 책봉된 분이나 8년이 지나는 오늘까지 태기 한번 소문내지 못한 불임의 몸으로 더러 서온돌에 군불이 지펴지고 향을 피운다는 소문이 들려오지만 그것은 임금이 부부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 지금 임금의 사랑이 함빡 자신에게 쏟아져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더구나 연년생 두 왕자에 이어 세번째 임신에 성공한 그녀는 혹여 거푸 출산으로 아름다운 몸매를 망가뜨리거나 가슴이 처져 임금의 사랑이 떠날까 저어할 뿐이다. 더구나 두 아이를 낳고 더욱 무르익는 그녀의 뜨거운 여체는 이미 남자 없는 독수공방은 지옥이라 여기기에 ...
  그래서 그녀는 지금의 행복에 자만하지 않았다. 저마다 지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자 발돋움하는 경쟁자들 ... 또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남자의 속성과 왕자녀 생산을 위한 잉첩이 허락된 왕실이기에 그녀는 남자의 사랑을 영원히 내 것으로 하기에 더더욱 게으르지 않았다.
  더구나 왕비 박씨가 임금의 사랑이 공빈 한 사람에게 쏠리는 것을 분산하고자 주위로 하여금 천거케 하여 의안군 성을 낳은 인빈 김씨라는 빼어난 미인이 같은 대궐 안에 살고 있고 보면 공빈은 자기의 남자를 잠시라도 인빈에게 빼앗기지 않기에 신경썼다.
  혈기와 기력이 왕성한 25세의 임금 선조에게 자신이 당월이라 하여 남자의 욕망을 소홀히 하도록 그녀는 바보스럽지 않았다고 할지 ...
  그러나 궁궐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끊임없이 긴장 속에 살아야 했던 그녀의 과다한 욕망이 산병이라는 이론으로 마침내 그녀의 목숨까지도 앗아가고 만 것이다.
  설왕설래하던 공빈의 죽음에 얽힌 여러 내의원의 추측들이 한낱 옛얘기로 접어지고 세월이 흘러갔다.
  임해군, 광해군 두 왕자를 데리고 궁정을 소요하며 쓸쓸해하던 선조는 새로 사랑을 쏟기 시작한 인빈이 부를 낳고 의안군 성과 그토록 기다리던 딸 정신옹주와 정혜 옹주 등 다산하니 왕실에 있어 공빈은 완전히 과거의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맞은 어머니의 죽음과 그리고 비록 왕실의 허락된 광경이요 법도라 하나 시앗 본 아버지가 그 몸에서 난 자식들을 싸고 도는 모습은 점차 철이 들어가는 임해군, 광해군의 눈에는 감당키 어려운 번뇌로 커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인빈에게서 난 어린 왕자 의안군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듯이 귀여워하니 9살 자기 생각을 갖춘 소년이 된 임해군이나 광해군의 눈에는 날로 고독의 빛이 짙어갔다.
  그 외롭고 쓸쓸한 나날들 특히 어린 광해군은 형 임해군과도 떨어져 늙은 보모상궁의 손을 이끌고 자주 내의원을 찾아왔다.
  여성들로 둘러싸인 대궐에서 자란 광해군은 그 어린 나이에도 흔치 않은 남성 출입자 속에서 아바마마를 호종해 다니던 대전별감이나 내시들도 인빈 김씨의 궁으로 떠나버리고 모습이 뜸하자 대궐 안 그나마 남자들의 집단인 내의원을 자신의 가장 마음 편한 놀이터로 정한 듯하다.
  그리고 특히 어마마마의 신뢰를 받았던 허준을 기억해내고 따랐다.
  또 사포서 별제를 지내는 외조부 김희철이나 외숙 김병조가 들어와 말동무가 되어주다가 지난날 허준과의 인연을 옛얘기나 하듯 들려준 뒤론 허준의 남매 겸이, 숙영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소인의 자식들은 지체가 미천하와 함부로 대궐에 드나들지 못하옵니다." 하고 달랠라치면
  "보모상궁 치마폭 속에 숨어서 들어오게 하라." 며 어린 꾀를 내기도 했다.
  형 임해군에 비해 광해군은 총명했다. 그리고 양주 진건 어마마마의 산소에 데려가 달라 때도 없이 조르다가 허준이 왕가의 법도를 차근차근 일러주노라면 입술을 문 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아쉬움을 참는 숙성함도 있었다.
  그 허준이 임금이 특히 귀여워해 마지않는 그러나 광해군이 턱없이 미워해 마지않는 의안군 성의 병을 맡은 건 선조 21년 2월 봄의 일이었다.

    14
  "어디가 얼마나 아프다던가?"
  허준이 열한 살 의안군의 와병에 대처할 의원의 특명을 태의 양예수로부터 받아 여러 날 못 뵐 것을 아뢸 겸 처소에 들르자 임해군이 되물었다.
  열다섯 살이라 하나 이미 2년 전에 부제학 허명의 딸 그 3살 연상의 아내를 둔 몸이요, 유난히 껑충한 키와 궁중 법도에 익은 언동이 나이보다 숙성해 뵜으나 의안군을 비롯해 이복들의 얘기가 화제속에 묻어나을 제는 임해군의 눈속에 질시가 이글거리는 것을 허준은 가슴 아파했다.
  아직 정통 왕자의 탄생이 없고 봄에 서장자인 임해군은 부왕 선조의 대통을 이어받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서계가 아니라면 의당 세자 책봉이 있고도 남을 나이라는 것쯤 주위에서 귀엣말을 속삭이지 않더라도 그도 안다.
  그리고 아직 여자에 관심이 일기 전인 어린 나이에 혼례가 서둘러졌을때 임해군은 그것이 대통을 이을 왕세자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요식행위로 지레 짐작했고 주위의 인물들 또한 불임의 왕비를 두고 그리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음에서 "아마도 어의가 그러한 줄 아옵니다." 하고 넌지시 맞장구쳤을 때 어린 임해군의 마음은 자신이 정통 왕자가 되었다 믿어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내가 임금이 된다!'
  '나는 곧 이 나라 억조창생을 호령하며 살 사람이다!'
  그러나 책임보다 환희부터 맛본 열세 살 소년의 그 순진한 꿈을 산산이 부순 건 부왕 선조의 행각이었다. 왕자의 도리나 의무를 일일이 알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소년인 그에게 궁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생전의 어마마마를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아바마마였건만 어마마마의 죽음 이후 인빈 김씨에게 정을 쏟아 저경궁이란 궁호를 내려주고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 정신옹주, 정혜옹주 등을 낳고 다시 순빈 김씨에게서 순화군, 정빈 민씨에게선 인성군 등을 줄줄이 낳으니 왕실에서는 경사가 잇따른 셈이지만 임해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고 섭했다.
  그 모든 왕자녀들의 서열이 모두 자기와 아우 광해군의 뒤로 태어난 아우들이긴 하되 생모 공빈이 없는 지금 부왕이 저경궁에 온갖 정을 쏟는 소문이 들릴 적마다 어머니 아닌 다른 여자에게 흠뻑 빠져서 잇따라 아이를 낳는 아버지가 도덕적으로 너무나 천박해 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특이하게도 아우 광해군은 그런 부왕을 이해하는 눈치였으나 임해군은 지난날의 어마마마 대신 오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인빈 김씨가 밉고 일찍 죽은 어머니가 새삼 너무나 불쌍했다.
  그후 장가 들고 철이 든 지금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많이 사라졌으나 다시 임해군을 긴장시킨 것은 부왕 선조가 인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익애였다. 특히 넷째아들 신성군에게는 물불 가리지 않는 사랑이었다.
  서장자인 자기로부터 세 차례나 뒤에 태어난 그 엄연한 서열과 관계없이 부왕 선조는 저경궁에 조석으로 드나들며 일곱 살짜리 신성군에게 영특하다, 잘생겼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과 귀여움을 보태는 그 모습은 마치 신성군은 군이 아닌 정통 왕자인 대군으로 치부하듯한 격차가 있었다.
  더구나 불임의 왕비조차 신성군을 귀애하여 자주 자신의 처소로 데려오게 하여 사랑해주는 것을 보면서 임해군은 저 왕비가 영영 왕자를 낳지 못하더라도 여러 군 속에서 대통을 이어받을 지명은 반드시 자신에게 떨어지리란 자신이 날로 멀어지고 있음을 깨닫는 요즘이었다.
  "왜 말을 않소? 태의가 오라 했을 전 무슨 병에 어느만치 아프다는 귀띔은 있었을 텐데."
  병자가 부왕이 사랑해 마지않는 신성군의 형임에도 그 미움은 다를 바 없다는 투의 임해군의 눈빛이었다.
  "아직 병증을 짚어보지 아니했사와 가봐야 아옵니다."
  "들으니 허직장이 우리 형제에게 드나드는 것을 곱지 않게 보는 자들이 많다면서?"
  "모르옵니다."
  "왜 모르오?"
  "형님."
  하고 광해군이 만류했으나 임해군의 눈빛은 허준에게 박힌 채 집요했다.
  "소인은 두 분 왕자분에게 할일없이 드나든 적이 없사옵고 심병을 청하기 오는 것이라 사사로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러운 것들이 우리 형제에 대한 아바마마의 정이 뜨아하다 여기고 공연히 트집거리를 차는 건 나도 알아. 지난번 허직장을 아예 내 처소에 붙박이로 배치해달라 했을 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거든. 우(신성군) 아이가 배앓이라도 했는가 하면 온통 내의원이 소란해하면서."
  아우 광해군이 형의 그 투정 섞인 말을 철없는 동생을 무마하듯 하하 웃었고.
  허준이 임해군을 달랬다.
  "본시 관원이 된 자는 왕자궁에 무시로 드나들지 못하는 법도이옵고 설사 호명을 받자온다 할지라도 직무 이외의 언동은 금하는 터인데 저로서는 누가 무어라 여기건 저어할 바 없습니다."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내의원 숱한 의원 중에 하필 허직장을 저경궁에 데려가는 까닭이 뭔가 말이지. 그 모두 우리 형제가 친하게 지내는 말동무조차 데려가는 그런 저의가 아니고 뭐냐고."
  "다른 인간이야 백 명이 찾아와도 반가울 것 없어. 그러나 허직장조차 부르지 못하면 우리 형제 허구헌날 서로 얼굴이나 쳐다보며 너무 외로워."
  광해군이 대범하게 말했다.
  "형님 말씀이 허의원 없으면 종일 아무 할일없는 사람처럼 들립니다."
  "그럼 달리 무슨 할 일이 있느냐?"
  "공부 많이 합시고 사이사이 적적하면 이 아우가 찾아와 말동무하옵니다."
  "네 얘긴 백 번도 더 들은 얘기들뿐이고 새 얘기가 있느냐."
  "하하 ... 그럼 아주머님과 투호(화살같이 만든 청홍의 긴 막대를 일정한 거리에 놓인 단지 속에 던져 꽂는 놀이)라도 합소서."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그리고 ..."
  "공부 많이 하라지만 그 공부한들 아마 우리가 쓰진 못할 게다. 난 알지. 세상 돌아가는 일 ..."
  "...!"
  왕좌에 대한 위협을 예감하고 있는, 차마 함부로 해선 안될 말이었다.
  "이만 물러가게 해주소서."
  허준이 다시 청했건만 가타부타 임해군은 말이 없고 광해군이 다시 허준을 도왔다.
  "돌아가오. 그리고 그 아우의 병이 다 고쳐지면 그전 다시 우리가 병을 칭탁해 부를 테니 꼭 오오."
  허준이 조용히 웃었다.
  "병을 칭탁하신다 하오면 올 까닭이 없사오나 진실로 앓으신다면 남먼저 달려오옵니다."
  "좋아."
  하고 광해군이 웃으며 일어섰다.
  곧 저경궁으로 달려가야 할 허준의 입장을 이해하는 어른스런 행동이었다.
  일어선 두 사람에게 아쉬운 듯 임해군이 따라 일어섰으나 그 말은 또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허직장이 병든 몸만 낫우는 의원이 아니라 마음을 앓는 병도 낫우는 의원이면 일년 내내 우리 형제 곁에 있어야 할 거요. 우리 형젠 다 병자거든."
  "소인이 보기엔 두 분은 모두 튼실하시옵니다."
  "아니야. 어머니 없는 모든 자식은 다 병자야."
  인빈이 있는 저경궁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임금의 사랑이 비록 신성군에게 쏠려 있어도 그 신성군의 형 의안군은 인빈이 낳은 첫 왕자니만큼 그 관심과 사랑도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경궁 안은 병자가 있는 그 수심도 부산함도 보이지 않았다. 태의 양예수를 비롯, 특히 소아의 병을 전담하는 의원들이 병자가 누운 방의 안팎에 서성이며 열한 살 어린 왕자의 이마와 목 부위에 느껴지는 미열을 강 너머 불처럼 한가한 얼굴로 몇 마디씩 했다.
  모두 낙관적이었고 허준도 긴장하지 않았다.
  자기의 전담이 침구이기에 더욱 그랬고 저경궁 분위기로 보아 오히려 갑자기 불린 까닭도 의아했다.
  그러나 곧 양예수와 정작에게 따로 불려간 방안에서 양예수로후터 허준에게 내려진 임무는 뜻밖의 것이었다.
  즉시 발정하여 평안도 방면 '구황경차관'을 따라 떠나 있는 이명원을 불러오되 그 평안도 일대에 치발하고 있다는 역질에 대한 모습을 알아오라는 명령이었다.
  "하오면?"
  허준이 의아하자 양예수가 냉담하게 말했다.
  "아직 발성할 계제가 아니나 조짐이 심상치 않아."
  "어떤 조짐 이오니까?"
  "역질에 관련된 여러 증상 중에 그 하나와 비슷하이."
  이번에는 정작이 아직은 알려선 안될 일이라는 듯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 낮은 소리를 냈다.
  "평양에는 파발이 달려갔으니 그대가 당도할 제는 이미 이명원이 인근 현지에서 돌아와 귀경의 차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을걸세. 종친부에 파송의원으로 있는 남응명과 병조의 몇 사람이 기다리고 있은즉 속히 떠나게. 그대를 선발하는 것은 그대가 의원으로서 승마에도 능하다기 뽑은 걸세."
  병조란 말에 허준이 긴장했다. 병조가 직접 띄우는 파발자 동행이란다면 촌음을 다투는 급선무일시 분명하고 그 임무에 종친부의 파송의원이 동행하며 역질 운운은 또 불안했다.
  양예수가 말했다.
  "다시 한번 의안군의 증상부터 상세히 살피고 떠나게."
  정작이 앞장섰고 허준이 의안군이 눕혀진 방에 다시 들어섰다.
  열한 살 어린 병자는 칭얼거림도 없이 늙은 보모상궁과 두 사람 시위 상궁의 주시 속에 누워서 무시로 드나드는 의원들이 귀찮은 눈치일 뿐 병이 깊어 보이지 않았다.
  허준이 그 의안군의 가슴을 헤쳐보았다. 열은 아직 미열이었으나 그 가슴 부위에 좁쌀만한 붉은 반점과 물집이 10여 개 열을 지어 돋아 있었다.
  순간 허준의 가슴에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예감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황열병 아닌가!'
  10년 혹은 15년 주기로 이 나라의 생명을 무수히 죽이는 병,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그 돌림병의 병명이 허준의 머리를 때렸다.

    15
  출정의 행장을 갖추자 허준은 일행에 잠시의 말미를 청한 후 다시 한번 의안군의 병증을 확인하고자 저경궁 인빈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특히 승마의 술이 있어 자신을 선발했다는 어의 양예수와 정작의 긴장된 목소리가 허준의 귓전에 계속 맴돌고 있었다.
  병자가 병자인만큼 어찌 긴장되지 않을까만 어린 왕자의 가슴팍과 목줄기에 줄을 이어 돋아난 열증은 성홍병을 닮았으나 그 두번째의 심병에서 처음 짚었던 황열병은 아니라고 허준은 생각했다.
  열에 떠 말을 잇지 못하는 푼수로는 황열병이되 황열병이면 고열에 돋는 반점이나 입속에 탄 검은 오물을 토하고 간헐적인 오한에 떨다가 수시로 토혈의 충동이 잇따른 후 마침내 토혈에 이르면 중증으로 본다. 그러나 호위해 앉은 세 궁녀도 왕자가 오한을 느끼는 증상은 없다고 입을 모으고 허준의 손끝에 뒤집어지는 의안군의 안저에는 고열의 핏발만 핏물이 괸 듯 괴었을 뿐 황열병에 수반하는 황달의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 '
  허준은 서둘러 달려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적어도 하루이틀 병자의 곁에 수발을 들며 더 좀 확실한 것을 지켜본 후에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 자신이 맡은 침구 분야의 병자가 아닌 것이 분명하고 그 분야의 의원들을 모아 그 투약에 대한 최종 검토를 거친 사항에 임의로 끼여들 수는 없음도 알고 있었다.
  "왜 다시 왔소?"
  빼어난 미모가 이젠 오남매를 낳아 선정적인 여인의 모습으로보다 온 후 자애로운 모성으로 더 돋보이는 인빈이 어느새 건너왔는지 병자의 방을 나서는 허준에게 나직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눈의 횐자위가 푸른 빛이 돌도록 횐, 그래서 더욱 심성이 맑아 보이는 여자였다.
  "어의와 제조도 마마에게는 따로이 왕자의 증상을 아뢴 듯한데 들락날락 심병하고 거푸 숙의만 할 뿐 내겐 병명도 이르지 않고 안심하라는 말뿐이니 오히려 더 불안해서 묻는 게요."
  "소인은 왕자의 병을 맡을 의원을 데리러 가는 길이옵니다."
  "그러니 묻는 말이오. 불러올 의원이 평소 무슨 병을 잘 보는 사람인가는 알 터이고 보면 왕자의 병명 또한 짐작이 가리라 믿소만."
  허준의 뇌리에 구황경차관을 수행해 떠난 이명원의 조예를 떠올렸다.
  "...!"
  이명원뜬 탕약 조제의 천재다. 탕약의 재료가 꽃(씨앗)과 잎새와 줄기와 뿌리로 형성되었고 그 4분된 한 부분이 하나의 약효를 발생한다면 이명원의 재능은 그 각 약재의 여러 부분을 혼합하여 최대의 약효를 우려내는 귀재로 인정받는 터였다.
  "대답을 감추려 하는 뜻이 아니오라 부르러 가는 의원은 이명원이라는 의원이온데 여러 병에 투약이 능하고 그 범위는 딱히 어느 병 어느 증상이라 사뢸 수 없습니다. 확실한 점은."
  "말씀하오."
  인물만이 빼어난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지체가 빈에 이르렀음에도 어린 궁녀나 무수리들에게도 함부로 명성을 높이지 않는 인덕에 대한 칭송이 궐내에 자자한 여자였다.
  "분명한 것은 왕자의 병증이 침이나 뜸과는 상관이 없는 병인 듯하옵니다."
  인빈은 더 채근치 않았다.
  그리고 하직의 눈빛을 보이는 허준에게 한숨 섞인 독백 한마디를 했다.
  "마마께는 분명 병명이 어떤 것이다 아뢰었을 법하건만."
  그리고 다시 말없이 돌아서 가는 허준의 귓가에
  "참말 답답도 한지고."
  인빈의 수심 묻은 한마디가 들려왔다.
  '무슨 병일꼬?'
  의안군의 병증에 대한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은 채 어의가 꾸며 줄 서찰을 가지러 내의원에 들어섰을 때 막 양예수가 손수 서찰을 들고 정작과 함께 급히 나오고 있었다.
  받아든 봉함된 서찰은 간략한 요지 몇 마디만 적힌 듯 서찰의 부피가 엷었다. 그리고 다시 저경궁에 다녀온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레 꺼내려는 허준에게 양예수가 명령했다.
  "서둘러 떠나게. 그리고 이직장이 경차관과 함께 벌여놓은 일이 있어 미처 회정이 지체될 듯하거든 그대가 그쪽 일을 대신 맡고 이직장 일랑 촌시도 지체치 말고 돌아오라 해야 하리."
  "분부 거행하겠사옵니다. 하온데 ..."
  "알고픈 말이 많을 터이나 그건 함께 떠나는 남응명이 가는 도중에 논의할 것인즉."
  양예수의 말도 오늘 따라 평소의 위엄보다 긴장에 굳어 있었다.
  그 내의원이 초긴장한 모습에 해답의 실마리가 허준에게 잡힌 것은 도성을 벗어난 일행이 자정 이전에 임진강 도선장까지 닿아야 하리라는 선도하는 병조의 관원의 말에 따라 쉴 새 없이 달리는 파주 경계에서 남응명의 입에서 였다.
  "오히려 내의원에서 소식을 듣고 있는 줄 알았소만."
  "어떤 소식을 이르시오니까?"
  "의주 가도에 여역이 번졌다는 소식 모르오?"
  "여역?"
  "그렇소."
  놀란 허준이 말고삐를 채며 속도를 떨구었다.
  "여역이라했사오니까?"
  "겪어본 바 있소?"
  "말은 무성하게 들었으나 아직 겪은 바는 없습니다. 하온데 남주부께서는?"
  "겪었소. 겪었다뿐이 아니라 곡산에서 처가가 함몰하는 것도 겪었소."
  "처가가 ..."
  "여섯 식구 모두."
  "...!"
  "처가의 여덟 식구 중에 여섯이 물고(죽음)가 났고 둘째 처제가 겨우 살아남았소. 그 여섯 식구는 넉 달 틈새에 잇따라 죽어갔고 ... 앓는 사람도, 수발들며 간병하던 사람도 모조리 잔인하고 ... 정말 무서운 돌림병이오."
  "집사람은 한양에 나와 있었으니 목숨을 부지해 있소만 부모형제가 모두 그 역질에 죽고 나선 이젠 식솔 중에 누가 기침 하나 우습게 해도 숨을 삼키고 바라보곤 하오!"
  "의주 지방 ..."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건 전쟁이오. 그 퍼지는 속도가 바람결 같아 한 고을이 앓는다 하면 벌써 다음 골도 죽어가오."
  "병의 발생이 꼭 봄철에 생기는데 특히 갑인, 을묘년간의 봄에 더 치성하고 돌림병 중에 치사량이 그렇게 참혹할 수가 없소. 낫고 안 낫는 병자가 아닌 무리무리 떼죽음으로만 번지는 게 그 여역이란 돌림병이오."
  "하오면 지금 혹 왕자의 병세가 그 여역과 동일하다고 여겨서 이명원을 부르러 가는 것이오니까?"
  "의안군의 병세를 보았소?"
  "보았습니다."
  "난 그 증세를 잘 아오. 한눈에 알아. 그래 허직장이 본기 그 증세가 어떻더이까? 세세히 말해 보오."
  "그것보다 의안군이 그 병이라면 ... 그리고 지금 어의나 모두 그 일로 우리를 보내 이직장을 서둘러 불러들이는 것이라면 특히 남주부님을 동행시키는 것이 ...
  다음 순간 허준은 자기 자신의 입을 막았다.
  남응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연 건 또 허준이었다.
  "이 모든 사세가 돌림병의 일단이 이미 궁중에도 퍼졌다는 그런 판단에서가 아니올지!"
  "의안군의 병이 여역이라면 그렇겠지."
  의외로 남응명의 말이 수월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이제야 기다리고 벼르던 숙적을 만나기나 한 듯이 투지에 빛나고 있었다.
  허준은 숨을 삼켰다. 그 뇌리에 전염병에 휩쓸려 떼주검이 실려나오고 곡성이 진동하는 대궐의 광경이 스치고 있었다.
  허준은 자기가 븐 의안군의 병세를 세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닌 듯하군."
  문득 남응명이 자신의 긴장을 풀며 말했다. 허준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의 안도였다.
  다음날 다시 낮밤을 달려 일행이 황주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직 여명이 남은 강 건너의 들판곽 산비탈에 서너 군데 불길이 치솟고 그건 모두 방화의 불길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나루를 점령하고 길을 가로막은 황주 관아의 관원들이 어제 아침부터 이 고장에 같은 병증에 의한 환자의 초상이 삼 개 부락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하며 국도를 우회하여 북상할 것을 지시했다.
  남응명이 곧 신분을 밝히고 길을 막은 지휘군관을 불러 죽은 병자들의 병세를 캐묻곤 신음했다.
  "여역 맞네."
  "뭐라고요!"
  "어김 없네."
  "의주 어간 운운하더니 벌써 이곳까지 ..."
  남응명이 이를 악물었다.
  "여역일세. 병자가 죽으면 병자가 죽을 때 송장에서 병균이 새나온다하여 집을 불태우는데 이미 그 병세를 아는 사람의 솜씨일세."
  허준은 강 건너 군데군데 소리없이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을 망연히 건너보았다.
  갑자기 눈앞의 강물도 죽음에 잠긴 듯 물소리도 들리지 않고 강 건너의 불길만 일렁일렁 비칠 뿐이었다.

    16
  곡산에서 시체들을 태우는 마을의 불길들을 바라본 그날이 밝아 일행이 평양 남쪽 40리 어간인 중화에 이르기까지 허준의 코끝에는 시체를 태우던 역한 냄새가 떨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살아서야 인간이다.
  살아 숨쉴 제는 제 살이라도 베어 먹일 듯이 정을 주는 것이 인간들의 미속이건만 일단 숨을 떨군 송장의 불에 타는 그 냄새는 차마 아무나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아니었다.
  허준이 의원으로서의 관심에서 일행과 떨어져 불타는 마을에 일일이 찾아들어 사자의 생전의 병을 앓는 모습을 물어보고 나올 적마다 남응명만이 동구 밖에서 묵묵히 기다려줄 뿐 여타 일행들은 외면하고 구역질하고 허준의 옷자락에 죽음의 병균이라도 묻었을까 섬뜩한 눈빛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건너볼 뿐 말을 갈아타는 역참에서도 말 한마디조차 건네려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남응명만이 이미 수년 전 처가 일가의 함몰이라는 참혹한 체험을 지녔음에서 허준이 유족이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어오는 견문을 종합해,
  "그해의 바로 그 병이오. 내 처가 일가의 목숨을 모두 해쳤던 그 병."
  하며 이를 악물었다.
  온역(장티푸스)의 두 형태인 대두온증과 대두종 그리고 두창을 통틀어 의서는 여역이라 일컫는데 이 여역의 려자는 곧 염병 려자다.
  염병 ...
  피하지도 외면할 수도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온갖 증오를 담아 '염병할!' 하고 되알진 욕설을 사람들은 내뱉지만 욕설이 아닌 염병의 실체는 가래침과 함께 뱉어버릴 수 있는 그런 간단한 것이 아니요, 말 그대로 목불인견의 참상 그것이었다.
  그 발병의 경로는 지독한 흉년이나 대기근으로 인간들의 체력을 탕진시킨 뒤 오랜 장마로 이어진 덥지 않은 여름이나 이상난동을 치른 봄이면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찾아드는 이 염병은 걸렸다 하면 허약자는 발병 당일로 물고가 나고 이틀에서 사흘, 엿새에서 이레, 길면 15일에서 17일 사이에 생사의 양계로 갈리는데 열에 여덟아홉씩이나 고목에 낙엽 떨구듯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치사율을 지니고 있었다.
  얄팍한 인간들이 겨울의 혹한을 원망하지만 자연이 그 겨울을 준비한 것은 그 추위야말로 그 철에 죽일 것을 죽이고 살릴 것은 살려 더욱 새로운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한철을 살곤 죽어야 할 미물들이 춥지 않은 겨울이면 그대로 살아남아 묵은 알을 가고 새끼를 쳐 그 불결하고 독한 병균들이 들쥐의 뱃속을 살아남거나 족제비나 새떼 깃털 속에 옮아 살아 우물이나 인가에 알을 슬고 마침내는 인체에 침입하면서 인간들에게 재앙은 시작되는 것이다.
  '십중팔구의 치사율!'
  의주 어간에 여역의 혐의가 짙은 돌림병이 번졌다는 소문이 떠돈 지 겨우 사흘, 이제 도보로 사흘 거리가 넘는 평양의 훨씬 남방 여러 고을에 번지고 있는 전파의 경로도 수수께끼려니와 그 속도가 너무도 전율스러웠다.
  '그리고 ...!'
  말머리를 나란히 채찍을 더해 달리는 남응명을 돌아보며 또 한번 허준은 굳이 이 일행 속에 종친부 파송의원인 그가 끼인 사실을 불안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의안군이 발병한 지는 비록 하루에 불과하다 해도 상대는 왕자가 아닌가. 외형과 내경의 각 병증을 두고 태의의 지휘하에 각 부서의 의원들을 모아 면밀한 심병을 거쳤을 것이고 안타까워하는 인빈에게조차 병명을 감춘 채 남응명과 자기를 선발해 이명원을 데리러 보내는 비밀은 무언가!
  '기안군이 앓고 있는 병도 이 여역이다! 틀림없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니 차마 상상해서도 아니 되는 그 의문을 이제야 허준은 눈앞의 현실로 직시하는 느낌이었다.
  평양 성문 아래 당도하기까지 그 의문을 되풀이 정리한 허준은 남응명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강한 눈길을 그의 얼굴에 박았다.
  "아까부터 허직장의 눈길을 알고 있었네."
  남응명이 거두절미한 침착한 어조로 그 허준에게 말했다.
  "하오면!"
  "맞네. 의안군의 병증이 내 눈에는 틀림없는 염병일세. 내가 먼저 태의께 말했네."
  "...!"
  "허나 미리 왕자의 병이 염병이라 소문날 때 궐내의 혼란을 어찌 막겠는가. 염병이 왕실 내에 틈입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왕실은 물론 세상이 발칵 뒤집히네."
  "하오나 그토록 전염률이 빠르고 치사율이 높은 병을 어째서 태연히 격리시키지도 않은 채 그냥 두오니까. 저 또한 발정 직전에 다시 찾아들어 직접 심병했었습니다. 증상이 기묘하여 차마 불온한 말은 발설치 못하였으나 ..."
  "그대는 아직 염병을 다룬 체험이 없나 모르나 전조 명종대왕 때부터 태의도 나도 아프도록 겪은 병일세."
  "...?"
  "특히 나는 첫눈에 왕자의 병이 그 증상의 초기다 확신했네. 허나 장소가 왕실이요 병자가 왕자이고 보매 차마 경망하게 말을 꺼내지 못했고 더 좀 명확한 증거로 사태를 대처하고자 역질이 치발하고 있는 지역에 수행해 있는 이명원을 데리러 가는 것이네."
  "허나!"
  허준은 사태도 사태려니와 염병 병자로 확인된 의안군의 방에 간병의 역을 다하고자 앉아 있던 세 사람 시위상궁의 위태로운 목숨을 생각했다.
  "내 말 더 듣게!"
  말을 막는 남응명의 눈빛이 딴때없이 강했다.
  "마저 상황을 일러주소서. 소상하게!"
  "왕자의 병실에 궁녀조차 없이 할 순 없잖은가. 그건 주인을 모시던 인간의 피치 못할 운명인 게고 ... 그러나 주상전하를 비롯, 인빈도 그 밖의 어떤 이도 지금쯤 저경궁에는 출입이 금지돼 있을걸세."
  "우리가 이명원을 대동해 돌아가 이명원이 그 동안 현지에서 수없이 보았을 병자들의 증상과 의안군의 증상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증거하기 이전까지 ..."
  "굳이 나와 그대 내의원 의원으로 하여 이명원을 데리러 가게 한 비밀한 사연을 이제 알겠는가?"
  허준은 출발 전 자기 혼자 의안군의 병실에 들어가 의안군의 몸을 만지고 코앞 가까이 들여다보며 왕자의 숨소리를 세던 사실은 상기했다.
  "...!"
  어쩌면 그 순간 염병의 병균은 자신의 몸속에 옮겨 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 이상했다. 세상을 뒤흔들 거대한 병균의 집단을 목격한 의원으로서의 긴장인지 투지가 앞설 뿐 가냘프게 맡아지던 어린 왕자의 호흡 속에서 병균이 자신의 몸속으로 옮아왔다는 불안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얼 하오. 곧 성문이 닫힌다 하오."
  일행인 병조의 관원이 10여 보 앞까지 달려와 소리쳤으나 허준은 아직 한낮인 중천의 하늘을 흘긋 본 채 다시 남응명에게 말했다.
  "만일 의안군의 병이 북쪽과 이곳에 번지고 있는 염병이란달 때 그렇다면!"
  "들어 갑시다."
  허준이 남응명의 옷소매를 다시 잡았다.
  "그렇다면 병은 대궐 안뿐 아니라 이 평안도에서 한양에 이르는 모든 길목에 이미 번졌다는 증좌가 아니오니까?"
  "한양뿐이 아니지. 아미 더 남쪽까지 자꾸 번지고 있다 여겨 틀림이 없을 게요."
  숨을 삼킨 채 이번에는 허준이 못박혔고 이번에는 남응명이 그 허준을 이끌었다.
  "지금쯤 아마도 내의원은 발칵 뒤집혀 있을 게요. 의안군도 의안군이려니와 이미 각처의 수령들이 띄우는 수십 기의 파발들이 경의가도의 처처에 번진 사태를 조정에 계달 치보하고 있을 것 인즉."
  허준은 문득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왁자의 손목에서 맥을 짚고 그 눈을 까뒤집어 병증을 찾을 때 자신의 손끝에 옮아오던 왕자의 고열이 자신의 손끝에 되살아나는 듯했고 또 그것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병균을 보유한 병자인지도 모르는 채 시시때때로 이마를 짚고 함께 아파하며 조용히 지켜앉아 병자가 토하는 숨결을 함께 호흡하고 있는 세 사람 궁녀의 처연한 모습도 떠오르고 있었다.
  이날밤 두 사람은 구주지역에 파송된 구황경차관 이동형의 수행에서 급거 귀경 명령을 받아 평양부로 돌아온 이명원과 해후했다.
  발병지역으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평양에서 소환당해 온 이명원은 기다리고 있는 인물들이 내의원 동료들인 남응명과 허준이자 가득히 반가운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그 해후는 한끼 서로 밥상을 마주할 사이도 없이 꺼졌다.
  허준들을 뒤따라왔다고 여겨지는 파발이 전한 내의원으로부터의 급보는 임금 선조의 제삼자 의안군은 어제 새벽 허준 들이 평양으로 출발하자 곧 괴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당일로 급서했으며 임금은 그 슬픔에 조정과 저자가 사흘을 쉬어 왕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시 삼일을 정했다는 머리말 끝에 이명원과 남응명의 즉시 귀경과 허준에게는 이명원을 대신하여 평안도 지구 구황경차관에게 수행할 것을 내의원 도제조와 태의 양예수의 연명으로 명령하고 있었다.

    17
  왕자 의안군의 죽음 ... 병 앞에 그리고 죽음 앞에야 왕자나 서민의 차별이 있을까만 바로 엊그제 자기 손으로 짚어보고 들여다보았던 환자의 사망 소식은 돌림병이 만연한 오염지역으로 달리는 허준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있었다.
  전갈을 듣고 찾아가 병자 가족의 인사를 받으며 아랫목에 편안히 좌정하고 병세를 물어보고 맥을 짚어보는 그런 유장한 대거리가 아닌 것이다.
  걸렸다 하면 온 식구에게 옳고 그리곤 곧 바로 떼죽음으로 내닫는 염병이라는 이름의 잔인한 병마 ...
  '병이 있으면 반드시 약이 있다.'
  그것이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신념이지만 자기의 짧은 인생과 경첩으로는 감히 짚어볼 수 없는 세상의 수많은 기괴한 병들이여 ...
  생각하면 혜민서에서도 부인병이요 소아병이요 그리고 잡병이라 이름하여 수많은 가닥으로 병을 분류했거늘 그 각각 다른 병자를 다루는 병동을 조석으로 바라보고 오가면서 왜 자기는 오로지 침술에서만 의술을 발견하려 했더란 말인가.
  침술 따위로 감히 어쩔 수 없는 저 집단으로 발생하는 돌림병에 대하여서는 다른 이의 분야려니 미루어온 자신의 태만이 이제야 뼈저렸다.
  세상을 무시로 횡행하는 수많은 병명 속에서 과연 스스로 자신 있다 자부하는 병이 대체 몇 가지나 되기에 내의원 의원이란 영예를 코끝에 걸고 고작 눈앞에 띄는 병자나 낫우는 것으로 허송세월했더란 말인가.
  눈앞의 병자를 낫우는 것도 기쁨이요 보람이리라. 그러나 진실로 세상을 위한 의원이고자 소망하거든 병이 있기 전에 병이 오는 길을 가로막는 그런 의원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고통하기 전에 미리 병을 막아 세인에게는 비록 눈에 띄거나 화려한 소문은 나지 않는 외로운 의원이라 할지라도 이미 온 병을 낫우는 의원보다 병 오기 전에 가로막는 의원이 더 가치 있는 의원이리라.
  너무 좁게 살고 있어서 그저 한두 가지 아는 걸로 세상 모든 병을 다아는 듯이 교만한 얼굴로.
  물론 허송세월이라 할 만큼 세상을 한눈 팔며 살아오진 아니했다. 딴엔 직처에 나가거나 집에 돌아와서나 낮도 밤도 없이 의에 관한 꾸준한 생각을 했었노라 자부하지만 온 세상에 치발하고 있는 저 염병에 당장 속수무책이란다면 오늘에 대비하지 못한 자신의 공부는 허송세월이라는 자책을 면할 수 없으리라.
  더구나 내 나라의 역사 속에 주기적으로 되풀이 발생했던 돌림병에 미리 유의하고 관심했던들 지금 세상의 저 떼죽음 앞에 이토록 당황하지만은 아니했으리라. 세상 속을 돌아다니지 않고 내의원 방안에서 고작 의서 따위에나 의지해 자기의 의술을 닦으려 한 자신이 그는 부끄러웠다.
  또 있다. 외국의 의술과 그 이론에 굶주려하고 6천여 리를 달려가 반년 세월을 허비하며 명의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한눈 팔던 과거.
  '조선땅에서 병 앓는 이여, 이 못난 허준을 용서하오.'
  허준은 진심으로 그런 자괴를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웠다.
  '여역!'
  하고 평양 감영에서 초집한 의원들과 함께 밤을 도와 구성으로 향한 서북가도를 달리며 허준은 또 신음했다.
  온 세상 병든 모습을 향해 돌아오는 건 후회뿐이었다. 비록 겪어내지는 아니했으되 그래서 염병에 대처하는 경험의 축적이 없으되 허준은 지금 자기가 향해 달리는 이 길이 의원으로서의 자신의 앞길에 커다란 전환이 되는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선 팔도에 생겨나는 병이거든 어떤 병일지라도 내 한몸 던져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바로 그 결단의 길이어야 한다고 ... 관서의 산맥들은 봉우리마다 눈을 뒤집어쓰고 있건만 지상은 봄날씨였다.
  겨울이 겨울이지 않은 그 이상난동의 서북가도엔 안개가 자욱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안개들은 마치 생물처럼 허준 들을 감싸고 흩어졌다가는 다시 감싸며 허준 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절기가 이월인데 무슨 안개가 이토록 심한 건지 마치 병마의 입김 같소."
  초집한 의원들을 선도하는 감영의 향도역이 탄식했다.
  "누가 아니라오. 마치 봄밤 같소. 온 산 꽁꽁 얼어붙고 북풍이 휘몰아쳐야 할 철에 일기가 이토록 눅으니 땅속 벌레가 모두 되살아나는 게지."
  구성에서 약재를 타러 급거 평양까지 달려와 허행한 후 허준 등과 일행이 된 초로의 관원이 자꾸만 주위 어슬한 골짜기에 불안한 눈알을 굴렸다.
  떠나기 전 그가 전한 구주의 참상은 허준이 평양에 당도하기까지 연도에서 목격한 바로 그 병자들의 증상과 모두 일치했다. 각자의 잠복기간을 경계로 병자는 순식간에 고열의 습격을 받고 골이 빠개지듯한 두통에 시달리며 헛배가 부르고 심장 밑이 뻣뻣해지고.
  여기까저의 상태를 일러 대두종 또는 뇌두풍이라고도 가려 부르기도 하나 이 고열의 고비 다음은 머리꼭지가 지끈거리고 다음 진행은 머리 주위에 부스럼이 생기며 또 헐다가 목안이 부어오르고 부어오르고 자꾸 부어오르다가 마침내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목쉰 비명을 지르다가 죽어가고.
  또 다른 예로 처음 심한 감기처럼 열이 솟다가 코안과 귀뿌리부터 헐고 붉게 부어오르고 삭신이 쑤시다가 역시 목안이 물도 넘기지 못하도록 부어오르다가 기가 막혀 죽고 ... 그 발병서 낙명까지 사람따라 다르나 즉일서 열흘, 길어서 두이레면 생사가 갈리는데 재채기가 나면 목안이 다시 틔어 사는 증좌요 재채기가 없으면 죽는다.
  저마다 경첩 속에서 처방은 많다.
  감초, 천궁, 당귀, 박하 등 17가지의 약재를 생강 세 쪽에 달이는 방풍퉁성산이라는 복잡한 약에서부터 진피, 천화분, 당귀, 천궁, 길경, 후박 등 14가지 약재로 달여 물탄 술로 마신다는 탁리소독산까지.
  그리고 장달환, 인진사황탕, 고삼산 등 가지가지 약명과 대문과 사립에 소피를 흥건히 발라두면 병이 못 들어온다는 황당한 소문 속에 농가의 외양간마다 병가족들의 필사적인 습격이 휩쓸고 있다는 소문과 새벽 첫닭 울 무렵에 목욕재계하고 마당 가운데 서서 사해의 신명을 세 번 씩 외면 들었던 병도 도로 도망친다는 웃지 못할 너무도 슬픈 처방까지 ...
  '그러나 ...!'
  허준은 믿지 않았다.
  물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때로 성황당 돌무더기에 비는 그런 허황한 처방이 잠시의 자기 위안이 될지는 모르되 자신이 평양에 이르기까지 본 그 참혹한 죽음들과 불태우는 집들과 거기서 뿜어나온 송장 타는 내음은 이미 신불에게 비는 영역과는 상관이 없는 냉혹하고 거대한 떼죽음의 현장들이었다.
  죽은 이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할값에, 앓고 있는 이도 또 어쩔 수 없다 할값에 아직 온전한 이 그러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마 앞에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이들을 지켜주기 위하여서는 신불에의 기도보다, 수십가지 동원해야 하는 난삽한 방법보다 손쉽고 확실한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되리라.
  '그 길뿐 ... 병엔 요행이 없어!'
  의원으로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나라 안 최고수들이 머리를 맞대어 내 놓은 온갖 처방 속에서 와병 불과 하루 만에 병자의 목숨을 물고낸 이 여역이라는 이름의 병마의 위세를 꺾을 방법 ...
  그러나 아직 허준에게는 이 공포의 역질에 대처할 단 한가닥의 실마리도 희망도 잡혀 있지 않았다.
  구성 경계까지 40리, 그 정주땅에 들어서면서 이윽고 일행은 안개를 벗어났다.
  밝아오는 하늘은 여명 속에서 청명했다. 그러나 하늘이 아닌 땅 그 지상의 광경은 인적 없는 황량한 광경 그것이었고 그건 이른 새벽 시각이어서가 아니라 군관의 지휘 속에 길목마다 인구의 이동을 가로막아 통제하는 당지 관원들의 횃불 속에서 더욱 긴장감만 더할 뿐이었다.
  구성도 안개였다. 정주에서 본 해는 환시인 듯이 사라지고 허준 일행이 닿은 구성 관아는 지척의 동헌 마루가 안내를 받아 다가서기까지 보이지 않도록 짙은 안개에 파묻혀 있었다.
  "미리 연통을 받았네. 반가우이."
  위엄 지니고 아랫관원의 현신을 기다릴 법한데 방문 밖까지 나와 맞이 해주는 구황경차관은 사행 때 친교를 튼 이동형이었다.

    18
  구황경차관 이동형은 한양에 소환된 이명원을 대신해 나타난 내의원 의원이 허준이라 헤어져 살던 아우를 만난 듯이 반겼다. 또 당상관이요 어사인 높은 지체를 파탈하여 자신의 숙소에 허준의 잠자리를 함께 배설케 했고 다정스럽게도 원로의 여독을 물어주었다.
  허준이 감동되어 더욱 존경의 태도로 대답했다.
  "아직 젊사와 여독을 핑계할 정도는 아니옵니다."
  "그러면 좋네. 수백 리 밤을 도와 달려온 사람에게는 미안한 노릇이나 오늘밤 우리 회집에 끼이게."
  구성은 도호부다. 이동형의 주재 속에 부사와 선천 군수, 곽산 군수가 동석했고 그밖에 인근 고을의 현감을 비롯, 각지의 병세 구완에 참여했던 의원 그리고 병에 감염되었다가 요행히 살아났다는 백성들을 참여시켜 각자의 경험을 종합하고 대책을 강구하자는 모임이었다.
  하나 아무도 자신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의원들과 현지를 순시해 돌아다닌 관원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개인적인 목격담과 의원인 허준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미신적인 속방의 나열과 중구난방의 비관론뿐이었다.
  어떤 약이나 어떤 처방에서 확실히 실효를 보았노라는 주장은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아니했다.
  병든 후 나았다고 주장하는 동석한 백성들의 체험담에 허준이 특히 관심을 보였으나 그 촌로 둘과 젊은이와 소년 하나 그리고 말석에 불려와 앉은 고부 두 여자도 약을 먹고 나았다는 말이 아니고 성황신에 빌고 바위에 절을 해서 나았다는 황당한 주장이었고 두 촌로도 닭의 피를 방문에 처발라 병을 몰아냈다는 허황된 것인데다 소년의 증상은 애초부터 여역과 상관이 없는 황달이 분명했다. 가재의 즙을 짜내 먹으니 황달이 나았다는 산골 마을에 굴러다니는 속방이 소년의 말이었고 남은 젊은이의 주장인즉 하나도 둘도 꿩고기를 먹고 나았다는 되풀이였다.
  그러나 허준의 눈에는 그의 앓았던 대머리가 헐고 입술이 부르튼 증세등이 염병의 모습에 비슷은 하되 손가락 사이가 진물렀던 흔적이 좀 앓다가 나은 병자지 여역과는 달랐다.
  그 어느 체험담도 허준이 이곳에 이르기까지 목격했던 병자들과는 증상의 일치가 없다고 판단한 허준이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나자 좌중은 다시 "어찌 대처할지 ... 하는 탄식 속에서 서울 높은 곳에서 내려온 허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할 말이 없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만져보고 말아보고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것뿐 여역 환자를 낫을 처방에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자신의 감염을 무릅쓰고 각처의 환자를 증상의 경중별로 나누어 함께
무릎을 맞대고 일일이 물어보고 촉진하는 그 길뿐이라 생각했다.
  "어째야 하는가?"
  좌중의 침통한 침묵을 이동형이 깼으나 시선만 들었을 뿐 허준은 그들을 당장 안심시킬 대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허준은 한시바삐 날이 새기를 바랐다. 관리인 그들이 병자를 보되 의원의 눈처럼 세밀할 까닭이 없고 의원의 관심처럼 애써 가까이 상종하지도 아니했을 터이다.
  '그건 의원인 내가 할 일이다.'
  허준은 날이 밝는 길로 현지에 달려가 더 좀 자세히, 더 좀 많은 병자를 접하여 기어이 어떤 해답을 얻으리라 자신의 결심을 거듭 다짐했다.
  "의원이란 인물이 어째 이토록 묵묵부답인가."
  질문을 듣지도 못한 허준에게 돌연 선천 군수가 눈을 치뜨며 화를 냈다.
  "무어라 하문이 계셨사오니까?"
  "답답도 한지고. 별이 퍼지는 망상이 아침저녁이 다른 터에 의원으로서 무어라 방책을 내놔야 하잖는가!"
  "소인도 처음 접하는 증상들이오라 날이 밝는 길로 특히 병이 치발한 지역을 답사하여 처방의 실마리를 찾아보리라는 말 외 지금은 달리 드릴 말씀이 없사옵니다."
  "백성들이 다 어육이 된 뒤에 말인가!"
  말끝에 그 선천 군수의 손가락질이 허준에게 향했다.
  "지금 당장 이 시각에도 백성들은 약을 달라, 살려달라 울부짖고 버둥버둥 죽어자빠지는데 한양에서 달려온 의원이란 자의 말이 고작 이제 실마리를 찾기 위할 묵상이라?"
  "고정하오,"
  이동형이 제어하자 이번에는 관할 내에 이미 150여의 사망자를 냈다는 곽산 군수도 노기 어린 눈으로 허준을 쏘아보았다.
  "병사는 평화로운 날에도 군사를 조련하여 불의의 전란에 대비하는 것이요 의가는 무병할 재도 고난에 대처할 줄 알아야 진실로 의원이라 하겠거늘, 오는 자 가는 자가 모두 속수무책이라니 국록을 먹는 자가 창피도 모르는가!"
  허준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 창피 뼈저리게 깨닫고 있사옵니다. 하오나 ..."
  "말해 보아. 그래 하오나 그 뒷말은 뭔가!"
  허준은 말하지 못했다 ... 변명은 걱정을 더 부를 뿐이다.
  '가서 목격하고, 다시 더 세세히 살펴보는 그 길뿐.'
  언제부터인지 닭 우는소리가 아스라이 들리고 있었다.
  이때 새벽녘 임지로 달려가야 하는 두 군수를 위해 밤참을 겸한 간략한 주안상이 들여졌다. 그러자 그 주안상 앞에서 남 먼저 술을 따라 허준에게 건네준 것은 잠시 전 허준을 매도하던 선천 군수였다.
  "어전에 드나드는 내의라 하여 세상 만병을 다 다룰 수 없다는 건 내 또한 모르는 바 아니로되 온 고을이 곡성과 비명뿐인데 어느 누구 뾰족한 방책을 내지 못하니 불현듯 그대를 향해 고성이 터진 것이니 이해하게."
  "넉히 아옵니다."
  "안다고는 말게. 말로 들은 이들은 모르네. 현지에서 보고 겪기 전엔 참상을 아무도 짐작 못해."
  "허준이라 했던가?"
  "그러하옵니다."
  "그렇거든 명심해 주게. 타군 타현보다 특히 내 고을에 병이 치성하니 행장이 갖춰지는 대로 제일 먼저 내 군으로 달려와 살펴주게."
  "소인도 꼭 찾아보려 하옵니다."
  "예서 선천은 70여 리, 우리 곽산은 60리가 못되네. 내 지경에도 참상이 목불인견이라 가까운 우리 쪽부터 들려주게."
  이번엔 곽산 군수가 허준의 술잔에 손수 잔을 치며 말했다.
  허준은 방안의 모든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병 앞에 무력한 의원으로서의 자신을 사과했다.
  날이 밝아오자 허준은 서둘렀다. 꼬박 밤을 밝힌 그였으나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나지 않았다.
  여역이라는 거대한 적을 발견한 데 대한 강렬한 투지가 잠 따위는 멀리 내쫓고 있었다.
  허준은 이동형과 구성 부사에게 청하여 고장에서 자원한 의원 중 강행군할 여정에 견딜 특히 젊은 의원 10명과 지난날 여역이라는 전염병과 조우한 적이 있는 경첩 깊은 4명의 의원을 선발했다.
  허준은 먼저 의주로 향한 작정이었다.
  그 의주는 중국의 문물을 들여온 길목인 동시에 대륙으로부터의 모든 전염병을 묻혀들여오는 길이기도 하기에 우선 의주에서 시작된 병의 발생 형태와 인근 지역으로 퍼져나간 속도와 날짜별로 발전한 여러 양상을 추적하고 특히 타 지역보다 월등히 사망자를 낸 고장의 지리적 특성도 고찰한다는 계획이었다.
  병은 날로 번지고 있고 그 치유방법을 찾는 일이 화급한 터에 자신이 세운 계획이 혼자 지휘 정리하기엔 버겁다 여긴 그는 내의원으로 응원해 줄 의원의 증파를 요청하는 글을 적어 부사에게 부탁한 후 10일 안에 의주, 정주, 선천, 곽산, 삭주를 거쳐 돌아올 것을 이동형에게 품의했다.
  이동형이 허준의 강행군의 일정을 묵묵히 듣고 향도 두 사람과 특히 낯선 관아에서 신속한 협조를 얻어낼 역을 맡을 인물로 판관을 딸려보내는 호의를 보이며 한마디 물었다.
  "각처의 병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날로 더 치성한데 의사에 자문해 줄 그대가 10여 일씩이나 자리를 비우면 기다리는 날들이 너무 지루하다 여기네. 물론 이 일은 그대의 판단이 우선이라 떠나기는 하되 언제쯤 하회를 들을 수 있겠는가?"
  "가는 곳마다에서 소인의 견해를 즉시즉시 대감께 전해지도록 조치하려 하옵니다."
  "꼭 그렇게 하게. 부디 그대의 안목 속에서 이 흉칙한 병을 잡을 실마리가 발견되기를 빌겠네."
  구성서 의주까지는 방향을 서로 잡아 110리. 삭풍이 몰아쳐야 할 2월의 그 의주가도는 곳곳이 자욱한 안개에 덮인 채 병을 부르는 이상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일행 18명의 말발굽소리가 몇 개의 역참을 통과했을 때 자욱한 안개 속으로부터 허준에게는 낯설지 않은 냄새가 맡아지기 시작했다.
  '송장을 태우는 내음,'
  지방 관원들이 하나둘 명주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 시작했다.
  안개 속 어디선가 상여가 나가는 요령소리도 들리다가 뒤로 사라졌다. 그러나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은 다시 안개 속으로부터 나타났다.
  좌우 산비탈을 가득히 메운 민초들의 무덤들. 전서부터 생겨 있던 것이 아닌 돌림병이 돌며 새로 생겨난 1백도 2백도 넘는 거대한 공동묘지였다.

    19
  열흘을 작정한 서북 오염지구의 시찰에서 허준은 구황경차관 이동형에게 두 번에 걸쳐 보고의 파발을 띄웠다.
  각지의 병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발정에 앞서 열흘 시한을 둔 9일째 구성으로 회정하는 용만에 이르러 여역에 대처하는 하나의 확실한 실마리를 잡았다.
  그는 떠나기 전 그간 목격하고 종합한 각처의 병증에서 환자들에게 공통된 머리의 부스럼과 두통, 고열 그리고 목안이 메어지도록 부어오르는 현상에 뱃속의 구충과 해열 또 이질과 설사에 특효를 지닌 약재들 중 고삼, 치자, 매실에 주목하고 각처의 발병자들을 네등분한 뒤 각각 실첩했다. 그리하여 응원 나온 의원 한 사람씩을 현지에 잔류케 하여 매일의 증상 변화를 잇따라 보고케 한 결과 이 궁여지책의 처방 중 의외로 확연한 효력을 낸 것은 매실이었다.
  처음 환자를 구분하기를 발병 사흘째 이레째 열흘 보름으로 나눌 때는 큰 기대는커녕 너무도 막막했으나 잔류한 의원들의 보고를 종합건대 특히 매실의 투약과 함께 발병 사흘 이내의 가벼운 병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보고가 일치했고 이레 미만의 병자들도 열이 내려서 정신을 되찾는 병자가 많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허준은 즉시 가고 있던 시찰 행정을 멈추고 이곳 용만에서 병자를 남녀노약별로 더 세분하여 또 한번 하회를 기다렸던 것인데 뒤쫓아온 회보는 모두 매실즙을 음복한 환자는 늦어서 이틀을 경계로 해 해열의 확증을 얻었고 목이 붓는 증세가 가라앉기 시작하며 변을 흘리는 이질 설사는 거짓말처럼 멎는다는 보고들이었다.
  날뛸 듯이 기뻐한 허준은 혹시 이것이 우연이 아닌가 여기어 자신이 분류한 병자들을 직접 다시 살피기를 이틀낮 이틀밤 끝에 매실즙의 효과를 확실한 약효로 확인하자 즉시 서찰을 꾸민 후 파발을 이동형에게 달리게 한 것이다.
  한밤에 그 허준의 서찰을 받아본 이동형은 밤을 도와 허준에게로 달려와 더 자세한 설명을 허준으로부터 들었다.
  "분명 매실이다?"
  "달리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각처 병자들의 모습들이 차마 직시하지 못할 참상이라 처음에는 의서에서도 말하는 고삼을 생각했었습니다."
  이동형이 허준의 말허리를 끊고 물었다.
  "고삼?"
  "우리 말에 '쓴너삼 뿌리' 혹은 '도둑놈의지팡이'라는 괴이한 이름아 붙은 일년 인삼의 모양을 닮은 약초이온데 맛이 지독히 쓰고 독하여 독초로도 치부되는 것올시다."
  "마저 소상히 말하게."
  "하라 약용에 쓰이는 그 뿌리의 채취 시기가 늦은 가을로 한정돼 있는 산초요 햇살에 제대로 말려서야 쓰이는 것이라 날로 병자들이 죽어가는 경황에서는 급히 쓰이는 약이 못되옵니다."
  "흠 ..."
  "게다가 그 쓴너삼은 비록 소화에 약효가 출중하나 또 일변 그것을 끌인 물로 논밭의 구충에도 쓰일 만큼 약성이 독하다 여길 때 함부로 이미 체력이 탕진된 환자들에게 쉬 권할 약재가 아니라 판단되었습니다."
  "하여 ..."
  "이 철에도 병자들이 쉬 구할 수 있는 약재를 찾아 전전긍긍하며 다음에 생각한 것이 치자이옵니다."
  "치자의 약효가 뭔가?"
  "황달이나 두통 또는 산증에도 쓰이고 특히 소인이 주목한 것은 그 열매를 달여 마시면 아이들의 머리 종기나 어른들의 목안이 부어오르는 걸 삭이는 데 특이한 약효가 있는 걸 알기로 이를 생각했던 것이온데 이 역시 늦가을 열매를 채취하는 것이오니 시의에 맞지 아니하여 마지막 생각해낸 것이 매실이옵니다."
  "매실이라면 절기는 맞아떨어지는구먼. 헌데 나는 묵객들이 서화에 치는 관상나무요 혹여 술이나 담가먹는 열매쯤으로만 여기는 그 매실이 어떻게 여역의 독성을 퇴치하는 것으로 보았단 말인가?"
  동행해 온 평양감사의 도사도 마른침을 삼키며 허준을 주시했다.
  "속히 말하오, 답답하오이다."
  "매실이 본시 신맛이 강해 생식용으로는 쓰이지 못하고 그 풋 열매를 강판에 갈아 액즙을 내어 햇살에 쬔 후 물엿처럼 엉기게 하거나 생짜를 무말랭이처럼 만들어 먹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고열 설사 심한 이질의 병독을 내리는 데 효험이 있음을 뒤늦게 생각해냈습니다."
  "가만 ... 헌데 여역의 병증에 꼭 끼이는 것이 두상에 퍼지는 부스럼인데 매실이 이에도 약효가 있다고 의서에 적혔는가?"
  "소인도 그 점에 확연한 전거가 없어 많이 망설였사온데 생각하면 두상의 부스럼도, 목안의 붓는 모습도 모두 고열에서 비롯된 것이라 우선 병이 옮은 뱃속의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는 방법으로 피마자를 떠올려 우선 병자의 관장부터 손을 써보았습니다."
  "... 뱃속을 비운다 그런 말인가?"
  "그러합니다. 속명 아주까리라 부르는 것이온데 이는 썩은 음식이나 푹음 폭식에서 생긴 병을 훑어내는 명약올시다."
  "옳거니!"
  "신열의 대체가 뱃속의 음식이 적시에 내리지 못함에서 도지는 것이기 우선 병자의 속을 피마자로 깨끗이 씻어낸 후 묽은 좁쌀 미음 반 공기로 위를 달래게 해 매실즙을 먹여 두통을 다스렸던바 ...
  "나았어?"
  이번에는 허준이 자신의 말에 침을 삼키며 감동적인 얼굴을 했다.
  "먹인 사람마다 효험을 보았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먹인 사람마다!"
  "정녕 그게 사실이오?"
  "현재까지는 확연히 차도가 있습니다. 소인 역시 스스로 믿기지 아니 할 만큼 확실한 차도올시다. 병세를 지켜보게 한 의원들의 말만으로는 만에 하나 실수가 없나 저어하여 소인이 직접 환자를 지켜앉아 비교도 해보았사온데 이젠 마음놓고 권할 만하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여역이 매실 앞에 힘을 못 쓴다?"
  허준이 상기한 얼굴로 말했다.
  "믿기지 아니합니다."
  "나도 그러하이. 왕자의 목숨조차 앗아간 그 역질이 매실로 다스려진다?!"
  "병세가 가벼운 쪽이 체력으로 이겨낸 것 아닌가 여기어 반신반의했으나 모든 이에게 뚜렷한 효험이 보인다 여기어 바삐 알린 바올시다."
  "허의원!"
  이동형이 허준의 손을 힘껏 잡았다.
  "가세. 나도 내 눈으로 나아간다는 병자의 모습을 보아야겠어 ..."
  남 먼저 도사가 자리를 차고 있어났다.
  '틀림없다!'
  그 새벽 출입을 금지시켰던 그 동안 병이 치발했던 서너 군데 오염지구를 방문해 다닌 일행 모두가 매실의 효과를 확신했다.
  "속히 내용을 적게, 아주 소상히."
  노구에 마상과 밤이슬 속에서 꼬박 밤을 새운 이동형이 한점 피로의 기색도 없이 역참의 큰방에 자리를 잡자 지필묵을 대령케 소리치고 허준을 재촉했다.
  초주검이 돼 있던 모두의 얼굴에 희망이 샘솟고 있었다.
  이동형이 자신의 직책으로 임금께 바치는 장계를 급히 초했고 허준도 내의원으로 향하는 글을 적었다.
  그 파발이 밤을 새워 달리라는 이동형의 거듭된 재촉 속에 떠난 지 반 시각쯤 지나서였다.
  특히 병세가 치발한 선천으로 향하느라 사람보다 지친 마소에게 물을 먹일 때 였다.
  5명의 응원차 동원된 내의원 의원들이 당도했고 그 남응명이 내놓은 내의원 도제조의 급보를 받아든 허준은 아연했다.
  아니 허준은 뛸 듯이 기뻤다.
  서찰 속의 그 내용은 의안군의 급서 이후 전국으로 번지는 여역에 필사적인 대처 끝에 이공기와 이명원이 찾아낸 약명이 적혔는데 그 약재 또한 매실과 피마자가 뚜렷이 적혀 있었고 남응명이 서둘러 설명하는 그 대처 방안은 반 시각 전 허준이 서울로 띄운 그 내용과 너무나 같았다.
  허준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렀다. 서로의 수가 비슷하고 서로의 생각하는 바가 아무리 닮았다 한들 그 어렵던 병에 대한 약을 세 사람이 다 함께 생각해냈다는 사실은 허준이 더 이상 매실과 약효를 의심하지 않아도 될 천군만마의 응원을 받은 것처럼 든든했다.
  이동형과 헤어져 선천 군수가 꼭 자기 고을에 와달라 당부하던 선천으로 달리며 허준은 말머리를 나란히 채찍질하는 남응명으로부터 그 여역이 침투한 한양의 참상을 들었다.
  왕자 의안군의 죽음과 함께 실시된 조회와 저자의 사흘 정지가 선포된 날 여러 가닥으로부터 역질 내습의 소문을 듣고 있던 한양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고 말았다 한다.
  꼭 왕족의 죽음이 아닐지라도, 나라에 공이 있는 대신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조회나 저자의 정지는 애도의 뜻으로 항용 실시된 터이지만 의안군의 죽음과 아울러 묻어나온 소문 ...
  시탕을 받든 궁녀들이 잇따라 아닌밤중에 가마에 태워져 도성 밖 어딘 가로 격리되었다는 소문은 도성 안에 병이 퍼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 그 가마와 왕자의 시신이 실려나간 길목은 사람들의 보행조차 끊겨 잠시 한양은 공포의 도시로 바뀌었고 온 내의원이 발칵 뒤집히고 그 소연한 속에서 이공기와 이명원이 극적으로 여역과 매실의 관계를 밝혀냈다는 것이었다.
  약이 발견되자 절기도 도왔다. 계속되던 이상난동이 어느 하루 살을 에는 설한풍으로 돌변하고 팔도 천지가 얼어붙은 속에서 이윽고 역질은 기세가 꺾이어갔다.
  그리고 그 뒤처리의 기일이 한 달여 허준이 개선하여 한양으로 돌아왔을 땐 꽃샘바람도 거쳐간 화개유수의 3월 중순이요 귀로를 함께 하는 이동형은 이번의 공으로 허준이 여러 품계 승차할 것이라 자기 공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러나 ...

    20
  내의원은 마치 잔칫날처럼 들떠 있었다. 온 나라를 덮친 여역이라는 돌림병에 전전긍긍했던 만큼이나 이 무서운 돌림병에 대처해 나섰던 내의원 의원들의 명예 또한 걸린 일이었기에 병을 잡은 공로가 내의원 전체의 모든 이에게 고루 내려지리라는 것을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
  도성 안에 틈입했던 병은 상징적으로 왕자 의안군의 목숨을 떨구었고 그 병세는 태백산맥과 추풍령을 경계로 강원도와 경상도까진 퍼지지 못했으나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와 호남 일대까지 번졌었음에서 온 나라의 우환이었는데 시의가 맞아떨어진 행운도 있었으나 병을 잡았다는 그 사실은 내의원이 떨쳐일어나 불철주야 애쓴 공이라 여겨 시비거리가 없다 생각한 것이다.
  특히 한양 귀환 후 선두를 선 어의 양예수와 함께 궐내의 예방에 헌신한 이명원과 여타 의원들을 휘동, 충청, 호남 쪽을 맡아 분주했던 이공기, 또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맡았던 허준은 마땅히 직위의 승차와 함께 후한 상급이 내려질 것이라 모두 기대했다.
  지시된 약재를 밤을 낮삼아 조제한 도약사령에서부터 무엇으로 어찌 약을 만들어 어찌어찌 먹어라, 각 지역에 내의원 방의 원문을 통지해 다닌 급주 녀석들까지 저마다 자기의 공을 내세우는 판에 오염지방을 더듬고 다닌 의원들의 공이야 어련하랴 싶은 것이고 황해도 일원만 5,570인의 사망자가 집계된 그 치발한 지역을 맡았던 허준에 대하여서는 특히 너나없이 그 공로를 입을 모아 치하했다.
  비록 그 허준 들처럼 목숨 걸어 촉진의 모험까진 안 겪은 의원들일지라도 그 허준이 구성한 일단의 단원이 된 사실로도 자랑을 삼고 이도 저도 끼이지 못하고 운 좋게 뒷전에 남았노라던 비겁자들까지도 이젠 성예를 드높인 내의원 의원이노란 것을 내세우고 각처에서 수집된 병의 양상을 내 눈으로 본 듯이 떠벌리며 자랑을 삼았다.
  특히 당자인 그 허준에게 장차 특별한 승차가 확실히 내려지리란 것을 알려온 것은 미사였다. 15살에도 숙성한 여자 티를 보이던 그녀는 이젠 스물여섯 여자의 아름다운 태를 고루 갖춘 모습인 채로 위험지구를 무사하게, 더구나 공적을 세우고 돌아온 허준을 눈부신 듯이 바라보았다.
  허준에게도 그 미사는 눈부셨다.
  그녀가 중전 의인왕후의 처소에 붙박이 의녀로 뽑히며 직처가 갈라져 오래 상면을 못했었으나 전통적인 의녀의 복장, 화사한 옥색 삼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받쳐 입고 가슴 앞자락에 공작꼬리의 깃을 꽃은 조그만 침낭을 달아 멋을 낸 모습은 무르익듯 솟은 젖가슴과 함께 허준의 시선을 이끌었다.
  "감축하다니 무슨 소식이기다?"
  "어제 상감마마께오서 신성군을 보시고자 납셨습니다."
  "그래."
  "상감마마께오서 지금 여러 왕자녀 속에서도 특히 귀애하시는 분이 신성군이옵니다. 더구나 의안군께서 저리 되시고 난 후는 혹여 의안군의 목숨을 앗아간 병마가 신성군 주변에 다가들까 의안군이 거처했던 저경궁 쪽에는 일체 못 가게 하시도록 엄중히 하시니 각지로 파송되었던 국황어사들께서 중전이 곕시는 곳으로 오시었는데 그때 ..."
  "그때 내 이름이 나왔단 말인가."
  "그랬습니다. 아주 간곡히 공을 아뢰옵더이다."
  "의원이 병자의 병을 구완한 것이 일일이 공이랄 수 있나. 그걸 공으로 치기 전에 그 동안 숱해 죽어간 병자를 미리 확인하지 못한 죄가 추궁될 수도 있는 일이지."
  "그건 너무 겸허한 말씀이옵니다. 더구나 중전마마께오서도 이번 일에 공이 뚜렷한 분들이 누구누구인지를 소상히 아시옵니다."
  "왕비마마께오서야 구중궁궐 밖의 일을 어찌 아시기다?"
  "중전마마의 본곁식구 중에도 누가 이번 병살로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매실의 처방으로 구명했다 들으시고 그 공을 아시옵지요."
  "그건 다행한 소식이나 매실의 처방도 기실 나만의 발견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모두 애쓴 보람이로세. 딱히 날 지목할 까닭은 못돼."
  미사가 살포시 미소했다. 이분은 이런 남자다. 공이 있어도 티를 내지않는 사람, 세월이 가도 여일하게 변하지 않는 남자.
  그 바라보는 미사의 눈빛이 허준의 눈에는 또 한번 아름다웠다.
  그 허준의 조용한 눈을 향해 처소로 돌아갈 시간이단 여기며 미사가 작별을 담은 말로 치사했다.
  "부디 더 좀 큰 소임을 맡으소서. 심신은 고단하실지라도 세상 병 앓는 이들에겐 더없는 다행일 것이어요."
  "기쁜 소식이라 여겨 일부러 와주었으니 고맙구나."
  허준도 작별을 담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각처로 파송된 의원들이 모두 귀환하고 각지의 피해 상황이 집계되어 그것들이 조정에 올라온 뒤 드디어 내의원이 기다리는 임금으로부터의 은전과 작질이 내려졌다.
  일차로 거명된 성명이 여러 사람이었다.
  내의원을 총지휘한 어의 양예수가 가의대부(종2품)로, 이공기가 가선대부(종2품), 남응명에게 통정대부(정3품)가 내려졌다.
  내의원은 환호성이 터졌다.
  종2품이면 당상 반열이다. 나라를 덮친 큰 우환과 그 처치에 암담하던 때를 생각하면 벼슬이 무엇이랴 여기면서도 내심 천직이라 여기는 의원에게는 너무나 흥감한 작위인 것이다.
  내의원은 그 일차 명단에 허준, 이명원이 빠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잇따라 내려질 다음 성명이 당도하기를 기대에 차서 숨을 죽였다.
  하나 이차 명단이 닿기 전에 조정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의관은 천출인데 동반전직에 서하는 것은 외람된 것이라 하여 사간원에서부터 잇따라 상소가 올라갔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고 그 소동은 그날 밤이 되자 커다란 난리나 난 듯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밤 조정 대신들이 퇴궐을 거부하고 왕의 내의원에 내린 결정을 취하하기를 상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원은 천한 출신이라 하여?'
  내의원 또한 퇴궐을 않고 분연히 대신이 병을 고치느냐고 떠들며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천출 ... '
  허준도 입안에 뇌었다.
  자신이 의원이기 전에, 의원이란 인간 이전에 양반들과 함께 조정에 서지 못할 그것을 거부당한 천한 계급의 인간인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허나 나라 안 병이 어찌 잡혔나. 우리의 공인데 곧 어명대로 되리."
  모두 그 안심하는 쪽을 들며 귀를 기울이는 중에 그러나 다시 들려온 조정 쪽 소식은 왕이 그대로 시행하라는 어명에 불구, 이번에는 사헌부도 들고일어났다는 최악의 소식이었다.
  "손톱에 가시 하나 박혀도 의원부터 찾는 자들이 세상 그 난리를 평정해놓고 나자 의원의 출생이 어떻고 저떻고?"
  벼슬자리 떨어질 것까진 바랄 염도 아니고 경사의 어지에 덩달아 사찬이라도 바라며 한구석 자리에 자리하고 있던 도약사령이 긁어올린 가래침을 탁 뱉으며 되알진 눈자위를 떴다.
  모두 말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은 당장 거명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내의원 의원이면 너나없이 언젠가 겪어야 할 출세냐 아니냐의 마루턱일 터이다.
  "이미 어명이 확고한데 취하야 되리. 아무리 떠들어도 조정 대신도 임금 밑의 신하 아니더라고."
  몇이 맞장구치며 자위하는 말소리가 났다.
  그러나 허준은 그 자위하는 축에 끼지 않았다.
  사간원이 왜 있겠는가. 임금의 독주를 가로막고자 존재한다. 그리고 양반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집요한 신분제도를 그는 뼈아프게 안다. 올 것이 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  15. 7년전쟁 속에서 ]
    1
  내의원의 분란은 오래지 않아 가라앉았다.
  왕명이 지고한 것이로되 언로는 신하의 소임 속에 보장된 것이요, 설사 임금의 영이라 할지라도 통념에 반하여 관작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정체의 인적 기본을 양반, 상민, 천민으로 엄중히 구분해 각 출신의 출세의 한계를 규정한 마당에서 설사 하천들이 발군의 공이 있다 한들 종5품이 한계일진대 육조의 판서나 참판 반열인 종2품의 직위는 너무나 외람되며 장래의 인사의 기준을 문란케 한 표본이 된다는 것이 조정의 주장이었다.
  "온 백성이 날로 어육이 되어가는 그 심대한 우환을 막은 공이 그들에게 있는데도 말인가!"
  임금 선조의 노기 어린 한마디가 있었으나 바탕이 천한 출신들이고 보면 속량만으로 하해와 같은 왕은이라며 대신들은 후퇴하지 않았다.
  군신간의 논란은 국초에도 있었다. 세종임금이 장차 조선의 새로운 문물을 발흥코자 나라 안에 발명의 장인들을 모을 제 동래 관아의 노예인 장영실에게 상의원의 종5품 관직을 내렸을 때 하천배에게 벼슬을 줌이 불가하다고 온 조정이 들고 나서 두 달여를 두고 시끄러웠으나 초지대로 당신의 사람 봄을 관철시켜 마침내 세종조의 저 찬란한 문화의 한모퉁이를 장식케 했으나 조정은 조정대로 반대의 명분이 매서웠다.
  장영실이 비록 결과적으로 측우기를 비롯, 이 나라 농사에 기여한 바가 없다 하지 아니할지나 종당엔 그가 임금의 어가를 무너뜨려 죄를 지은 사실로 반박했고 이에 선조가 다시 그 장영실이 몇 가지의 발명으로 벼슬이 호군(정4품)에 이르렀던 사실을 들고 장영실의 발명보다 왕실과 나라의 치병을 맡은 내의원의 공로를 높이 들어 초지를 물리지 아니했다.
  그러나 신분에 관한 한 대신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러 들지 아니했다. 또 한번 목청을 돋우어 의원은 결코 문무양반의 동렬에 오를 수 없다는 성토 앞에서 마침내 월여에 걸친 승강이는 임금이 천거한 사람 중 일부에게는 벼슬을 내리지 아니한다는 타협안에서 낙착이 된 것이다.
  내용인즉 이번 내환을 명목상 총지휘한 어의 양예수에게 가의대부를, 수도의 방역에 앞장선 여러 인물 중에서 안덕수, 이인상, 김윤헌 등에게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 북방과 남도로 분주하던 인물 속에서는 상징적으로 이공기 한 사람만이 통훈대부(정3품 상하관)로 가자하여 군신간의 언쟁은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어의 양대감이야 명목상 그 작위가 가합하다 치세. 그러나 여타 인물들은 여역이 치발했던 지역에 코빼기 한 차례 내민 적도 없이 콧수염이나 뽑으며 한양바닥에서 재채기나 하던 자들인데 어째서 허준이나 이명원을 젖혀놓고 공치사를 받는단 말인가!"
  "세상사 일일이 시시비비 가릴 수 있더냐. 다행히 이공기 한 사람이라도 용케 거명된 것이 장래를 위한 희망으로 알아야지."
  "장래를 위한 희망이라니?"
  "벼슬이 올랐대서 명목뿐이지, 의원인데 고을 하나 떼어 맡겨주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동관이던 사람이 동반정직에 서임 됐다는 사실만이라도 자축하면 되어."
  "본시 떡메 치는 자 따로 있고 떡 먹는 자 따로 있더란다고 의원 빛 보는 구멍은 피고름 짜는 데 있지 않고 조관님네 철철이 보약 의논이나 하러 다니는 게 직통인 법이라고. 헝, 젠장할 ..."
  불만과 불평은 그러나 한바탕 욕질과 종주먹질 속에서 가라앉고 승차한 인물들을 모아 내의원 자축연이 있던 날쯤에는 그 불평객들도 이미 앞서간 새로운 상관들에게 다투어 축하 인사하기에 바빴다.
  "특히 그대들을 볼 낮이 없네."
  내의원 자축연이 끝나고 처음 거명되었다가 이름이 빠졌던 허준, 이명원, 남응명 세 사람을 마치 죄를 지은 듯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공기가 두번째 같은 말을 했다.
  아무래도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며 자축연이 끝나고 남대문 밖 객점으로 세 사람을 끌어들인 자리에서였다.
  "사람도 ... 승차하여 영감이 되고 대감이 되는 건 그만치 내의원 짐을 더 진다는 뜻인데 왜 자꾸 미안하단 말씀이오."
  연치가 훨씬 위인 남응명이 어제의 수하가 오늘은 세 품계나 높아진 상관이 된 이공기에게 웃고 말했다.
  "그 존대 또한 듣기 민망하옵니다. 공이 없었다면 굳이 공을 고사하는 것은 아니나 제가 한 일 제가 익히 알고 세 분이 한 일 누구보다 제가 잘 아는 터에 내 공이 어찌 세 분보다 월등했으리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이 벼슬 끝줄 높은 곳이 아닌 바에야 이공이 왜 자꾸 민망하오, 자 잔이나 나누고 오늘은 이만 헤어집시다. 말만 듣던 호피를 얼결에 받았으나 정작 호랑이 가죽이 어찌 생겼는지 어서 끌러보고 싶소그려."
  "저도 호피는 처음올시다.
  이명원의 말에 이공기가 다시 미안한 듯이 시선을 떨구었다.
  임금 선조는 자신이 거명한 의원 중 승차에 제외된 허준, 이명원, 남응명의 경우를 못내 아쉽게 여기는 듯했다. 제외된 세 사람 앞으로 특별히 호피 1령씩을 하사하여 이번 사지를 헤쳐 다닌 세의원의 노고를 따로 유념하고 있노라는 자상함을 보였다. 허준도 호피는 처음이었다.
  궐내에 경사가 있거나 내의원에서 왕실의 작은 병이라도 치유했을 제 노고를 가상히 여겨 더러 사찬이 내려지는 경우는 있으나 이렇게 뚜렷한 물건-함부로 돈으로 살 수도 없는 호피를 기념으로 내려준다 함은 당사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내외에 밝히는 것으로 어사품을 받았다는 영예 외에 다음 연공 때 최우선으로 승차의 대상에 감안한다는 말없는 어명이기도 했다.
  그날 네 사람의 술자리는 세 차례째 수표교 건너 시금동의 남응명의 집에서 통음 끝에야 파했다.
  결국 통음이 된 것이다.
  벼슬이 높아진 이도, 그 기회에서 제외된 쪽도 승차가 되었네, 아니 되었네, 변죽만 울렸을 뿐 기실 그들이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얘기는 누구의 영달 이전에 조정에서 두 달여를 두고 소란히 떠들던 말-의원은 천업이요 의원 된 자는 양반과는 태생부터 천출이라 갈라쳐진 신분에 대한 서글픔이었다.
  차라리 천하다 여기는 자들만이 얽혀 사는 곳에서라면 서로 묻어지내니 별나지도 않다. 하나 천하의 내노라 하는 양반이 사는 한양에서는 싫어도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아니 느낄 수가 없고 그 신분의 아픔을 이번처럼 절실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모인 네 사람이 모두 그렇다. 인생에 대한 꿈을 꾸는 나이가 되는 스무 살 어간에서 너나없이 또래 중에서는 똘똘하다, 앞서 있다는 명석함을 촉망받았으되 벼슬길은 애초부터 바라볼 수 없는 신분이기에 그런 신분에게 열려 있는 몇 가닥 아니 되는 선택 중에서 의의 길에 들어섰을 것이요, 그 의업에 생의 보람을 찾아 헌신하던 차 또 한번 자신들의 출생의 비애를 맛본 것이 아니랴.
  당하관이라 하나 정3품 동반에 섰으니 이공기야 이제 어디로 보나 천출의 모습일 수 없다. 근본 운운하며 마지막 어느 모퉁이에선가는 다시 거론이 될 수 있을지 모르되 당장 양반의 모습으로 빠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양반이 된들 ... '
  통음 끝에도 결코 취할 수 없는요. 두어 달 겪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물의를 떠올리며 허준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반의 출생이었다면 나는 이 길로 들어서지 아니했을까? 들어선 걸 후회했을까?'
  봄밤, 아니 이미 새벽, 애오개 긴 고갯길을 임금이 내린 호피 보따리를 한손에 들고 오르며 허준은 그 생각을 골똘히 했다. 물론 처음부터 출생에의 좌절을 맛보지 아니했다면 하필이면 의원의 길을 택하지 아니했기 십상이다.
  출신에 회의도 느끼지 아니하고 태어난 고장에서 안주할 수 있었다면 애초 경상도 땅엘 왜 왔으며 유의태를 무슨 인연으로 만났으며 김민세 그 사람을 어디서 마주쳤으랴!
  '추호도 후회할 거리가 아니도다.'
  의원이 된 후 자기가 보고 겪은 14년째의 짧지 않은 생애를 떠올리며 허준은 새삼스러울 수도 없는 그 결론을 내리며 미소했다.
  '의원도 벼슬이 높아지면 고작 수하들에게 호령이나 일삼는 한낱 고관으로 끝날 것이 아니겠는가.'
  허준은 그건 싫다고 생각했다.
  벼슬 높아지는 그것보다 끝없이 나타나는 새로운 병자들에게 자기 또한 끝없이 도전해가는 그 길만이 자기가 보람을 느끼는 남은 생이라 생각했다.
  '더구나 ... '
  이번에 새로 겪은 병, 여역뿐이 아니고 자신이 침구에만 몰두하며 미처 돌아보지 못한 각 분야의 수많은 병, 이 세상의 병이라면 모두 대결하고 싶던 그 못다한 욕망을 어찌하랴 싶었다.
  '이 세상 병을 모두!'
  밀양 천황산에서 스승 유의태의 죽음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던 그 생애의 긴장을 다시 떠올리며 허준은 이제야말로 자기의 할일이 세상 곳곳에 얼마나 널려 있는가고 다짐을 했다.
  고갯길 초입에서 자주 돌부리에 채던 허준의 걸음걸이가 자신의 자문자답 속에서 술이 깨며 차츰 똑발라갔다.
  마루턱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내와 딸 숙영이었다.
  "이 새벽에 웬일로?"
  남편의 말에 딸 숙영이가 대답했다.
  "할머님이 자주 내다보시고 어머님이 나오셨습니다."
  열일곱 딸은 이미 달덩이 같은 처녀태가 났다.
  허준은 말없이 어사품 호피를 그 딸에게 넘겼다.
  "무언지 보따리에 비해 무척 가볍습니다."
  숙영이 환히 말했고 허준이 대답했다.
  "할머님 보료 대신 쓰실 귀물이다. 고이 들어라, 상감께서 내리신 것이니."
  "상감마마께오서요!?"
  "사찬이오니까?"
  "사찬을 보료 대신 쓰오? 호피라 하오."
  "호피? 호랑이가죽 말씀이오니까?"
  아내의 말이 튀며 딸의 손에서 공손히 보따리를 받았다.
  "나도 아직 보지 아니했소만 ..."
  숙영이 한발 앞서 집으로 달렸고 스무 살 장성한 아들 겸이가 할머니와 달려나왔다.
  호피는 장대했다. 밤눈에도 대호였다.

    2
  허준이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호피는 곧 인근의 평판이 되었다. 가뜩이나 병자들로 인해 사람이 끓는 집이었다.
  자신이 내의원에 매인 관원이요 등청과 함께 맨 먼저 수행하는 소임이 왕실 각전에 문후가 우선이라 아침 정신을 맑게 가지고자 등청 시각 이 전에 찾아드는 병자는 받지 못하되 물어물어 찾아온 병자를 잘라 거절하긴 안쓰러워서 굳이 자기의 처방을 소원하는 이들에게는 퇴청시각 이후에 올 것을 이르니 그 퇴청시각에 즈음한 허준의 집은 연일 흡사 장날을 맞은 저자거리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그건 사랑채만이 아니었다. 지난 10여 년 세월 부인 이씨 또한 바탕에 지녔던 한학을 기초로 그 동안 남편으로부터 자주 부인병과 소아병에 관한 대강을 배우고 깨치니 함부로 처방하고 약 짓는 일은 아니해도 아비 못지않는 열성으로 의술에 야망을 태우는 아들 겸이와 함께 수많은 단골들을 사귀어 안채마당 또한 날이면 날마다 잔칫날의 부엌바닥처럼 인근의 아낙들로 붐볐다.
  하나 단골이라 하여도 사람과 사람의 사귐이지 돈이 생기는 생업과는 달랐다.
  "의원은 돈을 버는 성업이 아니다."라는 철칙을 고집스레 지키는 남편이요 그 남편의 소신을 자랑스러이 여기는 아내는 병자나 그 가족에게 그들 스스로 돈으로 사지 않아도 구해 먹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단방을 일러주거나 더러 귀 어두운 이들에게는 언문으로 자세한 처방을 적어주는 것이 다였다.
  "돈을 안 받는 의원댁."
  "약을 일러는 주되 약을 팔지 않는 의원댁."
  그 두 가지 소문만으로 허준의 집은 밤도 낮도 없이 사람이 들끓었다.
  그럼에도 허준의 단칸집이 10여 년 세월과 함께 사랑채 있고 안채 따로 넓어진 것은 저마다 아쉬운 마음으로 달려왔다가 처방을 전해 듣고 돌아가 효험을 보았을 때 각자가 느끼는 고마움대로 사례차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아예 돈을 아니 받는다는 소문이 난 그 허준의 집 사랑채나 안채마루에는 그러나 누가 가져다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호박 두어 덩이, 찹쌀 몇 됫박, 팥 몇 되, 계란 서너 개씩으로 놓여지기 마련이고 더러 형편이 나은 이는 명주 한 감을 들여놓고 가기도 하고 강변 어부가 생업인 사람은 새벽녘 그물에서 건진 고기 몇 마리를 버들가지에 꿰어와 부엌 물동이 속에 담아넣곤 도망치듯 돌아가기도 하였다.
  일년 내내 병치레하는 손주를 데리고 무시로 드나들던 노파가 세모에 술 한 병에 중병아리 한 마리를 들고 찾아와선 손씨 앞에서 한바탕 걸찍한 농담을 하다가 돌아가는가 하면 2년 전에 와 침맞고 돈도 없이 그냥 돌아간 일이 있노라며 기억도 없는 농부가 햇곡 반 자루를 들고 나타나 찾아온 연유를 설명할 제면 허준의 생모 손씨가 그 뿌듯한 인정에 고마워하면서도 생활이 펴지 않은 듯한 그 입성을 보곤 애비가 돌아오면 대신 인사를 전할 테니 도로 가지고 가라는 등 기어이 놓고 가겠다는 등 승강이 일어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훈훈하게 했다.
  목수는 처마를 내 달아주고 옹기장수는 물동이를 들여놓아 주고 수년 전엔 폭우에 집담이 무너지자 누군가의 발의로 10여 명 병자의 가족들이 모여 토담을 쌓아주며 마당이 넓어지고 그런 인정이 모이고 겹쳐 이제는 식구들이 각랑방을 쓰도록 널따란 집 경계가 된 것이다.
  "허의원댁에 임금이 내리신 호랑이가죽 구경하러 가세."
  사람들은 그 호랑이가죽 뒤에 가려진 허준의 신분에 대한 설움은 짐작한 바도 없이 말만 들은 대호의 가죽을 내 눈으로 보리라는 호기심으로 몸 성한 아이와 영감들까지 몰려와 허준의 영광을 화제삼았다. 저걸 팔면 세 칸 짜리 기와집이 한 채라고 아는 체하는 촌로와 쌀 서른 섬과 맞바꿀 수 있다는 가난한 가장의 배고픈 계산이 있는가 하면, 아니다 저 호피 위에 알몸으로 자면 성력이 철봉처럼 강해진다는 속설까지 소란한데, 저건 임금의 하사품이니 재물 따위로 가늠할 수 없는 대대 가보다 하는 이는 그래도 눈속에 식자깨나 들어간 생원의 선망어린 풀이였다.
  그 호피에 얽힌 임금의 특별한 배려는 그 다음해 봄에야 허준에게 현실로 돌아왔다.
  임금 선조가 인빈에게서 낳은 둘째아들이요 자신의 넷째 왕자인 신성군의 작은 두창을 치료한 허준의 공을 들어 직첩을 직장으로부터 주부로 두 품계를 승차시키도록 명한 것이다.
  이번에는 아무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전일의 논법대로라면 이번의 종6품 주부의 직첩이 또 한번 조정으로부터 시비거리가 되지 않을 바 아니로되 이때의 조정은 임금 선조의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인 채 묵인했다.
  허준은 대신들의 그 침묵을 고소했다. 허준은 대신들의 그 침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임금 선조가 장성한 제 1왕자 임해군이나 제 2왕자 광해군을 젖혀놓고 유독 총애를 쏟는 신성군의 병을 낫운 사실을 시비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바로 지난해 10월에 돌발한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라 일컫는 서인 정철이 반대당 동인들을 몰아쳐 반대당수 100명이 죽은 이른바 기축옥사의 끔찍한 살기가 아직 선조의 얼굴에 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주 왕기설과 계룡산 정씨 도읍설 등 근원도 확연치 못한 참언에 걸어 기예 활발하고 반상에 구애되지 않는 대동계를 조직, 휼민에 공이 큰 정여립을 처참하게 죽였을 때의 선조의 격노는 잔인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옥사에 연루된 동인들을 물리친 승자인 서인들도 가급적 어의를 거스르지 않고 있는 분위기였다.
  "감축하이."
  이제는 이공기조차 높은 지위로 가버리고 허준이만을 유독 가까운 말 친구로 삼았던 이명원은 그 허준조차 이제 두 품계 앞서 승진, 앞으로 자주 만날 길이 없으리라 여겼는지, 남 먼저 달려와 축하해 주면서도 그 눈빛 속에는 외로움이 내비치고 있었다.
  "나도 뜻밖이오. 이번 신성군의 그것은 가히 치료라 할 수 없는 가벼운 증상이었소."
  이명원이 선의의 미소를 띠었다.
  "병을 다 아는 이에게는 가벼운 증상이라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창자 붙은 병이 쉬운 병은 아니지. 그보다 내 듣기 이번 신성군의 병세를 살피고 특히 그 수의로 허주부를 천거한 건 양대감이라니 이젠 양대감도 늙나보오. 사람을 적소에 뽑아 쓰는 걸 보면."
  "천거한 게 어의 양대감이라 누가 하더이까?"
  "도제조께서 허주부에 대한 여러 면에 관해 따로 하문이 계셨기로 알았소."
  "도제조께서?"
  내의원 도제조는 지난해 기축옥사에 연루된 노수신이 좌의정에서 파직되어 죽은 후 새 좌의정 유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 도제조께서 왜 하필 나를 지목해 여러가지를 묻더란 말이오?"
  "여러가지를 묻습디다. 나도 아는껏 아뢰었고."
  "여러가지란 무엇무엇이기다?"
  "허주부가 창병에 관해 언제부터 공부가 있었는지를 특히 알고싶어합디다."
  "...?"
  "세상에 많은 것이 각종 부스럼인데 그 창병의 형상이 보기가 흉해 병을 앓는 이는 남에게 기피당하고 의원들 또한 정성껏 가까이하려 않으니 앞으로는 취재의 시제에도 특히 창병에 관심이 있는 의원도 뽑아야 하리라며 의사 전반에 남다른 관심이 계시더이다."
  "난들 아직 초보요. 내가 창병에 관심한 것은 저번 여역의 돌림병을 겪고 난 뒤이니."
  "곁에서 양대감이 그 말도 합디다. 그러나 덧붙여 양대감이 그 적임자는 허준이다, 앞으로 침구보다 그쪽에 전념케 할 재목이라 천거하더이다."
  "그쪽으로 전념?"
  "그 첫째로 맡겨진 것이 신성군이 아닌가 싶소. 다행히 속히 효험을 내어 전하 또한 기꺼워하시니 장차 허주부께선 싫어도 그쪽 일까지 전담해야 할 겝니다."
  "의원이 지식을 넓혀나간다 함에 수고로움만 생각할 일일까만."
  "이미 어의가 천거했고 공 또한 세웠으니 발뺄 순 없을 겝니다."
  허준은 속으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창병뿐이 아니다. 그것도 더욱 겪고 그 낫우는 방법을 토구해야 하리라.
  '그러나!'
  허준은 근래 다른 생각에 잠을 설치고 있었다.
  '욕심만이 아닌 하나의 실천으로.'
  세상 모든 병을 겪고 고치리라는 뜻을 욕심만이 아닌. 하나의 실천으로 몸에 익혀야 한다는 결심.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가장 가까운 곳 저 대궐 밖 백성들이 앓고 있는 온갖 병을 볼 수 있는 곳 그 혜민서로 다시 돌아가리라는 결심이었다.
  대궐 안 그 왕실과 관련지어진 이들이 앓는 병만으로는 자신의 의술은 더욱 줄어들 뿐 넓어지지 못하리라는 자각이었다.
  '대궐 안의 병은 나 아니라도 낫우는 이가 수두룩한즉 ... '
  더 많은 병, 더 많은 병자, 이 세상 온갖 병을 보고 겪자면 최소한 자신의 선택은 혜민서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나없이 지긋지긋해하는 혜민서 의원질, 그러나 허준에게는 이제야 초출내기 때 온몸을 던져 한 사람 한 사람 환자를 다루어가던 혜민서의 지난날이 새삼 그리웠다.
  '내일 등청하면 양대감께 그 소청부터 하리라.'
  멀리 봄날 밤안개에 싸인 자기 집의 평화로운 불빛을 발견하며 허준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나 그 허준의 소원보다 많은 병자를 겪고 싶다는 소망은 너무도 무서운 방법으로 그 허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장차 임진왜란이라 불릴 3천리 강토를 초토화하고 조선 백성을 시산혈해 속에 어육으로 만드는 왜떼가 그 시각 동해바다를 까맣게 뒤덮으며 건너오고 있었다.

    3
  의원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병 모든 상처를 고루 모두 들여다보고 매만지고 싶어하는 허준의 소망은 현실로 닥쳤다.
  이 나라 역사상 가장 참담하고 잔혹한 전쟁이 임진왜란이라는 이름으로 닥친 것이다.
  "난리가 났다!"
  "왜군이 쳐들어온다!"
  난리나면 이 나라에서는 대륙세인 중국으로부터의 침입과 해양세인 왜로부터의 침략밖에 없다.
  특히 그 왜는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하는 조상 대대의 기억이 있다. 여말 선초 일본남방과 대마도를 본거지로 한 왜구들의 그 엄청난 분탕질 ...
  척박한 화산도에 칩거해 사는 왜족은 바다 건너 조선땅 특히 삼남의 비옥한 들에 추수철이 되면 거의 어김없이 적게는 10여 척 1백 명 미만의 해적 규모로, 많게는 2백 명을 태운 대형선박 5백 척이라는 일대 전쟁의 규모로 몰려와 곡식과 가축을 빼앗고 여자를 끌고 가고 조선의 남아라면 임부의 뱃속에 든 태아까지도 서슴없이 죽이는 만행을 거침없이 저질렀다.
  비단 삼남에서만 있었던 사실이 아니다.
  영, 호남과 충청도의 곡창지역은 물론 여경의 지호지간인 강화도를 위시, 황해 넓은 들과 평안도 ·함경도 저 북쪽 오지에 이르기까진 짓밟지 않은 곳이 없도록 조선에 있어 왜는 천적이었다.
  고려 패망의 양대 원인의 하나로 일컫는 이 왜구의 발호는 조선 개국 후 태종이 지휘한 세종 원년의 대마도 정벌로 징치되어 국교를 터주는 형국으로 점차 가라앉았으나 그 왜를 야만으로 보며 문약에 흐른 조선의 평화가 2백 년이 흐른 지금 그 왜가 이번에는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나선것이다.
  군대는 백 년 동안 한번도 사용 아니할 수 있으나 단 하루라 할지라도 이를 갖추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그래서 10만양병론을 주창하던 율곡 이이도 세상을 뜬 지 8년, 그 율곡을 서당이다 동당이다 좌우에서 헐뜯고 마침내 조정에서 내쳐 그 말년을 유폐된 고향땅에서 피를 토하고 죽게 했던 조선의 당쟁 속에 있을 때 왜국은 60여 주로 나뉘어 군웅할거하던 자체 상쟁의 시기를 거쳐 무력으로 국권을 틀어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팽창한 힘으로 조선과 명을 정벌하리라는 야망을 품고 이에 그 현지 염탐의 역을 띤 왜승 현소가 사신이라는 미명으로 조선땅을 다녀간 지가 3년 전 ...
  이에 물색 모른 조선 조정은 일본 사신 현소가 찾아온 데 대한 답례를 겸하여 조선의 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이 왜국의 정정을 살필 겸 도일했다가 돌아온 지 1년여 ...
  그러나 왜의 실체를 간파하는 안목에서 서와 동으로 당파를 달리하는 황윤길과 김성일은 왜는 쳐들어온다 아니다로 주장이 엇갈리니 국론조차 통일돼 있지 못했다.
  그 조선을 향해 왜군이 호호탕탕 바다를 건너 상륙한 것은 4월 14일. 정명가도 -명나라를 정벌코자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왜를 미개족으로 보고 명에게 사대하는 조선에게 있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그 조건으로 왜는 선전포고를 대신했다.
  국내 통일전쟁에서 연마되고 연마된 왜군 15만, 게다가 최신병기인 조총으로 무장된 그 왜의 압도적인 무력 앞 당일로 부산포가 함락되고 다음날 동래성 공략에선 부사 송상현이 장렬한 전투 끝에 전사, 마침내 7년 임진왜란의 서막은 오른 것이다. 즉일로 다시 왜군은 삼로로 나뉘어 한양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 1군은 고니시로 부산,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를 지향하고 가토가 이끄는 2군은 울산, 영천을 꿰어 충주에서 1군과 합류를 꾀하고 구로다, 시마즈, 고바야가와 등과 3군을 이룬 떼거리는 김해를 짓밟고 추풍령으로 치닫고 구키 등이 지휘하는 9천여의 수군도 남해, 서해를 돌아 한양으로 한양으로 배를 저어 달리니 그 가는 육지와 바다에서 미처 준비가 없는 조선 군사는 달구지가 뛰닫는 연못가에 모기떼 흩어지듯 할 뿐이었다.
  "왜군이 침입했다!"
  "전쟁이 났다!"
  그 급보가 서울 조정에 당도한 것이 4월 18일. 조정은 놀라 나자빠졌고 이제야 동인, 서인 할것 없이 벌집을 쑤신 듯이 소연했다.
  발칵 뒤집힌 것은 조정뿐이 아니었다. 동래군 다대포의 매봉을 기점으로 양산, 언양, 경주, 영천, 신녕, 의홍, 의성, 안동, 예안, 영주, 봉화, 풍기를 두려뺀 왜군의 예봉은 다시 단양, 청풍, 충주로 방향을 잡으니 상기의 지명과 함께 음성, 죽산, 용인에서 광주 천림산으로 통한 후 한양 남산까지 이르는 직선봉 40곳과 간봉 1백 3곳을 꿰어 호응하는 산봉우리마다 연일연야 다섯 개씩의 불기둥들이 잇따라 솟아오른다.
  봉은 어두운 밤에 홰에 불을 켜서 신호하는 것이요 수는 낮에 연기를 피워올려 서로를 부르는 신혼데 그 각 봉수마다 설치된 다섯 개씩의 봉수는 평시에도 하나를 켜 고장의 이상없음을 알리는 것이고 적정이 경계태세일 때는 둘을 켜며 적이 보이면 셋, 국경이 침범되면 넷을, 그리고 다섯은 적과의 접전 중이라는 가장 긴급한 신호다. 그 각 고장의 봉수들이 연일연야 다섯 가닥의 불길과 다섯 가닥의 연기를 피워 올리는 걸 보면 이미 조선 천지는 온통 벌집을 쑤신 듯 소란했다.
  궁금한 것은 적세는 얼마며 어디쯤 왔으며 아군의 대처는 어떠한가였으나 노상엔 그 상대로 역참과 역참을 꿰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양으로 뛰닫는 그 소란한 말발굽소리와 무인지경으로 밀려올라오는 뺏고 죽이고 불지르는 왜군의 소문만 휩쓸 뿐이었다.
  동래 한양 간만이 아니다. 전라도 쪽 또한 순천 방답진을 기점으로 장흥, 강진, 영암, 해남, 진도, 무안, 나주, 함평을 연결한 불길이 다시 영광, 부안, 옥구, 임피를 거쳐 은진, 공주, 천안, 아산, 직산, 음성, 수원, 남양으로 돌아 김포, 통진, 강화의 여러 봉수에 호응한 후 양천 개화산에 이르기까지 봉과 수가 밤도 낮도 없이 하늘을 그을리며 타오를 뿐이었다.
  "짐을 싸야 하올지?"
  한양의 생업은 중단되고 있었다.
  전쟁의 상황을 오로지 봉수대에 타오르는 홰의 숫자로밖에 짐작해볼 길 없는 백성들은 연일연야 타오르는 남산의 다섯 개의 불꽃과 연기를 보며 일변 피난짐을 싸고 삼삼오오 몰려선 채 조정에 드나든 관리들의 집 문전에 찾아들어 서성댔다.
  그 관리의 입을 통하여 혹시나 상황 판단에 도움이 될 조그만 정보라도 얻어들을까 해서였다.
  허준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직임은 의원이되 상감이 계시는 대궐 안을 출입하는 내의다. 대궐 밖 어설프게 직책만 높은 관리보다 상황을 더 자세히 알리라 여기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짐을 싸서 어디로 가잔 얘기요?"
  아내의 말뜻도 알고 집 안팎에 몰려든 인근 사람들의 초조한 눈초리도 알건만 허준 또한 명쾌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어 되물었다.
  "어디로 가잔 뜻이 아니오라 왜적이 문경 새재를 넘었다는 소문이 있사옵고 그렇다면."
  "다들 무어라 하더이까?"
  "만일 이대로 왜적을 중간에서 막지 못한다면 도성 안으로 피해야 무사하리하 그런 말을 합니다."
  "도성 안으로?"
  "그래도 대궐이 있는 도성이니 성벽도 제일 튼튼하고 서울만은 군사들이 엄히 지킬 터이라 도성 안이 제일 안전하리라고들 ..."
  허준은 묵묵했다.
  어제 동서붕당 서로가 책임을 전가하고 지탄하는 노성과 고함이 터지던 빈청(궐 안 대신들의 대기소)에서 보고 들었던 양상을 떠올렸으나 허준의 마음은 편치가 못했다.
  그건 낙관론에 매달리기에는 짓쳐들어오고 있는 적세를 단 한번 어디서 분명히 꺾었노라는 한 가닥의 승전보가 아직 조정에 도달해 있지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
  어제 퇴궐하기 전 이동형을 만났다. 신임 도제조 유전이 지병이 재발, 갑자기 직임을 고사하고 사임하고 임시로 내의원 업무를 이동형이 관장하게 되자 때가 때인지라 어의 양예수를 비롯, 이공기 그리고 기축옥사 이후 한직으로 밀려났던 정작도 돌아온 자리에서 이동형이 들려준 얘기, 왕실과 조정의 한가닥 기대는 온통 신립에게 걸려 있다 했다.
  그 신립이라면 조선 사람들은 안다. 일찍이 22살의 나이에 무과급제 특히 그가 용명을 드날린 것은 온성 부사로 있을 제 오랑캐 니탕개란 자가 함경도의 변경을 분탕질하기 수년이 되건만 싸우러 나간족족 우리 쪽 무장이 패전해온다는 걸 듣자 자원 출전한 신립은 단 일전으로 니탕개를 두만강 너머로 패주시킴은 물론 끝내 추격하여 마침내 니탕개의 목을 베어 말머리에 달고 돌아오니 그의 무위는 조선 팔도에 떨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립에게 딸이 있음을 듣자 이에 감동한 선조가 사랑하던 제 4왕자 신성군과 혼인시켜 사돈을 맺었으며 그 신립이 지금은 한성부 판윤으로서 도성을 지키는 중책을 맡아 있다가 이제 전란을 맞아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왜군을 치러 갔고 지금 그 신립이 충주 달천강가에 배수진을 치고 왜적자의 필사의 일전을 벼르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무력이 아무리 용맹하다 할지라도 조총이라는 무기로 무장한 왜적을 상대로 조선의 희망대로 다시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지 그 소식을 전하던 이동형도 허준도 안타까운 한숨만 새나왔다. 집 안팎을 둘러싼 마을 사람과 환자로서 가족으로 안면이 친숙해진 사람들에게 허준이 애써 도순변사 신립 장군의 소식을 알려주고 입궐한 그날밤 과연 허준의 불안은 최악의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왕실과 온 조정이 학수고대하는 승전보 대신 임금의 사돈 그 도순변사 신립은 달천강변, 나라의 운명을 건 그 필사의 배수진에서 패퇴, 부장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 장렬한 전사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신립이 전사하고 그 군사가 패퇴했다면 적이 서울까지 이르는 길목을 지킬 더 이상의 군사가 조선에는 없다.
  충주에서 서울까지 287리 ... 왜군의 선두를 이룬 기마 군단이 달려서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몽진."
  다음 순간 조정의 이구동성은 이 한마디였다.
  아니 대신들의 그 피난 도주의 의견의 일치 이전에 이 급보는 고관들의 채비를 메고 따라나와 있던 집안것들의 달음박질에 의하여 북촌 양반골로 전파되었다.
  "신립 장군이 죽고 충주가 무너졌다!"
  "임금이 몽진한다!"
  이제야 한양은 싸놓았던 피난짐을 이고 지고 일대 공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 공황은 내의원도 마찬가지였다.

    4
  내의원의 혼란은 시시각각 더해 갔다.
  4월 스무아흐레, 15만 왜군이 조선에 상륙하여 15일째 그 충주 달천강변에서 쌍방 2만 6천여의 병력이 맞붙은 전투에서 조총과 왜도를 든 왜군이 1만 8천5백, 도순변사 신립이 휘동하는 기병을 앞세운 조선의 군세는 8천 ... 그 양군이 1진 2진 3진으로 격돌하기 세 차례 ... 조총을 앞세운 왜군의 화력 앞에 배수의 각오도 헛되어 조선군은 섬멸의 타격을 입는다.
  그 패전에 대소 장수들 또한 적진에 돌입 전사하고, 신립 또한 강물에 몸을 던져 시신조차 간 곳을 모르는 참패로 끝난 것이다.
  조정은 경악했다. 사태는 절망이었다. 이에 영의정 이산해의 발의로 몽진을 서두르는 중에 뒤늦게 수도의 결사 방어를 주창하고 나선 건 사헌부와 사간원이었다.
  그 옥당의 선비들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전력이나 전술보다 대의명분을 내세워 결사대 모집을 외치며 그 전사로서 삼의사의 의원도 포함시킨 것이다. 충주에서의 패전은 처참했다. 도성으로 돌아오는 기백명 패잔병의 대오도 남지 않은 이름 그대로의 옥쇄였다.
  훈련받은 군사들의 싸움이 그러했거늘 이제 서울을 지키자며 목청을 높이는 사헌부나 사간원의 대신들은 그 싸울 병력으로 도성 안 각 관아의 서리들과 삼의사의 의원들 그리고 대의에 호소해 초모 가능한 백성들의 민병을 들었다.
  삼로를 이룬 적의 선봉이 호왈 10만이라 일컫지만 실제는 3만, 그러나 기마가 주력을 이룬 그 3만은 280리 한양까지의 거리는 하룻길이면 와닿는 지척이었다.
  죽기는 쉽되 막을 승산이라고는 애초부터 강구된 것이 아닌 의분과 명분뿐이었다.
  "그래도 싸워야 한다!"
  "싸우자!"
  의분이 치솟는 대로 처음에는 사기들이 드높았다.
  "우리도 나가 싸우자. "
  그러나 백성들이 호응한 이 의기와 용기를 무너뜨린 건 조정 내부로부터의 혼란이었다.
  적의 선봉 3만에 대적할 숫자도 한양은 젖먹이까지 포함하여 인구가 7천. 그 누구의 눈에도 싸워 이길 수 없는 그 사실 앞에 충주에서의 참패의 실상을 남보다 더 자세히 아는 조정 벼슬 높은 자들이 먼저 팔다리를 떨고 있었다.
  특히 전 이조판서 유흥은 그 상징적 인물이었다.
  주전파의 요구로 다시 몽진 결의가 뒷전으로 밀려나고 수도 사수를 위한 명령이 시행되자 몰려드는 백성들과 함께 싸워 죽으리라는 광경은 보이지 않고 도성 안에 일어난 현상은 미투리와 말의 품귀현상이었다.
  그리고 대궐 밖 북으로 가는 길모퉁이와 골목마다에서 말을 데린 하인풍의 사내들이 밤낮없이 대기하는 광경이 벌어지니 특히 조정 신하들의 주된 출입문인 선인문 밖은 매어둔 말울음소리와 견마잡이 하인들의 떠드는 소리로 밤낮으로 소란했다.
  "서울을 지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쌀 한 됫박 값이면 감지덕지 삼아올리던 미투리값이 쌀 한 말 값을 줘도 살 수 없는 희귀품이 되어버리자 서울에 남아 필사의 결전을 각오하던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랫것들 발엔 짚세기면 족했고 왕골과 모시 노 따위로 삼은 미투리는 돈냥깨나 있고 행세깨나 하는 이들이 찾는 것이다.
  백성들은 서울을 사수한다는 조정의 약속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소를 올려 백성들의 의심을 대변해 나선 것이 유홍이었다.
  "한창 위급한 격서가 왔다갔다 하는 터에 내 한몸 바쳐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는 하지 않고 조정 높은 관품을 지닌 자들로부터 대궐에 직을 가진 가들일수록 다투어 미투리를 사 챙기니 이는 임금을 따라 도망치려는 행위가 자명합니다. 이에 삼가 아뢰옵건대 사대부들의 이 작태를 묵인한다면 이는 나라의 위기는 백성에게 떠맡기고 저들은 싸움에서 도피하는 형국이라 벼슬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히 막으소서."
  기개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유흥이 그 망국행위를 저지른 자를 거명하자 거론당한 자가 이번엔 그 유흥이야말로 이미 여러 날 전에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 피난시킨 사실을 증거로 대어 반박하였다.
  이에 동서 양파에 속한 그 쌍방의 비행의 폭로 속에서 백성과 함께 적을 맞이해 싸우자는 것은 겉으로 낸 핑계요 발설자인 유홍뿐이 아니라 좌찬성 최황을 비롯, 열 스물이 넘는 고관대작들이 뒷구멍으로는 언제든지 저 한몸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을 지키려 떨쳐일어났던 백성들은 침을 뱉고 돌아섰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흩어지는 백성들을 막아 수도 사수의 민병을 만들려 조정이 사대문을 막고 호통쳐도 이미 이반한 민심은 잡아지지 않았다.
  현직 이조판서 이원익이 일가와 가복들 속에서 10여 명을 모으고 체찰사 유성룡이 군관과 병졸들 80여 명을 모았으나 그건 유성룡의 개인적인 덕망에 의해서이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에 모여든 의병들이 아니었다. 흩어진 건 백성들뿐이 아니었다.
  궐내 각사의 관원들도 급속도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서울을 지킨다면 더더구나요 어가가 몽진한대도 함부로 부서나 임금 곁을 떠날 수 없는 관원들조차 관복을 벗어던지고 백성의 모습으로 변복하여 제 한몸 가족들의 손을 끌고 사대문이 메어지도록 한양을 빠져나간다는 말을 전해 들은 임금 선조는 병조판서 김응남에게 생살여탈권을 지닌 표신을 주어 사태에 대처케 했으나 그 병조판서가 목이 쉬도록 군졸을 불러모으건만 단 한 사람도 귀기울여 주는 이가 없었다.
  병조판서는 모병을 위한 피맺힌 절규가 마침내 통곡으로 바뀌자 병조 좌랑 이홍로가 대신 표신을 목에 걸고 서울의 경비를 맡을 사위영을 뛰어다닌 끝에야 그 텅빈 성루 위에 남아 있던 딱 한 사람 위장 성수익이 따라나섰을 뿐이었다.
  서울을 향해 적의 3만 선봉이 치달아오는 시각, 한양 사수의 결의에 찬 조선 군사는 그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이제야 임금의 몽진은 필지의 사실이었다. 달리 더 버틸 어떤 방책도 남아 있지 못했다.
  그 4월 28일, 한양은 장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장대처럼 내리퍼붓는 빗줄기였다.
  왜군의 말발굽소리와 피바람 일으키는 칼날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한양성내는 자꾸만 인적이 뜸해지고 있었다.
  내노라, 육간대청에 아랫것들을 부리던 안팎 주인들의 호령소리가 찌릉거리던 대갓집 울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주인들은 떠난 지 오래. 집 지킨다는 명색으로 하인배들만. 호롱불을 밝혀놓고 악에 받친 눈을 치뜨고 다가오는 난리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었다.
  사가만이 아니었다.
  한 나라의 체통과 법을 상징하던 대궐 또한 그 서슬 푸른 위엄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관아마다 켜져 있어야 할 불빛들이 반도 켜져 있지 못했다.
  이제야 한양은 적의 말발굽소리도 들리기 전에 무너지고 있었다. 높이 40자 둘레 1만 4천5백보 이수로 40여 리에 이르는 우람한 도성의 성벽도 위병이 없고서는 한낱 촌가의 싸리울타리만도 못한 죽은 성일뿐, 그 지키는 이 없는 성채에 난 사대문은 활짝 열려진 채였다.
  성문뿐이 아닌 궁궐도 지엄한 경비라는 이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이제나저제나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그 주인을 모시고 피난길을 떠날 채비로 기다리고 있던 하인배와 붙이들은 점차 거리에 인적이 끊기고 주인들은 나타나지 않자 위병들이 사라진 그 대궐문을 하나둘 숨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칼날이 떨어질까 오금이 저리고 조심스럽던 것은 처음 몇 사람일 뿐이었다.
  내수사 별좌 김공량이 스스로 내수사의 종 중기운 쓰고 활 잘 쏘는 자 2백여 명을 모아 대궐 호위에 임하고 있었으나 그 숫자만으로 대궐이 지켜질 리 없었다.
  한눈에 내시로 보이는 자가 변복을 한 채 보따리 하나씩을 감춰 대궐담을 기어오르다가 담 너머로 뛰어내렸다.
  그 담 밑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삼삼오오 서로 부르고 찾으며 총총히 몰려오는 것은 궁녀들이었다.
  "임금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생각한 붙이와 하인배들은 이제야 거침없이 궁정을 달려 각전과 각궁으로 내 집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임금이 있고선 군사들의 호위도 없이 대궐이 이토록 텅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인정전 마당은 하인배들이 틀고 온 말과 저희끼리 부르고 찾는 소리로 저자바닥처럼 소란했다.
  그러나 이때 임금 선조는 궁 안에 있었다.
  궐내까지 침입한 그 민초들의 소란한 소리를 한귀로 들으면서 근정전 북편 사정전에서 몽진에 앞서 마지막 국사를 치르고 있었다.
  국난을 당하여 우선 국기인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대신들의 말에 따라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다.
  차서로 보아 임해군이 형이지만 그의 품성이 아우만 못하다 하여 광해로 세자를 책봉했으나 그 현장은 일국의 위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광경이었다.
  왜군이 충주를 떠난 지 하루. 적이 당장이라도 덮칠지 모른다는 초조하고 긴박한 정황 속에서 문무백관이 다 모이지 못한 중에 인장도 교서도 없이 광해군은 세자가 되었고 그밖에 임금은 비우게 될 서울을 맡을 유도대장으로 이양원을 정하고 어가의 몽진에 호종할 각 분담 부서를 정하며 대신들의 인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 그 시각 궐내에서 오직 한 군데, 임금의 몽진에 앞서 불을 뿜듯한 눈빛으로 격론을 벌이는 곳이 있었다. 내의원이었다.
  삼사의 관원과 의원들 중 거의가 행방을 감추어 마지막 남은 30여 명이 초저녁 어전회의에 참석한 어의 양예수를 기다리는 중에 전란에 즈음하여 내의원 의원이 다해야 할 소임에 대하여 이견이 생긴 것이다.
  집중 공격을 받는 것은 허준이었다.

    5
  논쟁은 기정사실화한 몽진 앞에서 임금을 호종할 내의원 각자의 부서를 정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시시각각 도성은 비어가는데 피난을 갈지, 가면 어디로 갈지, 혹은 아니 갈지 내의원에 남아 있는 가장의 하회를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며 발을 굴러대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상하 관원들이 너나없이 신경이 곤두서 있는 판이었다.
  평소의 안면과 우정은 존중되지 않았다.
  전쟁은 살육이다.
  그 살육의 무기 병장기라곤 들어본 일이 없는 축이요 가진 것은 침통뿐, 손에 손에 조총과 왜도를 들고 집을 태우런 가축라 젊은 여자는 끌고 가며 그밖에 늙고 어린 생명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그 귀를 잘라 전공의 증거로 삼는다는 잔학한 왜적의 소문 앞에 더구나 적을 막는 것을 업으로 해야 할 군사는 산산이 흩어진 터요, 그 겁먹고 흩어지는 민심을 통솔하고 지휘해야 할 요로 관원들조차 남 먼저 가산과 식솔을 피난길로 빼돌린 판국에 도대체 왈가왈부 허준이 꺼내는 의론이라는 것부터가 마뜩치도 않거니와 오로지 하나의 관심 ... 세자를 데린 임금의 행차가 영의정 이산해가 주창하는 평양으로 향하든 도승지 이항복이 권하는 대로 국경 너머 명나라로 가든 그 임금 행차에 따라가는 인원 속에 자기 자신이 선발되는지 여부와 그 임금의 행차와는 따로 근왕병을 불러모으는 소임도 맡아 각도로 흩어져 가는 여러 왕자의 행차 중 특히 함경도로 향하는 임해군 쪽에 붙는 것이 편하냐, 아니면 지금 상감의 총애가 순빈 김씨에게 함빡 쏠려 있으니 그 순빈과 사이에 태어난 순화군이 광국공신 1등이며 장계 부원군에 예조판서인 황정욱과 호군 황혁 등 쟁쟁한 인물들과 동행이니 그쪽에 끼여야 안전도 하고 뒤에 기대할 만한 것이 있지 않겠느냐 ... 내의인의 온통 쏠린 그 관심과는 엉뚱하게 허준은 혜민서 서고에서 짐 옮길 사람만 모으려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도대체 씨알이 먹히는 얘기가 아니었다.
  평소 광해군과 친숙한 사이요 그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으니 허준 자신은 원치 않아도 임금과 세자가 함께 가는 그쪽에 뽑힐 것은 틀림없는데 이런 때 그 위세를 업고 편한 길로 함에 가도록 인정을 쓸 법도 하건만 제 갈 길은 정해놓고 그가 꺼내는 말들은 너무도 엉뚱한 주장들이었다.
  어전회의에서 돌아온 양예수의 인원 편성이 발표되자 숨을 죽이고 있던 내의원은 허준이 제기하는 이의를 놓고 다시 소란해졌다.
  어의가 심복 김응택과 아랫사람 통솔에 능한 남응명 그리고 이명원에 이어 허준을 호종의 제일반을 짜고 연전 여역을 다룬 공로로 품계가 자신과 엇비슷 겨뤄온 이공기를 임해군을 따라가는 제이반으로 또 항시 눈에 가시처럼 여기는 양반 출신 유의 정작으로 하여금 순화군을 따라 제삼반으로 편성한 것이 발표되자 그것이 양예수의 포석이었을지라도 불만 많고 목청 큰 자들이 제일반 제이반에 많이 끼여 이 편성은 그대로 실행되는 듯했다. .
  그러나 허준이 정면으로 반의 재편성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강원도 쪽 순화군 쪽으로 밀린 자들은 다시 기대를 걸었고 다행히 임금과 임해군 쪽으로 편성된 자들은 눈을 치뜨고 허준의 상명거역을 손가락질해 나섰다.
  "어련히 알아서 짜진 인선이겠소! 이미 정해진 대오를 무슨 억하심정으로 다시 흐트러뜨리려 하오! 더구나 그대도 끼여 있지 않소."
  "이미 적의 탐마가 강남에 출몰했다는 경황인데 시키면 서둘러 떠날 채비지 무슨 독불장군처럼 나서서 피난길을 지체시킨단 말인가."
  그 뽑힌 자와 밀린 자들의 재연된 소란을 제어하고 나서는 양예수의 눈도 핏발져 있었다.
  벌써 나흘째 잠을 못 자고 있는 그다. 식솔들을 처가인 양근으로 피난시켰으나 양근은 도성의 지척이요 이대로 난리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양근땅은 적세가 북상하는 길목이 아닌가. 몸은 대궐에 있되 불안과 초조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냐! 반을 새로 짜야 할 ..."
  "삼로로 나뉜 호종할 인물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오라 호종에 앞서 짐을 지고 갈 인력이 모자랄 듯하와 각반에서 신체 굴강한 다섯 사람을 따로 편성해 주실 것을 아뢰는 것올시다."
  "다섯 사람 누구누구? 무슨 연고로!?"
  "파천이 결행되면 도성은 빕니다. 그 빈 도성은 왜적의 분탕질로 무엇 하나 성하게 남아 있지 못한다 여기옵니다."
  "한데."
  "대감 ..."
  "그러니 네 말은 도성이 분탕질당하는 것이 마음 아프니 손에 창칼을 나눠 들고 사대문 성벽 위라도 기어올라 결전을 하자는 것이냐?"
  "아니올시다."
  허준의 대답 첫머리에 어의가 눈앞의 서탁을 탕 쳤다. 그리고 예외없이 손가락질이 향해왔다.
  "호종길이 봄날 천렵놀이나 가듯 유유자적 한가한 길로 알더냐. 병조 판서가 표신을 목에 걸고 목이 터져라 불러모아도 단 한놈 따라나서는 자가 없는 마당에 따로 다섯 사람의 인력을 어디서 주워모은단 말이냐."
  "소인의 소청을 마저 들어주소서."
  "어련히 결정한 인선이리! 또 누구 하나 맨몸으로 따라나서는 게 아니다. 품계의 고하 막론하여 왕실의 시탕에 소용되는 약재와 기물을 지고 가야 하리. 물론 너도 짐을 져야 하느니."
  "압니다."
  "안다면!"
  "상약으로부터 지고 가야 할 약짐이 무엇무엇이며 그 물량이 얼마인가는 익히 들었사옵고 소인 또한 어슬렁거리며 뒷짐지고 가는 길이 아닌 걸 열번 백번 아옵니다."
  "그렇거든 시키는 대로 군말없이 따를 일이지 언감 항명의 앞장을 서?"
  "항명이 아니올시다."
  "그 말대꾸가 항명이 아니고 무엇이냐!"
  "대감!"
  "네 이놈!"
  "하오나!"
  허준이 그 격노한 양예수의 눈빛을 맞받았다.
  "이 망종 같은 놈. 네 본심이 무엇이기다 언감 ..."
  "각반에서 다섯 사람 짐질 이를 차출해 주소서."
  소연해진 의원들 속에서 김응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의께서 너나없이 짐을 지고 간다 누누이 말씀 겝시거늘 고작 약재짐이나 지고 갈 그대가 미리 그것도 무겁다 야료를 부리는 겐가!"
  "난 약재짐은 지지 않소!"
  "무어라?"
  "어째!"
  "네가 세자 저하의 힘을 믿고 너만은 침통 하나 달랑 들고 따라나설 참이란 말인가!"
  "이 대체 무슨 망발인가! 내의원 의원이 상감의 몽진길에 약재짐을 안지겠다니!"
  듣고 있던 이명원과 정작도 허리를 일으키며 나섰다.
  "그렇소. 난 약재짐은 지지 않소."
  "이자가 미쳤어!"
  양예수가 외쳤고 김응택이 허준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순간 허준이 억센 팔목으로 긴응택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외쳤다.
  "호종은 하되 내가 속할 반을 따로 짜주소서."
  "네가 속할 반?"
  "추리고 추린다 해도 소인을 포함 다섯 사람 짐꾼이 필요하옵니다."
  "대체 무슨 짐을 지고 가려는가. 그 속말을 하시게."
  시종 묵묵하던 이공기가 나섰고 양예수는 서로 또 한패거리가 되듯한 두 사람을 한꺼번에 쏘아보았다.
  "이미 대오와 반을 짰으니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 대오는 너문나 경황이 없는 대오이옵니다. 내의원 의원이 몽진을 당하여 약재를 지고 임금와 행재소를 좇는 건 백번 만번 당연한 소임이오나 이건 전쟁올시다. 언제 다시 대궐에 돌아올지 기약없는 길이며 그 동안 대궐은 적의 분탕질로 무엇 하나 성하게 남아나지 못한 국면도 예상되옵니다. 그렇다면 대궐에 남아 있는 온갖 희귀 의서와 누대 기록해 온 비망록 또 혜민서 서고에 쌓여 있는 수많은 비방전 또한 무사히 남아 있으리라 어찌 기필하오리까!"
  분노와 비방의 손가락질이 잠잠해진 순간 허준이 다시 외쳤다.
  "내의원에 있어 그것들은 딴 어떤 보화보다 귀한 보물올시다."
  "...!"
  "특히 혜민서 서고의 비망록과 처방전들은 다시 또 누대 보관하고 연구해야 할 각각 생생한 토구의 자료로서 만일 그것들이 적화에 불타거나 분탕질에 산실하는 낱 그건 곧 이 나라 의업의 중단을 뜻하는 것이라 여기옵니다."
  양예수가 조소했다.
  "너 혼자 아는 체할 것 없다. 그런 불의에 대처하는 방책으로 이미 희귀 서책과 갖춰둬아 할 비망록은 왕실 서고에 단단히 이관토록 명해 두었은즉."
  "바로 어젯밤까지 그 일을 내가 했소!"
  김응택이 증오에 찬 눈으로 허준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 말도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면!"
  "그걸로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무어라?"
  "...!"
  "왕실 서고라 한들 전쟁 앞에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얘기올시다."
  "이런 미친 ..."
  "난 미치지 아니했소."
  허준이 김응택을 쏘아보았다. 양예수가 다시 나섰다.
  "그래서 네 말은 다섯 사람 짐꾼을 내어 그것들을 어디로 옮기잔 얘기냐. 너의 집으로?"
  "아니올시다."
  "아니다?"
  "지고 가옵니다."
  "지고 가? 어디로?"
  "상감께선 곧 대궐이오니 상감 따라 지고 가옵니다. 그리고 환궁하는 날 다시 지고 돌아옵니다. "
  "피난길 이 경황에 그것들을 지고 간다 ..."
  "그러합니다. 소인이 앞장을 서옵니다. 소인이 책임을 지옵니다."
  방안이 일제히 침묵했다.
  "소인을 포함 따로이 네 사람만 차출해 주소서."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방안의 눈알들이 왔다갔다 했다.
  약재는 무거워봤자다. 책더미 종이뭉치는 묶을수록 돌더미처럼 무거워진다. 모두 그걸 생각하는 눈치였다.
  약재는 남으면 중도에서 쌀말이나 술잔과도 바꿀 수 있으리라.
  그러나 보물이다, 보물이다 외치기 시작한 서책자 종이뭉치들은 한 권 한 장의 헌실도 용납되지 않은 채 지고 다닐 수밖에 없다.
  사람이 죽느냐 이 마당에, 가족이 무사하냐 아니냐 이 전쟁판에 저 미친 사람들이 눈이 더 살벌해서 그 허준을 쏘아보았다.
  "짐질 사람 차출해 주소서. 소인이 목숨 걸어 이 소임을 감당하려 하옵니다."
  허준이 양예수에게 고개를 깊이깊이 숙이고 소청했다.

    6
  허준이 청한 대오는 짜지지 않았다. 내의원의 소임이 무엇이냐! 상감을 위시, 왕실의 고귀한 분들의 건강을 지키는 것일진대 고루 인원이 갖추어진 평화로운 길도 아니요 미리 일정을 예정할 수도 없는 피난길에 예상되는 부상과 예기치 못할 병세에 대처할 의약을 지고 가는 것이 급선무이지 의서니 처방전이니 비망록 따위는 불요불급하다는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중요 의서는 이미 옮겨 감추었으며 임금과 왕실 주요 인물의 지병과 병력에 대비할 약재도 만전을 기해 갖추었으니 그로써 내의원의 소임은 다했다 할 것이다.
  게다가 조정 주요 대신들의 병력을 참작, 그들을 위한 약재짐까지 꾸렸노란 어의 양예수의 말에 이르러서는 허준의 소청은 이미 남이 귀기울여 줄 얘기가 못 되었다.
  대의명분에서 양예수는 빈틈이 없다고 당당했다. 허준의 주장은 사견이요 고집으로 보일 뿐이었다. 설사 허준의 고집 속에 같은 의원으로서 한가닥 공감이 없지는 않되 몇백 리를 갈지 몇천리를 가야 멈출지 모르는 피난길에서 약재보다 두 배도 다섯 배도 무거운 책이며 종이 뭉치를 지고 다녀야 한다는 고역을 생각할 때 모두 입을 다물어 허준을 외면했다. 당장 궐 밖에 초조한 가족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임금의 몽진길에 함부로 가족을 동행시킬 수 없고 보면 한시바삐 이 무모한 논쟁을 끝내고 장차 적지에 남겨둬야 할 가족들을 그 동안 궁리한 대로 병화가 미치지 않을 어딘가로 피난보낼 의견도 내야 할 각자의 간이 타는 듯한 사정을 저 허준이라는 자, 미친 놈은 아는가 모르는가.
  저 또한 하늘에서 떨어진 자가 아니요 노모와 처자식이 있음을 알거늘 한시바삐 제 식구 건사할 궁리는커녕 엉뚱한 발상으로 어의를 가로막고 버틴 꼴이 눈에 불이 나도록 증오스러울 뿐이었다.
  기어이 김응택이 고함쳤다.
  "예 있는 이가 모두 의원이고 보면 그 의서와 문적들을 아까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을 게요. 하나 사세가 이미 만부득이하여 운일랑 하늘에 맡기고 그것들을 두고 가는 터인데 유독 그대만이 아까워하는 투로 충성을 가장하니 ..."
  "충성을 가장이란 무엇이고 운이란 무어요! 운 따위에 맡겨버려 둘 물건이오니까! 운이 우리에게 따르는 쪽이면 이 전쟁이 왜 터진단 말씀이오! 난 운을 믿고 그냥 놓곤 못가!"
  "그걸 정하는 건 어의신가 그댄가?"
  "내가 아니기다 어의께 간청하고 있소이다."
  "싸울 겨를도 없으니 긴말 떠들 것 없다!"
  "대감!"
  "정녕 그토록 네가 충성이 뻗쳤거든 서책 운운 이전에 창칼 빌려 들고 성벽 위에 올라가 왜적 막는 기개부터 보여야 하리."
  "왜적?"
  "암, 네가 그 용기가 있거든 나라도 달려가 내의원 허준이가 군졸을 자원했다 유도대장께 청을 넣어줄 것이다."
  그 비웃음 앞에 허준이 고개를 떨구었다.
  "네 본심이 그러하거든 해봐, 대답을!"
  허준의 침묵을 통쾌히 여긴 몇 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김응택이 다시 내쏘았다.
  "왜 남의 등판에 서책을 지을 생각엔 기고만장하더니 제가 군졸로 나설 생각 앞엔 다리가 떨리느냐?"
  "다리뿐이 아니라 온몸이 떠는구먼."
  평소의 친분으로 보아 세자의 행차에 끼여줄 것으로 기대했다가 순화군을 좇아 강원도행으로 반이 짜인 젊은 의원이 그렇게 분풀이를 했다.
  "교활한 것!"
  가래침이나 뱉듯 양예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허준의 손가락이 양예수를 제한 일동에게 향해갔다.
  "군졸 ... 마다하지 않으리다. 무너지는 성벽 위에서 쳐들어오는 적을 맞아 내 한몸 죽기는 쉬운 일이오. 허나!"
  "허나고 뭐고 없지. 목숨이 아까운 자야 굳이 성벽 위에 올려놓아 본 들일 터인즉."
  "... 물론 저 또한 목숨은 아깝습니다. 하오나 목숨이 아깝되 그렇다고 창칼 앞세워 적진에 죽는 것만이 진실로 용감한 것이고 충성이오니까!"
  "탈 쓴 말 길게 늘일 것 없다. 너는 한마디 대답만 하면 되느니! 네가 진실로 충의지심이 있는 자거든 나라의 흥망이 걸린 이 전쟁에 마땅히 한번 죽어 국은을 갚을 군졸을 자원한다 한마디면 될 것인즉! 나가겠느냐? 군졸로 나선다 그 대답부터 해라!"
  "대감!"
  "이 간물!"
  "한 사람 군졸로서의 죽음도 어찌 뜻이 없으오리까. 하오나 지금 우린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막중 소임이 내려진 것올시다."
  "막중 소임? 누구로부터?"
  "서둘러 죽지 아니해도 한 사람 병졸의 용맹으로 적진 속에 뛰어들어 죽을 기회는 하시라도 있을 것이나 우린 의원올시다. 전쟁의 와중에서 다치고 상한 수많은 생명을 구할 재주를 가진 의원이 한때의 용기를 뽐내어 죽는다면 그건 작은 용맹 작은 충성올시다."
  "무어라? 작은 충성!"
  "전쟁은 수많은 부상자를 낳는 것올시다. 이런 때일수록 적병 열을 죽이는 용맹보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우리의 다친 군사 스물 서른을 살리는 재주가 긴요하옵고 그것이 전쟁을 당한 의원의 참된 소임이 아니오니까."
  조소가 지워지고 양예수와 김응택의 얼굴에 시기가 피어올랐다.
  "의원의 재주가 사람마다에 태어난 것이 아닐진대 잠시 자중하여 분노를 삭이고 언제 끝날지 모르며 어디까지 번질지 모르는 장차의 전쟁에 대비하고 그 전화에 휩쓸리는 보다 많은 군졸들과 백성들을 구하는 것이 왜 비겁이 되오니까."
  "...!"
  "내의원의 소임을 저 또한 익히 아옵니다. 우리의 소임이 왕실의 몇몇분의 병에 대비해 존재했사오나 그건 시절이 화평스러운 적의 소임이요, 장차 전쟁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다친 군졸과 백성들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면 그 동안 수많은 병자들의 병세와 치료의 수단을 적은 특히 혜민서에 보관한 비망록과 처방전들은 반드시 미리 간수해야 할 보전이 된다 여기옵니다. 소인이 이 창황한 와중에서도 굳이 그것들을 가지고 가야 한다 주창하는 것은 진실로 그러한 안목에서오이다."
  "... 안목? 그래서 그대의 안목이 어의의 안목보다 윗길이다. 그 얘긴가?"
  "어의께선 통촉해 주소서."
  양예수가 웃었다. 조소였다.
  "일견 네가 제법 앞날을 내다보는 말인 양 꾸몄으나 더 들을 필요 없다."
  "왜오니까!"
  "의원은 고장 고장마다 있고 역시 우리의 주무는 성궁(임금의 몸) 보호와 왕실의 심병에 있지 일일이 백성을 좇아다니는 데 있지 아니한즉슨!"
  "그도 아옵니다. 하오나 ..."
  "또! 전쟁이 그토록 장기화하여 황실 의원들조차 백성들의 병고를 살펴야 할 만큼 절박하게 느끼는 것부터가 관원으로서 불온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냐."
  "대감!"
  "또 있느니! 상감조차 마상에 융복이요 비빈마마들조차 일용품과 함께 실린 가마에 올라 떠난다는 터에 인수에 여력이 있으면 그 짐을 하나라도 덜 일이 우선이다. 한데도 언제 소용될지 모를 약재를 버리고 혜민서 문건을 지고 간다 운운은 그건 장차 사정이 닥친 고장의 목민관이 할 걱정이지 어찌 한낱 의원인 네가 떠들 일이란 말인가."
  허준은 입을 다물었다.
  양예수는 더 이상 허준을 거들떠보지 않고 일동에게 명령했다.
  "모두들 들어라! 임해군을 좇 함경도로 향할 인원과 순화군을 따라 강원도로 떠날 반은 지체없이 각 행차를 찾아가 그곳 지휘를 받을 것이요, 나와 함께 상감과 세자 저하를 호종하는 반은 각자 집에 가 신변잡사를 정리하되 몽진 행차가 내일 새벽 사고에 선인문으로 거동하시니 그 한 시각 전에 각자 미리 지시된 짐을 꾸려 인화문에 당도하여 점고받도록 하라!"
  "인화문 앞이오니까."
  일동을 대신해 모일 장소를 다시 다짐해 묻자 그 대답 대신 양예수가 덧붙였다.
  "공연히 헛말 지껄이며 긴 생각 하지 말 것이 이미 신성군과 정원군이 종묘 관원들을 이끌고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모시고 떠났은즉 너희의 행동도 낙자없이 할 것이다."
  "종묘가 떠났다!"
  웅성거린 건 잠깐이었다.
  순식간에 핏기를 잃어가던 의원들은 앞자리 뒷좌석 할것없이 서로 부르고 찾으며 황황히 흩어져가기 시작했다.
  어의 양예수도 김응택이 들고 온 조족등을 따라 툇돌 아래로 내려섰다.
  순간 허준이 다시 외쳤다.
  "하오면 소인의 특청을 한 가지만 들어주소서."
  "어서 가세!"
  양예수가 빗물을 막고자 뚜껑을 씌우고 발밑만 빤하게 비추는 조족등의 불빛에 발을 옮겨놓으며 김응택을 재촉했다.
  "소인 혼자라도 약재 대신 혜민서의 물건들을 지고 가게 허락해 주소서."
  빗발은 가늘어져 있었으나 바람이 일고 있었다.
  다음 순간 김응택이 버린 조족등이 장마비가 흥건한 본청 뜰 물창 속을 뒹굴었다. 조족등의 작은 불빛을 따라 한발 한발 걸어가기엔 너나없이 마음들이 급했다.
  "대감!"
  허준이 다시 비통한 소리로 재촉했으나 물속을 저벅거리는 두 사람의 발소리는 어둠속으로 멀어졌다.
  그때였다.
  "소녀도 함께 가옵니다."
  하고 여인의 소리가 났다. 놀라 돌아본 허준의 눈에 저만치 처마끝 어두운 난간 아래 빗속을 달려온 모습으로 그리고 거기 오래 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모습으로 서 있는 건 의녀 미사였다.

    7
  "여길 네가 어찌 왔느냐?"
  허준이 다가서며 물었으나 다가든 미사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빗속을 달려왔음이 분명했다. 흠뻑 비에 짖은 옥색 삼회장 저고리 속에 맨어깨가 비치고 있었다.
  삼회장 옥색 저고리를 떠받친 남치마 밑단은 흙물이 흠씬 튀어 배겨있었다.
  평소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아니 이젠 아이라 부를 수도 없다. 비록 어린 나이 적부터 곁에 두고 보아온 스스럼없는 상대로 지금은 스물여섯인가 일곱인가 ...
  옷매무시가 항상 단정했고 궐내에서 임의롭게 만나는 유일한 남성들인 의원들이나 내시들에게 또래 의녀들이 항용 보이는 수다나 헤픈 교태도 없는 늘 조용하고 눈빛 맑은 처녀. 그녀의 그 음전한 태깔로 인해 중전 처소에 붙박이 의녀로 뽑힌 미사.
  부모 형제 있고 의녀라는 신분으로 풀리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 전에 머리 풀어 둘도 셋도 아이를 낳고도 남을 성숙한 여인일 터이다.
  그 젖은 머리올이 엉킨 그녀의 뽀얀 목덜미가 눈부셨다.
  허준이 애써 냉정히 물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더냐?"
  그녀의 눈속에 원망이 스쳐가는 것을 허준은 보았다.
  허준은 입을 다물었다.
  소시적부터 자기에게 향하고 있는 그녀의 간절한 눈매들을 이제 와 모른 체 더 되물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빗발이 또 굵어지고 있었다.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있다. 다시 입을 먼저 연 건 그녀였다.
  "새벽 사고를 신호로 어가가 출궁한다 들었삽던 중에 뜻밖에 내의원 인원이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삼로로 나뉜다 하기 허주부께선 어느 반에 속하였나 그것만이라도 알고자 ..."
  "떠나는 노정과 시각은 각각이되 곧 모두 한데 모이지 않으리 ..."
  "어느 반이오니까?"
  "전하와 저하가 속한 첫반이로다."
  "... 기쁘옵니다."
  어둠 속에서 미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히 저의 짐은 별로 없사옵니다. 중전 처소의 짐은 내관들이 모두 꾸렸사와 저는 빈몸으로 가도 되옵니다. 허주부님의 짐을 저도 나눠지게 해주소서."
  "철없는 소리로다. 이 길이 사사로운 길이 아닐진대 중전 처소의 네가 어찌 내 짐을 지련단 말이냐."
  "그것 또한 아오나 경황이 경황인지라 한 사람이라도 더 짐을 들 사람은 들어라 분부가 계셨습니다. 또 제 신분이 여의오니 허주부님의 짐을 나눠 짐이 이상할 바 없사옵니다."
  "말은 고마우나 그렇게는 아니 되리."
  "왜오니까?"
  "여자와 나눠 질 가벼운 짐들이 아닌즉."
  "아까 의논의 일단은 들었사옵니다."
  "여자의 힘으로 도울 일이 아니다."
  "허주부님."
  "또 호종의 길은 같되 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갈 순 없은즉."
  "함께 아니 가시면 허주부께오선 따로 뒤좇아간다는 말씀이온지!"
  "또 어가는 촌시도 다투어 앞으로 나아갈 것인데 짐 진 자로서야 어가와 속력을 함께 한다 기필할 수 없을뿐더러."
  "짐의 내용이 무엇이온지?"
  "의서와 혜민서의 여러 비망록들이니라."
  "...!"
  "아직 내용들을 가련낸 터도 아니요, 더구나 여태 꾸리지도 아니했으니 사고 어가가 출발하실 제까지 짐초자 다 꾸릴지 모를 일이요 ... 허나 떠나는 건 각기 달라도 행재소(이동한 임금의 임시 처소)에서 서로 다시 볼 수 있으리라."
  말끝에 이미 허준이 내의원 대청으로 오르고 있었고 그 뒤를 좇는 미사가 외쳤다.
  "만일!"
  "허주부님의 뜻이 아무리 간절하다 하시어도 만일 어가가 출발할 제 그 인원 점고에 빠졌다가는 도망자로 치부됨도 아시옵는지."
  허준이 대답없이 방으로 뛰어들어 자기 짐 속에서 비망록 몇 권을 챙겼고 따라들어온 미사에게 그제야 대답했다.
  "점고에 빠짐을 추궁받는 건 장차의 걱정이지 지금부터 걱정할 일 아니다. 어서 네 부서를 찾아가!"
  미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의원 의원으로서 몽진하는 어가를 인허도 없이 이탈했다 몰리는 날에는 ... 허주부님!"
  허준은 더 듣고 있지 않았다.
  일변 어의의 서탁 밑에서 대황초 두세 자루를 집어들었고 또 일변 필가에 걸린 대소붓을 걷어들어 책을 찢어발겨 그 종이에 둘둘 말아 싸며 임시 홰를 만들었다.
  "허주부님을 훼방코자 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의서나 비망록을 챙기는 일이 요긴한 일임도 아옵니다. 하오나!"
  "빠지려해서 빠지는 것이 아니다. 비상할 때는 비상하게 행동할 수 있느니!"
  "... 허주부님."
  "예 어물대다가는 너조차 점고에 빠질지 모르니라. 어서 가거라, 어서."
  "집에는 다녀오셨사온지?"
  허준이 뒤꿈치로 으깬 대소 붓대체 촛농을 버무려 단단히 묶어 불을 당겼다.
  멋진 횃불이 되어 그 불빛이 온 방안을 가득 밝히기 시작했다.
  "소녀가 대신할 수 있는 일은 소녀를 시키시고 서둘러 집에부터 다녀오소서."
  "가져가야 할 의서와 비망록들을 고르는 일은 누굴 대신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오나 기다리는 식구들 생각해 보소서. 집집이 모두 피난길에 올랐사온데 집에서는 일각이 여삼추로 기다리고 계실 터이온데 ..."
  허준이 밖으로 달려나갔고 미사가 뒤쫓았다.
  본청 뒤꼍 도약사령들의 관할인 약재창고에 이른 허준은 아연했다. 주로 녹용 인삼 등 희귀 약재가 쌓인 그 곳간문은 반이나 부서진 채 가져가다 남은 약재들이 그 바닥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회집에서 어의가 돌아오기 전 남 먼저 사라진 의원들과 하속들의 짓이 분명했다.
  허준은 그 어질러진 곳간 바닥에서 10여 발 새끼줄을 이어 묶어 움켜쥐었다.
  "소용되는 것들 소녀가 챙길 것이니 우선 집에부터 다녀오소서."
  "기왕 네가 이곳에 왔으니 한가지 부탁을 하리."
  "하소서."
  "난 혜민서로 달려가 지고 갈 짐을 꾸릴 터이나 혹 내 출발이 늦어 인원 점고할 제까지 닿지 못하거든 네가 어의께 아뢰어라. 비록 걸음이 늦어도 나는 반드시 뒤쫓아갈 것이니 날랑 점고하지 마시라고."
  "! ..."
  창고를 나선 허준은 빗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장대 같은 빗줄기에 횃불은 소용 없었다.
  허준이 달리는 궁정의 여기저기는 파장을 만난 난전처럼 소란한 소리들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천둥소리는 계속 우르릉거리고 일순 어둠속을 하얗게 비치는 뇌광에 드러난 사람들의 정체는 궁중에서 눈에 익은 복식들이 아니었다.
  도롱이 입은 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이도 없이 거리낌없이 저희끼리 부르고 소리치고 방자하게 웃는 자도 보였다.
  '난민이다!'
  대궐이 약탈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걸음을 세울 수도 없었다.
  궐문을 나서 육조 넓은 뜰을 가로질러 길 건너 혜민서로 뛰었다. 그때였다. 허준의 등뒤에서 두응 ... 두응 ... 삼고를 알리는 쇠북소리가 음산하게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혜민서에는 그 많던 병자도 가족도 관원도 누구 한 사람 남아 있지 않았다.
  허준이 그 칠흑의 혜민서의 탕제실 아궁이에서 가까스로 불씨를 구해 다시 홰를 만들어 혜민서 서고에 들어앉아 지고 갈 짐을 꾸렸다. 어가가 궁성을 떠나리라는 사고북 울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쥐죽은 듯한 정적에 싸인 지 이미 한 시각도 넘어 있었다. 허준은 아직 짐을 꾸리는 중이었다.
  꾸려야 할 짐이 너무나 많았고 단 한 장의 처방전이라도 더 가져가야 했다.
  이런 병에는 이 처방, 이런 상처에는 이 처방, 장차 전지에서 징집할 의원들에게 보다 쉽게 하나의 기준이 될 처방의 분류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원이 아니랄지라도 처방전을 읽을 지식 하나로 의원을 대신할 그 지침이 될 단 한장 단 한줄의 처방전이 필요할 것이다.
  미사의 비명이 터진 건 그때였다.
  "불!"
  하고 뛰어든 미사가 외쳤다.
  "왜 여직 안 떠나고 있단 말이냐!"
  미사에게 허준이 그렇게 성난 고함을 질렀을 때 미사가 허준을 잡아끌었다.
  "대궐이 타옵니다, 대궐."
  "무어라!"
  허준은 미사가 끄는 대로 혜민서 밖으로 달려나갔다.
  빗줄기는 그쳤으나 그 칠흑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대궐 일각이 타오르고 있었다.
  장례원 쪽이었다.
  육조 넓은 뜰에 왜적의 그림자는 아직 없었다.
  그런데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뛰닫고 있는 건 한눈에 알 수 있는 천예로 불리는 공천, 사천의 신분인 하인배들의 모습이었다.
  불길은 한 곳만이 아니었다. 이쪽 저쪽 솟으며 온 대궐로 번지는 기세였다.
  "어서 떠나야 합니다, 허주부님."
  미사가 공포에 질려 거푸 소리쳤다.
  허준은 악몽을 꾸는 듯했다.
  왜적도 닿기 전에 조선 사람들의 손으로 싸질러지는 그 대궐을 허준은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8
  비는 그쳤으나 하늘은 먹장 같았다. 밤새 퍼부은 호우에 물 먹은 대궐이건만 그 대소 전각과 궁 기둥들이 그 어두운 하늘로 시뻘겋게 타오르다가 굉음과 함께 계속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허준은 눈을 씻고 다시 한번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왜병이 아니었다. 난민이라는 말 외에 무어라 더 표현할 길이 없는 조선 백성들이 양반들이 떠나고 관리들이 떠난 그리고 임금과 대신들이 떠난 대궐을 불싸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측으로 건너뵈는 숭례문만이 아니고 동서남북 도성을 둘러싼 사대문이 모두 열려진 듯했다.
  사방 성문으로 닿는 큰거리마다에 손에 손에 횃불과 몽둥이와 어디서 주워든 병장기들을 든 폭도들이 육조 넓은 마당을 뛰닫고 그 어느 하나가 해태 석상의 머리 위로 기어올라 마악 불이 붙은 광화문 현판을 손가락질하며 성난 고함을 질러대는 것도 보였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타오르는 대궐 뒤 백악과 인왕산 검은 등성이에도 넘어오는 횃불들이 열도 백도 넘는 듯했다. 도성은 비어 있지 않은 듯했다.
  서둘러 피난길 떠나던 상전들이 집을 지켜라 두고 간 하인배들이 뛰쳐나온 듯했다.
  또 무악재가 미어지라 피난길 떠나던 백성들이 되돌아온 건지도-암튼 이제야 팔만 장안이라 일컫던 한양은 그들 폭민들의 세계였다.
  광화문 문루 한구석이 불더미가 되어 무너지는 것을 보자 폭인들이 환호를 질렀고 공포에 떨던 미사가 부지중 허준의 관복을 붙잡았다.
  "속히 이 관복을 벗으소서!"
  "관복을?"
  "성난 백성들이 대궐까지 태우는데 관복을 입은 이를 보면 무슨 해악을 끼칠지 모르옵니다."
  허준은 자신의 행색을 돌아보았다.
  비에 젖고 흙탕 속을 뛰고 서고의 먼지를 뒤집어썼으나 그 옷은 관복이었다.
  허준은 고개를 저었다. 옷을 갈아입고 뒷골목으로 도망치는 행동은 취하고 싶진 않았다. 저 성난 백성들이 대궐을 불지르는 이유 ... 난리에 대비는커녕 동서붕당 싸움에 영일이 없던 조정에 대한 분노 ...
  백성과 함께 결사항전의 의지는커녕 당황망조하여 몽진길을 서두른 임금에 대한 실망. 또 제 권속 제 살림부터 챙겨 백성보다 먼저 피난길을 재촉한 관리들을 향한 배신감, 아니 더 뚜렷한 사유-제일 먼저 불타 오른 곳이 노예문서를 관장하는 장례원이요 호조 건물이고 보면 그건 단순한 방화가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천하고 살면서도 천하며 장차 자신을 핏줄로 태어날 자녀까지 대대손손 천할 수밖에 없는 그 가혹한 신분제도에 맺힌 포한의 폭발일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기 또한 그들과 같은 천민이요 그들 가슴에 맺힌 원망, 분노, 한이 왜 없다 하리.
  그 원망 그 분노 그 한이 남보다 오히려 더 깊었기에 면천의 길을 찾아 의업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비록 그 자신의 의업이 세상 병고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요 왕실 존귀한 이들만을 상대할지언정 지금 그는 그렇게 세상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데 동조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내 갈 길을 찾았다."고 믿기에 지금 이 무거운 보따리를 스스로 꾸린 것이다. 임금뿐이 아닌 왕실만이 아닌 보다 많은 백성들을 병고에서 구완하고자 그 자기의 길을 가고자 ...
  '피할 까닭 없다.'
  허준은 그렇게 작심했다. 다시 혜민서 서고로 뛰어들어 짐을 마저 묶어가던 허준의 손이 문득 정지했다.
  '저 불길!'
  세상 그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저 한어린 불길에 가족들의 모습이 겹쳐온 것이다.
  그건 사심이었다.
  '어머님을 한번 뵙고 가야 하리!'
  이 엄청난 난리 속에서 어머님이 그리고 안내도 또 자식들이 몸 성히 있기를 당부하는 한마디 작별의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이대로 떠나면 가족과 영이별이 아니 되리라는 희망도 없고 보면 그리고 이 불타는 대궐 쪽을 바라보며 발을 구르고 있을 어머니와 처자식들의 모습이 갑자기 허준의 가슴을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난민들이 기어이 이쪽으로도 달려옵니다."
  허준이 짐을 꾸리는 동안 따로 무엇을 더 싸야 도움이 될지 안타까운 얼굴이던 미사가 대로변에 점점 커지는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나갔다가 뛰어들어오며 외쳤다.
  '장정 한 사람이라도 더 있었던들.'
  추리고 추린 짐이 혼자 지기엔 너무 무겁다 느끼며 허준이 발을 굴렀다.
  "사람들이 이리로 물려옵니다."
  다시 미사가 외쳤고 허준이 돌아본 그 혜민서 마당에는 바람을 탄 잿가루와 불씨들이 어지러이 날아 떨어지고 있었다.
  허준이 꾸린 짐의 부피를 본 미사가 황급히 말했다.
  "이걸 다 지고 가려 하시옵니까."
  "지게는 구할 수 있을 것인즉!"
  "지게를 지고 몽진길을 쫓아가옵니까!"
  "그보다 너는 어찌할 터이냐. 저 불길이 곧 잡힐 불길도 아니요 이 흉흉한 민심이 어디까지 번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어찌 하려느냐?"
  "어찌 하려느냐라니요?"
  "이 난리 속에서 젊은 여자가 온전히 몸을 지키기가 쉬운 일이 아닐 터이다. 난리가 평정되기까지 네 일신을 믿고 의탁할 곳이 있겠느냐?"
  "저는 허주부님을 따라가옵니다."
  "이미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저를 두고 가려 하지 마소서."
  "냉정히 알아야 할 것이 시세를 본즉 왜적이 곧 닥칠 것이요, 임금이 떠난 것을 알면 곧장 어가를 추적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가는 길 또한 안전할 까닭이 없다."
  "아옵니다."
  "알고야 어찌 나를 따라간다 할 수 있으리. 더구나 난 짐까지 진 사람, 기마로 쫓는 적진 속에 언제 갇힐지 모를 일이오. 그렇다면 날 따라간다 함은 오히려 위험을 자청하는 길일 수도 있으니."
  "그래도 가옵니다."
  그 미사의 눈이 허준의 시선을 맞받았다. 전에 없는 눈빛이었다.
  "사위스러운 말이오나 가다가 만에 일 허주부님의 곁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 소녀는 여한이 없사옵니다."
  "미사야."
  "저를 두고 가려 하지 마소서. 이미 소녀의 뜻은 정해져 있사오니."
  막무가내의 눈빛이었다.
  "네 사사로운 결심까지 귀담아들을 겨를 없거니와 나 때문에 지체된 길 나 또한 너를 중전마마의 행차까지 데려다주고자 마음먹었으나!"
  "다른 말씀 마소서."
  "난 잠시 집에 다녀올 요량인즉 그리 되면 어가를 쫓는 길이 더더욱 급한 걸음이 될 것이오."
  "그러소서. 집엘랑 다녀오소서. 소녀는 허주부님께서 오시기까지 기다리옵니다."
  더 말로 달랠 수 없다 여긴 허준은 멜빵 속에 관복의 팔을 끼웠고 일어서는 그 허준을 미사가 부축했다.
  광화문을 무너뜨린 불길은 창덕궁 쪽에서 더 큰 불기둥이 되어 번지고 있었다.
  난민들이 거리를 고함치며 달리고 있었다. 약탈이 시작된 듯 대가댁 가재도구를 처실은 달구지가 약탈자의 채찍을 맞으며 폭주하는 것도 보였다.
  또 대가댁 부엌에서 들고 오는 게 분명한 밥상을 움켜든 아낙과 뉘 집 화개장인지를 어깨에 진 백발 영감도 뒤뚱거리며 허준의 곁을 달려갔다.
  허준도 미사와 함께 그 도둑들과 함께 숭례문을 향해 달렸다.
  어가를 좇아야 할 북과는 반대의 방향 애오개 너머 집이 있는 공덕리까지가 아득히 멀었다.

  들기름으로 태우는 접시 등잔에 불도 당기지 못하고 온 방안이 캄캄했다.
  집에 오니 겸이가 없었다.
  그 아들은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마중코자 애오개고개 위에서 조모와 동생 숙영이가 애타게 기다리다가 대궐이 화염에 싸이는 걸 보자 동생 숙영이 시켜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라 이르고 아버지를 찾아 내의원으로 달려갔다는 것이었다.
  불타 무너지는 대궐안에서 날뛰던 폭도들과 섞여 목메어 아비를 찾아 달리는 아들을 떠올리는 허준의 가슴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스물둘인 아들은 이미 몇 군데 혼사가 거론되는 미장부다.
  고생한 아비의 온갖 수고를 조모로부터 들었기에 그 아들은 남다른 효성이 보였다. 또 몰락했으되 반가의 숙녀로 자란 어미의 훈도와 범절이 남달라 그 아들은 조석으로 찾아드는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게 연민도 갖춘 아이였다. 가족을 두고 떠남에 있어 허준이 믿는 건 그 겸이일 수밖에 없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가족을 건사할 능력이 있다 없다 판가름 이전에 그 아들에게 뒤를 당부하고 떠나리라는 허준의 걸음이 길이 엇갈려 대궐로 달려간 아들을 기다리자니 시간은 자꾸 지체되고 있었다.
  "왜 아니 올꼬. 이미 시각이 암만인데 ..."
  초조한 노모 손씨가 곧 떠나야 하리라는 아들 허준의 한손을 잡은 채 또 억눌린 소리를 냈다.
  '잠시라도 보곤 가야 하리 ... '
  노모의 앙상한 손등을 마주잡은 채 눈을 감은 허준이 속으로 뇌었다.
  아까부터 어디서 닭 우는 소리가 거푸 나고 있었다.
  아들을 만나 너를 믿고 떠난다는 한마디 당부의 말을 하고 가야 한다는 마음과 엇갈려 이대로 날이 밝도록 마냥 지체할 수 없다는 초조함 속에서 허준이 뇌었다.
  닭 우는 소리가 다시 났다.
  '이대로 가야 하리. 더 지체할 수 없은즉 ... '
  허준이 그렇게 자신을 재촉해 헤어져야 할 가족에게 시선을 들었을 때 문간을 박차고 뛰어든 발소리가 났다.
  달음박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소 행동거지가 침착한 아이였다. 그러나 허준은 곧 알았다. 그것이 아들의 기척임을 ...
  "아버님 돌아오셨사옵니까."
  소리친 건 과연 땀투성이가 되어 달려온 겸이였고 대답을 대신해 방문을 연 아내 앞에 반가움에 왈칵 눈물을 비치는 아들이 보였다.

    9
  "저흰 죽어도 살아도 모두 아버님과 함께 있는 것이 소원올시다. 할머님과도 어머님과도 되풀이 밤새 의논했사옵고 ..."
  '아직 어린 아이로다.'
  허준은 마음속에 신음하듯 그렇게 뇌었다.
  찾아오는 병자들에게 지극정성이요, 집안에서 조모와 세 어미에게 효성일 뿐 담박 거친 세상사에는 무방비의 아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내가 자식을 잘못 보았던가.'
  더러 제 여동생 숙영이에게 이러면 아니 되고 저건 저리 해라 타이를 제 보면 그 언동이 믿음직하다 여겼건만 ... 장차 생사를 기약할 수 없고 활로를 점칠 수 없는 난리의 와중에서 살아도 죽어도 함께 있자는 것은 사정일 수 있되 너무도 여린 논리다.
  "어찌할꼬 ..."
  아니 떠나면 아니 될 길이다. 내의원 의원으로서 몽진하는 임금을 뒤쫓아 호종한다 함은 더 달리 이의를 붙일 여지도 없는 절대절명의 길일터이다.
  '그러나!'
  "후살랑 걱정 마소서. 할머님과 어머님과 동생일랑 소자가 힘써 모시고 지킬 것이오니 아버님은 아버님이 가셔야 할 길을 떠나소서."
  그 대답을 기대하던 허준의 가슴속에 일순 찬바람이 일었다.
  세상사 험한 파도를 헤쳐본 일도 없다.
  철없는 어릴 적 가난한 부모 따라 굶주림과 헐벗음은 겪었으되 아비가 내의원 의원이 된 후 그 관급의 식량과 조석으로 찾아드는 환자들을 돌보는 속에 빈곤의 고통을 벗어난 뒤론 잠을 못 이루며 이 세상의 문제와 몸싸움한 적이 없는 아이.
  선비의 집안은 아니로되 읽은 책은 수신에 관한 것이요 때로 밤늦도록 제 방에 불이 켜져 있었던 건 의서의 글줄기에 혹해 있을 때였던가.
  그 아들이 이제 와서 옹골찬 결의를 할 줄 모른다 탓할 수만은 없되 이 비상한 상황에서 위기에 대처할 강단 있는 말을 못 듣는 건 서운했다.
  아비의 생사가 궁금하여 불타는 대궐 속을 뛰닫긴 해도 그것이 스무살 이 아들의 세상을 향한 용기와 행동의 한계였다는 생각도 ...
  "아버님!"
  하고 그 아들이 다시 결심을 채근하는 말을 꺼냈다.
  "우리도 피난을 서둘러야 합니다. 이곳도 이미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이옵고."
  "이곳도라니?"
  "오가며 들었사온데 해 떨어질 임시 하여 삼개, 서강 일대는 아예 무인지경이 되었다 합니다. 왜적이 강을 건너온다면 필시 그 길목이 이 어간이라 이 일대가 짓밟힐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올시다. 혹 그 사이 심중에 정해 두신 피난처가 어디이옵는지."
  "애빈 아직 너희의 피난처를 정하지 못했니라."
  "네? 하오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하옵니까?"
  "너는 생각해 보았느냐?"
  "소자가오니까 소자가 어찌 ..."
  "너 말고 그럼 집안에 누가 있더란 말이냐."
  "예?"
  "비록 함께 갈 순 없되 애비 없는 집안에 사내가 너뿐이다 여겼다면 네 나름대로 마땅히 식구들을 어찌 건사한다 궁량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거기까지 바라는 건 애비의 욕심이더냐."
  아들이 입을 다물었다.
  말은 낮았되 그건 장성한 후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들어보는 질책임을 안 것이다.
  노모도 침묵했다.
  아내와 딸도 침묵했다.
  그 노모는 보고 있었다. 아내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딸도 ... 그 허준이 이틀 사흘 눈을 붙이지 못한 시뻘건 눈속을. 그리고 불타는 대궐에서 달려나온 그 몇날 며칠을 갈아입지 못한 비와 흙탕물에 구겨진 옷을 갈아입을 염도 없이 꾸려놓은 피난짐도 보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던 그 절실한 모습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아내도 노모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충혈된 눈빛을 그제야 아들도 본 듯했다.
  "소자는 미처 모든 것 아버님이 작정하신다 여겼사옵고"
  "위인의 됨됨이가 그뿐이면 이제 와 탄식해 어쩌리."
  아비의 말이 비정하리만큼 냉랭했고 벌겋게 무안해진 겸이가 그러나 다시 물었다.
  "하온데 함께 가실 수 없다 하심은 무슨 말씀이시온지 "
  "애비는 곧 다시 떠나야 할 것인즉."
  "어디로오니까!"
  "몽진하오신 전하의 어가를 좇아."
  아들이 일순 침묵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온 말은 반항과 비난이 섞여 있었다.
  "우리를 모두 두고오니까?"
  노모 손씨의 얼굴이 사색이 되고 있었다. 겸이가 소리치듯 다시 물었다.
  "식구들을 이 사지에 두고 아버님 혼자만 떠나시오니까!"
  "함께 가기엔 이미 늦었다. 애비 또한 낙오한 처지인즉."
  노모 손씨가 애원하는 눈을 들었다.
  "애비야 그렇거든 ..."
  "어머님 말씀 아니하셔도 어머님 말씀 아옵니다. 허나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아니올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아버님 오시기 전까지 어머님과도 할머님과도 누누이 의논했사옵고 ... 모두 죽어도 살아도 아버님과 함께 있는 것이 소원올시다."
  "소원은 소원에 그칠 뿐 ... 난이 평정되기까지 할머님 모시고 식구들 건사할 일은 네가 맡아야 하리."
  "소자가 무슨 수로 ..."
  "나 또한 그 수는 모르니라.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달리 방처가 없은즉. 그리고 어머님 들으소서. 그리고 당신도 듣소."
  노모가 울음을 물었고 아내 이씨가 자꾸만 떨고 있는 딸의 손목을 잡았다.
  "세상이 평온하고 그런 태평성세에 관원이 하는 일은 쉬운 일올시다. 하나 관원인 자가 국난을 맞아 사사로운 정에 매여 직처를 벌릴 순 없사옵니다."
  노모가 울음을 삼키고 말했다.
  "그렇기로 이제 곧 왜적이 닥치고 너나없이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터에 네가 떠나면 ... 이 늙은 사람이야 어찌 되건간에 아이들하며 ..."
  "어머님, 때로 사내란 가족을 버리고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것이 무슨 길이오니까."
  "신하의 길이다."
  "...? ...!"
  " 그리고 도성 안에 왜적이 닥쳐 어떤 불측한 일이 내 집안에 들씌워진다 해도."
  허준이 스스로 격한 숨을 가라앉히고 말을 이었다.
  "그건 또 오늘 이 난리를 당한 이땅에 사는 모두의 운명일 뿐 ... 내 손으로 막을 수 있는 길이 아니옵니다."
  "그렇기로 아무리 그렇기로 ... 애비야."
  "충과 효는 겸한다 했사옵고 효보다 충이 앞선다 배웠습니다. 그건 문벌 있는 사대부들만의 덕목이 아니라 이 시국에 관원이 된 이 나라 모든 이의 행할 바 행동이옵니다. 어머님, 소자의 결심을 용서해 주소서."
  손씨가 울음을 터뜨렸고 숙영도 울음을 터뜨렸다.
  아내가 그 딸의 손을 다독거리고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하오면 언제 다시 돌아오실 ..."
  "기약 없소. 상감에서 돌아오실 제 나도 돌아올뿐!"
  "그리고 겸이는 들어라."
  "네 말대로 곧 적이 닥칠 곳이요, 이 고개는 서강서 남대문에 이르는 요로라 병화가 노리는 지역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 말고 가본 곳도 없고 달리 지적해 가랄 곳도 마련치 못했으나 대로가 있는 곳을 피해 은신하되 네가 조석으로 가족의 울타리가 돼야 하리."
  "제가 제 몸을 사리려는 게 아니오라 하오나 아버님 "
  "하오면."
  허준이 일어섰다. 그리고 깊이 고개 숙여 노모께 절을 드렸다.
  손씨가 그 아들 손을 잡고 흐느꼈다.
  "어찌 할꼬. 장차 어찌 할꼬 ..."
  마당을 나서는 허준에게 아이들이 쫓아나왔고 노모 손씨는 마루 끝에 주저앉아 내려오질 못했다. 그 시모를 부축한 아내를 허준은 문간에서 기다렸다.
  아내가 다가오자 그 눈물을 외면한 채 허준이 말했다.
  "어머닐 버리고 당신을 버리고 아이들도 버리고 가는 내 맘이 마냥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진 마오."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살 사람 살고 죽을 사람 죽는다는 그런 요행을 믿고 떠나는 게 아님도 ...".
  "아옵니다."
  "생각하면 당신도 반가의 딸 ... 관원이 어찌 처신해야 하고 사내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 함도 모를 리 없소."
  "당부하신 말씀도 모두 아옵고 오로지 부디 무사히 다시 만나 우리 식구 옛날처럼 살기를 비옵니다."
  허준이 그 아내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아내의 손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 아내의 체온이 아들에게 느낀 허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듯했다. 허준은 그 아내의 손을 놓고 대문을 나섰다.
  노모가 '애비야' 외치며 맨발로 마당에 내렸고 그 시모를 아내가 부축하는 걸 돌각담을 돌아서며 허준은 본 듯했다.
  겸이와 숙영이가 외쳐 부르는 소리가 따라오다가 주저앉는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단숨에 고갯마루에 오른 허준이 그제야 돌아본 집 쪽은 불빛 하나 인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허준은 고개 아래 미사가 자기의 짐을 지키고 기다리고 있는 자원사 절간 입구로 달렸다. 그건 불타는 도성을 피해 남산을 넘는 지름길 기슭이었다. 미사가 마주 달려오는 것이 보였고 그 자원사 숲속에서 끊임없이 목탁소리가 들리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동녘이 터오고 있었다.
  의서 짐을 진 허준과 미사가 걸음을 재촉해 전농리 밖 살곶이 석교를 지날 때 전방에 수많은 횃불을 든 거대한 기마군단이 치달려오고 있었다.
  언덕 밑에 몸을 던진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수백기의 말발굽소리가 천지를 덮듯 굉굉했다. 바라본 그 왜병들은 손에 손에 조총과 창검을 비껴든 것이 보였다. 그 일단의 살벌한 군마가 멀어가자 허준과 미사는 일로 북방을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이미 주위는 아침이었다.

    10
  어가가 도성을 떠난 지 이틀째 ... 하루 늦어 그 어가를 쫓는 허준은 양주 지나 광탄을 건넌 후 파주 경계에 들어서며 지금쯤 어가는 개성에 계시다고 보았다.
  한양 개성 간의 거리는 160여 리, 여기가 파주라면 이제 그 절반은 와서 개성은 80리 저쪽이다.
  짐을 지긴 하였되 더 하룻길이면 족할 터이다.
  동행인 여자의 걸음이 의외로 잽쌌다.
  오히려 미사는 대궐 안 왕비전의 붙박이 의녀였음에서 먼 거리 보행에 익숙해 있지 않을 터인데도 애써 허준에게 부담을 수지 않으려 작심했음인지 다섯 발 열 발 간격을 두고 열심히 뒤따르며 허준이 돌아볼 만큼 뒤처지지 않았다.
  걸음이 처지는 쪽은 허준 쪽이었다. 수시로 퍼붓던 장마비를 막고자 두겹 도롱이를 씌우고 진 의서며 여러 자꼬의 무게는 그 물먹은 도롱이의 무게가 아니랄지라도 애초부터 장정 한 사람 반 몫이 실하게 넘었다.
  나이 45세, 비록 젊은 나이라 여길 수 없어도 건강은 병이 오기 전에 스스로 지켜야 한다 믿어 남달리 섭생에 유념하였기에 또 젊은 날 지리산 골짜기를 약초를 찾아 7년 넘어 밤낮없이 산을 타던 체력을 바탕으로 아직은 강건하다 자부한 허준이었으나 버티는 힘과 달리는 힘은 달랐다.
  임금의 몽진과 가족과의 이별이 있기까지 나흘밤 사흘낮을 거의 뜬눈으로 지샌 터요, 요기다운 요기도 아니한 채 등에는 과다한 짐이 얽혀 지금 87리를 달려온 것이다.
  '하나 쉬어서는 안되지. 설핏 잠이 드는 날에는 쉬 일어나지 못할 것인즉.'
  무엇보다 임진나루로 뻗은 조선 제일의 국도로 치는 역로에 인적이 끊긴 사실이 허준의 가슴에 천근 같은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멀리 국경 의주까지 뻗은 그 역로의 좌우에는 10리마다에 이정표를 대신하는 사철 푸른 나무인 표수들이 심어져 있는데 국법이 그 훼손을 막고 관할 역참의 보호수로서 100년, 200년 묵은 거목들이라 수고로이 오가는 길손들의 쉼터가 되는 곳이요, 평화로운 시절에는 그늘에 쉬는 나그네의 목이나 시장기를 달래주는 들병장수들이 와글대는 곳이건만 지금은 귀신 떠난 서낭당처럼 적막할 뿐이었다.
  "왜병틀의 소행이 워낙 잔혹하다 소문이 퍼져 인근 동궈에 인적 하나 없사옵니다."
  다가든 미사가 허준의 지게 위에 씌운 도롱이를 벗겨 자기가 들며 마치 밀어처럼 속삭였다.
  그녀는 두려움이 없는 듯했다. 허준이와 함께라면 이대로 수백 리 수천리를 가도 지치지 않을 듯이 생기에 차 있었다.
  "힘이 들어도 임진나루를 건너고 나서 쉬어야 하리."
  "나루를 건너거든 우선 짐의 반턱이라도 나누어주소서."
  허준은 미사의 그 마음 씀씀이에 감사했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았다. 젊다 하되 여자다. 이 수삼 일 그녀가 겪은 불면과 주림은 절은 사내라 한들 견딜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비가 그친 사이사이 꼬박꼬박 도롱이를 벗겨 들며 허준이의 짐을 덜어주려는 정성은 또 아무에게나 쉬운 것은 아니리라 ... 하나 미사가 보이는 그 감미로운 긴장 못지 않게 그 미사로 인한 현실적인 책임감이 허준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서로가 자기 소임을 향해 가던 길에 만부득이 낙오하여 동행이 된 것이 아니다.
  몽진을 떠나던 전후의 군신간의 절망도 알고 혼란도 안다.
  장례원과 형조가 타오르는 건 자기 눈으로 본 바거니와 다시 더 그 성난 난민에 의해 경복궁이 타오르고 창덕궁, 창경궁이, 또 임금의 내탕고가 약탈당하고 역대 중요 문적을 쌓아둔 문무루, 홍문관, 춘추관이 그리고 또 임해군의 저택과 한성판윤 홍여순의 집 등이 모조리 방화된 것을 안 것은 아비를 찾아 궐내외를 뛰닫다 돌아온 아들 겸이를 통해서다.
  그 비상한 시국에 지켜야 할 처소를 떠나 자신에게 달려온 미사는 허준이란 자기를 향한 사랑의 행동이지 공사를 기준으로 추궁한다면 인허 없이 제자리를 떠난 죄목이 남을 뿐이다.
  '혼란 속에서 우연히 만나 내 행위를 돕고자 동행이 된 것일 뿐.'
  무사히 행재소에 당도하면 어의 앞에서 그리 발명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가 더구나 왕비전 젊은 의녀를 데리고 몇날 며칠을 함께 행동하며 나타날 때 말 많은 입들이 무슨 오해를 씌워올지 모를 일이었다.
  왕비전의 붙박이 의녀라면 궁녀에 다를 바 없다. 이젠 소식을 끊은 사람 ... 스승 유의태의 붕우로 사랑하는 궁녀 정씨를 데리고 도주한 뒤 문둥이들에 섞여 숨어 사는 안광익의 기걸찬 모습도 떠올랐다.
  반드시 타인의 경우가 생각나서만이 아니다.
  처자식을 사지에 두고 떠나온 자신의 신념이 속된 흥미거리로 오해받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떤 무리를 하여서라도 한시바삐 행재소에 닿아야 하리.'
  팅 빈 역로 위에 다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곧 미사가 다가들어 짐짝 위에 도롱이를 씌우고 허준의 이마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닦아주었다.
  체온에 말라가던 그녀의 삼회장 저고리도 새삼 다시 비에 젖기 시작했고 그 엷은 저고리 속에서 죄어 매기엔 너무도 풍만한 그녀의 희뿌연 가슴을 보며 허준은 눈을 감고 뜨지 못했다.
  다시 두 사람은 소낙비 속을 나아가기 시작했다.
  두 참을 더 쉬어 두 사람이 임진강 나루에 닿았을 때였다.
  강 건너에 2, 3천은 될 조선 군사들이 비에 젖은 기치들을 강변에 꽂고 저녁 짓는 연기도 여기저기 피어오르고 있었으나 배와 뗏목은 모두 건너 언덕에 끌어 매어놓은 채 고함쳐 건네달라 외쳐도 누구 하나 말대거리하는 이가 나서지 않았다. 겨우 나무그늘에 소피 보는 자를 발견하고 강변으로 뛰달아 내가 어느 부처의 누구며 여차여차하여 이제 당도했노라 거듭 외친 끝에 겨우 그자는 상류 쪽에 얕은 여울이 있다는 시늡을 한번 해보였을 뿐 더는 알은체 업이 강둑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짐짓 남녀의 행색이 피난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듯했고 추격해 오는 왜의 대군을 가로막은 군대로선 사사로이 배를 저어와 건네줄 선심은 없는 듯했다.
  한쪽 벼랑 위에 꽂은 수기가 팔도도원수 김명원의 것이었고 소피 보던 군졸이 손짓하던 상류 쪽에 일단의 군마가 뛰달아오고 있었으나 허준이 또 한번 강변에 소리치며 마주 달려가는 사이 건너 산 위로 치달아오르며 반대방향으로 사라져갔다.
  "배는 기어이 내어주지 않을 모양올시다."
  허준이 받쳐놓은 지게 곁으로 돌아왔을 때 미사가 위로하듯 조용한 말을 건넸다.
  강물은 활 두어 바탕의 거리로 퍼져 있었고 수시로 퍼붓는 장마비로 인해 생나무 따위가 함께 떠내려가는 창일한 흙탕물이었다.
  "헤엄칠 줄 알더냐?"
  강 건너 군사들을 더 이상 부를 것을 단념한 허준이 물었다.
  미사가 시선을 떨구었다.
  허준은 더 묻지 않았다. 우문이었다.
  미사 하나라면 업든 끼든 강을 건널 헤엄 실력이 있다. 하나 저 의서와 문진들은 물속을 건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준은 다시 강변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아 강물은 온통 끓어 넘치는 흙탕물의 형국일 뿐 어디가 얕은 여울일지 종잡을 길이 없었다.
  자꾸만 상류 쪽으로 달리는 허준을 쫓아 미사가 쫓아왔다.
  걸음을 세운 허준이 망연히 강물을 바라보다가 그 미사에게 말했다.
  "위쪽으로 더 가야 하리."
  "위쪽에 나루가 있사오니까?"
  "한가로이 배를 띄우는 나루는 없을 게다."
  "하오면?"
  "얕은 곳을 찾는 길뿐."
  "얕은 곳을?"
  "해가 떨어지면 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 이전에 인근 민가에라도 달려가 도끼를 빌어 생목이라도 잘라 떼를 만들어 오늘 안으로 건너야해."
  "오늘중으로 ..."
  "오늘중으로."
  허준은 지게를 버터 세운 뒤 하류 쪽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나면서 살곶이 다리 어간에서 보았던 그 왜의 기마떼가 그 길로 서울로 돌입했고 텅빈 서울을 발견한 뒤 되돌아 어가에의 추적을 시작한다면 강복 최초 최대의 저항선으로 이곳에 포진한 조선군과 왜는 일대 격전을 벌일 것은 필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 이전에!'
  짐을 진 허준의 충혈된 눈이 다시 강폭과 강물의 양상을 살피며 강둑도 끊어진 돌밭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상류로 상류로.

    [  16. 미 사 ]
    1
  그날 허준 들이 임진나루를 떠날 때를 끝으로 빗줄기는 더 쏟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상류 쪽 근 시오 리 어간에서도 도강할 얕은 여울을 찾지 못한 허준이 키가 넘는 왕갈대밭 속에 버려진 쪽배를 발견한 것은 그 드넓은 강변 일대에 설핏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시각이었다.
  "천우신조로다!"
  가파른 언덕빼기를 뛰어굴러 그것이 배임을 확인, 허준이 소리쳤고 뛰어올라 구르고 밀어보며 파선이 아님을 확인한 순간 허준은 다시 한번 같은 소리로 외쳤다.
  인가와도 꽤나 떨어진 이 황량한 강변 근처에 배 임자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유속이나 산형으로 보아 낚시터도 아닐 터이요 달려온 강을 사이에 끼고 이쪽 저쪽 산비탈에 천수답 몇 뙈기가 개간된 걸로 보아 아마도 인근 어느 가난한 농부가 농삿일로 똥장군이라도 싣고 오가는 배임이 틀림 없었다.
  과연 뱃전엔 그 냄새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배를 저을 줄 아시오니까?"
  언덕 위에서 굽어보던 미사가 소리쳤다.
  "내려오너라."
  허준이 대담 대신 다시 언덕배기를 뛰어오르며 외쳤다. .
  저을 줄 알다뿐이랴. 용천 바닷가 더러 술안주거리에 궁하면 어부들이 내린 뱃전에 숨어들어 친구 양태 들과 함께 고기 서리를 일삼고 들켰다하면 배를 저어 내빼고 선주와 어부가 뒤쫓아오면 바닷속에 뛰어들어 안주거리 고기 그물을 끌고 바닷속을 물개처럼 헤집고 다닌 망나니짓으로 어머니의 피눈물을 뽑던 자신 ...
  지게의 짐을 배에 실은 허준은 강물의 흐름에 배를 맡긴 채 익숙한 노질로 방향만 바러주며 다시 한번 뇌었다.
  '천우신조로다!'
  노에 찍히는 강바닥은 깊지 않았으나 불어난 강물로 물살은 세었다.
  일차 대려는 지점에서 밀려난 배를 보자 그 애쓰는 허준을 돕고자 미사가 뱃전에 팔을 뻗어 손으로 물살을 저었다.
  한가로우면 웃음이라도 나을 미사의 그 행동이었으나 어둠이 깔리는 뱃전에서 걷어올린 저고리 소매에서 뻗어나온 미사의 뽀얀 살빛 때문에 그리고 그 헌신의 모습 때문에 웃을 수도 없었다.
  두번째 시도에서 바위가 널부러진 모래톱에 댔을 전 이미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싸이고 있었다.
  지게에 짐을 옮긴 허준은 어둠에 겁을 먹고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미사와 함께 강 건너에서 한눈에 띌 바위틈에 배를 단단히 받쳤다.
  강 건너 배 임자가 배를 찾을 때 수고를 덜 하도록 배를 빌려 탄 고마움 때문이었다.
  다시 지게를 지고 언덕 위에 올랐으나 사방은 열 자 앞도 분간 못할 칠혹인데 종일 빗줄기를 쏟아붓고 간 길은 모두 미끄러웠다.
  "방각이 짐작되오니까?"
  몇 번씩 미끄러운 걸음을 딛던 미사가 허준의 곁에 바짝 따르며 물었다.
  "곧 알 수 있지 않으리."
  허준의 대답이 메말라 있었다. 별도 보이지 않는 하늘, 근처에는 논배미도 없는지 개구리소리도 없었다. 강줄기가 등뒤 남쪽이니 그 강줄기를 등지고 짐작되는 북쪽으로 그냥 나아갈 뿐이었다. 그 침묵 속으로 반 시각이나 걸었다 싶은데도 소로길도 논둑도 밭고랑도 나타나지 않았다.
  허준이 지게를 내려 다시 방각을 찾고자 어둠속을 살필 때였다.
  등뒤에서 미사의 침착한 음성이 들렸다.
  "다리도 쉬어야 하오나 잠시 요기도 해야 하옵니다."
  "요기를?"
  의외의 소리에 허준이 돌아보았다. 어둠속에서도 미사의 얼굴은 하얗게 빛나 보였고 좀 자랑을 담은 미소도 그 얼굴에 떠 있었다.
  "떠날 때 여축삼아 미숫가루를 얻어온 게 있사옵니다."
  "미숫가루?"
  "평소 소녀를 따르는 세수간 나인이 있었사온데 먼길 떠나자면 배고플 적도 있을 것이라며 따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미사가 어딜 가나 나이 든 이들에게 귀염을 받고 수하 사람에게 따름을 받는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때에 대비한 것이 헤어진 나인의 우정이든 미사 그녀의 마음 씀씀이든 요기를 하자는 말 한마디 앞에 허준의 속은 걷잡을 수 없는 주림으로 두 다리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허준의 눈길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고 있자 미사는 다시 기쁜 낯으로 앞의 말에 부연했다.
  "세수간이라 하오면 두 분 마마의 세수물과 목욕물을 대령하는 소임이온데 그 순금이란 아이가 내소주방(임금과 왕비의 야찬과 간식 전담)에 동무가 있어 얻은 것을 다시 제게 나누어 주었사와 많지는 않사와도 하루이틀 급한 허기는 면할 듯싶습니다."
  "양은 여하간에 이런 때 입맛이라도 다신다면 능히 새 기운에 나지 않으리. 그리고 나야 사내이니 웬만한 일 참을 수 있되 ..."
  "아니옵니다. 소녀는 그냥 빈몸으로 걸었을 뿐이오나 ... 그 많은 짐을 지시고. 하오나 너무 어두옵고 부어 마실 반한 물이 어디에 있을지"
  "이 장마 끝에 마실 물이야 없으리. 기다리거라, 곧 찾아낼 것인즉."
  몇 발 어둠속을 더듬어 나간 허준의 뒤에서 미사가 소리쳤다. 떠난 뒤 처음으로 들어보는 밝은 음성이었다.
  "너무 멀리 가지 마소서."
  계속 어둠속을 더듬어 나가는 허준의 뒤에서 문득 미사의 작은 비명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냐?"
  허준이 어둠속에 외치자,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미사의 부끄러움을 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준이 돌아서 가자 따라오다가 넘어진 미사가 일어서고 있었다.
  "괜치 않으냐?"
  "예, 풀섶에 미끄러졌을 뿐이옵니다. 너무 어두워 혼자 있기 무섬증이 나서 ... 뒤따라가려다 ..."
  "잡아라, 손."
  허준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어둠속에서 미사의 눈빛이 떠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손은 곧 허준의 손을 마주 잡아왔다.
  "추우냐?"
  물기 밴 그녀의 손을 쥔 채 허준이 물었다.
  허준의 걸음 따라 따라오며 갑자기 미사의 목소리가 한결 작았다.
  "아니옵니다."
  "곧 무엇이 보일 것이다. 길이 됐든 마실 물이 됐든 ..."
  "... 예!"
  "아무리 난리 중이기로 이토록 사방 불빛 하나 없다니 ..."
  허준의 손에 잡힌 미사의 손이 문득 고물거렸다. 넘어졌다 일어나며 미처 털지 않은 풀순 하나가 그대로 두 사람의 손 속에 잡혀 있었다.
  "나보담도 네가 쉬어야 하리. 젖은 옷도 말려야 할 게고 ..."
  다소곳이 따라올 뿐 미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이 어둠속에 익어왔고 눈앞의 완만한 비탈은 뽕밭이었다.
  "뽕밭인 걸 보니 근처에 인가가 있어."
  말끝에 허준이 미사의 손을 놓으려 했으나 손이 놓아지지 않았다. 쥐고 있는 허준의 손 못지않게 미사의 손이 허준의 손을 잡고 있었고 어느덧 미사의 그 손은 불을 쬔 손인 양 뜨거웠다.
  '이 아이가?!'
  물론 아이가 아닐 터이다. 혜민서 그 안팎 넓은 마당들, 가랑잎부터 쓰는 열서넛 어린 나이 적부터 보아온 그녀로되 스물일여덟에도 아직 소녀의 수줍음을 지닌 그녀의 뜨거운 손은 허준에게 당혹스러웠다.
  방자히 어깨를 기대오는 행동은 없어도 온기가 느껴지는 미사의 젓가슴이 허준의 팔굽에 몇 번 스쳤다.
  놓아야 할지 뿌리쳐야 할지 주저하는 허준의 손을 이젠 미사가 분명히 잡고 있었고 그 어둠속 시선을 내리깐 것은 이대로 허준의 손을 잡고 천리 만리 걸어가리라는 의지로도 보였다.
  그 두 사람의 손이 떨어진 건 거의 동시였다.
  한 마장쯤 전방에서 치닫는 말발굽소리가 들린 것이다.
  바라본 멀리 그 전방엔 4, 5기 각자 홰를 든 군졸들이 산비탈을 돌아와 다시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나가고 있었다.
  "필시 저쪽이 북쪽일 것이다."
  허준이 외쳤고 미사도 막 꿈에서 깨어나듯 사라져가는 불빛을 보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은 다시 또 다른 불빛을 보았다.
  그 불빛은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역시 횃불이긴 했으나 그 불빛의 주위에는 달구치를 끄는 덜커덩이는 소리와 말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사람이다."
  허준은 10여 보 달려 자세를 낮추고 그 횃불과 달구지 쪽을 보았다. 어둠속에 떠오르는 것은 남부여대 떼를 지어 몰려가는 피난민들이었다. 아이들의 칭얼대는 울음소리도 들렸다.
  이제야 달려와 곁에 서는 미사에게 허준이 소리쳤다.
  "저기에 길이 있다."
  시장기도 날아가고 없었다.
  앞서 산등성이를 넘어간 말들이 달려간 곳은 역로요, 피난민들이 떼지어 몰려간 눈앞은 그 역로에 병행하여 북으로 뻗은 소로길인 듯했다.
  "예 있어라."
  허준이 미사에게 이르고 짐을 둔 쪽으로 뛰었다.
  강을 건너 멀리 오진 아니했다. 그러나 북으로 뻗은 노상에 떼지은 피난민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구원이었다. 아직 자기들도 어가로부터 멀리 처지지 아니했다는 희망이 솟았다.
  지게의 멜빵을 패는데 뒤따라 달려온 미사가 허리를 드는 허준의 뒤에서 짐을 받치며 거들었다. 허준이 새 기운을 내어 걷기 시작했으나 그 뒤를 따라가는 미사의 얼굴은 행복을 놓친 희망이 떠 있었다.

    2
  허준은 지금 자신의 체력이 감당의 한계에 이르고 있구나 느꼈다.
  횃불과 달구지를 앞세운 피난민들로 보이는 일행의 뒷광경은 따라붙으려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 활 한 바탕 거리로 떨어진 그 간격이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 졸며 걷고 있었다. 언덕 모퉁이를 돌아가기도 하고 문득 숲 속에 가려지기도 하는 일단의 횃불들이 꺼졌다 보였다 하는 걸 보며 두 다리만 앞으로 내딛고 있었다.
  어느덧 앞장선 것은 미사였고 그 미사의 등에 몇 번인가 허준은 이마를 박으며 눈을 뜨곤 했으나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의지에도 불구, 눈두덩은 납땜이나 되듯 다시 감기곤 했다.
  "외길인 듯하오니 잠시 쉬어간들 길을 잃을 염려는 없사옵니다."
  미사가 그렇게 여러 번 일깨우며 쉬어갈 것을 권했으나 허준은 걸음만은 세우려 하지 않았다.
  '한 시각이라도 빨리 행재소에 닿아야 하리.'
  자꾸만 뇌리에 떠오르는 불길한 추측, 어제 새벽 ... 살곶이다리 밖에서 본 그 살벌한 무리들 ... 손에 손에 조총을 난방하고 왜도를 휘두르며 한양으로 치닫던 그 왜의 기마군단이 임금이 떠난 도성을 발견하고 그 길로 뒤돌아 추격하기 시작한다면 등뒤의 임진강까지는 불과 한 나절도 못될 것이요, 그 임진강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 휘하의 군사가 아차 무너지는 날, 지금쯤 개성에 겝실 어가는 다시 북행을 서둘러 자기와의 거리는 더더욱 멀어지고 말리라.
  철퍽 또 한번 진창길에 빠지는 허준을 보며 미사가 그 팔을 잡아주며 말했다.
  "길이 한참 진흙밭올시다. 발 밑을 조심하소서."
  '이 여자가 나를 도와주고 있어 ... '
  함께 가면 부담이 되리라 여긴 떠나기 전의 판단은 역전되어 있었다.
  이렇게 부축해주는 그녀가 곁에 없었다면 지금쯤 자기는 어느 길바닥엔가 죽음과 같은 깊은 잠으로 쓰러져 있을 것이다.
  혜민서에서의 인연 뒤 자신은 궐내의 내의로, 그녀는 중전 의인왕후의 처소로 헤어지고 나서는 같은 대궐 안이라 할지라도 서로 얼굴을 마주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궐 안에서도 이름 그대로 구중궁궐 첩첩한 지밀인 왕비전이 그녀의 근무지였고 일변 허준은 남들이 삼살방에 빗대어 삼살방 주인이라 부르는 학의의 소임을 맡아 내치원 고방에 틀어박혀 고금 의서에 망라된 각종 초근목피를 생성지방별로 분류하고 채취월별로 나누어 그것들을 음건하고 폭건(햇살에 쬐어 말리는 것)하는 일과 다시 또 이를 약연에 갈아 산환으로 만들어 먹는 경우와 열탕으로 우려낸 약효의 차이 그리고 이를 남녀별, 연령별로 먹었을 때의 변화 등을 측정하는 따위와 사랑니 하나도 눈금에 오르는 약저울과 씨름하는 등이 일과였다.
  게다 잦은 타도 출행이요, 돌아와선 연구에 골물, 대궐 아름다운 꽃밭에 어울리는 생활과는 동떨어진 나날들이 길었다.
  그리고 허준이 출행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찾아가는 곳이 있었으니 그건 몸이 아파도 일체 다른 이에게는 내색하지 않고 있다가 허준이 나타나서야 어디가 아프다, 그 동안 글을 얼마만큼 읽었노라며 삼촌처럼 따르는 광해군에 대한 문안이었다.
  그러나 그런 왕자와의 격의 없는 사랑은 허준에게 더 많은 적이 생기게 했고 그 미움의 화살들은 허준과 미사가 치정 잔계라는 소문으로 번졌다.
  허준은 상대하지 않았다. 허준을 가까이 사귀는 사람들도 일소의 가치로도 여기지 않았다.
  정작 그 소문을 그럴싸 번지게 한 건 허준을 향한 미사의 순정이었다. 그녀가 왕비전에 소용되는 약을 타러 내국에 나타날 적이면 내곽 담당 이명원에게 으레 허준의 근황을 물었다. 그건 허준과 이명원의 형제와 같은 우정을 미사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미사의 모습은 내국 일을 돕는 의녀들의 입을 통하여 엉뚱하게 확대되어 내의원 전체에 번졌다.
  그리고 허준은 소문이 어쩌고 하는 것은 자기를 겨냥한 것이 아니요, 차라리 미사의 미모가 유죄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태깔은 어릴 적 그녀가 몸담았던 혜민서 사내들이나 직책을 대궐 안으로 옮겨서는 그 대궐 안 그녀의 행동반경 속에 출몰하는 사내들에게는 늘 군침 도는 대상이었다.
  '두고 보자 이년!'
  불러 대답소리조차 못 들은 사내들은 제 마누라보다 더 예쁜 계집을 기어이 한번 꺾어볼 양으로 턱도 없이 침을 튀겼다.
  -지난 칠중 전가 세답방 뒷숲에서 웬 늙은 내시놈에 안겨 마구 희롱하는 꼴을 본 사람이 있네. 이 궐내에 돈냥깨나 모은 건 내시 뿐 더 있나.
  -도톰한 입술이며 함초롬히 내리간 속눈썹이네, 게다 잘록한 허리는 아예 태를 앉힐 정숙과는 애초부터 모양새가 다를뿐더러 게다 검은 윤기 도는 살갖하며가 일부종사는 애시당초 그른 년이고 유부남이건 뭐건 제가 눈독 들인 사내만 골라 놀아나는 색살 낀 계집이 바로 저런 년이란 말일세.
  소문의 표적이 미사면 허준의 이름은 절로 들먹여졌다.
  -내가 사내로 태어났으면 저 재주 있는 사내에게 손목이라도 잡혀보는 것을.
  -상사병에 손목이나 잡혀갖구 심에 찰까?
  -어린 년이 못할 말도 없네. 까르르.
  -어린 년은 왜 어린 년이유. 이래 뵈두 미사년보다 두 살이나 위유. 까르르.
  -미사 고년이 달없는 밥마다 삼살방 주인한테 달려간다며?
  -아서라, 그 말 다 헛소문이고 못 오를 나무 쳐다보도 말랬다고 미사 같은 인물도 소 닭보듯 하는데 이 중엔 허의원께 손잡힐 년은 하나도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오고 소문이 한두 해 났냐고. 그리고 사내가 지집 인물 뜯어먹고 사나. 두고 보라지.
  그러나 정작 그 허준과 미사를 더 큰 의혹 속에 빠뜨린 사건은 그 뒤에 있었다.
  당시 최고의 맥서로 꼽히던 고양생의 찬도맥이 내용에 오류가 많고 해설이 잡스럽다 진언한 후 스스로 떠맡아 교정을 가한 찬도방론맥결집성 4권을 완성하자 그 인체의 맥도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내의원을 발칵 뒤집었는데 그 쾌거가 있기까지 연일 내의원 직숙방에서 몰두하는 그 허준에게 제조의 지시가 없었음에도 자청하여 밤참 수발을 든 미사를 놓고 그날 허준의 방에 몇 번이나 불이 꺼졌느니 켜졌느니로 추잡한 소문이 돌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린 미사에게 허준이 웃으며 달랬다.
  "소문은 삭정이불과 같은 게다, 건드리면 더 커지는. 울 일 아니니 너 또한 앞으로 함부로 내 방에 드나들지 말고 오해의 근원을 끊어라."
  "의녀가 한 직처의 의원을 돕는 게 무에 잘못된 일이옵니까."
  그러나 그 미사도 곧 중궁전 붙박이 의녀로 뽑혀나가고 허준 또한 북은 백두산 남으로는 제주 한라산에 이르는 잦고 오랜 출행이 잇따라 두 사람의 소문들은 제풀에 수그러들고 말았다.
  그뒤 허준이 교정했던 찬도방론맥결집성이 의과 취재를 위한 기본 출제서로 정식 채택되는 영광이 내렸을 때 왕 임어하의 출연이 끝나고 내의원 의원들만의 잔치로 연장되자 지난날 미사의 노고를 상기한 허준이 미사를 불렀으나 그녀는 그날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나긴 했었으나 기실 그녀는 내의원 입구에서부터 둘러싸고 길을 막는 의녀들의 온갖 잡스런 야유 앞에 허준이 있는 내의원 취국정 연못까진 가지도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되돌아갔음을 다음날 허준이 들었다.
  그날 임금이 따로 내려준 어사주와 사찬을 들고 집에 돌아가자 가족들과 오늘을 자축하는 자리에서 지난날 그 미사의 수고를 아내에게 얘기했고 그 미사에게 감사한 아내 이씨는 미사에게 걸맞을 선물 하나를 꾸리어 며칠 후 남편 허준을 시켜 전했던 것이다.
  이 소문 앞에서 또 한번 두 사람이 입초시에 올랐으나 그건 그간에 있었던 두 사람을 두고 퍼지던 추잡한 소문을 걷어낸 마지막 아름다운 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문이 사라졌다 하여 허준이 미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바꾼 것은 아니었다.
  어떤 소문이 있었건 허준에게 있어 그 미사는 내의원의 한 식구요, 특히 자기 일을 도우려 애쓴 고마운 여자 그 이상의 기억을 지닌 주인공은 아니었기에 ...
  그런데 그 오랜 세월이 가로지른 지금 예기치 않은 전란이 닥치고 장차 너나없이 생사를 가늠할 길 없는 혼란 속에서 이제 새삼 처소를 버리고 자기를 향해 달려와 기어코 자기를 따라오겠노란 막무가내의 미사의 고집은 허준에게는 새삼스러운 당혹이었다.
  만일 그녀의 행동이 기실 돌연한 행위가 아니요, 허준 자기를 연모의 대상으로 삼아 14, 5년 일편담심으로 불태워온 사랑의 결단이라 할 때 그 미사는 지금 자기의 등에 진 무거운 짐보따리만큼이나 또 하나 주체 못할 짐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사지에 아내를 두고 떠나온 자신이다.
  아내뿐이랴. 아들도 딸도 노모도 남겨둔 채 호종의 의무를 다하고자 임금을 좇고 있는 자기나 세상의 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미사와 단 둘이 이 어둠속을 가고 있다는 사실은 불륜의 눈으로 보자면 변명의 여지도 없을 위험한 동행이었다. 더구나 어가를 따라가고는 있되 자신은 이번 길이 상사로부터 정식 인허받은 행동이 아닌 오히려 어의 양예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한 단독 자의의 행동이요, 미사 또한 모시고 가야 할 왕비의 행차에서 이탈해 온 가증스런 행동이라 지탄받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몸이 아닌가.

  [  뒷이야기 ]
  이 소설은 독자 여러분에서 이미 읽은 바처럼, 임진왜란을 당해 선조가 몽진을 떠난 뒤, 허준이 그 환난중에도 "동의보감"의 자료묶음을 둘러메고 선조의 일행을 뒤쫓아가고, 기어이 동행을 자청한 의녀 미사가 그 참담한 둘만의 피난길에서 그간 사무친 모정을 이슬처럼 애잔하게 내비치는 중에 중단되고 만다. "일요건강"과 "주간부산"에 1984년 11월 11일부터 1988년 2월 14일까지 3년여에 걸쳐 연재되던 도중, 작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그리 된 것이다.
  이은성씨는 자택에서 집필중 지병인 심장병으로 쓰러져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 한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깨어나지 못한 채 51세의 한창 나이로 1985년 1월 30일 상오 9시에 별세했다.
  작가는 생전에 이 책의 각권을 춘하추동으로 이름 붙이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동'편 한 권 분랑의 얘기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작품은 1777년 MBC TV의 일일연속극으로 방영되었던 "집념"을 소설화한 것인데 연속극으로서도 소설로서도 끝내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TV쪽에서는 비록 방영은 되지 못했으나 허준이 끝내 "동의보감"을 완성시키기까지 10회 가까운 대본이 더 씌어졌고 그 대본에 잇따라 다시 야인으로 돌아간 허준이 펼치는 의성의 세계가 작가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작가가 못다 쓴 이후의 이야기를 대략 밝혀보면 이렇다.
 
  허준과 미사는 천신만고 끝에 선조가 먼저 피난가 있던 개성에 무사히 당도하고 이후 의주까지 호종한다. 허준은 전란중에 임금을 지성으로 받들고 전염병을 구완한 공을 인정받아 마침내 정3품 통훈대부 어의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새 어의로서 선조께 올리는 허준의 첫 시탕은 선조가 일찍이 먹어본 적이 없는 떫고 쓴 것이었다.
  그 몇 해 뒤 정유재란이 터져 왜군이 다시 한양성 지척에까지 이르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지자 허다한 고관대작들과 태의 양예수, 그리고 스승의 은혜를 못 잊어 허준이 특별히 자신의 보좌의관으로 지명한 유도지마저 체통을 버리고 도망쳐버린다. 그러나 허준은 몽진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고민하는 선조를 모시고 끝까지 도성을 지킨다. 그리하여 허준은 왜적이 패퇴해서 물러간 뒤 한 번 더 두 단계를 승차, 정승 반열인 양평군 정 1품 보국숭록대부에까지 이르고, 그 부인도 숙부인에서 정경부인의 칭호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대감'으로 불리는 허준의 누옥에는 여전히 가난한 병자만 득실거릴 뿐, 허준에겐 변변한 양반 갓 하나 가마 하나 없다.
  이 무렵, 정유재란이 끝난 뒤 조정은 당쟁으로 더욱 살벌해지고 허준도 이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성대감이 위독하여 야밤중에 허준을 급히 부르는데, 성대감의 반대세력들이 먼저 허준의 집에 당도하여 그가 사병에 들었는가 알아낼 것과 절대 살리지 말 것을 엄중히 당부하고 위협한다.
  그러나 허준은, 의원은 병만 고칠 뿐, 그가 누구인지는 알 바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성대감이 보낸 가마를 탄다. 허준을 믿지 못한 성대감 식솔들이 탕제를 검수, 극약인 비상이 나오자, 허준을 죽여버릴 듯이 덤비지만, 성대감은 대인다운 신뢰로 그 비상을 마셨고 한때 혼절했던 성대감은 며칠 뒤 잠에서 깨어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게 된다.
  두 번의 전란을 겪었지만 조정의 당쟁은 끊일 줄을 모르고 마침내 다음 보위를 둘러싼 절대절명의 권력투쟁이 대궐 안에서부터 벌어지는데, 선조가 다시 새 왕비를 맞아들일 공론을 벌이는 듯하자 이미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 측에서는 광해군 자신이 그와의 오랫동안 말벗이요 지기였던 허준에게 마침 대비전의 시탕을 돌보는 미사를 시켜 돌아가는 분위기를 염탐해줄 것을 세자빈과 함께 동궁 처소에서, 종내엔 허준의 집에까지 몸소 찾아와 간청한다. 허준은 의원과 의녀는 병 이외의 일은 알 수 없노라는 한마디로 거절한다. 이에 격노한 광해군은 허준에게 의절을 통고하지만 허준은 자신을 벌할 수 있는 것은 하늘뿐임을 믿어 태산처럼 동요하지 않는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허준은 다시 숭록대부가 면탈돼 종3품으로 강등되고 의녀 미사를 혜민원으로 보내 거리를 두면서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시켜 그녀를 시집 보낼 궁리를 하지만 미사는 허준을 향한 일념으로 추호의 흔들림이 없다.
  마침내 선조가 승하하고 모든 작록을 면탈당한 채 귀양길을 떠나게 된 허준은, 오직 허준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돕는 것을 생애의 보람으로 여기게 된 미사와 삼적대사, 이공기, 유도지 등 숙세의 가연들과 함께 귀양길을 떠나며 병마를 퇴치하고 의서를 찬술하는 데 함께 나서 귀양살이 2년 동안 마침내 "동의보감"을 완결한다.
  귀양살이가 끝나고 복권되지만 허준은 조정의 부름을 마다하고 그때부터 모든 속박에서부터 해방되어 오직 언젠가 닥쳐올 죽음만을 직시한 채 병과 약을 찾아 조선 팔도를 헤매는데 상권에 나왔던 괴승 안광익과 삼적대사의 천형의 자식, 여인들도 허준 일행과 다시 합세한다. 그리하여 삼남에 창궐한 혹사병에 시달리는 무지렁이 백성을 구완하다 허준 자신도 병에 걸려 성스러운 최후를 맞는다.

    [  발문 ]
    내가 아는 이은성 .
  이진섭(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
  나는 한때, 대저 글이란 '코딱지 같은 것이라고 치부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숨을 쉬고 뱉을 때, 대기 속의 먼지와 허파 속의 열기가 맞닥뜨려서 딱지를 엉겨붙게 하듯이, 글이란 대체로 우주에 미만해 있는 정신의 바다에 떠다니던 몇 톨의 티끌이 호흡을 통해 내 뇌수의 한 자락에 끼이게 된 것을 종이폭에 어기지게 긁어놓은 것쯤으로 생각했다.
  말은, 숨결과 함께 들이마실 수도, 흘려내버릴 수도 있는 콧물처럼, 유기체의 몸체에서 떨어져나오기 전, 생명현상의 자연스런 한가닥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지만, 글이란 아무래도 딱지처럼 이미 토막치고 잘려버린 정신의 때요, 비듬 같은 것이라는 사념에 사로잡혀 괜히 혼자 역해 있곤 했던 것이다.
  그 때, 비듬, 딱지를 누룽지 긁듯이 긁어모아 그럴듯이 장정하고 검인 찍어 '내 글' '내 말씀'입네 산지사방 외고 다니면서 사기치고 장사하는 ... 그래서 그 흩날리는 비듬가루 때문에 온 세상 천지의 뭇 생령들이 얼마나 얼이 뽑히고 주머니를 털렸을까. 나 혼자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1975년 초여름께였을까, 유신이 선포되고 3, 4년이 지나면서 연이어 긴급조치가 발동되어 세상의 모든 마이크 잡은 목소리는 한 가락으로 통일되고, 대판 인쇄물들은 한가닥으로 정제되어 왕왕 장구치고 북칠 무렵, 당시 톱니바퀴 돌리는 듯한 관제음향은 물론이려니와 여기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외마디 소리 또한 틀어막힌 비명처럼 귀청을 찢어대는데다가 일부 상업성까지 가미된 매명플레이가지 이 판국에 은근슬쩍 끼여들기도해서, 소위 언론계의 한쪽 귀퉁이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나로서는 더 더욱 '코딱지 글줄론'이나 웅얼대면서 역시 비듬가루나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초여름에 나는 이은성을 처음 만났다. 아니 내가 만난 것은 '유의태'였다. 어느날 밤 9시 뉴스가 끝난 뒤 좀체 거들떠보지 않던 TV를 그냥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데 거기에 한 인간의 모습, 세상의 그 어떤 명리에도 흔들리지 않는, 오로지 '생명에만 생명을 바치는' 한 인간의 모습이 어줍잖은 TV연속극에서 비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방영이 시작되고 한 달포쯤 흘렀을까말까 한 어중간한 시기에 제목도 뭔지 모른 채, 얘기가 지금껏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도 도통 알 바 없이, 그저 무심결에 멍하니 TV를 보다가 나는 유의태의 서릿발 같은 결기 서린 얼굴과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날 이후 근 1년 나는 좋아하던 바둑이나 술도 가급적 멀리하고 귀가를 서둘렀다. 시간이 닿지 않을 때는 다방에서나 주막에서나 기원에서나 막무가내로 MBC TV를 틀어줄 것을 사정했다.
  실례된 얘기지만 나는 그 이전 그 어떤 TV극도 사흘 이상 계속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생전 처음 보는 TV연속극이었다. 일찍이 그 어떤 국내외 명작소설이나 강연이나 글줄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충격'이 뱃속에서, 잔등에서, 콧날에서, 눈시울에서 펑펑 나를 때리는 듯했다. 철든 이후 때때로 후미진 절간이나 돌아다니고 함석헌 선생님께 '노, 장' 글줄이나 몇 해 읽었다고 '인위적인 것' '작위적인 것' '개별적인 것' '분별심' '일체의 명과 사'를 이 세상 모든 갈등과 사악의 뿌리로 단정, 면전에 펼쳐진 모든 글줄에 코방귀를 퉁퉁 뀌어대던 내 콧방울이, 시큰하게 툭 터지는 감동이었다.
  코딱지나 후비며 비몽사몽간을 헤매던 나에게 '유의태와 허준'은 벽력처럼 내리치는 '주장자'며 '할'이었다.
  '유의태와 허준'이라는 세상에 둘도 없을 듯한 사제상을 빛은 도공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나는 난데없이 소년처럼 들떠버렸다. 그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나는 MBC로 전화를 걸어 옛 동료 중의 하나에게 "집념"의 작가에 대해 수소문을 했고 어렵잖게 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황감하게도 그는 내가 몸담고 있는 "세대"지 앞 다방까지 찾아와 주었고, 나는 만나자마자 내 신앙고백을 토해낸 뒤 수필 한 편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후 한 달이면 두세 번 소주잔을 앞에 놓고 만나거나 '귀빠진 날' 서로 불러주는 피차 몇 안되는 친구 사이로 발전돼갔다. 마침 그의 집은 녹번동과 신사동을 오갔고, 나는 남가좌동과 홍은동을 맴돌던 때여서 일요일 같은 날 불쑥 찾아가든지, 시내에서 만나 몇 순배 돌면서 귀가하기에는 한결 편한 점도 있었다.
  아마 두 번쯤 만나면서부터 나는 그에게 TV극 "집념"을 소설화해보라고 권유했던 것 같고 만남이 잦아지면서부터는 아예 강권하다시피 했다. 그것은 이은성 한 개인의 영예나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억지로 쥐어짜는 코딱지보다 못한 글과 글장사치들의 발호로 헝클어지고 피폐해진 이 나라 심성의 일대 쇄신을 위해서도 그가 그리는 장엄한 인간상이 활자화되어야 한다고 믿은 까닭이었다. 나의 활자에 대한 타기와 냉소가 "집념"을 보면서, 그리고 인간 이은성을 만나면서 '활자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어느새 바뀌어졌다.
  일일연속극 "집념"은 1백36회나 롱런을 했지만 끝내 그가 그리던 대미는 보지 못하고 중도하차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드디어 허준이 어의까지 올라간 뒤 타들어가는 촛불 아래서 쫓기는 듯 신들린 듯 "동의 보감"을 집필하는 만년의 모습이 끝나갈 종막 몇회분부터 계속 시그널 화면으로 비치는 중에도 막상 본화면에서는 거기까지 얘기가 진행되지 못하고 황급히 마무리된 기억이 새롭다.
  당시 담당 프로듀서였던 표재순 씨의 회고에 의하면 이은성의 "집념"이 30회 가량 방영되었을 무렵부터 경쟁 방송국과의 시청률 운운하는 얘기와 더불어 중도폐기의 압력이 위로부터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압력을 피해나가는 방편 겸 생활정보를 드라마 속에 넣는다는 의미로 한방의 단방처방을 줄거리에 맞추어 삽입시켰는데 이것이 중노년 층의 호응을 얻은 덕분에 그나마 연명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당시 나는 그가 그리는 어기찬-시리에도, 왕명에도, 신분에도, 정분에도 한눈팔지 않고 그게 누구의 병이든 오로지 병 낫우는 스스로의 직분-천분에만 온 정성을 바치는 어기찬 한 인간상을 비록 TV화면을 통해서나마 대하면서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천, 지, 인' 합일사상을 구체적인 인간의 몸을 통해 표출시키는 동의의 진득한 깊이에 흥건히 취해 "집념"의 향후 전개를 두고 나름대로의 비판과 아이디어를 주고받던 추억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는 당시 허준의 일대기를 드라마화하면서 경희대학교를 비롯, 부산, 대구의 한의, 약종상 들과 허씨 종가 등을 무수히 쫓아다녔는데 드라마를 마칠 때쯤에는 웬만한 침구사 이상의 견식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드라마에 자연스레 녹아나오자 한의와 한약건재상측에서 엄청난 관심과 호의를 보여오기도 했다. 당시 직장을 쫓겨다니던 불안한 상황에서 사설 침구강의실을 기웃거리던 나도 "집념"을 보기 시작하고 이은성과 교분을 가지면서 새삼 "동의보감"을 한 질 구해 읽으며, 또 이전에 읽은 "황제내경"의 한방 지식을 가지고 둘이서 아마추어 풋이론을 논한 것도 지금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돼버렸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소설 동의보감" 상, 중 두 권을 다시 읽으며 나는 마치 '내 작품' 같은 착각과 애착에 젖는다. 이 작품에 내 아이디어 한톨 내 땀 한방을 들어간 적은 없지만, 내 숨결, 내 소망은 몇 오라기나마 배어들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이은성의 소설에 내 인생을 걸어본 적도 있고, 둘이서 그런 공동의 인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 바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집념"의 소설화이며 출간이었다. 그제나 이제나 별로 알아주지 않던 드라마작가이며 기자였던 우리는 서로가 쓴 글줄들을 용케도 찾아 보아주면서 더불어 걱정하고 분노하면서, 위안과 격려를 주고받았다고나 할까.
  그의 "집념"이 중도하차하고 난 뒤 나는 어떤 출판사의 편집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잡자마자 나는 그 출판사에서 두어 해 동안 이미 출간한 서적들 가운데서 못마땅한 것들은 모조리 폐기처분한 뒤, 내가 새로 기획한 첫번째 작품이 바로 이은성의 소설 '집념'이었다. 드라마가 종영되고 얼마 안됐을 때 나는 20만 원의 계약금을 그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 1년이 가까워오도록 그는 한줄의 소설도 쓰지를 못했고 그 출판사는 종내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다시 직장을 옮길 수밖에 없었고 이은성은 내가 자리를 비웠을 때 새 직장으로 나를 찾아와 먼젓번 계약금 20만 원을 놓고 갔다. 그 돈 20만 원을 이은성에게 금새 되돌려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얼마 뒤 새 직장에서 다시 '1백만 원'을 마련, 정식계약서와 함께 건네주고 그 회사 총수와 함께 수 차례 만나면서 "집념"의 소설화를 밀어대고 추궁하고 했지만, 몇년간 그는 끝내 소설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지 못한 채 계약금을 반환하였고, 나는 1984년 여름 언론계로 다시 돌아왔다. 그 계약금 1백만 원을 두번째로 다시 돌려받은 것 또한 나에게 여지껏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회사에서의 반환 성화가 드세기는 했지만, 왜 내가 나 혼자 그 정도는 끝까지 감당할 옹찬 뱃심이 없었는지 여태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그와 나는 이런 치사한 계약관계를 다 털어버리고 난 뒤 오히려 "집념"의 소설화와 간행문제를 단둘이만이 기어이 해낼 숙원사업으로 거듭 다짐하기도 했다.
  드라마가 발표되고 그 이듬해 영화로 다시 한번 리바이벌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집념' 소설은 근 10년 가까운 되새김질 끝에 1984년 11월 11일부터 부산일보에서 내는 "일요건강"(그후 "주간부산"으로 개제)에 "소설 동의보감"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그와 나의 10년 가까운 숙원사업이 드디어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몇달 동안 뜸했던 우리의 교우는 시골 여행을 같이하며 밤을 꼬박 새우는 등 소설 연재를 계기로 다시 빈번해졌고, 그때마다 나는 그의 유일한(?) 독자이자 아마추어 비평가로서 소설의 구성과 전개에 대해 같이 취해 허우적거렸다.
  당시 나는 신문사의 출판부를 책임맡고 있을 때여서 일부 초기에 연재한 수십 회분을 모아 사내외 동료 몇명에게 돌리며 '해방후 최대 걸작품이 될 물건'이라고 PR작업도 벌여보았으나 별무성과였다.
  그는 생전에나 사후에나 역시 외로운 작가였다. 방송 쪽에서 소수의 지지는 얻었으나 방송대본을 언제나 가장 늦게 갖다주는 욕심꾸러기에다가 번번이 중도퇴장당하는 골치아픈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롭지 않은 작가였다. 비록 소수지만 그의 진가, 그 인간이나 작품을 눈여겨본 사람은 그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의태 역을 저릿저릿하게 소화해낸 김인태 씨도 이은성의 대본이라면 볼에 쥐가 날 정도로 뻑뻑한 대사가 많았던데다가 밤 12시가 다되어야 그 다음날 녹화분 절반이 도착하곤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술회했는데, 그러나 그의 작품이 속된 인기와는 또다른 차원에서 연기자로 서 무척 욕심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사를 커닝'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그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이은성의 최초 사극작품인 "대원군"에서 타이틀롤을 박진감있게 해낸 김홍기 씨는 이은성의 작품 가운데 주인공이 '온보'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작품이 "독짓는 늙은이" "심마니" 등 여러 편이 있는데, 하나같이 바보스럽도록 억척같고 끈끈하고 뻑센 이 땅의 토종 인간들을 감동적으로 형상화시켜 놓았다고 이은성의 유다른 작품세계를 고인이 작고한 이후 여러 차례 들려주었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시골뜨기 풋내기 극작가를 발탁, 그와 함께 씨름하며 땀을 흘린 표재순 씨는 이은성을 증언하는 메모를 필자에게 넘겨주기도 했다.
 
  과묵한 사내, 고집이 센 사내, 뚱한 사내, 그래서 때론 꽁한 사람.
  빙그레 웃는 그 웃음 속엔 정선아리랑의 한이 스며 있고, 욕심 때문에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 그칠 줄 모르는 탐구욕, 뭐 그리 목이 말라 채우기만 하는가, 역마살이 뻗친 사람.
 
  이은성! 그는 한마디로 말해 집념의 사내다. 내 나라 내 역사 속에서 굵은 인간만을 찾아 굵은 인간만을 만들다가 간 집념의 사내다.
  굵은 인간-목표를 향해 태산도 허물고 강물도 메우는 그런 굵은 사내들을 찾다가 간 집념의 사내다.
  창틈으로 내다보는 그런 시야 좁은 사고가 아니라 산마루에서 사방을 훤히 굽어보는 그런 시원한 사고를 지닌 인간.
  멍에 쓴 말처럼 오로지 한길을 치달리는 인간의 긴박한 근육, 치켜떠진 눈초리, 터질 듯한 심장, 그것만으로 보는 이도 상쾌한 그런 인간, 더구나 그 인간의 목표가 보다 큰 겨레라든지, 국가라든지, 인간애라는 높은 이상을 지녔다면, 이은성 그는 그것만으로 그 인간을 작품화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사내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이 사람도 그런 충동에서 작가가 내 나라 내 역사 속에서 찾아낸 여러 사람 속의 한 사람일 뿐이다.
 
  역시 표재순 씨가 당시 녹화필름과 작가 본인의 작품요약 등을 토대로 정리해준 이은성 씨의 중요 드라마 작품개요를 옮겨본다.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세계를 단편적이나마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광대가(1953년 5월 방영. MBC)
  조선왕조말 진정한 민중문학인 판소리를 정리하고 새로이 그 체계를 세운 신재효의 집념에 찬 일생을 극화, 서민 속에 깃든 민족정신의 맥을 더듬고 있다. 양반 출신이면서도 광대, 천민들의 소리에 심혈을 기울이며, 파란만장하게 살다 간 한 인간의 높은 뜻과 장인기질이 잘 그려져 있다.
  우리 민족의 숨결과 호흡이 그대로 담긴 민족문학이자 독특한 연희형태인 판소리의 참된 멋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신재효의 전작품에 관류하는 서민적인 해학과 희노애락의 사실성을 추적하면서 그 이름없던 민중들과 자기의 신분마저도 잊고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함께 웃고 울다 간 '민중의 발견자'로서의 그의 인격과 선각성에 초점을 맞추어 드라마를 구축해갔다. 더구나 동학이 터지고 서학이 창궐하던 당시의 세정을 참고로 할 때 그가 그 시대에 이름없는 백성들의 '노랫가락'과 '소리'에 왜 그토록 집착했는지 새롭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으며, 또한 그 혼신의 정열과 원념이 깃들었기에 그가 엮은 가락들이 일제시대의 민족의 희노애락과 함께 부침하며 다시 오늘에 이르러 우리들의 사랑을 받는 판소리로서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닌가고 묻고 있는 것이다.

    고산자 금여호(1983년 10월 방영)
  정신문화의 바탕과 민족전통의 맥을 찾는 '위대한 한국인의 재발견' 시리즈의 일환으로 제작된 '대동여지도'의 고산자 김정호의 일대기.
  신분차별제도가 엄격했던 당시에 상민의 몸으로 우리 땅의 모습을 찾기 위해 집념의 한평생을 보낸 김정호의 일생을 통해 국토 사랑의 뜻이 잘 담겨져 있다.
  평화시엔 나라의 국세를 파악 조정하는 기본토서로서, 유사시에는 적의 침입을 막는 경계로서 막중한 값어치를 지닌 지도의 의미를 형상화하여 추상적인 영토개념을 실재화시켰다. 8도 360주를 종횡하여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를 완성하는 위대한 업적을 과학사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토정비결(1984년 1월 방영)
  학문이 깊고 천문지리, 산수, 의약, 주역에 조예가 깊었던 토정 이지함의 생애와 그의 일화를 통해 점쟁이로서보다 생을 투시하는 철인의 진면목과 기인스런 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생의 슬기와 교훈을 그리고 있다.
  당시의 사회상과 인간상, 토정의 청빈찬 생활과 그의 가족의 인고와 이해, 갈등 속에 '토정비결'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린 "토정비결"에서 그는 운명론적 민족성과 그 철학의 배경, 한국인만이 갖는 토정비결적 해학과 인생관의 근거를 천착하고 있다.
 
  표재순 씨가 간략히 묘사한 몇 작품의 줄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은성은 단지 술수와 독기로 한때 성공했다가 좌절하는 흥미 본위의 휴먼드라마가 아니라 크고 올곧은 진정한 민족애를 한몸에 체현한 전통사회의 '진국'을 진하게 그려서 보여주었다. 이런 점에서 참여문학이니 순수문학이니 하는 논쟁들이 한참 가열되어 갈 때에도 그는 그런 글싸움을 한참이나 뛰어넘는 진짜배기 작품을 TV드라마의 형태를 빌려서나마 가히 혼자서 알몸으로 쌓아가고 있었다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그리고 작품의 대중적 성과를 역설하는 평자들이 그의 작품을 그 누구 하나 언급하지 못했다는 점, 무척이나 아쉽고 애석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 표씨가 언급한 작품 외에도 '한미수교 백주년기념특집극'에서 병인양요의 대담한 재해석과 친일, 친미파로 이어지는 한국의 지배층이 갖는 속성과 행태들을 때론 정면에서 때론 한 꺼풀 웃음과 울음이 범벅되어 터지는 기막힌 해학과 반전을 통해 드라마화시켰던 그 장면장면들이 아직도 눈에 선할 지경이다. 또한 그는 마지막 작고하기 몇 달 전 88올림픽 개막기념작을 의뢰맡으면서 남북통일의 비원이 담긴 작품을 해방 직후 38선을 넘나들며 밀거래를 하는 장사꾼과 친일파를 38선에서 잡아 으깨는 2중간첩의 얘기들을 통해 보여주겠다고 작품 줄거리와 그런 소재를 얻게 된 비화를 얘기하던 일이 아직도 쟁쟁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그는 "집념"만큼 생애를 건 작품으로 세종대왕과 신숙주의 한글창제 얘기를 드라마화 해보겠다면서 자료를 모으고 구상을 가다듬어 나갔는데 ... 본인이 그런 집념을 안은 채 눈을 감을 수 있었는지 ... 원통하기만 하다.
 
  그는 정말 욕심쟁이였다. 드라마대본을 녹화시간이 넘으면서까지 조각 조각 갖다준 것도, "집념"의 소설화를 17년 이상 끌고간 것도 본인의 성에 차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그 '욕심' 때문이었다.
  부인 장태자 씨에 따르면 그는 한밤중에 불도 켜지 않은 캄캄한 속에서도 생각이 떠오르면 수십 장씩 난필로 써내려가다가 생각이 막히고 표현이 미진하면 마당에 나가 몇 시간이고 서성대면서 끙끙 앓았다고 한다. 그러다 날이 새고 오늘은 원고를 필히 갖다주어야 할 최종 마감일인 데도 불구하고 수십 장을 찢어버리고 다시 시작한 일도 수다했다는 것이다.
  그의 집에 가보면 온통 책더미 속에 파묻힐 지경이다. 그는 화장실에도 아예 책꽂이를 마련해두고 있었는데, 어디에 꽂아둔 무슨 책 몇 페이지에 무슨 글이 나온다는 것을 뼛속에 새긴 듯 기억해두고 미심하면 되풀이 찾아 확인하곤 했다.
  그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워낙 없는 집에서 자라면서 공부를 못한 한이 사무쳐 일을 하면서도 밤낮으로 말 그대로 반딧불을 모아 이불 속에 넣고 책을 보았다고 한다. 부산 철도공작창에서 일할 때 이은성은 월급의 절반을 떼어 집에 부쳐주면서 책을 보든가 야구 같은 놀이를 하면서 점심을 걸렀다고 부인은 회상했다.
  그는 방송극이나 영화가 가진 민중에 대한 직접적인 소구력에 남다른 애정과 자부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가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것은 전파매체가 지닌 엄청난 정서적,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일찍부터 눈떠 시나리오에 매달렸다기보다는 그가 부산공작창에서 일하면서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중매체였던 라디오에서 시나리오를 현상모집한다는 광고를 들은 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었다고 한다. 1996년 서른의 나이에 그는 공보처에서 시행한 반공시나리오 현상모집에 "칼 맑스의 제자들"이란 제목으로 입선하고 이듬해 다시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녹슨선"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드라마 작가로 입신하게 된다.
  그가 쓴 최초의 사극은 "대원군"이었는데 유주현 씨의 원작에서는 제목만 따오다시피 하고 독자적인 구상과 체취를 불어넣어 강렬한 인상은 남겼지만 '병아리드라마작가'로 간신히 각색을 맡은 주제에 대가의 원작을 너무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투의 물의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는 이성계의 일생을 그린 이태원 원작의 "개국"을 일일연속극으로 각색할 때도 아예 첫장면부터 원작과는 동떨어지게 스스로의 '이성계전'을 집필, 원작자와 방송사 간부로부터 심한 항의와 질책을 받았으나 끝까지 고집으로 밀어붙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하나하나의 대본에, 그것이 자신의 '오리지널'이든 각색이든 온 심혈을 쏟아부었다. 그는 대사 하나 장면 하나하나에 누구보다 엄격하고 진지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대본을 쓰고 난 뒤 방영이 나갈 때는 어느 자리에 있던지, 라디오나 TV를 켜놓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감청하면서 자신의 글이 왜곡되거나 도둑맞을까봐 눈알을 부릅떴다. 필자와 만나 술잔을 나누는 중간에도 TV를 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그가 쓴 새 연속극이 나갈 때쯤이면 내게 통지를 해주곤 했다. 그것은 자기 작품에 대한 철두철미한 검증과 감시, 확인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방송국측과 무척이나 다투고 또 그때마다 번번이 패해 나가떨어졌지만, 몇 달 뒤 다시 펜을 곡괭이처럼 찍으며 기어오르고, 또다시 굴러떨어지고 ... 이번엔 펜을 입에 물고 네발로 기어오르고 ... 하는 형상이었다.
  1987년 12월 어느날 대통령 선거유세가 여의도에서 열렸던 날, 부산일보 서울지사에 원고를 전해주러 들른 그와 둘이서 여의도로 갔다가 인파에 휩쓸리는 통에 겨우 빠져나와 인근의 대폿집에서 소주잔을 나눈 게 둘이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다음해 1월 30일 아침 9시 그는 끝내 심장이 터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88올림픽 기념 특집극을 쓰면서 너무 용을 쓰다가,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내는 데 피를 말리며, 심장이 멎을 정도로 신고를 겪는 마당에 그렇게 토해낸 대사를 방송국에서는 깎아라, 죽여라 윽박지르고 ... 한밤중 심장이 끝내 터져버린 것이다.
  통분한지고!
  그러나 이은성은 우리에게 "집념"을, "소설 동의보감"을 남겨주었다. 이미 세 권을 읽은 독자라면 췌언이 불요한 노릇이지만, 정말 아름답고 절절하지 않은가.
  미완의 걸작 ... 이은성은 생전에 "소설 동의보감"을 춘, 하, 추, 동 4권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 2, 3, 4보다 돌고도는 4계절의 이름을 따 '봄' '여름' '가을' '겨울' 4권으로 했으면 좀 좋았으련만 그는 끝내 '겨울'편을 심장 속에 안고 우리 곁을 떠났다.
  지금 상, 중, 하 세 편으로 나누어진 끝부분에 임진왜란을 당해 선조가 몽진을 떠나가고 호종하는 허준을 의녀 미사가 애틋하고 정결하게 사모하는 정경들이 비치고 있다.
  우리가 까마득히 잊고, 잃고 있었던 참사람들의 참사랑과 절도와 위의 같은 것이 흠뻑 와닿지 않는가.
  이땅의 모든 남 병 고친다는 사람들, 남 가르친다는 사람들, 남한테 배우며 사랑한다는 사람들은 기어이 이 책을 읽어야 하리라.
  '사성'-그는 이름 그대로 우리한테 크낙한 은혜를 이루어놓고 갔다. "동의보감"이 4백 년 전 우리 겨레에 내려진 은혜요, 정성이었다면, 거기에 피와 살을 이겨넣어 오늘 우리 앞에 되살려낸 "소설 동의보감"은 오십 평생 이 땅의 곡식을 파먹고 살다간 이은성이가 그 '산 값'으로 이 땅에 다시 되돌려주고 간 은혜요 정성이리라.
  선조가 임진왜란 때 몽진을 다녀온 후 허준은 마침내 어의에 이르고, 정유재란이 끝난 뒤 수의로 승차되면서 정일품 보국숭록대부의 칭호를 얻지만 그것도 반상과 사색을 다투는 사대부들의 질시와 모함에 못이겨 다시 '어의'만으로 강등되고, 선조가 죽자 유배의 길에 오르는 줄거리가 "소설 동의보감" '동'편에서 다루어질 예정이었다.
  사실 "소설 동의보감"은 오직 허준 한 사람만을 쫓아가는 너무 단선적인 전개를 하고 있어 대하소설이 보여주는 다방면의 실상과 표정을 그려내는 데는 미흡한 감이 없지 않다. 이것이 허준이 귀양가면서, 미천한 신분에서 정승의 반열에까지 올랐다가 그 모든 작위, 껍데기-허준에겐 애시당초 아무런 인연도 의의도 없었던 그 껍데기들을 털어버린 뒤 원래의 오직 의인일 뿐인 허준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소설 동의보감"은 그야말로 '대미'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삼남에 창궐한 전염병(작가는 흑사병으로 상정했음)에 시달리는 무지랭이 백성 틈에 섞여 그들과 한덩어리가 되어 한편으론 의술을 베풀고, 한편으론 또다른 한글판 의서 찬술에 투신 물두하다가 자신도 그 역병에 걸려 이름도 흔적도 없이 일생을 마치는 스토리를, 마치 장강이 바다 어귀 하류에 이르러 대하를 이루듯이 중엽으로 접어드는 광해군시대의 서민적 문물을 폭넓고 깊숙하게 보여주려 눈알이 벌겋도록 앓고 있었는데 ... 애닯다 ...
 
  글 한줄 쓰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그의 모습이 하도 보기 딱하고, 원고 품팔이도 기약없는 생활이어서 부인이 때로 '글쓰는 꼴 보기 싫다'고 투정을 할라치면 '나는 죽어서 다시 태어난대도 글을 쓸 것'이라고 했다는 필생의 작가 이은성.
  그는 붓을 놓지 못한 채 갔다. 자기 살점을 뜯어 글을 쓰다가 그는 갔다. "소설 동의보감"과 등사체로 된 시나리오 대본 10여 권만 우리에게 남겨준 채 ...
  그는 평소 시나리오가 한국에선 왜 책으로 묶여져 읽히지 못하는지, 항변 같은 얘기를 자주 했다. 이번 "소설 동의보감"의 출간을 계기로 한국에서 시나리오 문학, 특히 이은성의 극본에 대한 재발견이 독자들의 원과 힘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비는 마음이다.
  전후 이 땅의 '정신계'에 신동엽이 이룬 언덕과 맞닿는 높이로 이은성의 언덕이 또 하나 이루어지리라 나는 굳게 믿는다.
  살아 생전에 그와 약소한 친교를 가졌다는 허울 하나로 그가 남긴 보배롭고 장엄한 작품의 못다한 말미에 속취 분분한 두서없는 난필을 덧대 고인과 독자에게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아, 그가 살았다면 얼마나 장쾌한 서문으로 우리를 압도했을 것이랴.
  이은성, 이제 붓 거두시고 편히 눈 감으소서.
  199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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