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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동의보감(중) [이은성 저]
작성자 이종운 (ip:)
  • 작성일 2017-01-21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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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047
평점 0점

  도서명: 소설 동의보감(중)
  저자명: 이은성


    [  7. 걸승 김민세 ]
    1
  정지할 줄 모르고 흐르는 세월 속에서 3백60여 일 만에 한번 찾아오는 시간의 마디가 유독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 날은 신분의 상하에 구애되지 않고 세상의 모두가 새 날이라 부르며 기리는 날임에 틀림없었다.
  없는 자는 없는 대로 있는 자는 있는 대로 흘러가 버린 지난 한 해의 아쉬움을 묻어버리고 어제와 꼭 같은 해가 떠오르건만 그 해를 바라보며 저마다 새해에의 소망을 읊조리기 마련이었다.
  하나 그건 새 희망을 품을 만큼 특별한 날이 아니라는 것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가난을 덜어주십사
  아들을 쌍둥이로 낳게 해주십사
  풍년을 들게 해주십사
  과거에 붙게 해주십사 ... 신분과 처지의 층층이 간절히 빈들 세상은 세상대로 굴러갈 뿐, 연년세세 그 숱한 소망이 얼마나 허망한 세모를 맞이했는가를 사람들은 되풀이 되풀이 세월에 속아살며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절절하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 희망을 못 버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1년 계량은 고사하고 이 정초가 지나면 어김없이 호랑이 아가리처럼 버티고 있을 보릿고개를 번연히 알면서도 세상의 가난한 애비들은 세밑이 되면 공연히 부산떨며 나락섬이나 보리쌀말이라도 들고 나가 몇푼 돈냥과 바꾸어 자식들을 설빔으로 치장하여 집 밖으로 내보낸다.
  흉년이다 핑계대어 추석에도 헌 옷으로 건너뛴 아이들도 그래서 이 설날이면 싸구려 옷감의 설빔일망정 그것을 자랑스레 떨쳐 입고 마냥 즐거운 것이다.
  팽이치기, 제기차기 그리고 썰매를 지치고 동네방네 집집이 처마를 후비는 참새잡이.
  어린것들뿐이랴, 일년중 마음놓고 쉬는 날 집에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멍석 서너 장 깔고 한아름씩이나 되는 참나무 통윷을 굴리며 마을 대항 술상 차려내기 윷놀이에 온갖 기성을 질러대고 아낙들과 처자들은 그들대로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드는 '얘기꾼'을 마을 제일 넓은 방에 모셔 놓고 그 간드러진 입담으로 흘러나오는 삼강행실도에서 부풀려낸 효자 효녀 얘기며 슬프고 아름다운 열녀 얘기에 울고 웃으며 즐겁다.
  그러나 허준의 집은.
  그런 마을의 정초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채 깊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느질 솜씨뿐이 아니라 음식 솜씨도 남다른 데가 있다 하여 마을 안에 작은 잔치라도 있을라치면 으례 불려가던 허준의 아내도 삯바느질 끝에 우진사댁에서 도둑 누명을 받은 뒤로는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다. 
  정말 도둑이었다면 서슬 푸른 그 우진사댁에서 즉일로 풀려나왔을리 없다며 그녀의 마음씨를 기억하는 마을의 후덕한 몇 아낙이 그녀의 무고함을 두둔해주지 않은 바 아니었으나 그 무고함을 짐작하면서도 시모를 떡장수로 내보내면서까지 자식을 서당에 보내는 그녀의 남다른 점을 더 많은 아낙들이 시샘함인지 이젠 허준 일가는 마을에서 잊혀진 집이었다.
  그 외롭고 쓸쓸한 정초를 허준은 뒤꼍 자기 방에 누워 산삼을 뺏길 때 당한 타박상과 동상을 열흘째 삭이고 있었다.
  아내와 어머니는 그 열흘 동안 허준의 피멍을 치료하고자 조석으로 드나들었으나 모자간도 부부간도 서로 눈길을 부딪치려 않았다.
  "면천시켜 주랴?"
  하던 김민세의 그 한마디가 허준의 머릿속을 뒤범벅을 만들고 있었다.
  허황하다고 믿으면서도 허준은 그날 이후 단 한시도 김민세를 잊어버린 적이 없다. 그는 또 하나의 눈을 분명히 본 것이다.
  면천 얘기를 할 때의 김민세의 눈빛은 너무나 형형했다.
  인간이 가짜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 열홀 동안 허준은 김민세에 관한 모든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술 마시고 고기 먹고, 그건 유의태의 문도가 된 지 얼마 후 자기가 직접 목격한 김민세 그의 모습이었다.
  어느 여름날 비오는 후원 유의태의 정자 위에서 연신 유의태와 웃음을 터뜨리며 유의태가 아들의 취재 자격을 시험해 달라던 그때.
  기억이 또 하나 있다.
  그건 허준이 직접 본 것은 아니나 저 김민세만 나타나면 유의태의 부인 오씨가 한바탕 꼭 유의태에게 대든다는 것을 지금은 사라진 장쇠로부터 들었었다.
  "까닭이 뭐요?"
  하고 허준이 영문을 묻자 장쇠가 목소리 떨궈 말했었다.
  "저 땡추중의 어디가 좋은지 암튼 스승님은 저 중만 나타나면 일 년치 웃음을 한꺼번에 다 웃는데 돌아갈 제는 꼭 돈 한 다래끼씩을 시주받아 가거든."
  "돈을 한 다래끼씩이나 시주를?"
  "그것도 올 적마다 한번도 빼놓지 않고. 그러니 저 중만 나타나면 내방마님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가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 분풀이가 불원간 스승님한테 터지는 거구."
  그 말에 부산포도 한마디 보탰었다.
  "그 걸팡지게 먹고 마시는 것 봐라. 돈 한 다래끼가 아무리 많은 돈이라 해도 아마도 부처님 면전에 가기 전에 다 먹어 없앨기다. 저리 먹어대니 하초도 꽤 힘을 쓸끼고 반드시 먹어 없애뿌리는 것만도 아닐 끼라. 땡추중 쳐놓고 과부 한둘 안감춰논 기 있겠나."
  '그러나 ...'
  열홀 전 자기가 본 김민세의 눈은 친구의 돈을 뜯어다가 주색에 탐닉하는 그런 풀어진 눈은 아니었다.
  그랬었다. 그건 불도에 정진하는 맑고 깊은 사색이 담긴 눈도 아니요. 아무에게 뚫려 있는 그냥 껌벅이는 눈알도 분명 아니었다.
  부릅뜨면 불빛과 성깔이 한꺼번에 타오르는 고집스러운 눈이었다.
  취재로 내의원에 올라 어의가 되는 것이 면천의 길임을 강조하면서 왜 그 자신은 내의원을 그만두었을까? 유의태가 아들 도지의 취재 자격의 자문을 구할 정도요 또 안광익과 그토록 격의없는 친분을 나누는 것하며가 그 또한 결코 범상한 의술은 아닐 터이다. 한데 왜 스스로는 면천의
길을 버렸을까. 어의가 되는 길을 알면서도 내쫓겨났는가. 아니면 그도 안광익처럼 왕가에 무슨 척을 지고 뛰쳐나을 사유가 있었던가 ...
  허준이 잠 못 이루는 두 눈을 카악! 천정에 꽃으며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그게 정녕 면천의 길이라면 무엇을 못할 것인가! 나의 목숨이 열이라면 아홉 개를 던져서라도 서슴없이 면천의 길을 택함에 주저하지 않으리라!'
  마주쳐도 이젠 인사조차 않는 마을 사람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떡목 판을 이고 나서는 어머니, 삯바느질 벌이가 끊긴 후 새벽마다 그 시어머니를 도와 디딜방아에 떡을 찧으며 ... 집 주위와 뒷산 비탈 그리고 앞도랑 모래톱에 이름 그대로 손바닥만한 채소밭과 몇 줄기 밭이랑이 띄엄
띄엄 생겨나는 것을 보며 허준은 그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도 모른 체 지내고 있었다.
  아내의 설움을 덜어주는 일이요, 또 자식들로 하여금 장차 천출이라는 손가락질을 면하는 길이라면 어찌 아홉 개만 던지고 하나는 아끼랴. 남은 마지막 목숨도 아낌없이 면천이 되는 길을 향해 던질 수 있으리라.
  '김민세를 만나거라! 그는 지금 유의태의 집에 있을 것이다! 혹 그 동안 시주돈 한 다래끼 받아내어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할지라도 앉아 기다리지 않고 세상의 끝까지라도 찾아가 기어코 그를 만나 그의 입에서 나온 면천에 관한 그 얘기가 결코 한때의 농지거리가 아니란 확약을 들으리라!'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있음에도 허준의 눈은 김민세를 만나리라는 집념에 핏발이 선 채 이미 그 뇌리에서는 잃어버린 산삼에 대한 미련은 아득히 사라져 있었다.
  허준은 열이틀째가 되던 날 드디어 자리를 걷고 일어났다.
  김민세가 말한 보름에 사흘을 앞당겨 일어날 수 있는 건 어머니가 달여내는 약의 효력만이 아니라 아내의 정성임을 허준은 알고 있었다.
  허준이 가족과의 말을 끊고 누워 있던 그 열이틀간 아내는 늦은 밤 꼭 한번씩 다녀갔다. 그리고는 잠든 남편의 곁에 말없이 앉아선 타액이 상처를 삭이고 아물게 하는 처방이라 여기고 있음인지 조용히 남편의 웃옷을 헤쳐 그 가슴이며 허리의 피멍 위에 수없이 타액을 발라주었었다.
  그 아내의 눈물겨운 헌신에도 허준은 여물어가는 자기의 결심을 입밖에 내진 않았다. 확인하기 전에는.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아내에게도 희망을 심어주었다가 그 희망이 꺼질 때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뜨리는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딜 다녀오려고?"
  마당에서 동생 숙영이와 눈사람을 만들고 있던 겸이가 나타난 아버지를 보고 놀라서 안방으로 달리며 "아버지가 걸어나오셨다!"고 소리쳤고 그 소리에 안방에서 어머니가, 부엌에서 군불 때던 삭정이를 꺾어든 채 아내가 달려나왔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아들은 황급히 마당에 내려서는 어머니에게 짧게 인사를 드렸다.
  "어딜?"
  대답 없는 아들의 과묵한 입매에 더 캐묻지 않고 어머니가 가족을 대신해 물었다.
  "걸을 수 있겠느냐?"
  "다 나았습니다."
  하고 허준은 삽짝도 없는 집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좇아 일가가 따라나왔으나 더 따라가진 않았다.
  어머니도 아내도 허준의 가라앉은 눈이 산삼을 되찾겠다고 날뛰던 그 눈빛과는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저만치 유의태의 의원이 보였다.
  내쫓긴 지 석 달이 되고 있었다. 그 유의태의 의원이 와락 반갑게 느껴지려는 심정을 허준은 고소했다.
  '이제 와서 빌 일도 없고 빌러 가는 것도 아니다! 난 김민세를 만나러 가는 것일 뿐!'
  그때였다. 문득 걸음을 세우고 말았다. 언덕배기 위 유의원의 문전에 이젠 수제자의 모습을 한 임오근하며 문도들의 배웅 속에 출타 차림의 유의태가 상화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실망이 스쳐갔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김민세와 안광익이 이미 유의태의 집을 떠난 것을.
  다음 순간 허준은 그 유의태의 길을 가로막듯이 꿇어앉았다.
  유의태가 언덕배기를 내려오며 그 허준을 보았다. 아니 보려 해도 가로막고 꿇은 허준을 못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태는 그 허준을 지나치려 했다. 순간 허준이 외쳤다.
  "물어볼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자도 뺀 그 허준을 걸음을 세운 유의태가 돌아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뒷짐을 지며 허준을 내려보았다. 일체의 연민도 호기심도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2
  올려다보이는 의윈 입구 그 언덕배기 위에서 내려보고 있는 임오근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 곁에 늘어선 꺽새, 영달, 병문 들도 이맘때면 얻어입는 설빔을 차려 입은 모습으로 바쁘게 눈길이 오갔다.
  이미 산음을 떠났다고 보고한 허준이 다시 나타나 유의태를 가로막은 모습이 그가 다시 유의태의 문하에 애원해 들어오려고 찾아온 모습으로 비쳤는지 경계와 적의에 찬 눈빛들이었다.
  그러나 산음을 떠났다고 들었던 허준의 출현에 대해 유의태는 한가닥의 관심도 움직이는 기색이 아니었다.
  "물어보려는 말이란?"
  전혀 모르는 자는 아니라는 듯이 유의태의 첫마디는 그렇게 짧았다.
  "봄 가을로 오가던 삼적대사라 불리는 그분의 소재를 알고자 합니다."
  유의태의 말수는 더욱 짧았다.
  "그 사람은 왜?"
  "십여 일 전 안광익 그분과 함께 다녀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집에 다녀간 것은 사실이되 난 그 사람의 거처를 일일이 물어본 적이 없다. 오면 오나부다 가면 가나부다 우린 피차 그러한 교분인즉슨."
  말끝에 유의태는 허준을 비켜 몇 발 행보를 옮겼다.
  그 유의태를 허준이 돌아보자 유의태 또한 걸음을 세우더니 한마디 뱉었다.
  "간다고 하여 반드시 그 사람이 그곳에 있다고 기필할 수도 없다. 하되."
  "...?"
  "함양 북쪽 30리허에 안점산이 있느니. 혹 그 산기슭에서 초동이라도 만나거든 삼적사가 어딘갈 물으면 더러 아는 아이가 있는지도 모르지."
  말끝에 유의태는 가고 있었고 종자로서 뒤따르는 상화가 그 유의태와 허준을 안타까이 번갈아 보았다.
  "안점산이라 했사오니까?"
  허준이 외쳤으나 유의태는 돌아보지 않고 마을 쪽으로 멀어갔다.
  '함양 북쪽 30리, 안점산, 삼적사.'
  알고자 한 것은 다 안 셈이었다.
  그러나 허준은 멀어져가는 유의태를 잠시 보고 있었다.
  가로막았으니 시선을 주었고 물어오니 대꾸를 했을 뿐이라는 듯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유의태의 뒷모습은 그가 자기를 얼마나 확실하게 버렸는가를 웅변하고 있었다.
  허준의 가슴속에 한가닥 야속함이 비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허준은 자신의 그 여린 감정을 거부하듯 고개를 저었다.
  '끝났어!'
  허준 또한 그 유의태를 외면하며 등을 돌려 집 쪽을 향했다.
  비인부전 ---
  일찍이 유의태가 선언한 자기의 의발을 전수받을 경합자 속에서 자기는 확실히 제외되고 아들인 도지, 15년 고참인 임오근 그리고 그 심지와 노력으로 보아 상화 세 사람으로 좁혀졌다고 어림하며 허준은 유의태의 의원으로부터 계속 멀어져갔다.
  다음날 새벽, 허준은 수삼 일 바람이나 쐬다 오겠노라며 집을 나섰다. 어머니도 아내도 허준의 가출을 궁금해 견딜 수 없는 얼굴이었으나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했을 뿐 더 이상 자기의 목적을 부연하지 않았다.
  면천의 실마리를 잡으려는 일생일대의 소망이 걸린 길이었다. 김민세를 만나 단단히 그 방법과 절차를 들어보고 그 확신이 설 때 설명해도 늦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 첫걸음이 내의원 취재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창녕 성대감 댁으로 정경부인의 문후와 세배를 겸하여 찾아가 시임 우의정이자 내의원 도제조라는 노수신에게 보일 소개의 글월을 다시 써달라 못할 것도 없다 싶었다.
  "그것이 면천의 확실한 길이라면!"
  그가 날 버린 지금 새삼 유의태의 조소 따위 개의할 바 무엇이며 그보다 더한 수모를 당한들 아플 것이랴!
  "나 또한 지난 7년 동안 밤잠을 안 자며 정진했고 가족의 생계조차 희생하며 배운 의술일진대 그걸 내세운다 하여 어찌 그것이 유의태에 대한 은의의 배반이라 할 것인가."
  근래 찾아낸 한 가지 설익은 변명도 고개를 쳐든 허준을 부추겼다.
  함양까지 30리, 그 함양서 안점산까지 다시 30리, 합해서 60리. 짧은 겨울 해요 비록 초행길이라 해도 그건 어려운 노정이 아닐 것이었다.
  허준은 산음, 함양의 중간 지점인 서주 장터의 건재약상에 들러 안점산의 위치를 대충 듣자 서주로부터 화산으로 질러가는 길을 택하여 당본을 향해 길을 잡았다.
  눈 쌓인 들에 분지의 바람이 회오리치며 허준을 쫓아왔고 내와 고개가 잇따라 길을 막았으나 허준은 새삼 김민세란 인물이 지닌 수수께끼에 골몰하며 추위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면천시켜 주랴 하던 것은 그 면천의 길을 안다는 뜻일 것이요 그렇다면 그 스스로는 왜 저부터 서둘러야 할 면천의 길을 버리고 다시 중의 복색이 되어 사바의 세계를 떠도는가.
  또 의원의 세계에서 사문의 세계로 전향했다면 면벽 9년의 달마대사의 참선은 흉내내지 못할지라도 술에 고기에 또 유의태로부터 철 따라 돈을 한 다래끼씩 얻어선 무엇을 하는 것일까.
  허준이 김민세에 대한 끝없는 의문을 되풀이하며 당본 어간의 몇 개의 주막을 지나쳐 함양 북쪽 20리라는 취암산 아래 나루에 이르러서였다.
  뜻밖에 나룻배를 젓는 건 登그랑 늙은 노파였고 미리 뱃삯부터 받아 챙긴 노파가 이 취암산 너머 십리 끝이 곧 안점산이요 그 안점산은 옛날 신라, 백제 때 어느쪽에선가 쌓은 돌성터가 뚜렷이 남아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에 허준이 삼적사라는 절 이름을 대었으나 그 산에 절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 없다며 그제야 의아한 얼굴을 했다.
  해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남은 길이 십리라면 목적지에 닿아도 해가 남는 시각이라는 여유를 가지며 그제야 허준은 사공집에서 소주 한 사발을 요기삼아 사 마신 후 취암산 산허리로 굽도는 산길로 접어올랐다.
  대보름까지는 정초라는 관념 때문인지 그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엔 오가는 행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고 정초 초사흗날엔가 내린 푸짐한 눈길에 겨우 5, 6명만 넘나든 발자국이 얼어붙어 있고 때로 그 눈길을 가로질러 십여 마리 노루떼의 굽자국이 가파른 골짜기로 내리닫고 있었다.
  그 외로운 산길의 마지막 굽이를 돌아 능선 날망에 섰을 때 눈 쌓인 벌판 멀리 한눈에 안점산임을 알 수 있는 높지 않은 산이 곰이 웅크린 형국으로 눈을 쓰고 엎드려 있었다. 허준은 미소지었다. 지리산을 7년 동안 무시로 넘나든 허준에게 안점산의 외형은 한낱 뒷동산처럼 작은 산이었다.
  그러나 속단이었다.
  허준이 거창으로 뻗은 외줄기 달구지 자국이 난 길을 벗어나 길도 없는 눈밭을 헤치고 안점산의 초입에 이르러 보자 멀리에서 본 외형과는 달리 지난날의 고전장답게 그 기슭에서부터 섣불리 발을 디딜 수 없도록 지형이 험악한데다 멀리에서는 뚜렷이 식별되던 성터 자리는 우거진 참나무와 닥나무 그리고 가시덤불과 빽빽이 어우러져 어느 쪽이 성터에 가까운 길목인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여러 차례 옷깃을 잡아뜯기며 그 밀림을 뚫고 산속으로 들어선 허준은 다시 아연해지고 말았다.
  기슭의 밀림 다음에 나타난 건 병풍처럼 둘러서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벼랑들이었고 그 사이사이 눈과 얼음을 쓴 비탈에는 수십 길 짜리 아름드리 적송들이 거대한 구렁이떼처럼 휘어지고 늘어진 채 어느 한 곳 사람이 오르내린 오솔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절이 있다면 인적이 없을 리 없다.'
  들어섰던 밀림에서 걸음을 돌려 다시 내려온 허준은 백여 보를 물러나 일면 다시 산세를 살피고 산에서 가까운 마을의 위치를 찾았다.
  산속으로 나는 길이라면 산세가 평탄한 지형이나 마을에서 가까운 지점으로 길이 뚫려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마을은 어느 쪽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덮인 탓으로 여긴 주변 들판은 논도 밭도 아닌 쑥대밭이었으며 어느 한 곳 두엄 한 지게 부려놓은 논밭의 흔적이 없었다. 그제야 허준은 취암산 비탈을 내려온 뒤 항용 산 아래 있을 법한 주막집도 산비탈에 취락하는 마을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한 산이로군."
  해가 이미 서산에 걸리고 있었고 온 산이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가 안점산이요 이 산속에 삼적사가 있고 거기 김민세가 있다면 물러날 수 없었다. 오솔길 찾기를 단념한 허준은 잡목과 얼음에 뒤덮인 계곡을 발견하고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눈과 얼음 덮인 계곡은 집채만한 바위가 많아 시야가 좀체 트이지 않았다.
  이만한 수목이면 뜻아니한 침입자를 향해 새떼가 날거나 오소리 새끼라도 몇 마리 바스락거릴 만하건만 온 산은 괴괴한 정적에 싸여 들리는 건 오로지 바람소리뿐이었다.
  "무슨 산이 이런가 ..."
  허준은 계속 계곡을 헤치고 올랐다. 길은 아무데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허준은 얼어붙은 폭포의 빙벽을 기어올랐고 그 너머에 무너져내린 돌성의 한모퉁이를 발견했을 때 얼음을 짚어 오느라 손가락은 얼다 못해 떨어져나갈 듯한데 온몸은 땀을 뒤집어쓴 듯이 젖어 있었다.
  허준은 수백 년 성벽을 버티다 무너져내린 이끼 긴 돌틈을 타넘으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은 빤히 열려 있었으나 마지막 낙조가 비낀 성 안엔 키가 넘는 쑥대와 잡목이 어우러지고 밤을 맞이하는 바람소리가 아우성치며 횡행할 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물의 소리가 났다.
  꿩이었다.
  쑥대밭에서 서너 길 솟아오른 꿩과 장끼가 금세 제 체중을 못이기고 팔매질이나 맞은 듯 성벽 너머로 쑤셔박히는 것이 보였고 그것들이 다시 나는 소리가 났다.
  하나 그런 미물의 움직임 따위와는 상관없이 성벽의 안팎에 자생한 적송의 기괴하게 뻗은 가지들이 구렁이떼의 화신처럼 고개를 흔들고 가지를 휘저으며 귀곡성 같은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야.'
  허준이 올라온 빙벽으로는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성벽 안 바람소리 속을 나아갈 때였다.
  그 거센 바람소리 속으로 문득 두둥거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
  그건 분명 여느 북이 아니고 절간의 법고소리였다.
  "삼적사다!"
  반은 바람에 흩어지는 그 법고소리가 나는 곳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바로 찾아온 거야!"
  그 법고소리 쪽을 향해 허준이 쑥대밭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3
  두둥 두둥 두둥둥둥둥 두두둥둥 ... 달리는 허준의 앞으로 법고소리가 다가왔다.
  쑥대밭에 가려 있던 시야가 탁 트였다. 멀리 번듯한 성의 출구도 두엇 보였다.
  순간 허준은 달리던 기세에 엎어질 듯이 걸음을 씨웠고 자기 눈을 의심했다.
  상식으로 아는 단청이 현란한 절의 형체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고 불사마다 받들어 단 무슨 전 무슨 전 하는 현판도 명호도 없을뿐더러 오로지 성벽 안 돌벽에 기대어 줄줄이 달아 이은 크고 작은 너와집들이 일여덟 채 보이는데 그 너와집의 사이사이 디딜방아며 나무곳간이며 절구통들이 그런 대로 사람 사는 흔적을 갖추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법고소리는 너와집 건너편 돼지와 닭장이 차려진 축사 건너 성벽 위에서 나고 있었다.
  세찬 산바람 때문인지 얼굴도 손도 온통 헝겁으로 감싼 15, 16세의 소년이 요철을 이룬 성가위 사이에서 매달린 법고를 두드려대고 있는 속에 그 아래 성벽 입구에선 십여 명의 남녀와 어린이 신도가 성 밖에서 들어와 마악 불빛이 새나오기 시작한 맨 끝쪽의 너와집으로 향해 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허준은 그들의 불심 깊어 보이는 경건한 모습과 소년의 법고소리를 연관지어 이곳이 나루터 노파도 들은 바 없다는 그 삼적사인가 보다 여기며 머리 위 소년을 향해 얼른 합장해 보이며 고개를 숙여보였으나 멈칫 북채를 멈출 듯하던 소년은 다시 장단을 찾아 북을 두드리며 그러나 그 시선은 허준에게 떼지 않았다.
  순간 돌아서려던 허준이 다시 몸을 돌려 소년을 올려보았다.
  이상한 예감이 허준의 가슴을 꿰뚫었다.
  조그만 몸은 아직 소년일시 분명하건만 그리고 비록 귀와 입을 싸맸으나 성벽 위 세찬 바람 속에 온몸을 드러내놓고 끊임없이 북을 두드려대는 당당한 모습에 유일하게 내놓은 그 눈이 의외로 소년답지 않은 날카로운 안광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먼저 보낸 눈인사에 깜박도 않고 그 시선을 맞받으며 지켜보는 그 눈빛은 도저히 소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섬뜩한 안광이었다. 그러나 허준은 그 소년을 오래 보지 않았다.
  저만치 십여 명 신도들이 들어간 그 곁 너와집 처마 밑에서 부엌문이 열린 불빛과 함께 뜻밖에도 낯익은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야!'
  허준의 내심이 외쳤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본 기억은 없으나 그건 안광익이 유의태의 집에 처음 나타날 때 데리고 온 궁녀 정씨임에 틀림없었다.
  지엄한 궁금을 어기고 사랑을 위해 목숨 걸고 대궐 높은 담을 뛰어넘은 강단은 그녀의 그 화사한 미모의 어느 구석에 숨어 있던 용기였을까.
  처음 그녀가 유의태 집에 나타나 안채 골방으로 잠적했을 때 두 사람의 사연은 알 길 없이, 그러나 그녀는 영달, 꺽새 들의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때로 호젓한 시각에 담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화사한 미모를 훔쳐보고자 달려갔다가 돌아온 녀석들은 같은 화제에 신물이 나지도 않은지 으레 잠자리에 누워서는 "저렇게 잘난 계집도 그 일을 치를 때는 소리를 지르느냐" "어떻게 지르느냐"는 등 "저런 여리여리하게 생긴 계집일수록 그 짓은 더 밝힌다"느니 음담패설을 늘어놓았고 그런 어느날 스승 유의태가 집을 비운 날 저 계집이 한밤중 사랑으로 몰래 건너가는 걸 보았으며 그 때 나는 직접 저 계집의 온갖 신음소리를 들었다는 등 꺾새놈이 부풀려 낸 얘기를 녀석들은 등잔 심지가 다 닳도록 해대었으나 그때 허준은 궁녀 정씨에 대한 흥미보다 자신의 부술을 시험하고자 변돌석을 회유하여 남의 묘 속에서 송장을 꺼낸 안광익에게 더욱 관심이 쏠렸었다.
  그래서 허준은 어느날 갑자기 안채에서 사라진 그녀의 행방을 놓고 또 한번 이러쿵저러쿵 화제삼는 영달이 들의 침 튀기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그녀가 미리 사라진 걸로 보아 안광익 또한 미구에 이 집을 떠나겠구나 내심 그것만을 서운하게 여긴 기억이 있다. 아마도 그건 허준 자기가 유 의태의 영을 받아 창녕 성대감댁으로 떠나던 그 임시의 일이었다.
  아무튼 지금 허준은 그때 유의태의 집에서 사라진 궁녀 정씨를 이 깊은 산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반가웠다. 상대가 여자이매 소리쳐 부를 수도 섣불리 아는 체할 수도 없었으나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안광익 또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안광익이 여기 있다면 김민세도 이곳에 있어!'
  허준의 가슴이 뛰었다.
  빙벽을 기어오르고 팅 빈 절안에서 북소리를 듣기 이전의 절망이 일시에 더 큰 환희로 바뀌었다.
  그 궁녀 정씨가 상다리도 없는 판에 담아올린 음식들을 받쳐들고 신도들이 몰려들어간 저쪽 처마 밑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그 방에서 목탁소리와 여러 사람의 염불소리가 들려나오기 시작했다.
  '김민세다!'
  허준은 목탁을 치는 주인공이 김민세임을 확신하며 너와집 처마 밑으로 향해 갔다. 불공에 즈음하여 방문은 여느 절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허준이 소리없이 다가가 들여다본 그 방은 아래윗방 벽을 헐어버린 꽤나 넓은 방이었고 그 속에 들어찬 20여 명 신도들의 뒷모습 너머 한 좌의 불상 앞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뒷모습만으로도 분명 김민세 그 사람이 었다.
  그리고 그 불상 앞에서 향을 퍼우고 있던 두 사내가 궁녀 정씨가 담아온 공양 그릇을 좌우에서 받아 공양대 위에 올리고 있었다.
  허준이 그 사내들의 얼굴을 바라본 건 바로 그때였다. 순간 허준의 눈이 바쁘게 깜박였고 그 눈이 다시 사내들을 바라보다 소스라치며 뒷걸음 쳤고 허준의 입에서 터져나온 건 공포에 가까운 비명소리였다.
  김민세가 돌아보았고 뒷모습의 20여 명 신도들도 일제히 문간을 돌아보았다.
  "이럴 수가!"
  허준은 그 기괴한 얼굴들을 보며 그 자리에 못박힌 채 뒤통수에 거대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얼굴이 모두 똑 같았다.
  성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여자 남자 늙은이 어린아이 할것없이 허준을 향한 그 얼굴들은 모두가 대풍창(문둥병) 환자들이었다.
  눈알 하나가 빠지고 코가 떨어지고 입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엉겨붙은-이목구비 성한 사람은 오로지 궁녀 정씨와 김민세뿐이었다.
  허준의 온몸에 거대한 몽둥이질 같은 충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뒤꿈치가 땅에 닿지도 못하고 온몸이 떨릴 뿐이었다.
  김민세가 그 허준을 무시하여 다시 불단을 향해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환자들도 불단을 향하여 손가락이 떨어져나간 손들을 모아 합장했다.
  '이럴 수가 ... 그릴다면 이곳은 문둥이굴이란 말인가!'
  허준이 자신의 중심을 필사적으로 버티며 입속에 거푸 외치고 있었고 그 눈앞으로 궁녀 정씨가 음식을 담아간 빈 판을 들고 밖으로 나왔으나 숨을 삼키고 바라보고 있는 허준에게는 시선도 줌이 없이 바로 옆방 너와집 처마 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허준의 등뒤로 인기척들이 다가왔다.
  허준이 돌아보자 십여 명 또 한떼의 남녀 문둥이들이 손가락도 없는 두루뭉수리 주먹으로 낯선 허준에게 합장해 보이면서 김민세가 목탁을 두드리는 방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허준은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 성벽 안이 그 수십 명 문둥이들의 살 썩는 냄새로 진동하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허준을 전율케 하는 것은 후각의 환상뿐이 아니었다. 금시라도 딛고 서 있는 자기의 두 다리로부터 온 성벽 안에 충만한 대풍창의 병균들이 수천 마리씩 줄줄이 온몸으로 기어오르고 있는  착각이었다.
  또 인기척이 났다. 
  "처사님께선 어디서 오신 분입니까?" 
  돌아본 허준의에 눈에 좀 전까지 성가퀴에 서서 법고를 치고 있던 소년이 바로 등뒤에 서 있었다.
  대답 대신 허준은 소년으로부터도 몇 발 물러났다. 이제야 소년의 손이며 얼굴에 감긴 천은 방한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병을 감추기 위한 위장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소년의 두번째 물음은 날카로웠다.
  허준은 아직 입이 떨어지지 않은 채 소년을 마주보고 있었다. 목소리부터가 소년의 음색이 아니었다. 아니 목소리는 아무래도 좋았다. 빤히 지켜보는 소년의 눈은 천 길 깊고 어두운 공동에서 번쩍이는 살기조차 띤 지옥의 눈빛이었다.
  대답 없는 허준에게 소년이 웃는 듯했다. 오히려 허준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무서운 델 왜 왔소!"
  소년이 자기 발 아래 침을 탁 뱉고 돌아서 갔다.
  정신이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허준의 귀에 다시 거센 산바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미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히고 있었다. 성벽 위에 요철을 지은 성가퀴들이 별빛이 깔린 밤하늘에 검은 형체를 그리고 있었다.
  허준의 막막한 눈길 뒤에서 또 소리가 났다.
  "누가 오래서 여길 왔나?"
  돌아보니 안광익이었다. 그리고 안광익의 저만치 뒤에 그에게 전갈을 했음직한 궁녀 정씨가 역시 경계의 빛을 띠고 허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답을 하기에는 허준의 입안이 바싹 메말라 있었다.
  "아는 사람이오니까?"
  궁녀 정씨가 안광익에게 물었고,
  "안다고도 할 수 없는 자요."
  하고 안광익의 내뱉듯한 대꾸 끝에 그 왕방울 같은 눈이 조소를 담아 허준을 훑어보았다.

    4
  "왔군."
  하고 등뒤에서 김민세의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과연 그가 서 있었다.
  너와집 쪽에서는 그가 없어도 독경을 대신하는 사람이 있는지 누군가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독경소리와 함께 20여 명 대풍창 환자들이 한꺼번에 외쳐대는 '나무관세음보살' 소리와 목탁소리가 섞여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잘 기다리기나 한 듯한 말이로군."
  하고 안광익이 그 김민세를 비아냥거렸으나 허준을 보는 김민세의 눈매는 따스했다. 그리고 "오너라." 하며 앞장섰다.
  김민세를 따르는 허준의 등뒤에서 궁녀 정씨가 "미리 무슨 언약이 계셔서 찾아온 분이오니까." 하고 안광익에게 묻는 소리와 "사람이 다심하여 아무나 믿는 탓이지." 하는 뱉듯한 안광익의 대꾸가 들렸다.
  "내니라."
  하고 김민세가 기척을 내자 곧 문짝이 열리며 뜻밖에 혼전의 처녀인 듯 한 두 아가씨가 급히 나오며 김민세에게 합장을 했다.
  "...!"
  아직 비주가 무너진 중환자는 아니었으나 떨어진 눈썹과 한쪽 귀가 엉겨붙은 것하며 두 아가씨도 한눈에 대풍창 환자였다.
  앞장서 들어간 김민세가 횃불처럼 밝힌 관솔불 아래서 문밖의 허준을 돌아보았고 허준은 자기에게도 합장해 보이며 건너 너와집 쪽으로 환자가 총총히 사라진 걸 보고야 너와집 안으로 들어서며 닥나무 가지로 촘촘히 엮은 문짝을 닫았다.
  너와집 안은 훈기로 가득차 있었다.
  밖에서 본 어설픈 건물에 비해 내벽은 두텁게 흙을 싸발라 외풍이 스미지 않는 듯했고 한구석 깨진 가마솥에는 벌겋게 숯불이 담겨 있었다.
  한눈에 약재 창고였다.
  사방 벽에 달아맨 여러 가닥의 시렁에 매달린 수백 접 마늘 냄새! 구석구석 엮어 이은 높고 낮은 건조대에 늘어진 것들은 고삼(너삼), 개오동나무, 그밖에 천정에 매달린 자루에서는 골당초며 작약의 싸한 냄새가 풍겨나고 있었고 맨바닥웨 멍석이며 크고 작은 바구니에 두름두름 묶어 쌓은 것들은 뿡나무 뿌리, 대풍수 가지, 그리고 단단히 마개를 하여 구석진 곳에 놓인 아름드리 큰 독에서 스며나오는 건 비릿한 뱀탕 내음이 었다.
  또 하나 그 곁의 뚜껑도 없는 작은 단지에서는 대풍수의 열매씨를 갈아낸 뱀탕에 못지않은 비리고 진한 냄새가 다른 약재 냄새와 함께 훈기에 어우러져 있었다. 그런 것들을 한눈에 바라보며 허준의 목구멍 속에 맹렬한 토기가 치받아왔다.
  이제야 그것들은 한낱 약재라기보담 대풍창 환자들이 뱉어 내놓은 대풍창 병균 냄새처럼 느껴진 것이다.
  김민세가 미소지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의원이 되려는 자가 약재를 보고 토악질을 느끼다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가 ..."
  "...?"
  "와서 이미 병자들을 보았으니 굳이 긴 말은 않겠으나 세상에는 반드시 낫울 수 있는 병만 있는 게 아닐세. 하나 병이 있다면 반드시 낫울 수 있는 약도 있다 믿는 게 내 고집이로세 ... 정 속이 메슥거린다면 골짜기에 내려가 실컷 토악질을 하고 다시 오게."
  "... 이제 괜치않습니다,"
  "처음 온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울 만도 하지. 나갔다 오게."
  "괜치 않습니다, 이젠."
  "그렇거든 게 앉아 몸이나 녹이며 얘기하지."
  김민세가 숯불이 이글거리는 가마솥 가의 통나무 긴의자를 가리켰다.
  걸음을 옮겨 그곳에 가 앉으려던 허준의 몸이 다시 흠칫했다.
  수많은 문둥이들이 앉아 불을 쬐었을 그 통나무의자는 그 환자들의 엉덩짝에 닳고 닳아 윤이 나도록 반들거리고 있었다.
  허준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대가 찾아온 용건은 내가 아네."
  하고 김민세가 입을 열었다.
  허준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란 사람 사지 멀쩡한 사람을 일일이 돌아보도록 호사가가 아닐세. 그렇다면 내가 그대에게 면천이 되는 길을 일러주고 힘이 되어 주는 대신 그대 또한 내게 해주어야 할 일이 있어."
  "그것이 확실히 면천의 길이라 한다면 대사님이 시키는 일 마다하지 않을 각오로 찾아왔습니다."
  "길게 잡진 않으리니 앞으로 1년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도웁다니요? 제가오니까?"
  "그렇네, 내가 보기 자네는 적임자인즉."
  허준이 눈을 문득 허공에 돌렸다. 건너 너와집 쪽에서 나무관세음보살을 외치는 환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환자들은 아마도 저렇게 밤을 새우는 모양이었다.
  "...?"
  "나를 돕는다 여기지 말고 사람 사는 고장에서 내쫓기어 저렇게 밤낮 없이 부처의 자비를 애원하는 저 사람들을 돕는다 여기어 ...!"
  "다행히 그대가 유의태의 문하에서 여러 해 동안 약초에 관한 적공이 있다 들었으니 같은 병을 앓는 저 사람들을 위하여 1년 기한하고 나를 도와 약초를 갈무리하는 소임을 맡아준다면 나 또한 그대가 신분의 병에서 벗어나는 면천의 길을 일러주리."
  "1년 ...?"
  "결코 더 길게 잡지는 않으리니."
  "이곳에서 말씀이오니까?"
  김민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허준의 입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저 사람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말씀이오니까?"
  "그러 하이."
  허준은 더 이상 입이 열리지 않았다. 1년이라는 말과 함께 오늘 산성 안에서 본 환자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을 지나갔다.
  등줄기엔 닭살 같은 전율이 돈아나고 있었다.
  "당장 대답을 하지 아니해도 되지."
  "...?"
  "수삼일 이곳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처지를 지켜보며 천천히 작심해도 늦지 않으리."
  "..."
  안광익의 음성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기왕사 잡을 사람으로 지목했다면 한두 가지 더 맡아야 할 소임을 마저 일러 줘야겠지."
  허준이 뒤돌아보자 안광익이 언제 들어왔는지 문간 안에 들어서 있었다.
  "한두 가지 더 맡아야 할 소임이라 하시면?"
  "너도 의원의 의자는 배운 터요 귀가 뚫렸으니 대풍창에 사람의 생간이나 인골류가 특효란 말은 들었을 터이다."
  '인골과 생간?'
  순간 김민세가 지금까지의 그답지 않은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건 속설일 뿐 나도 아니 믿어!"
  안광익이 그 김민세를 돌아보지도 않고 맞받았다.
  "아니 믿는 건 그대의 주장일세, 나는 믿는 쪽인즉!"
  "그 짓을 하여 과연 효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무덤 속에서 끌어낸 이미 죽은 송장의 간이나 뼈다귀로는 효험을 기대할 수도 없지!"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로도 병은 낫지 않아!"
  이번에는 안광익의 격한 소리였고 김민세가 무시했다.
  "그래서 병자를 살리고자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잡겠단 말인가."
  "세상엔 살아서 남에게 해만 끼치는 자도 많은즉, 못할 짓도 없지,"
  "매번 말하나 그건 그대가 아직도 못 버리는 부술을 위한 공부는 될지언정 다른 아무것도 아닐세. 암튼 그 얘긴 더는 거론 않기로 했어."
  "않기로 한 건 자네의 심성이지 난 맞장구친 바 없어. 자네는 자네가 믿는 바대로 나무뿌리를 달여 먹이건 가물치를 잡아 먹이건 또 약초를 뜯어 먹이건 자네 나름으로 낫워보란밖에 ... 난 내가 믿는 바대로 끝내 실험해볼 것인즉."
  안광익이 허준에게 다가왔다.
  "그러니 네가 이곳에 있고자 한다면 약초만 캐고 갈무리하는 일 외 두 가지가 더 있는 셈이다. 하나는 인근 저수지를 돌아다니며 가물치를 씨가 마르도록 잡아들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이사이 괭이와 삽을 싸들고 내 뒤를 쫓아다니는 일이다."
  숨을 삼킨 채 대답 없는 허준에게 안광익이 기탄없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나를 따라다니노라면 싫어도 부술 하나는 제법 통달할 경지에 이를 것인즉 ..."
  "아무리 면천의 길을 위해서라 해도 굴총에 살인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순간 안광익의 손가락이 허준의 면상을 향해왔다.
  "가소로운 소리! 의원 쳐놓고 병자의 생목숨 한둘 안 잡은 놈이 어디  있다더냐. 네가 하늘처럼 아는 유의태 또한 병을 잘못 짚어 애매한 생목숨 한둘쯤 안 잡았을 것 같으냐. 그런 실패를 딛지 않고서야 어찌 오늘날 저만한 의원이 됐을까 보냐. 내 말 어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개구리나 토끼가 아닌 남자 하나 여자 하나 진짜 사람의 뱃속을 갈라보고 싶지 아니하냐?"
  "그만두게!"
  김민세가 또 한번 노기 어린 소리를 외쳤다. 안광익이 계속했다.
  "더구나 너로선 면천과 의업 정진의 두 가지 이득이 있는 일이니 그야 말로 일석이조인즉 잘 생각해보아."
  이어 안광익은 김민세에겐 눈길도 안 주고 혼자 약재창고를 걸어나갔다.
  김민세의 입에서 시름을 담은 한숨이 새나오는 걸 허준은 보았다.
  너와집 쪽 환자들의 나무관세음보살 소리가 줄기차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밥을 새우는 모양이었다.

    5
  설핏 잠을 깨니 동창이 훤히 밝아 있었다.
  허준은 튕겨일어났다. 어젯밤 곁에 나란히 누웠던 김민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부자리도 말끔히 개켜져 있었다.
  허준은 어젯밤을 생각했다.
  관세음보살을 연호하며 울부짖어대던 환자들의 처절한 소리는 자정 북소리를 신호로 점차 가라앉았으나 약재창고에서 자기의 방으로 데리고 온 김민세는 허준과 함께 방에 누우면서 한마디 더 회유하는 말도 채근하는 말도 없었다.
  아니 딱 한마디 김민세가 말했었다.
  눕자 곧 코를 골기 시작했던 김민세가 한잠 자고 난 그 새벽 첫닭이 울던 무렵까지 그제까지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허준의 귀에 툭하고 뇌까리 던 소리 .
  "천수관음의 법력을 하루만 빌릴 길이 있어도 ..."
  그건 불을 끈 방안에 던져진 자기 혼자의 독백 같은 것이었고 허준이 놀라 돌아보자 다시 김민세는 코를 골기 시작했었다.
  허준은 그 김민세의 잠든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곰처럼 우람한 신체에 가슴에 모은 두 손은 여자의 손처럼 작고 섬세했다. 마치 그건 기형처럼 작은 손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자위에는 사바에서 겪은 고통을 얘기하듯 칠십늙은이 같은 굵은 주름이 잡힌 채 눈물이 괴어 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더 이상 김민세의 얼굴을 오래 보고 있지 않았다.
  잠결에서조차 눈물을 흘리며 부처의 전능함을 빌러 다니는 그의 비원이 감동스럽기는 했으나 자기로서는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다.
  1천 개 되는 팔과 손으로 사고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천수관음의 보도자항의 행적도 자기와 무슨 상관이랴 여기며 뒤늦게 깊은 잠에 떨어진 듯했다.
  귀를 기울이자 인적은 없이 요란히 가축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산성의 아침 생활이 시작되었나보다 여겼으나 내다볼 흥은 나지 않았다.
  내다보고 다시 확인한다는 것이 끔찍했다. 이 산성의 기억은 어젯밤 자기 눈으로 본 그 환자들의 썩고 죽어가는 면면만으로 족했다.
  자정에 이르도록 그 처절한 울부짖음도 쉬 잊혀질 광경 같지 않았다.
  '날이 새면 지체없이 떠나리라!'
  악몽에 시달리다 잠을 깨곤 바람에 휘감겨 덜겅거리는 문짝을 공포에 차서 바라보고 한 건, 그건 바람의 장난이 아니라 자신의 의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하리라는 안광익을 선두로 생간과 인골을 탐하는 환자들이 몰려와 문고리를 잡아흔드는 듯한 착각 때문이었다.
  '문둥이들과 1년 ... 그건 함정이야!'
  김민세나 안광익이나 그리고 궁녀 정씨가 어떤 처방으로 저 환자들의 병균으로부터 자기 몸을 지키며 한데 얼려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저 환자들과 고락을 함께 하며 같이 살 자신은 없었다.
  김민세도 안광익도 궁녀 정씨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되 같은 환자거나 그 가족인지도 모를 일!
  허준은 그렇게 생각했고 앞으로 1년 동안 여기에 붙들려 있다가는 필시 자기 또한 환자가 될 것이요, 그러고 나서야 면천의 소원은커녕 자기 또한 눈썹이 떨어지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참담한 모습이 되어 마침내는 가족과 생이별한 후 평생을 김민세 곁에 옭아매이리란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의 의술이 결코 범상한 경지의 것이 아님도 짐작한다.
  그러나 1년 동안 그들과 기거를 함께 하며 설사 저들의 의술을 전수받고 면천의 방법을 가르침받는다고 치더라도 그땐 이미 내의원 취재에 얼굴도 못 내밀, 콧등이 내려앉고 입술이 말려올라가고 손발조차 오그라진 대풍창 환자란달 때 의술이야 어느 경지건 내의원에 얼굴이나 내밀 수 있으랴.
  면천의 길이 뛰어난 의원이 되는 길이요 어의가 되는 길임은 들은 바다.
  '그렇다면 유의태의 아들조차 낙방한 내의원 취재에 입격하기 위해서는.'
  "그 길뿐!"
  아내의 말처럼 어머니의 말처럼 순서가 바꿔 방법이라도 좋다. 권세에 빌붙은 놈이라 조롱소리도 달가이 들으리라.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 하루 빨리 창녕 성대감을 뵈어 다시 소개장을 얻어 우선 내의원에 붙고부터 볼 일이다.
  '그곳에는 내외의 온갖 진귀한 의서도 구비돼 있을 것인즉 그 연후에는 독력으로라도 어의가 되는 길로 매진해가리라. 가자, 날이 새면 지체없이!'
  그 결심의 날이 밝아온 것이다.
  허준이 상투를 매는 손에 절로 힘이 가는데 문득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났다.
  허준이 방문을 열자 그 밖엔 뜻밖에도 궁녀 정씨가 나무대야에 더운 소세물을 담아 방문 밖에 놓아주고 있었다.
  허준이 인사치레로 방문 밖에 나서자 그녀는 조용히 묻지도 않는 말을  꺼냈다.
  "두 분께선 새벽같이 길을 떠났습니다. 모레 아침 나절에 돌아온다 하셨습니다."
  환자들의 목쉰 소리와는 다른 낭랑한 음색에 가까이 본 그녀의 눈빛은 한점 안개도 없이 맑았다.
  그리고 물일을 하느라 한겹 걷어접은 소매 끝의 손이며 분세수도 안한 얼굴이며가 백옥처럼 눈부신 피부를 지닌 여자였다.
  허준이 오히려 시선을 흘리며 물었다.
  "떠나다니 어디로오니까?"
  "거창 어간에 몇 사람 유랑하는 환자가 있다는 기별이 있어 데리러 갔습니다."
  "이미 여기 있는 사람만이 아니고 어디에 환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일부러 데리러도 가오니까?"
  "여항간에서는 어차피 섞여 살지 못할 사람들올시다. 버려두면 결국은 굻주림을 이기지 못해 도둑질을 하다가 맞아죽거나 가도 가도 반겨주는 이가 없으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말거나 ..."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일부러 불러모은단 말씀이온지?"
  "두 분 욕심은 그러하오나 인력도 한도가 있으니 ...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시겠지요."
  하며 그녀는 화제와는 달리 잠시 밝게 미소를 머금고 나서,
  "소세하시지요. 환자들과 같이 쓰는 물이 아니니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마음을 놓아도 된다니 댁에선 이 병을 어찌 알기에?"
  "잘 알지 못하오나 자주 들었고 뒷바라지하며 함께 사노라니 조금은 아옵니다."
  "들었다면 누구에게오니까?"
  "두 분에게서."
  얘기가 길어지고 있었으나 드넓은 대궐에서 세련된 탓인지 조신한 태도 속에서도 그녀는 말씨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두 분께선 이 병을 어찌 여기고 있사오니까?"
  "유전은 하지 아니하는 병이라는 것과 주거를 청결하게 하고 외로워도 서로 몸을 맞대어 체온을 탐하지 아니하면 병이 옳는 것을 웬만치 막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웬만치란 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방법은 아니오이다."
  "..."
  "오히려 내가 알기로 댁도 병자가 아니라면 하루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할 줄 압니다만."
  대답 대신 그녀의 맑은 눈이 기대를 가지고 허준을 향해왔다.
  "말씀하시지요."
  "처사님도 의업에 매진하시는 분이라지요."
  "그런 꿈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 제가 온 목적은 의업 때문이 아니올시다."
  "자세한 말씀까지는 모르오나 혹 이 산성에 머무실 양이면 매사 제가 길안내를 하도록 당부를 받았습니다."
  "길안내?"
  "특별히 보여 드릴 것은 없으나 약을 조제하는 방과 목간통을 여럿 갖춘 욕실이 있습니다."
  "목간통?"
  "보시렵니까?"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떠날 결심인 것이다. 약재실이며 환자가 드나드는 목간통 따위 구경할 이유가 없었다.
  그 허준의 침묵에 궁녀 정씨가 새삼 대담한 시선을 향해왔다.
  허준이 고개부터 저었다.
  "왔던 길은 허행이라 치고 곧 돌아갈 사람올시다. 보고 싶거나 구경하고픈 것이 없습니다."
  순간 궁녀 정씨의 눈속에 문득 안개 같은 것이 어리는가 했더니 곧 눈물이 되어 괴기 시작했다.
  허준이 당혹하여 외면하며 말했다.
  "저는 어느 분들처럼 흘홀단신도 아니요 처자식과 노모도 있는 몸올시다. 내 한몸 함부로 던질 처지가 아니올시다. 소셀랑은 내려가다가 하겠습니다."
  세숫물조차 신세지기를 거부하며 허준이 옷을 가지러 다시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문득 목멘 그녀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났다.
  "함부로라니요?"
  "...?"
  "두 분 다 목숨 걸고 하는 일올시다. 어찌 그것이 함부로 하는 일로 보이오며 또 ..."
  "그만두시지요!"
  "애초 처자식 없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어차피 나하고 상관없는 일올시다."
  "처자식은 어찌해도 이곳 사람보담은 편안히 사옵니다. 처사님도 정녕 의술을 지닌 분이시거든 저토록 애쓰는 저 두 분을 도와주소서!"
  허준이 그녀의 눈물을 외면하고 방안의 옷가지를 집어내어 꿸 때였다.
  "제발 그대로 가지 마소서. 이렇게 비옵니다."
  궁녀 정씨가 돌연 허준의 앞을 두 손을 모으며 가로막았다.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니오이다."
  허준이 날카롭게 외치며 그녀를 비켜가려 하자 이미 눈물을 거둔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서찰이 하나 들려 있었다. 머리위 성가퀴 위에 언제 나타났는지 어젯밤 북을 치던 소년이 여전히 북을 끼고 두 사람의 모습을 무감동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몸은 소년이되 소년의 눈이기엔 이 세상의 신산을 다 겪은 듯한 어두운 눈빛 ...
  그리고 그와 닳은 환자들이 멀리 가까이서 대치하여 마주선 두 사람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6
  "그것이 대체 무슨 서찰이오이까?"
  궁녀 정씨가 내미는 서찰을 무시하고 허준이 물었을 때 돌연 머리 위의 소년이 북을 둥! 한번 울렸다.
  허준은 소년을 무시하고 다시 궁녀 정씨를 대했다.
  "왔던 길을 후회하며 돌아가는 사람이오. 그런 내게 누가 그것을 내주더란 말이오?"
  "삼적대사께서 혹여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전해주라 당부하신 서찰이니 받아들고 가소서."
  "돌아갈지 모른다 하면서도 써준 서찰?"
  "이 안에 면천의 길이 적혀 있다 하더이다."
  "그건 1년을 이곳에 있고 나서야 알려준다 하였소. 한데 하루 사이에 돌아가는 내게 전해주라 하더란 말이오? 면천의 길을?"
  "그러셨습니다."
  허준이 궁녀 정씨의 손에서 빼앗듯이 서찰을 채들었다.
  서찰은 봉합하지 않고 그냥 두세 번 거푸 접은 그냥 쪽지였다.
  "이곳에 면천의 길이 적혀 있다고?"
  "그랬사옵니다. 하되 그건 처사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방생의 자비를 자식에게 일러주던 처사님 어머님의 지극한 불심에 대한 보답이노라고, 그 한마디는 전하라 하셨습니다."
  말끝에 궁녀 정씨는 저만치 여자 환자들이 눈을 쓸고 있는 약재창고로 향해 갔다.
  '어머님의 불심에 대한 보답?'
  허준은 그 서찰을 펴들었다.
  선인들의 어느 필체도 본받지 않은 김민세의 분방한 필적으로 여덟 자가 써 있을 뿐 육성에 대신하는 다른 한마디도 더 보태 있지 않았다. 그건 '의지일생 묘법존심'의 여덟 글자였다.
  '의원으로 나아가는 길은 따로 묘법이 없고 온갖 비방은 마음속에 있다.' 고 허준은 그 여덟 자를 풀었다. 그리고 그 "마음속"이란 환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리키는 말임도 알았다. 그러나 ... 이것이 면천의 열쇠라고?
  허준은 고소했다. 허망하고 분노가 치밀어왔다. 그가 바란 것은 좀더 확실한 손에 쥐고 뜯어볼 수 있는 보다 구체적인 증거였었다.
  '하나 의원이라 하여 어째 저처럼만 살 수 있으랴. 세상이 어찌 저의 입맛처럼 아름다운 것이며 의술 또한 반드시 그런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리라.'
  그러나 힘주어 신들메를 고쳐 매던 허준이 다시 정지했다.
  "돌아가긴 돌아가되 김민세란 인물을 더 좀 알고 가리라."
  구겨버릴 수도 없는 김민세의 여덟 글자를 쥔 채 허준은 약재창고로 향해 갔다. 깨진 솥의 예의 화로의 재를 담아내고 있던 궁녀 정씨가 나타난 허준을 무시했다.
  "한 가지 김민세란 인물에 대하여 알고픈 일이 있습니다."
  "...?"
  "내 듣기로 그 사람이 한때 내의원에 있었다 들었는데 그건 사실이온지?"
  "... 떠나는 사람에게 새삼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니까."
  "이 종이쪽하며 사람이 믿기지 아니해서 하는 소리오이다."
  "믿기지 않는다구요? 그럼 처사님의 눈으로는 그분이 이곳에 있는 것이 돈이나 버는 일로 보이옵니까?"
  "댁의 말도 알아들을 법하오나, 그러나 그도 내의원을 지향했더라떤 애당초 높아야 신분이 중인에 그칠 터인데 그 어렵사리 들어갔을 내의원을 뛰쳐나온 사단이 무엇인지 혹 그 사연을 아시는지?"
  "그분은 뛰쳐나온 적 없습니다."
  "자기 발로 도로 나왔단 말씀이온지? 왜오니까?"
  "궁금한 일이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가사에 가리고는 있으나, 또 비록 아직은 얼굴에 나타나지는 아니했어도 그도 대풍창 환자가 아니온지?"
  "그도 아니면 여기 있는 환자 중에 부모나 누가 있어 한이라도 맺힌 인물이던가!"
  침묵 끝에 궁녀 정씨가 허준의 의문에 도전이라도 하듯 짧게 대답했다.
  "아들이 있지요."
  "그랬군, 역시 ..."
  허준이 이제야 모든 의문의 실마리를 거머잡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없이 돌아설 때였다. 궁녀 정씨가 항의하듯 재빨리 부연했다. 
  "지금은 아들이되 피를 부어준 아들은 아니올시다. 함부로 넘겨짚지 마소서. 오히려 원수의 아들올시다."
  "원수의 아들."
  "저기 온종일 밤이나 낮이나 북을 두드리고 다니는 저 아이올시다."
  "원수의 아들이라고."
   허준이 다시 궁녀 정씨를 보자 웬일인가 그녀의 눈엔 금시 눈물이 가득 괴고 있었다.
  "...?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으리까?" 
  "만일 그분의 기막힌 사연을 들으신 후라면 처사님께선 저 불쌍한 우리 형부의 일을 도와준다 다짐하시오니까."
  "삼적대사라는 저분이 댁의 형부가 된단 말이오?"
  "다짐하시오니까."
  허준은 대답 않고 약재창고로 들어가 어젯밤의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본명이 김민세인 삼적대사의 과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가다가 격정에 목이 메이곤 했으나 그러나 더 많이 차분하게 그녀는 얘기를 이어갔다.
  내의원-그 내의원에서 김민세는 선대 명종임금 때부터 금상왕의 양대에 걸쳐 부동의 권위로 어의의 자리를 지키는 양예수의 대를 이을 어의의 재목으로 가장 촉망받는 사람 중의 선두주자였다. 
  22살에 내의원에 첫등으로 등제, 그 연소한 나이를 보고 시관 양예수는 재삼재사 김민세의 재능을 손수 실험해본 뒤 그를 편애에 가깝도록 감쌌다. 그리고 자기 뒤를 이을 사람은 김민세노라 공공연히 자랑 했다.
  그런 시기에 유의태라는 또 한 사람의 의술의 준재가 나타났으나 오히려 양예수는 김민세의 경쟁이 될 유의태를 일부러 떨구어 유명한 구침지희의 사건조차 치른 것이다.
  그러나 정작 김민세는 그 나이에 그 출세에 대면 교만을 떨어 흉이 아닌데도 남들이 다투어 넘보는 세자궁이나 빈궁전의 시의를 마다하고 왕실의 시탕에 약재를 조제하는 약국의 건재약재창고나 탕약방에 드나들며 온갖 약재의 조제와 증험을 비교하는 데 더욱 열을 올리며 오로지 재미는 그것뿐인 듯했다.
  그 외가닥 성미로 인해 그는 삼십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양예수의 강권에 가까운 중매로 궁녀 정씨의 언니에게 장가를 들었다. 부부의 나이 차가 십여 년이나 벌어지는 부부였으나 현직 어의의 중매요 장래 어의의 물망에 오르내리는 신랑감이었으므로 처가도 영광으로 알아 그녀의 언니는 김민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부부의 금술이 남달리 도타웠음에도 정씨는 혼인 3년 후에야 아들을 낳았을 뿐 더는 생산이 없었다.
  그러함에서 길상이라 이름지은 외아들은 부부의 남다른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비극은 그 길상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친정 부모의 회갑을 맞아 큰방상궁(상궁 중 가장 높은 직위)의 처소에 나인으로 있던 그녀가 허락을 받아 친정인 관악산 아래 탑골에 이르러 행복한 언니와 조카 길상이의 귀여운 재롱을 본 것도 잠깐, 잔치가 끝나고 함께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장마비에 불어난 한강에 물이 줄어 뱃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노들나루의 주막에 하룻밤을 묵은 새벽이었다.
  길상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자매가 함께 방을 들었고 자매를 전송해온 오라버니가 윗방을 정하였기에 아침에 잠을 깬 자매는 길상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어도 그 장난꾸러기가 언제 오라버니의 방에 건너가 재롱을 떠나보다 여기어 무심했었다.
  그러나 한나절이나 되어 겨우 주워들은 건 더욱 불길한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어제 저녁 마을 앞을 문둥이떼가 지나가는 걸 보고 마을 젊은이들이 몽둥이질하여 내쫓았다는 ...
  설마 하면서도 그 소문은 더더욱 식구들의 가슴을 방망이질치게 했고 오라버니는 아직도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사공에게 큰 돈을 약속하고 혼자 강을 건너가 김민세에게 아이의 실종을 알렸다.
  윗전의 시탕 대령을 위해 내의원에 나가느라 처자와 동행하지 못했던 김민세가 직처를 달려나와 다시 강을 건너 주막에 도착한 것은 여름날 긴 해도 이미 서산에 기운 황혼이었다. 울다 지쳐 눈도 못 뜨는 아내를 진정시킨 김민세도 이 감쪽같은 아이의 실종을 유랑하는 문둥이패의 짓으로밖에 다른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생각이 이에 미친 김민세는 저도 몰래 만나는 사람들에게 문둥이패를 보지 못했느냐 물어댔고 그중 한 사람의 대답이 오늘 이른 아침에 문둥이 몇 사람이 과천 쪽으로 가는 걸 봤다는 한마디였다.
  과천은 일곱 살짜리가 길을 잃고 헤맬 수 있는 거리와 반경 밖이었다.
  그러나 김민세는 그가 의원인지라 문둥병엔 사람의 간과 인골이 특효라는 민간에 떠도는 그 속설을 알고 있었고 더구나 유괴의 당사자가 자기의 자식임에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몇 줄기의 오솔길을 헛짚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미친 듯이 수소문해 달리기 이틀 밤 사홀 낮 그러나 가는 도중에도 그렇게 곤두박질해 도착한 일산리에는 지난날 병자들이 살던 움막은 남아 있었으나 오래 전부터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폐허였다.
  앞장섰던 지관도 마침내 맥이 풀려 주저앉았고 김민세에게 한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혹시나 그 동안 아이를 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요 우리가 너무 성급히 넘겨짚은 게 아니냐며 달래는 그 맡이 끔찍한 상상에 전율하던 김민세에게 위안이 되긴 했으나 일단 그쪽으로 의혹을 품은 김민세의 가슴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애초 구름잡는 얘기였다며 더 이상은 흥이 나지 않는 지관을 먼저 떠나보낸 김민세는 지관이 짚어봤던 마지막 산길로 혼자 접어든 것이다.
  찾고 있으나 그렇게 찾아선 아니 될 아들이었라. 그 불행한 상상이 백에 하나 맞아떨어져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민세의 운명은 그 백에 하나 맞아서는 아니 될 운명의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7
  그 운명의 길 -
  그 산길은 좌우의 골이 깊어 거의 한 낮이 되는 시각인데도 햇살이 들지 못한 채 장마의 물기가 배어 습한 공기만 떠돌 뿐 인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김민세가 죽음과 같은 정적에 싸인 산길을 더듬어 이윽고 산날망에 을랐을 때였다. 뜻밖에 그곳에는 비에 풍쳐 찌그러져가는 서낭당이 돌배나무와 돌무더기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 앞에 나어린 며느리를 데린 칠십노파가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그 가파른 산길에서 만난 사람의 모습을 보자 반가운 헛기침이라도 했어야 할 김민세는 오가며 지나치는 사람마다 수백 번 물은 그 질문을 또 하고 만 것이다.
  옷은 이러이러한 옷을 입고 나이는 얼마이고 모습은 이러이러한 아인데 흑 누가 데리고 가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고.
  순간 대답도 기대하지 않았던 두 고부가, 문득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입을 다물었다. 
  더럭 의심을 먹은 김민세가 다그쳐 묻자 자기들은 이편 골짜기에서 아들과 함께 숯을 구워 생업을 하는데 바로 어제 새벽 아들이 참나무 등걸을 굴리러 가던 중에 저쪽 산비탈에서 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자세히 보니 웬 노부부가 아이를 업은 것 같기도 하고 자루를 멘 모습 같기도 한데 길도 없는 그 산길을 헤쳐가더라는 소리를 듣고선 자기들도 무서워서 손주아이를 종일 방안에 가두고 아들이 지키고 있노라고 했다.
  짐승 같은 신음을 틀어전 김민세는 이들이 손짓해주는 산마루를 넘다가 과연 이상한 발자국 둘을 찾았다. 
  상대가 길 아닌 길을 가고 있었기에 정체 모를 두 사람의 발자국은 장마에 젖은 산비탈에서 용이하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발자국은 눈 아래 마을이 보이는 지점에서는 방향을 바꾸어 다시 산속으로 숨어들어 사라지고 그 방황 속에서 김민세가 마지막 찾아낸 두 사람의 발자국은 주위에 마을이 보이지 않는 강변으로 잘려들어간 가파른 모래 언덕이었다.
  주위는 무성한 갈대와 무심한 물새떼들이 천국을 이루어 날고 있었다.
  그 낮이 가고 황혼 땅거미가 너울거리는 시각. 갈대 숲속에서 발자국을 잃은 김민세의 미쳐 헤매는 눈앞에 돌연 그 움막집이 나타났던 것이었다.
  돌아보니 인적도 없이 아득한 정적과 어둠에 싸여 있는 이상한 강변은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면 이런 시각 차마 헤매고 다닐 생각이 안 나도록 음산했다. 
  그런데-다가간 그 움막의 오지 굴뚝에 소리없이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온몸이 떨리도록 불안했다.
  김민세는 다가갔다. 마당에는 괴괴한 정적뿐, 방안에저도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오직 굴뚝의 연기만이 유일한 생물처럼 하늘로 머리를 풀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엌 쪽만 쌓은 그 묵은 돌각담 아래에서 김민세는 보지 않았어야 할것을 보고 말았다. 그건 아들이 외가에 간다 하여 김민세가 대궐에 신발을 공급하는 갖바치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지어다가 제 손으로 신겨줬던 아들의 신발 한 짝이었다. 그리고 그 곁엔 아들을 돼지새끼처럼 담아 메고 왔을 커다란 마대가 던져져 있었다.
  김민세는 눈을 씻고 씻으며 그 신을 보았다. 틀림없이 아들의 신이었다. 무늬가 낯익었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발의 크기를 뼘으로 재어다가 주문해준 신인데 왜 모르랴.
  눈이 뒤집힌 김민세가 아들의 이름을 절규하며 마루에 뛰어오르며 방문을 열어 젖혔다.
  그 방안에서 눈으로 발견하기보다 먼저 코끝에 맡아진 건 속이 뒤집힐 듯이 진한 마늘냄새였고 방도 부엌도 한데 이어진 그 거적바닥에는 상상했던 중년의 두 환자가 이팔이 넘었을 여자아이 둘과 국솥을 싸고 둘러앉아 있었다.
  아들은 방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 어디 갔나!"
  김민세가 아들의 신발짝을 내보이며 외쳤다. 순간 한 눈이 빠진 환자의 정한 외눈이 김민세를 향해왔다. 뒤이어 들고 있던 여자 환자의 국사
발이 무릎에 떨어졌고 딸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목쉰 소리였다.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던 김민세가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방을 뛰쳐나왔다. 이어 그 김민세가 돌각담 앞 잿간 위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 손에 들고 일어난 건 아들의 신을 집어들 때 눈에 비친 쇠스랑이었다.
  김민세가 다시 방으로 뛰어들었을 때 문둥이 부부는 서로 한데 쓸어안고 그 김민세를 무저항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김민세는 그 애비의 성한 눈속에 번쩍이는 눈물을 본 듯했다. 그러나 이미 김민세의 쇠스랑은 천정과 벽의 거적을 찢으며 내려꽂히고 있었다. 그 부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얼굴의 살갖이 엉겨붙은 두 딸도 표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건 괴기한 광경이었다.
  피를 뒤집어쓰며 죽어가는 부부 어느 쪽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고 무저항으로 죽어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두 딸을 끌어안으려 했다. 딸들 또한 그 애비와 어미를 잡으려 무어라 외치고 있었으나 김민세는 그 무엇도 듣지 못했다. 문둥이의 피도 붉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거푸거푸 쇠스랑을 찍어대며 오히려 울음이 터지고 울부짖는 건 김민세 쪽이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미친 듯한 노호와 몸부림 속에서 김민세 또한 피바다 속에 고꾸라졌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 국솥을 받쳤던 질화로가 쇠스랑에 맞아 박살이 났고 그 불씨들이 거적과 문짝 대신 달아놓은 갈대발에 옮겨붙어 온 방안이 매캐한 연기에 싸여 있는 속에서 김민세의 멍한 눈에 천정에까지 퍼가 범벅이 된 지옥의 광경이 들어왔다. 갑자기 연기가 불길로 바 뀌었다.
  그 불똥들이 머리 위에 수없이 떨어지고 방바닥이 소리내어 타오를 때야 김민세는 다시 통곡을 멈추었다.
  갈대밭 위에 바람이 불고 있었고 그 너머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등뒤에선 움막이 온통 불길에 싸여 천정이 내려앉고 오지 굴뚝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 불타는 소리를 등뒤로 들으며 아들의 신발 한짝을 움켜쥔 김민세는 허우적거리며 강변으로 걸어갔다.
  강변 무성한 갈대밭에 흐르던 안개가 사라지고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빗소리 사이로 인기척 하나가 마주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민세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것이다. 한 사람도 아닌 네 사람을 ...
  김민세는 이 길로 관아에 나아가 자신을 고발할 결심이었다. 새삼 누구의 눈에 띈들 상관이 없었다.
  빗발 속을 헤치고 나타난 건 도롱이를 쓴 소년이었다. 순간 김민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서너 칸 저쪽 앞 우뚝 마주선 도롱이를 쓴 소년은 다름아닌 길상이 자기 아들이었다.
  그 옷, 아버지도 외가집에 함께 가자고 조르던 파란 물감을 들인 낯익은 그 옷.
  김민세는 전율했다.
  김민세의 온몸이 떨렸다.
  "길상앗!"
  외치며 뛰어들자 돌연 그 길상이가 잽싸게 물러서며 다시 거리를 만들었다.
  "...!"
  김민세는 눈을 부릅떴다. 흘러내리는 빗물을 쓸었다.
  착각이었다. 역시 길상이가 아니었다. 길상이의 옷은 입었으되 그건 또 한 사람 7, 8세의 어린 문둥이였다. 그 어린 문둥이는 피를 뒤집어쓴 무서운 김민세의 형상하며 불타고 있는 자기 집을 보고 사태를 안 듯했다. 뒷걸음쳐 도망칠 듯하던 소년이 돌연 김민세를 향해 울음 맺힌 목소리로 고함쳤다.
  "난 사람을 해치지 아니했소. 난 내 병을 고치고자 뱀하고 가물치만 잡아먹고 다니오!"
  이어 내미는 그 손에 들린 지겟막대기에는 올가미에 목을 죄인 뱀 한 마리가 칭칭 감겨 아직 단말마의 몸짓을 하는 중이었고 다른 한 손에는 강변 칡으로 아가미가 케인 가물치가 두어 마리 꼬리를 퍼덕거렸다. 김민세가 다시 다가서자 소년이 또 뒷걸음치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 옷은 아버지가 던져주기로 입었을 뿐입니다."
  말끝에 소년이 옷을 벗어 김민세에게 내던졌다. 아직 병반이 얼굴에 채 안 퍼진 소년의 가녀린 목이 김민세의 눈에 더없이 슬퍼 보였다. 김민세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어린 문둥이를 쓸어안았다. 그리고 김민세는 통곡했다. 굵어진 빗발이 소리내어 두 사람의 모습 위에 쏟아지고 있었다.
  -기어이 궁녀 정씨의 목이 잠기며 얘기가 삼켜졌다.
  허준이 재촉했다.
  "그래서요, 마저 들려주시지요."
  냉정을 회복한 궁녀 정씨가 다시 김민세의 얘기를 계속했다.
  쏟아지는 빗발속에 강물이 온통 끓어오르듯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문둥이 소년을 한 팔에 끼고 김민세는 강물을 타고 헤엄쳤다. 김민세의 목에 두 손을 감은 채 자기 또한 죽을 곳으로 끌려가는 게 아닌가 어린 문둥이는 소리내 울어댔다. 김민세가 외치고 있는 소리는 "나를 용서해다오. 내가 너를 기어이 낫게 해주마." 였다.
  그 소리를 수없이 외치며 이윽고 강을 건넨 김민세는 그 길로 밤을 도와 서울로 향하며 과천 어간 인적 뜸한 물레방앗간에 소년을 기다리게 하고 서울로 달렸다. "내가 기어이 네 병을 고쳐줄 것이니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수없이 다짐하고 다짐한 채.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원으로서 비록 천형의 환자일지언정 네 사람씩이나 살인을 했다는 사람으로서의 양심 따위가 쓰려서 소년과 약속을 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만도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자기 눈앞에 나타난 저 대풍창이라는 참혹한 병에 연민을 느낀 한 의원으로서 새로 눈을 뜬 것이었다.
  세상에 하늘이 있다면 저럴 수 없다 싶었다.
  "네가 저 병을 못 고치면 내가 저 병을 고치리라!"
  서울로 오는 동안 김민세는 구름 사이로 파랗게 드러난 그 조각난 하늘을 너라고 타매하며 수없이 주먹을 내둘렀다.

    8
  나흘 만에 나타난 남편이 내놓은 아들 길상이의 외짝 신발을 본 아내는 김민세가 보고 행한 얘기를 듣다가 컥컥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다가 기어이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밤 사이 미치고 만 아내는 무서운 힘으로 말리는 사람을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갔고 그 아내의 시체는 밝은 날 마을의 우물 속에서 김민세가 들고 온 아들의 외짝 신발과 함께 발견되었다.
  아내를 장사지낸 다음날 김민세는 직처인 내의원에 들어가 어의 양예수를 만나 자초지종 얘기할 만큼 냉정해져 있었다.
  "그래 그 아일 그곳에 감춰뒀다면 그놈을 어쩔 셈인가?"
  양예수의 말에 김민세가 대답했다.
  "그 아이는 제 양자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 문둥이를?"
  "그러합니다."
  "내 자식을 잡아먹은 문둥이의 자식을 양자로 삼아? 자네 미쳤나!"
  "소인의 마음은 이미 정했사옵고 내일 내의원을 떠나겠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뵙지 못하겠지요."
  "이사람! 정신을 차리게."
  "의원이 되어 흉기를 들고 네 사람의 생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건 관아에서도 변명할 수 있어! 결코 자네의 죄가 아니야. 그 죌랑은 내가 벗겨주리니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게."
  "아무도 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제가 다시는 그 사람들을 되살려놓지 못하듯이."
  "그들 따위에 괘념치 말라지 않는가. 그들은 인간도 아닌즉슨!"
  "그들의 피도 우리 피처럼 붉었습니다. 소인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들은 문둥이라는 병자였을 뿐올시다."
  이레 동안이나 잠을 못 이룬 김민세의 핏발 선 눈이 양예수에게 꽂혔고 그 무엄한 눈빛을 탓하지 않고 양예수가 다시 달랬다.
  "자넨 내 뒤를 이을 사람일세. 그렇게 촉망하는 건 나 혼자만의 안목이 아닌 걸 모르는가."
  "..."
  "알거든 그 살변의 수습일랑 내게 맡기게. 장차 왕실의 시탕을 맡을 막중한 재목인 사람이 항차 그까짓 문둥이 몇쯤 해를 입혔기로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그들은 자네의 자식을 해친 오히려 흉악범이거늘."
  김민세는 더 듣지 않았다. 이미 몸을 일으켰고 카악 노여운 눈을 치뜨는 양예수에게 말했다.
  "오늘날까지 공사간에 여러 지침을 주신 은혜 잊지 않으오리다. 또 제가 살변의 정범이라 의당 스스로 관아에 자수를 해야 하나 그리 되면 저 어린것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을 것이옵고 그렇다면 저 아이 역시 종당에는 제 애비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하와 소인은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마침내 말리지 못할 결심임을 알자 양예수가 마지막으로 타일렀다.
  "성한 사람이 어찌 문둥이와 함께 살 수 있나. 마음이 가라앉아서 다시 내 말이 기억나거든 다시 돌아오게. 자네는 다시 이 곳에 와야 해. 가는 곳은 지금 미리 내게 알려놓고."
  "정처는 없사옵고 분명한 건 소인 또한 영영 세상 빛을 보지 아니할  결심올시다."
  그 말을 끝으로 김민세는 대궐을 떠났다. 김민세가 양자 길상이를 끌고 두류산에 이르러 때에 세상을 유력하던 휴정으로부터 낙식(삭발)을 주재받아 세상으로부터의 번뇌를 끊은 후 부자는 중이 되었다.
  그 길로 김민세는 다시 불탄 집터로 내려와 잿더미 속에서 자기가 죽인 자들의 뼈와 아들의 뼈를 한데 추리어 뒷산에 무덤을 써 하룻밤 그 무덤 앞에서 회오의 눈물을 뿌린 후 산음의 유의태를 찾아 그의 도움을 얻어 이곳 안점산 돌성 안에 너와집을 지어 정착했고 불경에 정진하는 일방 또 일변 세상을 유랑하는 이들을 불러모아 살아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장차의 어의로 촉망받던 그의 의술에도 불구 그 긴 세월 그가 대풍창에 관하여 알아낸 것은 이 병에는 양성과 음성이 있으며 성인이 되기 전 어린 나이에 쉬 병에 걸린다는 것과 주거를 청결하게 않고는 더욱 번진다는 것, 그밖에 시고 맵고 짠 음식이 모두 병을 도지게 하는 무거운 병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아직 상처가 깨끗이 치유되거나 사지와 얼굴을 본모습으로 낫우는 방법을 찾지 못한 체 빌고 속방에 의지해 살아오는 절망의 나날이었던 것이다.
  "그 길상이란 아이가 성가퀴 위를 오가며 밤낮없이 법고를 두들겨대는 그 아이오니까?" 
  하고 허준이 긴 얘기를 마친 궁녀 정씨를 건너보며 새삼 물었다.
  "그러합니다. 그 아이가 이곳에 와서 근 7년을 형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길상이올시다."
  "한데."
  하고 허준이 다시 말했다.
  "난 어젯밤베도 아까도 그 길상이란 아이의 눈을 보았소. 내가 관상까지는 볼 줄 모르나 그 아이의 눈이 결코 소년의 눈이라기엔 심상치 않는 눈이었고 더구나 양부의 자애에 훈도된 아이의 눈 같지가 않더이다. 그 눈은 오히려 지금은 비록 김민세 그 사람을 자기의 양부로서 받들지 모르나 그 양부가 자기의 살부지수인 걸 쉬 잊지 않는 그런 눈이었소."
  대답 대신 궁녀 정씨가 입술을 물었다.
  "...?"
  "그 점을 제 지아비되는 이도 대사님께 일깨워줬습니다."
  "지아비라면 안광익 그 사람이?"
  "그분은 관상에 능한 분을시다. 그래서 길상이의 눈엔 항시 살기가 떠 있으니 그 아일 떠나보내라고 권했지요. 만일 무슨 일 저지르면 자네의 목숨 하나가 아까운 게 아니라 그대를 의지해 이 산성에 모인 수십 명 병자들을 위해서라고. 또 그대는 앞으로 모여들 병자들을 위해 오래 살아야 할 사람이라며 ..."
  "그랬더니."
  "그랬더니 얘기가 그것도 사람의 길이지, 그 말만 합니다."
  "그것도 사람의 길?"
  "제 부모를 죽인 자를 눈앞에 보면서 원수를 갚지 아니하면 어찌 그것이 사람의 자식인가 하고."
  "그럼 장차 저 아이가 자기를 해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키우고 있단 말씀이오?"
  "앙갚음을 당해도 한마디 변명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하셨지요. 남은 병자들을 위해 한 가지 구원은 길상이의 불심이 깊어져서 사바의 악연일랑 가슴속에서 지워지길 바랄 뿐이다, 그런 말씀도 ..."
  순간 그 끝에 누가 시키기나 한 듯이 또 길상의 법고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다보니 건너 성가퀴에 등을 기대 버티고 서서 언제부터 자기들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허준은 그 어린 문둥이를 마주보았다.
  북채도 없이 손가락이 오므라든 그 두루뭉수리 손으로 북을 두들겨대는 길상이의 썩어가는 손이 허준의 눈앞으로 가득히 다가오는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착각-고름이 썩어흐르고 상처 진물이 풍기는 악취 또한 마치 생물의 냄새처럼 허준의 코에 자꾸만 맡아지고 있었다.
  "두둥 두둥둥둥 따닥 둥둥두두둥"
  묘한 북소리였다.
  참고 있는 토기도 북소리를 따라 목구멍을 자꾸만 치닫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달래도 그때뿐올시다. 언제 어느 절에서 훔쳐온 건지 작년 가을 며칠 성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며 저 북을 메고 왔습니다. 그리곤 밤도 낮도 시도 때도 없이 저걸 울려댑니다."
  "영문을 물어보았사오니까?"
  "대답도 않습니다 ... 어찌 보면 어릴 적 그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번민에 몸부림치는 모습 같기도 하고 죽어서 극락에도 지옥에도 들지 못하고 원혼이 되어 떠도는 부모형제의 넋을 불러 위로하는 몸짓 같기도 하고."
  "그런 아름다운 맘씨를 가진 아이 같진 않소."
  궁녀 정씨가 한숨을 들이쉬고 또 뱉었다.
  '언젠가 자기를 죽일 것을 각오한 채 원수의 자식을 키우고 있는 사내-김민세.'
  허준은 그 김민세를 통해 또 한번 엄청나게 넓은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성문을 지나니 문둥이들이 닦아놓은 길이 산허리까지 깨끗이 비질자국 까지 난 채 이어져 있었고 밀림으로 접어든 오솔길도 올라올 때의 고생을 비웃기나 하듯 산아래로 편안히 뻗어 있었다.
  허준에게 궁녀 정씨가 재삼 이 산속 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하여 김민세와 안광익을 도와 남아주기를 간청했으나 허준은 "좀더 생각해보리다." 그 말을 남기고 안점산을 뒤로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리다." 하고 칼로 끊듯 궁녀 정씨를 뿌리치기 위한 대답은 남겨놨으나 허준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자기를 알고 있었다.
  김민세의 반생이 비장하여 자칫 솟구치는 협기와 함께 앞으로 1년 그들을 도우며 안점산에서 '의지힐생 묘법존심'이라는 여덟 자로 집약한 김민세의 의술과 안광익의 부술을 낱낱이 배워보리란 미련이 없는 바 아니나 1년은커녕 단 한 달도 저 참혹한 대풍창 환자들의 소굴에서 버틸 자신은 없었다.
  '그 길뿐이야.'
  허준은 안점산에서 십리나 걸어온 취암산 비탈을 오르며 자신에게 말했다.
  '면천도 좋지만 문둥이가 되어 처자식에게 돌아갈 순 없어. 그건 일가가 함께 문둥이가 되자는 말일 것인즉. 이 길로 창녕 성대감에게 가서 소개장을 다시 받으리라.'
  허준은 취암산을 넘자 집 쪽이 아닌 합천 쪽으로 길을 잡았다. 창녕 성대감 집을 목적으로 한 이상 그 합천은 창녕으로 향하는 지름길일 터였다.
  그러나 머리를 내저으며 자꾸만 떨쳐버리려는데도 귓가엔 길상이가 울려대던 법고소리가 멀어가는 안점산의 거리와는 관계없이 자꾸만 들려왔다.
  "결코 그곳에는 아니가!"
  허준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다짐했다.

    [  8.한양으로 ]
    1
  아침밥도 점심 요기도 거르고 있었으나 창녕 성대감댁으로 달리는 허준의 걸음은 도망치듯이 바빴다.
  의지일생 묘법존심-그 여덟 글자 속에 면천의 길이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기는 했으나 자기는 도저히 김민세의 행동을 본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도 아내도 자식도 자기와 헤어져 살 것을 원치 않을 것이요 허준 또한 가족과 헤어져 살 순 없었다. 더구나 안형이 부식하고 사지가 오그라든 환자들의 그 끔찍한 모습이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들의 모습 위에 잠시나마 겹치는 상상만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 뇌리 속으로 환자들이 삼적사 좁은 법당 안에 모여앉아 외쳐대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소리가 계속 들려왔으나 허준은 김민세와 안광익이 있는 안점산 쪽을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자기의 발자국을 따라 그 문둥이떼가 산모퉁이를 돌아 떼를 지어 쫓아오는 모습이 보이는 듯해서였다.
  '성대감의 소개장을 다시 받아 독력으로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길뿐!'
  밤을 도와 창녕으로 달리는 허준은 이젠 오로지 그것만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 허준의 그 마지막 꿈은 창녕 못미처 물슬천나루에 이르러 깨어지고 말았다.
  백리 이상 쉬임없이 달려온 그가 마침내 체력이 다한 채 나루터에 다다랐을 땐 밤 오경은 실히 넘은 새벽이었고 이미 창녕 경내에 이르렀으니 의관을 정제하리란 생각으로 사공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사공집엔 창녕 장터를 찾아드는 장돌뱅이 서넛과 중갓을 쓴 몇 사람 과객들이 한방 가득히 자리에 눕고 술도 마시는 모습으로 왁자했고 사공의 아내가 연신 어두운 강 건너에 욕을 퍼부으며 일변 손들의 술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영문을 물으니 건너 갈대숲에 낚싯줄을 건지러 건너간 사공이 배도 건너보내지 않은 채 움막 어디에 술취해 자빠져 있어 아침녘에야 건너올 낌새라는 것이었다.
  이에 허준도 손들의 술추렴하는 방에 들어 옷을 갈아입다 보니 돌아앉아 술을 마시던 사나이가 만석이라 불리는 성대감집 늙은 하인이었다.
  허준이 아는 체를 하자 만석이가 벌떡 일어나 "허의원님, 허의원님." 하고 반색을 했다.
  그러나 방안의 시선이 모두 돌아보는 속에서 만석이가 제 일인 양 자랑스레 꺼낸 사정은 허준의 기대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소식이었다. 성대감이 저지난달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거를 청산하고 다시 예조판서로 출사했는데 지난달 초에 동지사의 직책으로 출국했으며 정경부인 또한 한양 북촌의 가회방 서울댁에 가 계시다는 것과 지금 자기는 막내따님이 출가한 진주 사돈댁에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노라고 묻지도 않는 말까지 보태었다.
  "그럼 대감마님의 귀국 예정이 언제쯤이시오?"
  "사행차 가시면 빨라도 두세 달 또 더러는 대국의 구경도 하시면서 한 반 년 지나서 돌아오시기도 합지요. 옛날 부사로 가실 제 저도 의주까지 수행한 적이 있어서 압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오실 날짜는 알 수 없단 말이외까."
  "그거야 소인 같은 것들이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한데 허의원님께선 이 창녕엔 어인 일이십니까?"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마님의 차도를 전해들은 모모한 댁에서 허의원님을 소개받고자 여러 차례 산청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한양 어디로 옮기셨다고 들었습니다만."
  "..."
  허준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기가 한양으로 옮겨갔다고 소문낸 것은 임오근과 꺽새 들의 모함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자들을 원망할 흥미도 없다. 분명한 건 의지하려던 희망의 끈이 무참하게 끊겼다는 사실이었다.
  "그 뒤 정경부인 마님께선 나날이 평안하오시오?"
  허준이 간신히 웃음을 지으며 자기의 초라한 심정을 감추고자 묻자 그 물음에 되돌아온 대답도 의외였다.
  "마님께선 그 뒤 병이 재발하셨었지요."
  "재발이라니 언제쯤?"
  "허의원이 돌아가시고 한 달쯤인가요. 병세가 워낙 호전하여 자칫 마음을 놓으신 것이 원인이고 또 중풍은 물로 씻은 듯이 완치는 어렵노라고 그 뒤 불려온 유의태 그 양반이 말씀하더이다."
  "유의태 그 사람이 다시 불려왔었단 말이오?"
  "허의윈님을 부르러 갔다가 이미 산청땅에 안 계신다 하매 대신 그분 부자가 함께 오셨지요."
  "...!"
  "결국 다시 유의태 그 분이 병을 바로잡긴 합니다."
  다시 웃어 보이려던 허준은 어색한 웃음을 짓고 만석이의 술잔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거푸 권하는 술잔을 사양도 없이 목안에 쏟아부었다. 천정과 벽은 얼음장 같은데 방바닥은 쩔쩔 끓는 방이었다. 만석이가 또 한 병 술을 청하는 소리를 들으며 허준은 술기운과 엄습하는 피로를 못  이기고 그렇게 방안에 쓰러져 깊은 잠속으로 떨어져갔다.
  ... 한가로운 물새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눈을 뜬 허준의 귀에 문 밖 눈보라 소리가 한층 음산했다. 방안엔 새벽의 선객들도 만석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잠결에 주모가 돌아온 늙은 사공과 욕을 주고받으며 다투던 소리를 들었고 주모인지 사공인지 누군가 방에 드나들며 방문이 여닫길 적마다 얼굴에 섬뜩섬뜩 느껴지던 강변 찬바람을 기억했다.
  그러나 허준은 누워 있었다. 술은 깼으나 온몸이 뭇매나 맞은 듯이 욱신거린 채 이대로 걸어나갈 기력이 없을 것 같았다. 백리길 뜀박질해 달려온 발바닥이 퉁퉁 부은 채 삽자리를 눌을 듯이 뜨거운 방바닥에서 팥죽처럼 물러 있었으나 그 살가죽은 땡땡 얼어서 남의 살처럼 감각이 없었다. 동상이었다.
  그러나 허준의 의식은 그 동상에 가 있지 않았다. 이날 그의 악몽의 주인공은 유의태였다. 자기가 미처 손보지 못한 병의 뒤처리를 유의태가 끝낸 일이며 그 유의태가 아들 도지를 대동한 건 허준 자기가 미처 소홀히 한 그런 병의 뒤처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눈물이 비쳐나오고 있었다. 외로웠다. 머리맡 문풍지를 울리며 자꾸만 떠는 강변 설한풍만큼이나 허준의 가슴속을 불어치는 건 때아닌 외로움이었다.
  고명한 아비로부터 일일이 손잡아 의술의 진수를 가르침받는 도지의 처지가 온몸이 떨리도록 부러 웠다.
  쓰러진 후 허준의 혼백이 또 한 차례 배회한 건 안점산 문둥이촌이었다. 아니 허준이 달려간 것이다. 잠결에 떠들썩하던 선객들의 소리가 궁녀 정씨의 소리로 바뀌었고 문둥이들의 떠드는 소리, 길상이의 북소리, 김민세와 안광익의 웃음소리와 고함소리로 바뀌어 두번 세번 가위가 눌리듯 허준은 버둥거리고 헛소리를 쳤었다.
  문둥이굴로 뛰어드는 길 이왼 세상천지 누구도 어디에도 자기의 내미는 손을 잡아줄 손이 없다는 것을 되씹으며 그 의지가지없는 자기라는 사내를 하늘처럼 믿고 사는 처자식과 어머니를 떠올렸다.
  '불쌍한 사람들.' 
  겨우 자기 같은 자를 택하여 아내가 된 사람, 겨우 나 같은 자에게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들, 겨우 나 같은 자를 세상에 둘도 없는 보람으로 여기고 사는 어머니 ... 뒷방문을 열어 어지러이 나부끼는 강변 눈보라를 하염없이 내다보며 허준은 이윽고 주모를 불러 술을 청하여 마시기 시작했다.
  "눈길에 막혀 못 떠나셨구려."
  눈보라 속에서 해가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할 수도 없는 저녁 나절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사공과 함께 강을 건너온 중갖의 사내가 허준을 보자 환한 눈매로 인사를 했다. 
  "누구시온지?"
  "새벽에 나도 이 방에 있었소이다. 그래서 성대감댁 하인의 하는 얘기로 댁이 허준이란 분인 걸 알았었소."
  "저는 세상에 드러난 이름이 아니올시다만?"
  "겸손한 말씀, 헛헛."
  사내는 먼길을 떠나온 듯 서너 벌의 의복이 들었을 보따리와 여벌의 갓을 담은 갓집도 메고 있었고 몸의 움직임은 몸속에 두어 꾸러미의 전대를 찬 동작이었다.
  "난 밀양서 의원 짓을 하는 박갑서라 하는 자올시다."
  "의원이라고요?"
  "예, 밀양서 3대째 의원을 하지요. 그리고 지난해 유의태 그 양반의 문하에 허준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성대감댁 정경부인의 병을 일차 낫우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지요. 반갑습니다, 헛헛."
  "아 예 ... 허준올시다. 우선 몸도 녹이실 겸 잔을 받으시지요."
  "아니올시다. 이 눈에는 고개마다 길이 막혔을 테니 어차피 오늘은 술이나 마실 일밖에 없는데 제가 상을 차리지요. 이보게 주모!"
  "아니올시다. 받아놓은 상이 있으니 개의치 마시고 먼저 받으시지요."
  박갑서가 스스럼없이 잔을 받은 후 주모 대신 나타난 사공에게 새로 술상을 청하고 나서 허준을 보고 친구처럼 환하게 웃어보였다.
  "성대감댁 정경부인 병을 듣고 실은 나도 사람을 보내어 내가 낫우어 보겠다 청을 넣었었는데 그만 내가 한발 늦어서 노형이 그 기횔 잡았지요. 핫핫."
  "그랬었습니까."
  "하긴 나야 유의태의 이름을 덮을 만한 실적은 없고 보니 나를 지목하란 법은 없고 또 내가 갔다고 해서 반드시 성과가 있었을지는 장담은 못합니다마는 헛헛 ... 드십시다."
  사내가 남은 술을 허준의 잔에 채워주고 자기 잔을 들었다.
  허준은 생면부지의 자기에게 대뜸 도전장 같은 말을 던져온 사내를 건너보았다. 허준에게 사내가 넘치는 기운으로 자기 잔을 쨍그렁 부딪쳐왔다. 머슴방에서나 통할 방자한 행동이었다.

    2
  길 떠날 초입이라 노자가 든든한 건지 태어난 성정이 활달한 건지 키는 작으나 불거진 광대뼈가 완강해 보이는 박갑서는 술이 고래였다.
  초면에 술잔을 주고받는 조심스러움 따위는 일찌감치 털어버린 그는 두 병째 술병이 비워나갈 때 호기 있는 소리로 사공에게 걸찍한 안주라는걸 시켰고 날궂은 날 때아닌 큰손을 만난 사공 부부가 요란히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잉어회에 메기 매운탕이 곁들여 나오는 큰 술상으로 변했다.
  그 동안 그가 독판으로 떠들어댄 얘긴 자기네 집이 밀양바닥에서 상당히 알아주는 의원이라는 것과 자기는 특히 부인병을 잘 보노라는 자랑에 지난해에도 동래까지 가마로 모셔져가 동래부사 소실의 은밀한 병을 치유해주었노라며 스물이 갓 넘은 계집의 속살이 어찌나 매끄럽고 고왔던지 그 모습이 하도 삼삼하여 며칠씩 몽정을 쏟았노라는 시답잖은 패설이었다.
  과연 그의 의술의 정도를 알게 된 것은 이젠 술독이 바닥이 났다며 여섯 병째의 술병을 채워온 사공 마누라의 비명이 난 후였다.
  박갑서가 새삼 자기 혼자 떠들고 있음을 깨달았는지 아직도 술이 안 취한 눈으로 허준에게 물어온 것이다.
  "한데 한양 올라갔다는 노형은 어찌 다시 이 고장에서 뵙게 되오?"
  유의태와의 관계를 누누이 얘기할 흥미가 없는 허준이,
  "그냥 잠시 왔지요."
  하고 대답하자 그가 갑자기 궁금한 얼굴로 물어왔다.
  "참 이번에 내의원 취재에 응하시오?"
  허준이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형씨는?"
  "보다시피 이렇게 떠나는 길 아닙니까. 아예 일찌감치 한양에 올라가 준빌 할 양으로."
  "지금 떠나는 길이다?"
  "집안이 대물림으로 의원을 벌여왔지만 윗대엔 감히 내의원 쪽을 쳐다 보지도 못했던 재주들이라 가문 한번 빛내보라 하면서 조부캉 아부지가 나보다 성화라 남 먼저 상경하는 길이지요. 마침 이쪽에 처가가 있어서 인사 겸 들렀다가 막바로 떠나는 길인데 형씰 만난 거요. 형씨는 이번에 안 봅니까?"
  허준이 대답없이 자기 잔에 자작하는 걸 보다가 사내가 다시 물어왔다.
  "한데 허의원은 내의원에 줄이 닿아 있는 사람이 많을끼라."
  "내의원에 줄이라니?"
  "시장에서 시관으로 나설 그런 떨거지들 말이오."
  "없소."
  "알면 나도 낍시다. 듣자니 전직 내의원에 있던 인물들이 유의원하고 교분이 두텁다는데 노형도 이래저래 모를 리가 없잖소."
  허준이 갑자기 상대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맨입에 안될 건 각오하고 있고 나도 응분의 사례는 할 테니 연줄을 잡아봅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부탁 좀 합시다."
  "... 오늘 술에 안주에 정말 잘 먹었소이다."
  "형씨를 만나 기대가 컸는데 영 실망이 크오."
  "내게 기대를 하다니 무엇을 기대했단 말이오?"
  "새벽에 노형이 허준인 걸 안 채 그냥 처가에 갔다가 눈길에 다시 허둥지둥 달려온 건 이 눈길에 노형이 오늘 하루는 이 집에 갇혀 있으리란 생각과 그렇다면 노형이 아는 연줄을 나도 같이 보려고 해선데 괜히 헛걸음친 꼴이 됐지 뭐요."
  허준이 고소했다.
  "대체 어떤 책들을 읽었소?"
  "글쎄."
  "황제내경소문이란 책을 보았소?"
  "..."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의서 중에서도 고전으로 친다는 책이오만 내의원 서고에 꽂힌 희귀본으로 밖으로는 나돌지 못하는 책이지만 더러 내의원의 관원들이 필사하여 꿍쳐나와 높은 값으로 내다 판다는 소문도 있소만, 본 적 있소?"
  "있는 것 같소."
  박갑서가 바싹 다가앉았다.
  "한 질 다 보았소?" 
  "한 질이 다 있는 건 아니고 스무남은 장 필사한 건데 이법방의론편인가로 기억되오."
  "그건 무슨 내용입디까? 온갖 비방이 그 안에 있다고 들었소만 ..."
  "무슨 비방이 적힌 그런 책은 아니었소." 
  "그래요 ...? 나는 침구편만 보았소만."  
  "그럼 형씨가 본 그 안엔 침술의 비방이 써 있습디까?"
  "... 아니오. 그렇진 않았소. 진맥의 법을 발견하고 시작한 원조가 편작이라고 써 있는 그런 외는. 그래 노형이 보았다는 그 편에 써있는 내용은 무업디까?"
  "의술은 각 지방의 특색과 생활환경에 따라 발달했다는 그런 말이 적혀 있었던 걸로 아오."
  "자세히 얘기해보오."
  "의술이 재주이긴 하되 그 재주가 만인에게 다 먹혀들어가는 재주는 아니다 하는 그런 뜻이었고," 
  "더 자세히 얘길 해보오."
  "의원이 병을 볼 때 병자가 어떤 기후의 지방에서 어떤 생업을 하던 사람인가를 미리 알아야 한다는 그런 얘기였소."
  "답답하오. 더 자세히 얘기해보시오."
  "그건 중국인이 저들의 땅과 사람을 머리에 넣고 본 것이라 맹목적으로 따를 얘긴 아니지 않소."
  "아, 지금 우리 의술이 따로 있소. 다 중국 것을 가져다 사용하는 거지, 그래 책내용이 뭡디까?"
  "동쪽은 바닷가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고기잡는 것을 주업으로 삼으니 생선과 소금을 많이 먹으므로 곪고 썩는 피부병이 많아 돌칼로 살을 째고 고름을 빼고 상처를 아물리는 치료법이 발달했다."
  "그리고 ..."
  "서쪽은 불모의 산악지대라 사냥과 광업을 주업으로 하는데 기후가 급변하는 지역이라 두꺼운 옷과 기름진 음식을 주식으로 하여 내장질환이 많아 독한 탕약을 쓰는 치료법은 그 서쪽지방에서 생겨났고 ..."
  "북쪽은?"
  "땅이 고지대인데다 기후가 차고 인간들은 유목을 위주로 생활하며 짐승의 젖과 고기를 주식으로 하니 혈행이 원활치 못하여 뜸 뜨는 법이 거기서 발달했다 뭐 그런 얘깁디다."
  "또 남쪽은 뭐요?"
  "남방은 습기가 많은 평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주식 또한 곡물이 위주라서 혈행 장애와 근육에 병이 잦아 이를 풀어주는 방법으로 침술이 생겨났고 또 중원이라 칭할 지역은 산세가 평탄하고 기후가 고르나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는 까닭으로 자연 정치와 장사의 중심이 되는데 그러나 이들은 노동보다 머리를 쓰며 사는 일이 위주가 되니 몸의 운동이 부족하여 빈혈과 사지의 위축을 가져와 안마나 뜨거운 탕 속에서 몸을 담그는 도인법이 발달되었다는 등 ..."
  "그리고?"
  "내가 안건 그 정도의 내용뿐이었소."
  "가만 내가 그것들을 적어야겠소."
  박갑서가 휴대용 필묵을 꺼내 다시 일일이 물으며 적기 시작했다.
  말은 활달해도 공부에 힘들인 필체가 아니었다. 허준은 박갑서에게 또 한번 실망하고 있었다.
  박갑서를 만난 것은 허준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의 등불이 켜진 역할을 했다.
  팔도의 취재 지원자 중 과연 어느 정도의 인물들이 모여들지 짐작할 길은 없다. 그러나 듣고 본 대로 실기의 연륜은 깊었으나 의서가 유통되지 않는 세상에서 의술에 대한 그들의 이론은 빈약했다.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가류대로 물려받은 얘기와 눈대중의 실기가 병을 낫우기는 커녕 오히려 병을 더 도지게 하고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을 희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허준의 머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적어도 삼대를 의원으로 가업을 삼는 자가 이토록 이론에 어둡고 철저하지 못한 것은 허준이 오늘 박갑서를 보며 느낀 의외의 사실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론과 실제를 겸한 도지는 최상급의 응시자란 생각과 도지의 의술의 정도를 아는 허준은 새 용기가 솟았다.
  실기의 연륜은 짧다. 집으로 찾아온 병자를 보아주었던 일 그리고 창녕 성대감의 아내 그 정경부인을 낫운 것이 허준이 겪은 실기의 전부였다.
  그러나 박갑서의 정돈되지 않은 이론을 목격하면서 허준의 가슴속에 켜진 조그만 희망의 불꽃이 급속도로 어떤 자신감으로 불어나는 것을 허준은 깨달았다.
  망설이지 말고 부딪쳐보리라, 지금 내가 어느 정도인가. 누구의 도움도 거역하고 내 독력으로 부딪쳐보리라! 내의원 높은 벽이 무너지건 내 머리가 벽 아래 산산이 깨지는 좌절을 맛보건 ...
  잠든 박갑서를 깨워 작별인사를 할까 했으나 그대로 행장을 챙기고 방을 나선 허준은 불 꺼진 아랫방의 주모를 깨워 자기의 밥값과 술값을 치르자 마지막 남은 짚세기를 꿰고 덧끈을 발등에 힘있게 묶어 죄었다 ... 밖은 다시 눈보라였다.
  나 같은 사내를 믿고 남편으로 택한 아내, 나 같은 사내에게 태어나 아버지라 부르며 따르는 아들과 딸, 나 같은 사내를 생애의 보람으로 사는 어머니, 그들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줘야 하리라. 남의 신세나 의지하려 허둥거리며 이대로 주저앉아 그 무엇도 보여주지 않는다면 ...
  '그건 하지하짜리 사내일 뿐!'
  눈보라 속으로 나서며 허준이 자기 자신에게 힘있게 외쳤다.
  "한양으로!"
  무릎이 빠지는 설원 위로 눈발을 몰아 회오리바람이 불어치고 있었다.
  허준의 옷자락이 깃발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집으로 향하는 허준의 온몸에는 아버지와 생이별하며 용천을 떠나던 그날의 그 뜨거운 피가 오랜만에 다시 팽팽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3
  안점산 문둥이떼들의 얘기에 이르자 숨을 삼킨 채 숨도 못 쉬던 손씨와 허준의 아내는 이윽고 귀로에 지목하고 간 창녕 성대감을 만나지 못하고 이제야 독력으로 내의원 취재를 목표하여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감격한 손씨가 아들의 손을 쓸어잡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고 아내 또한 울음을 삼킨 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두 달 반올시다. 올라갈 노정을 생각하면 길어야 두 달 ... 촉박한 시일임에는 틀림없으나 내 몸이 부서질 걸 각오하여 취재공부에 매달릴 겯심이오니 노자의 말을 믿어주시어 다시 한번 참고 견뎌주소."
  "여부가 있느냐,"
  "만일 이번 길 또한 실패하거나 내의원 취재가 소자의 능력보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것이라면 깨끗이 손을 털고 다른 길을 택하오리다."
  "걱정 말아라. 에미만 견뎌준다면 나야 평생이라도 참을 것인즉 ..."
  뒤꼍 자기 방으로 건너온 허준이 말했다.
  "꼭 붙어보겠소. 믿어보시오. 꼭 붙어보일 것인즉."
  이젠 의원짓 그만두리라며 이까짓 것들 불쏘시개나 하라며 부엌 바닥에 내던져버렸던 수많은 처방전이며 그동안 베껴 모았었던 의서의 비망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자기의 서탁 위에 놓여 있는 걸 보았던 때문이었다.
  좀처럼 자기 자랑이나 섣부른 결심을 꺼내지 않는 허준이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표현했고 대답 대신 아내는 남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창녕 그 강변에서 여기 오는 동안 내내 김민세 그 사람의 경우를 생각했소. 자식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 마침내 자기의 일생을 던져 그 끔찍한 병자들과 기거와 고락을 함께 하는 그 사람의 결심을 ...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소. 나 또한 나를 믿고 사는 가족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노라고."
  "옷 갈아 입으소서."
  "그러리다."
  "그리고."
  "얘기 하오."
  "상화 그분이 어제도 다녀가고 아침에도 다녀갔습니다."
  "무슨 얘길 합디까?"
  "서방님께서 요즘 어찌 지내시는가 궁금하여 들렀다 하면서 아이들에게 엿뭉치와 연값이라며 잔전도 쥐어주고 갔습니다."
  "고마운 사람이오. 나는 무엇 하나 힘이 되어 준 바가 없는데 ..."
  "시장하실 터이니 진지상 차리겠습니다."
  "점심까지 해먹을 처지는 아니지 않소. 기다렸다가 저녁이나 식구들과 함께 먹읍시다."
  "따로 차리는 점심이 아니올시다. 계시나 아니 계시나 어머님이 늘 서방님의 진지를 따로 떠놓으시곤 하셨습니다."
  "... 사내란 죄많은 것들이지."
  허준이 문득 자기 자신에게 탄식했다.
  "미안한 노릇이나 난 집을 떠난 후 그렇게 조석으로 어머니나 당신을 오매불망하진 아니했소."
  아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처녀적의 아리따운 그 미소였다.
  허준이 집에 돌아온 엿새 후 저녁 상화가 건너왔다.
  그리고 콩자루 속에 동상 걸린 두 다리를 담근 채 의서의 비망기들을 암기하고 있던 허준으로부터 그 동안의 얘기와 현재의 결심을 듣자 일변 안타까워했다.
  김민세와 안광익이 안점산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가를 알고 소스라친 눈이었고, 4월초에 있을 내의원 취재에 성대감의 후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이 탄식하며 지금 도지가 얼마나 맹렬하게 취재 준비에 골몰하고 있는가를 누누이 알려주었다.
  도지 본인의 결심은 물론 유의태 또한 아들의 취재에 도움이 되라며 왕진이 있을 제는 딴때완 달리 자기 아닌 도지를 수행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얘긴 나도 들었네. 창녕 성대감댁에도 부자가 함께 갔었다는 것을."
  "부자 두 분만이 아니라 임오근 그 사람까지 세 사람이 동행했습니다."
  "..."
  임오근-
  창녕에서 자기의 성공을 시기하여 자기와 유의태와의 관계를 끊은 임오근의 노란빛 냉혹한 눈빛이 허준의 뇌리에 되살아났다.
  "임오근 그 사람의 집념도 대단합니다. 스승님께서 도지 그분께 공부를 시킬 적이면 부르는 자리가 아닌데도 스스로 찾아들어 함께 듣고 배우고 합니다."
  "..."
  "그 열성에 스승님도 감동이 되시는지 근자에는 첫새벽 병사에 찾아드는 병자들의 초진을 두 사람에게 맡기시고 처방을 각자에게 따로 적어내게 하시어 틀렸다 옳다 매일 손잡아주시고요."
  한참 침묵하던 허준이 말했다.
  "아우님은 이번에 응시하지 아니하오?"
  "저 같은 거야 연기도 일천하고 아직 멀고 멀었습니다. 하지만 제 꿈 또한 내의원에 있으니 딴 사람보담 형님 같은 분이 먼저 내의원에 올라가 계시기를 바라고 바랐었는데. 진작 성대감의 소개장을 활용했다면 이번 일 땅짚고 헤엄치기였을 것을 ..."
  "성대감 얘긴 이젠 않기로 하지."
  "도지 그 사람도 일차 떨어졌던 취재올시다. 시제들이 결코 만만하진 않을겝니다."
  "그럴테지!"
  "더구나 남들은 수년씩 준비하고 골몰해온 일을 겨우 두 달밖에 아니 남았다면 ..."
  "무모한 줄은 알고 있네. 그러나 흘려보낸 세월 이제 와서 후회한들이지."
  "꼭 보셔야 할 책이름 기억나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본다 핑계하고 수삼 일씩은 몰래 가져다 보실 수 있을 겝니다."
  "..."
  "생각나는 책이름 있습니까?"
  "그럴 수 있겠는가?"
  "될 겝니다. 요즘 그 두 사람은 독서는 끝난지 오래고 실제의 임상체험을 쌓는 중이니 손맡의 책 몇 권 잠시 눈에 안 보인다 한들 두리번거리지 않을 겝니다."
  코끝이 시큰했다. 허준이 벌겋게 젖어오는 눈으로 상화의 손을 굳게 잡고 흔들었다.
 . "고맙네, 정말 정말 고마우이."
  -두 달 ... 밤도 낮도 없이 60일 동안 허준은 대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상화가 몰래 내다준 십여 권의 책들 중 몇 권은 허준의 코피로 얼룩진 채 유의태의 서가로 되돌아갔다.
  집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긴장 어린 정적에 싸여 있었다.
  밥을 먹으라거나 옷을 갈아입으라거나 일상의 전갈도 끊은 채 어머니도 아내도 뒤꼍 허준의 방 쪽을 드나들지 않았고 아이들 또한 마당에서 놀지 못하고 밭두렁과 냇가에서 놀라는 어머니의 엄명을 따랐다.
  긴 겨울을 견딘 주변의 고목에 연두빛 봄잎이 돋고 한층 발랄한 잡새소리가 들리던 3월초 허준은, 도지는 나귀를 타고 임오근은 도보로 그리고 도지의 견마잡이가 된 상화가 한양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 허준의 손맡에 있는 몇 권의 책을 회수하러 온 상화가 그 소식과 함께 그들의 느긋한 노정을 얘기했다.
  "시일이 임박하여 올라가면 마음이 각박하여 취재를 그르칠지 모른다하여 일찌감치 떠난다 합니다. 그리고 이 책들은 한양에 거처를 정한 후 다시 훑어본다기예 가지러 왔습니다. 그 동안 보실 만큼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간 애써주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내. 내 이 공을 결코 잊지 않으리."
  가위질도 잊고 그 동안 더부룩하게 수염이 덮인 얼굴의 허준이 치사했다. 미처 못다 본 아쉬움이 컸으나 돌려주지 않으면 아니 되는 타인의 책들이었다.
  "그럼 형님께서는 언제 발정할 생각이십니까?"
  "노자도 부실한 형편이라 미리 떠날 주제는 아니 되고 일단 길을 나서면 공부도 아니 될 터이니 단 한나절이라도 더 짐에서 공부를 보태다가 한 열흘 앞두고 떠날 작정일세,"
  "한양까지 8백40리올시다. 8백40리를 열홀 만에 간다 함은 너무 촉박한 여정이 아니올지?"
  "다리도 다 나았으니 충분하네."
  허준이 담담하게 웃자,
  "그러나 혹 봄장마라도 들면 강물이 불어 길이 막히는 수가 전혀 없다 할 수 없으니 2, 3일은 여유를 지니고 떠나소서."
  "그러겠네. 그럼 4월초 한양에서 보세."
  상화를 돌려보내고 허준이 오랜만에 어머니의 방에 들르자 방안에는 구수한 찌개냄새가 진동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나 피라미 매운탕이었다. 그건 아들의 취재를 곧 과거로 여기는 어머니와 아내가 천리길 등정에 앞서 아들에계 체력을 붙여주려는 너무도 어렵사리 마련한 정성일 것이었다.
  그 민물요리는 허준의 출발을 앞두고 여러 날 상 위에 올라왔다. 일가의 형편으로는 구할 수 없는 육류를 대신한 그 국그릇을 비우며 허준이 집을 나선 것은 취재의 날짜에 열하루를 남긴 3월 하순이었다.
  "자손의 이름이 방에 오르려면 삼대 조상이 돌보고 주변 사람의 정성이 하늘에 사무쳐야 한다는데 ..."
  그만 들어가라는 허준의 말을 귓결에 흘리며 근 시오리길을 따라와 현북쪽 백야현원의 작은 나루에서 건너오는 나룻배를 기다리다가 손씨가 뇌었다.
  나룻배가 닿자 다섯 켤레의 미투리를 단봇짐과 함께 멘 허준이 배에 올랐다. 강심으로 떠나가는 나룻배 위의 아버지에게 겸이와 숙영이가 "아버지, 장원급제 하이소." 하고 할머니와 입버릇을 들었는지 작은 손을 입에 대어 함께 소리소리 질렀으나 떠나는 허준도 보내는 어머니와 아내도 뜨거운 시선을 서로에게 향한 채 군말을 않았다.
  드디어 허준이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전기에 들어선 이날 뿌연 안개가 덮인 강변의 봄볕이 새로 돋는 능수버들가지에 더 없이 평화로웠다.

    4
  집을 떠난 지 닷새하고 한나절 거창 . 무주 . 영동 . 보은을 꿰어 허준은 충청도 청주에 이르러 이윽고 거치른 소백산맥을 밤도 낮도 없이 답파해온 고달픈 다리를 쉴 생각이 났다.
  하루에 백여 리씩-그 닷새 동안 그는 산음. 한양간 8백40리 중 5백50리를 걸어 이제 한양까지 남은 노정은 2백90리였다.
  앞으로 엿새의 여유가 있었다.
  지금까지의 보폭보다 반을 줄여 하루 50리씩만 가도 느긋이 가 닿을 거리만 남은 것이다.
  아직 노독을 느끼지도 않았고 싸구려 주막에서 조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으나 스물여덟 탄탄한 육체는 새벽마다 쾌변으로 속을 비웠고 그 하루하루 낯선 주막에서 신들메를 고쳐 매고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새 희망에 차 있었다.
  무주에서도 보았고 보은에서도 보았었다. 무주 주막에서 본 그들은 전라도 쪽에서 올라오는 의원들인 듯했고 어젯밤 보은 주막에서 한방에 든 인물들은 경상도와 강원도 쪽 어디에 사는 의원들인 듯했다.
  모두 의원으로서의 생활이 가난은 면한 듯 안색들이 좋았다.
  적어도 그 응시자의 일행 속에서 갓도 없이 패랭이를 쓰고 결이 곱고 촘촘한 왕골 미투리 한 켤레도 갖추지 못한 채 짚세기를 꿴 건 허준이 뿐일 듯하므로 ...
  하나 그런 외양이 허준을 기죽게 하지는 않았다.
  애초 그는 번드르르한 외양 따위에 신경을 쓰는 것과는 성격이 멀었다. 지난날 용천땅에서 천출인 주제에 군수인 아버지의 위세를 업고 큰갓을 쓰고 다닌 객기가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 지금은 등에 소름이 돋도록 부끄러웠다.
  속알맹이가 제 것이 아닐 때 잘 먹고 잘 입은 외양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가를 적어도 그는 뼈저리게 체험한 인간이었다.
  그런 외양보다 지금 그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나 한나절씩 아니 단 한 시각이라도 절실하게 아쉬웠다.
  지금 허준이 그 아쉬운 시간을 더욱 금쪽같이 아끼는 방법은 한시바삐 한양에 닿아 내의원 근처에 조용한 거처를 빌린 후 차분하게 취재 준비의 마지막 점검을 해보는 일이요 한양에 닿기 전에는 함부로 사람 많은 방에 끼여들어 쓸데없는 객담 따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결심이었다.
  주막에 또 한패의 길손들이 들이닥쳤다. 행색으로 보아 모두 내의원 응시자임이 분명했다.
  또 한판 술자리가 벌어질 것을 예상한 허준은 애초 오늘은 이 청주에서 쉬리라던 생각을 털고 그 주막을 나섰다. 30여 리 북쪽 진천까지 가서 조용한 주막을 찾아보리란 생각에서였다.
  주막을 나서 십리가 채 못된 지점 공북루란 곳에 이르자 십여 명 선비들의 시회라도 열린 듯 화사한 봄풍경 속 그 누상에 아리따운 기생의 시 읊는 소리가 낭랑했다.
  누외장강강상산
  동풍영유송춘한
  (다락 밖에는 긴 강이요 강 위에는 산인데 동풍이 버들을 날려 봄추위를 보낸다.)
  천하게 태어난 자들이 자신의 일생의 운명을 걸고 천리길을 허위허위 밤을 도와 걸어가는 길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분 잘난 양반들의 그 봄맞이 놀이는 허준의 다리힘을 일시에 빼놓듯이 한가로웠다.
  그러나 허준은 더 이상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한가로운 인간과 바쁜 인간으로,
  '이제 2백 40리 ...' 
  진천 서남쪽 시오리에 위치한 태령산 언덕배기의 주막에 이르러 짚세기를 꿴 발등의 덧끈을 풀어 벌겋게 달아오른 발을 주막 앞 냇물에 담가 짜릿한 아픔을 지그시 깨물며 허준이 마음속에 뇌었다.
  1년만 자기 곁에 있어 달라던 김민세의 제의와 안광익의 강권을 뿌리치고 그들이 일시 몸담았던 내의원에 독력으로 도전해가는 자기의 결심이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 있으랴 여기면서도 아들 길상이의 죽음으로 인해 보장받은 어의에의 영화를 버리고 문둥이굴에서 여생을 보내는 김민세의 극기 모습은 생각날 적마다 허준에게는 커다란 감동이었다.
  설사 의원의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실수와 죄를 그토록 자기 자신에게 엄하게 양심으로 다루며 사는 김민세의 모습은 자기가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거대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동정해서가 아니었다. 김민세 그 정도의 인간이고서야 어의의 자리가 내다보인다 여겨지자 갑자기 김민세에 비해 자기의 존재가 얼마나 초라한 몰골인가를 느끼져 그 어의에의 첫 관문일 취재의 합격이 갑자기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절망감이 왔다.
  '내 재주가 어느만치인지 직접 부딪쳐 스스로 확인해보리라!'는 결심은 한낱 오기일 뿐 얼마나 허황한 욕심인가도 ...
  '그러나!'
  허준은 황혼의 낙조 속에 반짝이고 있는 일명 길상산이라는 태령산을 바라보며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듯 입밖에 뇌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고말고."
  산속 주막은 해가 지자 아주 조용했다.
  포기하고 있던 길손이 한 사람이라도 찾아든 것이 반가운지 심지가 무던해 보이는 중년의 주모는 국밥에 술 한잔을 청해 마시고 자리에 누운 허준에게 으레 목침이나 들여놓는 주막방인데 푹신한 배개를 들여놓아 주었고 취재차 한양에 가는 길이란 말에 등잔도 새 심지로 갈고 담뿍 기름을 채워 밤중에 글을 읽을 허준을 기쁘게 해주었다.
  그 허준이 삭정이에서 송진이 타는 향긋힌 군불 내음을 맡으며 잠에 떨어졌을 때 였다.
  비몽사몽간에 누군가 귓결에서 "허의원" "허의원"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가 귀에 익어 눈을 뜨니 뜻밖에도 그건 벌써 도지, 임오근 등과 한양에 당도해 있어야 할 상화였다.
  "그대가 여기 어인 일인가?"
  튕겨 일어난 허준이 정말 믿을 수 없어서 묻자 상화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허준의 손을 잡고 흔들며 연신 웃었다.
  방안에는 상화뿐이 아니라 오던 길에 수없이 본 취재차 상경하는 의원들의 하인과 소년들이 7, 8명 이미 눕기도 하고 코를 골기도 하면서 만원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길 떠난 후 도지들은 일정에 여유가 있어 백여리 걸음을 돌아 소문날 단양팔경을 구경차 향했다가 그곳의 산수에 취하여 한양서 공부할 시일을 그곳에서 자리잡아 보낸 후 마악 한양으로 떠나오는 길이노라고 했다.
  "단양에서 이쪽이라면 지름길이 아니지 않나?"
  허준이 산음에서의 사연이야 어떠했든 수백리 타관의 한 주막에서 해후하게 될 도지와 임오근의 안부를 반겨서 묻자,
  "지름길이 있는데 지난번 취재 때 그 길로 갔다가 낙방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지 이번에는 새 길만 골라서 왔습니다. 하긴 나귀 타고 가는 처지니 길 좀 돌기로 다리 아플 까닭은 없겠지요. 또 덕분에 나도 이름난 산천경개를 여러 군데 구경했구요. 하하, 건너가시렵니까?"
  허준이 방문을 나서자 도지가 타고 온 나귀가 마당 구석에 매여 그 커다란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고 딴채 불이 환한 큰방에는 7, 8명의 사내들의 글 읽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면서 일행이 된 사람들올시다."
  "일행?"
  "단양서 만난 사람도 있고 중도에서 만난 사람들도 있고, 모두 내의원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올시다."
  그러나 허준이 기척을 내고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
  반색해 손이라도 잡을 듯하던 허준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각자 벽에 기대기도 하고 자리에 엎드려 서첩을 뒤적이는 5, 7명은 낯선 인물들이었고 그 한쪽에 술상을 받아놓은 임오근은 허준의 웃는 낯을 향해 마치 낯선 침입자나 보듯 눈길이 날아왔다가는 들고 있던 술잔을 비워 건넛사람에게 권하며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고 도지 또한 이불뭉치를 보료삼아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보고 있다가 허준의 목례에 고개만 끄덕했을 뿐 자세를 고쳐앉으려는 태도도 없이 다시 책장에 눈길이 갔다.
  허준이 오히려 무색해졌고 그런 허준에게 임오근의 술잔을 받아든 사십 나이나 됐을 사내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뉘요?"
  허준이 잠시 앉지도 물러나지도 못한 채 서 있자 그 사내가 다시 말했다.
  "보다시피 이 방은 꽉 찼소. 이부자리도 벼개도 모자라니 다른 방을 청해 보시오."
  임오근이가 짐짓 허준을 무시하듯 그 사내에게 부인병에 관한 얘기를 계속했다.
  대목이 세종조에 찬집된 향약구급방 중의 한 내용이었다.
  대작하던 사내가 낮게 맞장구쳤다. 술잔은 들었으나 내용이 분명하고 자세하여 만만치 않은 실력이 엿보이는 사내였다. 
  그 사내가 아직 서 있는 허준에게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밤새 공부하는 사람들이 자는 방이니 어서 나가보시오."  
  도지가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걸 보며 허준은 그 방을 나왔다.
  방 밖에 섰던 상화가 민망한 얼굴을 했으나 허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상할 것도 없다 싶었다. 산음에서 그러하듯이 타향에서 만났다고 하여 갑자기 말문이 터지고 매사 화해가 되리란 것은 착각일 것이기에.
  방으로 돌아온 허준은 상화와 짧은 정담을 마치자 방자들이 요란히 코고는 그 방에서 보따리를 풀어 자기 또한 읽을거리를 찾아들었다.  .
  그 곁에 자리를 편 상화도 묵묵히 입을 다문 채 허준을 방해하지 않았다.
  윗방에서 도지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 밤중이었다

    5
  이날은 집을 떠난 지 엿새째.
  하루 백리씩 그 엿새 동안 6백 리를 달려왔건만, 그리고 오늘 하루는 마음놓고 쉬리라 작정을 했는데도 허준은 쉬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취재를 실시한 내의원 쪽의 목적이 과연 어느 분야의 충원에 있는지 그걸 짐작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크게 나누어 출제의 분야를 내경. 외형. 잡병. 탕액.침구로 나누어지고 그 내경 한 분야에도 신형,  정, 기, 신, 혈, 오장육부 등으로 세분되며 잡병 하나에도 천지운기의 이치를 논하는 이론에서부터 심병, 진맥, 용약에서 해독, 구급까지, 다시 그 속에 부인병, 소아병으로 쪼개는 수백 줄기 중에서 과연 무엇을 물어 올지는 오리무중일 뿐이다.
  그건 결코 한때의 요행으로 열리는 길이 아닐 것이다.
  자연 나 허준의 의술의 경지는 어디쯤에 와 있는가.
  창녕 물슬천나루의 주막에서 만난 박갑서의 부박한 이론에 용기를 느낀 자기 또한 내의원 취재에 도전하기엔 아직은 설익은 재주일 것이라는 자책 어린 절망이 한발 한발 한양의 과장이 가까워짐에 따라 허준의 가슴을 무겁게 찍어누르고 있었다.
  "제 재주를 과신하지도 말고 과소평가도 말 것이 설사 떨어졌다 해도 이 넓은 세상 나보다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인생의 공부인즉!"
  이번 길이 아닌 지지난해 취재를 떠나는 아들 도지에게 담담하게 일러주던 유의태의 한마디가 때아닌 지금 새삼 허준의 귓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는 그렇게 긴 눈으로 인생공부를 할 여유가 없어. 오로지 붙는 길 뿐 ... 혼신의 힘을 다해 이번 길에 붙는 길뿐!' 
  마치 밤이라도 새울 듯이 계속되던 건넌방 도지와 그 일행들의 의서 읽던 소리도 내일 새벽의 발정을 위해 잠을 청하는지, 허준의 머리맡에 어리고 있던 건넌방의 불빛도 꺼지고 허준의 얼굴도 칠흑 속에 묻혔다. 하인배들의 코고는 소리가 한층 요란한 속에 상화도 버릇인 이를 갈기 시작했다.
  안성, 용인, 수원, 과천, 삼개 ... 허준이 한양 내의원으로 뻗은 앞으로 남은 2백40리길의 지명을 꿰며 설핏 잠에 빠지는 그때였다. 
  주모의 방 쪽에서 주모의 한참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문득 여자의 울음소리가 났다.
  "아 글쎄, 아래윗방 여러 의원들이 묵은 건 틀림없지만 한양에 과거치러 가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깨울 수가 있어. 더구나 너나없이 새벽길 떠난다구 곤히 잠든 양반들을."
  "그 사정 알지만 그러나 사람이 죽어가는 판에 누굴 잡구 사정하우."
  "내가 사례는 할 테니 제발 누구 한 사람 좀 깨워나 주시우. 사정은 내가 할 테니께요."
  우는 여자를 가로막듯 중년 사내가 역시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고 여자가 또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건넌방 방문이 왈칵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경상도 사투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집구석 먼길 떠날 손들인 걸 뻔히 알면서 잠을 재울락카나 안재울락카나. 아께부터 무슨 놈의 울음소리고!"
  "초상났나, 뭐꼬!" 
  또 한 사람 이미 깨어 있던 목소리가 외치자 울던 부부가 허준의 방앞을 가로질러 건넌방으로 내달았다.
  "아이고 의원님, 잠을 깨워 죄송만만올시다만 기왕 깨신 김에 저희 사정 좀 들어주십시오."
  "사정이라니?"
  임오근의 목소리를 향해 주모의 소리가 났다.
  "정말 죄송해유. 그란디 갑자기 병자가 위독해설랑."
  "병자?"
  이미 건넌방은 모두 잡을 깨버린 듯 도지가 되묻는 소리가 났고 울던 여자가 매달리듯이 말했다.
  "오죽하면 한밤중에 달려왔겠슈. 장시 어느 분이든 우리 시아버님 병좀 봐주세유."
  "주모, 대체 이 사람들이 누고?"
  "바로 저어기 저 산 밑에 사는 사람들올시다."
  "헌데 무슨 병인데 밤중에 이 야단이오."
  또 한번 도지의 목소리였다.
  잠을 깬 상화가 튕겨 일어났으나 허준은 그대로 누운 채 밖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걸핏하면 두 갈비뼈 밑이 아프고 배가 땡긴다구 하시구유."
  "그럼 간이 나쁜 게로군."
  "예? 간이 나쁘다구유?"
  놀라는 여자를 향해 도지의 박식한 목소리가 났다. 주위의 수런거림과 호기심을 압도하는 자신에 찬 어조였다.
  "갈비뼈 밑이 아프고 배가 땡기고 ... 그 병자 곧잘 성을 내지 않소?"
  "아이고메, 고걸 어찌 안 보시구두 아신대유. 맞아유, 걸핏하면 성을 잘 내세유."
  "얼굴에 푸른및이 돌고."
  "아이구 의원님!"
  "정말 용하세유, 제발 우리 아버님을 몸소 좀 봐주세유."
  부부가 눈물 콧물로 반기는 소리를 향해 도지가 계속했다.
  "간에 병이 온 게 틀림없소. 하나 우린 한시바삐 한양에 가야 할 사람들이리 처방을 써주리다. 주모, 여기 불 좀 밝히게."
  "처방이라면 혹 큰 돈이 드는 게 아닌지유?"
  "이 사람들이 사람 죽어간다카모 남 잠 다 깨워놓고 돈걱정까지 할라카나. 아 간이란 기 웬만하모 병이 안 들지만 한번 병이 붙었다모 좀체로 고치기 어려운 법인기라. 원, 큰병에 걸렸으모 큰돈 쓰는 거 각오해야지 병이 절로 났소?"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핀잔 끝에 또 내뱉었다.
  "본시 말이 있는기라. 몸띵이가 만 냥이모 눈이 구천 냥이라꼬. 눈은 곧 간이께로 이 양반 처방에 한 백 냥만 내놓소."
  "백냥이라니유?" 
  "돈은 필요 없고 그냥 처방을 써줄 테니 가지고 가서 날이 밝은 녘 동리 의원한테 약을 지으소." 
  도지의 부드러운 말에 찾아온 사내가 울상으로 이의를 달았다.
  "근디 처방이니 뭐니보다 당장 어른이 못견뎌 하시니께 잠시 가셔서 침이라도 놔주셨으면 하는디유." 
  "가다니 어디로 말이오."
  "저희도 그 동안 의원이 없어서 약을 못 지은 게 아니고 손바닥만한 논뙈기 붙여사는 가난뱅이들이 돼서 알고도 약을 못 사먹었슈. 근디 오늘 이 어른이 하도 못견뎌 하시니께 그래서 의원댁에 달려강께 이 양반 이 집안에 무슨 잔치가 있다고 타관엘 가셔서 의원이 비었어유. 그러니 처방을 갖구 가두 약을 구해볼 도리가 없으니께." 
  "그래서 당신네 집으로 우릴 같이 가잔 말요?"
  "죄송하지만 이 불쌍한 것들을 살려주시는 셈치시구 어느 한 양반만 ..."
  울던 여자가 거들었다.
  "저기 저 양반이 젤 잘 아는 듯하시니께 잠시 가서 우리 아버님께 침이라도 몇 대 놔주시면."
  지목당한 도지가 침묵한 채 대답이 들리지 않는데 낯선 의원의 목소리가 비아냥거렸다.
  "침은 꼭 맞을 데 놓는 게 침이지 아무데나 쑤시면 다 낫는 게 침인줄 아쇼."
  "아이구 그렇지만."
  "사정이 딱하긴 하오만 갈길이 멀어 새벽같이 떠날 사람들이니 어딜 오가고 할 경황은 없소이다."
  도지의 거절하는 소리에 주모가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지가 이 사람들을 잘 아는데 사정이 아주 딱한 사람들올시다. 사정이 어려운 줄 알지만 잠시 도와주실 수 없으신지요."
  "미안하오만 난 안되겠소. 과것길 떠나는 사람 내 볼일 제쳐놓고 시간을 허비할 수 없으니."
  도지의 물러 앉는 소리가 났고,
  "괜히 남의 단잠만 깨워놓고!" 하고 또 두어 사람이 방안으로 사라지며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황급하게 방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남편을 제쳐두고 여자가 방문을 열어젖힌 모양이었다.
  "아이쿠, 다른 사람도 말고 저 의원께서 잠시만 가주세요."
  "글쎄 과거 보러 가는 사람 잡고 왜 이러시오."
  "이 여자가 어딜 남자들 방문을 함부로 열어젖히고!"
  "정말 죄송해유. 죄송하지만 잠시 진맥이라도 해주시면 ..."
  "진맥한다고 병이 낫는 게 아니고 내 약을 싸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가봤자 허행일 게 뻔하잖소. 이 문고리 놓지 못하오!"
  "의원님!"
  "이 여자 미쳤나. 왜 이카노. 정말 못 비키나!"
  "놓으시오 놔!"
  실랑이 끝에 여자가 떠밀려 나자빠지며 울음이 터졌고 곧이어 방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갑자기 여자가 악을 쓰는 소리가 났다.
  "의원이 뭐여. 병 고치는 게 의원이지. 죽어가는 사람 살려달라는데 돌아도 안 보는 것이 의원이여!"
  건넌방 방문이 다시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시끄러 이것들아. 누가 병들라구 했어. 길 가는 사람 잡고 웬 패악이야!"
  "상대할 것 없으니 불 끄게."
  "아, 글쎄 듣자니까 이것들이!"
  "아, 내버려두고 자자니까. 한잠 자야 새벽길 떠나지. 잡시다 자요."
  다시 닫히는 방문을 향해 여자가 울먹였다.
  "누군 패악을 부리고 싶어서 부리간유. 돈도 없이 약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이 ... 하도 안타깝구 ... 불 ... 쌍해 ... 서 ... 그라 ... 지유."
  주모와 남편이 달래는 소리를 뿌리치며 여자는 계속 울먹였으나 건넌방도 침묵한 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 눈치였다.
  그 정적 속에서 허준이 주섬거리며 옷을 제어 입고 짐을 찾아들었다.
  상화가 놀란 듯이 돌아보았으나 허준은 말없이 방을 나서 짚세기를 꿰었다.
  "아이구우,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 하고 푸념을 늘어놓던 여자와 그 아내를 달래던 중년의 농부인 듯한 사내가 길 떠날 채비로 선 허준을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기척도 없던 방에서 나타난 허준을 건넌방 의원들의 하인쯤으로 보는 눈이었다.
  "뭐여, 니놈은!"
  그 눈속에는 건넌방 의원들에게 멸시당한 분함이 서려 있었다.
  허준이 말했다.
  "나도 명색은 의원이고자 하는 사람이오. 또 재주가 없는 사람이나 병자에게 가봅시다."

    6
  건넌방을 향해 그토록 애걸복걸하던 부부였건만 하인배들의 방에서 나타난 허준의 행색을 보고는 금시 뜨악한 얼굴이었다.
  내의원은 대궐에 있고 대궐 그 궁정에는 허드레 짚세기로 보행하는 건 금해 있다. 하여 그 궁정 과장에 입장할 때 신을 미투리 한 켤레만 유지에 싸서 신주단지처럼 매달았을 뿐 집 떠나올 때 삼아 메고 온 아흡 켤레 짚신이 백리에 한 켤레씩 소비하여 아직도 세 켤레가 단봇짐에 매달려 있었고 더구나 남들 다 쓴 소갓도 없이 패랭이와 후줄그레한 무명 두루마기를 두르고 제대로 깎지도 않은 수염인 허준의 모습은 의원이 풍겨야 할 최소한의 위엄과도 거리가 멀어 농부 부부의 눈에 영 미덥지 않는 눈치였다.
  "댁이 정말 진짜 의원이신가유?"
  여자가 물었고.
  "집이 어느 쪽이오. 한양 쪽으로 가는 길목이요 아니면 되돌아가는 길 쪽이오?"
  하고 허준이 되물었다.
  여자의 남편이 젖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다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한 십리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지름길이 있으니께 멀지 않아유."
  "그렇거든 갑시다."
  앞장서 나가는 허준에게 주모가 부엌 문간에 매달린 등불을 벗겨 내달며 허준에게 고마운 얼굴을 했다.
  허준과 부부의 기척이 주막에서 사라지자 불 꺼진 건넌방 어둠 속에서 의원 하나가 조소하여 뇌까리는 소리가 났다.
  "넋빠진 놈이구마. 돈 한푼 못 받을 걸 번연히 알면서 미쳤다고 십리씩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 쯧쯧."
  "새벽길 바쁜데 어서 한숨 잡시다."
  툭 대거리하여 도지가 돌아눕는 기척인데,
  "그라고 보이 초저녁에 불쑥 이 방에 나타났던 그놈아 아이가, 형씨들보고 잠시 아는 체하던?"
  "과거에 나하고 잠시 동문수학하던 놈이오. 지금은 내쫓겨서 들개 새끼처럼 혼자 떠돌아다니는."
  임오근이 공연히 앙심을 담은 말에,
  "댁들이 유의태 그 어른 문하의 사람이라면서 동문수학이라카모 눈교?"
  "허준이란 놈이오."
  돌아눕는 임오근의 내뱉듯한 말에,
  "허준이고 하준이고 젊은 놈은 저래서 탈인기라. 쪼께 배운 재주를 우예 좀 남들 앞에 과시하고 자파서."
  잠에 겨워하던 그 목소리가 그러나 곧 튕겨나듯,
  "방금 뭐라캤소, 저 사람 이름. 허준이라캤소?"
  "허준이면 왜."
  "허준이면 창녕 성대감댁 정경부인 병 그 중풍을 사흘 만인가 닷새 만인가에 낫구었다는 그 허준이모? 낫궈놓고 한양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낫구긴 무얼 낫궈. 잠시 빤하다가 재발한 걸 씻은 듯이 낫군 건 우리 서방님이외다."
  임오근이 잽싸게 일그러지는 말로 허준의 이름 위에 찬물을 끼얹었으나 대답 대신 방안에 불이 켜지고 불쑥불쑥 이 사람 저 사람이 일어나 앉았다.
  "저게 허준이다!"
  그러자 임오근의 목소리가 되알지게 또 내뱉었다.
  "허준 허준! 그렇게 만나기 소원이거든 쫓아보지 그러시오."
  "우리 같이 안 가볼랑교?"
  하고 한 사람이 일동에게 발의를 하자 금세 젊은 놈 어쩌고 타매하던 중 늙은이가 제 보따리를 벗겨 들며 소리쳤다.
  "가보입시더. 내 언제고 허준이 그 사람이 병자를 어찌 다루는지 꼭 볼라캤는데."
  "같이 갑시더. 지난번 중풍도 난치 중의 난치병인데 이번에는 간이 상한 병잘 우예 낫구는지 이 눈으로 볼라캅니더."
  금시 세 사람이 동행이 되어 황황히 방을 나서고 남은 두엇이 또 따라 나설 듯하다가 주저 앉았다.
  "방금 그 허준이라카는 의원 어느 쪽으로 갔노?"
  앞장선 사내가 각자의 셈을 치르자 주막의 떠꺼머리 총각에게 소리치듯이 물었다.
  "허준이 누군데유?"
  "이런 답답한 자슥 봤나. 좀전에 농사꾼들한테 불려간 사람 말이다."
  "갑자기 또 무슨 일인데 이라유?"
  "갑자기고 뭐고 의원 데불러 왔던 그 사람들 사는 마실이 어디고?"
  "버드네 사는 사람들인디요."
  "글씨 버드네가 어느 쪽에 있는 동넨지 안 묻나."
  "근디!"
  주모를 가로막고 갑자기 떠꺼머리가 눈알을 빛내며 나섰다.
  "그 허준인가 하는 사람 제법 대단한 의원인가유?"
  "그걸 눈으로 볼라꼬 쫓아가 볼라카는기다. 소문이 참말인지 허풍인지."
  "그란께 소문은 난 의원이다 그 말인가유?"
  떠꺼머리가 또 한번 눈을 빛냈다.
  세 사내가 떠꺼머리의 팔을 잡아끌어 앞장세우자 주모가 새벽 물도 긷고 어쩌고 총각에게 볼멘 소리를 질렀으나 떠꺼머리는 무엇이 신명이 나는지 주막 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허준은 태령산 기슭을 두어 굽이나 오르내리며 농부 부부를 뒤쫓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민가가 아닌 공동묘지가 나타난 걸로 보아 거의 다 왔거니 했을 때였다.
  애초부터 지름길을 택했는지 저 앞에 주막의 떠꺼머리를 앞세워 두 사람의 의원이 다가왔다.
  의아한 허준에게 쫓아온 의원이 손이라도 잡을 듯이 반색을 했다.
  "가신 뒤에야 노형이 뉘신 걸 들었습니다. 노형이 산청 유의태 그분의 문하에 계시던 고명한 허준 그 사람이라지요?"
  "그렇긴 합니다만, 무슨 영문이시온지?"
  "이런 반가울 데가. 경황중에 이렇게 뵙심더. 저는 봉화사는 정상구심더."
  "나는 단양 사는 우공보올시다. 허준 그분이 틀림없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두 사람이 나이를 따지지 않고 조신하게 허리를 굽혔고 허준도 당황히 사람을 보며 두 손을 모으며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제가 허준이 틀림없지만 고명이니 뭐니 사람을 잘못 본 듯합니다."
  "천만에 말씀. 평소 늘 우예 생긴 사람인지 꼭 만나보고 싶던 차에 좌우간 피차 바쁜 길올시다마는 한번 노형께서 병자를 낫우는 방법을 구경도 하고 곁에서 도울 일이 있으모 도와볼라고 온 거니까 달리 생각 마이소."
  "뭔가 잘못된 소문을 들은 듯합니다만 ..."
  "어쨌든 여기는 긴 얘기 할 장손 아닌 듯하니 가면서 얘길 하십니다."
  단양 사람 우공보의 말에,
  "옳심더. 자, 가입시더. 가입시더." 하고 봉화 의원 정상구가 맞장구 쳤다. 그들의 대거리를 곁에서 보고 있던 농부 부부가 갑자기 허준을 다시 보았고 떠꺼머리가 그 부부에게 오다가 들은 얘긴지 허준이 어떤 실력의 의원이다 하고 입에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고 처음 세 사람이 따라 나섰으나 길이 너무 멀자 중도에 한 사람이 아쉬워 아쉬워하며 되돌아갔다는 얘기도 했다.
  버드네라는 마을에 도착하니 20여 호의 마을은 지난 가을 추수도 보잘 것이 없었는지 겨우 서너 집이 새로 지붕을 한 빈촌으로 농부의 집은 삽짝도 없이 여러 해 새로 이지 못해 썩은 지붕은 서너 군데 골이 패고 잡초조차 피어난 몰골이었다.
  그 불 꺼진 방문 앞으로 달려간 며느리가 "아버님, 의원 데려왔어유, 의원요."
  하고 사뭇 감격 어린 소리를 쳤을 때 방문을 열어젖히며 댓바람 허준을 맞아준 건 해골처럼 퍼골이 상접한 병자의 욕설이었다.
  숨차고 목구멍 안에 퍼가래가 글글거리는 소리로 누가 의원 데려오랬느냐. 어린 새끼들 마냥 울려놓구 어딜 싸돌아댕기느냐고 악을 썼고 오히려 허준들에게 자식 부부를 타매했다.
  "이놈들 말 믿지 마시우. 이것들이 미쳐도 분수가 있지. 땡전 한닢 없이 입에 풀칠도 못하는 주제에 무어라 거짓말을 지껄이고 당신들을 오랬는지 그 다 새빨간 거짓말이니 썩 돌아가란 말이여."
  하고 공연히 악에 받쳐 고함치고 방문을 도로 닫았다.
  "이미 난 죽을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유. 대체 어디서 온 의원인진 몰라도 약값 한푼 못 받아갈 게 뻔한디 왜 이러시우."
  "의원의 소임은 병을 고치는 것이 첫째지 돈은 둘째올시다."
  해골 같은 병자가 멍해서 그 허준을 보았다.
  "방금 뭐랬어유. 돈 없이도 병을 고쳐준다고요?"
  "고칠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몰라도 일차 병이 어디까지 깊었는지 살펴나 보십시다."
  "산음서 온 허 뭣이라는 분이신디, 아주 고명한 분이시니께 이 양반 말씀대로 맡겨봐유."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떠꺼머리가 아들 부부를 대신해 소리쳤고 정상구도 우공보도 따라들어왔다.
  "모두 한양에 의원과거 보러 가시는 고명한 의원들이시니께 지발 고맙게 알구 순순히 병세를 얘기해유."
  "하루 이틀 병도 아니구 내 병세 내가 너무도 잘 알어. 소용없는 노릇이여. 이미 가망이 없어. 구석구석 금간 몸인디 무슨 수로 낫워."
  말과는 달리 병자는 살고 싶어 필사적인 눈빛이 눈물에 번쩍였다.
  허준이 그 병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금간 그릇도 곱게 쓰면 오래 가는 법올시다."
  그제야 병자는 "아이고 의원님!" 하고 허준의 손을 더듬어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참고 참았던 한마디를 털어놓으며 마구 몸을 떨었다.
  "그렇거든 제발 살려주세유. 지발 이 불쌍한 놈을 살려주세유 ..."

    7
  허준의 손에 잡힌 채 병자의 손이 자꾸 떨었다.
  허준이 말했다.
  "병자가 병을 낫우는 첫째 요건은 스스로 병을 떨치고 살아야겠다는 굳센 용기올시다."
  "우린 정말 땡전 한닢 못 낼 가난뱅이여유 ..."
  병자가 세 사랍씩나 둘러싼 낯선 의원들 앞에서 또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맥이 좀 어떻습니까?"
  "손톱에 윤기가 없이 바싹 메마르고 안색이 푸르딩딩한 게 좀 어려운 경진 것 같은데 ..."
  허준의 등뒤에서 정상구와 우공보의 음성이 났으나 허준이 그 두 사람을 개의치 않고 병자에게 말했다.
  "평소 무섬증을 잘 타시오니까? 뭔가 헛것이 보이기도 하고 그러한지?"
  "그게 가슴 아픈 병자와 무슨 상관여유?"
  "간이 탈난 병은 아침에는 그만하고 해질녘이 가장 심하고 자정엔 좀 가라앉고 그렇지 아니한지? 눈병이 그치지 않고. 내 말이 맞는 데가 있습니까?"
  아들이 눈을 빛내며 한무릎 다가앉았다.
  "어찌그리 잘 아시는가요? 젊을 적에는 눈 하난 밝으신 어른이셨습니다만 요즈음은 의원님 말씀대로 ..."
  "모두 간이 허한 탓이온데, 하나 가망이 있습니다. 맥도 아직은 탄탄합니다."
  허준은 얼음뼈다귀처럼 차가운 병자의 앙상한 손에 힘을 가해 잡아주며 용기를 북돋우었다.
  "웃옷 벗으시지요."
  "옷을유?"
  "이 병은 올 여름 안으로 다잡아서 올 겨울을 넘길 대비를 해야지 이대로 대책없이 여름을 넘기면 회복되지 못합니다."
  "올 여름 안으로?"
  "가지고 온 약이 없어 우선 처방부터 써 드리겠으나, 그러나 없는 살림에 비싼 약을 먹을 순 없을 것이니 일변 또 집에서 고칠 수 있는 방법에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집에서 고칠 수 있는 방법 ..."
  놀라고 반기는 눈길 속에서 허준이 병자의 좌우 갈비뼈 밑을 눌러보았다. 이어 그 손이 배꼽 위쪽에 단단한 달걀 크기의 응어리에 닿자 병자가 기절할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으으으 ... 아파유 ... 거긴 아파유 ..."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지난 겨울부터지요."
   허준은 내색하지 않았다. 병은 간에만 있는 게 아니고 그건 꽤나 진행된 반위의 증상이었다.
  병자의 생명이 몇 달밖에 지탱하지 못할 위중한 것임을 알았다.
  허준은 눈물이 그렁한 병자의 눈속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을 살려야 해. 고생고생만 해온 이 병자를 살려보리라!'
  비록 다시 살릴 수 없는 병자임을 알았으나 허준은 우선 자기 자신부터 용기를 북돋우었다.
  "발을 보여주시지요."
  "발이라 카모?"
  등뒤에서 정상구의 소리가 났고 눈앞의 병자가 면구스러운 얼굴을 했다.
  "발도 안 씻었는디."
  "안 씻은 것은 씻으면 됩니다. 간의 맥을 잠시 보려는 것이니 물 좀 떠오시지요."
  며느리가 구를 듯이 달려나갔고 병자가 물었다.
  "간은 가슴에 붙었을 틴디 간의 맥을 발로 봐유."
  "시키는 대로 해유, 아버지."
  아들이 대신 아비의 다리를 당겨 바지를 동동 걷어올렸다.
  대야도 없는 가난한 살림인지 며느리가 바가지째 물을 떠왔고 아들이 머리에 두른 자기 수건을 풀어 아비의 발을 열심히 닦았다.
  그 물기를 닦아낸 병자의 발목을 허준이 잡았다.
  "이곳이 족음교라 하는 곳으로 간으로 올라가는 맥들이 모이는 곳올시다."
  허준의 손이 다시 병자의 엄지발가락 옆을 더듬어오르다가 지그시 누르자 그 손 밑에서 굵은 맥이 둔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어 수건을 꺼낸 허준이 손에 감고 병자의 좌우 눈을 까뒤집었다.
  눈자위 밑으로는 황달기가 고름처럼 퍼져 있었다.
  '가망이 없어.'
  누런 황달이 퍼진 병자의 눈을 허준은 보고 보고 다시 보고 있었다.
  허준이 조용히 위로했다.
  "아직 크게 다치지 아니했으니 집에서 할 수 있는 정성을 들이면 상당한 효험을 보오리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정성이라면 ..."
  "우선 마음으로는 무슨 일에도 조바심치지 말 것이며 조바심을 치면 간이 오그라들기 때문올시다. 또 애써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말고 진정 해야 하는 것이 마음이 노하면 제일 부담을 느끼는 것이 역시 간이기 때문올시다."
  "그리고?"
  병자가 아닌 우공보의 반문이었고 정상구가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도 났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정성이라는 걸 말씀해주세요."
  "이 간이 병든 덴 산딸기를 그냥 먹거나 말려서 갈아 먹는 것도 효험을 보고 모과를 쪄서 먹는 것도 득을 봅니다. 그러나 절기로 보아 그것들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니 우선 파를 구하여 ..."
  "양념에 쓰이는 그 파 말씀인가유?"
  "바로 그 파올시다. 그 파를 뿌리째 정하게 씻어 두 뼘짜리 한 뿌리에 세 종지씩의 물의 비율로 스무 뿌리씩을 솥에 안치되 반드시 괄하지 않는 불로 물이 반으로 줄어들도록 진하게 달여 하루 세 번씩 일삼아 마시면 그 물이 간의 병든 곳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합니다. 그밖에 ..."
  정상구와 우공보가 부산하게 저들의 보따리 속에서 지필묵을 꺼내 갈겨쓰기 시작했다.
  "밖에 또 뭔가요?"
  "포공영."
  "포공영이 뭔디요?"
  "속칭 앉은뱅이라고도 하는 민들레올시다."
  "민들레는 알지요."
  "그 민들레와 회향을 달여 이 또한 물을 반으로 달여 마시면 효험이 있습니다."
  "회향은 뭔지 처음 들어유."
  며느리의 안타까운 말에 우공보가 붓을 멈추고,
  "회향에도 대회향 소회향 두 가진데 어느 쪽이오니까?"
  "대회향은 중국에서 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채취하는 게 소회향인데 조선 사람의 병이먼 조선에서 나는 약초가 더 맞는다 하겠지요."
  의원끼리의 대화에 눈이 둥그래진 병자에게 허준이 다시 일러줬다.
  "회향이란 미나리과에 속한 2년초로서 6월에 노랗게 꽃을 피우는 풀올시다. 항미료로도 쓰이나 상한 위를 어루만지는 약제로 더 효과가 있는데 그 열매를 약으로 씁니다. 이름이 어려워 보이나 의원마다 그 생김새를 알고 있으터 여름이 오거든 꼭 시험해보시고 또 ..."
  "또!"
  "강변 수양버들의 가지와 잎을 달여 그 액을 조석으로 두어 숟가락씩 먹으면 이는 또 황달에 기이한 효험이 있습니다."
  "강변 수양버들?"
  "그리고 고삼을 아시오니까?"
  "고삼?"
  "속칭 너삼, 쓴내삼이라고 하는데 독초에 속합니다."
  "독초?"
  "생김새는 산삼을 닮았으나 일종의 독초인데 그러나 그 속에 암질환에 특효를 지닌 부분이 있으니 까다롭긴 하나 귀담아들으시고 이를 시험해 보소서."
  "암질환에 특효다?"
  "이 병자가 암이오?"
  "반위의 증세가 있소."
  "너삼이 반위에 특효다?"
  "지난날 내 스승이던 유의태란 분이 직접 투약하던 걸 보았기로 나도 확신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그 방법은?"
  "약으로 쓰는 부분은 뿌리인데 한여름의 뜨거운 정기를 빨아들인 늦은 가을에 채취하는 걸 원칙으로 합니다. 그 가을에 캔 걸 껍질을 벗겨 응달에 말려 생강을 썰듯 엷게 썰어 밤톨 두 알만큼의 양에 물 한 대접의 비율로 섞되 물이 반으로 줄어들 때까지 달여 이를 세 번에 나누어 마십니다."
  "반위에 고삼이 특효약이다."
  우공보와 정상구의 상기한 얼굴이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지시한 약 중에 당장 구할 수 있는 약재로 파를 구해와 허준이 제 손으로 약을 만들어낸 것은 새벽닭이 거푸 울어대는 희붐한 시각이었다.
  허준이 손수 달여주는 그 파 졸인 물을 병자는 영생의 영약이나 되듯 눈물 글썽이며 마셨고 그 허준의 정성에 감동된 농부 부부가 곧 길을 떠나려는 허준을 매달려 잡아앉히며 굳이 밥 한끼 먹고 가길 간청했다.
  이에 허준이 주저앉자 그들 부부가 꼭두새벽부터 온 동리 돌아다니며 닭 한 마리, 술 한 병, 고추장, 참기름, 깨소금 따위를 빌러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뜻밖의 닭국물에 뜨뜻이 요기를 하고 병자의 배웅까지 받으며 허준이 병자의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온 마당에 마을의 성인 남녀 십여 명이 맨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나타나는 허준에게 일제히 큰절을 했다.
  이어 놀라고 의아해하는 허준에게 앞자리의 촌로가 일동을 대신해 울먹이는 것이었다.
  "들으니 돈을 안 받고 병을 고쳐주시는 의원이라 하시니 저희들 불쌍한 것들의 병도 보아주십시오."
  모두 땟국이 전 그리고 조식에 찌든 가난뱅이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허준은 망연히 그 자리에 못박혀 서고 말았다.

    8
  까닭은 물어볼 것도 없었다. 한눈에 그들은 병자였다.
  사람의 모습은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목이 마르면 물을 찾아 이동하고 배가 주리면 먹이를 찾아 산도 넘고 강도 건너는 동물적인 인간들과 던져진 고장에서 목마른 채로 굶주린 채로 한발도 못 움직인 채 고생고생을 팔자요 운명으로 체념하는 식물적인 인간과-그들은 후자였다. 목이 타고 뱃가죽이 말라붙어도 악에 받쳐 있는 눈도 아니었고 팔뚝에 독이 뻗쳐 있어보이지도 않았다.
  백성이라 불리는 무지렁이들. 위로는 양반이라 칭하는 벼슬아치들로부터 아래로는 털끝만도 못한 권세를 코끝에 걸고 날뛰는 시골 관아의 이속들에게까지 휘두르는 대로 걷어차는 대로 뜯기고 억눌린 채로 살며 병든 자들 -
  그 병이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돌이켜볼 힘도 머리도 없는 무지렁이들이 그래도 길게는 살아보겠다고 돈 아니 받고 병을 보아준다는 허준의 길을 막은 것이다. 농부 부부가 이 양반들은 곧 과거 보고자 한양 갈 길이 바쁜 사람이노라 허준을 대신하여 언성을 높였으나 방에서 허준이가 병자에게 한 얘기들을 남김없이 훔쳐들은 무지렁이들은 허준에게 시선을 박은 채 길을 비킬 눈치가 아니었다.
  그중 몇은 금시 신음소리를 흘리며 더욱 허준에게 다가섰다.
  이에 "나도 간이 아파요." "난 허리가 펴지지 않는 병인디 낫워주세유" "저는 눈이 침침하구 아침저녁 기침으로 애먹구 있는디요." "우리 언니는 눈이 사팔인디 봐주세유." 심지어 "귀에서 고름이 나와요." "티눈이요." 하고 저마다 허준이 앞으로 나서며 차례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참말로! 글쎄 이 의원 양반들은 한시바삐 한양 올라갈 사정이라고 안혀!"
  농부가 민망해서 대신 소리쳤으나 같은 무지렁이끼리는 할말도 많다는 듯이 봄날 대추나무 가지처럼 앙상하게 생긴 사내가 콧물이 빠진 아이를 업은 채 마른 삿대질을 했다.
  "야 이놈아, 돈 안 받는 의원이라메. 왜 너 혼자만 덕을 보겠다구 가루막어?"
  이어 그 사내가 갑자기 허준에게 까부라지며 애원했다.
  "글씨 이건 지 아들놈인디 애초 엉덩이에 코딱지만한 부스럼이 나길래 몇 번 터쳐줬었는디 그게 잘못돼 가지구선 이젠 어찌나 크게 화농을 했는지 앉지도 눕지도 몫하구유."
  핑계삼아 사내는 재빨리 제일 앞자리로 헤쳐나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얼굴을 지으며 허준에게 거푸 고개를 숙여댔다.
  애비의 비굴한 모습에 비해 얼굴에 마른버짐이 하얗게 핀 아이는 아들 겸이의 나이 또래였고 또 문득 그 얼굴은 안점산에서 북을 치던 문둥이 소년 길상이를 닮아도 보여 일순 허준의 눈에는 온 마당의 병자들이 김민세가 돌보던 문둥이떼처럼도 보여 온몸을 떨었다.
  '이 순간에 왜 하필 김민세란 말인가.'
  허준이 내심 신음처럼 뇌며 맹렬히 고개를 저었으나 눈앞에는 이젠 김민세뿐이 아너고 안광익의 왕방을 같은 눈빛까지 나타나 자기를 쏘아보고 있었다.
  "..."
  "우옐랑교? 난 걸음발도 느리고 더 지체할 수 없심더."
  정상구가 못박혀 선 허준에게 재촉하는 말을 했고 우공보도 걱정스레 허준에게 뚱겨주었다.
  "아직 갈 길이 2백40리가 남았소. 2백40리가 뭐요. 근 20리 되돌아왔으니 2백60리가 남았는데 이 병자들 상대로 여기서 무얼 어쩌잔 거요?"
  허준이 김민세와 안광익의 얼굴을 떨어내며 온 마당의 병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병을 앓는 모습은 애처로우나 보다시퍼 나는 한양에 갈길이 급한 사람이오. 게다가 내 몸에 지닌 것은 오로지 이 침통 하나뿐인데 보아하니 여러분들의 병은 침으로 낫울 그런 병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가 약까지 지어달랬나요. 약 없는 건 아니께 암튼 침이라도 한 대 놔줘유."
  주막에서 따라온 떠꺼머리 총각이 저만치서 여러 사람을 대변하듯 소리쳤다.
  "침도 써야 할 때 침이지 아무 병에나 침이 듣는 건 아니오. 그리고 분명 약속을 하건대 한양에 다녀오는 길에 꼭 다시 이곳에 들러 여러분의 병을 보아 드리리니 지금일랑 그대로 보내주시오."
  누군가 울음을 터뜨렸고 그 처녀를 부축해 있던 좀은 문식이 들은  듯한 촌로가 안타까운 소리를 냈다.
  "의원님 말씀이 점잖은데 우리도 마냥 떼를 쓰듯 길을 막을 순 없지만 다ams 아침 한나절만이라도 병을 보아주실 수 없을지요? 아까 방안에서 하시는 말씀을 듣자니 돈 들이지 않고도 약이 되는 여러 단방약 이름을 가르쳐 주시던데 대충 그 정도라도 한 가지씩만 일러주시면 소원이 없습니다."
  "제발 그래 주세요."
  "우릴 살려주시는 셈치시구요. 이렇게 빕니다."
  촌로의 말에 온 마당의 병자들이 각자 자기의 병명을 다투어 소리질렀다.
  어려운 병도 있었으나 쉬운 병이름도 많았다. 한나절 자기가 돌보면 어렵지 않게 병을 낫우는 사람이 여러 사람 있다는 생각을 했다.
  허준은 눈을 감았다. 아직 닷새하고도 한나절의 여유가 있었다. 
  아니 그것은 여유라고 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닷새와 한나절 속에서 걸어가야 할 2백60리를 사흘로 잡고 남은 이틀 반은 한양에 닿아 과장에 들어가기 전 수험정리를 해야 할 것이다.
  그 이틀 반 속에서 한나절.
  허준은 이윽고 그 한나절을 이 병자들을 위해 쓰리라 결심했다.
  저 처참한 문둥이굴에서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의술을 베푸는 김민세, 안광익의 모습에 대항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자기를 생명의 신인 양 우러러보는 남녀노소 그 가난한 병자들의 눈빛에 진실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촌로와 한나절이라는 다짐을 주고받는 허준을 본 정상구는 이따가 셋이서 함께 떠나자는 우공보의 만류에 "사람들이 미쳤나 정신이 있나, 평생 별러 가는 취재길에 객기를 부려도 분수가 있지!" 하고 마치 모욕이나 당한 사람처럼 먼저 길을 떠나고 말았다.
  우공보도 그 정상구 못지않게 초조한 모습이었으나 허준에게 더 큰 홍미를 느낀 듯 불안한 얼굴인 채 주저앉았다.
  우선 허준은 촌로에게 지시하여 아래윗집 방을 하나씩 비우게 하여 남녀 병자를 분리한 후 침과 뜸으로 다스릴 환자와 약재로 다스릴 병자를 다시 나누는 일방 병자들이 돈을 들이지 않아도 효험을 볼 향약에 의한 구급단방약의 이름과 용약법 춘하추동별로 써주고 부인병은 나이가 많은 우공보에게 맡기고 자기도 남자 병자들을 맡았다.
  그 허준의 곁에서 허준이 써내는 단방약 이름을 촌로가 캐물어댔다.
캐묻는다는 말이 맞았다.
  의원이 약이름을 어렵게 쓰는 건 고금동서가 마찬가지여서 진서나 존대받는 한문에 비해 아직 '한글'이라는 빛나는 이름은커녕 표현 그대로 '쌍말 언'자 언문인 조선글은 세종조에 창제되고도 연산군 때 사용금지령이 내려진 후로는 제대로 적는 백성이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허준은 일일이 그것들을 풀이하여 기침을 달래고 해열제로 쓰는 차전자는 질경이의 씨앗으로, 위장병의 영약이라는 황백은 황벽문로, 횟배앓이와 일사병에 특효가 있는 남과는 호박으로, 이뇨약 창출은 삽주뿌리, 종기에 잘 듣는 인동은 겨우살이, 설사약에 쓰는 우자를 토란으로, 화상과 딸꾹질에 특효를 지닌 양매를 소귀 나무 등등으로 고쳐 적어주고 설명하는 동안 허준이 스스로 다짐한 한나절은 순식간에 지나고 말았고 그 한나절 동안에도 소문을 들은 이웃 마을의 여자들까지 아들의 지게를 타고 혹은 이부자리째로 달구지에 실린 오늘내일 하는 사경의 병자까지 계속 들이닥쳐 때아닌 산골 마을 버드네는 저자거리처럼 복닥거렸다.
  이러면 동네 병자들을 보지 못한다고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가로막고 다투고 했으나 심지어 가마에 태운 앉은뱅이까지 찾아와 허준이 있는 방앞에 겹겹이 둘러앉아 저희끼리 순번을 정하고 법석이었다.
  사태에 질린 우공보가 허준에게 소리쳤다.
  "안되겠소. 내의원 취재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이러다가는 여기서 잡히고 말겠소. 뒷문으로 빠져나가 한시바삐 떠나야지."
  허준이 땀투성이의 눈길을 들어 마당에 빽빽한 그 병자들을 건너보았다.
  모두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정녕 손을 보지 않으면 아니될 위급한 병자들 몇이 섞여 있었다.
  "대체 여기가 무어요. 애초 약속이 이렇지 않았잖소. 여기는 충청도 진천이오. 갈 길이 아직 이백육십 리가 남았소."
  "먼저 가시오. "
  하고 허준이 말했다.
  "먼저 가라니? 아니 그럼 허의원은 아니 갈 생각이오?"
  "갑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을 다 보아줄 수는 없을지라도 조금은 더 손을 보아주어야 할 병자가 여럿 있습니다."
  "겨우 닷새밖에 말미가 안 남은 걸 알고 하는 소리요?"
  허준이 마당의 병자와 온몸 곳곳에 뜸을 태우고 있는 병자를 보고 말했다.
  "2백60리. 사흘이면 갈 수 있으니 아직 이틀 여유가 있으니 해질녘까지만 더 있다 가겠습니다."
  "달려가면 과장에 곧바로 들어갈 생각이오? 그 남은 이틀 머리도 정리하고 시제도 어림해보며 금쪽같이 써야 할 시간인 줄 몰라서 하는 소리요?"
  "먼저 가시지요."
  허준은 조용히 다시 병자를 대해 마주앉았다.

    9
  "어떡 허시겠소?"
  하고 우공보가 또 초조한 눈으로 아직도 침통을 닫지 못하는 허준에게 물었다.
  허준이 대답을 망설이는데 두 사람의 심상치 않는 낯색을 보고 주춤주춤 다가온 병자들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그중 한 늙은이가 갑자기 허준의 팔을 붙들었다.
  "보다시피 워낙 후미진 골인데다 돈없이 사니께 설사 병이 들어두 의원이라군 모르고 사는 불쌍한 것들이지유. 기왕 오신 김에 부디 몇 사람만이라도 더 병을 봐주고 가세유."
  "이렇게 사정해유."
  "그 사정 알지만 우리들은 잠시도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사정이라지 않소."
  허준의 침묵이 답답한지 우공보가 가로막고 나섰으나 사람들은 누구하나 우공보를 상대하지 않고 허준을 향해 죽을상을 짓고 있었다.
  돌연 주막의 떠꺼머리도 마을 사람들을 편들어 소리쳤다. 그건 사뭇시비조였다.
  "그렇다구 누군 병 봐주구 누군 안 봐줘유? 무슨 처방 내려달라는 것도 아니잖유. 우리도 돈 안 들고 집에서 낫을 수 있는 그런 약이름이나 가르쳐주구 가시라 그런 이야기라구요."
  "글쎄 이 사람아."
  우공보가 또 나서려 하자,
  "댁은 나설 것 없어유. 저 허뭐시기라는 저 양반만 남아주세유."
  이건 뒷자리에 오십도 넘었을 아낙의 외침이었다.
  "둘러보세유. 이렇게 없이 사는 것들여유. 돈도 없는 것들이 참말 염치없는 노릇이긴 하지만요 ..."
  노모를 업고 달려와 아직 숨이 찬, 입술이 째보인 사내가 두 손을 모으며 허준의 앞을 가로막고 하는 소리였다.
  "댁네들 사정 딱한 줄은 알지만 우리도 지금 평생을 별러서 과거 치러 가는 사람이라지 않소. 그런 우리를 잡고 매달리면 그건 우릴 죽으라구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요."
  "어따 그 양반은 나서지 말라는데 지가 더 나서서 야단이네."
  "어째, 누구요? 지금 얘기한 게!"
  소리쳐도 나서 대꾸하는 사람이 없자 공보가 허준에게 오금을 박듯,
  "어찌 손보면 낫울 사람이 한둘 더 있을지 모르나 못 낫을 중환자도 많소. 자칫 잡혀 있다간 한양 못 가오. 잘 생각하시오, 자알."
  허준은 내심으로 '사흘 반 사흘 반.' 하고 뇌고 있었다.
  고칠 수 있고 없고는 이차 문제다. 병이 들었음에도 그리고 그 병을 다스릴 수 있는 약재가 산비탈과 들판에 질펀히 널려 있는데도 그게 약인지도 몰라 생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 허준의 눈이 그 사람들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 30여 명이 좋이 넘는 숫자였고 약초나 일러주는 외 일일이 매만지고 지켜봐야 할 중증에 속하는 병자가 6, 7명, 그 참담한 눈망울들을 도저히 이대로 뿌리치고 갈 순 없다 싶었다.
  그러나 사흘 반 앞으로 박두한 취재 날짜에 2백60리의 갈 길이 남아 있는 것이다.
  '뿌리치고 가야 해 ...'
  허준의 내심이 또 한번 자신을 독촉했으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소리였다.
  "어쩔 수 없소."
  "어쩔 수 없다니?"
  마을 사람들이 숨을 삼키며 허준의 다음 말을 주시했다.
  허준이 천근처럼 다음 말을 뱉어냈다.
  "난 남겠소. 내 미숙한 재주나마 필요하다면 이대로 뿌리치고 갈 순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안도의 환성 같은 소릴 질렀고 합장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취재는 포기요?"
  "아니올시다."
  하고 허준이 우공보를 보았다.
  "2백60리길, 오늘 하루 여기서 지체한다 해도 남은 이틀 반이면 한양에 당도할 수 있겠지요."
  "한나절이라고 하더니만 이젠 또 오늘 하루?"
  "다행히 걸음 걷는 일엔 자신이 있습니다."
  "걸음이 문제가 아니잖소. 그래 오늘 여기 남아 하루를 까먹으면 남은 이틀에 2백60리 길을 하루 백30리 길씩을 간단 말이오? 갈 수 있다 칩시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물건 팔러 갑니까? 백30리 길씩 달린 그 지친 걸음으로 내의원에 뛰어들면 이미 숨돌릴 새도 없는 게 뻔한데 시제에 대한 답이 절로 술술 나옵니까? 아니지 않소. 미리 생각도 가다듬고 머릿속을 정리해서 ..."
  마을사람들 속에 "저눔 자식이 웬 방해여! 가려면 당신이나 빨리 가란 말여!" 등 욕이 터져나왔다.
  우공보가 그 얼굴에 삿대질을 놓으며 "나도 밤새 한숨도 눈 못 붙치고 당신들 병 봐준 사람인데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하고 붉으락푸르락 목에 핏대를 세웠으나 돌아온 것은 마을 사람들의 흰 눈자위뿐이었다.
  "나는 노형께 정이 쏠려 설사 고생이 되더라도 함께 가려 했소만 더 이상은 못 있겠소. 난 먼저 가리다."
  우공보가 마지막 허준을 충동했으나,
  "한양 가서 뵙지요."
  하고 허준이 짧게 대답했다.
  애초 허준을 데려온 농부 부부가 떠나는 우공보를 유독 쫓아가 배웅하고 돌아오기까지 팔을 걷어붙인 허준은 우선 촌로에게 일러 마을 사람들에게 양해와 약속을 먼저 구했다.
  의원이 들여다본대서 병이 절로 낫는 것도 아니요 지닌 것은 오로지 침통 하나뿐 따로 약재를 지니지도 못했으니 오늘 하루 안에 병이 나으리라 여기지 말라는 것과 오늘 종일 성심껏 살펴는 보겠으나 저녁에 달이 뜨면 떠날 것이니 그땐 잡지 말라는 것. 그러자 감격한 촌로가 목이 멘 소리로 "여보게들, 이 고마운 말씀 들었는가. 이분의 사정을 우리도 익히 알았으니 달이 뜨는 길로 떠나실 수 있도록 모두 다짐을 허게." 했고 마을 사람들이 그것만도 은혜를 잊지 않겠노라며 이구동성으로 응해 오자 허준도 웃음을 띄웠다.
  "그럼 우리 합심해서 힘껏 해봅시다."
  곧 촌로가 지적한 몇 사람이 앞으로 나섰고 촌로와 그 몇 사람이 허준의 지시를 받아 병자의 경중과 남녀를 나누었다. 일시 철수했던 아래윗집이 다시 의원으로 바뀌어 쑥뜸 냄새로 가득차고 침 맞는 사람, 그걸 구경하고자 뒤밀리는 사람들로 복닥거렸으나 의원에서 터져나오기 마련인 신음소리나 비명 대신 병자도 가족들도 희망과 감사에 차서 웃음소리가 넘쳤다.
  그 속에서 아랫집 주인인 촌로가 몸소 잿간으로 달려가 씨암탉을 잡아들며 그 놀란 닭에게 말했다.
  "이놈아, 죽는다구 서러워할 것 없어. 저런 분 몸보신하는 데 죽는 거니 복이여."
  이밖에도 허준이 어젯밤도 날밤을 새웠다는 것을 안 병자와 가족들 중에는 다투어 밥상 제대로 차려 드리라며 달걀을 들고 오는 사람, 찹쌀 한 됫박을 찧어 들고 오는 사람, 심지어 마침 제사에 쓸 제주를 구해놓은 것이 있다며 시술중엔 금기인 술을 다짜고짜 권하는 노파도 있었다.
  허준이 아래윗집으로 오르내리며 뜸과 침을 사용하는 동안 일변 일러 준 약이 되는 초근목피를 캐러 간 사람들이 개선장군처럼 돌아와 허준에게 약재를 확인해 줄 것을 청했고 허준은 쓸 수 있는 약재와 이미 철이 지나 약효가 제대로 우러나을 수 없는 것 등을 지적하여 가려주는 등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데 소문을 전해 들은 이웃 마을 머슴 두엇이 찾아와 티눈까지 고쳐달라고 애원했다. 화가 난 촌로가 숱한 병자가 의원님 떠나시기 전에 병셀 짚어주십사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그깐 티눈 따위로 수고를 끼치느냐고 욕설을 뱉자 허준이 오히려 촌로를 만류하며 웃었다.
  "놔두십시오. 본시 남의 골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이 병자의 심리올시다."
  "하도 수고를 끼쳐서 우린 몸둘 바를 모르는 지경인디."
  허준이 티눈의 총각에게 일렀다.
  "티눈 낫우는 건 아주 간단하네. 대추를 가져다 씨를 뽑아버리고 그 과육만으로 티눈을 싸매두면 수일 안으로 단단한 티눈이 물렁물렁해지는데 그때 손톱으로 뽑아버리면 그걸로 낫네."
  온갖 자질구레한 병자를 다 보아주면서 허준의 눈은 자주 하늘로 향했다.
  오늘따라 해가 솟아오르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했고 바라볼 적마다 해는 한뼘씩 한뼘씩 그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또 애초 30여 명이던 병자들은 이미 반수가 돌아갔다 여기는데도 어디서 다시 나타나는지 그 숫자가 좀체 줄지 않았다.
  그러나 허준은 주위에서 강청하다시퍼 권하는 점심을 거른 채로도 힘들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달이 뜨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세상에서 자기를 이토록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그 발견 앞에서 허준은 더욱 눈에 총기가 뻗고 몸에 새 기운이 솟고 있었다.

    10
  바쁘고 바빴던 하루 해가 지기 시작했다. 눈코 뜰 새가 없다는 표현이 맞았다. 촌로를 비롯, 자청한 몇 사람이 곁에서 도왔으나 아래윗집 누워 있는 병자들의 수가 워낙 많아 허준 혼자의 힘으로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제야 허준은 지금쯤 죽산이나 안성, 아니 이미 수원 어간을 바삐 가고 있을 우공보를 아쉬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누구도 병자를 향해 허준의 눈과 손을 대신할 순 없는 일이었다.
  버드네를 둘러싼 삿갓처럼 뾰족한 산날망들 그 한 봉우리 위로 발그레 달빛이 어리기 시작했고 그 달이 뜨면 허준이 떠나는 것을 아는 병자와 가족들은 한번이라도 더 허준의 손길을 받아보고자 다투어 자기 병을 내세우며 조바심치기 시작했고 미처 아직 허준의 눈길을 거치지 않은 병자의 권속들은 동동거리며 솟아오르는 달을 끌어내리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다.
  하나 일변 허준의 진찰과 처방을 받은 병자의 가족들은 촌로의 지휘속에서 아랫집 부엌에 부산하게 드나드는 눈치더니 이윽고 음식을 익히는 냄새가 진동했고 그런 속에서, "지금 제주가 문제여. 밤길 떠나실 양반의 반주로 한잔 곁들여야 몸도 훈훈하니 가실 수 있지."
  하는 촌로의 소리도 났다.
  또 자기 차례까지 닿지 않을까 마음죄는 사람들이 차마 허준에게는 입을 못 열고 촌로에게 단 반 시간이라도 출발을 늦추어달라 사정했으나 촌로는 육십이 넘은 나이답지 않게 꼬장꼬장한 의리를 내세워 그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냉랭한 말로 무안을 주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어찌 자기 사정밖에 몰라. 평생을 별러서 가는 과거길이시라는디 동행들 다 떠나보내고 여태 남아준 것만으로 은혜가 태산같다고 여겨야지. 뭔 염치루다 또 지체허시라는 말이 나와. 다믄 반시간이라도 여유가 있다면 밤 꼴딱 새운 저 양반 다믄 한숨이라도 주무시고 가도록 권해야 옳지! 아무리 없이 사는 것들이라도 일단 약조를 했으면 약조는 약조니께 두말 말더라고!"
  "정말 그 말씀 옳아유. 참말로 저 의원양반 연이틀을 날밤을 새웠다니께. 더는 이러고저러고 잡고 매달릴 처지가 아녀."
  허준을 따라 역시 하룻밤을 새운, 처음 허준을 인도해온 농부도 가로막고 나섰다.
  '한 사람만 더!'
  이미 달이 뜨고 있었으나 그러나 정작 허준은 애써 그쪽을 외면한 채 자신에게 일렀다.
  '한 사람만이라도 더!'
  신음하는 병자들을 실제로 다루면서 자기의 노력으로 눈앞 병자들의 고통을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덜어주고 나을 수 있는 처방을 일러주면서 허준은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있었다.
  의원의 기쁨이란 이런 것이리라. 아팠던 사람이 나아서 돌아가는 모습, 나을 수 있다는 밝은 희망을 지닌 얼굴, 병자마다 부모요 집안의 기둥인 남편이요 사랑하는 형제자매요 자식일 때 가족들의 그 기뻐하는 얼굴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뿌듯한 보람이었다.
  또 묘한 일이었다. 이 병자 저 병자 각자 호소하는 환부와 병증을 보고 들으면서 언제 어느날 스승 유의태가 시술하던 온갖 어려운 기억들이 마치 어제의 일인 듯이 되살아나 허준의 용기를 일깨우며 손을 신들린 듯이 움직이게 했다.
  '한 사람만 더!'
  허준은 한 뼘이나 떠오른 달을 등지고 다시 윗집 방으로 건너갔다.
  그 윗집 아랫방에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닌 육십이나 된 농부가 팔십노모의 부축을 받고 와서는 뜸에 살갖을 태우며 누워 있었다. 빈대나 모기한테 물려도 그 작은 상처가 곧잘 화농하고 속발하는 특이한 피부병 환자였다.
  육십은 좋이 됐을 백발의 자식이어도 팔십노모에게는 불안하고 조심스럽기가 대여섯 살짜리 어린것 같은 심정인지 여느 병자의 가족들이 아래 윗집 오가며 허준의 시술을 구경을 하네 혹은 허준의 시선이 머물 적이면 수다와 애원을 섞어 우는 소리도 하건만 이 팔십노파는 처음 허준이 자기 아들을 대하자 합장을 해보였고 뜸 뜬 후는 의원의 지시가 있기까지 함부로 몸을 구부리거나 움직이지 못한다는 그 말을 철석같이 지키며 아들의 어깨에 힘줄이 나무뿌리처럼 뻗은 앙상한 손을 얹은 채 앉아만 있는 것이 눈물겨웠다.
  허준은 안타까웠다.
  뜸을 뜸에 있어 그 효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떤 쑥을 재료로 했느냐를 뜸의 위치를 선정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시한다.
  마을 사람들이 구해온 것은 쑥은 쑥이되 약용으로 정제된 쑥일 수가 없고 뜸에 붙이는 불 또한 금기로 하는 여덟 가지 나무를 기피할 겨를이 없었다.
  촌로에게 쑥을 가지고 빻고 체에 치고 뭉치는 요령을 일러 그렇게 만들어진 뜸을 환부에 얹어 촛불로 당기는 임시변통인 것이다.
  또 뜸은 약이 미치지 못하고 침이 이르지 못하는 중증일 때의 수단이요 그 뜨는 시각도 엄격히 가리어 점심 나절 이후에만 뜨는 것은 아침나절은 인체에 곡기가 아직 허하여 살갖을 파고 타들어가는 격동으로 혈행이 놀랄 것을 저어하기 때문이다.
  "의는 정하면 금기를 초월한다."는 언젠가 들은 유의태의 그 한마디가 허준을 격려하고 있었다. 허준이 시술하는 손을 멈춘 것은 온 방안에 자욱한 쑥 타는 내음 속에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졸음과 과로를 느끼고서였다.
  침의 위치 선정에서 표현 그대로 손톱만큼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그 침끝이 자꾸만 뿌옇게 흐려져오는 걸 깨달으며 허준이 방에서 나서자 방 밖에는 촌로를 비롯, 버드네에서 제일 처음 시술했던 간을 상하고 암까지 앓는 농부의 아비도 함께 서서 허준이 요기하기를 간청했다.
  허준은 그 회생의 가망이 없는 멀잖아 죽을 것이 확실한 암환자의 안내를 받아 아랫집 안방으로 향했다.
  그 방은 버드네라는 가난뱅이들의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게 촛불이 휘황했고 밥상은 산나물, 들나물을 무치고 볶은 것과 무우쪽과 감자를 버무린 닭도리탕이 푸짐했다. 그리고 하얀 쌀밥을 두 그릇이나 떠담아 놓았다. 아마도 온 마을이 추렴해서 이 밥상을 차렸으리라. 허준이 그 인정을 지그시 밥알과 함께 삼키는데 촌로가 손자 같은 그 허준에게 두 손을 받들어 술을 쳤다.
  "달이 이미 중천이에유. 정말 너무 오래 계시게 해서 ... 은혜가 백골난망올시다."
  은혜를 끼친 적도 없다. 내가 원하여 머문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낫울 수 있다는 그 자신감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다. 밥그릇을 거의 다 비워갈 때 촌로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던 중년 사내가 술이 담긴 호리병과 서너 주먹짜리 삼베 보자기를 들고 들어왔다.
  "뭡니까?"
  "이건 가시다 드실 요기로다 주먹밥을 담은 것이구 술은 가시다 목이나 축이십시오. 그리고 이걸랑 웃고 받아주시구요 ..."
  촌로가 내민 건 실꾸러미에 꿴 땡전 10여 닢이었다.
  "워낙 없이 사는 것들이다본께 더 마련은 못했습니다마는 아직 한양까지의 일정이 많으시니 하룻밤 주막에 유하실 적에 술상이라도 하나 청하시라구선 ..."
  허준이 미소했다.
  "제가 쓸 노자는 내가 가진 것이 있고 그리고 전 지금 안 떠납니다."
  좌중이 놀라서 그 허준을 쳐다보았다.
  "기일이 사흘인가밖에 아니 남으셨다면서 오늘 아니 가시다니요?"
  "혹 한숨 주무시고 내일 새벽에 떠나시려면 저희 집으로 건너가시지요. 그리고 그 돈은 돈이랄 것도 없는 잔돈 몇푼올시다마는 거두어주시구요."
  "돈 얘기는 마십시오. 한양엔 가야 합니다마는 몇 사람 병자는 두어 시각 더 차도를 지켜봐야 할 병이라서 조금만 더 머물다 가려 합니다."
  숭늉을 비운 허준은 마당으로 나와 남 먼저 쫓아나온 농부에게 세숫물을 청했다.
  피곤이 잠시 물러가고 잠도 달아난 듯했다.
  허준은 다시 윗집 위병을 앓는 젊은이와 각기를 앓으며 다리가 불편한 소년과 침을 다시 놓아야 할 서너 명 병자들을 찾아 건너갔다. 문득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연이틀의 밤샘과 신경의 집중 그리고 잠시의 휴식도 없었던 과로가 납덩이처럼 그의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날이 새면
취재에 남은 여유는 이틀 반- 한양까지 2백60리. 하루 1백30리씩 이틀 안에 달려 아직 한나절이 남았다고 허준은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마침내 허준은 돌아을 때 다시 들러 차도를 보아주마는 약속을 하고 버드네를 뒤로 했다.
  촌로와 마을의 남정네와 노파들이 새벽길을 따라오며 '장원급제'를 빌어주었고 사흘 밤을 샌 허준의 눈알은 모래가 박힌 듯이 따가웠으나 다리에는 새 기운이 솟고 있었다.
  '이틀이면 너끈히 가 닿을 수 있어.'
  허준은 버드네의 마을이 어둠속에 묻혀지자 돌덩이 같은 두 다리를 끌며 지름길로 길 안내를 자청한 처음 주막집에서부터 쫓아온 떠꺼머리 총각의 뒤를 따랐다.

    [  9. 스승의 부름 ]
    1
  "이틀 ... 하루 1백30리씩 이틀!"
  그건 절대절명의 시한이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내의원 취재의 일정이 연기되리라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앞으로 남은 이틀 안에 한양에 당도하여 내의원 과장에 무슨 일이 있어도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움직일 수 없는 시한 앞에서 차라리 버드네에서 병자들을 상대하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초조와 불안이 가슴을 옥죄기 시작했다.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라던가.
  어느 생각의 마디에서 불길한 비유가 튀어나와서는 자신의 목과 허리를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틀이면 충분히 갈 수 있어.'
  허준은 새삼 앞장서 지름길을 안내하고 있는 떠꺼머리를 잰 걸음으로 따라붙으며 자기를 격려했다.
  '어느 분야의 충원을 위한 취재인가?'
  정말 그것만 알면 이틀 남은 노정 속에서 걸어가면서라도 그 분야를 대충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망상은 버려야 해. 난다긴다 하는 온 나라 안의 의원을 상대로 조정이 실시하는 취재에 어찌 그런 요행이 해당될 건가.'
  떠꺼머리가 헤쳐가고 있는 험궂은 산새를 바라보며 자칫 지금 자기가 내의원 과장에 앉아 있는 듯한 그 착각을 고소했다.
  허준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며 걸음걸음 출제 분야의 대강을 하나씩 꿰어갔다.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그리고 내경 분야를 세분하여 신형, 정, 기, 신, 혈, 오장육부, 또 잡병의 갈래로 심병, 진맥, 용약, 해독, 구급 그리고 천지운기의 이치를 논하는 이론 등.
  그 골몰 속에서 허준의 눈두덩이 자꾸 무거워오고 있었다. 연사흘 눈을 못 붙인 피로가 길을 걷는 속에서도 자꾸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잠잘 시간은 없어!'
  부릅떠도 부릅떠도 떨어지지 않는 수마와 싸우며 허준은 자신에게 고함쳤다. 그때였다.
  떠꺼머리가 앞장선 가파른 산길이 거의 끝나고 있었고 문득 떠꺼머리가 길도 아닌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따라내려가던 다음 순간 허준은 아연해지며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 외길은 거의 쓰러져가는 오두막 담장도 없는 마당에서 끝나 있었다.
  "여기가 대체 어딘가?"
  여러 해 지붕도 이지 못하고 골이 패고 잡초가 새끼를 친 불빛도 인적도 없는 오두막을 보며 허준이 묻자,
  "우리 집여유."
  하고 떠꺼머리가 오히려 허준을 쏘아보았다.
  "우리 집이라니?"
  그때 불도 없는 방안에서 문득 늙은 여인의 기침소리가 났고 돌연 떠꺼머리가 허준에게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지가 거짓말을 했어유. 용한 의원인 걸 알았길래 우리 어머니 병 좀 봐달라구선. "
  "뭣이야?"
  "죽을 병에 들었는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먹지도 못하구유 천날만날 저렇게 기침만 하고, 살려주세유."
  떠꺼머리가 허준의 발치에 이마를 조아렸다.
  "제발 우리 엄닐 살려주세유!"
  허준이 뒷걸음쳤다. 이젠 남과 허튼말 한마디 건네고 있을 여유도 없는 자기였다.
  "이렇게 빌어유. 난 사흘씩이나 지켜봤어유. 내가 벼르고 별러서 모시구 왔다구유."
  "자네가 뭐라고 하건 이젠 난 단 한시도 어물거릴 여유가 없는 사람일세."
  떠꺼머리가 돌아서는 허준의 하반신을 끌어안았다.
  "놓게!"
  "아이구, 의원님 의원님!"
  "놔!"
  떠꺼머리가 한사코 허준의 허리를 끌어안고 질질 끌려오며 눈물 콧물을 번들거렸다.
  "살려주세유, 제발 우리 엄닐 살려주구 가유웃."
  허준이 자기 몸에 파고든 그 떠꺼머리와 손가락을 풀어내고 돌아선 순간 튕겨 일어난 떠꺼머리가 품에서 꺼내 든 건 버드네 뉘 집에서 훔쳐왔을 부엌 칼이었다.
  "그냥 가면 죽일 터! 울 엄닐 안 살리고 가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여!"
  고함과 함께 뛰어든 떠꺼머리의 칼날이 허준의 가슴 앞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 칼 놔!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내 말 듣게. 자네야말로 첨부터 내 사정을 지켜본 사람 아닌가. 용서하게."
  "당신 사정 따윈 난 몰라. 당신이 울 엄니 병을 낫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것만 지켜보고 있었던겨!"
  말끝에 다시 칼날이 허준의 앞으로 다가섰다.
  허준의 머리가 맑아왔다. 떠꺼머리의 눈의 살기가 진짜였다. 이대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허준이 낮게 말했파.
  "네가 핍박을 하건 말건 난 떠나야 해."
  "뭐 어째!"
  "사람 살려달라며 칼을 휘둘러? 내가 그깐 칼이 무서워서 사정하는 줄 아나. 찔러보아! 칼 아니라 더한 것으로 핍박해토 날 못 막아!"
  떠꺼머리가 잠시 압도되어 망설이자 허준이 돌아섰고 순간 그 등뒤에서 떠꺼머리의 호홉이 폭발했다.
  그 부릅뜬 눈과 칼날이 허준의 가슴팍에 뛰어들었다.
  허준이 거머든 보따리로 그 칼날을 받았다.
  칼날이 여벌의 짚세기를 뚫고 보따리 속의 벼루를 찌른 쨍그랑 소리가 났다. 동시에 허준의 발길이 숙여진 떠꺼머기의 정강이를 건어차며 용천 파락호 시절 익힐 태껸의 솜씨로 상대의 척택 (오른팔 팔굽 안쪽)을 쳤다.
  그 강도로 목줄기를 치면 목이 부러지거나 반 시각은 눈알의 초점이 흩어지는 호신의 일격이었다.
  칼이 허공을 날아 서너 칸 저쪽으로 떨어졌고 떠꺼머리가 어깨를 감싸며 마당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 허준이 칼맞은 봇짐을 고쳐 쥐며 마악 마당을 나설 때였다.
  기침소리가 나던 단칸짜리 어두운 방안에서,
  "밖에 누구여? 만석이 돌아온겨?"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산발한 백발에 띠를 맨 노파가 내다보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허준이 돌아보자 노파가 희미한 눈에 마당의 정경이 좀은 비치는지 눈을 끔벅거리다가 "누구여, 누구여." 부르다가 돌연 다시 기침을 터뜨리며 각혈과 함께 문지방 너머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떠꺼머리가 "엄니!" 하고 목이 멘 소리를 외치며 병자에게 달려들었고 거의 동시에 허준도 보따리를 던지고 노파에게로 뛰어들며 떠꺼머리를 밀쳐내고 병자를 부축했다.
  병자는 시력이 온전치 않은 듯했고 토혈이 심했다.
  허준이 소매 속에서 명주수건을 꺼내 병자의 입을 거푸 닦았으나 노파는 계속 쿨럭거리며 피를 뱉어냈다.
  오히려 다급한 건 허준 쪽이 되었다.
  "언제부터 이 지경에 이르렀나! 피를 이렇게나 토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턴가고 묻고 있는 걸세!"
  "꽤 오래 됐어유. 재작년엔가 하도 못견뎌 하시길래 한번 의원한테 보였더니 ..." 
  "그래 보였더니!"
  "죽을 병이라며 그냥 맛있는 거나 자주 해드리라구선 ..."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떠꺼머리가 울음을 울었다.
  "그래서 마냥 이대로 내버려뒀단 말인가!"
  "귀한 약을 써야 차도가 있을 거라는디 돈이 있간유 ... 그래서 별수 없이 숯가마 숯 굽던 일은 걷어치우고 주막에 나가 술심부름이나 해주며 더러 고깃국을 얻어다 드리군 했는디, 요즘은 것두 제대로 못 넹기구 ... 걸핏하면 피를 토해유."
  허준이 병자의 눈을 까뒤집고 들여다보았다. 이미 눈자위가 허옇게 변하고 있었다. 허준이 고함쳤다.
  "손발을 주무르게!"
  "남의 살이 닿기만 하면 아프다구선 ..."
  "어서!"
  떠꺼머리가 그 허준의 무서운 눈빛에 놀라 제 어미의 수족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허준은 병자를 봉당에 반듯이 눕히자 침통을 끌러 버선도 없는 병자의 앙상한 발바닥을 자기의 무릎에 올렸다.
  그리고 호침을 뽑아 병자의 용천(발바닥의 움푹 팬 중앙)을 취했다. 신과 연결된 곳이나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는 급소요 호침은 경락 중에 심한 마비를 다스릴 때 쓰는 침이었다.
  병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준은 이어서 폐에 새 숨을 불어넣기 위해 소상(왼쪽 엄지손톱 옆)과 어제(왼손 엄지 아래 살점의 가장 두툼한 곳)에도 침을 찔렀다.
  이윽고 병자가 숨을 새로 몰아쉬기 시작하자 허준은 떠꺼머리에게 외쳤다.
  "내 보따리 가져오게."
  "이렇게 그냥 가시면 어쩌냐구유 ..."
  "어서!"
  떠꺼머리가 마당에 던져진 허준의 괴나리봇짐을 들고 오자 허준은 일변 보따리를 끌러 지필묵을 꺼내며 자기의 노자 속에서 약값을 꺼내 떠꺼머리에게 쥐어주었다.
  그리고 병자에게 필요한 약재를 일필휘지하여 떠꺼머리에게 건넸다.
  "즉시 자네가 아는 가장 가까운 의원에 가서 예 적은 약재를 사오게. 어머니를 살리려거든 한 시각도 지체하지 말고!"
  사태를 안 떠꺼머리가 어둠 속으로 구르듯이 달려나갔다.
  병자의 호흡이 다시 깔딱거리고 있었다.
  돌연 허준은 병자의 양볼을 움켜잡아 입을 벌리게 한 후 자신의 왼손 무명지를 깨물었다.
  으드득 하고 머리 복판에 대침이 꽂히는 충격이 왔고 허준은 부서진 손가락 끝에서 두두두둑 ... 듣는 자신의 피를 병자의 목구멍 속으로 떨구기 시작했다.

    2
  단지는 약이 아니다. 그건 달리 필요한 약의 방편을 찾지 못했을 때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의 상징인 건강한 피를 병자의 몸 안에 섞어주어 살려보려는 염원의 뜻이 더 진한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란 효자나 열부의 전설에 묻어 있는 사건이지 의원의 행위일 수 없다. 그러나 허준의 그 행동은 약효를 가늠해보기 이전의 무아의 행위요 위급한 병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 의원으로서의 개안이기도 했다.
  눈알이 빠지듯한 격통과 함께 자신의 이빨에 으깨진 왼손 무명지에선 아직도 피가 계속 노파의 목구멍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죽은 듯한 병자가 크게 깊은 숨을 한번 몰아쉬었고 이어 병자의 앙상한 두 손이 허우적거리듯이 자신의 턱을 움켜쥔 허준의 우왁스런 손을 떼어내려 하며 신음소리를 틀어내기 시작하더니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시오니까."
  "뉘시우 댁은?"
  노파가 꿈을 깬 듯한 눈으로 자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낯선 허준에게 물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오이다."
  "이상도 ... 하지 ..." 
  노파가 또 꿈결처럼 뇌었다.
  "무엇이 말씀이오?"
  "꿈결에 ... 신령님을 보았어유. 만석이 아부지하고 함께 나를 가로막고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허준은 봉당 맨땅에 누운 병자를 안아들었다. 노파는 한 마리 토끼처럼 가볍고 따스한 체온이 살아나고 있었다. 지푸라기가 섞인 흙덩이가 그대로 비어져 나온 토담방은 싸아한 빈대의 피냄새가 괴어 어수선했으나 허준이 토혈질로 얼룩진 병자의 이불을 뒤집어깔고 높은 베개를 터뜨려 높이를 조절하고 있는데 숨이 턱에 닿은 떠꺼머리가 뛰어들어왔다.
  그 손에는 서너 첩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허준이 방을 나가 약첩을 헤쳐 써보낸 약재임을 확인한 후 물었다.
  "집에 약탕관이 있는가?"
  "부엌에 두 개씩이나 있지유."
  "참숯은?"
  "숯은 부엌 구석에 몇 포씩이나 쌓여 있구유."
  "그럼 됐네. 내가 약을 달일 동안 자넨 방에 들어가 병자의 치마끈을 풀어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드리게."
  하고 문짝 대신 드리운 싸리발을 들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방안으로 들어간 떠꺼머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머리를 등쪽으로 방위를 바꾸어 눕혀진 어머니에 의아해하다가 저고리 앞설의 벌건 핏자국을 보고 안타까이 외쳤다.
  "이제 피를 안 토해도 될껴. 내가 마악 약을 지어온간이여!"
  "이건 토한 게 아니구 저 양반이 제 손가락을 깨물은 자국이여."
  "손가락을 깨물다니?"
  "나도 첨엔 몰랐어. 근디 숨이 안 넘어가구 목이 칵칵 막혔는디 갑제기."
  "응?"
  "목 안에 불덩이처럼 뜨거운 무엇이 목젖을 지져대길래 눈을 떠봉께 저 양반 손가락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더라니께."
  "엄니를 위해서 저 사람이 자기 손가락을 깨물었단 말여!"
  "안 본겨, 넌? 대체 누구여, 저 사람이."
  떠꺼머리가 자리를 차고 방을 굴러나가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부엌칼로 약재를 썰고 있는 허준의 손을 잡아들었다.
  "무슨 일인가?"
  떠꺼머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일변 자기의 옷깃을 잡아뜯어 허준의 피투성이의 손가락을 감았다. 이어 허준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렸다.
  "고마워할 것 없네. 병자가 위급하기로 달리 손쓸 수가 없어서 선인들의 정성을 따라 해봤을 뿐."
  "... 우리 같은 신세 아무도 사람 대접 안 해줬는디 ... 이 은혜를 어찌 갚아유 ... 어찌 갚냐구유 ..."
  대답 대신 허준이 다시 약재를 썰기 시작했다.
  온몸에 새벽의 냉기가 휘감기고 있었다. 날이 밝고 있다는 것은 허준에겐 남아 있는 이틀이라는 시간 속에서 다시 하릇밤이 흘러가버린 것을 의미했다. 과장에의 입장이 소문에는 사시(상오10시부터 11시)다.  그리고 그 사시는 바로 내일의 사시를 의미한다.
  '내일 사시까지 2백60리.'
  약재를 써는 허준의 동작이 정지했다. 말인즉 오늘과 내일하고 이틀을 꼽을 수 있되 기실 그건 내일 새벽까지와 사시까지의 한나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
  '어서 떠나야 해!'
  허준의 손은 아직 약재를 썰고 있었다. 위중한 병자였다. 저 천등벌거숭이 같은 떠꺼머리에게 부자라는 극약이 섞인 약을 달이게 할 순 없었다. 또 자기가 지어주고 자기가 달여준 약을 먹고 병자가 편안해하는 모습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자기가 떠난 후에라도 산천에 자생하는 약초를 일러주어 아들의 효성으로 제 어미의 병을 낫을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야!"
 하고 허준의 칼질이 다시 멎었다. 과장에 입장은 내일 아침의 사시일지라도 과장에 들어가는 수속은 내일이 아니요 바로 오늘 해 안으로 내의원에서 마친 후 그 시권을 받아들어야 내일 과장에의 입장도 허용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한양에 도착해야 할 시간은 내일 사시가 아니라 내의원 시관들이 퇴청하기 전인 바로 오늘 신시(하오3시부터 5시)까지 가닿아야 하리라.
  그건 절망이었다. 개처럼 달리고 새처럼 날아가지 못하는 한 오늘 해안으로 2백60리 길을 갈순 없다.
  약재를 약탕관에 차곡차곡 재어가는 허준의 목덜미에 진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참말 이 은혜 돈 생기면 꼬옥 갚을 티니께 믿어주세유."
  간이 바싹바싹 오그라드는 듯한 갈등 속에서 그러나 허준이 손수 약을 달여내어 병자를 안아일으킨 후 첫탕을 먹이고 나자 아들인 떠꺼머리가 괜히 울상이 되어 되풀이 되풀이 치사를 했다.
  "자네 어머니 병은 소음병이라 하는 것으로 처음 심한 추위를 몸에 맞아 그로서 비롯된 것이며 처음엔 작은 약으로 조절이 가능했던 가벼운 증상이건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 병으로 번진 걸세."
  "엄니는 본래부터 약골이셨어유. 그리구 10년쯤 전에 숯을 굽는 아버지를 따라 숯굴에서 살면서 그때부터 시름시름했었슈."
  "짐작 가네."
  부자의 독한 약기운인지 조금 생기를 회복한 병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고 끼여들었다.
  "지발 숨만 가쁘지 않으면 살겠어유. 하도 견디기가 어려워서 원젠가야 몰래 의원을 찾아갔더니 폐라구 하던가유, 거기가 엄청나게 병이 들었다구선 ..."
  "일견 폐병 같지만 폐만 원인이 아니올시다."
  "다 가난이 웬수예유. 정 아프구 할 적에는 쟈 아부지도 의원한테 가 보라구 그러셨지만 온통 숯껌댕이가 돼갖구 그 고생고생하는 남편을 보면서 조금 아프다구 의원 찾아가기가 미안해서 그냥 참구참구 했던 게."
  거두절미하여 허준이 병자가 명심할 말을 골라 말했다.
  "사람의 가슴이란 하루 수만 번씩 세상의 온갖 좋고 나쁜 기운이 드나드는 곳이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음식 또한 변하고 상한 것이 많아 늘 조심을 해야 하는 곳올시다. 가슴 흉자 글자풀이를 해봐도 흉한 기운이 쉴새없이 드나들고 그것들이 똥오줌으로 쏟아져 나가지 않고 밤낮으로 가슴 복판에 남아 있다 하여 가슴 흉자의 복판엔 유독 흉한 흉자가 그려져 있는 것올시다."
  "눈이 까막눈이다봉께 글자까지는 모르지만."
  "암튼 내가 적어준 처방전 간직했다가 돈이 생기면 어머니의 수족에 온기가 돋아오기까진 주욱 그 약재를 사다가 내가 가르쳐준 대로 약을 달이게."
  "꼭 그렇게 하겠어유."
  "또 하나 토혈은 목안이 헌 게 원인이니 늘 엉겅퀴의 생즙을 짜서 먹는 것 잊지 말고."
  "명심 명심할 거예유."
  허준이 처방전을 쓰느라 헤쳐놓았던 자기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요기라도 하시고 가야 하는디 ..."
  하고 병자가 벌겋게 젖은 눈으로 허준을 건너보았으나 짐을 움켜든 허준은 연민의 시선을 한번 주어 인사를 대신하고 땅을 나섰다.
  눈알이 가시에 꿰인 듯이 따가웠다. 나흘째 잠을 못 잔 눈이었다.
  잠을 안 잔 건 눈뿐이 아니었다.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손으로 신들메를 죄어 매던 허준은 그대로 고꾸라져 깊은 잠속에 떨어져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잘 있게."
  하고 두손을 맞잡고 따라나서는 떠꺼머리에게 허준이 인사를 던졌을 때였다. 갑자기 눈을 빛내며 떠꺼머리가 말했다.
  "혹시 말을 탈 줄 아세유?"
  "말이라니?"
  "저 때문에 바쁜 길을 못 가셨으니께 말 한 필을 어찌 구해볼려구유."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다음 순간 그 떠꺼머리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럴 수가 있겠는가? 말을 빌 수가 있다면 돌아올 제 꼭 돌려주겠네. 살려주는 셈치고 꼭 좀 말을 구해보게!"
  "알았슈. 저의 모자의 은인인디 그만 부탁도 못 해드려서야 말이 되갔슈. 여기서 기다리세유. 오래 걸리지 않을 티니께."
  떠꺼머리가 신명이 난 얼굴로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허준의 온몸에 새 용기가 용솟음쳐 왔다. 희망에 찬 눈으로 가로막은 검은 산등성을 향해 소리쳤다.
  "말만 있으면 2백 60리쯤 오늘 해 안으로 갈 수 있고 말고, 있고 말고, 있고말고!"
  허준이 불끈 두 주먹을 쥐었다.

    3
  아스라이 홰를 쳐 목청을 뽑는 닭울음 소리가 거푸 틀려오고 있었다.
  떠꺼머리가 말을 끌러 간 지 거의 반 시각이 지나고 있었으나 허준이 뚫어지도록 지켜보고 있는 그 방향에는 말발굽소리는 커녕 쥐죽은 듯한 고요뿐이었다.
  이미 동녘하늘의 한 자락이 붐하니 어둠을 몰아내고 별들이 유난히 더 반짝거렸다.
  그러나 허준은 이젠 초조하지 않았다. 물에 빠졌다가 하늘이 내린 금줄을 타고 언덕 위로 소생한 기분이었다.
  기마의 술을 배운 것은 용천시절이었다.
  신분이 천출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현감이던 아버지의 위세를 업고 용천 서쪽 60리 신도진)의 해안 목마장에서 양반 자제들과 얼려 말에 미쳐 지새던 한 시절이 있었다.
  과거를 생의 목표로 하는 양반 자제인 선비들에겐 기마도 육예의 하나인 필수 덕목이다.
  허준은 자기는 과거를 볼 수 없다는 신분의 질곡을 알면서도 그 기마 하나에는 미쳤었다.
  눈보라를 실은 거센 바닷바람 ... 서해랄지 북해랄지 그 긴 겨울의 용천, 차갑고 산더미 같은 파도더미가 끝도 없이 밀려와 지둥치듯한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신도진 바닷가에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주는 말잔등에 올라 허준은 친구들처럼 동반은커녕 서반에도 응시할 수 없는 자신의 출생을 얼마나 원망하며 울었던가.
  그리고 안시성이라는 요동땅에 남은 고성의 이름을 붙인 그 늙은 검정말이 자기의 기술 부족으로 발목이 부러져 죽어갈 때 그 애마의 갈기를 쓸어주며 동기간의 죽음이나 보듯 울었었다.
  '그날이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의 추석날이었어 ...'
  나흘 밤을 잠 못 잔 허준의 충혈된 눈이 아득한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미소했다.
  '그 안시성의 넋이 지금의 나를 살려주러 오고 있어.'
  그 선한 커다란 눈에 끔벅끔벅 눈물을 담으며 죽어가던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했던 그 말,
  '260리쯤!'
  떠꺼머리가 끌고 온 말이 안시성처럼만 달려준다면 오늘 해 안으로 내의원에 닿아 시천을 받아드는 것쯤 문제도 아니리라.
  머릿속에 자꾸만 비쳐오던 영상. 지금쯤 새벽잠을 깨어 내일의 취재에 대비하여 의서를 뒤적이고 혹은 남 먼저 시권을 받아들고자 자리때기 말아들고 내의원으로 달리고 있을 면면들이 떠올랐다.
  도지, 임오근, 또 창녕 물슬천 나루에서 만난 이미 두 달 전부터 취재준비차 한양으로 올라간 밀양 산다는 박갑서, 그리고 이번 버드네까지 동행했던 정상구, 우공보 ...
  지금 내의원 앞으로 몰려들고 있는 얼굴들이 어찌 그들만일 것인가.
전국 팔도의 방방곡곡 저마다의 소망을 담아 내일의 취재를 겨냥한 사람들이 백도 되고 5백도 되리라.
  지지난해 도지가 볼 때의 인원이 8백여 명이었다니 이번도 아마 그 비슷한 숫자가 내의원에 가까운 객관에서 지금쯤 모두 일어나 소세하고 촛불 밝히고 혹은 책장을 뒤적이고 아침상을 채근해 먹으며 부산하거나 ... 허준은 이미 자신 또한 마치 한양에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지금 이 시각 내의원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들을 여유만만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라보던 방향과는 엉뚱한 등뒤에서 느닷없는 기척들이 들렸고 돌아보니 오라에 묶인 떠꺼머리를 앞세운 관졸 세 사람이 일제히 달려들며 허준의 목에 팔을 감아 쓰러뜨렸고 또 한 자가 팔을 꺾고 손을 묶기 시작했다.
  "이 무슨 짓이오!"
  허준이 놀라 튕겨 일어나려 했으나 그 얼굴에 날아온 건 관졸의 완강한 발길질이었다. 허준이 입술이 터지며 나뒹굴었고 그 등판에 허리에 세 관졸의 사정없는 발길질이 무차별로 쏟아졌다.
  순간 떠꺼머리가 몸을 던져 허준을 가로막으려 했고 그 떠꺼머리에게도 또 한차례 관졸들의 매질이 쏟아진 후에야 허준은 멱살이 잡혀 일으켜 앉혀지고 말끝마다 주먹질이 날아오는 취조가 시작됐다.
  이때 또 병자가 굴러나와 아들과 허준을 감싸려 울부짖었으나 그녀 역시 관졸들의 팔뚝질을 맞고 나뒹굴며 버르적거렸고 떠꺼머리가 이마로 마당을 찧으며 "그 양반은 죄가 없어유. 빨리 한양에 보내줘유." 하고 울먹였다.
  "네가 이자더러 말을 훔쳐오라 시킨 자렷다 ..."
  키 큰 관졸의 첫마디였다.
  "말을 훔쳐오라 시키다니?"
  "그 양반이 시킨 게 아니라 지가 한 일여유. 나만 잡아가란 말여유. 나만유."
  한사코 변명하려는 그 떠꺼머리에게 또 날아간 건 늙은 관졸의 육모방망이였다.
  "시킨 일이 없다구?"
  "없소."
  매질보다 욕설보다 한양 취재의 길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뜻아니한 눈물이 허준의 양볼에 자꾸만 흘러내렸다.
  "잡아떼도 소용없다. 이자와는 어떤 사이인지 말해라!"
  허준은 말할 기력도 없었다.
  눈앞에 다가왔던 한양이 2백60리가 아니라 천리 만리 아득히 멀어져가고 있는 절망뿐, 나흘을 밤샘하여 버틴 체력도 한계에 달하여 8년을 뼈무르며 발돋움했던 내의원 취재의 온갖 희망이 자신의 발 아래서 소리내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말 못하느냐!"
  육모방망이가 허준의 등줄기를 또 한번 사정없이 후려팼다.
  그러나 아픔 이전에 허준의 눈앞을 어른거린 것은 이번 취재길 자기 못지않게 온갖 정성 온갖 기대를 담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이 었다.
  '죽자 ... 이대로 죽는 게 나아.'
  허준은 그렇게 땅에 길게 누우며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 허준과 떠꺼머리가 개 끌리듯이 끌려가 하옥된 곳은 진천 관아였다.
  갇혀 있던 잡범들이 심한 매질과 옷이 찢겨 처박힌 허준을 마치 신세가 같은 자기들의 동류라도 보듯 빙글거리는 눈으로 건네보았고 떠거머리가 그 앞에서 자꾸만 자기 가슴을 치며 일이 이렇게 된 전말을 늘어놓았으나 허준의 머릿속은 텅 빈 채 아무 얘기도 일일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해가 한낮이 겨워 있었다. 지은 죄 없으니 풀려는 나리라. 그러나 풀려난다 한들 해가 지기 전에 2백 리 저쪽 한양에 가서 시권을 받을순 없다.
  '후회하지 마라! 돈 아니 생기는 일에 미쳐 비록 이 지경에 빠졌을지언정 후회는 마라!'
  비록 취재의 기회는 사라졌어도 이번 길 그는 보았던 것이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이런 병 저런 병에 시달리는 무지렁이라 불리는 저 이름없는 가난한 백성들의 모습을.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인간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인간인가를 이번 길에 깨달았은즉 ...'
  그렇다. 그것 하나가 이번 길 자기의 값진 소득일 것이었다. 비록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아내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얘기이긴 하되-의지일생, 그 김민세가 적어준 한마디가 뿌듯이 새로운 실감으로 허준의 가슴속을 뜨겁게 뜨겁게 채워오고 있었다.
  누가 맹렬히 깨우는 기척에 허준은 잠을 깼다. 눈알은 잠들기 전보다 더욱 따가웠으나 그 시뻘건 눈으로 둘러보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인데 "허준이 나오니라!" 하고 옥졸이 거푸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고 그 옥졸 뒤에는 문식이 있어 뵈는 관원이 조용한 모습으로 허준을 굽어보고 있었다.
  허준이 현감이 있는 동헌 뜰 아래 끌려나왔을 때였다. 그 마당 한쪽에는  떠꺼머리의 노모를 필두로 버드네 마을의 낯익은 촌로와 남녀 주민 이십여 명이 일제히 반기며 일변 허준의 피멍 맺힌 얼굴과 찢긴 의복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굽어보던 현감은 그 소란이 가라앉기까지 과묵한 모습으로 지켜보다가 형방에게 허준의 오라를 풀게 한 후 데리러 온 이방에게 부액을 명하여 동헌 협실(곁방)로 허준을 안내케 했다.
  저만치에서 눈물을 훔치던 촌로가 소리쳤다.
  사연인즉 떠꺼머리의 노모가 그 몸으로 주막으로 달려가 일어난 일을 얘기했고 이에 주모가 버드네로 달려가 전갈하여 촌민들이 떼를 지어 달려와 허준의 결백을 직소한 것이었고 자초지종 내용을 들은 현감이 서둘러 허준을 불러낸 것이었다.
  허준이 들어간 방안에는 어린 관기 하나가 그 역시 일의 전말을 들었는지 형편없는 몰골의 허준에게 날아갈 듯한 큰절을 올리고 나서 이미 준비한 의복 일습을 내놓았다.
  뜻밖의 사태에 입이 얼어붙은 건 오히려 허준이었다.
  "주안상이 마련된 줄 아오니 속히 의복을 갈아입으소서."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 없소."
  "방금 밖에서 사람들이 얘기한 그대로올시다."
  "그럼 나를 방환한다는 얘기요?"
  "그렇지 아니하고야 어찌 현감께서 주안상을 갖추라 했사오니까. 곧 현감께서 납실 것이오니 의관을 정제하소서."
  말끝에 관기가 다가와 허준의 의복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돌도록 눈이 맑은 이제 이팔이 넝었을까 한 어린 관기의 손길과 다가선 머리결에서 분냄새와 동백기름 냄새가 설핏 났다.

    4
  의복을 갈아입은 허준이 다시 관기가 쥐어주는 물축인 수건으로 얼굴과 상처를 닦고 났을 때 협실 밖에 기척이 나며 "여옥아." 하고 여자의 부르는 소리가 났고 여옥이라 불린 관기가 잽싸게 다가가 방문을 열고 늙은 관기인 듯한 여자로부터 술상과 술병을 받아들여 놓았다.
  뒤이어 다른 기척이 나고 30대 초반의 젊은 현감이 나타났다.
  허준이 시선을 다 들지 못하고 읍하여 경의를 표했고 관기 여옥이가 주안상을 가운데로 두 사람의 방석을 놓았다.
  "놀라운 일이구먼."
  하고 좌정한 현감이 조용한 첫마디를 했다.
  "..."
  "부민들의 얘기를 듣고 세상에 아직도 의인이 있는가 여겼는데 그게 또 이렇게 젊은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소."
  허준은 대답 대신 허리를 반쯤 굽혔다.
  아버지가 현감이었던 허준이다. 현감이라면 종6품직으로서 종9품에서 시작되는 관직에서 6단계의 승진을 거친 직책이다. 비록 충청도 진천이라는 벽지의 관장이긴 하되 이 사람은 이십대 초반에 등과한 후 남보다 훨씬 빠른 출세가도를 달리는 인물일시 분명했다.
  아버지가 40대 후반에 이르러 도달한 현감자리를 30대 초반에 이룩한 사내 .
  '나보다 서너 살 위.'
  하고 허준은 준수한 모습에 나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의젓한 청년 관리를 건너보았다.
  "우선 술을 쳐라."
  하고 현감이 관기에게 명했다.
  여옥이가 두 사람의 잔에 술을 따랐다.
  "자네가 요 며칠 내 관내에서 무슨 일을 치르었는가는 부민들로부터 소상히 들었네. 고맙다는 말을 미리 함세."
  "누구에게 치하를 받고자 한 일은 아니옵니다."
  "그 말도 마음에 드네."
  상대가 양반이 아닌 이상 '하게'나 '해라'는 양반의 특권이었다.
  "갈 길이 바쁜 사람이란 사연도 들었으니 오래 잡진 않으리니 마음놓게."
  "그 말씀은 소인을 이 길로 풀어주신다는 말씀이시온지?"
  "당연한 얘기 아닌가. 공은 있되 허물이 없는 자네를 어찌 잡아두리. 들게, 잔."
  "공이라 자처할 일이 있사오리까만."
  순간 허준은 말을 삼키고 맹렬하게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낯이 익었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어디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했다. 한번은 자신의 뇌리 속에서 담아두었던 인물일시 분명했다.
  그 현감이 입을 열었다.
  "아닐세. 부민들의 억울한 일을 살펴주는 건 나의 소임이로되 병든 백성을 돌봐주는 건 의원이 할 일. 그걸 부내의 의원들이 외면하는 터에 외처에서 온 과객인 자네가 스스로 달려가 인술을 베풀었다니 어찌 치하할 일이 아닐손가. 이 잔 받게."
  말 끝에 현감이 비운 술잔을 허준에게 건넸다.
  잔을 받는 순간 허준은 정지했다.
  '그 사람이야.'
  하고 허준이 내심으로 소리쳤다.
  '아내와 정혼했었던 사내!'
  8년 전 아내 다희를 데리고 용천을 떠나올 때 장번사령놈에게 노자를 도둑맞고 그자를 찾아 한양 남대문으로 향하다가 아내가 사색이 된 채 마주쳤던 사내.
  아내의 집안이 몰락하기 전 혼약을 했으며 그리고 그 다희를 찾아 유배의 땅 북청이며 의주며 용천땅에까지 찾아왔던 아내의 옛 정혼자 김상기.
  "술을 못하는 쪽이던가?"
  여옥이가 다시 친 술잔을 향한 채 움직이지 않는 허준에게 김상기가 물어왔다. 눈앞의 허준이 찾아 헤매던 여자의 남편임은 꿈에도 모르는 눈이었다.
  "..."
  허준이 잔을 비우자 여옥이가 그 잔을 김상기의 앞에 놓고 허준을 대신하여 술을 따랐다.
  "명리가 없는 곳에도 너도나도 피해가는 것이 세상 인심인데 그 나이에 그러한 일을 해낸 자네는 정말 가상한 데가 있네. 내 자네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하리. 허준, 허준이라 ..."
  "과찬의 말씀 송구스럽사옵고, 소인의 혐의가 풀렸다면 이대로 떠나려 하옵니다."
  "아닐세, 자네는 지금 한숨 눈을 붙여야 하리, 다믄 두어 시각이라도."
  "아니올시다."
  "취재의 날짜가 내일부터라는 말도 들었네. 하나 면경을 한번 들여다보게. 온통 핏발이 선 자네의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니야. 그러니 개의치 말고 다믄 두어 시각이라도 눈을 붙인 다음 내 타던 말을 내줄 것이니 그걸 타고 가도록 하게."
  "말을 내주신다고 하셨습니까?"
  "범인이 말을 끌고 오기를 기다린 것은 승마의 재주가 있다는 걸로 들리는데 말을 탈 줄 모르던가?"
  "아니옵니다. 하오나?"
  "그럼 됐네. 내가 다스리는 부민들에게 은혜를 끼쳤으니 말 한 필쯤 아까워할 것 없지. 미리 여물을 배불리 먹여두라 일렀으니 한숨 자고 난 후 곧 타고 갈 수 있겠지."
  "이 고마움을 무어라 해야 하올지?"
  "덕은 외롭지 않는 법이고 친구는 곳곳에 있는 법이지."
  '친구!'
  "안에 잠시 눈을 붙일 수 있는 방을 치워놨을 것이니 더 사양 말고 내 말대로 하게. 그럼 난 밀린 공사가 있어 나갈 터인즉 자고 나서 따로 인사할 건 없네. 잘 가게!"
  "이 은혜 정말 잊지 않으오리다."
  허리 굽힌 허준에게 미소를 남기고 김상기가 협실을 나가자 여옥이가 눈붙일 방으로 안내할 듯이 허준을 보았다. 그러나 허준은 사라진 그 김상기를 향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김상기가 풍긴 보이지 않는 작은 위엄. 그건 뼈대 굵은 집안에서 자란 양반의 습성만이 아니었다. 그건 허세를 뛰어넘은 치열한 자기 도야를 거친 당당한 인격의 분위기였다.
  남대문 앞에서 그 운명의 해후 이후 아내의 입에선 단 한번도 김상기의 이름이 나온 적은 없으나 아내는 좋은 사내를 알았었다고 허준은 생각했다.
  '그리고 ...'
  그 김상기를 거절하고 자기를 택한 아내에게 결코 후회를 주어서는 아니 된다고 뜻 아니한 장소에서 뜻 아니하게 허준은 멀리 산음 오두막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바로 내일로 닥친 취재를 그리며 치성을 드릴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김상기를 만난 이 우연을 당신은 모르리라. 그리고 집에 돌아간 후라도 아마도 내 입으로 꺼내지지 아니하리라 ... 그건 그 나이에 그 직첩에 이른 그리고 앞으로도 관운의 탄탄대로를 달릴 김상기에 아득히 못미치는 신분으로 내의원의 문을 두드리고자 선 자신과 비교가 되어서가 아니었다.
  왠지 김상기와의 이 만남은 무언가 떼지 못할 운명의 고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관운의 개척이란 삼정승 육판서에의 도전일 것이요 자기 또한 면천의 열쇠는 오로지 어의가 되는 것에 있다.
  그 어의도 정승도 판서도 결국은 정치의 중심인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소산일 것이다.
  '김상기 -'
  하고 허준은 또 한번 그 이름을 되뇐 후 협실을 나섰다.
  그리고 여옥에게 마방의 위치를 물어 자기 발로 찾아갔다.
  그 허준을 여옥이가 두어 번 부르며 쫓아왔으나 허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마에 흰 점이 박히고 온몸이 황갈색인 그 말은 손질이 잘된 말이었고 단골 마부가 고삐를 건네주며 이 말이 현감이 얼마나 아끼는 애마인것과 그 버릇들을 일러주며 돌아을 때 꼭 무사히 데려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더 이상 지체할 일체의 여유를 잃은 허준은 거푸 채찍질을 가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개처럼 끌려오던 그 진천 장터를 빠져나가자 황량한 들판에는 해는 지지 않았으나 봄날 특유의 황사현상과 바람이 세찼다.
  한양에선 취재의 응시자들이 이미 시권을 나누어 받는 것도 마감할 시각일 것이다.
  허준은 제발 오늘 하루만은 이대로 해가 지지 않기를 빌며 또 또 또 채찍을 가했다.
  다만 5리라도 빨리 가는 지름길이 있을 터이나 인근의 지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허준이 진천 북쪽 40리 죽산면 경계에 이르자 이미 해가 떨어진 듯 사방에 땅거미가 깔려오기 시작했다.
  시권 교부는 이미 끝났을 것이다. 혹시나 사람이 뒤밀려서 좀은 연장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 연장도 곧 끝나고 마감이 되리라 ...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 달려드는 온갖 상념을 떨어내며 허준은 어둠이 깔린 2백27리 저쪽 한양으로 향해 뛰는 말보다 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달아 채찍을 울려댔다.  .

    5
  죽산 지나 다시 50리의 양지현-
  이미 밤이었다.
  말은 인정사정없이 채찍질만 가하는 새 주인에게 항거하듯 여러 번 앞굽을 쳐들고 울어댔다.
  그때마다 허준은 조금만 참아다오. 조금만 조금만 하고 말 못하는 짐승을 마음속으로 달랬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토록 괴롭히던 잠이 달아났다는 사실이었다. 그 빗줄기에 생기가 돈 것은 말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행히 바람은 남풍이었다. 지나가는 소나기인 듯 천둥번개를 수반한 동이로 내리붓듯한 그 빗줄기는 용인땅을 한참 통과할 때야 멀어져갔다.
  검은 구름 사이로 다시 달이 비쳤고 비 끝에 부는 습한 바람이 상쾌했다. 여벌의 옷을 품에 안긴 했으나 지금 말을 내려 그걸 갈아입을 마음의 여유까지는 없었다.
  '쉬어도 광주를 지나서!'
  허준은 다시 말고삐를 젖혀쥐었다. 잘 먹이고 훈련이 잘된 그 김상기의 말이 흙탕물이 넘치는 노면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때아닌 시각에 미친 듯이 국도를 북상하는 말과 기수의 복색에 두어 군데 역참에서 기찰포교들이 앞을 가로막고 검색했으나 진천 현감 김상기의 이름과 마부가 고삐와 함께 넘겨주던 마적부를 내보이자 긴 찍자 붙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허준은 지친 말을 쉬게 할 겸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걸음을 세워서는 아니 되었다. 만일 여기서 땅바닥에 궁둥이를 붙여 주저앉았다가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광주를 지나서!'
  광주서 한양은 50여 리, 동이 터오기 전에 그 광주에 닿아야 서울의 문턱에 이르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를 지나면 쉬게 해주마.'
  앞발을 절뚝이기 시작하는 말을 보면서 허준은 애원과 애정을 담아 사람에게나 하듯 타일렀다.
  광주는 수도 한양 남방의 가장 큰 관소로 종3품 목사가 다스리는 곳이다. 자연 주변 요소에 호령이 상세하여 심야에 말을 뛰닫게 하여 통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막힌 길은 돌아가는 길이 있을 터이다. 그보다 지금 허준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날이 밝으면 바로 오늘이 취재 응시자들이 과장에 입장하는 날이라는 사실이었다.
  어제 시권을 받지 못했으나 오늘 과장에 당도하여 어떤 수단을 강구하건 취재에 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이 온 것이다. 어제 저녁 나절 진천 옥사에 처박혀 김상기를 만나기 이전의 절망에 비하면 이건 꿈에도 생각 못한 기적이었다.
  과장이 개문하는 사시까지 시각(한 시각은 현대 시간으로 2시간)은 인시 묘시 진시 세 시각이 아직 남아 있다. 게다가 이 광주 경계만 넘으면 길은 고르고 넓어 남은 50리 길은 한 시각만으로도 족하리라.
  허준은 다시 말에 오르자 멀리 우편 전방의 남한산성의 검은 산그림자를 향해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 하나 밤새 2백 리를 달려온 건 허준의 집념이 아니고 말이었다.
  대로를 벗어난 제방의 긴 방죽 길을 달리던 말이 돌연 앞다리를 꿇으며 허준의 몸뚱이가 허공을 날아가 방죽 아래로 굴렀다.
  허준은 일어나지 못했다. 그 머리 위 방죽 위에서 드센 콧김을 뿜으며 서성이는 말이 보였으나 돌쩌귀를 잡고 일어나려는 허준은 자기의 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것이 안타까웠다.
  비슬거리며 일어선 것도 잠깐 그 몸은 그대로 턱을 처박으며 혼절했다.
  이어 닷새째 뜨고만 있던 눈이 마침내 감기며 천길만길 깊은 잠속으로 떨어져갔다.
  -얼마를 잔 걸까- 허준은 스스로 자신의 코고는 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었다.
  편안했다. 누워 있는 곳이 산음 집의 자기 방 같기도 했고 한양 객관의 어느 방 같기도 했다.
  그때 새소리가 더 또렷이 들려왔고 해오라기가 꾸억거리는 소리도 났다.
  허준은 튕겨 일어났다. 그 눈에 비친 것은 한낮이 겨운 강렬한 햇살에 빛나는 4월의 싱그러운 들판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그 '왜' 대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허준의 입에서 절망 어린 신음이 새나왔다.
  기다란 방죽 저 멀리 낯익은 김상기의 말이 주억거리며 풀을 뜯는 모습이 한가닥 구원이었다.
  중천의 해가 이미 오시가 가까웠음을 말하고 있었다. 내의원 과장에 한창 취재가 진행되고 있을 시각이었다.
  "안돼 안돼."
  비통하게 소리지른 허준이 풀 뜯는 말을 향해 곤두박질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남한산성의 붉은 석벽이 송림 사이로 보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듯 말은 뛰어오른 허준을 태우고 가볍게 발굽을 떼놓기 시작했다.
  어제의 절던 발은 다 나은 듯했다.
  말은 유성처럼 달렸다.
  서울은 아직 57리가 남아 있었다. 허준의 뺨에 알지 못할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고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한양 성내로 들어가는 길은 아무리 길이 바빠도 허락된 성문뿐이 었다.
  허준이 길을 돌아 동대문 밖 객점에 이르러 마방에 말을 맡긴 후 동대문 그 육중한 성새 밑을 통과할 땐 하루 해가 뉘엿 기운 시각이었고.
  "여기 내의원이 어디쯤이오니까!"
  하고 미친 사람처럼 묻기 여러 차례 이윽고 중갓을 쓴 행인으로부터 "내의원은 예문관 서쪽이요." 하고 밑도 끝도 없는 대답을 듣고 그 손짓하는 방향으로 예문관을 물으며 달리기 반 시각, 드디어 관상감남쪽 내의원 정문에 이르자 그 높다란 정청 위에 화제어약 보호성궁이란 위엄 어린 여덟 자의 현판이 찾아온 허준을 굽어보았다.
  그것만으로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는데 그 내의원을 둘러싼 담그늘의 여기저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웅성거리고 혹은 고누를두며 한가로웠다.
  한눈에 행색이 서울 사람들이 아닌 걸 알아챈 허준은 혹시나 시권을 받으러 온 의원들인가, 그렇게 취재의 날짜가 하루 연기되었는가 여기며 급히 그 한 사람을 잡고 물었다.
  "난 영남 산음에서 취재에 응시하고자 온 사람올시다만 혹 취재의 날짜가 늦춰졌사오니까?"
  상대가 논바닥에서 굴러 자고 또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온 허준의 행색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인가 하고 뜯어보았다.
  "나랏일로 공포한 일을 늦추긴 왜 늦춘단 말이오. 난 우리 집 서방님 나오시길 기다리는 사람이오."
  "..."
  그러고 보니 그들은 의원이 아니라 여유 있는 의원쪽 종자들이었다.
그 종자가 허준에게 내뱉었다.
  "이번 취재는 특히 출입이 엄하여서 아침 사시에 일호의 낙자도 없이 개문했고 점심밥도 밖에 나와서 먹는 건 허용치 않고 주먹밥을 싸들고 들어갔수. 아까 곧 끝나서 다들 나올 시각이우."
  "곧 끝날 시각."
  그때 허준의 소매를 누가 잡았다.
  "허의원 아니시우!"
  돌아보니 도지의 종자로온 상화였다.
  그 상화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허준의 참담한 행색을 거푸 훑어보았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어제 시권을 마감할 시각까지 통 보이지 않아서 궁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호패가 없으니 내가 대신 신청할 수도 없고 ... 병이나 났었던가요. 대체 어디 있다 지금사 나타납니까!"
  허준이 내의원 정문으로 뛰어들어 주먹이 깨져라 두들기기 시작했다. 주변의 종자들이 우우 몰려와 그 허준을 둘러쌌다.
  "열어주시오. 이 문 열어주시오!"
  그 허준의 절규 서너 번 만에 육중한 문이 열리며 내의원 관원 두셋이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허준이 풀어쥔 호패를 내밀고 숨차게 말했다.
  "경상도 산음에서 의원 취재에 응시코자 온 사람올시다. 중도에 피치 못할 연고가 있어 늦었사온데."
  "이자가 미친 자가 아닌가?"
  "지금이라도 좋습니다. 남은 시간것은 응시코자 하오니 시권을 교부해 주시오."
  그 행색부터가 불쾌한지 관원이 대뜸 삿대질을 놓으며,
  "예가 동네 사랑방인 줄 아느냐. 시권 배부는 어제 끝났다."
  "실성한 놈이구먼. 어서 네 집에 가거라."
  관원이 억센 힙으로 허준을 내밀쳤다. 쓰러진 허준이 튕겨 일어나 닫히는 문에 매달렸다.
  "열어주시오. 이 문 열어주시오 ... 열어주시오 ..."
  내의원 문을 미친 듯이 두들겨대는 허준에게 울음이 물렸고 상화가 뛰어들어 쓰러지는 허준을 쓸어안았다.
  이틀 후 내의원 정문에 이번 취재의 입격자들의 이름이 방에 올랐다. 9백28명의 응시자 중 입격자가 7명, 일곱 명 중에 여섯 번째에 유도지의 이름이 있었다. 객관에 쓰러져 있는 허준은 그 소식을 상화로부터 전해들었다.
  허준의 절망은 아랑곳없이 한양은 봄볕 가득히 화창했다.

    6
  나이 스물아홉.
  그 갑술년( 선조 7년 1574년)의 봄-내의원 등재를 향해 몸부림 친 허준의 도전은 끝났다.
  객사의 방방마다에 묵었던 각처의 낙방 의원들이 취재의 과정에서 정실이 있었느니 사술이 끼었느니 미치지 못한 자신의 재주는 제쳐놓고 하루 저녁 홧술을 퍼마시고 대궐 쪽을 향해 되알진 욕설을 퍼붓다가 그 초라한 모습들이 썰물처럼 사라져갔다.
  텅 빈 그 방에 허준은 흘로 나흘째 누워 있었다.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번 기회는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었던가-
  창녕 성대감의 소개장을 받은 일로 유의태에게 내침을 당한 자신이 그 스승과 자신의 가족에게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였음도 일이 끝난 이제서야 새삼 깨닫고 있었다.
  차라리 시장에 들어 떨어졌어야 할 말이 있다.
  일구월심 가족들의 염원을 제쳐두고 피붙이들도 아니요 돈 한푼 아니 생기는 가욋일에 빠져 취재의 기회를 날려버린 자기는 김상기가 표현한 의인은커녕 제 앞자락도 여밀 줄 모르는 천하의 바보요 멍텅구리인 것이 옳았다.
  몸도 마음도 수백 길 수렁 속을 질척거리며 지칠 채 대로 지친 채 마음만은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허준은 갈 곳이 없었다.
  방에는커녕 내의원 과장 입구에서 뒤늦게 나타나 입장시켜 줄 것을 외치다가 멱살을 휘둘리고 덜미를 잡힌 채 내동댕이쳐진 그 형편없는 몰골로 돌아와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사내. 그 행색으로 보아 노자도 떨어진 인물일시 분명하건만 타고 온 번듯한 말 한 필이 든든하여 밤낮없이 지분 냄새를 피우는 주모가 몸보신하라며 잉어죽이며 영계백숙을 조석으로 뇌고 새로 익은 술맛을 귀띔했으나 허준의 의식은 8백40리 남쪽 산음땅 가족들의 절망을 떠올리며 일어나지 못했다.
  8백40리 - 어떻게 달려온 길이었던가 ...
  마방 쪽에서 김상기의 말이 말굽을 투덕거리는 소리가 나고 주모가 심드렁한 소리로 몇 마디 응수하는 소리가 난 후 기척이 다가와 나타난 건 상화였다.
  도지가 부른다고 했다.
  양반 자제들이 과거에 급제할 경우 유가라는 게 있다.
  급제의 첩지를 앞세우고 친척들이나 선임자들을 찾아뵙는다는 구실로 수하들을 거느리고 왁자 ... 도성거리를 돌며 내가 방에 오른 누구노라 세상에 과시하는 호기 어린 풍습.
  그 양반 자제의 급제는 아닐지라도 미천한 출신인 의원들에게도 나라가 허락한 그 좁은 외줄기 관로를 개척한 감격은 결코 과거에 급제한 양반 자제들의 감격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양반 자제들에게 무시로 열린 과거가 아니요 있다가도 없기가 더 쉬운 너무나 가물에 콩 나듯한 기회이기에 그들의 기쁨은 더욱 소란하고 유별날 수밖에 없다.
  "그 내의원 하급 떨거지들과는 어제로 수인사가 끝나고 오늘은 함께 등방한 인물들끼리 도성 십이경의 하나라든가 양화나루의 희우정이란 곳으로 뱃놀이를 가는데 함께 갈 의향이 있는지 묻더이다."
  '뱃놀이 ...'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자신의 절망을 생각하면 지금 도지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눈감고도 안다.
  "이미 떠났다 하면 그만인 초대올시다. 할 말이래야 제 자랑 이외 들을 것도 없을 것이니 내키지 아니하면 아니 가도 되오리다."
  "안 그래도 형님이 과장 입구에서 소란을 피운 일이며 그간 버드네로 떠나갔던 행적을 화제삼는 이가 있어 술안주삼아 그 뒷얘기나 듣자고 고작 그런 호기심일시 뻔합니다. 차라리 저와 예서 술이나 한잔 하시지요."
  "술은 생각 없네."
  "어쩌시려고요?"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냈는가. 오라 소리 없어도 마땅히 찾아가 감축해주는 일이 옳지."
  "천만에요."
  "왠가?"
  "이런 말 이제 와서 꺼내는 것이 형님의 가슴에 또 못을 치는 말이 됩니다만 도지 그 사람이 지금 형님을 만나보자는 저의가 결코 형님이 생각하듯 그런 심정은 아니올시다. 제가 들은 바가 있어서 하는 얘기올시다."
  "들은 바라니?"
  "아니 그만두지요."
  "... 그러던가."
  간단히 포기하는 허준을 상화가 연민을 담은 눈으로 건너보다가 다시 정정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
  "한양에 올라와서 도지 그 사람이 뜬눈으로 나흘 밤낮을 버티며 취재 준비를 하면서 무어라 했는지 압니까?"
  "..."
  "형님이 창녕 성대감댁을 다녀온 후 창녕 쪽과 그 인근에서 형님을 찾는 병자들이 줄줄이 이었습니다. 아십니까?"
  "모르네."
  "하나 허준이란 사람은 이미 산음을 떠났노라, 임오근을 필두로 그의 입김에 쐰 자들이 거짓 대답으로 모두 따돌렸지요. 그건 아십니까?"
  "..."
  "내가 하도 안타까워서 형님댁으로 몇 번 병자를 데리고 갔더니 형님은 집에 없었습니다. 금년 정초의 일올시다."
  -그땐 유의태에게 파문당한 울분과 절망을 안고 김민세를 찾아 안점산을 찾아나섰을 때다.
  "암튼 그때부터 도지 그 사람은 옛날 두 분이 친했던 때의 그 사람관 변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버티는 의원에 찾아온 병자들이 아버지 아닌 허준이란 제자의 이름을 찾을 때 그때 이미 그 사람은 형님을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 여긴 겁니다. 그건 짐작하시오니까?"
  이제야 작은 의문이 하나 풀렸다. 버드네로 향하기 전날 밤 그 주막에서 우연히 상화를 만나 타관에서 동문수학한 도지를 만난 기쁨에 그의 방에 들어갔을 때 임오근도 도지도 싸늘하게 외면한 채 더 돌아보지 않던 사실.
  "아니 그건 경쟁자 이상의, 적어도 이번 길 꼭 형님한테 이겨야 한다는 원한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번에 붙은 겁니다. 형님은 붙지 않았고 ... 그는 이겼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승리자의 얼굴로 형님을 한번 내려다보고자 부르고 있는 것올시다."
  "..."
  "갈 거리가 못 됩니다. 가지 마십시오."
  이윽고 허준이 입을 열었다.
  "가겠네. 가세."
  하고 허준이 나흘의 칩거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준은 갑자기 결심하고 있었다.

    7
  갈 데가 없다는 것은 이번 취재를 빌어주었던 가족들에게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나약한 애비로서의 감상일 뿐이다.
  "놀이터가 서강 어간이라면 떠나는 길에서 멀지 않으니 축하인사를 하고 가겠네."
  "이 길로 떠나시려고요?"
  "빌린 말도 돌려보내야 하고 버드네란 곳에 두고 온 병자들이 있네."
  "무어라고요? 아니 그 웬수 같은 버드네란 데를 또 찾아간단 말씀이 오니까!"
  상화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며 길 나설 준비를 하는 허준을 건너보았다.
  그렇다. 그래야 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아니 가고는 또다른 얘기다.
  자기 입으로 다시 오마 약조한 버드네의 병자들이 지금 이 시각도 일각이 여삼추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실을 기억해낸 것이다.
  그건 자신이 내의원에 붙고 아니 붙고와는 상관없는 의원으로서 병을 앓고 있는 자들에 다짐했던 어김없는 약속일 터이다.
  썰렁했던 허준의 가슴속에 다시 온기가 소생했다.
  도지의 초대에도 응할 것 없고 오늘 하루 자기와 도성 구경이나 하며 장차의 의논이나 하자는 상화의 위로 어린 말을 오히려 허준이 달래며 두 사람이 양화나루에 이르렀을 때 희우정 언저리에 등방한 동패들과 술추렴이라도 하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여긴 허준의 추측은 빗나갔다.
  희우정 언저리에 도지의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갸웃대는 상화가 허준을 세워놓고 강변 어부의 집 서너 집을 뛰어다니고서야 술과 기생을 실은 도지들의 유선이 아침 나절부터 나루를 떠난 것을 알았고 이에 두 사람이 거의 반 시각이나 하류로 더듬어 내려갔을 때야 강 건너 수양버들이 숲을 이루어 휘날리는 곳에 장고소리가 왁자한 차양 친 배 한 척을 보았고 소리쳐 불러대는 상화의 목소리가 세번 네번 비껴갔건만 잇따라 장고소리만 낭자한 채 분명히 도지요 임오근으로 보이는 선객들은 돌아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상화가 발을 굴러 욕지거리까지 퍼부었으나 허준은 더 기다릴 것을 포기하고 상화에게 작별을 나누고 발길을 돌렸다.
  갑자기 버드네의 병자들이 보고 싶었다.
  십여 명은 잠시의 고통뿐 별탈이 없을 것이요 서너 명은 약이 꼭 필요했고 두어 사람은 그 병으로 목숨을 떨구고 말 그 얼굴들 ...
  그 면면들을 떠올리며 허준은 초여름 강변길을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끌고 있던 말고삐를 잡아채어 말잔등에 뛰어올랐다.
  곧 가슴이 탁 틔어왔다.
  이상도 했다. 떠오르기 시작한 병자의 면면의 고통들이 들려왔고 그들에게 가까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허준은 행복했다.

  사람들이 푸른 하늘을 본 지 오래 되었다.
  5월의 장마가 지루했다.
  남편 허준이 내의원 과장에서 생애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건 지 꼭 한 달이 지나고 있었으나 허준의 소식은 묘연했다.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한 자락의 기쁜 소식을 갈망하던 허준의 어머니는 날이 새면 하루같이 유의원댁으로 달려갔다.
  도보로 간 아들에 비해 아무래도 나귀를 타고 간 유의원의 아들 쪽이 먼저 한양의 소식을 전해오리란 짐작에서였다.
  그 하루같이 찾아드는 허준의 생모에게 꺽새, 영달 등 유의원댁의 제자와 마당쇠들은 짐짓 알지 못하는 얼굴인 양 튕기는 얼굴이었고 더러 되바라진 언동을 보여도 손씨는 늘 웃는 얼굴로 그 꺽새나 영달을 잡고 밤 사이 한양으로부터 무슨 소식이 없는가를 묻는 것이 일과였다.
  "없소!"
  하고 그나마 한마디 대답해주는 날은 기쁜 날이었고 그 대답도 없이 공연히 바쁜 척 들은 척도 돌아보지도 않는 날이 많았다. 자기의 답답함은 며느리의 애태우는 마음에 비해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손꼽아보던 취재의 날이 임박하면서부터 며느리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갔고 취재가 끝난 지 달포, 행여나 행여나 그리고 다시 행여나 ... 하며 날이 새면 현 북쪽 마연동산 나루의 십리길을 종종걸음쳐 달려가는 며느리의 초췌한 뒷모습을 볼 적이면 아들 허준이 취재에는 떨어져도 저 며느리의 소원만은 이루어지는 그런 앞뒤가 맞지도 않는 소원을 품다가 손씨는 갑자기 고개를 젓곤 했다.
  '취재에 떨어지다니, 아니고말고. 내 아들은 돼. 겸이 애비는 붙고말고!'
   처음엔 손씨도 '첫술에 배부르랴.' 하며 겸양 어린 생각을 했으나 손씨로 하여금 아들이 이번에 꼭 되리란 확신을 갖게 한 것은 오히려 주위의 떠들썩한 소문이었다.
  허준 일가가 아들의 한양행을 놓고 주위의 그 소문을 안 것은 아들이 한양으로 떠난 4, 5일 후였다.
  취재는 자기 일가의 사건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세상이 그렇지 않았다. 산음 사람들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넓지도 않는 지리산 기슭의 한적한 고장에 영남에 정 울리는 명의 유의태가 산다는 것이 자랑이요, 그 유의태 때문에 산음 사람은 명이 길다고 타 현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터에 그 유의태 문하에서 다시 유의태의 뒤를 이을 두 사람의 신진 기예의 의원이 나타나 나라 안 최고의 의원을 뽑는 내의원 취재에 응했다니 그 기쁨으로 잠잠하던 산음고을 안은 시끌벅적했다.
  "둘이 다 될끼다!"
  "그걸 말이락꼬! 하모!"
  이건 한 사람은 유의태의 친아들이요 한 사람은 비록 파문은 당했으나 창녕 성대감댁에서 펼쳐보인 허준의 기적을 전해 들은 사람들의 확신이었다.
  그 확신파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세상살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라곤 못 겪어본 신중한 패거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건 욕심이고 ... 아, 나라 안서 수천 명씩 몰리는 취재라카는데 둘 다 되면 그런 경사가 어딨겠노마는 그 기대는 과분한 기고 하나는 틀림없다."
  "그 하나가 눈교?"
  "누구겠노. 그래도 유의원 자식인데 도지 그 사람이제. 난 도지데이."
  "파문이라캐도 솜씨가 모자라 파문이 아닌 기라. 너는 소문도 못 들었나, 허준이 틀림없이 한 수 위라카더라이까."
  "그럼 니는 허준이 쪽에 걸으라모! "
  "걸으라니 내기하잔 말가?"
  "자신 없으면 빠지그라."
  "미친놈, 내가 왜 빠질 끼고. 내 여편네를 걸으라캐도 걸 게다. 난 허준이다."
  "난 도지데이."
  "나도 허준이다."
  "관아에 이방들캉도 온통 허준이 쪽이라카더라. 나도 술 한병 허준이 한테 건다."
  "미친놈아, 상수리 사람들캉 하수리캉 동네들끼리 돼지 한 마리 걸고 붙었는데 상수리 사람들은 다 도지한테 걸었다카더라."
  "그쪽이 미더우면 그쪽에 걸으라모."
  "자네들은 의리도 없나. 유의원댁 약 묵고 무탈하게 지내면서 타관서 흘러온 허준이가 뭐꼬. 모두 도지한테 걸어라!"
  "이기 사람 내긴고 재주겨루긴데. 난 누가 뭐라캐도 허준잇시더! 하모요!"
  그 떠들썩한 고을의 흥분과 기대를 반영하듯 하루는 현감이 이속들을 거느리고 유의태의 집에 나타나 과묵한 유의태를 잡고 고을의 경사를 스스로 한참 뽐내며 돌아가니 온 고을 안 도지와 허준의 내기에 불을 붙인 꼴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도지와 허준의 신화적인 얘기까지 만들어 살을 붙이며 이젠 한양으로부터 허준이나 도지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은 양가만의 것이 아니도록 소란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다가도 거창, 산음, 진주로 뻗은 관도를 달리는 파발마의 발굽이 지나갈 적이면 저도 몰래 손을 놓고 기대에 찬 눈을 했다.
  그 동안 장마에 곳곳의 강물이 불어 길이 끊겨 못 오고 있거니 여겼으나 현감이 인근 역참에 영을 띄워 주막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의 소식을 파발마의 마군들에게 부탁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그러나 아침 저녁 뛰닫는 파발마들도 두 사람의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다.
  관용, 그것도 부사나 도의 관찰사급의 인물들에 전달되는 중대 관령을 대동해 뛰닫는 역참의 마군들에게 있어, 중인이나 천것들의 과거의 하나인 내의원 취재에 누가 붙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관내 양반 자제의 문과, 무과의 급제 소식이라면 그 문중 관찰사부터가 나서서 요란하게 생색내며 선전할 호재이긴 할 것이로되.
  산음 사람들이 이잰 둘 다 떨어졌다고 쉬 기대한 것을 후회하며 내기의 열이 식어간 그런 날, 한달하고 엿새가 되던 날의 새벽 드디어 산음고을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도지가 나타난 것이다.
  사비로 미리 해입은 내의원 관복에 첩지를 왕지처럼 앞세우고 임오근과 상화 그 수하와 어디서 동원한 농악대를 뒤에 딸리며 마연동산 나루 너머에 나타난 것이다.
  강을 건너 있던 허준의 아내가 임오근과 상화에게 함께 보이지 않는 남편의 소식을 물었으나 임오근은 대답도 않았고 상화는 상화대로 가슴이 아파서 "저녁에 가서 따로 뵙지요." 그 말 한마디만 했다.
  소식이 뛰닫고 굴러 도지가 아버지의 의원에 닿기 전에 생모 오씨와 그 아내가 엎어지며 구르며 달려나왔고 금의환향한 도지의 행차가 구름같은 구경꾼들의 손뼉과 환호에 둘러싸여 집에 닿자 유의태가 나타나 그 병사의 마당에서 아들을 얼싸안았다.
  "애썼다! 믿지 않았는데 애썼어."
  아들의 어깨를 다시 잡아 흔드는 유의태의 감격을 보면서 구경꾼들 속에 따라온 손씨는 집으로 향했다. 허준의 노모는 울고 있었다.

    8
  "무엇이 어쨌어? 이실직고하라거늘 어찌 이놈이 턱만 덜덜거리고 있느냐."
  벌떡 일어선 채 다시 앉지도 못한 유의태가 소리쳤다.
  "도지 불러오너라!"
  "서방님은 아까 감축하러 온 현감 이하 이속들과 술이 과음하여 안채에 누워 있사옵고 ..."
  "오라 하라 ...!"
  핏기 가신 임오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번 유의태가 고함쳤다.
  임오근이 더 얼버무리지 못하고 굴러나갔다.
  행려인의 행색으로 찾아와 있던 안광익과 김민세는 묵묵히 술잔을 기울일 뿐 유의태를 만류하려 들지 않았다.
  병사 쪽에는 아직도 하객으로 온 인근 촌로들이 도지를 화제삼아 떠들썩했다.
  도지가 한양에서 돌아온 지 아흐레째의 해질녘이었다.
  "혹 잘못된 소문인지도 모르니 고정하시고 잠시 앉아서 기다리시게."
  김민세가 달랬으나 또 유의태의 격노한 음성이 쌍학이 춤추는 발을 뚫고 마당으로 튀어나갔다.
  "상화놈도 불러라!"
  취안이 몽롱한 채 뜻 아니한 사랑채의 고함에 찾아와 기웃거리고 있던 꺽새와 영달이 걸음아 날 살려라 내뺐다.
  '결국 그랬었단 말인가 ...'
  아들의 출현을 기다리며 방안을 오락거리던 유의태가 뜨거운 한숨과 함께 천정을 쏘아보았다.
  이럴 수가 없다 싶었다.
  안광익이 들어온 소문 한마디.
  근자 한양 가도에 떠들썩하게 번져난 소문.
  내의원 취재에 향하던 한 인물이 충청도 진천 일대에서 가난한 병자들을 구완해 주느라 취재의 기회도 스스로 버렸는데 그 의인의 이름이 허준이란 젊은 의원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두 붕우가 전한 얘긴 이토록 짧은 것이었으나 그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유의태는 뇌수에 일격을 당하는 충격을 느졌다.
  김민세가 세상에는 동명이인도 있을 수 있지 하고 유의태에게 말했으나 유의태의 얼굴은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무안했다. 마치 만인 환시중에 벌거숭이가 되어 서 있는 그 참담함이 거푸 유의태의 가슴을 무너뜨렸다.
  '그 아이야 ... 동명이인일 수가 없어.'
  함께 떠난 것은 알고 있었고 애써 허준이의 성적을 관심두지 않았고 또 양쪽으로 나뉜 온 고을 안의 떠들썩한 호사가들의 내기라는 것도 듣고 있었으나
  "한 개의 과일도 '때'가 되어야 익는 법"이라 여기며 유의태는 어느 쪽에도 기대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들 도지가 첩지를 들고 돌아온 것이다.
  지금도 금상왕의 어의요 당시도 명종의 어의며 내의원 시관이던 양예수와 목벨 내기 그 구침지희 이후 출세와 영달의 길은 버렸으나 생각하면 도지가 들고 온 그 첩지는 실로 사대에 이르러 달성한 가문의 영광이었다.
  일대 유술이는 명이 짧으니 절로 보내라는 늙은 중의 거짓말에 속아 찢어지도록 가난한 집안에서 입이나 하나 덜자며 중을 딸려 억지로 사문에 출가시킴으로써 유의태 집안의 의업은 시작되었다.
  짧은 명이 절에 와야 장생하리라는 거짓말로 아이를 넘겨받은 운초라는 그 늙은 중은 시시때때로 불공이 모자라면 너는 죽는다는 위협으로 아홉살짜리 유술이를 혹사했다.
  물대기, 땔감 해오기, 새벽 물긷기가 모두 불공이라는 위협에 소년 술이는 밤도 낮도 없이 중의 종살이에 바빴으나 지독한 늙은 중은 술과 계집질로 늦잠이 예사였다.
  10년 적공해야 70수를 하리라는 감언에 소년 술이가 말처럼 소처럼 일하기 9년 그의 나이 18세 이르렀을 때 그 호된 노동에 그 뼈마디가 장사처럼 굵어 있었고 늙은 중 운초의 악행도 꿰뚫어보도록 어른이었다.
  하여 그 술이는 어느날 그날도 득남을 빌러 절에 올라온 계집을 올라타고 씨근덕거리는 운초의 덜미를 잡아채어 절간 부엌바닥에 엎어뜨려놓고 9년 동안의 새경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이에 늙은 중이 할 수 없이 술이에게 가르친 것이 안마술인데 특히 그 안마는 풍병에 득효하고 또 병이 있어도 함부로 의원에게 몸을 보이치 못하던 여자들에게는 성의 환희에 이르게 하는 비법의 효과가 있었다.
  이에 몇 사람 산속을 출입하는 계집들에게 실험을 거처 효과를 확인한 술이는 그 길로 하산하여 의원을 자처했다.
  그러나 외간남자에게 온몸을 내맡기는 그 의술은 의원이 지녀야 할 구급의 효과와는 다른 것이요 병이 어떻다 해도 제 계집 제 딸자식을 외간 사내의 손끝에 놀아나게 하는 그토록 열성적인 집안은 없었다.
  자연 술이는 돈많은 늙은이의 팔다리나 주물러 겉보리 몇 되 받아드는 의원 아닌 자로 전락했고 뒤늦게 침술을 익히려 들었으나 문식이 없는 그로서는 절망이었다.
  이대(유의태의 생부) 유흥삼은 전답 한뼘 남기지 않은 아비 밑에서 그 역시 먹고 살 길은 의술이다 여기고 천자문을 온 방 벽과 천정에까지 써붙여 놓고 애써 학식을 쌓으려 했으나 역시 책을 읽고 쓰는 재주까지는 갖추지 못하고 늘그막의 아비와 함께 만들어낸 것이 유가 고약이요 그 행상으로 생업을 삼았다.
  그 고약은 특별했다.
  지리산 1천5백92군데 골짜기와 비탈을 춘하추동 부자가 헤매며 남들이 좋다 하는 약은 모조리 캐어내어 한솥에 끓여대는 그 방법이었다.
  애비도 자식도 의서를 읽고 해석하는 힘이 없으니 그저 좋다는 약초는 무엇이고 캐어 한데 버무려서는 열흘이고 보름이고 고아댔다.
  이 고약 제조에는 한 가지 일화가 따른다. 흥삼이 어느 해 가을 산에서 산삼 다섯 뿌리와 오사 두 마리를 잡았다. 어느 쪽도 금쪽과도 맞바꿀 수 있는 일생일대의 횡재였다.
  달려온 술이가 아들 홍삼에게 자신의 몸보신용으로 그 산삼 한 뿌리  먹기를 청했다.
  그러나 흥삼은 우리 집안이 오직 좋은 고약 만드는 그 업으로 먹고 사는데 좋은 약재를 구했다면 의당 약재로 써야지 식구가 따로 먹을 수 없다며 달려드는 아비를 밀쳐내고 산삼도 오사도 끓고 있는 고약솥에 집어넣고 휘저어버렸다.
  탄식하는 아비와 제 고집을 피운 아들 간의 언쟁이 소문으로 퍼져 유가고약은 양심의 상표로 알려져, 이후 유가고약은 산삼 섞인 약이라며 화농에만 붙이는 약이 아니요 입으로도 삼키는 영약으로 불티나듯 팔려 나갔다.
  흥삼은 돈을 모았다. 그러나 그 돈의 출처가 지리산 약초를 캐어다 번 것이라 여긴 흥삼은 지리산 골짜기 곳곳에 채약꾼들을 위한 산막을 짓고 산신령의 단을 지었으며 자신이 행상해 다니는 고장에도 흉년이 들 때면 번 돈을 아낌없이 던지는 덕행을 일삼았다.
  그 흥삼이에게서 태어난 것이 삼대 유의태였다.
  권력이 불러도 가지 않는 사내, 부자가 청을 넣어도 심병의 순차를 바꿔주지 않는 고집 -
  그리고 큰 병 작은 병에도 따로 값을 매기지 않고 병사 바깥기둥에 소쿠리를 내매달아놓은 채 혹여 병자의 가족들이 침값이나 약값을 물을라 치면 "가진 대로 넣어놓고 가든가 어쩌든가 하게." 하기 일쑤요 "병은 급하고 지닌 것은 없어 그냥 병자만 업고 달려왔습니다." 할라치면 "알았네." 할 뿐 "언제 갚겠느냐." "집이 어디냐?" "약값이 얼마요 시술값이 얼마노라." 한 적이 없는 사내.
  또 심병 후 죽을 사람은 못 고친다 미리 끊고 그밖의 병은 백발백중 낫우는 유의태고 보니 산음 사람들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유의태의 아들 사대인 도지가 타처에 비해 의료값이 너무 싸다고 투덜거리더란 소문이 나고 제자를 자칭하는 자들 중에 웃전을 뜯어 낸다는 비난도 들렸으나 그 대상은 타관서 찾아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행위지 함부로 산음 사람들에게 하는 짓거리는 못되었다.
  아무튼 그 유가고약의 4대 도지가 내의원에 붙은 것이다.
  어제까지 허준에게 내기의 승부를 걸었던 사람들은 이제야 그건 도지의 당연한 승리로 여겼다.
  "한 개의 과일도 때가 되어야 익는다."고 본 유의태도 조부가 의업을 일으킨 이래의 이 경사에 아들을 얼싸안고 환희했었다.
  20년 전 과장의 부정을 따진 끝에 의술의 상수가 누구인가 따지고 마침내 양예수를 자기의 버선코 앞에 내꿇린 그 교만 뒤에 숨은 한 .
  스스로 조선 제일의 의원이 되고자 했던 야심을 아들이 이루어 온 것이다. 그 내의원 등장은 뭔가?
  종실과 지존의 환후를 전담할 어의의 길이 아닌가.
  궁벽진 산간의 현감에게도 허리를 못 펴고 사는 그들에게 대궐은 아득히 하늘처럼 높은 곳이요, 그곳의 임금은 함부로 입에도 못 올려보는 이 나라 억조창생의 주인이다.
  '20년 전 이미 내 생애에서 출세나 영달을 버렸다 했거늘 이제 와서 내 무슨 망발이었던고!'
  아들 도지를 기다리는 유의태는 스스로 자신에 침을 뱉으며 발을 굴렀다.
  그 심정을 헤아렸는지 안광익도 김민세도 침묵으로 위로의 말을 대신 하고 있었다. 발 밖으로 소세를 마친 듯한 도지의 모습이 임오근과 나타났고 때아닌 벼락 같은 호통이 궁금하여 부인 오씨도 며느리도 뒤쫓아오고 있었다.
  유의태가 그 아들을 쏘아본 채 자리에 풀썩 앉았다.
  죄지은 바 없는 상화도 영달이에게 멱살을 꺼들린 채 끌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오!"
  오씨가 먼저 물었고 이미 불려오는 사연을 임오근에게 귀띔받은 듯 들어서는 도지의 눈에 유의태의 첫마디가 터졌다.
  "허준이의 행적을 낱낱이 밝히거라!"
  "그자의 행적을 왜오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는 도지의 대꾸가 오히려 당당했다.

    9
  "허준의 행적을 왜 제 입에서 듣자 하시오니까."
  "묻는 말부터 대답하지 못하느냐. 아느냐 모르느냐를 묻고 있는 게다.!"
  "조금은 아오 ..."
  쩌렁 유의태의 성난 목소리가 그 말을 덮었다.
  "아는 대로 말해!"
  도지의 입가에 조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네 이놈!"
  "할 까닭이 없소. 난 허준 따위에겐 아무 정도 품지 않았은즉!"
  "해라!"
  돌연 도지가 가로막는 어머니를 밀어내고 마주 고함쳤다.
  "이미 다 들은 눈친데 굳이 내 입에서 듣자는 건 무슨 심술이오니까."
  유의태의 손이 탕 서탁을 쳤고 그 손에 움켜잡힌 벼루가 먹물째 아들의 면상에 날았다.
  벼루의 먹물이 일어서는 도지의 가슴에서 검게 무늬지어 흐르기 시작했다. 소스라친 오씨가 아들을 가로막고 "미쳤소!" 하고 남편에게 소리쳤고 도지가 어머니를 밀치고 아비의 앞으로 나섰다.
  먹물이 그 얼굴에 검은 핏방울처럼 흘러내렸다. 그 씩씩거리는 아들에게,
  "못난 놈!"
  하고 유의태가 내뱉었다.
  "무어라고요?"
  "천하에 못난 놈."
  또 한번 내뱉으며 그 아비의 손가락이 창날처럼 아들의 눈을 향해 뻗었다.
  "못나고 못난 놈. 그걸 모르고 그걸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장구 치고 북울리며 나는 등제를 했음네!"
  "하나 만일 서방님이 허준이와 함께 그 버드네란 곳에 갔다면 보나마나 낙방올시다."
  유의태의 손가락이 변명하고 나서는 임오근의 눈을 향했다.
  "네놈도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은즉!"
  "..."
  "대체 허준이 허준이, 허준이가 무엇이오".
  오씨가 분해서 소리쳤으나 유의태의 눈은 자식에게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감정을 삭인 얼음장같은 어조로 말을 뱉기 시작했다.
  "의원은 영달하는 길이 아니니라, 의원은 돈 버는 길이 아니니라. 영달을 꿈꾼다면 중국말 열심히 배워 역관이라도 될 것이요, 돈 버는 게 소원이거든 장사꾼으로 풀릴 일 ... 의원은 병자를 보살피는 게 소임이다. 그것이 첫번째 소임이요 둘째도 세째도 의원의 소임은 그것뿐!"
  그 서탁을 움켜잡은 유의태의 손이 다시 경련했다.
  "한데 한쪽에선 가던 길도 멈추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병자를 보살피는데 유의태의 아들이, 바로 내 자식이 병자는 뒷전이요 오로지 한양 갈 길만 재촉해?"
  "..."
  "그것이 아비의 훈도에 대한 네 대답이었더냐 그 말이다!"
  "..."
  "그래서 따낸 첩지! 그게 그토록 자랑스럽더냐? 울고 불고 소리쳐 부르는 병자들을 못본 체 외면한 의원이 첩지만 따냈대서 대단한 의원이란 말이냐!"
  "대체 어느 놈이 다 지난 일에 이런 이간질을 놓는 게요?"
  오씨가 안광익과 김민세를 싸잡아보며 말머리를 바꾸려 했으나 유의태는 또 한번 도지를 향해 손가락질을 뻗어왔다.
  "너는 졌더니라. 네가 비록 내의원에 적을 두게 되었다만 너는 허준에게 졌더니라. 못나고 못난 놈. 행여나 집안의 의업을 너에게 맡긴다 기대를 했거늘 태어난 품성이 이토록 다르니 너는 마침내 허준에게 미치지 못하리로다."
  "무엇이 어째요? 대체 그 뜨내기놈이 영감한테 항차 무엇이기에 말끝마다 그깟놈에게 빗대어 자식을 비방한단 말이오! 그놈이 당신의 살붙이요 피붙이요!"
  김민세와 안광익의 도전을 기다리던 오씨가 유의태에게 손짓해 달려들자 돌연 도지가 먹물이 핀 가슴에서 첩지를 꺼내들고 일어섰다.
  "아버님 말씀이 일견 옳은 듯하오나 분명히 말씀드리오나 아버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
  "이 첩지는 당신도 못 따낸 것을 내가 따낸 것이오!"
  아들의 입에서 당신이란 냉혹한 말이 나왔건만 유의태는 이미 미동도 않은 채 마치 타인이나 보듯 아들을 향한 눈이 차가웠다.
  "여기엔 당신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이 써 있소. 이 첩지만 있으면 평생 의원으로서의 자격이 팔도 방방곡곡 어딜 가나 인정되는 바요.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암, 그것으로 족해야지. 더 이상 바랐다간 제 분수에 맞지도 않는 복이니. 세상의 조롱거리로 끝날 것인즉슨."
  "아니 고생 고생 그 고생 끝에 성공해온 제 자식에게 애썼다 칭찬은 커녕 악담을 하시꼬."
  "악담도 귀담아들으면 약이오!"
  "무엇이 어째요!"
  "나가 있지 못하는가!"
  "그리구 말이야 바른 말로 의원은 무슨 흙 파먹고 산답디까! 침 놓아 주고 대가 받는 건 응당한 보순게구 그만한 보수도 없어 뵈던 것들이오. 제 갈 길 바쁜 사람 ..."
  "흙 파먹을 때 흙 파먹더라도 봐줘야 할 병자는 봐줘야 해. 그게 의원이랄밖에 ..."
  "난 후회하지 않소."
  씨근덕거리는 어머니를 밀치고 도지가 다시 소리쳤다.
  그 아들을 유의태가 연민을 담아 건너보았다. 눈이 충혈되어 붉었다. 눈물 같았다.
  "내의원, 암! 그 경쟁 뚫고 들어간 곳이니 어찌 자랑스러운 곳이 아니리. 하나 과연 네가 내의원의 진짜 모습을 아느냐!"
  "...?"
  "천하에 내노라 하는 의원들만 모인 곳이 그곳이다. 침술의 재주도 약 짓는 재주도 조선 팔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술들만 모여서 내의원이다."
  "...?"
  "특히 그 내의원의 어의 양예수가 누구며 상약 이봉정, 침의 김윤헌, 그밖에 남응명, 정희생, 박춘무, 김영국."
  "날 걱정하여 하시는 말론 들리지 않소!"
  "너는 아직 익지 않은 감이다. 고작 그 첩지 하나로 자만하고서야 어찌 더 높이 날 수 있으랴."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는 내의원 높은 담을 넙지 못한 채 왜 떨어졌습니까? 하나 나는 거뜬히 넘었소, 새삼 내게 시기할 것은 없다 그 말올시다."
  더 눈을 뜨지 않는 아버지에게 도지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감취놓은 비방을 돌려주십시오."
  "비방?"
  "어차피 이젠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 한양 살림을 해야 할 것이오. 새삼 가르침을 받으러 한양 산음 간을 오르내릴 수 없으니 내주시지요."
  "암, 그건 네가 가져가야 하고 말고. 허준 허준 그 허준한테 간까지 빼줄 사람인데 네가 그걸 미리 차지해야 해."
  "어서 내주시오!"
  "..."
  "어디다 감추었나 모르나 그것만은 기어이 가져가야겠습니다."
  "감춘 적 없다. 떼어가거라"
  "떼어가다니?"
  "내 비방은 내 머릿속에 들었으니 내 머리를 떼어가는 수밖에!"
  "무어라고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가 어찌 비방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스스로 체험하지 않고서야 무엇이 비방이 될지 어찌 미리 알더란 말이냐! 세상의 어떤 병도 고치려는 욕심이 없는 자가! 세상 누구의 병이라도 고치겠다는 맹세가 없는 자가 어찌 어디에 누구에게 쓴 비방을 알 수가 있단 말이냐!"
  "네 아버지는 미친 사람이다."
  하고 부인이 악을 썼다. 남편의 친구가 두 사람이나 눈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을 만큼 오씨는 남편에게 실망해 있었다. 제 속으로 난 자식보다 남의 자식을 추켜세우는 데에 분함과 억장이 무너지는 절망뿐이었다.
  "난 네가 한양에 가는 것은 반대니라."
  하고 유의태가 그 또한 깊은 절망을 담아 아들을 건너보았다.
  "그건 무슨 심술이시오."
  "뜻이 있다면 새로 시작해도 늦지 않아."
  "전 이미 내의원에 합격된 사람올시다!"
  "그걸 명예로만 알고 이곳에 남아 새로이 배우고 깨치면 능히 너도 윗대가 물린 가업을 번창시킬 수 있으리라. 하나 섣불리 그 정도의 재주로 내의원에 올라가기를 조급히 굴다가는 ..."
  "난 갑니다!"
  "큰 나무에 가리면 작은 나무는 시드는 법."
  도지가 일어섰다. 그 눈이 아비와 아비의 친구들을 한꺼번에 비웃고 있었다.
  "난 갑니다. 더불어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도지가 뛰쳐나가자 오씨와 도지의 아내도 달려나갔다.
  임오근과 꺽새 들은 이미 도망친 뒤였고 상화 혼자 죄책감을 담아 방문앞에 꿇어앉아 있었으나 질끈 눈을 감은 채 유의태는 아무도 더 보지 않았다. 그 감긴 눈에서 눈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10
  도지가 산청을 떠나는 날 아비 유의태는 그 방문 밖도 내다보지 않았다.
  담을 넘는 데는 소문처럼 빠른 것이 없다. 누구의 입을 통해선지 유의태와 도지 부자의 언쟁의 내용이 산음 현민들에게 퍼져나갔고 엊그제까지 도지의 의술을 경하해주던 현민들은 허준의 낙방의 이유를 알자 이번에는 허준의 그 의로움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해 마지 않았다.
  "유의원 같은 사람이 있기 망정이지, 아 유의태 같은 의원이 고을마다 있는 긴가? 아니란 말다. 그렇다면 생각해보라모. 병자는 앓았쌓제 돈도 없제 돈 대신 들고 나갈 것도 없어보래이.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일이 그런 경우 아이겠나, 으잉?"
  "허준이 허준이 키가 뼈주욱한 기 겉으로는 벨로 볼품이 없어 뵈더만은 참말 소문이 그런다카모 그건 마 우리 산음 사람들이 비석이라도 세워줄 만한 인물인기라."
  "이눔아. 이거 소문을 어찌 듣고 있노? 도지캉 같이 한양에 갔던 상화라카나 그눔아가 유의원 앞에서 애초 우예 갔으며 간 뒤 어찌 됐으며 취재라카나 그 시험이 시작된 다음날에사 한양에 당도해 갖고 뭐 어쨌단 얘기까지 다 털어왔다카더라."
  "말이 중풍이지 중풍이 쉽나? 문자 그대로 반신불수, 반은 죽었던 벵자도 침 한 방으로 일으켜세운기라. 내의원 아니라 내의원 할애비라캐도 그런 재주를 안 뽑으면 어떤 놈을 뽑을끼고? 안 그린나?"
  "본시 살신성인이라카는 고사가 있지만도 그 참임자가 있는 기라. 말이 쉽지 세상 어느 놈이 허준이같이 굴끼고? 땡감 한 개라도 생기는 게 없으모 가는 길도 삐익 돌아가는 게 시상 인심이라카는 긴데."
  "나는 허준이 그눔아가 지리산 골짜기에 약초망태 메고 왔다갔다 하는걸 언제 한번 본 것뿐인데 그자슥 그거 어디서 도를 닦아갖고 인물이 그만치 컸노?"
  그 웅성거리는 산음 사람들의 소문을 뚫고 산음을 떠나는 도지의 짐은 한양땅에 임시로 옳겨가는 모습이 아니었다.
  누대 살아온 고향을 미련없이 정리하고 떠나는 냉담한 눈빛이었고 말탄 그 도지의 뒤로 어머니 오씨와 아내의 가마도 뒤따랐는데 그간 신세진 병자의 가족들이 인사를 건네려 했으나 산음 경계를 벗어나기까지 가마문이 한번도 열리지 않더라는 숙덕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처자식에게 버림받은 유의태를 향해 사람들은 동정과 또 일변 자식에게 너무 야멸차게 굴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제 소문의 주인공은 윤도지를 대신하여 허준이었다.
  산음이 낳은 의인을 맞이하자며 노유들과, 소문이 나자 갑자기 안 보고는 못 배기겠다는 호사가들이 한통이 되어 마연동산의 나루목에서 아예 차양을 치고 기다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취재가 끝난 지 한 달 보름이 지났는데도 의연히 허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지의 소문이 성할 때는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던 허준의 집은 현민들의 화제가 허준에게 옮아오면서 조석으로 병자가 붐비며 그 병자들보다 더 가슴을 애태우는 생모 손씨와 아내 김씨가 허준의 귀환을 기다렸다.
  취재의 날짜는 지나고 한 달이 넘으면서 그때의 그 궁금함과 목마름이야 어찌 말로 다하랴.
  그리고 등방한 도지의 출현과 함께 "내일이나 와서 일러드리지요." 하던 상화가 하루 이틀 사흘 열흘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허준의 등방을 포기한 어머니와 아내였다. '다음 기회도 있으려니' 고부가 서로 그렇게 위로하며 이젠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어서 돌아와주기만을 기다렸는데 들려온 스승댁의 소문을 통해 아들이요 남편인 허준의 행적을 알았다.
  그 소문을 처음 들은 밤 어머니도 아내도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고마워서였다. 취재에는 실패했을지언정 두 여인은 아들이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비록 목에 첩지는 걸지 안했을지라도 그 허준이 이미 너무도 당당한 진짜 의원이 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그것이면 됐어. 세월이야 기다리면 또 오는 게 아니겠느냐. 있는 이들도 아니요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느라 그랬다니 그 모두 부처님께 덕을 쌓는 길이 아니리 ..."
  손씨는 그렇게 며느리와 손자 손녀 앞에서 기쁜 눈물을 흘렸으나 아내 김씨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존경으로 가슴이 터질 듯이 벅찼다.
  '내가 택한 남자!'
  스스로 잘못 보지 않았다는 그런 공리적인 타산에서가 아니라 남편이 스스로 그토록 갈망했던 내의원 취재를 포기하기까지의 마음 고생이 불쌍하여 자꾸만 눈물이 홀린다.
  그리고 뒤늦게 하루가 늦어서 시장에 이르러 몸부림치더라는 그 절망을 듣곤 그 남편을 자기가 얼싸안아 위로해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충청도 진천 버드네 ..."
  5백87리 저쪽에 있다는 그 버드네로 당장 달려가서 남편을 쓸어안지 못하는 것을 아내는 안타까워했다.
  성대감의 소개장을 안 내놓으려 자기의 뺨까지 때리려 하던 남편이 이제 그토록 변한 것이다.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 두 달이 되든 석 달이 되든 안달하지 않으리라. 남편 허준이 그토록 분명하게 확실하게 없는 이들의 편에 서서 참된 의원이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 그녀는 행복했다. 남편의 품속에 뛰어들어 그대로 영원히 쓸어안고 또 안겨 있고 싶도록 김씨는 행복했다.
 
  "가업이 끊기다니?"
  안채 몸종들도 모두 도지를 따라 한양에 올라갔고 병사 쪽 임오근도 연일 술이나 퍼마시며 사랑에 건너오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다. 유의태가 어떤 사람인가를. 뜻이 맞지 아니하면 자식과의 의도 끊는 사람이다. 이번 일로 실추된 자신의 신임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으리라.
  "한마디 말리는 말도 아니했더란 말인가!"
  발을 구르며 고함친 유의태의 한마디로 장차 그의 의발을 전수받으리란 꿈은 사리진 것이다.
  "두 놈을 죽이리라! 이렇게 물러나진 못하리!"
  허준과 유의태에 대한 미움을 그렇게 다지면서 그는 사랑 쪽은 아예 기웃거리지도 않았고 이것도 자리바꿈의 절호의 기회로 여긴 꺽새와 영달이 그런 임오근쯤 안중에 없이 새삼 유의태의 눈에 띄고자 사랑채에 드나들었다.
  "가업이 끊기다니? 있다가 힘에 부치면 돌아오겠지."
  김민세가 위로하는 말이었으나,
  "아쉬워 않으리. 세상사 모두 명수가 있는 것인즉 어찌 한 가문의 영욕인들 없으리요."
  하고 유의래는 독백처럼 한마디 내뱉었을 뿐 거푸 술잔만 기울였다.
  그 실의의 친구를 지켜보며 김민세와 안광익은 안점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허준의 귀환을 연일 상화를 시켜 알아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허준을 기다리는 내심을 유의태는 캐묻지 않았다.
  유의태는 두 사람의 관심을 알고 있었다. 그 관심은 바로 자기의 관심이기도 했었기에 ...
  의에 대해서 제각기 조선 제일의 술과 학을 지닌 인물들.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유의태는 김민세와 안광익에게 그걸 인정한다.
  그 두 인물이 자기 아들의 어느 모퉁이를 관심하고 인정해주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러나 친구라 해도 아부하지 않는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진짜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 그들의 오만을 유의태는 사랑했다.
  의술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서, 특히 양생과 조제에서 김민세는 양예수가 다음 대의 어의 자리를 약속하고 잡으려 한 천하 제일의 재목이었다. 또 역적의 지탄을 감수하며 왕자의 몸에 칼을 대어 왕실이 포기한 생명을 구해낸 안광익의 그 부술 또한 천하 제일이었다.
  침의 당대 제일을 양예수로 친다 하나 그 양예수를 구침지희로 물리친 자신 또한 침술에 관한 한 누구에게 꿀릴 바 아니로되 지금 아들 도지가 지닌 것은 그 침술뿐이었다.
  침술은 양예수의 분야이기에 양예수의 가장 견제를 받는 분야이기도 했다. 양예수의 주의를 끌 또 다른 기량이 없다면 양예수 죽기 이전에는 앞길이 막혀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 그리고 ...
  의는 아무 그릇에나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릇은 심성의 맑기와 크기를 말한다.
  의를 담는 그릇은 셋이다.
  하나는 인품이요 둘은 천품이요 셋이 신품이다.
  인품은 고을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며 천품은 세상 사방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요 신품은 온 세상의 만병을 바라보는 그릇이다.
  그 인품의 격이란 고을마다 깔린 작은 의원을 이르며 천품의 격은 죽었다고 본 사람을 살려놓기도 하는 자기들 정도의 기량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 세 사람도 신품의 격은 서로 사양하여 자부하는 이가 없었다.
  굳이 그 격을 든 것은 인간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제약의 근원을 구분한 전설 속의 신농씨와 역시 한족의 초대 군신이라는 황제 그리고 단군고기에 등장하는 환웅이 있을 뿐.
  이에 인간의 경지에서 최고로 다다를 수 있는 의원의 격을 신품과 천품 사이에 선품을 둔다.
  그리고 그 선품에 꼽히는 건 아득히 중국의 편작과 창공 그리고 화타를 일컫거니와 그러면 조선의 역사에 길이 새길 선품의 격은 누구인가.
  어느날 유의태, 안광익, 김민세는 그 의논으로 밤을 새웠었다.
  혹은 과거의 사기에서 이름을 끌어내고 전거가 희미하다 하여 그러한 의원은 미래에 태어날 것이라 입을 모았었다.
  "수천 년 중국의 역사에도 의선의 격에 이르는 인물은 불과 두 셋을 꼽을 뿐이지."
  "그런 인물이 수백 년마다 나타난다 해도 선자 붙이긴 아깝고 내 말은 아직 조선에는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네."
  "엉뚱한 기대들 말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환웅 이후 수천 년간 부침은 있었되 오늘 나라 이름이 조선이 되면서부터 의가 가뜩이나 천직에 떨어진 시대가 계속되는데 우리의 당대에 그런 인물을 보리란 건 욕심일세."
  서로 욕심이라 튕기면서도 특히 유의태는 아들인 도지가 의를 담을 그릇이기를 얼마나 공들여 가르쳤던가.
  자기의 훈도는 물론이요 안광익, 김민세의 인정을 받아 그들의 가르침까지 받을 수 있다면, 그건 조선 천지에서 그 누구도 바랄 수 업는 행운일 것이었다.
  도지가 한양의 숭례문을 호기있게 통과하던 그 시각 이윽고 허준이 산음 자기 집 오막살이 마당에 털북숭이의 그 초췌한 모습을 나타냈다.

    [  10. 대결 ]
    1
  충청도 진천 버드네에서 허준이 보상없는 의료행위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 낙방한 가장을 맞아 요즘 허준의 집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취재는 떨어졌어도 인심이 허준의 집을 뜨겁게 감싸고 있었다. 사네 죽네 온갖 마름질에 살기 바라면서 그 고단한 세상살에 지쳐 허기져 쓰러진 이를 두어 번 어깨나 흔들곤 지나치는 모진 인정을 발휘하면서 그래도 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행할 수 없는 마음, 자기가 죄면해 온 상황에 누군가가 대신 나선 것을 알면 그제야 그게 누구인가 되돌아  보는 한가닥 썩지 않은 마음씨들을 지녔나보았다.
  그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자괴 ... 이래서는 아니 되며 사람이면 저래야 하리라는 삶의 가치와 덕목을 너무도 익히 알면서도 또 행하지 아니한다 하여 세상이 자기만 들어 욕하는 바도 아니기에 지나쳐버린 숱한 기억 속의 부끄러움 하나를 허준이란 인간이 말없이 바로 잡았더라는 소문 하나.
  없는 이웃을 도와주고 약한 자를 부축해주었다는 너무도 간단한 인정 한자락.
  그건 나도 할 수 있었으며 너도 할 수 있었으며 세상 사람 인두겁을 바로 쓴 자라면 어쩌면 그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를 그가 행한 것뿐인데 낯선 사람이면 그토록 가혹하고 이기적이며 모질던 인정이 어느 순간 또 세상 이웃을 향한 너무도 당연한 옳은 일 하나에 그토록 열광해 마지 않는 것도 인간들의 수수께끼였다.
  "저 집이 허준이의 집이데이."
  곧장 가던 길도 곁으로 돌아나와 사람들이 산비탈 보잘것없는 허준의 집을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길 나가면 모두 네 인사를 하구 해서 오히려 내가 면구스러워 마치 자식 이름 팔아 떡이나 팔러 다니는 에미 꼴이 됐으니."
  흉년이라 인절미에서 수수팥떡으로 채웠던 떡목판을 한나절도 안되어 떨이하고 돌아온 어머니 손씨의 말이었다.
  "대체 그 허준이란 의원이 사는 산음이란 데가 추풍령 이쪽인가 저쪽인가?"
  "이런 무씩한 것 봤나! 산음이 강원도땅이지 추풍령고개는 왜 나와?"
  추풍령은 넘어보았으나 더 이상의 지명은 꿸 자신이 없는 친구에게 동행한 객이 세상 잘난 인물은 다 제 고장으로 끌어들이고 싶은지 번쩍 경상도 산음 고을을 강원도땅에 옳겨놓았다.
  "우리 외가집이 거창입니더. 허준이 사는 산음캄은 바로 도랑 하나 사이라예."
  이런 자랑은 산음을 비껴가는 나루나 고갯길 아래 주막에서 쉬지 않아도 될 걸음을 주막 툇마루에 앉아 공면히 술 한잔 시켜먹는, 산음과 지리가 가까운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와요?"
  자기 동생처럼 아침부터 나타나 허준의 남매를 데리고 매미도 잡아주고 모래무지도 잡아주는 동리 아이들이 언덕 위에서 내려와 두 아이에게 다가서는 과객을 가로막고 물었다.
  "무슨 소문들은 기 있어서 그렇다. 야들이 허준이 그분 자식가?"
  "그렇심더. 우리캉 한마실에 삽니더."
  "그래, 이리 온나."
  과객이 두 아이를 불러 턱없이 정전 한 닢씩을 두 아이의 주먹에 쥐어 주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괜찮다 받아라. 나도 니 아부지를 전에 한번 본 적이 있다. 엿 사묵고 싸우지 말고 잘 놀거래이."
  버드네 병자들과 아무 상관이 없을 산음 사람들이 두 아이에게 인정을 쓰며 허준이와 한고장에 살게 된 것을 즐거워했고 그 수많은 소문을 날마다 한아름씩 듣는 김씨는 다시 그 얘기를 시어머니께 전하며 눈물이 나도록 날로 남편이 자랑스러웠다.
  소문처럼 세상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일도 없다.
  "허준이 집에 돌아왔다모?"
  "왔다 다시 갔다카더라."
  "어디로?"
  "어디긴, 이제 그 사람 얼굴 보기 어려운 거 아이가. 진주, 고성, 밀양 쪽까지 급한 병도 없는 놈까지 덩달아 찾아오느라 요새 산음 어간 주막들은 허준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대목 만났다카두만."
  "에이, 장돌뱅이 되지 말고 나도 의원이나 한번 돼볼 거로 ..."
  "와? 지금도 안 늦다. 꼭 의원짓을 해야 허준이처럼 이름이 나나. 장돌뱅이 중에 허준이처럼 되거라."
  "나도 언제 우리 어무이 해소병이나 고쳐드리러 한번 찾아가보야 할긴데 ..."
  급한 사람은 달려가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벼르며 이미 허준의 이름은 유의태의 이름을 능가하고 있었다.
  물론 그 능가는 유의태와 같은 의술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촌로들은 그 두 사람을 산음의 두 '의'로 규정했다. 그 산음의 두 '의'에서 의는 유의태요 또 하나의 의는 허준이란 뜻이었다.
  이 규정에 산음 사람들은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산음 밖의 사람들은 허준을 더 위에다 놓으려 했다.
  두 사람의 의술에 대한 경쟁을 본 바도 들은 바도 아직은 맞붙었다는 얘기도 없다. 그러나 태산같이 높던 유의태의 이름과 견주어진 허준이란 새 이름을 사람들은 상쾌하게 여겼다.
  그가 새 사람이라는 신선함에서, 또 허준이 과거 유의태의 문하에 있다가 파문당하고 축출당했다는 흥미로운 인연에서 산음 밖 사람들은 신인 허준을 기대하고 성원했다. 그리고 멀잖아 필연적으로 벌어질 두 사람의 대결을 고대해 마지않았다.
  "다시 길을 떠난 후 돌아올 기약은 없었다 하시오."
  집에 병자와 환자들이 몰리고 가마가 줄을 잇자 허준은 아내 김씨에게 일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행방에 대해 엄하게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 어머니 손씨에게 그 이유를 설명했다.
  세상 소문이 너무나 침소봉대로 커진 일, 또 자기로 인해 스승의 집안에 풍지박산이 난 데 대한 죄스러움. 또 있다.
  지난날 성대감댁 정경부인을 낫운 일이 새삼 신기다 어떻다 거론되며 인근에 몰려든 병자들이 유의태의 집을 지나쳐 너도 나도 자기의 집으로 찾아드는 데 이르러선 허준은 아연할 따름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소문에 좌우되어도 허준은 알고 있었다. 스승 유의태의 의술의 경지는 자신의 재주보다 아득히 구름처럼 높다는 것을. 또 허준은 생각한다. 의술은 누구와의 경쟁도 아닐 것이요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수단은 더더구나 아닐 것이다.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가 배운 대로 자신이 믿는 대로 정성껏 대처하는 것만이 자신을 완성하는 길일진대 세상의 소문에 충동질당하여 스승 유의태와 이기고 지는 경쟁 따위는 흥미가 없었다.
  진다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요, 아니 지고 또 져서야 마침내 자기보다 우월하고 앞선 이를 따라잡을 마음의 터도 마련이 되리라,
  그러나 결코 유의태 그 사람과 침통을 풀어들고 맞서고 싶진 않았다.
  허준이 이번 길에 안 것들-세상 소문이 두려움을 알았고 세상의 소문이 지닌 허황함을 또 알았다.
  자칫 그 허명에 정신을 팔다가는 잠시 세상 사람들의 흥미나 충족시킬 결코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
  허준은 날마다 어디서 왔소 어디서 왔네 낮선 지명을 대고 뒤밀리는 병자와 환자들을 보며 그 고통에 안쓰러워하는 아내에게로 다시 일렀다.
  "병자를 보기 시작하면 병자들은 더욱 몰릴 게요. 그러나 유의태 그 분은 내가 싸울 상대가 아니오. 세상 사람들은 자식에게도 버림받고 유의태 그분이 악이 받치고 분해 떨고 있다 속삭이며 우리 두 사람 죽기살기로 맞붙기를 바랄 터이지만 난 세상 그 잔인한 구경꾼들의 호기심이나 채워주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소. 내 관심은 다시 올 내의원 취재에 대비하는 일이지 그 무엇에도 한눈팔고 싶지 않은즉."
  "하오나 아니 계시다 하여도 날로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아니 계시다는 한마디로 되올지."
  "이 산음에 유의태란 분이 의원을 열고 있는 한 난 결코 한 사람의 병자도 받지 않을 것이오."
  그날 이후 상화가 찾아와도 허준의 아내는 허준이 오랜 여정을 잡아 길을 떠났다고 그의 방문을 거절했다.
  세상 소문이 가라앉고 허준의 집으로 몰려온 병자들이 다시 유의태의 의원으로 발길을 돌릴 즈음.
  세상 그 변덕스러운 인심을 한귀로 흘리며 허준이 자기 집 글방에서 다시 내의원 취재 시험 준비에 몰두하던 어느 날 믿을 수 없는 소문 하나가 허준의 귀에 들어왔다.
  유의태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피투성이가 되어 자기 방안에 쓰러져 있었다는 놀라운 소문에 허준은 책과 씨름하던 자기 방문을 박차고 그 길로 유의원을 향해 달렸다.

    2 
  허준이 저만치 유의원의 언덕배기로 오르는 외가닥길에 들어섰을 때 그 언덕을 급히 내려오는 사내를 보니 상화였다.
  허준이 걸음을 세워 상화를 기다렸다. 경황없이 달려오던 상화도 눈앞에 서 있는 것이 허준이자 반색을 하며 내달아왔다.
  "부르러 가는 길인데 어찌 알고 미리 오십니까?"
  "부르러 오다니?"
  "그럼 모르고 그냥 오시는 길입니까."
  "도시 믿을 수 없는 소문이 들리기로 달려왔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임오근이가 집을 떠났습니다. 들으셨습니까?"
  "..."!
  "떠나도 그냥 떠난 게 아니라 스승님께 패악을 부리다가 떠났습니다. 암튼 들어가시지요."
  "나를 부르시는 일은 왠가?"
  "가면서 말씀드리지요. 가십시다."
  잡아끄는 상화에게 허준이 걸음을 세웠다.
  "정녕 나를 지목하시어 오라 하시던가?"
  "부자지간 의를 끊으신 후 우리 문도들 모두 조만간 이런 분부가 계시리라 짐작했던 바올시다. 어제 임오근의 난동도 스승님의 그 결심과 무관하지 않고요."
  '유의태가 나를 부른다!'
  상화의 그 말 한마디로 허준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무언가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하는 두근거림을 억누르며 허준이 물었다.
  "임오근의 패악은 어떤 것이며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다니 자초지종 얘기를 듣세."
  상화가 비탈을 오르며 어제 있었던 사단을 빠른 말투로 말했다.
  이미 십여 일 전부터 임오근의 행동이 불안정했다. 14년 동안 유의태의 문하에 있으면서 특히 창녕 성대감의 '서찰건'을 고자질하여 허준을 파문시킨 후로는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의원의 수제자로 자처했고 아들 도지와 함께 내의원 취재의 기회가 허락된 것도 그런 임오근에 대한 유의태의 애정 어린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도 임오근도 유의태를 실망시켰다.
  아니 그건 유의태에게 있어 실망이란 말로 달랠 수 없는 배신이요 절망이었는지 모른다.
  울부짖는 병자를 외면하고 영달의 길로 달려간 아들과 수제자.
  의에 대하여 특히 남다른 완벽을 추구하는 그 소망 때문에 유의태는 그래서 더더욱 아들과 제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는지 모른다. 치병용약의 술이나 의료제민의 이상에 앞서 의원이 의원이고자 하는 그 심지와 품성을 더욱 중히 여기는 유의태였다.
  모자라는 재주는 채우면 된다.
  그건 세월 속에 성심만 곁들이면 누구나 달성할 수 있는 노력과 단련의 경지다.
  그러나 의의 길에는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마음의 영역이 있다. 병자를 연민을 담아 보는 눈이 업을 출세나 치부의 욕망과 바꿀 수  없다는 무심지의의 바탕.
  그래서 의의 첫단계에서 부딪치는 심병의 술을 예로 누누이 유의태는 주장했었다.
  신, 성, 공, 교라 이름하는 심병의 수단에 신은 병을 짚는데 바라보기만 하여 아는 경지로서 그 바라본다 함은 병자의 오색 즉 코, 눈, 이마, 뺨, 피부색을 보아 절로 아는 것을 말하며, 성은 듣고 아는 경지로서 오음을 듣고 숨은 병을 분별하는 재주며, 공은 일일이 병자의 용태와 괴로운 것을 물어서 아는 경지요, 교는 맥을 짚고 미심쩍은 곳을 만져보아 병을 찾아내는 경지다.
  그러나 이 지식은 연륜과 훈련으로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로되 설사 그것들을 차례로 거치고 이르렀다 할지라도 정작 병자의 아픈 데를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건 흔하디 흔한 의원일 뿐이라는 것이 유의태의 결론이었다.
  영달의 길이 아닌 의.
  치부의 길이 아닌 의.
  병들어 아파하고 앓는 이들의 땀젖은 돈으로 제 일신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 의 ...
  세상이 원하고 그 자신 절절히 소망했던 참된 의원의 자질을 유의태는 자기의 자식에게서 발견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 도지는 아버지의 그런 선도에 가까운 의원을 꿈꾸지 않았다.
  상것으로 태어나 대궐 높은 곳에 뽑혀 올라가는 영광으로 족했고 팔도에서 인정해주는 내의원 의관이라는 명예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 부자간의 이상의 차이는 부자지간 의절이라는 이별로 끝났다.
  아들과도 의절한 유의태의 그 절망을 보며 임오근은 드디어 자신도 설곳을 잃은 것을 알았다.
  일찍이 그가 말하던 "그 그릇이 아니면 물려주지 않는다."는 비인부전이라는 경구가 뼈아프게 가슴을 옥죄었다.
  바라는 그릇이 아니다 하여 아들과도 의를 끊는 냉혹한 인간이 자신의 14년 적공쯤 눈여겨보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불을 보듯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의태가 바라는 그릇-허준이 다시 오고 자기가 그 수하에서 부림을 받는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미칠 듯한 질시가 치받쳤다.
  이제는 떠나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오근은 이대로 호락호락 떠나기에는 너무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도지는 그나마 첩지나 따냈으나 자기는 뭐냐. 지리산 채약꾼으로부터 시작한 14년 동안의 간난신고가 저 원수와 같은 허준에게 밀려 물거품이 되다니 ...
  '죽여야지!'
  임오근의 처음 결심은 그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놓고 자기는 무사히 살아남으리라 여기도록 어리석지는 않았다.
  임오근은 마지막 기대를 품고 유의태의 방으로 찾아들었다.
  내의원 등재의 큰 꿈은 버렸으나 고향 김해로 돌아가 소아들의 병이나 보아주며 한세월할 수 있도록 유가고약의 비방과 장차 의원으로서의 지침을 내려주기를 간원했다.
  그러나 유의태의 반응은 의원의 자질이 없는 자에게 더 일러줄 것도 가르칠 것도 없다는 차가운 한마디뿐이었다.
  "하오면 그간 문도로서의 정리를 가상히 여기시어 유가고약의 제조 비방을 나누어주소서."
  "문도의 정리는 내가 끊은 게 아니고 네가 끊은 것이다. 네가 14년 동안 내 밑에 있는 것을 주장하나 그 14년 동만 난 결코 매달리는 병자들을 뿌리치란 말을 한 적이 없은즉 또 네 위인 됨을 속속들이 안 지금 어찌 전래의 제약법을 일러주어 윗대의 이름을 더럽힐까 보냐."
  상화가 문 밖에서 들은 건 거기까지였다.
  침묵 끝에 임오근이 용쓰는 소리가 나며 방안이 캄캄해졌다.
  이어 그 어품 속에서 윤의태의 서탁이 걷어채인 소리가 났고 상화가 방문을 열어젖힌 순간 임오근의 손에 움켜잡힌 촛대가 그대로 유의태의 정수리에 내려박히려는 순간이었다.
  "너도 사람이냐? 네가 사람이면 어찌 이토록 박대할 수 있느냐!"
  임오근의 그 소리는 오히려 울음에 가까웠고 고함을 치며 상화가 임오근을 밀어뜨려 유의태를 가로막자 함께 귀기울이던 문도들이 뛰어들어와 성난 황소 같은 임오근을 잡아 드잡이를 했다.
  그 소란 속에서도 유의태는 카악! 눈을 치뜨고 날뛰는 임오근을 쏘아 본 채 미동도 않았다.
  "그래?"
  "남은 문도들이 뛰어들어 치고받는 소동중에 결국 임오근이가 문갑 속 돈들을 쓸어쥐고 뛰쳐나갔소."
  "유의원께선 무사하셨고?"
  "오른 팔뚝이 촛대의 송곳에 찔려 피를 흘렸으나 병사 쪽 병자들까지 저놈 잡으라고 고함치며 뛰어들자 뒷문을 차고 사라졌소."
  "상처는 어느 정도요?"
  "당분간 그 손으로는 정교한 침을 못 놓을 거외다. 팔뚝이 근 반 뼘이나 찢기셨소."
  유의태의 오른팔이 칭칭 동여진 채 상처의 부위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의 인사를 침묵으로 받는 유의태의 안색 속에는 아들에게 버림받아 혼자 남은 고적이나 제자의 난행에 생명을 위협받은 기색따윈 떠 있지 않았다.
  "네 요즘의 소일이 어떠한고?"
  그것이 유의태의 첫마디였다.
  "별로 하는 일이 없사옵니다."
  "그렇거든 이 아이 데리고 병사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을 회진하고 들어오너라."
  "소인이 대신하여도 되는 일이온지."
  "네가 미더워서가 아니다. 달리 사람이 없기로 시키는 것이다."
  스승이라 부르기엔 그 눈이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허준은 큰절을 올려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유의태의 방을 나오며 마음속에 뇌었다.
  '천하에 외로운 사람!'
  자식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헤어짐을 당한 늙은 사내에게 느끼는 동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당당하고 여전히 오연한 그 모습 속에서도 허준의 눈에는 눈앞의 유의태가 그렇게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동정의 염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도 아내도 제자도 떠나보내고도 가슴 아픈 빛은커녕 눈썹도 까닥 않는 그 태연함에 대하여 알지 못할 적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스스로 불안했다.

    3
  허준이 유의태의 영을 받아 그를 대신하여 병사에 새로 찾아온 병자들에게 초진을 마치고 통원하기도 하고 병사에서 기거하기도 하는 묵은 병자들을 회진할 때였다.
  뒤따라 다니며 미리미리 병자의 병력을 귀띔해야 할 상화가 갑자기 다급한 소리를 쳤다.
  "무언가?"
  "이 방의 병부가 없어졌소!"
  그 방에는 병부가 비치되어 있었다. 병자의 성별과 나이와 이름을 적은 후 병의 발생 시기, 조제하고 시술한 약의 내용과 사용한 침의 이름과 부위, 그리고 병세의 진행을 기록한 병부가 몽땅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죽일 놈! 이를 어쩌리까!"
 하고 상화가 그 병부를 기록하고 간수하는 것은 임오근의 소임이었으매 그 혐의를 임오근에게 두고 발을 굴렀다.
  "아무리 스승님에 대한 포한이 있기로서니 이건 병자들에 대한 살인 행위올시다!"
  "병자들이 놀라니 잠자코 있게."
  흥분해 날뛰려는 상화를 달래어 허준은 급히 유의태가 있는 사랑채로 건너갔고 뒤쫓아온 상화가 내다보는 유의태에게 소리쳤다.
  "임오근 그자가 전서부터 술이 들어가면 자주 그런 얘길 뇌는 소릴 들었습니다. 14년 동안 보고 들은 건 웬만치 쌓았고 저 세세한 병부들만 들고 가면 스승님의 반 정도의 의원 행세는 할 수 있다, 그런 얘기를요."
  "새로 만들어라."
  유의태가 허준에게 명했다.
  "일일이 새로 다오니까?"
  "그러리라. 매매인에게 발병의 시기를 묻고 현재의 상태를 살펴 투여할 약재의 이름을 적고 시술의 의견을 적으면 되리."
  "투여한 약재와 시술의 의견을 소인의 소견대로 적으오니까?"
  "그러리라."
  상화가 마른침을 꼴깍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건 신뢰인가 시험인가?
혀준이 유의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유의태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허준이,
  "소인의 의견을 적을 순 있사오나 병사를 살펴본즉 오래 된 병자가 한 둘이 아니오며 자신이 없습니다."
  그 허준을 향해 유의태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네가 본 바대로 병자들의 병세를 적어오라는 것이지 만병통치의 처방을 적어내라 한 적 없느니라."
  "..."
  "항차 네가 무엇이기에!"
  그 차가운 대거리를 향해 허준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큰사랑을 나왔다.
  '항차 네가 무엇이기에!'
  "... 네가" 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그건 "네 따위가!" 하는 타매의 억양임도 허준은 알았다.
  따라나온 상화가 허준의 팔을 잡으며 달래는 말을 했다.
  "새삼 불러오라 하실 전 언제고 왜 그렇게 야멸차게 구시는지 모르겠소. 하다못해 말 한마디라도 말이오."
  "어찌 생각하면 모두 제 발로 떠나긴 했으나 도지를 이 산음땅에서 내쫓은 건 유의태가 아니고 허준이란 그 소문도 맞습니다. 허의원이 아니라면 서로 갈라질 싸움도 있을 턱 없었고 또 부자지간이야 천륜인데 결과가 그리 된 이상 허의원께 마냥 좋은 감정만 있을 리 없지 않소.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말이오."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 ...'
  허준이 내심에서 내뱉었다.
  허준은 큰사랑채 쪽 보이지 않는 유의태를 쏘아보았다. 헤어진 후, 아니 헤어진 것도 아니다. 창날 같은 손가락질을 받고 덜미를 잡힌 채 의원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던 그후의 자기의 숱한 마음고생, 그 절망의 바닥을 기며 독력으로 내의원에 도전하기까지의 처절한 마음고생에 대하여 단 한마디의 위로도 없는 사내. 온세상이 칭송해준 진천 버드네의 사건에 대해서도 입도 벙긋 아는 체도 위로도 없는 냉혈한.
  먼저 달려온 건 자기이되 의원 밖에서 만난 상화는 분명 그 유의태가 먼저 자신을 부르러 보냈다지 않았던가.
  그러함에도 왜 불렀다는 말 한마디 없이 "항차 네가 무엇이냐." 되물어온 그 비웃음이 자꾸만 허준의 가슴을 부글부글 적대감으로 끓게 했다.
  ... 찾아온 건 잘못인 것 같았다. 자신의 뜻에 아니 맞았다 하여 자식도 가족도 버린 사내. 14년 수족처럼 부리던 제자의 단 한번의 실수도 용서 않고 끓어버린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을 아직도 스승이었다는 지난날의 그 여린 감상으로 달려온 건 자기의 약한 몰골을 보인 것 외에 무엇이랴 싶은 것이다.
  임오근의 폭력에 쓰러졌건 어찌 됐건 그것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자칫 병사 뒤로 뛰쳐나가려던 자기를 불러온 건 허준 자신이었다.
  그래도 한가닥 미련인지도 몰랐다. 유의태란 인간에게 존경일랑은 아예 뺀 미련. 그가 자기보다 한두 수 위의 위원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미련 ... 그 허준을 상화가 또 위로했다.
  "가지각색 병자가 스무남은 명인데 그걸 다시 일일히 진맥하고 처방내리고 왜 그런 헛수고를 끼치는지. 당신이 매일 대하던 병자들이니 잠시 당신이 건너와 이렇다저렇다 부르시면 그냥 받아 적으면 될 일을."
  순간 허준의 뇌리 속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나를 시험하고 있어!'
  그렇다. 병부를 가져간 것은 임오근이가 아니요 유의태 자신인지도 모른다. 허준은 갑자기 그런 확신이 왔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 무엇을 시험하고 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부질없는 추측이야 ...'
  시험은 기대다. 그렇다면 저 오만한 유의태가 자기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허준은 자신을 고소했다. 오히려 허준은 상처난 손으로 침을 놓을 수 없는 유의태의 부상을 생각했고 그 치료를 기다리는 병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다시 병사로 향했다.
  이미 헤어졌던 사람이다. 새삼 그의 인간성에 무엇을 기대하려는 자신이 웃음거리다 싶었다.
  유의태 대신 나타나 새삼 진맥하고 심병하고 처방을 적는 젊은 의원이 허준임을 알자 유의태의 의원은 다시 장터처럼 붐비기 시작했다.
  딴 아이들 다 내보내고 허준이 다시 그 문하에 들어왔다는 소문은 허준이 또 하나의 의원을 차려 유의태와 대결하기를 기대하던 구경꾼들을 실망시켰으나 '고장의 두 의'와 함께 살게 된 산음사람들은 두 사람의 화합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기대했다.
  "그럼 다시 입문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 입에서 한마디도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고 저 또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왜 서방님부터 그분을 어찌 그 사람이라 매정하게 칭하시오니?"
  병부를 다시 만들고 사흘 만에야 집에 돌아온 허준을 둘러싸고 어머니 손씨와 아내 김씨가 유의태의 부름을 받은 사실을 기뻐하면서도 풀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응어리만은 아쉬운 얼굴이었다.
  허준은 더 이상 구구한 얘기를 가족들에게 하지 않았다.
  허준이 이틀을 밤샘하다시피 새로 병부를 만들어 큰사랑에 들어갔을 때,
  "게 놔두고 나가거라."
  ... 가거라가 아니고 나가거라 ...
  그것이 유의태의 대답이었고 다음날 아침 허준이 문안차 방 밖에 다시 섰을 때 들어오란 말도 없이 문 밖에 허준을 세워둔 채 유의태는 허준이 궁금히 여기는 이틀 동안 자신이 투약한 조제와 시술에 대해서 일언반구의 의견이 없었다.
  허준이 참다 못하여,
  "이틀 동안 소인의 조제와 시술에 혹 잘못이 없었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하고 물러나지 않을 기색으로 서 있자,
  "병이 비록 독한 것이라도 세상 병든 이들이 다 죽지 아니하는 것은 목숨의 자생력과 자구력이 반인 때문이고 그 중에 또 어느만치는 간병하는 이의 정성으로 버티곤 하니 굳이 누구의 공인 양 자처할 것 없다."
  그 한마디 끝에 방문이 닫히고 말았다.
  그러나 허준은 드디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의태의 말 속에 조롱과 멸씨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유의태의 그 말들은 자기가 적어낸 병부의 처방을 그대로 병자들에게 투제할 것과 시술할 것을 반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 때문이다.
  그 나흘째 되는 날 새벽 문득 길 떠날 모습으로 나타난 유의태는 내다보는 상화에게,
  "여러 날 집을 비울 것이니 혹 경각에 달린 위급한 병자가 찾아오거나 한다면 안점산으로 찾아오면 되리라."
  바라보는 허준에게는 일별도 업이 상화에게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 대문을 나섰다.
  놀란 것은 허준이었다.
  유의태가 말하는 여러 날이란 정작 며칠일지 알지 못하나 그건 자신의 부재중 의원을 허준에게 일임한다는 뜻일시 분명했다.
  위급하지는 아니하여도 병사에는 조석으로 병의 진행을 감시해야 할 중한 병자가 십여 명이나 있는 터요 하루면 수십 명씩 연락부절로 찾아드는 병자들에게 대처할 사람은 자기뿐이지 않은가.
  허준은 십여 걸음을 내달아 그 유의태를 향해 소리쳤다.
  "의원엔 간병이나 도울 제자들뿐이온데 스승님께서 가시면 남아 있는 병자며 연일 찾아올 병자들은 어찌 대처하오니까?"
  "남아 있는 자가 할 일이지 어찌 매번 내가 알아 있어야 한단 말이냐!"
  귀찮은 듯이 그 말 한마디 던지더니 미처 잡지 못하는 허준을 뒤로 유의태는 그대로 멀어지고 말았다.

    4
  말 한마디로 의원을 허준에게 내맡기고 사라진 유의태는 열흘이 지나도록 기별이 없었다.
  상화가 유의태의 그 종적을 유일한 벗들인 김민세와 안광익이 있는 함북쪽 30리 대풍창 병자들이 득시글거러는 안점산으로 짚었으나 허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유의태 없는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유의태를 대신해 허준이 와 있데이!"
  "유의태가 허준이를 양아들로 삼았다카두만."
  "참말이가!"
  "가보이까 묵어 있던 병자캉 새로 오는 병자캉 허준이 혼자 전부 응대하고 유의태는 내다보지도 않는데 마당쇠 그놈아들께 물어보이까 방에서 양반은 술이나 묵고 그래 지내는갑두만."
  "거름이나 져날라놓고 나도 허준이 얼굴이나 한번 보러 가볼가. 니도같이 갈라나?"
  병사에 나타나지 않는 유의태의 변화를 일변 쑥덕거리면서도 그러나 사람들은 유의태의 행방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권위는 유의태와 견줄 수 없으나 소문은 유의태를 능가하는 허준.
  그 소문이 너무나 아름다웠음에서 사람들은 3대 70년엔 걸쳐 이어온 해묵은 유의원의 얼굴이 바뀐 것에 대하여 신기해할 뿐 가슴 아파하는 눈치는 없었다.
  또 그 허준이는 이래라! '저래라!' 하는 유의태의 오연한 말투가 아니요 일일이 설명하고 하나하나 손잡아주는 성심 어린 언동이라서 의원의 분위기는 딴때없이 붐볐다.
  "지 병을 허준이 그 사람이 손수 진맥했어예. 손마디가 길쭉하이 그렇데요. 그러고 사람 눈매가 우예 그리 조용하이 그렇십니까. 물어보는 말 수도 적고 어찌 보이 색시 같애얘."
  부쩍 불어난 여자 환자 중에서 젊은 아낙이 차례를 기다리는 다른 병자와 그 가족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허준이에게 진맥받은 걸 자랑스러워했다.

  "대사께서 저기 오십니다." 
  하고 유의태에게 술을 쳐주고 있던 늙은 문등이가 일어서며 말했다.  .
  유의태가 들었던 술잔을 조용히 비웠다.
  찾아온 친구를 기다리며 열흘씩이나 기다린 사람 같지 않게 조용한 동작이었다.
  상화의 짐작대로 안점산에 찾아온 유의태는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다.
  김민세, 안광익이는 밀양 어간에서 유랑하는 병자 십여 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데리러 가고 없었다. 
  그 하루하루 유의태는 궁녀 정씨에게 술과 요기거리를 청해 싸들고는 안점산 산등성이와 계곡을 소요하며 침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은 석양이 뉘엿거리는 시각인데도 돌아오지 않는 유의태를 걱정하여 정씨가 산식구들을 시켜 찾아보니 안점산 제일 높은 봉우리 그 바위 비탈에 걸터앉아 꺼져가는 석양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생각하면 유의태는 그 동안 산식구들의 의식의 뒷배를 책임져준 너무나 큰 은인이었기에 정씨도 산사람들도 항시 술을 담가놓고 그의 내방을 기다렸었다.
  산성 가까이 이른 김민세 들의 뒤로 십여 명 병자들이 나타났고 새 식구들을 맞이하는 산성 사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산성 사람들과 헤어져 김민세와 안광익 그리고 앞장을 선 소년이 산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건 길상일시 분명했다.
  "여직도 저렇게 저 아이를 데리고 다니오?"
  "그러합니다."
  오늘따라 유의태의 술과 안주를 손수 들고 따라나섰던 궁녀 정씨가 대답했다.
  물었던 유의태의 시선이 그 정씨의 눈길을 따라 향하는 곳에 양자 길상이를 앞세운 김민세와 안광익이 손을 잡기도 하고 끌기도 하며 오르고 있었다.
  어느 모로 봐도 그 모습은 자기의 처자식을 죽인 원수의 아들과의 광경 같지가 않았다.
  "처음엔 저도 많이 상심했습니다만 이젠 저 두 사람 뗄래야 뗄 수 없는 부자지간이옵니다. 조석 밥상도 함께 들고 잠도 한이불에 자며 짧은 여정이라 할지라도 산을 떠날 때는 항시 동행하는 ..."
  유의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적다운 보시지."
  "..."
  "3천 명 병자의 병을 고쳐주는 의술보다 마땅히 제 손아귀로 죽여야 할 원수의 목숨을 저렇게 살려주고 지켜주는 것이 진짜 의의 모습인지도 ..."
  "형부를 아직도 의원으로 보시옵는지? 제가 형부에게 보는 것은 의가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올시다."
  "나는 부처를 모르는 사람이니 저 모습도 내 눈에는 의업으로밖에 보이지 않으오."
  늙은 양부의 손을 잡아끌고 온 길상이가 유의태의 앞에 이르자 뒤로 물러나 예의를 지켰다.
  김민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친구에 대한 반가움을 대신했다.
  "어쩐 일이신가. 의원을 비워두고 한가하게 열흘씩이나 예서 묵었다니."
  "담아놓은 과일주가 입에 달아 발병 핑계하고 앉아 있는걸세."
  유의태가 웃지도 않고 말했다.
  그 유의태에게 안광익이가 물어왔다.
  "허준이 그 아이가 집에 와 있다고?"
  "있겠지."
  "아예 떠넘기고 오는 길이신가?"
  그건 김민세의 관심이었다.
  그러나 유의태의 대답은 엉뚱했다.
  "한번 와봐야지 하면서 잊고 있었는데 산세나 한번 둘러보러 집을 나선 길일세."
  "산세는 왜?"
  "묏자리나 하나 찾을까 하고."
  "죽을 사람이 누군데?"
  "나로세."
  안광익이 웃고 김민세도 웃었다.
  "때로 얘길 하지. 인간은 삼생을 거쳐서 사라진다고. 전생 현세 그리고 내세. 그러나 사람에서 사람으로 꼭같이 태어나는 복은 많지 않다네. 소가 되는 사람, 말이 되는 사람, 물고기가 되는 사람, 두더지가 되는 사람, 심지어 벌레가 되는 사람, 그래서 다시 좋은 인연으로 태어나고자 사람들은 공덕을 쌓는 것이고."
  "한데 모처럼 찾아오시어 왜 사위스런 얘기만 하시오니까."
  궁녀 정씨가 끼여들자,
  "사위스런 건 아니지. 사람에게 있어 생과 사는 가장 중대사인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뿐 ..."
  "새 식구들이 왔으니 저는 내려가겠습니다."
  궁녀 정씨가 인사를 했으나 김민세도 안광익도 유의태의 침묵을 지켜볼뿐이었다.
  정씨와 길상이와 문둥이가 산을 내려갔다.
  산상의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유의태의 옷고름이 술잔을 든 팔뚝에 휘감기며 날렸다.
  "다녀온 지 얼마 아니 되는데 어찌 올라오시었나?"
  "요즘 생각하는 게 있네."
  "무엇에 대하여?"
  하고 안광익이 다시 물었다.
  "사람의 목숨에 대하여."
  "사람의 목숨?"
  "의를 업으로 하며 남의 목숨은 손이 닳도록 다루었으면서도 정작 내 목숨에 대해 들여다볼 여가도 없었거든."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여명을 지니고 있지. 나도 그대도. 부처와 친한 그대도. 그 남은 목숨이 다하는 날이 몇 년 몇 달 후 그리고 어느 날 어느 때냐 미리 알 바는 없되 그러나 사람은 너나없이 앞으로 무수히 닥치는 그 어느 해 몇월 몇날에 죽는다는 것은 사실이지."
  "그거야 예외가 있겠나, 인간들의 숙명인걸."
  "한데 왜 새삼?"
  긴장하는 두 사람에게 유의태가 웃었다.
  "고작 예닐곱 달 전이래야 태어날 날짜를 짐작할 뿐인 생, 그러나 죽는 날은 언제 죽노라 짚어볼 수 없는 생, 바람이나 불어 옷자락이라도 날리지 않으면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잊고 사는 생. 어느날 그런 것을 깨닫고 나니 어차피 죽을 목숨들을 수시로 낫워주는 의업이란 것도 너무나 작은 행위로구나, 그런 허망한 생각이 났네. 기왕사 큰 의원이 되려면 몸의 부분부분 낫게 하는 작은 의원이 아닌 한목숨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그러한 커다란 의원은 왜 되지 못하는가 하는 말일세."
  "꿈이로군.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능력 밖의 꿈 ..."
  유의태가 신음처럼 말했다.
  "결국 죽는 목숨, 결국 피할 수 없는 죽음, 아무리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도 그 일을 다하도록 기다려주지 않는 죽음 ... 인명유한이라는 그 사실."
  "...!"
  "사람의 죽음이란 세상의 질서일세. 초승달이 태어나 보름달이 되고 다시 그믐달이 되어 없어지듯이 그리고 다시 비치다가 커지다가 사라지고 그렇게 끝없이 태어나고 끝없이 죽고 ... 그렇게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무언가 남기려는 것이 아닌가?"
  "죽으면 끝인데 무엇을 남긴단 말인가. 제사밥이나 찾아먹는 고작 그런 귀신이 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네!"
  안광익이 표정을 수습하고 유의태를 똑바로 건너보았다.
  "죽으면 그만인 목숨 왜 오늘따라 죽음에 대한 말이 그리도 많은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5
  허준이 어렴풋이 잠을 깨었다.
  좀전 첫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가 다시 살포시 잠에 빠져 있던 차였다.
  병사 쪽이 점점 소란해지며 상화와 다투는 사내의 목소리는 거의 욕설과 고함이었다.
  순간 허준은 튕겨 일어났다.
  날뛰는 사내를 말리는 소리 속에 어머니 손씨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고 뒤이어 중문을 두드리며 "아부지 아부지"를 외치는 건 아들 겸이의 목소리 였다.
  병사에서 소란을 부리는 것은 허준이 내의원에 갈 때 말을 훔쳤다가 함께 진천 관아에 하옥당했었던 만석이라 불리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어쩐 일인가?"
  허준이 나타나 영문을 묻자 녀석은 인사불성이 되어 날뛰었다.
  "으응, 너 잘 만났다. 봐라! 당신이 지어준 약을 먹고 이 모양으로 엄니 눈이 멀었단 말이여. 엄니 눈을 고쳐내란 말이여 ..."
  허준은 아닌밤에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봐라, 눈이 있으면 당신 눈으로 보란 말이여."
  '아뿔싸!' 하고 허준은 내심 외쳤다.
  말을 빌려오마 하고는 훔쳐왔던 녀석이었다.
  자기의 욕심뿐 사리나 경우를 따지기엔 머리가 모자란 인간이었으매 간병을 할 그에게 좀더 약의 독성을 일러주었어야 했었다.
  허준은 아들의 지게에 얹혀 5백80리나 달려온 병자의 반이나 풀어져버린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신음했다.
  절망적인 허준을 향한 아내 김씨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린 채였고 몰려든 병자들과 가족들을 향해 녀석이 또 한번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상화와 꺽새, 영달들이 그 만석과 밀고 당기는 실랑이 끝에 가까스로 잡아앉힌 후 영문을 캐물었다.
  "대체 어째서 이리 됐단 말이오."
  "허준인지 뉜지가 지어준 부자탕을 먹고 눈이 요 모양으로 아예 멀어 버렸단 말여."
  "아예 멀었어?"
  꺽새가 얼른 녀석의 노모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확인했으나 병자는 코앞의 그 손은 못 본채 아들의 목소리를 향해 소리쳤다.
  "만석이 이놈아, 손가락꺼정 깨물어가메 고맙게 해준 양반인데 행패부리지 말구 차근차근 말씀드려."
  "멀쩡한 남의 두 눈 멀게 해놓고 그까짓 손가락이 고까운겨? 어여 우리 엄니 눈 낫워놔? 못 낫우면 너 눈이라도 대신 박어, 이 돌팔이 같은놈아!"
  허준이 녀석의 팔을 잡았다.
  "마음 가라앉히고 자초지종 얘긴 하게. 내가 떠나온 뒤 무슨 일이 있었던가."
  모자의 실랑이를 들으며 허준리풍의 등불을 벗겨 병자의 눈앞에 쳐 들었다.
  "이 불빛도 안 보이는지?"
  "안 보여유."
  "이쪽 눈은?"
  "양쪽 눈 다 마찬가지구만유. 낮에 햇빛 쪽을 보면 때로 허연 지렁이 같은 게 구물거리긴 해두 그뿐이구민유 ..."
  "... 이럴 수가 ..."
  "그때 주머니 털어 약 지어준 건 고마운 일이지만 그렇다구 멀정한 생사람의 둔 눈을 멀게 했으니 그 책임을 어쩔 거유?"
  "책임?"
  "그람 사람 눈을 멀게 해놓구 아무 책임도 없단 말유."
  "그게 왜 허의원 책임이여, 이놈아! 허의원이 우리헌티 어떻게 해준 분인디 ... 고칠 수 있으면 고치는 게구 못 고치면 ... 그것두 팔자소관이지 ..."
  "그게 왜 팔자소관여! 차라리 그띠 그 상태루 해놓란 말여. 앞을 못 보고서야 그게 무슨 사람이여."
  "왜 이놈이 패악을 부리구 지랄여. 닥치질 못혀."
  "닥치긴 왜 닥쳐. 딴 사람 같으면 칼부림날 일여! 고칠 수 있어유 없어유 양단간에 대답햐!"
  "못난자 같으니!"
  허준이 탄식처럼 내뱉었다.
  "어쩌유?"
  "병자의 눈이 멀게 한 건 네가 미련했기 때문이니라."
  "어따가 뒤집어씌우는 거여!"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고 있었고 그 속에 허준의 딸 숙영이를 데린 손씨도 나타나 아들을 향해 숨을 삼켰다.
  "내가 지어준 그 부자탕 병자가 다 먹었더냐."
  "먹었쥬."
  "그리군?"
  "그걸 먹구 행결 차도가 있길래 ..."
  "그뒤에 또 먹였어. 그것도 함부로. 그런가 안 그런가!"
  "함부로라니유?"
  "병자의 이 눈이 증걸세. 과연 어느만치 먹었는지를 알아야 손을 써볼 수가 있어! 사실대로 다 말하게!"
  잠시 안색이 질렸던 만석이가 그러나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는 듯이 소리 쳤다.
  "딴 약은 입에도 댄 적 없어유. 당신이 지어준 그 부자탕인가밖에 먹질 않았다구요!"
  "내가 묻고 있는 건 어느만침 먹였는가를 말하라는 걸세!"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허준의 의문이 적중했다. 녀석이 떠듬거리며 실토한 얘긴즉은 이랬다.
  그날 -
  녀석이 말을 훔친 내력을 들은 진천 현감 김상기는 허준을 한양으로 떠나보낸 후 녀석의 말을 훔친 까닭이 은인의 취재에 시일을 맞춰주려는 행위였음을 듣자 방환과 함께 효심에 보태 쓰라 약값을 던져준 것이다.
  이에 녀석은 고두백배하여 돌아오는 길로 의원을 찾아가 약부터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돈으로 부자탕만 계속 먹었더란 말이냐?"
  "그걸 먹으니까 행결 차도가 있길래 계속 먹였지유."
  "꿀과 함께 썼더냐."
  "제 철도 아닌데 꿀 구하기가 쉽간유. 그 약이 잘 듣는 것 같으니께 한두 가지 빠져두 그 약을 계속 지어달라구 했쥬."
  질끈 허준은 눈을 감아버렸다.
  일명 바곳이란 불리는 다년생 풀인 쌍란국의 구근으로 만들어지는 부자는 쇠약한 병자의 몸에 양한 기운을 돋우는 강한 효험이 있기는 하나 약기운이 강열한 만치 독성도 포함돼 있어 그 상품에는 반드시 꿀을 함께 써야 했다.
  아울러 부자는 극약으로도 통용되기에 용량에 세심한 주의가 따라야 했다.
  그러나 일이 공교롭게 된 것이다.
  병자에게 고깃국 한 그릇도 마련키 어려운 가난한 사람이었기에 애초 노자까지 털어 부자탕을 마련은 해주었으나 그의 형편에 계속 그 약을 쓸 수 없다 여겼던 허준이 부자에 대신하는 약초를 일러주었는데 뜻밖에도 현감에게 돈을 얻어든 녀석이 오로지 비싸고 좋은 약이란 일념으로 연거푸 부자탕만 지어 노모에게 먹여댄 것이다.
  가난한 그에게 잇따라 부자탕을 사먹을 수 없다고 짐작한 것이 허준의 실수요 병든 어미에게 대한 효성을 갸륵하게 여기어 뜻밖의 약값을 녀석의 손에 쥐어준 진천 현감 김상기의 인정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었다.
  그리고 돈을 내밀며 약을 지어달라는 만석에게 돈부터 챙겼지 병자를 불러 보려 않은 이름 모를 의원과 ...
  "원인을 알았사오니까?"
  "짐작하네."
  하고 허준이 상화에게 대답하고 만석이의 우직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인을 알았으나 늦었어."
  "늦었다니요!"
  "부자란 과용하면 그 독한 기운이 온통 간을 공격하는 법, 어찌 눈인들 멀지 않으랴."
  "그럼 못 낫운단 말여유? 우리 엄닌 참말 영영 봉사가 되는 거냐구유."
  허준이 탄식했다.
  "약이 과했어. 이미 늦었어."
  녀석이 털썩 주저앉았고 허준이 말을 이었다.
  그 허준의 팔에 매달려 병자가 울먹해서 말했다.
  "전 그것으로 됐어유. 허의원님이 못 낫우면 그것도 지 팔자소관으로 돌려야지유. 어차피 그때 죽었던 목숨이었던걸유 ... 어차피 ..."
  칭찬보다 질책이나 비난에 사람들은 더 쾌감을 느끼는가 보았다.
  열 번 잘하다가도 한번 눈밖에 벗어난 그 실수를 사람들은 놓치지 않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소문의 실태를 바로 알려고 하기 전에 흥미 위주로 사건을 풀어갔다.
  "허준이 본 병자가 눈이 멀었다!"
  소문은 하룻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병을 빨리 낫우려는 공명심으로 허준은 약을 독하게 쓴다더라."
  유의태와 견주는 정도의 인물로 보았기에 소문의 강도는 높았다.
  만석이 모자가 병사에 드러누운 지 이틀도 못 되어 병자들의 발길이 끊이기 시작했다.
  "병은 낫우었는데 병자는 죽었다카는 말이 있더니만 겁이 나서 난 허준이 약은 못 먹겠다."
  "소문 요란히 나더니 그눔아 그거 유의원을 지가 차지해 앉을라고 눈이 뒤집힌 기라. 내 너무 설칠 때 알아봤다."
  "... 시키! 인명이라카는 걸 우찌 알고 약을 막 쓰노! 유의태는 어디 갔노?"
  "어디 갔다카두만!"
  "유의태 불러오라캐라!"
  병자의 발길만 끊인 것이 아니라 그 담 밖으로부터 그런 불신과 질책의 고함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허준의 실수로 인해 병자의 생눈이 멀었다는 만석이의 주장에 허준의 아내와 어머니까지 매일 의원에 나타나 가슴을 떨며 만석모의 시중을 자청했으나 허준의 밤낮없는 노력에도 병자의 눈먼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아니었다.
  "유의태 불러오이라!"
  이제야 병사의 병자들도 아직 자기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허준의 무능의 탓으로 돌리떠 떠들기 시작했다.
  "유의태 불러오이라!"

    6
  차도가 없었다.
  허준의 아내 김씨는 집안일은 시어머니께 맡긴 채 연일 병사에 나와 눈이 먼 만석모의 조석 요기를 떠먹이고 이부자리를 대신 깔고 대소변을 보러 가는 그녀를 부축해 동행했다. 남편의 실수에 대한 죄책감 어린 그 행동들이었으나 사람들은 동정하지 않았다.
  "지가 못 낫우면 유의태를 불러야 옳제. 유의원을 부르러 갔나 안 갔나! 이 집이 허준이 니 혼자 맘대로 해도 되는 의원 아니데이. 이 집은 산음사람들이 다 믿고 지내는 의원이란 말다!"
  중갓을 쓴 늙은이가 자기 집안의 명예나 걸린 사건인 듯이 매일처럼 찾아들어와 구경꾼들 앞에서 목청을 돋웠다.
  "안점산에 다녀올지 ...?"
  닷새째의 새벽을 맞이하자 상화가 허준에게 물었다.
  "꼭 누가 와야 병자의 눈이 낫는다는 그런 뜻은 아니올시다만 ... 위급한 병자가 있으면 부르러 오라 하신 스승님 말씀도 계셨고 하니?"
  오기로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실수로부터 외면하기 싫었고 가능하면 자신의 손으로 병자의 눈을 새로 뜨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허준의 침묵을 향해 상화가 결론지었다.
  "곧 떠나겠습니다.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모시고 올 수 있을 겝니다."

  그 시각 안점산 김민세의 약제실에 유의태가 병자의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그 유의태의 풀어헤친 나신을 조심스레 촉진해가는 김민세의 눈이 긴장에 떨다가 외쳤다.
  "이럴수가! 대체 언제부터 이랬단 말인가!"
  "그대가 보는 병명부터 말하게."
  "그대가 보는 바로도 반위인가?"
  "이럴 수가 ..."
  "죽을 사람은 날세. 왜 그대가 놀라는가."
  "자넨 죽어서는 아니 될 사람인 걸 모르던가!"
  "정은 고마우나 세상 죽지 아니하는 사람 없지. 헛헛!"
  웃음 끝에 일어나려는 유의태를 김민세의 손이 강하게 제지했다.
  "한번 다시 천천히 보세."
  그 손을 물리친 유의태가 풀어헤친 옷깃을 여미고 옷고름을 매기 시작했다.
  "일영!"
  하고 김민세가 유의태의 아호를 부지중 불렀다.
  유의태가 문득 웃음을 띄웠다.
  "가는 길을 피하려는 미련이 아니라 여명이 과연 얼마쯤일지 벗님의 입으로 듣고 싶네."
  "다시 한번 누우라지 않는가!"
  "부질없는 일."
  "대체 그 지경이면서 왜 독주는 그토록 퍼마시던가!"
  "세상 구경을 얼마나 더 할 수 있겠는가?"
  "오진일 수도 있어."
  "그대가 오진이라, 핫핫핫."
  "... 냉정한 사람!"
  "... 여러 해 됐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차츰 병증이 손끝에 만져즉면서 곧 알았지. 이놈이 나를 저승으로 데불고 가는 사자로구나. 하고 ... 훗훗!"
  "광익에게 한번 보이시게."
  "구차한 짓 싫네."
  "일영! 광익의 부술을 한번 믿어보아."
  "후회없이 살았지. 오십 평생 살면서 남에게 못할 짓 한 바 없고 좁쌀 한톨 빚진 바도 없으며 잠시 태어난 흔적으로 족히 수천 명의 병고를 살펴줬고 ... 언제 가도 떳떳한 일생일세."
  "... 하늘의 이치가 참으로 오묘하게 냉정한 것이 ... 자식 하나 영특한 게 태어나길 그토록 소원했는데 그 복은 나에게 없었어. 그것 하나 아쉬웠을 뿐 ..."
  "허준이 얘긴가?"
  "... 태난 자식은 하나뿐이오! 그토록 아껴 키우며 타일렀건만 내가 바라는 그릇은 아니었어."
  "누구하고 비교하고 있는 겐가, 허준이 그 아인가?"
  유의태가 대답하지 않은 채 침묵했다.
  김민세가 아프게 눈을 감았고 곧 유의태가 그 김민세에게 물었다.
  "한 가지 묻세. 내 몸에 반위가 생겨난 걸 어찌 짐작했는가?"
  "그대의 입에서 비파잎새 삶아먹은 냄새가 났네. 지금도 나고 있고 ..."
  "의약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그대가 비파즙을 마시고 있을 제야 다른 병일 리 없지 않는가."
  유의태가 미소하자,
  "오늘 안으로 길을 떠나세."
  하고 결론처럼 말했다.
  "남쪽 끝 바닷가 거기서 구하지 못하면 제주도까지 ..."
  "무얼 구하려는가?"
  "내 알길 반위의 토예증상을 다스리는 영약 중에 비파만한 것이 없고 그 비파잎은 땅과 기후가 따뜻한 낳쪽에서만 제대로 자란 것을 구할 수 있네."
  "싫네."
  "싫다니!"
  "나한테 온 병 내가 대처하리. 그게 죽음이거든 그 또한 겪어보는 것이 내 바람인즉!"
  궁녀 정씨가 기척을 내고 나타나 산음서 상화가 급행해왔노라고 기별 하면서 두 사람의 언쟁은 끝났다.
  김민세의 슬픈 눈빛에 비해 유의태의 입가에는 웃음조차 떠 있었다.
  산음에 돌아오는 유의태를 김민세가 한사코 동행했다.
  그러나 약제실에 있었던 두 사람의 얘기는 산음에 이르는 동안 어느 쪽에서도 서로 한마디도 더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밤을 도와 산음에 이른 것은 다음날 새벽 첫닭이 어지러이 우는 시각이었고 한발 앞서 달려 기별을 한 상화를 따라 허준이 나와서 고개를 숙였으나 그 유의태의 걸음을 세우게 한 건 허준의 인사가 아니라 의원 내에 피어나고 있는 약냉새였다.
  "병자의 눈이 멀었다더니 어찌 '본사방양간원'을 달이고 있느냐?"
  허준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는데 김민세가 허준에게 미소를 보이며 대신 대답해주었다.
  "부자의 독한 기운은 다 뽑은 모양이로군."
  "지난 밤 사이 독은 풀어진 듯하오나 대신 눈썹 자위에 좁쌀 같은 것이 돋아나고 눈물이 쉴새없이 흐르고 눈동자가 아파 못 견뎌하와 ..."
  "많이 낫우었구만."
  "나을 증좌오니까?"
  "좀은 나은 셈이지."
  "하오면 이 병자 눈을 다시 뜰 수 있사오니까?"
  유의태가 대답 없이 병사로 올랐다. 허준이 황급히 뒤따라 올라 황초에 불을 당겨 잠든 병자를 비친다.
  병자는 흐르는 눈물을 막고자 무명수건을 눈에 맨 채 쉬임 없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불빛을 물려라."
  허준이 불빛을 물렸다.
  "눈동자가 움직였더냐?"
  "고통이 우심하여 눈을 맨 후 아직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약은 언제 먹었느냐?"
  "반 시각이 지났사옵니다."
  "맨 것을 풀어라."
  허준이 맨 것을 풀기 시작했다.
  자고 있던 만석이가 튕겨 일어나 때아닌 시각에 나타난 초면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유의태가 그 병자의 눈을 까뒤집었다. 병자가 찢기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눈을 세 겹으로 가려라."
  허준이 무명천을 꺼내 시키는 대로 환자의 눈을 겹겹이 매는데 병자의 고통엔 아랑곳없이 유의태가 뇌까렸다.
  "독을 푸는 일이 조금만 늦었어도 다신 눈을 못 뜨고 말았으리."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오면 소인의 처치가 득효했사오니까?"
  "내세울 것 없다. 애초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선 상의라 할 수 없은즉."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왔다. 지난 닷새 동안 병세를 이 정도나마 돌려놓은 건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수단에 대하여 너무나 막막하던 차였다.
  "간의 구멍이 눈이다. 이는 내경에 있는 말이다."
  "... 거기까지는 기억하옵니다. 하오나 눈에 대하여 더 좀 자세히 알기를 원하옵니다."
  "오장육부의 맑은 기운이 눈으로 올라가 그 정기가 모여 눈이 되는 것이다. 하나 그 눈도 다시 세분하여야 하니 뼈의 정기가 동자가 되며 근력의 정기가 검은 눈자위가 되고 피의 정기가 흰자위가 되는 것이다. 침 준비하여라."
  "벗님의 손이 아직 침의 정교함을 다를 수 있겠소?"
  임오근의 폭력에서 미처 낫지 못한 상처를 김민세가 걱정했다.
  "상화가 불 밝히고 준이가 침을 들어라."
  허준은 중지했다.
  준이라는 말-그건 유의태가 '너' '네가' 하는 호칭 대신 처음으로 쓴 따뜻한 말이었다.
  "안정통에 취할 곳이 어디 어디인지를 말해라."
  "풍부, 풍지, 통리, 합곡, 신맥이옵니다."
  "또 있다."
  "... 조해이옵니다."
  "또."
  대답하지 못하는 허준에게 김민세가 첨가했다.
  "대돈."
  "그러하옵니다!"
  고개 숙이는 허준에게 유의태가 물어왔다.
  "취하는 곳은?"
  "규음과 지음올시다."
  "취하거라."
  유의태가 물러앉았고 상화가 불빛을 높이 들었다.
  남아 있는 병자들이 모두 깨어 그 사제지간의 협조를 지켜보았다. 숨소리도 죽인 긴장이 방안에 감돌았다.

    7
  유의태의 자신에 찬 지시와 일호의 오차도 저지르지 않으려는 허준의 정교한 침술에도 불구, 만석모의 시력은 사흘 나흘 지나도록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저지른 실수이매 허준의 어머니 손씨 또한 연일 의원에 나와 아예 붙박이로 병사에 지켜서서 만석모의 간병을 맡은 며느리와 같이 애를 태웠다.
  의원 밖엔 구경꾼들만이 날로 불어나 떠들썩했다.
  "사제지간이 다 달라붙어 앉아갖고 고칠라캐도 이미 동자가 굳어삐릿다카이 용빼는 재주 없지러."
  "그리 되모 책임문제는 우예 되노?"
  사람들의 흥미는 그쪽에 쏠려 있는 듯했다.
  지고 이기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때없이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원인행위 이전에 누구는 꼭 이기고 누구는 꼭 져야 한다는 단순논리에 취하길 잘한다.
  실명이 결정적인 병자의 그 불행은 화제의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침은 유의태가 직접 안 들었다카더라."
  "와?"
  "전에 있던 그눔아 그거 누구고, 임오근이라카나 ... 지가 유의태의 수제자라고 모가지 뻣뻣이 하고 돌아다니던 눈알이 당나귀멩쿠로 노오란 놈, 그눔아한테 칼침 맞은 그 손이 안적도 유의태가 침을 잡을 만큼 안 낫은기라."
  "그라모?"
  "허준이 저지른 일이고 하이까 유의태가 일부러 침을 안 잡는 거 아이가? 찾아온 병자가 봉사가 되모 뒤늦게 유의태도 책임을 같이 져야 하이까네."
  "설마 ..."
  "그럴 수 있데이 ... 생각하모 허준이는 유의태한테는 원수 같은 놈 아이가."
  "하모, 자식캉 그 모양으로 헤진기 다 허준이 그눔아 때문인기라. 글고 유의태도 사람인데 찬솥에 밥 먹이던 놈이 지 자식보다 재주가 뛰어난 거로 조석으로 보다 보면 속에 천불이 날 만도 한기라."
  사람들은 유의태와 허준 두 사제가 이번 병자를 놓고 이빨을 드러내고 개처럼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것을 기대하며 연일 의원 안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병사는 팅 비어 있었다. 소문의 속성은 과장이다. 아니 그 과장이 아니더라도 공명심에 눈이 먼 허준이가 약을 독하게 써 두 눈을 실명케 한 산 증인이 병사에 앉아 있음으로써 병사를 채웠던 그 병자들이 너도나도 의원을 떠나버린 것이다.
  그 휑뎅그렁하니 비어버린 병사에는 만석모와 간병하는 허준의 아내 김씨 외 마당에는 허준의 어머니 손씨가 서성댔고 그 한구석 평상 위에는 술취한 만석이가 밤낮으로 앉아 허준의 아내와 노모를 마치 비녀나 부리듯 밥 가져와라 술 가져와라 속이 복받칠 적마다 고함치고 욕질하는 소리만 낭자했다.
  그 고함소리가 터질 적마다 상화를 비롯한 제자들은 녀석을 주막으로 데리고 나가 술을 먹이고 달래건만 그렇게 술취해 돌아온 녀석은 또 한바탕 대문 밖 구경꾼들애게 자신의 억울찬 처지를 되풀이 떠들어대고 쫓아와 용서를 비는 손씨에게 종주먹질을 했다.
  "삼경이 너무 허하이."
  하고 김민세가 유의태 대신 병자의 맥을 짚고 있다가 말했다.
  "그러니 제독이 늦을 수밖에 ..."
  유의태가 내뱉었다.
  "오늘 밤이 고비겠지."
  설사 그것이 오늘 밤이 아닐지라도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 오늘 밤이 고비라도 유의태의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병자의 숨결을 받아 백회(머리꼭대기 한복판)와 천주(목 뒤 양귀 중간)을 호침으로 한번씩 더 취하거라."
  허준의 눈및을 받아 상화가 세 가닥의 황초불을 병자의 머리 꼭대기로 옮겨 밝혔다.
  호침은 경락 속의 통비를 다스리는 길이 세 치 여섯 푼 끝이 모기 주등이처럼 생긴, 허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침이었다.
  그 가늘기가 머리카락만하다 하여 호침이었다.
  지난날 창녕 성대감댁 정경부인의 중풍을 고칠 때 썼던 침, 자기에게 침의 신비함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던 침.
  병자의 머릿결을 헤친 허준이 병자의 배 위에 손바닥만한 종이를 조용히 올려놓았다.
  그 가벼운 종이는 병자의 신체의 숨결을 가장 민감하게 전해받고 바스락거리며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병자의 숨결에 네 호흡도 맞추어라."
  병자의 배 위에 오르내리는 종이의 움직임을 보며 허준도 숨결을 고르기 시작했다.
  눈에 이르는 혈은 삼경이라 이르는 족궐음과 간경의 좌우에 26혈 족태양 방층경 좌우에 126혈 수소음 심경의 좌우 18혈 등 도합 170혈이 퍼져 있다.
  그중 천만이라고 불리는 백회는 양기를 다스리는 주혈이며 천주는 눈의 이상을 다스리는 주혈이다.
  허준의 침을 쓰는 모습을 김민세가 불붙듯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허준의 손에서 침끝이 다시 뽑혀나오자 뜨겁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애썼네."
  김민세가 만강의 칭찬을 담아 그 한마디를 했고 그러나 유의태는 다시 지시했다.
  "병자의 눈을 가려라."
  허준이 일어서려는데 상화가 먼저 움직였다.
  그러나 허준이 움직였다.
  "홑겹이 아니고 세 겹쯤."
  "세 겹이오니까?"
  "확 매지는 않아도 되리. 갑자기 불빛이 들어가는 걸 막자는 것인즉."
  모두 정지했다.
  허준이 외쳤다.
  "나았사오니까!"
  "마음놓지 못하리다. 하나 네가 정녕 취해야 할 곳에 일호의 낙자도 없이 찔렀다면 ..."
  "... 일호의 낙자도 없이?"
  일호란 무언가. 머리카락이 빠진 그 구멍을 이른다. 스스로 찔렀으되 어김없이 그 호에 해당하는 정혈을 찔렀다. 장담할 수 없다.
  "아직 두 가지 증상이 더 나타나야 하리라."
  "두 가지 증상이라 하오면?"
  "부자의 독이 완전히 가시면 뒷골이 패고 거의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무겁다 할 것이다. 그 통증은 팔미산으로 흩어내야 하리."
  '팔미산!'
  "하나 팔미산에는 부작용이 따르니 두통은 멎되 위가 잡아찢기듯이 아픈 증이 온다."
  "위."
  "그러나 두통에 비하면 덜한 고통인즉 그렇게 증세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증세를 줄여나간다 ...?"
  "위 경은 어디더냐?"
  "족양명 올시다."
  순간 허준의 눈이 빛났다.
  "삼리두혈(무릎 밑 세치)을 취하오니까?"
  "대장 소장이 모두 위맥이므로 ... 삼리의 정혈은 알렷다?"
  "엄지로 질양맥을 눌러서 움직이지 않는 곳이 삼리의 정혈올시다. 하오면 삼리를 취하고 나면 병자가 눈을 뜨옵는지?"
  "그건 위의 고통만 나을 뿐이다. 위는 낫되 이번엔 그 고통이 양 어깨 뒤 대추로 옮겨질 것이다. 이 대추의 혈이야말로 모든 눈병과 직접 관계가 있는 곳이다."
  "하오면 그 다음 대추에 온 고통은 무얼로 떨어내오리까?"
  "뜸이다. 그 뜸이 세이레만 계속되면 더 고통은 없으리라."
  유의태가 거침없이 말했고 허준과 김민세가 '앗' 하는 얼굴로 그 태연한 유의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의문에 찬 두 사람을 유의태는 돌아보려고도 않았다.
  침과 뜸은 같이 행하지 못하는 것인데 유의태가 뜸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정 넘어 유의태가 예언한 증상이 병자에게 나타났다.
  아들 만석과는 달리 허준에 대한 송구스러움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말수가 적던 병자가 갑자기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머리 뒤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준비했던 팔미산을 재탕해 마신 새벽녘에 이르자 이번에는 위통을 호소하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 고통을 지켜보던 김민세가 아까의 의문은 간 곳 없는 얼굴로 말했다.
  "복이 많은 병자로고. 천하를 호령하고도 남을 두 의원을 곁에 두고 병을 앓고 있으니."
  병자의 고통은 허준이 삼리를 취하고 반 시각이나 지나서야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런 잡사는 지켜볼 것도 없다는 듯이 유의태는 병자를 허준에게 내맡긴 채 자기 방으로 돌아가버린 뒤였고 끝내 허준을 흥미로워하여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건 김민세뿐이었다.
  아침이 오자 유의태의 예언은 또 한번 맞았다.
  과연 병자는 두 어깨 뒤가 결린다고 호소했다.
  좌중이 모두 놀라워하며 상화가 뜸뜰 준비를 하자 허준이 그 상화를 막은 뒤 김민세에게 의문을 제기했다.
  "침과 뜸을 함께 행하지 아니한다 하는 것은 의가의 상식인데 대추에 뜸을 놓아도 되오니까?"
  "놓지 말아야지."
  "하오면?"
  "저 사람이 비록 일일이 지시는 했되 일일이 정혈을 찔러 병자의 고통을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배로 배에서 어깨까지 유도해낸 건 그대의 공이지 더 무얼 거리낄 것이 있는가. 핫핫."
  "하오나."
  아직도 의문을 꺼내려는 허준을 한눈으로 보며 김민세가 일어났다.
  "저 사람은 나머지 일은 그대에게 맡겼네. 그렇거든 아는 대로 행하게. 핫핫 ... 그럼 이만 나도 한숨 눈 좀 붙여야겠어."
  호탕한 본래의 웃음소리로 바뀐 김민세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안채로 건너가고 말았다.
  상화가 말했다.
  "스승님의 영이니 뜸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으오?"
  "모든 게 유의원이 얘기한 대로 되었지 않으냐. 이제 와서 다른 사단 일으키지 말아라."
  병사로 들어온 손써도 애원하듯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허준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침과 뜸을 함께 쓴다는 건 본 바도 들은 바도 없는 해기올시다. 난 그렇게 할 수 없소."

    8
  첫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거푸났다.
  유의태의 방, 그 동녘으로 난 사창에 붐한 새벽이 어리고 있었으나 방안은 아직 어두웠다.
  그 어둠속에서 김민세의 음성이 났다.
  "왜 그러셨던가?"
  잡든 듯 한참 대답이 없던 유의태가 조용히 되물었다.
  "왜라니?"
  "침구는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가의 영인데 침과 뜸을 함께 쓴다 처방하고 들어와 버렸으니 저 아이가 당혹한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당혹하던가?"
  "...?"
  "그 정도로 당혹한다면 내가 사람 잘못 본 거겠지."
  "무슨 얘길하는 건가. 의가의 영에 반하는 얘길 꺼낸 건 그대가 먼저가 아닌가?"
  "내 뜻은 나는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요, 저 아이는 앞으로 뻗어나야 할 생이니 뒷마무리를 저에게 맡긴 거지 딴 뜻은 아닐세. 또 병자의 병은 이미 나았은즉."
  "그럼 왜 하필 그런 말을?"
  "그 정도 침이면 뜸뜰 자리 침으로도 풀 수 있지. 어느 쪽을 선택하건 저에게 맡긴 것뿐."
  "...!"
  "큰 의문 갖지 마시게. 이젠 난 명예가 필요없는 사람. 하나 저 아이는 제가 저지른 일 제 손으로 그 오명을 씻어야 않겠는가."
  "고마운 말이로세, 정말 고마운 말이고말고."
  "당황하지 않을 게야. 곧 방법을 찾아내겠지. 유의태란 존재에 얽매이지 않는 방법으로."
  김민세가 어둠속의 유의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의태는 천정을 향해 카악 강한 눈길을 박은 채였다.
  "저 아이의 호침 쓰는 솜씨는 놀라웠어. 열에 셋만 맞추어도 효력을 내는데 그 아이는 모두 적중시켰어. 병자의 회복되는 증상이 그 증거지. 입신의 경지야."
  "젊은 아이에게 과찬은 도리어 해롭네."
  "벗님은 저 아이의 솜씨를 어찌 보셨던가?"
  "침술만 뛰어났을 뿐 ..."
  "다른점은?"
  "그대도 알다시피 침술은 의원이 갖추어야 할 수단 중 작은 한 가지일 뿐 적어도 ..."
  "말씀하시게."
  "내가 저 아이에게 스승이 됐고 선인이 됐던 내가 바라보는 바는 ..."
  "...?"
  "선배란 뭔가? 그건 후학으로서 점령하고 뛰어넘을 목표여야 하리. 그게 첫째일세. 나를 뛰어넘을 후학이 아니고서야 무슨 재미로 눈여겨볼 재미가 있겠는가."
  "그럼 허준이 그대의 영에 반발하고 대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이젠 제 힘으로 우뚝 서야 해. 나 같은 건 잊고 ... 나도 오늘 보았어. 저 아이의 침술을 ... 능히 그 침술만으로 세상 입초시에 오르내릴 정도는 되네. 지난날 창녕 성대감집에서 이룬 일도 결코 우연이 아니란 것도 확인했지, 그러나 ..."
  "제 뜻이 내의원에 있다면 재주 승한 것만으로는 앞길을 열 순 없어."
  "... 누구 얘기를 하시는 건가?"
  "전대로부터 금상왕에 이르는 양대 37년을 어의 자리를 틀고 앉은 양예수를 상대로 제 앞길을 헤쳐나가려면 어떤 권위에도 할 얘기 하는 패기가 아니고선 영영 양예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어."
  "양예수를 아직 미워하시는가?"
  "미워하건 아니하건 그자를 뛰어넘지 아니하고는 영원히 어의의 길은 막혀 있다는 그 말을 하는 게지."
  어느덧 김민세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양예수라면 그도 잘 안다. 자기를 어의의 후계자로 꼽아주었던 사람이며 궁녀 정씨의 집안과 혼인을 맺게 했던 자기에게는 대부와 같은 은인이다.
  하나 그가 또 이 유의태에게는 구침지희라는 의원의 명예와 목숨을 건 피나는 경쟁자였음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행여 허준으로 하여금 벗님이 양예수와 못다 싸운 그 싸움의 뒷마무리까지 떠맡길 그런 생각까지는 마시게."
  유의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유의태의 늙은 눈이 깊숙이 어두운 불꽃을 태우며 타고 있는 것을 김민세는 보았다.
  "양예수는 특히 그대에게 있어선 벌써 30년 전 옛 인연일세. 이젠 그 사람을 잊을 때도 됐지 않은가."
  침묵하던 유의태가 입을 열었다.
  "그와 나와의 사사로운 인연을 떠나 한 가지 묻세."
  "하시게."
  "명종조 이후 근 37년 동안 나라 안에 큰 의원이 태어나지 않는 까닭을 어디다 보는가?"
  "양예수의 책략으로 보네."
  "성급한 단정 일세."
  "허준이 새로운 재목이다 여기면서 난 그 생각을 해."
  "양예수는 자기를 위협할 재주는 결코 뽑지 않네. 30년을 두고 어의라는 위세와 과장의 감시관으로 있으면서 물질에 얽힌 부정은 저지르지 않되 장차 자기의 지위를 위협할 재목은 철저히 가려 낙방시켰어. 이건 내 확신일세."
  "벗님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어. 내가 아는 양예수는 왕실의 시탕에 공도 많은 인물일세."
  "어려운 병일랑 타인에게 맡기고 쉽고 생색이 날 변자만 도맡으니 공적 또한 쌓이겠지."
  "누구에게 들은 소린가. 마치 그대의 눈으로 보기라도 한 듯이."
  "안광익."
  "..."
  "아무튼 장차 허준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을 걸세. 그 아이가 내의원에 아니 올라간다면 모르되 올라간다면 ..."
  "... 너무 상심 말게. 작은 고을의 작은 의원으로 마치려면 모르거니와 큰 의원으로 크려면 내의원은 기어이 한번 가야 할 곳이지. 이 나라에서 희귀 의서를 마음놓고 접해볼 곳은 내의원밖에 없은즉 ..."
  유의태가 말이 없었다.
  잠을 청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불쌍한 사람 ...'
  마치 남의 말처럼 여명 여명하고 예사로 내뱉고 있으나 김민세의 눈으로도 유의태의 여명은 오랠 것 같지 않았다.
  - 반위 .
  오장이 마르고 마르다가 마침내 물도 넘기지 못하고 토하기만 하다가 숨쉬기를 멈추는 불가사의한 병 ...
  '오늘 해 안으로 광익에게 기별하여 저 사람의 병을 회생시킬 방책을 논의해 보리라.'
  창밖에 날아온 새소리를 들으며 김민세도 눈을 감고 한숨 잠을 청했다.
  대추의 고통을 호소하는 만석모에게 허준은 손톱을 강하게 세운 지압을 계속했다.
  허준의 하는 양을 보고서는 그 말많고 떠들썩하던 꺽새, 영달 들은 벙어리가 되다가 방구석에 뒹굴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화만은 유의태의 영이 있었음에서 허준의 독단이 불안한 모습으로 큰사랑 쪽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유의태가 깨길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허준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엔 병자의 두 눈에서 꽤 많은 양의 눈물이 배나오고 있는 것도 눈이 되살아난 증거였다.
  허준은 자신이 붙었다.
  희망에 찬 아내와 어머니가 병자의 요기를 차려왔고 밥냄새를 맡은 병자가 식욕이 동하는 눈으로 그쪽을 두리번거렸으나 허준은 병자의 음식을 거절했다.
  "침과 음식은 밀접한 거올시다. 한 순차 침이 끝나기까지 음식은 참으소서."
  "하지만 배가 너무 고프구만유."
  허준이 그 가련한 병자에게 설명했다. 침은 환부만 자극하여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환부가 확실한 자극을 받게 하기 위해서는 의원은 반드시 병자의 여러 모습을 모두 지켜보아서 비로소 침을 살갖에 꽂는 법이라는 것을.
  그건 예로부터 주장되는 엄격한 규범으로 이 규범과 원칙을 무시하거나 벗어난 의원은 결코 상의라 할 수 없는 뜨내기 돌팔이들의 행위였다.
  음식을 새로 먹은 뒤에는 찌르지 못한다.
  술에 취한 신체에는 찌르지 않는다.
  성난 뒤에 찌르지 않으며 이미 찔렀으면 노기를 풀어야 한다.
  힘든 일을 한 후에는 찌르지 않으며 배고픈 상태에선 찌르지 않는다.
  목마를 때는 찌르지 않으며 수레를 탔거나 걸음을 달리고 난 뒤는 반시각을 누워 안정한 뒤에 찌른다.
  이보다 더 의원이 중시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 침자는 천시와 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사람의 피 그 혈행이 하늘에 뜬 달의 크기에 밀접한 고로 예민한 반응를 일으킨다는 사실에서 모든 침술은 이 천시의 운행에 기준한 침술을 절대적으로 써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초승달이 날 때는 사람의 혈기 또한 가장 정하고 맑아지는 시기로 몸안의 기운이 찰 때이며 달이 보름이 되어갈수록 혈기가 실하고 살갗이 탄탄해지는 것과 달이 이지러지면 살갗이 시들고 경감이 허하여지는 때임을 알아야 하고 그러므로 날이 한랭하면 찌르는 것은 삼가고 달이 날 때엔 사하지 말고 달이 찰 때엔 보하지 말고 달이 치지러질 때는 큰병을 침으로 낫우려 말라는 것이니 달이 찰 시기에 외상을 입으면 특히 피를 더 많이 흘리게 되고 보름 전후의 출산은 딴 때보다 하혈이 심하다는 것 등이 모두 침을 지닌 의원이 명심해야 할 경구들인 것이다.
  '오늘이 초사흘 ...'
  허준은 침술에 절호의 이 시일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9
  유의태가 오늘 밤이 고비라던 날이 밝았다.
  허준의 아내도 어머니도 허준과 함께 밤을 밝히는 제자들도 모두 밤을 꼴딱 새우고 있었다.
  유의태가 말한 '오늘 밤이 고비'라는 그 고비는 그가 지시한 뜸을 뜰 것을 전제로 한 예측일 것이나 허준은 유의태가 장담한 뜸을 무시한 채 그 손에는 계속 침만이 들려 있었다.
  제자들도, 소문을 듣고 꾸역꾸역 나타난 구경꾼들도 그래서 날이 새어 유의태가 나타나 한바탕 사제간의 갑론을박과 소동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수군거렸다.
  침과 뜸을 함께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의가의 좌우명일지라도 그렇게 지시한 것은 유의태다.
  비록 허준의 침술이 어느만치 완성된 경지라 할지언정 스승의 지시를 면전에서 거부해서 될 말인가 싶은 것이다.
  물론 제자들도 수삼 일 동안 곁에서 보아온 터이다.
  병자의 부위는 어디를 어떻게 시행하라 낱낱이 지시한 것은 유의태로되 그 지시를 따라 취한 기와 술은 허준의 재질인 것을.
  그러나 그렇게 유의태가 시키는 대로 하여 득효했다면 마지막 지시 또한 그대로 따라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허준이 스승의 영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모두 괘씸하게 여겼다.
  스승의 '해라!'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절명의 영일 터인데도 마치 대결이나 하듯 자신의 시술을 내세우는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그냥 한가로이 오가는 문답이 아니요 당장 눈앞에 살아 있는 환자를 놓고서의 대결임에서 모두 숨을 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곁에서 말리기엔 그 동안 허준의 존재가 너무 뚜렷했다.
  새삼 그의 행동을 가로막을 위엄은 좌중의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 병사의 이변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날 같으면 벌써 모습을 나타내어 병자의 차도를 간심할 유의태는 아직 큰사랑에서 기침소리 하나 없었고 그 유의태 대신 꼭두새벽에 상화를 불러들여 어디론가 길을 떠나게 한 김민세 또한 다시 깊은 잠에 빠졌는지 더 동정이 없었다.
  "유의원이 하라는 대로 하면 떠질 눈이 애비의 고집으로 인해 아직 떠지지 않는 것이 아니냐?"
  한여름의 붉은 첫햇살이 퍼져나가고 초복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 시각에 오늘도 집에서 달려온 손씨가 만석모 곁에서 병자 못지않게 진땀을 흘리고 있는 며느리를 불러내어 긴장된 소리로 물었다.
  "천으로 겹겹이 눈을 가리고 있으니 나아가는지 어쩐지 들여다볼 길이 없습니다."
  "어디 고통스럽다 호소하지는 않고?"
  "고통은 일차 가신 모양올시다."
  "그것이 애비의 침의 효력인지 궁금하구나. 병자가 자식하고는 달라 애비한테 내내 미안해하고 참을성이 맡은 사람이라 일부러 아픈 내색을 감추고 있는 듯도 하고!"
  구경꾼들이 하나둘 불어나 고부를 앞질러 병사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병사의 방문에 가리운 낡은 갈대발 너머로 허준과 만석과 영달 꺽새들, 병자들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
  상화의 솜씨로 방문 위에 매단 여치집에서 때로 여치가 시원하게 울어댈 뿐 어디서 거름 썩는 냄새가 후덥지근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기다린다. 가서 요기 좀 하고 한숨 눈 붙이고 오너라."
  손씨가 일렀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어야 한다더냐?"
  "모르겠습니다. 온정신을 모으고 있으니 섣불리 곁에서 입을 열 수도 없고요."
  "유의원은 그 길로 더 내다보지 않고 내내 애비 혼자 저러고 있느냐?"
  "예."
  "이미 누군가 애비 혼자 무얼 어찌한다 일러주었겠지."
  "사람들 눈빛이 하나도 애비를 편드는 것 같지가 않아."
  "애비도 한숨도 눈 안 붙인 채냐?"
  "예."
  세상 사람이 믿지 않아도 그러나 지금 허준의 아내는 남편을 믿고 있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성질이 아니라 여겼다.
  어디를 어떻게 취하라 낱낱이 일러준 유의태의 만병에 밝은 눈도 경탄할 지식이되 그 정혈을 하나하나 낙자없이 취한 남편의 기와 술 또한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유의태와 대립한 의견을 낸 남편의 판단이 승리하여 병자의 눈이 떠지기를 그녀는 믿었다. 믿지 않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녀는 밤새 그 사실을 곱씹어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이 일은 남편 허준의 의원으로서의 긍지와 기략을 스스로 확인하는 기회인 것을.
  실패는 남편이 유의태에게 패한다는 그 체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지식의 붕괴일 것이다.
  남이 일러주고 남이 손잡아주어 병을 낫우었을 때 그도 기쁨은 되리라.
  그러나 자기가 믿는 바대로 스스로 행하여 병을 낫운 기쁨에 비길 수는 없다.
  자신있는 행동.
  남편 허준의 자신있는 행동.
  허준의 아내 김씨는 남편의 자신있는 행동에 자기의 운명도 걸고 있었다. 지난밤 유의태를 따르지 않는 남편에게 주위와 함께 우려한 자기 자신이 지금은 부끄러웠다.
  그리고 남편을 일시나마 불안하게 여긴 자기가 죄스러웠다.
  비록 말없이 병자를 간병하는 모습이나 그건 필사적인 행동인 것을 그녀는 열 번 스무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지식을 스스로 확인하려는 행동, 그녀는 그런 남편의 고집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남이 하라는 대로만 한대서야 언제 자기가 믿는 자신의 세계를 가질 것인가. 실패하면 어째서 실패했는가를 알고 성공하면 이러이러해서 성공했다는 자신감이 있음으로써 사람은 보다 높은 곳으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아닌가.'
  매미소리가 귀 따갑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뭇잎새의 아침 이슬이 말라가는 그 시각에 이미 등줄기에 후줄근하게 땀이 느껴지는 무더위가 오늘도 계속될 모양이었다.
  "어서 이젠 풀어봐유. 그 양반 허의원 선생이란 사람도 어젯밤이 고비라구 그랬잖네비유. 그리고 이젠 해가 하늘 똥구멍꺼정 올라왔는디 왜 마냥 내려다만 보구 있느냐구요."
  "아직 침이 박혀 있어."
  조바심치는 만석이를 돌아도 안 보고 허준이 뇌까렸다.
  "뽑아요. 그럼 침!"
  "어쨌든 고비라는 어젯밤이 지나구 한나절이나 지나갔잖유. 한나절씩이나!"
  "가서 그 좋아하는 밥이나 찾아 먹게."
  "아, 지금 내가 밥이 넘어가게 됐슈?"
  만석이가 눈을 하얗게 떴으나 허준은 더 이상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려 않았다. 그러나 김씨와 손씨는 동시에 안도의 숨으로 바뀌었다.
  그 좋아하는 밥이나 찾아먹으라는 그 말 속에 한가닥 여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두 시각은 더 있어야 하리. 그리고 다시 또 마지막 취할 곳도 남았고."
  둘러싸고 앉은 여타의 제자들을 의식해선지 한참 후에 허준이 병자의 맥을 짚고 있던 손을 떼며 혼자 그 한마디를 했다.
  새벽내의 침묵에 비해 그 어조 또한 딴때없이 자신에 찬 소리였다.
  침의 명수를 일컬어 상공, 중공, 하공으로 친다.
  물론 그 상공외 첫 조건은 정혈을 찾아내는 특이하고도 신묘한 재질에 있다.
  그러나 진짜 상공의 명순란 어디가 무슨 혈이라는 그 부위의 선정에서 막 그 정혈을 찌르는 재능 못지않게 찌르면 얼마나 찌르며 찌를 시각은 어떻게 선택하며 찌른 후에는 어느만치 꽃아두는가를 두루 통달해야만 그 경지에 이르렀다 일컫는다.
  첫째로 그 깊고 엷게 찌르는 기를 중시하는 것은 혈락에 가까이 이어진 병은 그것이 살가죽에서 가까이 있으니 엷게 찌르는 것이요 다음 차례로 깊은 곳인 육부는 더 깊게 그리고 오장은 더 깊이 있으니 그에 속한 병은 더욱 깊이 찌르게 된다.
  또 사는 취할 부위가 전채의 기운에 비해 탄탄하다 여기면 그 실한 것을 흩어내어 관련 부위와 균형을 맞추어 전체의 평정을 맞추는 것으로 병자가 숨을 들이킬 때에 침을 넣어 침신을 굴려 병자의 숨결이 내쉬는 것과 함께 침을 뽑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모든 침의 운용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병자의 몸속의 음양을 조화하는 오장육부의 움직임을 평하게 하는 병자의 전체의 건강을 지켜보는 눈이 상공의 경지다.
  "그래서 허준의 경지가 그 상공에 이르렀단 말인가?"
  하고 병사 쪽의 긴장은 아랑곳없이 유의태가 느긋이 자리에 누워 있는 김민세에게 말했다.
  "그대 또한 그런 믿음이 없다면 침을 고집하는 소리를 들었으면서 아직 자리 속에 누워 있진 못하리 ... 아니 그러한가?"
  유의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의원마다 침통이야 지니고 있지. 그러나 과연 상공의 경지에 부끄럽지 않은 솜씨를 지니기란 백에 하나쯤이겠지."
  툭 유의태가 독백했다.
  "후하구먼, 세상에 많은 의원이 하공이요 그중 스물에 하나가 중공이요 상공은 천에 하나 아니 만에 하나라도 많네."
  "만에 하나라 ... 그건 아예 없다는 얘기가 아닌가."
  대답 대신 유의태가 웃었다.

    10
  "상공이라 ..."
  하고 김민세가 다음 말을 더 기대하듯 유의태를 건너보았다.
  "굳이 순차를 매기자면 허준이 중공과 상공의 중치쯤에 이르렀는지 모르지. 제 고집대로 시술한 저 병자가 온전히 눈을 떴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
  "뜬다고 했지 않은가. 그대의 입으로. 분명 어젯밤이 고비라 한 말이나 또 병자의 차도가 미심쩍다면 그대가 이렇게 마냥 태평하게 앉아 있을 리도 없을 터이고, 아닌가?"
  김민세의 그 말에 유의태가 다른 말로 대답했다.
  "아마도 허준이 상공의 경지에 이르려면 사람의 몸속을 적어도 열 명은 헤쳐보아야 하리."
  "사람의 몸속을 헤쳐보다니?"
  "사람마다 병이 있기 그 가짓수를 세자면 가히 만 가지 병이라 할 것이로세. 그렇다면 만병을 통치하려는 상 중의 상의를 지향하려는 자거든 마땅히 사람의 몸속을 열어보고 헤쳐보는 기회를 가져야 하겠지."
  "어려운 얘기로군."
  "수만 사람의 병을 다루어야 할 의원이 고작 필설로나 형용한 오장육부를 상대로 한대서야 더 이상의 정진은 기대하기 어려워."
  "말은 옳으나 지난한 일 아닌가. 도대체 사람의 몸속을 누가 들여다볼수 있는가? 광익이처럼 부술에 미친 사람이 아니고선, 더더구나."
  "그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거든 해내야지. 길이야 어떤 길이 되었건."
  김민세가 숨을 삼키며 유의태를 건너보았다.
  "해내다니? 살인을 말인가?"
  "살인일지 활인일지 아무튼 고작 개나 고양이 뱃속을 째보는 것과는 달라야 하지. 사람이 개 고양이의 속과는 다를 터이고 안광익의 부술도 허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그가 비록 남의 무덤 속을 몰래 파내어 여러 송장을 헤쳐본 것은 짐작이 가는 터이나 그 송장이란 뭔가? 3일장, 5일장으로 장례가 끝나 파묻힌 사체들이니 이미 정지한 오장은 오그라들고 혈행은 멎은 지 오래인 썩어가는 송장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본들 그것으로 살아 있는 병자를 가늠한다는 것은 차이가 많아."
  김민세의 침묵이 길었다.
  민세는 안다.
  의원의 가장 큰 욕망은 생체의 인간을 헤쳐보는 일이다. 그리고 때로 급살한 송장이나 사죄가 결정된 인간을 헤쳐보려는 탄원이 내의원의 신진기예의 의원들 속에서 어의나 내의원을 관장한 도제조에게 품신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체의 해부는커녕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 자체가 사죄로 치부되는 절대의 윤리이기에 인체 해부의 허락은 어느 곳에서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승에서의 죽음이 저승에로의 떠남을 의미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재활을 꿈꾸는 사생관을 지닌 인간들에게 이승에서의 죽음 위에 다시 타인의 칼끝으로 몸을 갈가리 찢기어 개돼지가 백정의 칼끝에 해체되듯 그 끔찍한 두 번 죽음을 원하는 이가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때로 정치적 역모에 연루되거나 절대권력의 노기 어린 명령에 부관참시라는 것은 있을지언정. 그것 또한 이미 백골이 된 고루를 동강내는 법의 관행일 뿐.
  이때 돌연 두 사람의 침묵을 깨는 소리가 병사 쪽에서 났다.
  "눈을 뜬 모양이로군."
  하고 유의태가 마치 먼 고장의 소동이나 말하듯 뇌까렸다.
  "나가보지 않으시려나?"
  김민세의 음성도 병자의 눈뜸은 기정사실인 양 나직하고 침착했다.
  유의태가 툭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나갈 것 없겠지. 구경꾼들이 제법 몰려와 있는 모양인데 저 공일랑 저 아이가 지녀야겠지. 새삼 병자 하나 더 낫운 공을 내 이름 밑에 달고 싶지 않으이."
  김민세가 끄덕였다.
  "아름다운 정이로세."
  "세상 사람들은 그대와 허준이와의 대결에서 누군가 한 사람 세상 입초시에 난도질이 나길 바랐을 터이지만 그대는 그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저 아이에게 양보를 했어."
  "..."
  "임오근이한테 당한 그 상처 따위로 그대가 침을 못 잡을 리 없건만 저 사람에게 직접 침을 잡게 한 것부터 세상의 공치사를 저 사람에게 넘겨주려는 그대의 지극한 정이고말고."
  유의태가 나직이 또 한번 독백처럼 뇌었다.
  "내가 준 건 정이 아니라 기회일 뿐."
  "...!"
  "어차피 이젠 이 세상 더 많이 살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저 사람일 터이므로 ..."
  김민세의 코끝에 시큰 작은 감동이 지나갔다.
  유의태의 입에서 허준을 일러 '저 사람'이라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미 유의태가 허준을 자신의 의술의 경지에서 멀리 떨어진 후학으로 보지 않고 한 사람 독립된 의원으로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한마디이기도 했다.
  이때 영달과 꺽새가 달려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기척도 생략하고 마루로 뛰어오른 영달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병사 쪽을 가리켰다.
  "병자가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떴다구요."
  "허준이 병자의 눈을 고쳤소!"
  뒤따라온 꺽새도 악을 썼다.
  김민세와 유의태가 몸을 일으켜 큰사랑을 나왔다.
  마당은 온통 난리였다. 손씨와 아내가 허준을 붙들고 울고 있었고 찾아온 아들 겸이와 딸 숙영을 마을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끌어안듯 하고 반가워하며 동동거렸다. 그리고 해장술이 아직 덜 깬 만석이가 햇살이 눈부시다는 듯이 눈을 가린 제 어미를 들쳐업고 온마당을 뒹굴고 돌며 병자의 눈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마다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허의원이 병을 고쳤다고 울고 웃으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인심이란 애초 그 정도 엷은 것인지 모른다. 허준이 눈먼 병자의 눈을 다시 뜨게 했다는 소문이 돌자 이틀도 지나지 않아서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이 유의태의 의원은 다시 찾아드는 병자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이 세상에 의원이란 허준이밖에 없다는 듯이 찾는 이름도 모두 허준이었다.
  배탈난 병자도 머리가 아픈 환자도 발병이 난 사람도 병을 그 허준이가 보아주기를 열망했다.
  만석 모자가 허준과 그 가족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또 조아려 감사하며 산음을 떠난 후 의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로 바뀌었다.
  이젠 병사가 허준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영달과 꺽새도 허준이 앞에서 시선도 다 못 들도록 순종하며 허준이 그들의 연치를 존대하여 황초잡이와 수건쟁반 들고 시종하는 것을 맡기자 마당쇠의 신세에서 병사로 올라선 그 승격에 감격하여 이제야 숙원을 이룬 듯이 허준의 거동 때마다 허리가 휘었다.
  어제까지 유의태를 존대했듯이 허준의 신발을 툇돌 위에 바로 놓기를 다투었다. 유의태의 시대는 가고 허준의 그늘 속에서 자리를 잡아야 살길이 열린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린 눈빛들이었다.
  하나 주위가 '허의원' '허의원' 하고 떠받들어도 허준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의 성공은 결코 자신의 재주만이 아니요 유의태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침과 뜸을 병행하라는 그 황당한 말을 들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이미 일어선 사람을 부축하는 정도의 간단한 마무리로 자신에게 공을 돌려준 유의태의 뜨거운 정을 이제야 허준은 절절히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더 배우리라! 열 번 쫓으면 열한 번 다시 찾아와서라도 기어이 이분의 의술의 경지와 혜안을 반드시 내 몸으로 익히리라.'
  바로 그날 밤이었다.
  평소와 같지 않은 유의태의 참담한 병증을 발견한 것은 ...
  이날 새벽부터 뒤밀리는 병자들을 맞아 솜처럼 피곤해진 몸으로 그날의 처방전들을 모아 들고 허준이 유의태가 있는 큰사랑으로 찾아들었을 때 언제 찾아왔는지 그 방에는 안점산의 안광익이 나타나 있었고 그 김민세와 안광익 앞에 웃옷을 벗은 유의태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안광익이 무서운 눈및으로 유의태에게 소리쳤다.
  "반위일세! 이미 초기가 아니라 말기에 가까워."
  들어선 허준이 그 자리에 못박혀 서버리고 말았다.

    [  11. 밀양 천황산 ]
    1
  유의태의 눈길이 안광익을 무시한 채 허준에게 날아왔다. 허준이 숨을 삼켰다.
  "이 아이더러 어쩌란 말인가!"
  "이미 아이가 아닐세."
  "내가 말하는 아이란 것은 이런 괴병을 다스리기엔 신출내기란 뜻일세. 다시 한번 내가 확인해보세."
  "준이는 다가앉아라."
  "소인이오니까?"
  "너 또한 처음 대하는 병일지 모르나 내가 이 증상을 보이고자 하는 것은 너뿐이다."
  "이 아이에 대한 신뢰도 좋으나 침술 따위로 다를 병증이 아니라지 않은가."
  "다가앉아라."
  유의태의 눈길이 다시 허준에게 멎었다. 허준이 무릎걸음으로 유의태에게 다가앉았다.
  "네 손으로 내 맥을 짚어라."
  "하오나."
  "의원은 스스로 자신의 맥을 짚을 수 없다. 또 네 촉진을 신뢰하여서라기보담 세상에는 이러한 괴병도 있다는 것, 그러한 병자를 촉진한다함은 그 또한 장차에 대비하여 흔치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생사가 달린 경각에 자신의 장래 운운하는 그 말에 왈칵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먼 만석모를 두고 대결이란 당치도 않은 착각이었다.
  지금 그의 눈빛을 보며 허준은 유의태가 자기를 얼마나 뜨겁게 촉망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인이 어찌 감히 스승님을."
  "내가 원하는 일인즉슨!"
  스스로 옷소매를 걷은 유의태의 야윈 손목이 허준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허준은 눈을 감았다.
  '장차에 대비한 흔치 않은 경험.'
  물론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의서 속에서 본 반위라는 병명을 기억하되 아직 그 병자를 허준은 대한 적이 없다.
  허준은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병자의 맥을 짚자면 의원 자신의 호흡부터 고르지 않으면 안된다.
  의가에서 말하는 호흡은 호와 흡을 세밀하게 구분하니 내쉬는 것을 말하는 그 일호에 맥이 세 치를 운행하며 일호에 또한 맥이 세 치를 운행, 호흡에는 곧 여섯 치를 운행하는데 성한 신체는 일주야에 일만삼천오백 회를 숨쉬며 일호에 맥이 재동하고 일홉에 다시 재동하는 것을 기준삼아 일식이라 부르며, 그 한 호흡에 사동하면 무탈하며, 삼동은 지하다 하여 이상으로 보며, 이동은 패, 육수, 칠극하면 열이 많으며, 팔동은 탈하고, 구는 죽으며, 이식에 일동해도 또한 죽는 것으로 친다.
  아울러 병의 유무와 생사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술이 곧 진맥인데 먼저 중지로 안찰하여 촌 관 척의 삼부를 짚되 그 각 부마다에 부 중 침의 진법으로 도합 아홉 가지 증후를 가리는데 상중하 혹은 천인지 로 부르는 이 삼부의 상부는 가슴으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의 질병을 주관하고 중부는 가슴 밑으로부터 배꼽 이상의 질병을 그리고 하부는 배꼽 이하 발끝에 이르기까지의 질병을 주관한다.
  그 삼부를 또 세분하여 아홉 가지 증후로 나누는 것은 호흡 즉 맥이 특히 작거나 큰 것 빠른것 더딘 것 열한 것 한한 것 그리고 가라 앉은 것은 모두 병이 있는 증거며 그 호흡의 뛰는 양과 수치로 병의 경중 그리고 생사의 전망도 가늠하기 때문이다.
  허준의 손이 유의태의 촌, 관, 척 삼부를 짚으며 그 맥치 박동을 전해 듣기 시작했다.
  순간 그 허준의 눈이 번쩍 뜨이며 유의태의 눈 감은 얼굴을 보았다.
  허준의 입술이 메말라갔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시오니까?"
  "놀랄 일은 없다. 세상에 처음 있는 병도 아니요, 어찌 이 병이 내게만 닥친 병이리."
  "일견 큰맥은 크게 이상이 없사오나 ..."
  "공연한 소리로 나를 달래려 할 것 없다. 증상은 맥 뛰는 소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닌즉."
  "하면 달리 또 무슨 증상이 있단 말인가!"
  안광익이 물었으나 유의태의 눈은 여전히 허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 가슴을 만져보아라. 명치 부위도."
  유의태가 다시 자기 손으로 옷자락을 헤쳤다.
  "...!"
  "망설일 것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장차에 대비하여 흔치 않은 경험일 것이다."
  유의태가 자리에 자신의 몸을 눕혔다.
  허준의 손이 유의태의 가슴을 더듬어갔다.
  이상이 없었다. 아니 일견 이상이 없어 보이는 그 살가죽 밑에서 곶감덩이 같은 미심쩍은 어혈뭉치같은 것이 만져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호홉을 골라가는 허준의 손바닥 안에 점점 더 뚜렷이 감지되었다.
  "대체 ... 대체 이것들은 무엇들이오니까?"
  "죽은 살점이겠지."
  "죽은 살점?"
  "저 혼자 죽은 살점이 아니요, 저와 붙어 있는 여타 살점이며 장기들과 함께 죽어가는 살덩이. "
  "...?"
  "저 혼자 죽었으면 그것만 도려내면 될 것이로되 저 혼자는 죽지 않는, 아마 내 몸통 속에 지금 가장 왕성하게 살고 있는 것은 그 살점뿐이리라. 마치 인간사의 작은 재주 따위 비웃기나 하듯이."
  유의태가 웃고 있었다.
  "...!"
  "물러나게, 내가 다시 한번 만져보리."
  안광익이 허준의 곁으로 다가앉자 유의태가 그 안광익을 거부하듯이 일어나 앉으며 옷을 여미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들여다보세."
  대답 대신 이미 유의태는 옷고름을 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옷고름을 매는 손끝도 말씨도 그 태연함이 이미 오랜 사생관에서 우러나온 의연함이 있었다.
  "내 몸속에 자라기 시작한 이놈의 정체를 기어코 또 내 손으로 밝혀보려 한 적도 있었으나 그건 내 욕심일 뿐. 그 소임을 맡을 자는 아마도 너희들이려니."
  "잠시 더 누워보소서. 소인이 다시 한번 확인하려 하옵니다."
  "내가 지난 일년 동안 자나깨나 연구해도 도시 종잡을 수 없는 병, 뱃속을 갈라보기 전에 도시 알 수 없는 병."
  그 눈빛에 좌중이 숨을 삼켰다.
  "그러나 멀잖아 누군가 이 병의 원인과 약을 찾아내리로다. 끝내 못낫을 병이거든 하늘도 이런 병을 한가로이 만들어내지 아니했을 터인즉. 핫핫 ..."
  패배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침통해 있는 일동의 면전에서 유의태의 그 웃음소리는 이 세상 그 무엇도 겁내지 않는 오연함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김민세와 안광익의 고함 같은 노호와 질책이 있었으나 끝내 상화를 시켜 술상을 대령케 한 것은 유의태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달가워하지 않는 두 벗에게 손수 술을 쳐주고 내내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허준에게도 손수 술 한잔을 쳐주는 여유를 유의태는 보였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의 침묵 속에서 유의태가 꺼낸 화제는 의원이 지녀야 할 부술에 관해서였다.
  "사람의 몸속을 갈라보았느냐니요?"
  "그런 욕망 없느냐. 도대체 사람의 몸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구석구석 뜯어보고 싶은 욕망이 없는가 그 말이다."
  "왜 없사오리까만 의원의 소망일 뿐 누가 죽어선들 다시 갈가리 찢기기를 원하오리까."
  "필요하면 해야지."
  유의태가 술을 반 잔쯤 비우고 허준과 안광익을 보며 낮게 웃었다.
  그러나 정작 안광익은 두 사제의 화제에 끼여들려 않았다. 허준이 재차 말했다.
  "소인이 잘못 들었나 모르오나 더러 죄짓고 죽은 이의 몸을 관에서 허락받아 장부를 헤쳐보는 그런 일도 있다는 풍문을 들은 바 있사옵니다만."
  "풍문이 어찌 내 지식이 될 수 있으리."
  "...!"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바로 그런 일이 아니리. 더구나 의원으로서 사람의 소장과 육부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욕망이기 전에 당연히 거쳐봐야 할 공부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을 주업으로 삼으면서 사람의 속이 어찌 생겼는가를 모른다면 짚신 신은 채 발바닥을 긁어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오나 그건 아무리 소망하여도 만금을 주고서도 쉬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올시다."
  "그대도 그 말은 더 계속할 것 없네."
  하고 김민세가 말했으나 허준이 계속했다.
  "게다가 인체의 해부란 국법으로 엄히 금하는 바이옵고 이미 죽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느 상주가 가족의 시신을 해치는 것을 허락하려 하오리까."
  "상주 없는 송장이 더러 있지."
  "엉뚱한 소리 말게."
  허준이 다시 물었다.
  "어디에오니까?"
  "내가 아는 어느 장소에."
  "대체 왜들 이러시는가! 농담도 심하이."
  "농담이 아닐세."
  "하오면 그 장소가 어디오이까? 소인도 가볼 수 있는 곳이온지?"
  "너도 갈 수 있느니."
  "하오면 소인도 일차 그곳에 데려다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지."
  의외로 유의태의 대답이 선선했고 김민세의 혀차는 소리에 오금이나 박듯 한마디 더 보탰다.
  "길이 좀 멀긴 하나 일간 내 꼭 기별하여 네 소원을 풀어주리로다."
  말끝에 유의태가 다시 밝은 웃음소리를 냈다.
  다음다음날 산음에서 사라진 유의태의 모습이 상화를 데리고 멀리 밀양 천황산 북쪽 골짜기 속칭 시례빙곡에 나타났다.

    2
  사람의 내부가 어찌 생겼는가를 알고자 하는 의원의 열망.
  어떤 뛰어난 구변으로도 그 내용이 어찌 생겼는가를 형용할 수 없는 것이기에 허준의 기대는 더더구나 컸다.
  "임자 없는 시체를 보여주마."
  임자 없는 시채가 어디 있으며 세상 연고 없는 무덤이 어디 있으랴 여기면서도 그러나 '일간 기별하여 네 소원을 이루게 해주리로다.'라는 그 유의태의 말에 허준은 잠조차 설치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발설한 상대가 유의태가 아니면 애초 기대는 아니 할 얘기였다.
  죽어선 가족이나 친지의 곁에 놓이는 것이 인간의 죽음이요 그 사체는 며칠 몇 달의 호곡으로 전송받아 수의를 입고 잔 속에 들어가 못질을 받고 다시 밧줄에 매여 땅속 깊이 묻히는 것이 운명이다. 그런데 -
  "무덤에서 꺼낸 시체야 이미 혈행이 멎어 장기가 변형되거나 부패했으니 어찌 온전한 공부거리가 되리.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직 땅속에 묻힌 적이 없는 생생한 사람의 내부일세."
  -아직 땅속에 묻힌 적이 없는 생생한 인간의 내부.
  유의태는 또 말했었다.
  "사람의 만병을 다루는 자가 사람의 속이 어찌 생겼는가를 모르고서 병을 운운한다면 그거야말로 짚신 신은 채 발바닥을 긁는 터수와 무엇이 다르리요."
  "살가죽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내부, 그 혈행이며 장기며 골격의 모양새!"
  허준의 입술이 또 메말라왔다. 뜨거운 기대 때문이었다.
  허준이 접한 의서 속에도 장기며 골격의 모습을 적은 부분은 많다.
  중국의 고전인 황제내경 영추의 골도편에 처음으로 해부라는 표현이 보이고 또 한서 왕망전에 그가 왕실의 의술을 주관하는 직에 있을 때 가축 도살의 명인을 동원, 사죄가 확정된 인간을 옥중에서 해부하여 그 내장별로 떼어내어 무게를 달아보고 머리카락 처럼 가느다란 대쪽을 주요 혈관 속에 집어넣어 그 주행을 살피는 등 노력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지식에 의거 동양의학사상 최초로 구리로 표준 인체모형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일명 동인으로 불리는 이 중국 특유의 인체 표준모형은 그 뒤인 송조에 이르러 의학교육의 주요한 교재로 채택되고 다시 당대인 대중 2년에 여의 견소녀가 저술한 오장육부도가 등장하나 그 문자로 형용된 오장과 육부가 결코 필요한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큼 정밀한 것은 아니었다.
  의원이 궁금해하는 피의 흐름과 역할, 내장의 생김과 역할 그리고 뼈의 정밀한 모습 중 가장 확실한 것은 풍장의 습속에 의하여 들에 던져진 시체들이 살이 썩어 떨어져서 남는 그 백골에 의한 골격일뿐이었다.
  '골격은 나도 알아. 하나 내가 정녕 꼭 보고 싶은 것은 아직도 인간의 숨이 남아 있는 인간의 내장이야.'
  날이 밝아오는 닭울음 소리를 들으며 허준은 다시 한번 유의태가 장담한 일간이라 이름대어 말한 그날이 어느 날일지 애태웠다.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니 조바심칠 것 없네. 부조의 산소나 한번 돌아보고 온댔으니 오늘낼 돌아올 때도 됐어."
  병산에서의 피곤한 하루 해를 끝내고 돌아오자 안광익과 느긋이 반주를 즐기던 김민세가 껄껄 웃었다. 자나깨나 이젠 솔선해 의업에 정진하는 허준의 모습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궁금해하는 유의태의 소식이 온 건 다음날 해질녘이었다.
  유의태가 데리고 떠난 상화가 혼자 돌아왔고 그 상화는 궁금히 여기는 김민세와 안광익에게 인사를 마친 후 금시 유의태가 전하는 것이라 하여 서찰 하나를 허준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허준 전이란 간단한 그 석자의 됫장에 자신의 이름도 적지 않은 그 봉함은 그러나 예견했던 서찰이 아니라 한장의 커다란 그리고 꽤 상세한 지도로 '천황산 시례빙곡'이란 일곱 자만 지도 위에 간단히 적힌 것이었다.
  "천황산이 어디며 이 시례빙곡이란 또 어딘가?"
  허준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제야 상화가 갑자기 세상에 그런 신기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며 엊그제 보고 온 그 천황산 시례빙곡의 모습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기 시작했다.
  허준은 의아해졌다. 그건 도시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말복을 며칠 앞둔 이 절기에도 그 산속은 온통 얼음이 정정 얼고 있는 믿지 못할 비경이라며 상화가 사뭇 흥분하는 투였다.
  "이 복더위 속에 얼음이 정정 얼고 있는 얼음골이라니. 핫핫 ... 네가 꿈이라도 꾸고 온 게 아닌가?"
  곁에서 듣고 있던 안광익이 반농담으로 물었으나 제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얼음조각을 입안에 깨물어보기도 했다며 상화가 우겼다.
  여름에 얼음이 어는 계곡-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안광익과 허준과 김민세를 향해 극구 우기는 상화의 얘기도 점차 사실 같았다.
  밀양 경내라 하나 유의태와 주파한 노정은 가지산 따라 석남재 골짜기를 택해서였는데 주변 경개가 기괴하고 수려한 것은 그렇다 치고 그 계곡을 따라 다다른 천황산 중턱 위엔 눈부신 백색 바위가 병풍처럼 이어졌으며 그 골짜기 속은 마치 귀기 같은 냉기가 불어오는데 비오듯이 흐르던 땀이 금시 말라붙었으며 골짜기 속 널브러진 바위 틈새마다 서너뼘 아래 얼음이 뒤덮여 있으며 내려올 때 들어본 석남사 여승의 말로는 그 얼음들이 오히려 겨울과 봄철에는 없다가 일기가 더워지면서 얼음 골짜기로 바뀌는데 다시 그 얼음들은 처서가 와야만 녹기 시작하는 도통 세상 절기와는 거꾸로 가는 희한한 골짜기라는 것이었다.
  "믿을 수 없구먼!"
  안광익이 다시 중얼거렸고 김민세가 물었다.
  "그래 그 천황산 골짜기에 유의원은 왜 찾아갔던가. 예선 부조의 산소나 한바퀴 돌아보고 온다며 떠났던 사람이."
  "소인이야 그냥 챙겨주시는 짐만 지고 갔었습니다."
  "무슨 짐을?"
  "하도 꽁꽁 묶어서 내용까지는 알 수 없고 단단하고 무거운 푼수로는 쇠붙이며 여러가지 연장들 같았습니다."
  "여러가지 연장? 그 산속에 연장은 무엇에 쓰고자?"
  "소인 짐작이 연장 같았다는 얘기고 속은 풀어보지 않았습니다. 암튼 허의원더러 3, 4일 일용할 식량을 싸들고 그곳으로 찾아오라 하셨습니다."
  "그 얼음골짜기로?"
  "예, 병사 일이 바빠도 반드시 오라 하시면서 도착하는 날로 내일 모레 글피 보름날을 넘기지 말라 다짐을 두십디다."
  "예서 밀양이 길이 꽤 되잖는가. 사흘 말미라면 내일 당장 길을 떠나오라는 말 같으이."
  "왜 부르신다든가. 그런 말씀은 아니 계셨던가?"
  "그랬소. 가시는 동안에도 일체 아무 말씀도 아니 계셨으니."
  "갑자기 멀리 밀양땅에 불러내다니."
  "하긴 길 나서면 늘 엉뚱한 일이 많던 사람이지. 한여름에 얼음이 언다니 쉬 볼 수 없는 구경이고 하니 갑자기 구경시켜 줄 생각이 난 겐가?"
  "병사에 병자들이 뒤밀려 있는데 그런 작은일로 불러내는 호사가는 아니지."
  하고 김민세가 허준을 돌아보았다.
  "어쩌겠는가?"
  "떠나겠습니다. 제 요량으로는 ..."
  "뭐 짐작가는 게 있나?"
  "일간 무엇을 보여주시마 하셨사온데 아마도 그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죽은 사람을 헤쳐보자는 얘기?"
  "예."
  "그곳에 그대에게 보여주마던 그 죽은 사람이라도 누워 있다 그런 얘긴가?"
  얼른 상화가 끼여들었다.
  "산속이 온통 섬뜩한 냉기가 떠도는 곳올시다. 죽은 송장도 있을 법하지요. 그것도 하나 둘이 아니고 수백 원귀들이 몰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병사의 급한 병자들을 대충 본 후에 내일이라도 떠나겠습니다."
  "쉬 구경할 수 없는 곳인데 나도 동행을 하리."
  "나도 가보고 싶구먼!"
  하고 김민세가 말하며 유의태가 그려보낸 지관들의 묘혈도 같은 그 지도를 다시 집어들었다.
  허준 일행이 산음을 떠난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날이 가물고 있었고 기다리고 있을 유의태의 몫까지 합친 네 사람의 나흘치 식량을 둘로 나누어 허준과 안광익이 나누어 졌는데 그건 무거운짐이 아니었으나 10리도 지나지 않아 등줄기는 땀이 비오듯 했다.
  그 숨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그러나 허준은 이 한여름에 얼음이 꽝꽝 얼어 있다는 그 천황산 비경보다 유의태가 부른 이유가 틀림없이 자신이 소망하던 인간을 해부해보는 갈망해 마지않던 기회라 믿으며 긴장과 기대에 가슴이 벅차도록 들뜨는 걸 어쩔 수 없었다.

    3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본다!'
  어찌 꿈엔들 기대했으랴. 의원으로서 절실하게 열망했던 인체해부의 기회가 이토록 가까운 시일 안에 자신에게 닥쳐오리라는 것을 ...
  여자일지 남자일지 소년일지 늙은이일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유의태는 호언했었다.
  무덤에 묻히어 이미 여러 날이 경과한 부취나고 오장육부가 졸아든 그런 사체야 어찌 배움에 도움이 되리요 하고.
  혈행이 아직 생생하게 관류하는 인간의 몸.
  살인이라는 범법이 아니고서는 방금 목숨을 거둔 그런 사체를 과연 어디에서 만나볼 수 있으랴 의문을 지니면서도 그 장담하는 이가 유의태였음에서 허준은 유의태의 장담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천금을 주고 살 수는 있되 그 산 목숨을 해부한다는 행위만은 만금을 주고도 허락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을 주선하는 이가 유의태인 것이다.
  생사경계를 오락가락하는 무수한 중병자들을 조석으로 다루는 유의태가 의약으로는 도저히 구치할 수 없는 막다른 생명 하나를 뒤에 남는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아주리라며 죽어가는 목숨 하나를 만금을 주고 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월 모시에 죽을 것을 약속한 생명을 이 세상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손가 ... 추측은 허준의 머릿속에서만 맴돈게 아니었다.
  허준을 불러들이는 장소가 한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특이한 장소이기에 동행해오는 김민세도 안광익도 유의태의 초대를 반드시 인체해부와 연결짓는 눈치였다.
  "이 복중에 단지 자연의 신비한 현상이나 구경하라고 먼길을 불러들이도록 유의태는 호사가가 아니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김민세가 재차 물었을 때,
  "사람은 부술을 잠시 하루 한나절 헤쳐본대서 그 몸속의 구석구석을 다 들여다볼 순 없어. 첫째 목숨이 떨어진 몸뚱이가 이 염천에선 하루도 못 가 썩네. 그걸 감안하여 그 사람은 이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시례빙곡을 찾아낸 게 틀림없어. 아마도 병자는 이 여름을 못 넘길 중한 병자일 터이고!"
  '... 오는 보름날 밤.' 하고 유의태는 분명 시한을 두었었다.
  그렇다면 유의태에게 죽음을 약속한 그 생명은 이미 목숨을 떨구었는지도 모른다.
  자살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목을 매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치사량이 넘는 음독의 방법 또 촌철로 급소를 자해하는 방법 등 ...
  그러나 지금 허준의 머릿속에 비치고 있는 영상은 너무도 섬뜩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목숨을 향해 구원의 손을 뻗치기는커녕 빈사의 생명이 죽음의 고비를 맞아 마지막 몸부림치는 그 단말마적인 광경을 냉엄하게 지켜보는 유의태의 모습이 연상되어 허준의 등줄기엔 자꾸만 식은땀이 흘렀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바라는 품성이 아니기에 자식과도 조강지처와도 인연을 끊은 유의태가 아니던가?
  지리를 물어물어 점차 천황산이 다가올수록 허준의 뇌리에는 유의태의 얼음장 같은 눈빛이 다가와서 떨어지지 않았다.

    4
  밀양 부내로부터 60리. 밀양과 울주의 군계를 이룬 천황산의 수려한 능선을 발견한 것은 일행이 산음을 떠나온 다음날 밤중이었다.
  그러나 시각도 시각이려니와 길이 초행인 일행은 쉬 빙곡을 찾지 못한채 오히려 지름길을 찾는다는 것이 가지산 줄기를 가로질려 석남재를 방황하다가 표충사로 찾아들고서야 밤중에 깨어 나온 사미승으로부터 얼음골의 정확한 위치를 전해듣고 사자평 고원을 타넘었다.
  얼음골에 이른 시각이 별자리로 어림잡아 오경. 마치 백골의 더미인양 유난히도 횐 바위가 널브러진 골짜기는 과연 들어서면서부터 섬뜩한 냉기가 끼쳐왔고 그것은 산속 새벽의 한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미 서천 높이 뜬 달빛이 가파른 계곡의 동쪽 비탈을 파랗게 비추고 맞은편 달그림자 속에선 부엉이 소리가 마치 버려진 아이의 피를 토하듯한 울음소리로 심산의 정적을 강조하고 있었다.
  "오기는 제대로 온 듯하오만 집도 절도 보이지 않으니 이 사람이 어디쯤에서 기다리는지 짐작할 길이 없구먼."
  발밑으로 오싹오싹 기어오르는 냉기에 자꾸만 옷깃을 여미던 김민세가 입을 열었다.
  "일기는 말짱한데 저건 안개인가 구름인가?"
  하고 안광익이 골짜기 위쪽을 지팡이로 가리켰다.
  과연 골짜기를 타고 어디서부터 퍼어나는지 자욱한 안개가 감돌며 다가오고 있었다.
  "입구가 여긴 듯하니 좀더 올라보시지요."
  터져나간 신들메를 다시 죄어묶으며 허준이 말했다.
  다가온 안개가 세 사람을 감싸고 흐르기 시작했다.
  짙은 구름 속 같다가 문득 눈앞이 다사 트이고 그 자욱한 안개의 물방울들이 허준의 이마와 목덜미에 생물처럼 휘감겼다.
  "정말 기이한 장소군."
  안까 속에서 김민세의 소리가 났을 때였다.
  "저기 불빛이 있습니다."
  허준이 가리키는 골짜기 안에 횃불 하나가 마치 귀화처럼 소리 없이 타고 있었다.
  "지세로 보아 암벽 사이에 암자라도 하나 있는 게로군."
  안광익의 대꾸였다.
  그러나 횃불을 앞세워 세 사람이 널브러진 바위틈을 비집으며 머리 위의 횃불을 찾아 올랐을 때 그곳은 두어 채 초가집이라도 들어앉을 듯한 거대한 바위굴 입구였고 암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눈길을 끈 횃불은 굴 입구에 타고 있었고 또다른 횃불 두 개가 굴벽에 꽃혀 물기가 번들거리는 암벽을 비추고 그 아래 한 사내가 느긋이 왕골자리를 깔고 그 위에 반듯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누워 있네."
  "스승님올시다."
  안광익의 말에 허준이 대답했다.
  "사람이 장난이 우심하구먼!"
  그것이 한눈에 유의태임을 알아챈 김민세가 웃음을 물며 앞장서 다가가다 흠칫 섰다.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피냄새였다.
  허준도 안광익도 그 냄새를 맡고 걸음을 세웠다.
  누워 있는 것은 분명 유의태였다.
  그리고 그 모습, 마치 술취한 자가 제 집 안방에 드러눕듯 두 팔 벌려 큰 대자로 누운 그 왼손이 대야에 담겼는데 그 손목히 담긴 대야가 온통 피였다.
  김민세가 유의태를 부둥켜 일으키며 소리쳤다.
  "이보시게! 이보시게!"
  "스승님!"
  허준도 뛰어들며 외쳤고 안광익이 물통 속에 담긴 유의태의 피투성이의 손을 잡아챘다.
  예리한 칼날이 손목의 동맥을 잘라낸 모진 상처 자국이 보였고 피는 아직도 배어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자진했어!"
  김민세가 숨이 떨어진 그러나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유의태의 시체에 눈을 부릅떴다. 
  식지 않은 건 체온뿐이 아니었다. 체내의 피를 쉬 뽑아내기 위하여 대야에 담은 물 또한 아직 다 식지 않은 채 따뜻했다.
  "미쳤어!"
  안광익이 일변 유의태의 허리춤에 손을 넣었으나 멎어 있는 심장에도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허준이 절규하며 유의태의 가슴 위에 무너졌다.
  자결한 유의태의 의도는 곧 알게 됐다. 유의태의 머리맡에는 그가 미리 준비해온 물건들이 여러가지 있었다.
  겉에 먹점 하나도 찍지 않은 두툼한 서찰은 유서였고 상화에게 지어오게 했다는 상자 속에는 유의태가 직접 챙겨온 부술에 사용할 허준이 오늘날까지 듣도 보도 못한 작고 가느다란 톱 그리고 십여 가지가 넘는 여러 형태의 칼들이 어린아이의 기저귀와 같은 헝겁에 일일이 싸져 있었다. 그밖에 치험록이라 적은 네 권의 두터운 책 그리고 장부도와 12경락과 침혈을 그린 신체도 외에 팔뚝만한 황초가 십여 개가 들어 있었다.
  "이미 늦었어. 아마도 우리가 골짜기 입구에 들어서는 걸 보고서야 일을 저지른 듯하이."
  죽음의 고통을 이기려는 의지였을지 아직도 허공을 카악 지켜보고 있는 유의태의 눈꺼풀을 조용히 쓸어주며 안광익이 탄식했다.
  김민세가 유의태가 남긴 봉서의 알맹이를 꺼내 읽다 말고 소스라치듯 허준을 돌아보았다.
  "읽게. 그대에게 보내는 것이네."
  허준이 떨리는 손으로 유의태의 서찰을 받아들었다.
  낯익은 글자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날 병사에서 병자들의 처방을 휘갈겨쓴 그 글자들과는 다른 한자 한자 혼과 기백이 담긴 힘이 어린 행서체의 정자들이었다.
  "허준은 보아라. 내 죽음을 누구보다 서러워할 사람이 너임을 알고 유의태는 허준에게 이 글을 쓰노라!"
  허준의 눈이 붉어왔다. 눈을 부릅뜨며 허준은 계속 읽어갔다.
  "나는 내게 닥쳐오는 죽음을 보았고 기꺼이 그 죽음을 맞이하려 했을뿐 ... 그건 모든 생명의 예정된 길이라 어찌 서러운 일만이리."

  57년 전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바로 이 유의태의 모습이요 57년이 지난 오늘 죽어가는 자가 또한 이 늙고 병든 유의태라는 생사윤회의 법칙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겪어야 할 죽음은 곧 태어나던 때 이미 결정된 모든 인간들의 운명이 아니리.
  운다 하여 어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운명일 것이리요. 그 운명이라는 것.
  소리없이 서서히 어김없이 닥치는 그 죽음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라.
  60평생을 살다 가는 나 같은 자에게야 더 이상 무슨 여한이 있을까마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로부터 이 세상에 유용한 젊은이, 평생 타인을 위해 덕을 쌓은 귀한 인물, 평생 호강을 모르고 고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측은한 인생까지 마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만병의 정체를 캐고 밝혀서 남을 해치고 악업을 일삼는 자가 아니거든 그들로 하여금 천수가 다하는 날까지 무병하게 오래오래 생명을 지켜줄 방법은 없을까 하고.
  이는 의원이 된 자의 본분이요 열 번 고쳐 태어나도 다시 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너무도 간절한 소망이 아니리. 하나 나 또한 내 몸속에 불치의 병을 지니게 되었으니 병과 죽음의 정체를 캐낼 여력이 이미 없다. 이에 내 생전의 소망을 너에게 의탁하여 나의 문도 허준이가 세상의 어떤 병고도 마침내 구원할 만병통치의 의원이 되기를 빌며 병든 몸이나마 너 허준에게 주노라.
  이에 너 허준은 명심하라. 염천 속에서 내 몸이 썩기 전에 지금 곧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어 사람의 오장과 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사람의 몸속에 퍼진 삼백예순다섯 마디의 뼈가 얽히는 이치와 머리와 손끝과 발끝까지 퍼진 열두 경락과 요소를 살피어 그로써 네 정진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노라.
 
  읽기를 마친 허준은 복받치는 감동과 비통함이 다시 유의태에게 엎드려 울부짖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사오리까. 버려진 시체가 있다 하기 기대한 것이옵지 어찌 그것이 스승님인 줄 알았으 ... 리 ... 까."
  무너진 허준의 손에서 안광익이 유의태의 유서를 뽑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허준은 가슴이 터질 듯했다.
  '유의태! 유의태!'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스승의 손목을 움켜쥐고 허준은 숨이 막힐 듯했다.
  지난날 그가 아들 도지에게 말했던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이제야 새삼 허준의 가슴 복판에 마치 불덩이처럼 되살아나 뜨겁게 뜨겁게 담금질하고 있었다. 배워서 흉내내는 재주도 아니며 한 권 책 속에 담긴 지식도 아니다. 스승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죽여 자기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5
  골짜기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다.
  굴 밖 건너 가파른 비탈에 돌출한 낙락장송의 늘어진 가지들이 생물의 머리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날이 새는 바람일세. 마냥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안광익이 동맥이 잘려나간 유의태의 손목에 지혈의 묶음질을 마치며 말했다.
  허준은 보고 있었다.
  유의태의 사체에서 체온이 사라지고 사후 경직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고인의 뜻이 확연하거늘 더 이상 망설이지 말게."
  유의태의 머리맡에 죽은 이가 손수 마련해놓은 해부에 소용되는 연장들을 벌여놓던 김민세가 또 한번 채근했다.
  "이 사람이 굳이 이곳에 와서 숨을 거둔 의기를 헛되이 하려는건가!"
  "하오나 ..."
  "작은 인정에 얽매인 운운 말게!"
  안광익의 눈도 다그치듯 허준을 향해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비록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보기를 열망하오나 그렇기로 제 손으로 어찌 스승님의 몸을 갈가리 칼질을 하오리까. 난 못하오."
  "해야 하리!"
  "이 사람이 지금 그대가 느끼는 그런 작은 인정으로 죽었던가? 이 사람은 그대에게 마지막 자기 몸으로 그대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려 한 걸세. 그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을 외면할 셈인가!"
  "그것은 아옵니다. 그러나 소인은 ..."
  "지금 이 자린 그대가 소인이라 스스로 낮추어 부를 사람도 없으며 자네는 유의태와의 인연에만 얽힌 단순한 문도가 아니네. 그대가 이곳에 불려온 것은 유의태가 그대를 가장 촉망하는 의원으로 선택한 때문일세. 모르시겠는가?"
  "그 말도 아옵니다. 하오나 ..."
  김민세의 다음 말이 허준의 말허리를 끊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대는 특별히 초대받은 사람일세. 자기 자식과도 비교하여 특별히 선택된 사람."
  김민세의 손이 허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난 죽은 이가 생전에 즐겨 뇌던 한마디를 기억하네. 비인부전이란 그 말, 비기자부전이란 그 말, 분명 그대도 들어본 말일 터."
  "기억은 하옵니다. 하오나 ..."
  "유의태 이 사람은 자신의 소신대로 자기가 지닌 마지막 가진 것을 특히 그대를 골라 물려준 걸세. 자기의 목숨, 자기의 몸뚱이를."
  "그것은 그대의 의원으로서 자질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일세."
  "소인도 이제야 그 뜨거운 기대를 절절히 느끼옵니다. 하나 ..."
  "안다면 남은 뒷얘길랑 일을 마친 뒤에 하여도 늦지 않으리."
  허준은 딴때없이 강한 김민세의 그 눈빛을 보았다.
  안광익이 유의태가 준비한 장부도를 그린 족자를 굴 벽에 나뭇가지를 꽂아 걸고 그 눈빛도 허준에게 향해왔다.
  "죽은 이의 뜻을 저버리지 말게. 어찌 이것이 소소한 인정에서 비롯된 일이리요. 보다 큰 뜻이 아니어든 어찌 이런 흉낸들 내리. 이 사람의 죽음은 작게는 그대에게, 크게는 이 세상 모든 이에게 베푸는 은혜일세."
  "그대의 손으로 자신의 몸을 갈라 의원으로서의 그대의 오랜 숙계를 풀고 그로써 그대의 의술이 더욱 정통하고 그대의 손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병자의 고통을 덜어낼 수 있다면 이 사람의 바람은 그것이었으리. 그걸 안다면 스승의 배를 가르고 몸 안을 헤쳐보는 고대의 행동이 어찌 잔인한 행동이라고만 하리요."
  허준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넘치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날이 새기 시작했어."
  해부 연장을 하나하나 점검하던 안광익이 허준에게 또 한번 소리쳤다.
  이윽고 허준의 입이 열렸다.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
  "그렇고말고."
  김민세가 허준에계 강하게 끄덕였다.
  "그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대가 사모하던 스승 유의태의 몸을 가르는 것이 아니요, 이 사람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 모든 이의 몸속을 들여다본다 여겨야 하리."
  허준의 눈에서 눈물이 메말라갔다. 눈앞에 유의태의 백랍처럼 창백한 사체가 금방이라도 입을 열어 말을 걸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 모든 병든 이들을 대신한 죽음 ...'
  "칼을 잡게."
  허준이 마침내 시선을 들었다.
  "그렇게 하오리다."
  "그리고 마음을 먹게."
  "... 마음을?"
  "칼을 드는 것은 사람의 몸속 생김새를 알고 그 속에 찾아드는 어떤 작은 병도 낫우리라는 결심이노라."
  "명심하오리다."
  "그렇게 하여야만 이 죽음이 헛된 것이 아니요. 유의태는 영원히 사는 것이노라."
  "... 명심하오리다."
  잠길 듯하던 허준의 말꼬리가 굳게 악물어졌다.
  이윽고 그 허준의 어깨에서 손아귀를 푼 김민세가 유의태에게 합장했다.
  "극락왕생하시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안광익도 문득 젖은 눈을 들었다. 그러고 지그시 유의태를 바라보는 것으로 친구와의 이승에서의 작별을 마친 후 유의태의 피가 담긴 물통을 들고 굴 밖으로 나갔다.
  허준이 유의태의 시신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지혈이 된 스승의 손을 공손히 잡아 염원했다.
  '이 세상 병고에 시달리는 모든 이의 가슴에 스승님이 영원히 살길.'
  안광익이 물통에 새 물을 담아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김민세도 허준의 곁에 무릎 굽혀 앉으며 자신의 승복을 벗어 친구의 얼굴을 덮은 다음 연장을 담은 함을 새워 그 속으로 촛불 두 개를 옮겼다.
  바람에 일렁이던 촛불들이 불꽃을 곧추 세우면 그 환한 빛을 유의태의 시신 위에 비췄다.
  안광익이 허준의 곁에 앉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 또한 작은 미물이나 가축의 속은 갈라보았을 것이네만 난 일차 수의를 입었던 송장들 몇은 갈라본 적이 있네. 혹 손이 막히면 나도 곁에서 도우리."
  '스승님이 영원히 사는 길.'
  바람소리가 일고 있었다.
  첫햇살을 보고 울어대는지 뻐꾸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허준의 손이 마침내 스승 유의태의 옷자락의 매듭을 하나둘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예도를 쥔 허준의 손끝은 이미 떨리지 않았다.
 
  얼음골에서의 사흘이 지나갔다.
  그 첫날은 함께 밤을 새운 뒤 김민세는 굴 안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그날 밤 관재를 지고 나타나 관을 만들어 굴안에 넣어준 뒤 굴 밖에 나가 끝도 없는 송불을 허공에 보내며 목탁을 두드려댔다.
  이틀째 밤.
  허준의 곁을 떠난 안광익이 저 아래 계곡에 요기를 차려놨노라, 잠시쉬어 계속할 것을 권했으나 허준은 굴 밖으로 나서려 하지 않았고 그 허준에게 김민세도 안광익도 굳이 요기를 할 것을 채근하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황혼녘 허준이 혼자 유의태의 시신을 수습할 제에야 두 사람이 굴속으로 들어왔다.
  허준은 웃옷을 모두 벗고 있었다.
  자기 옷을 벗어 유의태의 시신을 덮어 드린 것이다.
  안광익이 자기의 옷을 벗어 그 허준을 감쌌고 보고 있던 김민세가 조용하게 물었다.
  "다 마쳤소?"
  "..."
  "..."
  "마쳤사옵니다."
  김민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보았소?"
  "... 사람을 보았습니다."
  "..."
  "겉으로만 보던 사람이 아닌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람이 무엇과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 애썼느니."
  김민세가 허준을 쓸어안았다. 순간 허준이 유의태의 관 앞에 꿇어앉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천지신명과 스승님은 제 맹세를 들어주소서. 만일 이 허준이 베풀어 주신 스승님의 은혜를 잠시라도 배반하거든 저를 벌하소서."
  "..."
  "..."
  "또 이 허준이 의원이 되는 길을 괴로워하거나 병든 이들을 구하는 데 게을리하거나 약과 침을 빙자하여 돈이나 명예를 탐하거든 저 ... 를 벌 ... 하소 ... 서. 이 고마 ... 움 ... 맹세 ... 코 ... 영원히 잊지 않으 ... 오리 ... 다."
  말을 마친 허준이 이제야 유의태의 관을 잡고 몸부림쳐 통곡했다.

    [  12. 내의원 ]
    1
  "애비 아적 안 일어났느냐?"
  허준이 밀양 천황산에서 스승 유의태의 유언을 실천하고 돌아온지 나흘째.
  해가 기울었건만 오늘도 자기 방에서 한마디 기척도 없는 아들의 심기가 궁금하여 손씨가 며느리에게 물었다.
  아직도 젊디젊은 부부다.
  사나흘씩 헤어져 있고 보면 없던 정분도 냄직하건마는 돌아온 후 '혼자있게 해주오.' 한 아들의 당부를 좇아 자기 방으로 건너와 있는 며느리가 손씨는 안타까웠다.
  "아직 너무도 혼곤히 자고 있습니다."
  며느리의 눈가에 웃음이 잡혀 있자 손씨는 혀차는 소리를 낼 뻔했다. 아무리 서로가 믿어 의심치 않는 부부간이기로 수삼 일 집 비우고 돌아온 남편에게 궁금증조차 없느냐 싶어서였다.
  "대체 밀양까지 가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돌아와서는 사흘씩 나흘씩 잠만 잔단 말이냐."
  "오늘은 일어나 나오겠지요."
  "사람이 드나드는 기척도 모르고 자기만 해?"
  그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워 있고 싶어서 누워 있을 것이다. 게으른 남자가 아닌 걸 안다. 그래서 작은 기척 한번 더 내보다가 말없이 돌아 나왔을 뿐이다.
  "어디 몸이나 탈난 눈치는 아니더냐?"
  "그렇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삼복 더위 속에 밥 한끼 청하지 않고 잠을 자누. 내 잠시 들어갔다 오마. 뭐 가지고 들어갈 게 없느냐?"
  "... 없습니다."
  손씨가 부엌으로 나섰다.
  "애비야 애비야."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났을 때 허준은 깨어 있었다.
  "원 방문조차 첩첩이 닫고."
  하며 들어온 손씨는 뜻밖에 아들이 깨어 있는 눈을 보자 오히려 당황했다.
  "아니 깨 있었더냐?"
  "예."
  하고 아들이 대답했다.
  그 방문 밖에 자지러질 듯이 장난웃음을 문 남매가 닥쳤고 뒤따라 아내의 얼굴이 다가서는 것이 보였다.
  "아부지 깼다! 와아, 아부지 수염 봐라."
하고 숙영이가 문지방에 매달리며 허준에게 웃었다.
  허준은 어머니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 많이 하신 줄 알고 있습니다."
  "걱정이야 에미가 더 했지. 혹 갔던 일에 몹쓸 일이라도 있었던 것 아니냐?"
  "몹씁 일이라니요?"
  "너는 제 얼굴도 볼 수 없어 모르는 모양이다만 바짝 야위었어. 눈빛부터가 전과 같지 않구."
  -눈빛이 다르다?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 자기의 이 손은 무엇을 한 손인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세상 그 누구도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을 한 손이다.
  그 피! 온몸에 달라붙던 그 스승의 피!
  떠들썩한 남매를 말리며 방에 들어온 김씨도 딴때없이 무거운 눈빛의 남편을 건너보았다.
  순간 허준의 입에선 변명 아닌 예상치 않은 말이 독백처럼 나왔다.
  "사람이란 정말 대단한 것올시다. 상상도 할 수 없도록 사람은 위대한 존재올시다."
  "무슨 일이 있었사오니까?"
  "무슨 소린지 난 ..."
  허준의 대답은 또 엉뚱했다.
  "세상에 사람처럼 크나큰 존재가 없습니다."
  "대체 누구를 만났기에?"
  허준의 퀭한 눈이 잠시 허공을 쏘아보았다.
  "... 좁쌀처럼 잔망스런 인간도 많을 것이요 평생 뜻을 품지도 세우지도 못하는 인간도 있을 것이오. 일차 뜻을 세운 인간은 ..."
  "누구 얘기를 하고 계시오니까?"
  "우리가 알아서는 아니 되는 일이냐?"
  허준이 잠시 어머니와 아내를 건너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무어라고! 설마 ...?"
  "사실올시다."
  "언제오니까!"
  "그분이 왜!"
  "자진했사옵니다."
  고부가 허준의 앞으로 다가앉았다.
  "자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씀이오니까?"
  "나를 위하여 ..."
  "예?"
  "이 허준을 위하여. 내 의술이 더욱 정통해질 기회를 주고자 ... 짐을 졌사옵니다. 너무나 커다란 짐을, 뜻이 나약한 저에게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소상히 말씀해주소서. 너무도 궁금하옵니다."
  "유의원의 정정한 모습을 뵌 것이 불과 바로 며칠 전이어늘 ..."
  "꿈결 같은 일이옵니다. 제가 보고 겪은 일 소자의 입으로는 차마 말하지 못하옵니다. 오로지 한마디 그분이 아니라면 영원히 꿈꾸지 못했을 너무도 귀한 체험을 했다는 그 말 한마디 외 지금일랑 더는 묻지 말아주소서."
  "...?"
  "그 은혜 ... 열 번 다시 태어나도 또 의원이 되리라는 그 높은 뜻 저 또한 이어받아 명심하고 명심할 뿐. 언젠가 이번 길에 제게 있었던 일 조용히 말씀드릴 날이 있사오리다."
  "그렇거든 네가 입을 열기까지 더 묻지 않으마. 하나 유의원의 장사는?"
  "제 손으로 치렀습니다, 밀양 천황산 양지바른 곳에."
  문득 허준의 목이 잠겼다. 나홀 전 천황산을 떠나을 때 허준은 한사코 유의태의 관을 산음으로 모시고 오려 했었다.
  하나 김민새가 말렸다. 안광익도 반대한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얼마 전 안점산에 찾아와 스스로 자신의 묏자리를 보러 다닌다 얘기하며 유의태가 지정한 무덤자리는 그런 소박한 장소였음도 두 사람에게 들었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부는 양지바른 언덕, 생전의 그의 바람이 그러했다 하매 고제야 허준은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천황산 그 이름없는 언덕이 굳이 부조가 묻힌 산음땅보단 유의태에게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여겼고 언젠가 도지가 찾고자 하면 쉬 찾을 수 있도록 스승이 묻힌 지형을 뇌리에 새기고 돌아왔었다.
  생전에 그가 세상에 베푼 인술에 비하면 그 무덤은 너무나 적적한지 모르나 생전의 유의태를 아는 그로서는 온산 가득 만장과 조객이 뒤덮인 호사스러운 장례보다 천황산의 조용한 장례가 고인이 바라는 바라고 느꼈다.
  일차 안점산으로 돌아갔던 김민세가 산음 허준의 집으로 다시 나타난 것은 약속대로 열흘 후였다.
  유의태를 묻고 산음으로 돌아오는 귀로에서 김민세가 허준에게 강경하게 권했던 것이다.
  "의업에 바탕이 될 세상 구경이라니요?"
  처음 허준이 그 말뜻을 못 알아듣고 반문하자 안광익도 기다렸다는 듯이 허준에게 권했다.
  "춘하추동 계절을 따라 각도의 특산 약재가 무엇이며 향약이라 일컫는 각 지방 전래의 처방도 알아보고."
  "그보다 중요한 까닭이 또 있네. 그것은 넓지도 않은 내 땅, 내가 죽도록 살아야 할 이 땅에, 조선팔도 안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 구경을 해 두라는 것일세."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
  "그밖에 소득이 또 있으리. 동서의 지형에 따라 물맛이 다르고 남북의 기후가 다르니 그 산줄기와 강변과 곳곳에 사는 내 나라 사람들의 인심 풍속은 어떠한지, 그 민생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겪으며 세상의 견문을 넓히는 일 또한 장차 세상을 넓게 살아야 할 사람의 빠뜨릴 수 없는 공부로세."
  "진실로 소인도 원하는 바올시다마는."
  "마음만 정해지면 앞장일랑 내가 서리. 한 일년 식구들과 헤어져 살수 있겠는가?"
  "일년이오니까?"
  절간을 찾아 잠을 자고 인근 마을에 내려가 의술을 베풀어 의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덧붙자 허준은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결심을 하였다.
  그렇게 길을 떠난 허준이 멀리 함경도 경원땅에서 내의원 취재 소식을 들은 것은 일년 작정한 그의 여정에 아홉 달을 넘긴 이듬해 봄이었다.
  허준은 그 길로 한양으로 남하, 취재에 응했다.
  그 허준의 태도는 딴때없이 조용했다.
  김민세와의 9개월의 동고동락의 여행에서 세상 물정에 대한 끊임없는 토구가 그가 아는 의술에 관한 지식 외 인간사에 관한 두텁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시켜 주었던 것이다.
  허준은 등방했다. 성적은 수석이었다.
  그때의 허준의 나이 스물아홉, 선조 8년 4월의 일이었다.

    2
  내의원이란 태조 초년에 설치한 전의감을 개칭한 것으로 임금이 복용하는 어약화제를 관장하여 궐내에서도 가장 조용한 예문관 서쪽에 위치한다.
  직책들이 임금과 왕실의 건강을 살피고 지키는 막중한 것이매 일명 내국이라고도 부르는 이 내의원의 진용 또한 삼엄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시임 의정이나 전임 의정 중의 정 1품 한 사람이 맡으며 그 아래에 종1품 또는 정2품의 제조 한 사람이 있고 다시 그 아래 정 3품의 당상으로 부제조를 삼는데 이 제조는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가 겸임한다.
  이 세 정식 문관을 정점으로 실무의 서열과 분담에 따라 내의원정(정3품), 첨정(종4품), 판관(종5품), 주부(종6품) 등이 1명씩이며 그 밑에 직장(종7품) 3명, 봉사(정8품) 2명, 부봉사(정9품) 2명, 참봉(종9품) 1명과 차비대령 할 의녀10명과 종약서원과 도약사령이 각각 2명씩 소속한다.
  이 진용이 매일 번을 맡되 도제조는 5일마다 의관들을 인솔하고 계사로 임금을 비롯 각궁에 문안을 아뢴다.
  의원으로서 취재에 뽑힌 자는 이 내의원 외에 일반 서민백성들의 의약과 치료를 전담하는 궐외의 혜민서가 있으나 갓 취재에 뽑힌 허준은 확정된 부서를 지시받지 못하고 일차 내의원에 속했다.
  그러나 그가 취재의 수석합격자임에서 18품계 제일 꼴찌인 종9품에서 두 품계를 올라 뛴 종8품 봉사직에 제수받았고 구임원으로 지정되었다.
  구임원이란 특정한 기술이나 경험 또는 자격을 인정받은 인물에게 함부로 그 보직의 이동을 금하고 그 임기에 관계없이 재직을 보장하는 취재나 과거의 최고 득점자에게만 해당되는 특혜인 것이다.
  그리고 춘하추동 4절기로 나누어 지급하는 종8품 허준의 춘기의 녹은 쌀과 보리 수수가 넉 섬, 콩 두 섬, 포 한 필, 저화 두 장이었다.
  그 저화는 조선조의 지폐로서 때의 가치가 저화 한 장에 쌀 닷 되를 바꾸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어의의 길을 별러 8년 만에 도달한 길이요 그 첫 녹봉이라는 데서 허준 일가의 감격은 컸다.
  밀양 천황산에서의 유의태의 자결 이후의 지난 1년, 그 허준을 데리고 함께 전국을 유력하던 김민세가 허준의 등방을 축하하며 아들 길상이와 함께 멀리 산음으로부터의 이삿짐을 나누어지고 상경했고 여축이 없는 허준 일가가 도성 밖 애고개와 만리재 중간의 황량한 언덕배기에 삼개 선군들이 살다 버린 움막집을 내 집으로 정하자 그들 부자도 굳이 함께 남아 허준과 함께 강변 갈대를 꺾어지고 와 일변 돌과 흙을 발라 벽을 두르고 내려앉은 구들장을 세우고 토담을 쌓아올리는 등 마치 친자식의 분가나 돕듯이 도왔던 것이다.
  그 여름 한철 지리한 장마가 잇따랐고 빗발이 굵어질 적마다 애고개 쪽에서 황황 홀러내리는 흙탕물들이 허준의 집 토담을 허물고 마당 한귀퉁이도 쓸어나갔으나 그 여름이 지나자 그런 대로 허준의 집도 사람 사는 훈기가 감돌았다.
  노모와 아내가 날이면 날마다 돌을 고르고 언덕을 다져 손뼘만한 밭뙈기들이 개울 주변으로 생겨났고 하절의 녹봉의 반으로 삼개 조선소에서 쓰다 남은 목재를 사서 손을 본 것이 드디어 아래윗간 버젓한 방 모양이 둘이 나왔고 잿간 곁으로도 겸이의 공부방을 하나 달아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초가을.
  봄철내 산비탈에서 옮겨온 돌배나무며 감나무 대추나무 등이 집 주위에 생생하게 살아올라 해질녘 밥짓는 연기라도 나무 사이로 피어오를라치면 멀리 길 가는 행인들이 건너보기에 제법 그 허준의 집은 누대를 살아온 집인 양 정감스럽게 비쳤다.
  "대궐이 저기다! 대궐 봐라."
  상경 반 년이나 되어서 새 옷은 못해 입고 추석빔으로 새 댕기 하나씩을 머리에 묶고 아버지를 따라나선 겸이와 숙영이가 웅장한 남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기가 죽어 있다가 육조 앞 널은 길로 들어서자 전개된 광화문과 그 뒤로 휘황한 대궐 전각을 발견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저쪽에도 대궐있다!"
  내닫는 오라비를 뒤쫓아가던 딸 숙영이도 딴 쪽을 가리키며 뛰었다. 애고개 밤나무숲에 밤도 따러 가고 그 골짜기 바위 밑창에서 가재도 잡는 두 남매에게 유일한 놀이터인 애고개에서 도성은 바로 눈앞이었다.
  그 줄줄이 이어간 도성의 성벽과 경고소리를 아침 저녁으로 들으면서 '서울구경 서울구경' 하고 아이들이 보챘으나 정작 구경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남대문 칠패(장터)에서 다시 감주와 떡을 파는 장사를 시작했고 아내는 아이들을 건사하고 일변 소채라도 한 다발 더 일궈먹을 밭뙈기를 늘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허준이 타오는 녹봉은 일가가 근근이 계량이나 하는 게 고작이니 아직은 겸이에게 한철에 쌀보리 서말짜리 서당에 보낼 처지도 못되었다.
  그토록 그리던 내의원.
  취재에 오르기만 하면 당장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대는 산음에서나 바라보던 허황스런 꿈이었다.
  상감과 왕실의 고귀한 이들의 병을 맡아 그 명예가 하루 아침에 달성될 듯이 여긴 것도 착각이었다.
  나라 안 저마다 내노라 하는 수재와 준재들이 기라성처럼 모여 저마다 와신상담 자기의 재주를 갈고 벼르며 의원 최고의 영예인 어의의 자리를 넘보는 보이지 않는 암투의 격전장이 내의원이었다.
  "저자가 허준일세!"
  돌아보지 않아도 하얗게 눈흘기는 그 질시의 수군거림이 허준의 등뒤에서 늘 들려왔다.
  "역대 수석자 중에 동인경 말고 구급방과 부인대전까지 배강했다는 건 저자가 처음이라네."
  "... 음 ..."
  듣고 있던 상대가 신음했다.
  내의원 취재의 과목에서 동인경의 배강(책을 펴놓되 돌아앉아 외우는 것)은 필수과목이다. 그러나 다른 고사서인 창진집 직지방, 구급방, 부인대전, 득효방, 태산집요는 임문이라 하여 외우지 못하면 그 일부를 보고 읽는 것을 허용한다.
  "한데 저 허준이란 자가 모두 배강으로 꿰뚫었단 말인가?"
  "시관으로 임석해 있던 이공기의 말이니 거짓일리 없지, 그리고 이건 정예남 그분한테서 나온 얘긴데 지난해 봄 한양 연도에 퍼졌던 소문, 충청도 진천땅에서 웬 시골의원이 빈민들의 병을 그냥 돌봐주었단 얘기 ..."
  "그 얘긴 나도 알지. 그자의 이름도 허 무엇이었는데!"
  "허 무엇이가 아니라 바로 저 허준이 그때의 그자였다네."
  "그래!"
  "순 미친놈 한 놈이 내의원에 나타난 걸세. 게다가 수석 특혜를 받아 우리보다 3, 4년이나 늦게 들어온 놈이 품계는 맞먹게 8품을 받았으니 앞으로 우리 앞길에 좨나 걸리적거릴 놈이 틀림없어."
  "글 잘 읽는 놈이거든 사역원 취재나 보고 역관으로나 풀릴 것이지 어쩌다 저런 놈이 내의원에 들어온 건지."
  말끝에 사내가 잇새로 침을 찍 갈겼다.

  "저기가 혜민서요."
  하고 허준이 우측으로 종로로 꺾이는 길목에서 서소문 쪽으로 선 건물을 가리켰다.
  허준의 아내가 남편이 손짓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에는 혜민서란 커다란 현판 외에 또 하나 작은 현판에 뛰어난 달필의 글씨로 의약동참이라는 넉 자가 보였다.
  "전에는 오가며 지리를 알았는데 한양도 하도 오랜만이라서 ..."
  김씨가 행인이 멀어지자 남편에게 말했다.
  한양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생각하면 모두 낯익은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은 다시는 못 오리라 여긴 한양거리에 관복 입은 남편과 나란히 서 있다는 감격에 또 다른 감개가 담겨 있었다.
  "이편 작은 현판의 글씨가 개국하고 이 나라 최초로 의원 취재의 고시관이던 정도전의 필체요."
  "저는 잘 모르는 성함올시다."
  "태조를 도와 개국의 일등공신이던 사람이오. 이 도성과 궁궐의 이름들도 그 사람이 짓고 명명했다 하오. 하나 그뒤 그 사람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후 태종이 역적의 흔적을 모두 없애려 했으나 용케 남아 있는 몇 개의 현판 중의 하나라 하오."
  넓은 길을 뛰닫고 있던 두 아이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직처까지 가보려오?"
  "그러고 싶습니다."
  "가야 대궐담에 가리어 지붕밖에 보이지 않소만!"
  김씨가 두 아이를 손짓해 불렀으나 마침 요란한 벽제소리와 함께 고관의 행차가 길을 가로지르자 남매는 다시 넋을 빼고 그 행치를 구경하다가 행차가 지나자 달려왔다.
  허준이 앞장서고 4, 5보 뒤에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조용히 따랐다.
  오랜만에 일가의 행복한 나들이였다.

    3
  선조 8년 10월.
  허준이 내의원의 일원이 된 지 어언 반 년, 궐내는 추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가을빛이 아름답게 물든 조정은 평화롭지 못했다. 전년 7월 당쟁 발생의 씨앗의 한 사람인 김효원이 전랑 자리에 앉음으로써 그를 반대하는 심의겸과의 대립이 1년여에 이르러 마침내 조정을 동서로 붕당케 하는 사건이 표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사태의 심각함과 당쟁의 폐해를 우려한 조정 원로들인 우의정 노수신과 부제학 이이 등이 양파에 대한 조정책으로 양파의 핵심인 김효원을 부령부사로 심의겸을 개성유수의 외직으로 내보내 사태 수습을 꾀했으나 서로 떠난 지역이 누구는 멀고 누구는 더 가깜다 하여 조정 안의 분위기는 아직도 소란했다.
  그러나 조정 안의 그 '대사건'도 출신 신분이 어엿한 잘난 문관들의 세계다.
  내의원에 소속하여 6개월. 아직 확실한 보직을 받지 못한 허준은 허구헌날 내의원 안팎 청소와 수목 가꾸기 그리고 궐내 지리, 궐내 법도, 궁중 법도, 그밖에 상감 이하 각궁의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종친부에 속한 분들을 대할 때의 예의범절과 궁중에서만 사용되는 용어 익히기에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궁중의 용어에 있어선 허준이 처음 접하는 어렵고 난감한 말들이 많았다.
  상감을 비롯 왕비, 세자 그 붙이들에게는 으레 마마가 붙어 '상감마마' '중전마마' '세자마마'였다. 그 마마란 중국에서 건너온 왕족의 남녀에게 붙는 최대 최고의 존칭임도 허준은 알았고 그 '웃전마마'들에게 얽힌 모든 난삽한 표현 또한 새로 배워야 했다.
  귀는 이부, 눈은 안정, 눈썹은 안정썹, 눈물은 옥루로-
  이마는 액상, 손은 어수 또는 옥수, 손가락은 수지, 발은 족장, 콧물은 비수, 머리는 마리, 여성의 월경은 환경, 방귀는 통기 ...
  또 그 육신에 걸치는 물건들 또한 어렵기 그지없는 말들로 옷은 의대, 옷감은 의대차, 바지는 봉지, 옷고름은 대조, 버선은 족건, 이불은 기수, 이불잇은 기수잇, 왕의 신은 치, 땀은 한우. 피는 피라 부르지 않고 반드시 혈로 부르며 오줌은 지, 똥은 매우, 왕과 왕비의 식사는 수라인데 아침은 아침수라, 점심은 점심수라 혹은 낮것이라 부르고 김치는 젖국지, 숟가락은 시저, 젓가락은 저, 약은 탕제.
  그밖에 수없이 어려운 표현은 계속되어 '약을 드시다'는 '탕제를 진어하시다', '양치질하오시다'는 '수부수하오시다'이고 '세수듭시다'가 '세수하신다'이며 '기노하시어'는 '화가 나시어'이며 '왕이 편찮으시다'를 '상후가 미령하시다' 또는 '문안이 계오시다', 임금의 표정이나 기색을 일러 사색, 화난 표정을 엄색 등 말 한마디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비록 엄숙한 왕실이라 하나 그 어려운 말과 표현은 내의원 취재 때의 성적보다 더욱 중시하여 의술은 인정이 되었어도 처음 6개월 동안의 유예기간 중에 이 궐내 생활의 규범과 언동을 익히지 못하거나 이수하지 못한 자들은 가차없이 등방이 취소되며 궐밖으로 축방되었다.
  그 유예기간의 6개월을 허준은 하루같이 여느 관원들과 꼭같이 묘시(상오 5시부터 7시)에 출근하고 유시(하오 5~7시)에 퇴근했고 등방자 8명 중 3명이 쫓겨나는 속에 끼지 않고 무사히 유예기간을 통과하여 정식 내의원 관원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이 6개월 동안 허준은 지난해 내의원에 들어온 스승 유의태의 일점 혈육인 도지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임해군의 처소에 배치되어 있음을 알았으나 서로 오갈 길이 없어 만나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같은 내의원 소속이요 제법 근년에 없이 과장이 떠들썩했던 자신의 등방이었으므로 그가 자기의 상경을 못 들었을 리 없으련만 도지 쪽에서 찾아와 주지 않고서는 자신이 함부로 도지를 만날 수 없음을 알았다.
  임해군의 처소 중 그가 상주하다시피 하는 별궁이 궐 밖 수진방에 위치해 있음을 들었으나 같은 내의원이라 해도 자기 같은 신출내기 의원이 사사로운 일로 찾아가봤자 함부로 문을 통과할 수 없도록 왕자궁의 경비가 지엄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좋은 얼굴로 헤어진 사람도 아니요 그가 찾아와 주지 않는다먼 당장은 만날 길은 없을 것이로되 그러나 허준은 그가 허락한다면 도지와의 교분을 두터이 하고 싶었다. 그 부자가 헤어진 연유를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부자지간에 생사는 알아야 하지 않는가 싶어 지난해 김민세와 나라 안 유력을 떠날 제 한양을 지나치면서 허준이 방자를 사서 아버지의 타계를 전해준 바 있으나 도지가 그 서찰을 받았다는 반신은 아직 받아보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인 자기보다 허준에게 있음을 알았을 때의 친자로서의 도지의 절망이 어떠했을까를 왜 짐작하지 못하리요마는 그러나 아버지의 유고를 마냥 모른 체하도록 독할 수 없는 것이 부자의 인연이 아닐는지.
  그가 자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허준은 도지에게 알려야 할 것과 전할 것이 있다.
  첫째는 밀양 천황산에 묻힌 스승의 무덤자리요 또 하나는 그 유의태의 몸으로 이루어진 해시지를 나누어주고 싶은 것이다.
  죽은 유의태의 몸을 소재로 이루어진 그 해시지. 도지로서는 죽은 아버지의 그 구석구석을 학문으로 읽고 새겨갈 심정일 수는 없을지 몰라도 허준은 그 귀한 기록만은 설령 그것이 죽은 이의 뜻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스승의 아들에게 한 부 필사하여 보내 주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그토록 온몸을 던져 의술의 눈을 더 높이 뜨게 한 스승의 아들과 하나의 정의로서도 친분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
  자신의 유예기간인 지난 6개월간 도지를 만나지 못했을지라도 만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건 새로 들어온 의원들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새 보직을 내릴 때면 이를 기회로 지난 1년 동안 정체되어 있던 내의원의 정례 인사이동이 실시되기 때문이다. 일단 정식 임명된 관원들의 기본 근속기간은 최소 45개월로 묶은 것이 국법이다.
  본인의 실수나 사사로운 사정에 의하여 그 45개월 전에 직위를 떠날 경우 그 직위의 경력은 인정되지 않으니 내의원 의원이었노라 혹은 대궐에 드나든다 하여 자랑도 섞어 자칭 궁의라고도 뻐기는 그 경력을 자타 공히 인정받기 위해선 싫어도 45개월 근속의 실적이 있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그 기본 45개월만 지나면 보다 높은 어의에의 출세를 단념한 인물들 중엔 부모의 상을 당했느니 자신의 건강이 어떠하니 하여 내의원을 떠나는 자들이 속출한다.
  더 이상의 출세를 포기하고 환향하여 궁의였노라는 자랑과 명예로 돈방석에 올라설 수가 있기 때문에 ...
  그러나 그 45개월을 채우기 전의 내의원 생활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려 있으니 어전에 드나드는 명예는 결코 쉬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병하고 대우 좋은 왕자궁이나 공주궁에 배치되리란 행운도 흔한 것이 아니다.
  그 내의원 의원들이 지옥으로 표현하고 기피하는 혜민서 근무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말 많은 병자들, 왕자궁 공주궁에서 수시로 내려주는 귀한 음식에 온갖 별식은커녕 계란 한 개 따로 들고 오지 않는 백성이라 불리는 무지렁이 온갖 병자들이 찾아와 낮이나 밤이나 득시글거리고 매달리며 울부짖는 소란한 혜민서를 맡아보는 것도 내의원 의원들이고 보면 1년마다 실시되는 이 인사이동은 내의원 의원들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리는 가장 긴장된 날이었다.
  자연 그날을 앞두고 누가 어디로 가며 누가 어디로 오고 그리곤 누구 누구는 혜민서로 떨어진다고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에 가슴이 철렁거리고 기대에 부풀어보는 날이기도 했다.
  "그럼 그날은 내의원에 소속된 의원들은 모두 이 자리에 모이오니까?"
  "물론이지. 양대감의 방침으로 삼의사라 일컫는 전의감, 내의원, 혜민서의 모든 6품 이하의 의원들이 그날은 모두 모여 누가 누구다 얼굴을 익히는 날이자 새 보직을 받아 천당과 지옥으로 갈려가는 이별의 날이기도 하지."
  웃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마른침을 삼키며 아직도 열흘 후의 일인데도 너나없이 긴장된 얼굴들이었다.

    4
  삼의사가 한데 모이는 날이 왔다.
  이날 주거가 사대문 밖에 있는 삼의사의 6품 이하의 관원들은 너나없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섰고 허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천당이냐 지옥이냐 오늘 변경되는 보직에 따라 앞으로 1년 동안의 직처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 생살여탈의 이동권을 쥔 사람은 도제조 노수신과 어의 양예수다.
  아니 도제조는 명목상의 총괄자고, 삼의사에 배속된 각 의원들을 일일이 평점해 아는 이는 양예수이니 그가 내정한 인물을 도제조는 동의할 뿐이다.
  북한산에는 호랑이가 많고 내의원엔 양예수가 산다고 할 만큼 삼의사에 있어서 양예수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다.
  10월도 하순, 초겨울의 절기를 연상케 하는 새벽 기온은 발을 동동거리도록 시렸다.
  그러나 아직도 어두운 남대문 성벽 밖에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인물 속에서 허준과 눈이 마주친 같은 내의원의 몇 의원은 허준의 눈인사를 못본 체했다. 이 첫새벽에 등원하는 까닭은 관례대로 이날은 삼의사의 의원들이 모여 양대감(그는 정3품 당상관으로 통정대부다)이 직접 주관하는 회집에 앞서 내의원 안팎을 청소하는 일이나 날이 날이요 상대가 상대인만큼 저마다 남보다 일찍 등원한다는 그 긴장감으로 해서 어느덧 해마다 이날은 삼의사의 의원들이 꼭두새벽부터 대궐로 달려가는 이상한 날로 바뀐 것이다.
  인사하지 않는 사람의 심정도 허준은 알고 있었다.
  연치로 따지면 그 정명보는 자기보다 2년 먼저 내의원에 들어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해 취재에서 네째의 순위를 받은 사람으로 관원의 첫품계에서 한 품계 올라선 정 7품 부봉사요 허준은 비록 올해 새로 들어온 신출내기이긴 해도 수석의 특전으로 두 품계를 뛰어 2년 전에 들어온 그보다 오히려 한 품계 높은 종8품 봉사인 것이다.
  그런 후배이되 품계가 상관인 허준을 공연히 무시하듯 못본 체하는 자는 비단 정명보뿐이 아니다.
  그런 부자연한 감정을 떠나 허준에게 동료로서의 우정을 보인 것은 지난 6개월 동안 지금 허준과 품계가 같되 햇수로는 3년 선배인 이명원과 1년 선배이되 벼슬의 품계 따위 개의치 않고 "잘난 체할 것 없다. 의원으로 풀린 놈은 너나없이 태생이 상것 아니냐"며 소탈한 이공기가 있을 뿐이다.
  이윽고 기다리던 쇠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밤사이 도성내의 통금이 풀리는 오경삼점 파루소리였다.
  삼의사의 의원들이 다투어 달려가는 곳은 내의원 정청 뜰이었다.
  그 내의원 정청 뜰이 삼의사 중 가장 넓고 조용한 때문이다.
  그 정청에 이르는 제 1문 위에는 입심억석이라는 의원들에 대한 명구가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50여 보 안쪽 정청 높은 큰 현판에는 화제어약 보호성궁이라는 내의원의 존재 이유를 강조한 여덟 자가 압도하듯이 내의원 뜰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제 희붐한 새벽이 시작되는 시각인데 그 내의원 제 1문에서 정청 뜰까지가 왁자지껄했다.
  삼의사의 6품 이하의 의원들과 각사에 속한 종약서원, 도약사령들 그리고 각사에 차비대령하는 의녀 20여 명까지 남녀 60여 명이 끼리끼리 곳곳에서 불을 밝혀 걸레질을 하고 비질을 하고 오랜만에 만난 회포와 보다 편하고 나은 곳으로 배치되어갈 오늘의 운세에 기대하며 수런거리는 모습이었다. 한 차례 비질이 끝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정청의 곳곳과 촘촘한 문살에까지 걸레질이 남았을 뿐이지만 비질이 끝난 마당에는 잇따라 낙엽이 날리곤 하여 묘시에 시작 될 회집까지 삼삼오오 모여서서 잡담하는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허준은 정명보와 맡은 정청 양대감이 좌정할 자리에 일차 걸레질을 마친 후 미처 손도 씻기 전에 도지의 모습을 찾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도지는 제 1문의 현판에 걸레질을 하다 말고 다가서는 허준을 발견하고 동작을 멈추었다. 주변 동료들과 농지거리를 할 만큼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으나 상대가 허준인 걸 알고도 별로 반가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붙었단 소문은 나도 들었네."
  거두절미한 그 말이 허준에 대한 도지의 첫말이었다.
  허준이 말했다.
  "임해군 처소에 있다는 소식은 알았소만 함부로 갈 수 없는 곳이라기 만나뵙지 못했소. 댁내 다 무탈하시온지?"
  "그냥 그렇게 지내오."
  그 말뿐 도지 족에선 허준의 가내에 대한 안부는 물어오지 않았다. 더불어 길게 얘기하고픈 흥미도 없는 얼굴이었다. 허준이 다시 물었다.
  "... 지난해 스승님의 유고 소식을 인편에 보냈었는데 받아보셨는지?"
  "... 보았소."
  도지의 대답은 짧았다. 그리고 허준이 다음 말을 기다리건만 더 부연 할 기색이 아니었다.
  허준이 도지에게 말했다.
  "저번 솔가해 상경하기 전 나 혼자 산소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왔습니다만 언제 말미 내어 함께 내려가야지 않겠습니까."
  "그게 쉬운가, 나도 그대도 이미 내의원에 매인 사람인데 서로가 똑같이 말미를 얻어내기가."
  "그것도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제 직처가 정해지면 윗분께 아뢰어 사모님과 두 분을 모시고 내려갈 결심으로 있습니다. 말로 이르거나 글로 적어서는 산소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므로."
  "그토록 찾기기 어려운가?"
  "스승님이 원하시던 곳에 산소를 썼습니다."
  "그래도 산이면 산 이름이 있고 웬만치 일러주는 산 형세로 찾으면 산소가 있는 골짜기를 찾을 수 있다 여기네만 ..."
  "그렇긴 합니다만 저 또한 이미 한철이 지났으니 한번 더 찾아뵐 때가 됐습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다행히 당신이 좋아하던 제자가 임종을 지켰다니 그분으로서도 큰 여한은 없겠지?"
  "..."
  "가보게. 그리고 오늘 서로의 직처가 정해지면 그때 조용히 의논하세."
  "그렇게 하오리다. 사모님께 문안 대신 아뢰어주십시오."
  도지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이 정청 쪽에 올라오자 팔짱 낀 이공기가 뒷짐진 이명원에게 이기죽거리는 눈으로 무슨 얘기를 하며 서 있었다.
  허준이 그 곁에 서자 이공기가 동의나 구하듯이 허준도 돌아보며 말을 계속했다.
  "대궐 대궐 말로만 듣던 대궐, 하나 난 내의원에 소속한 지 2년 동안 상감마마의 용안이 어찌 생겼는지 먼빛으로도 못 봤어. 바로 코앞이 상감마마께서 계시는 대전인데도. 그 까닭은 난 오늘사 이 사람 저 사람 속닥거리는 소리를 주워듣고 깨달았어."
  "오늘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주워들은 얘기란 뭔가?"
  "까닭이 있다는군. 양대감이 자기가 택한 사람이 아님 누구 하나 대전의 부름에 끼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네."
  "자기가 택한 사람이 아니면 끼어주지 않다니!"
  "어리숙한 건 자네도 마찬가지였군. 우리 세 사람만 귀가 먹은 벽창호였다 그 말일세."
  "들은 얘기란 걸 자세히 하게."
  "저도 듣고 싶습니다만."
  하고 허준이 끼여들자 이공기가 내뱉었다.
  "그댈 수석으로 뽑힌 구임원 아닌가. 그대야 누구 눈에도 띄는 사람이니 족히 걱정할 거리가 아니나 나나 이 사람은 이놈의 곳이 온갖 낮도깨비가 우글대고 눈치나 뒷손질 잘하는 놈만 살아날 수 있는 복마전일 걸 오늘사 알았다 그 말일세."
  "복마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네. 생각해봐. 대전 출입은 못 바랄값에 누구는 내내 몸 편하고 기깨나 쓰는 왕자궁이나 공주궁에서 마흔다섯 달 세월아 네월아 보내는데 어느 놈은 처음부터 혜민서로 떨어져 떡 하나 생기지 않는 무지렁이 백성들 피고름이나 짜주고 그 세월을 견뎌야 하니 그게 미운털 박힌 놈 안 박힌 놈 구별당하는 게 아니고 뭔가."
  "대체 누구 입에서 나온 얘기니까?"
  허준이 물었을 때 갑자기 제 1문 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고 곧 "양대감이 오오." "어의께서 납시오!" 하는 다급한 소리들이 전해왔다.
  일동이 서둘러 제 1문과 정청에 이르는 길 좌우로 달려가 도열했다.
  그러나 숨을 죽이고 기다려도 아직 허준의 위치에서는 양대감의 모습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나가셨어."
  하고 갑자기 제 1문 첫머리에 섰던 그중 품계가 높은 정 6품의 손두석이가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읍해 섰던 양손을 풀었다. 좌중이 다시 떠들썩하니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5
  그날 내의원 인사는 연기되었다.
  이른 아침 내의원 정청 앞을 통과한 양예수는 한낮이 지겹도록 다시 오지 않았고 그 어의를 주야로 수행하는 유의(양반 신분으로 의원을 자원한 자) 정작이 해가 뉘였거리는 시각에야 나타나 오늘 갑자기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에게 급환이 생겨 어의가 그곳으로 달려갔으므로 공빈의 병세가 회복되기까지 내의원 인사는 연기되리란 통보를 했다.
  인사를 기다리며 새벽부터 몰려들었던 궁의들이 갑자기 와글거리며 흩어졌다.
  그 와글거리는 소리와 한숨 묻은 소리들을 허준은 듣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건 허준에게는 실망 어린 말들이었다.
  대궐이라 하여, 내의원 의원들이라 하여 그들의 존재를 높이 우러러 존경의 염으로 보려 한 건 성급한 판단 같았다.
  그곳이 남대문 칠패의 장시 바닥이 줬건 구중궁궐 깊은 대궐 안이 됐건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생각하는 갈래는 별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안 것이다.
  감히 왕실의 누구가 아프기를 바랄 수야 있으랴만 그러나 의원으로서 자신의 재주를 펼쳐보이는 유일한 길은 그 재주를 시험할 대상이 있어야 할 것이요 내의원 의원인 그들의 대상은 오로지 왕실과 그에 딸린 종친부의 누군가 앓아눕는 기회를 잡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고귀한 이들의 병을 맡을 기회는 어의의 허락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일동의 이구동성이고 보면 내의원의 정체된 인사가 뚫리기 위해서는 양예수의 그 절대권력이 무너지거나 온갖 수단으로 그의 눈에 들어 기회를 할당받는 길뿐이었다. 또 그 기회란 것도 다행히 자신의 전공분야의 병을 앓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요행을 바라야 하고 또 다른 기회를 감히 넘본다면 시탕을 지정받은 선배가 병세를 빨리 회복시키지 못하거나 실패할 때라야 호명의 기회가 돌아올 뿐이다.
  차라리 모르니만 못한 그 숨막힐 듯한 내의원 사정을 한귀로 흘리며 직처로 돌아가는 허준에 말없이 다가선 것은 뜻밖에도 도지였다.
  "인사가 연기됐다는데 왜 아니 돌아가고 있었소?"
  "나하고 얘기 좀 하세."
  주변의 이목을 신경쓰며 도지의 안색이 긴장돼 있었다.
  그 도지가 허준의 소매를 끌며 정청 넓은 뜰, 한여름이면 내의원 마당에 가득 그늘을 지우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세웠다.
  "무슨 얘기요?"
  "함부로 믿을 인간이 없어 나 혼자 속을 앓고 있는 일인데 ..."
  "말하오."
  "이번 인사에 난 십중팔구 혜민서에 떨어진다 여기어 단념을 하고 있었지만 인사가 잠시 연기되었다는 건 천만다행으로 여기네."
  허준은 의아했다. 첫새벽부터 달려와 기다리던 인사가 연기된 사실이 천만다행이란 무슨 뜻이란 말인가.
  "나하고 편을 짜세."
 하고 도지가 말했다.
  "편이라니?"
  "그대도 귀가 달린 사람이니 이미 이 내의원의 속사정을 아니 들었을리 없지 않나. 그러니 이놈 저놈 눈이 맞는 자들끼리 편을 짜고 도는 판에 우리도 대책을 세우잔 의논일세."
  "난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겠소만."
  "그대가 제일 가고 싶은 직처가 어딘가?"
  "그거야 우리 임의로 선택할 순 없지 않소."
  "그걸 알면 됐네. 내 말을 귀담아듣고 즉답하게."
  "...?"
  "우리처럼 경험이 일천한 의원들이 언감생심 아직은 대전 출입이야 꿈도 꿀 처지가 아니네만 그러나 혜민서에 떨어지는 수모만은 무슨 수를 써도 면해야 하지 않겠나."
  "혜민서에 떨어지는 것이 수모란 말이오?"
  "사람 잡는 곳이 혜민설세. 제 푼수로 변변히 의원 하나 못 부르는 장안의 온갖 가난뱅이들만 몰려드는 곳이니 그 참상이야 말해 뭘 해. 그곳은 상시 야간직숙의 번이 있어 근무의 반은 집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온갖 병치다꺼리에 밤샘을 밥먹듯 하는 곳이 그 혜민서랄밖에."
  "오가는 얘기 몇 마디 주워들었소만 ..."
  "들은 얘기가 아니라 난 나하고 함께 내의원에 들어온 인물과 말동무가 됐기에 그 사람이 배치받은 그 혜민서엘 수차 찾아가 내 눈으로 봤어. 그리고 그 사람은 반 년을 못 채우고 혜민서를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버렸고. 도대체 그 혜민서에 찾아오는 것들이란 먹을 걸 제대로 먹는 것들인가 입을 걸 철따라 갈아입는 것들인가 그저 떠드느니 약을 달란 아귀다툼에 더구나 초기 증세 때 오는 자는 거의 없고 너나없이 깊은 병에 이르고서야 찾아오는 자들이라 죽네사네 울고불고 온종일 악머구리 들끓듯 소란한 곳이 그곳이야."
  "..."
  "하나 혜민서 이외에는 모두가 왕족들의 사저나 별궁이라 어딜 가도 호강이 넘치지. 생각해보게. 평소 보약을 지천으로 대먹던 분들이니 쉬 병드는 분들도 안 계실뿐더러 사철 한번씩 능 행차에 따라가는 게 고작이요 공주궁이나 윗전마마들의 처소에 배치되면 봄 가을에 온정(온천) 요양에 쫓아가는 게 달세. 그밖에 할 일이란 한장 반씩 내의원서 지정하는 의서나 읽고 한 달에 한번 그 쌓은 학문을 점검받는 것 왼 누워서 떡먹기야."
  "그래서?"
  "그러니 내 말은 인사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보면 사정이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집에 돈냥이나 모은 게 얼마나 있던가?"
  "...!"
  "세상 굿거리를 왜 하나! 귀신도 얻어먹고 나면 길을 비킨다 해서 굿판을 벌이는 게 아닌가. 사람도 마찬가지."
  허준이 문득 웃었다.
  "가진 돈도 없거니와 있다 한들 내키지 않소. 그리고 ..."
  "그리고!"
  "갓 들어온 신출내기로서 혜민서도 일차 겪어야 할 곳이면 피해 갈 생각 없고."
  이번에는 도지가 웃었다.
  "난 이미 임해군 사저에서 1년을 지냈으니 이번 인사에 반드시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게 뻔하고 미리 손을 안 쓰고서는 혜민서에 떨어질 게 뻔 해. 또 나뿐 아니라 그대도 위험한 것이 비록 취재의 성적이 출중했다하나 그대가 유의태의 문도임이 소문난 이상 양대감이 결코 그대를 잘 볼 리 만무네."
  "스승님과 어의와의 과거의 인연은 김민세 그분으로부터 들은 바 있으나 어의께서 여태 그런 티를 내오?"
  "그렇네. "
  "이십수 년 전에 있었다는 그 일을 아직도 말이오?"
  "나는 나를 처음 보던 그 사람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
  "그 눈빛은 나도 보았소만."
  "신참의원들에게 의술에 관한 몇 마디 대구를 놓아 의술의 정도를 떠보고 그 가계에 대해 직접 확인하는 건 누구에게나 하는 일인데 산음이면 유의태란 성명을 아느냐는 말에 그분이 내 가친이노라 대답하자 그대로 입을 다물더니 그 뒤로는 얼음장 같은 눈으로 건너보기만 할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어."
  "양예수 그 사람이 내의원에 버티고 있는 한 내의원에서의 내 출세는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네."
  "하나 그 눈빛이 정녕 스승님과 연관지어 미워하는 것이었다면 어찌 애초 유의원을 혜민서에 보내지 않고 오히려 남들이 부러워하는 임해군 사저에 보내주었으리까?"
  "천만에!"
  도지가 완강히 부인했고 고개까지 저었다.
  '어의 양예수!'
  양예수의 얼굴이 허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기억난다. 파장에서 답안이 완성된 표시는 고시지를 접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면 되었다.
  그렇게 일어서 있으면 취재자들 사이를 간시하며 오락거리는 시관이 와서 그 답안지를 봉투에 넣고 봉한 후 취재자가 보는 앞에서 시권에 적힌 취재자의 관향과 성명을 적어 회수해가면 칠재자는 퇴장하는 순서다.
  그날 과장에서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 허준이었고 그 허준에게 과장의 눈길이 일제히 쏠려온 걸 허준은 기억한다. 그리고 가까이 서있던 수염이 유난히 아름다운 50대의 인물이 그 허준의 답안지를 받아든 후 시권에 적힌 출신지를 유심히 보던 끝에 묻던 말을 ...
  "산음이라 ...?"
  "그러하옵니다."
  "의업은 몇 대인고?"
  "소인이 처음이옵니다."
  "누구에게 배웠느냐?"
  "스승님의 존함이 유의태이옵니다."
  일순 묻고 있던 사내가 정지한 듯한 짧은 침묵을 허준은 기억한다.
  허준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수염이 아름다운 시관은 이미 돌아선 후였다.
  그리고 그가 어의 양예수임을 안 것은 주일의 수군거림에서였다.

    6
  양예수란 성명 앞에서 두 사람의 침묵이 한참 길었다.
  "그래서 내 제의네만 만일 가진 돈냥이 없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으니 함께 찾아가보지 않겠나."
  "가서?"
  "고개를 숙이고 지난날 아버지의 지나친 점을 사과하고."
  "사과라니?"
  "내가 유의태의 자식으로 태어난 건 악연이었어. 죽은 뒤까지 내 앞길을 가로막아."
  허준이 차갑게 도지를 봤다.
  "그 집을 내가 알고 있네. 간다 해도 직접은 만나지 못할 터이나 안방 쪽으로 줄을 대어 소상히 사정을 얘기하면 ... 왠가?"
  의녀들의 비질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의녀들의 머리 위로 은행나무의 황금빛 낙엽이 내리고 있었다.
  허준이 고개를 저었다.
  "갈 생각 없소. 혜민서가 그토록 많은 병자가 찾아드는 곳이면 나는 일차 가보고 싶을 뿐. 그곳이라면 배우는 바도 있을 터이고 ..."
  "미쳤군!"
  도지가 외쳤고 허준은 더 그 도지를 보지 않고 그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악연이라니 생부와의 인연이 악연이라니!'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려했다.
  "배우다니 더 무엇을!"
  "..."
  "우리에겐 이미 의원의 지식과 자격을 구비했음을 조정에서 보장한 터인데 무엇을 더 이상 배운단 말인가!"
  "유의원!"
  허준이 달래듯한 눈을 향하자
  "그대의 고집은 나도 익히 알아. 그러나 그런 고집 여기선 통하지 않네. 누가 눈이나 끔쩍할 줄 아는가? 여긴 시골 구석관 달라. 누가 앞으로 나아가느냐 누가 먼저 대전 시탕을 받드는 기회를 잡느냐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하는 곳이네. 그대가 생각하듯 그런 정직만으로 꾸며진 곳이 아니란 말일세!"
  "그 얘긴 누누이 들었소. 하지만 ..."
  도지가 다시 허준의 말을 막았다.
  "난 이 내의원에 들어온 지난 2년 동안 상감마마의 용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먼빛으로도 뵌 적이 없어. 바로 코앞이 상감께서 갭시는 대전인 데두. 왠지 아나? 양대감이 자신이 택한 사람이 아니면 누구 하나 대전의 부름에 끼여주지 않기 때문일세."
  "... 언젠가 갈 날이 있겠지."
  "꿈꾸는 소리 말게. 정 싫은가?"
  "의원이 되는 길에 술수는 부리지 않겠소. 설사 그 길이 어떤 험난한 길일지라도."
  도지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돌아서 가기 시작했다.
  허준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거기 가을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공빈의 처소를 떠나 도제조의 방으로 돌아오는 양예수의 표정이 온화했다.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공빈의 환후는 가벼운 체증이었다.
  건강하던 공빈마마가 안색이 질리며 드러눕자 처소의 안팎 상궁과 나인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전전긍긍하다가 어의가 침 한 대로 체증을 내리자 '역시 어의의 솜씨'노라 입을 모아 칭찬하는 소리가 처소를 떠나오는 양대감의 귓전을 간질었다. 좋은 일 궂은 일에 고자질이 심한 우상이란 이름의 내시놈이 처소 밖까지 따라나와 만강의 감사를 담아 허리를 또 한번 굽혀 보인 것도 평소 잘 하지 않던 아첨이었다.
  녀석의 행실로 보아 오늘의 이 공은 필시 광해군 쪽을 감싸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장차 정통 왕자가 태어나시지 않는 한 대통을 이어받으실 분은 광해군 일지도 몰라.'
  그건 양예수의 짐작만이 아니었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는 14제에 왕후로 간택되어 24세에 이른 지난 17년 동안 후사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고 왕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아들을 낳은 것은 공빈이었다.
  정통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지는 아니했어도 공빈이 연년생으로 낳은 진과 훈 두 왕자의 존재는 비록 세 살, 두 살로 어린 나이요 또 선조의 보령이 창창하다 해도 만일의 경우 24세의 꽃답고 혈기왕성한 나이에 10년째 태기가 없는 왕비의 이상 신체가 끝내 후사를 잇지 못할 경우 장차의 보위가 어디의 누구에게 물려질 것인가는 조정의 가장 민감한 관심사일 터이다.
  그리고 두 왕자 중 선조의 애정이 유난히 둘째 광해군에게 쏠려 있기에 광해군의 병을 살피는 일은 양예수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는 사항이었다.
  '기억할 만한 공을 하나 세웠어.'
  임금의 가장 큰 총애를 받는 이가 두 왕자를 낳은 공빈이요 그 공빈의 환후를 간단히 고친 것이다. 어사주 몇 병이 내의원으로 내려질게 틀림 없었다.
  양예수 그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20여 년 전 시골 촌구석 유의태란 의원과 구침지희로 술내기에 져 '산음 사는 누구가 조선 제일의 의원이다'고 버선코에 머리를 조아리며 세 번을 외쳐야 했던 수모를 겪은 후로는 그 분함을 삭이지 못하고 술을 끊어버렸다.
  술잔만 들면 내기에 이기고 가가대소하던 유의태의 얼굴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그 27여 년 동안 그는 그 유의태를 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술은 끊어졌어도 유의태의 모습은 무시로 그의 뇌리에 떠오르고 꿈자리에 나타나 양예수의 치를 떨게 했다.
  그런 그가 유의태의 아들이 내의원에 들어온 것을 알고 나선 잊혀져가던 유의태가 다시 나타난 듯이 긴장했다. 그러나 그 긴장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유도지의 의술의 정도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마치 자신의 오랜 복수가 성취나 된 듯한 웃음을 웃었다.
  유도지에게서 유의태가 지녔던 그 불 같은 기백도 야심의 한조각도 보이지 않음으로써 자식을 뜻대로 키우지 못한 유의태의 고민이 눈에 보이는 듯해서였다.
  복수는 끝났다. 양예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내의원의 노른자위로 여기는 임해군의 처소로 도지를 보낸 것은 자식을 그 정도의 의원으로밖에 키우지 못한 유의태에 대한 조롱이요 야유였다.
  그런데 그렇게 잊어버리기로 한 유의태의 모습이 허준이란 인물에게서 다시 되살아날 줄이야 ... 유의태의 제자임을 확인한 그 허준의 취재 성적은 발군의 것이었다.
  '그자가 허준을 키웠어.'
  양예수는 자기도 모르는 신음소리를 냈고 특히 그 허준의 장소가 침술임을 알자 장차 그는 자신과 조선 제일을 겨루는 경쟁자임도 직감했다.
  '어느 정도인지를 지켜보리라!'
  공빈 처소에서 느긋했던 심정이 허준의 존재로 인해 눈살이 찌푸려지며 걸음발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유의태가 연전에 작고했다고?"
  빈청(대신들의 휴게소)에 나간 도제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양예수에게 유의 정작이 뜻밖의 유의태의 소식을 전하자 양예수가 눈을 치떴다.
  정작은 유의태와 자기가 구침지희의 내기를 할 제 김민세 등과 함께 입회하여 자기의 처참한 패배를 지켜본 몇 사람 안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랬답니다."
  "어디서 들었던가?"
  양예수가 애써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허준에게 들었습니다. 그 아이와 친분이 생겨난 이명원이가 허준과 침술을 토론하다가 나온 얘기랍니다."
  "유의태가 죽었다 ... 그래 ..."
  "지난해 여름이랍니다."
  양예수가 나직하게 웃었다.
  "교자는 단명이라, 일년 전에 죽었다면 꽤나 오래 살았군."
  양예수의 입가에 조롱이 어리다가 꺼졌다.

    7
  세상에 입처럼 싼 것은 없다.
  허준이 유의태의 문도였다는 소문이 갑자기 내의원 안팎에 화제가 되었다.
  발설자는 주부(종 6 품) 김응택이었다.
  그 김응택은 어의 양예수가 장차 자신의 의발을 이어받을 수제자로 지목하는 인물이고 적어도 양예수가 어의로 군림한 명종조에서 선조 8년에 이른 현재까지는 취재의 성적이 가장 훌륭했던 준재로 자타가 공인하는 터였다.
  그러나 그 김응택의 자랑스러운 성적은 허준의 출현으로 깨졌고 비록 그 허준이 자기보다 다섯 품계나 낮은 신출내기이긴 해도 김응택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허준의 전공이 자기와 같은 침구라면 품계는 고사하고 앞으로 언제 어느 대목에서 서로가 부딪칠지 알 수 없는 경쟁자일 것이었다.
  침술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김응택이다.
  어의 양예수의 침술이 나라 안 제일이라 소문났고 그 침술로 어의의 자리를 양대에 걸쳐 반석처럼 지키고 있다. 하나 자기의 침술 또한 결코 어의의 기술에 못지않다고 내심 자부한다.
  그러나 장차 자기의 앞길을 열어주고 밀어줄 양예수임을 믿기에 때로 양예수의 침술에 입이 간지럽도록 이의를 달고 싶다가도 입을 다무는 것은 세월만 가면 절로 굴러들 그 영광의 자리를 공연히 잠시의 혈기를 내세워 어의의 비위를 건드리진 말자는 계산이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도양양한 자신의 앞길에 허준이란 존재가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건 김응택에겐 악운이었다. 김응택은 알고 있다.
  그 허준이 당시 과장에서 답안을 제일 먼저 제출하여 주위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면 그 허준의 답안지는 양예수나 자신의 손아귀 속에 구겨져 없어졌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800여 명의 응시자가 엎드려 있던 과장에서 제일 먼저 제출된 답안이기에 그날 시관파 간시역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고 특히 남 먼저 허준의 답안을 받아든 양예수가 그의 출신을 묻는 몇 마디 속에서 그가 유의태의 제자라는 것을 엿들은 정작이 있었기에 그의 답안지가 고과의 책상 위에 놓여졌던 것이다. 정작은 자기의 그 탄탄대로에 돌팔매질을 한 방해자였다.
  '그 정작과 허준을 가깝게 해선 안돼!'
  정작은 유의태와 양예수가 구침지희를 할 때 김민세와 함께 입회했던 사람이었기에 유의태의 인상을 너무도 강렬하게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뒤 유의태는 다시는 과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양예수가 내의원의 1인자로서 양대에 걸쳐 군림했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유의태의 제자란 허준이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내의원에 들어온 것이다.
  이건 자기에게 무슨 징조인가를 김응택은 곰곰 생각했다.
  불길한 징조는 한두 가지 나타나 있다.
  첫째 내의원에 떠도는 은밀한 소문이 그것이다.
  그 비밀스러운 소문이란 양예수 치하에서 유의태와 같은 억울하게 암장된 실력 있는 탈락자도 있었다고 의심하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그 발설의 주인공은 정작이라고 김응택은 확신한다.
  ... 허준이 출현하던 그날 밤 사관들의 방에서 허준의 답안지가 양예수의 손에서 책상 위로 옳겨진 순간 정작이 남 먼저 집어보았고 즉시 그는 도제조를 비롯, 삼의사의 시판들이 지켜보는 그 만인 환시중에 허준의 답안을 감동한 목소리로 크게 떠들어댔다.
  이에 허준의 시험지는 이 사람 저 사람이 돌려가며 열람했고 그건 허준의 답안지가 공개적인 생명을 얻는 순간이기도 했다. 
  자연히 정작의 그 언동은 양예수에게 소외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하품직 의원들의 지지를 받은 반면 그들은 양예수를 업고 다음 대의 어의를 노리는 자기의 적임도 명백해진 것이다.
  "허준이 유의태의 문도렷다."
  이에 김응택이 정작을 따르려는 의원들에게 겁을 준 것이다.
  유의태의 죽음을 들어 교자단명이노라 차갑게 내뱉은 양예수의 뿌리 깊은 원한을 들어 함부로 허준에게 편드는 자들에게 경거망동 말 것을 ... 공갈이 먹혀들었다.
  갑자기 사람들은 허준이 이번 인사에서 혜민서로 떨어질 걸 예감했고 허준이 곁에 서 있다가 함께 혜민서로 떨어지는 것을 겁낸 것이다.
  "국사가 분주하와 늦으시는 듯하니 어의의 요령대로 인사를 확정하시지요"
  하고 내의원 육품 이하의 의원들의 성명 위에 배치장소를 놓고 방점을 찍기도 하고 성명을 지우기도 하는 양예수에게 김응택이 말했다.
  도제조가 일일이 간접은 하되 내의원 인사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은 어의 양예수요 도제조와 제조가 한번 돌아가며 훑어보는 정도에서 그 인사는 확정된다.
  그러나 확정된 거나 진배없는 인사일지언정 시행하기 전에 그 복안을 도제조와 제조의 눈에 거치게 하는 점도 관례다. 그걸 번연히 알면서 도제조나 제조가 국사에 분망한 이유를 들어 혼자 확정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의에 대한 김응택의 아첨이다.
  "곧 올 때가 됐지 않은가."
  기다리기 지루하면서도 양예수가 말하자,
  "유도지를 혜민서에서 제외하오니까?"
  하고 김응택이 고개를 빼어 양예수의 인사 구상의 지편을 넘겨보며 낮게 물었다. 양예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문밖에 기척이 난 것이다.
  김응택이 얼른 일어나 조신한 태도로 방문을 열었으나 나타난 건 부르러 갔던 정작 혼자였다.
  "국사가 지체되는 듯하와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무슨 하문이 계시던가?"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심기가 뒤틀리는 정작에게 그러나 양예수는 한껏 화기 어린 투로 물었다.
  정작이 침묵했다. 어의의 권위에 대한 그다운 반항이었다. 양예수가 다시 부드러운 어조를 냈다.
  "도제조께서 혹 지목해온 인물은?"
  "도제조께선 이공기를 들어 인빈마마를 배행할 의원으로 천거하더이다."
  김응택이 긴장하며 시선을 정작에게 박았다. 양예수는 눈길을 들었다.
  "도제조가 이공기란 이름을 어찌 기억하고 있지?"
  "뜻밖에 많은 이의 성명을 알고 있더이다."
  양예수가 정작의 그 비아냥 담은 말을 건너보며 그러나 그 입가에 자신 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 그리고?"
  "그밖에 새로 들어온 인물 중에 촉망받는 이가 누군가 묻더이다."
  "누구누구를 들었던가?"
  "새로 들어온 중에 촉망받는 자라면 이번에 첫등으로 뽑힌 허준이 아니올지?"
  "취재란 잠시 잘 볼 수도 있고 잘못 볼 수도 있는 것일세."
  "...?"
  "그래 허준이란 이름을 도제조께 아룄던가?"
  "저더러 꼽아보시라기 허준을 꼽았습니다."
  "허준이는 혜민서로 보내기로 내정했으니 거론할 것 없네."
  "취재에 첫등으로 들어온 인물을 처음부터 혜민서로 보내는 인사는 제가 아직 겪어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
  "뭔가?"
  "재주 있는 아일수록 하루빨리 대전에 출입케 하여 귀한 이들의 신체 발부를 눈여겨보게 하는 것이 오늘까지의 통상 관례였음을 아옵고 ..."
  "대전 출입이 반드시 취재의 성적에 좌우된다는 것은 언젠가 깨어야 할 구습일세."
  "하오나 ..."
  그 정작의 말을 양예수의 말이 조용히 덮었다.
  "인물이 우선이지 의술은 둘째지. 더구나 젊은것들은 모처럼의 기회에 제 이름을 드러내고자 급급하는 무리들인즉슨!"
  김응택이 동조하여 고개를 끄덕였고 양예수는 더는 정작에게 눈길을 줌이 없이 자리를 일어섰다. 아름다운 수염 속에서 어의의 위엄이 가득히 풍기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수일 후 조섭수양위선약석차지라는 어필 앞에서 내의원 인사가 발표되었다.
  유의태의 아들 도지가 내의원의 노른자위로 여기는 인빈 김씨의 처소에 배치됐고 허준과 이공기가 나란히 혜민서에 배치되었다.
  허준과 함께 유도지가 혜민서에 배치될 것임에 틀림없다 속삭이던 내의원 관원들은 양예수가 가장 미워해야 할 유의태의 아들을 인빈마마의 처소에 배치케 한 것을 보고 소문과는 달리 공정한 인사라고 입을 모았다.

    8
  삼의사의 의월들이 모두 기피하는 혜민서라 한들 가족들은 그 실체를 알 턱이 없었고 오로지 남편이요 아들인 허준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직처가 정하여진 것만이 반갑고 기쁜 얼굴이었다.
  그 첫출근의 시각에 대어 새벽밥을 지어 들여온 아내를 따라 생모 손씨도 여느날이면 아직 잠을 깨울 시각이 아닌데 겸이와 숙영이 남매를 깨워 세수를 시키고 머리를 빗기고 새 옷을 갈아입히며 아비의 첫출근을 배웅해야 한다고 수선을 떨었다.
  묘시 등원 시간까지 한 시각이나 여유가 있었다.
  집에서 애고개까지는 고함치면 들리는 거리요 그 고개 위서 밋밋한 내리막길을 우로 끼고 굽돌면 저만치 높다란 성벽을 거느린 남대문의 우람한 모습이 보인다. 혜민서는 그 남대문에서 광화문을 향해 서소문과 종로로 갈리는 육조 앞 넓은 길 모퉁이에 위치한다. 아직 날이 밝기 이전인 새벽 어두운 길이라 할지라도 집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반 시각이면 족한 가까운 거리였다.
  "기억납니다. 아이들과 함께 도성에 첫나들이 가던 길에 길 건너에서 가리켜주시던 바로 그 관아가 아니오니까?"
  아내 김씨가 그날 의약동참 혜민제수라는 커다란 간판을 본 기억을 되살리며 물었다.
  "그렇소, 우측 건너편에 전옥서가 있는 좌측 모퉁이오."
  "전옥서라면 사람 가두어놓는 곳 아니냐."
  "그러합니다. 죄를 진 사람들을 문초도 하고 가두어놓기도 하고 하나 제가 있을 혜민서는 도성 안에서 병자로 칭하는 사람은 누구나 드나드는 곳이니 도성 관아 중에서는 그중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혜민서에 묻어 있는 어두운 소문을 감추고 허준이 애써 밝은 얼굴로 손수 숭튱을 들어 주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러나 ..."
  하고 손씨가 문득 뜨악한 얼굴을 했다.
  "왜오니까?"
  "그래도 에민 한 가지 자랑거릴 잃었어. 인근 마을 사람들이 대체 관복을 입고 오가는 이가 누구냐고 물을 적마다 애비가 나랏님이 겝시는 대궐에 의원이 되어 오간다 얘길 했었는데 모두 거짓말이 되었으니."
  허준이 웃었다.
  "내의원과 혜민서가 모두 영이 한군데에서 나오는 곳이매 잠시 혜민서를 거친 후 대궐로 들어갈 날이 있겠지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아쉬움을 달래며 남편의 의젓한 관복 모습을 자랑 담아서 건너보았다.
  그 온 가족의 축복 속에 허준이 혜민서에 등원한 날, 그러나 묘시에 석점을 갓 넘은 꼭두새벽이어선지 혜민서의 두꺼운 대문은 아직 닫힌 채였다.
  허준은 혜민서 앞을 오락거리며 아직 잠을 안 깬 어두운 도성의 정적을 돌아보았다.
  이제야 새벽닭들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울어대고 있었고 그 어둠 속에서 횃불을 들고 나타난 기찰군관과 나졸들이 두런두런 육조 넓은 뜰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보였다.
  '서너 점 더 기다려야 하나보군.'
  허준이 지루한 생각을 하며 어제 이공기와 헤어질 때 그와 주고받은 말들을 문득 떠올렸다.
  "혜민서, 혜민서. 차라리 닥치고 나니 배짱이 정해져 마음이 편하이."
  혜민서로 확정된 후 남촌 술집에 들러 함께 몇 잔 술을 나누자 이공기가 그 서늘한 눈매로 말문을 열었었다.
  "마음이 편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니까?"
  "아무 뜻이랄 건 없네. 그저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 이 대궐까지 왔으니 가급적 귀한 이들의 병을 보는 쪽을 소원했으나 그러나 내심 내가 의원인 이상 반드시 존귀한 신분의 병자만 보려 한다는 것은 부박한 생각이다, 스스로 질책도 없지 않았거든."
  그 말이 반가워 허준이 술잔을 건네자 이공기가 처음으로 허준에게 친밀한 눈매를 보이며 또 말했었다.
  "혜민서가 사람 몸을 고단하게 쓸 곳임은 틀림없으나 대신 보고 배울만한 것은 많다는 자위도 있네."
  "보고 배울 만한 것에 어떤 것이 있사오니까?"
  "한강에 물 뜨러 가는 것을 내 눈으로 한번 보기 원했었어. 궐밖 혜민서 근무라면 더러 그런 행차에 동행할 수도 있을 게 아닌가."
  "한강에 물을 뜨러 간다니 누가 말입니까?"
  "모르셨던가? 궐내에서 사용하는 물은 모두 한강 강심에서 떠오네."
  "대궐에서 쓰는 물을 한강수를 쓴단 말이오니까?"
  "그렇네. 한강 상류인 뒴개 근처라 하나 아직 난 쫓아가보지 못했네."
  "일찍이 스승님으로부터 세상의 수질이 서른세 가지요 그중 상질의 물이 생수란 가르침은 받았으나 찬강수를 생수로 사용하는 것은 금시초문 올시다."
  "옛시인이 한강수를 두고 읊었다더군. 그 맑고 깨끗함이 금간옥수라 둼개 상류에 주변 경치가 이름 그대로 비단을 둘러친 듯하고 그 하얀 백사장과 계곡 사이로 옥수가 흐르는 듯하다는 그런 곳이 있다는군. 언제 말미 내어 함께 가보세. 첫새벽 강심에 궁녀들이 배를 띄워 놓곤 물을 담는 모습이 상상만 해도 한폭 그림 같지 아니한가. 하하하."
  "그런 기회 있으면 꼭 저도 대동해주소서. 대궐에서 쓰는 물이 어떠한 수질인지 저 또한 곡 보고 싶습니다."
  "궐내 근무가 아닌 바에야 그런 말미야 암만이고 있지 않겠는가. 꼭 함께 가리."
  그때였다.
  육중한 빗장이 뽑히는 소리와 함께 혜민서 문이 열렸고 등불과 빗자루를 든 7, 8명의 의녀들이 몰려나와 비질을 시작했다. 내의원 정청에서 낙엽을 쓸던 의녀들은 자세히 뜯어보지 않았으나 장차 고락을 함께 할 존재들임에서 허준은 새로운 감회로 그들을 건너보았다.
  모두 13, 4세의 소녀에서부터 20세가 채 못된 처자들인데 흩어진 등불에 비친 그 차림들이 아리땁고 독특했다.
  너나없이 차림이 똑같았다.
  옥색 삼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받쳐 입고 매매인이 그 가슴에 노리개처럼 어여쁜 수실로 감싼 침낭을 달고 있었다.
  의녀의 역사는 오래다.
  태종 6년(1406년) 3월 검교한성부 지제생원사 허수의 건의로 제생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부인들이 병이 있어도 남의에게 진찰받기를 부끄러워하여 그 변을 보이기를 싫어하고 더러는 죽기도 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궁사 소속비와 동녀 수십 인을 뽑아 맥경 및 침구의 법을 가르쳐 부인들의 병을 진치케 했다.
  그러나 의술을 지니기까지 의서를 읽을 두뇌 명석한 아이가 흔한 게 아니어서 그 재질을 엄선하고자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의녀의 수를 수십 명으로 늘이고 취재를 실시하니 천자문, 효경 정속편과 산서를 읽게 하여 질을 높여갔고 성종조에 이르러서는 예문관의 문신 두 사람을 교수로 임명하여 직지맥, 동인경, 가감십삼방, 화제부인문, 산서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그 성적을 3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궐내의 왕비 처소에까지 배치하는 내의로 삼고 2등급은 간병의로 3등급은 초학의라 불러 그 성적을 수시로 점검, 재주가 향상되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본래의 직처로 돌려보내 꾸준히 재주 있는 아이를 골라내기에 힘썼다.
  이래서 세종조 때 왕비 소헌왕후의 전문의로 뽑힐 만큼 특출한 소비라는 의녀가 나타났었으나 이러한 대우도 연산군 때에 무너지니 연산군이 아리따운 의녀들을 잔칫상 머리에 기생처럼 끌어내어 앉히기 시작한 후부터 의녀의 존재는 창기처럼 천시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애초의 목적을 떠나 남녀 상종의 추문이 발생해도 의녀로서의 존재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로 했기에 시속에 따라 천대도 받고 우대도 받으면서 오늘날에 이어져 현재 혜민서에서는 2등급인 간병의와 3등급인 초학의 십여 명 배속되어 1등급인 내의가 되는 훈련과 공부를 쌓고 있는 것이다.
  허준이 자기 가까이 있는 의녀에게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 다가든 낮선 사내에게 잠시 놀란 듯이 상큼 들린 소녀의 눈빛이 별처럼 맑았다.
  "뉘시온지요?"
  상대가 관원임에서 소녀는 내외하지 않고 물어왔다.
  "난 오늘자로 혜민서로 배속되온 허준이란 사람이네."
  "허준!"
  하고 문득 소녀가 깔았던 시선을 들었고 수작을 건너보던 여타 의녀들의 눈길도 일제히 그 허준을 향해왔다.

    9
  의녀 한 아이가 허준이란 이름을 문득 기억해낸 듯했다. 별 사람도 아니요 혜민서 근무도 감격이라고 꼭두새벽에 찾아든 시골티 나는 허준에게 금시 흥미를 잃고 흩어지는 의녀들 속에서 그중 나이 어린 그 의녀가 또랑한 소리로 물어왔다.
  "외람되오나 허의원이라 하시면 저번 과차 때 이상을 받으셨던 그분이시온지요?"
  이번에는 허준이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삼회장저고리에 남치마를 받쳐 입고 앙증스런 침통을 저고리의 고름깃에 단 전통적인 의녀의 복식이되 나이 13, 4세의 앳된 소녀인데 말끝에 상큼상큼 들리는 눈빛이 총명해 보였다. 그리고 궁 생활이 오랜지 취재의 성적을 이르는 '과차'라는 어려운 말을 선뜻 쓰는 것도 나이보다 훨씬 숙성한 인상이었다.
  과차란 아홉 등으로 우열을 매기는 취재의 성적을 이른다. 그 분류는 위로부터 이상, 이중, 이하, 다음이 삼상, 삼중, 삼하, 마지막 7, 8, 9등을 차상, 차중, 차하로 평점한다. 그 어려운 과장의 용어를 쓰는 소녀를 허준이 빙그레 웃으며 건너보았다.
  "나를 알던가?"
  허준이 묻자 소녀가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두 손을 모았다.
  "뵙기는 처음 뵈오나 성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어디서?"
  "제 자란 곳이 충청도 진천이오라 허의원께서 그곳 버드네에서 베푸신 여러 은혜를 익히 듣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허준이 미소했다. 이미 지난 일인데 그런 일로 자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미상불 반가웠다.
  "소녀의 이름은 미사라 부르옵니다. 태생이 미천하와 성은 지니지 못하였사옵고요."
  "그래 ..."
  미천하다 말하고 있으나 어느 한 곳 미천한 그늘이 없는 소녀였다.
  훤히 밝은 시각이요 이미 이 구석 저 구석 인기척이 들린 시각인데도 쥐죽은 듯 고요한 분위기에 의아해지는데 미사가 나직하게 혜민서의 공기를 일러줬다.
  그 말인즉 이번 내의원 인사 중 특히 혜민서의 의원들이 심한 반발을 품고 있다는 것과 그래서 인사가 확정된 어제 2년째 혜민서에 근무하며 이번 인사에야말로 타처로 전근되기를 고대하던 직장(종7품) 한 사람과 부봉사(정7품) 한 사람, 참봉(종9품)한 사람 그 세 사람이 사표를 던지고 밤 사이 고향으로 떠났다는 것과 그래서 남은 몇 사람들이 어의 양예수 대감에게 달려갔으나 그중에도 한두 사람은 저희가 억울하게 생각하는 인사가 정정되지 않으면 그도 내의원을 떠나리라는 그런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직소를 하면 더러 시정이 되던가?"
  "일차 영이 떨어지고야 시정되지는 않는다는 소문이옵니다. 하지만!"
  "하지만?"
  미사가 정색하여 허준을 올려보았다.
  "스스로 의원이고자 하는 분들이 꼭 몸편한 곳만 찾는 그런 걸 보면 우리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더구나 혜민서란 돈없이 가난한 백성들의 병자만 찾아드는 곳이온데 의원이 되어 꼭 지체 높고 귀한 신분의 병자만 보려고 안달하는 걸 보면 왠지 그 의원들이 미운 생각도 나고요."
  "이 혜민서가 그토록 힘드는 곳인가?"
  "궐내에 배치받는 데 비하면 힘들고 빛이 안 나는 곳이긴 합지요. 하지만 과차가 삼하 이상인 분들은 잘 배치되지 않는 곳인데 첫등에 올라 구임인 허의원 같은 분이 오시게 됐다니 혜민설 찾아오는 병자들한테 복이 떨어진 셈올시다."
  미사의 나이보다 재치있는 말에 허준이 웃었다.
  허준은 느긋했다. 땅을 파고 흙을 져나르는 일도 아니요 자신이 지닌 의술만으로 버틸 수 있는 곳이라면 설사 신체의 고단함쯤이야 익히 돌파 할 수 있는 직이라 생각했다.
  허준은 미사에게 청하여 혜민서의 각방을 둘러보기로 했다.
  혜민서의 건물 구조는 내경, 외형, 탕액, 침구, 잡병 다섯 건물로 나누어져 그 잡병 속에 부인병과 소아병이 또 세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각 건물마다 널따란 통로인 칸막이로 남녀의 병상과 진찰방이 따로 붙어 있는데 소아들일지라도 엄격히 일곱 살이면 남녀 각각의 병동을 사용토록 했고 그 각 과 각 병동을 의원과 의녀들만 무시로 출입하였다.
  각 병사마다 붙박이로 오래 치료할 이와 나날이 오가며 치료받는 병자, 격리해야 할 병자와 한 방에 잠자도 되는 병자들의 병동이 온돌방과 목상 10여 개씩을 배치한 방들로 나뉘어 혜민서 전체의 규모는 꽤나 컸으나 그러나 중부를 비롯, 동서남북 합해 그 다섯 부 마흔아홉 방의 한양성 내외의 병자들이 몰려드는 유일한 국립무료의료원인 혜민서는 진시 개문 후 유시 폐문까지 도성 안의 온갖 병자가 밀어닥쳐 서울에서 가장 소란하고 복닥거리는 관청이었다.
  미사를 따라 각 방의 구조를 둘러보며 허준은 병사 앞에 내걸린 의명들이 흥미로웠다. 내의원 도제조나 혜민서 제조로 직책을 받은 이들이 썼다는 그 각 방의 현판글을 보고 있으면 병일랑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내용이었다. .
  박람군서 정통도예는 서리들의 직숙방에 붙은 현판이고 절충고금 명지운기는 내경의 병동, 대증투제는 외형병동, 인병제방 약판온량은 탕액, 기사회생 맥분표리는 침구 병동에 그리고 잡병 병동의 부인과 소아의 병사에는 통효음양 병심허실 치용보사 등 각각의 의명이 굽어보고 있었다.
  허준이 서리의 방 앞으로 돌아오자 그 사이 등청해온 이공기가 뜻밖에도 그 서리들의 방에서 나와 허준을 끌고 한쪽으로 갔다.
  이공기가 그 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귀띔했다.
  어의에게 3년째 혜민서에 떨어진 억울함을 직소하러 간 황오복이라는 주부가 기어이 양예수로부터 내국(대궐 내 약방) 근무로 이동이 되었으며 그 황오복과 행동을 함께 한 박모라는 부봉사도 전의감으로 새로 발령이 났고 여타 인물들에게도 내년의 인사에는 반영되리라는 언질을 받아왔다는 그런 얘기였다.
  "혜민서에 온 걸 후회하지 않겠다 하더니 왜 새삼 미련이 남소?"
  하고 허준이 묻자 이공기가 수염을 쓸며 겸연쩍게 말했다.
  "우리야 어차피 첫배치요 억울하네 어쩌네 떼를 쓸거리도 없지. 하지만 ..."
  "..."
  "양대감이 일차 결정한 인사를 다시 바꾸어준 걸 보면 자신의 인사에 각사의 불만이 쌓인 것을 인정한 듯도 하여 내년쯤엔 우리도 살길이 열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 핫핫. 그리고 모두 그대가 온 걸 궁금히 여기고 있네. 가 인사하세."
  신참 두 사람이 고참 의원들과 새삼 통성명하여 인사를 나누었을 때 갑자기 혜민서 안이 악머구리 끓듯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몰려든 병자와 그 가족들이 진찰 순번을 정해주는 진료패를 저마다 먼저 받아쥐려는, 매일 아침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허준은 자신이 배치된 침구의 병동에서 그 밀려드는 병자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치종을 전담하다가 혜민서 발령에 사표 던지고 사라진 또 한 사람의 몫을 떠맡았다.
  "어의께서 곧 결원을 보충할 의원을 배치해 줄 것이니 그때까지 가외로 수고를 좀 하시게."
  어의에게 직소한 덕분에 드디어 혜민서를 벗어나 대궐 안 내국 배치를 받은 감격이 겨운지 황오복이가 들뜬 얼굴로 허준에게 이르며 옮겨갈 자기의 짐을 챙기기에 바빴다.
  허준의 혜민서 첫날 일과는 그렇게 침을 놓고 종기를 째고 약을 발라 주는 일로 시작됐다.
  병자가 끝도 없었다. 더구나 실무의원 세 사람이 빠져나간 혜민서는 옆 돌아볼 새 없이 바삐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허준은 오랜만에 자기 손으로 다루는 수많은 병자들을 대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의원으로서의 새로운 용기가 솟았다.
  '내 고단함은 병자의 고통에 비하면 열 배도 백 배도 가벼운 것이다!'
  점심상을 물리고 미사가 떠주는 숭늉은 이미 병사로 향해 걸으면서 마시며 허준은 뇌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떠오르는 남다른 의욕-그것은 수많은 병자를 무시로 대하면서 자신의 경험이 더더욱 쌓이리라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결의에 찬 불같은 희망이었다.
  '나야말로 가장 와야 할 곳,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곳에 배치된지도 몰라.'
  허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10
  바빴다.
  혜민서의 바쁜 나날이 허준을 싸고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허준은 그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자신의 건강에 대하여 감사히 여기는 것은 의원에 서 있고서야 절실하게 실감한다.
  혜민서를 나서면 오가는 건장한 사람들을 보며 병자는 자신의 직업의 대상으로서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한 발 혜민서에 발을 들여놓을라치면 온통 세상은 병자들로만 가득찬 것을 깨닫는다.
  그 혜민서 오과에 넘치는 가지가지 병을 앓는 이들을 보고 대하면서 허준은 새삼 자신의 건강에 감사하는 마음이 일곤 하는 것이다.
  나아서 돌아가는 병자가 수없이 많다 할 것이로되 새로운 병자들이 끝도 없이 또 밀려들어온다.
  오는 대로 병자들을 다 받는 것은 아니다. 혜민서의 수용시설이 장안의 모든 병자들을 받아들일 시설일 수 없고 찾아오는 수의 10분의 1이나 그날 그날 대처할 뿐이다.
  찾아드는 탕자 쪽에서도 병이 났다 하여 무시로 찾아들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제 사는 마을에서 어디 사는 누가 무슨 병으로 가노라는 증빙을 가지고 찾아와 그 혜민서의 접수관원에게 그 증빙서와 호패를 내 보이고 모월 모시에 찾아올 것을 허락받는 차례표를 받는데 물론 위급한 병자일 경우는 이 절차를 생략하는 특전을 받는다.
  그러나 병자들마다 마음들이 급하고 보니 또 바쁜 생업에 두번 세번 찾아오는 번잡함을 덜고자 달걀 꾸러미니 암탉 한 마리 따위를 혜민서 접수구의 서리에게 넌지시 밀어넣어주니 그 접수구 안 커다란 대다래끼 안에는 으레 암탉이 구구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정도의 선심도 쓸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병자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그 없고 가난한 죄로다가 번번이 차례가 뒤로 밀려나는 것을 보다 못한 다혈질의 병자나 그 가족이 대궐 문전에 있는 관아에서 이 따위 호작질이 웬말이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일도 더러 일어나지만 도대체가 혜민서 근무 따윈 불만투성이인지라 몇 놈 따지고 드는 백성의 엄포 따윈 눈알을 도끼질삼아 아래위로 훑어보는 위협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이 혜민서의 분위기였다.
  "내가 몇십 년 의원 공부를 한 것이 너 따위들의 병이나 돌보고 고름이나 짜주기 위해선 줄 아느냐?"
  내미는 증빙서류를 손톱으로 튀기며 건너보는 의원이나 서리의 눈자위엔 그건 말없는 공갈과 거만함이 내비치는 것이고 성깔이 나서 따져는 들었되 싫어도 그 의원의 도움으로 제 병을 낫워야 한다는 약한 처지의 병자들은 그런 승강이도 결국은 그저 저 하나 제대로 차례를 받으면 슬그머니 입 다물고 마는 것이었다.
  또 혜민서 직원들에게는 똑똑한 체 따져드는 자들을 한마디로 일축하는 비방이 있었다. 애초 병자들에게 차례를 지정하고 입진할 날짜를 해민서 오과에서 배정하는데 사용하는 약재의 물량에는 매달의 소비량이 한정돼 있기에 따지는 자의 병에 해당하는 과목에서 직원들은 이렇게 말을 잘라버린다.
  "당신이 타갈 약의 오늘치는 다 사용했으니 내일 일찍 오게."
  그 한마디에 더 따지고 들 수 없는 약점이 있었다.
  약재를 그날 쓰고 안 쓰고는 그날의 사용량을 알고 있는 서리의 특권이요 저희끼리 눈짓으로 오가며 한번 없다고 우기면 그걸 따지고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혜민서의 비리를 깨부순 건 허준과 항께 혜민서에 떨어진 이공기였다.
  침구과에 배속된 허준으로서는 용량을 재량하는 약재는 없었기에 병자들이 병동에 들어오기까지의 비리를 알 까닭이 없었고 찾아드는 병자들을 처치하는 일만으로 바쁠 뿐이었다.
  게다가 결원이 난 종기환자들까지 떠맡고 나서는, 더더구나 혜민서 문간의 관행을 알 까닭이 없었다.
  "아니 혜민서 근무도 억울한데 더구나 내가 내놓으라고 청한 것도 아니요 저희가 제 손으로 내미는 달걀 몇 개 받아둔 게 뭐 어떻단 말인가!"
  서리놈을 제쳐놓고 잡병과 소아병을 맡고 있는 살짝 얼굴이 얽은 고참 의원이 이공기의 아래위를 훑어보고 하는 소리였다.
  "더구나 그것들은 어느 한 놈의 입에 들어가는 것도 아닌기고 퇴청할적에 우리 혜민서 동관끼리 주막에 나가 술 한잔 나눠 마시는 밑천이데이."
  마치 좋은 일이나 하고 있다는 듯이 큰소리치는 그 고참 얼굴에 날아간 건 말대꾸가 아니고 이공기의 주먹질이었다.
  "이놈이 선배 친데이!"
  살짝곰보가 동관의 밥상을 안고 나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나 고함쳤으나 이공기도 마주 소리쳤다.
  "혜민서 혜민서 할 것 없다. 당신네가 혜민서 근무를 그 따위로 하니 내의원에서 아예 혜민서 근무자들을 발가락에 때처럼 보는 게다. 만일 앞으로 또 한번 혜민서 욕을 먹이는 자가 드러나면 선배고 나발이고간에 내 주먹맛부터 볼 것이니 그리 알아라!"
  마악 점심상을 받으러 들어오던 허준이 직숙방에서 벌어진 그 광경을 보았으나 싸움을 말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허준은 선배를 쳤다고 흥분해 나서는 또 다른 고참의 앞을 딱 가로막고 이공기와 뜻을 같이한다는 것을 말없이 시위해 보인 것이다.
  싸움은 그걸로 끝났으나 이 일로 이공기와 허준은 그나마 혜민서의 외톨이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공기는 집요했다. 죽일 놈 살릴 놈 선배를 치는 주먹잡이라는 등 등뒤에서 욕질과 손가락질을 하던 그들이 다음날 이공기가 아예 병자를 제쳐놓고 혜민서의 기강부터 바로잡는다고 접수구에 버티고 서서 서리의 농간 여부를 지키고 서자 결국 화해를 걸어온 건 고참들이었고 이공기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고 그 이공기의 고집을 지원하여 허준은 이공기가 맡아야 할 병자들을 자청하여 맡았다.
  그 두 사람의 의협심을 의녀들이 화제삼았고 그 화제는 궁에 출입하는 선배 의녀들의 입을 통하여 내의원과 전의감 쪽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문을 접하고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이 도제조를 보좌하는 유의 정작이었다.
  '이공기 ...'
  정작이 자기의 기억 속에 뚜렷이 박혀 있는 허준이란 이름 외 마음속에 이공기란 성명을 또 하나 치부했다.
  혜민서 문전이 깨끗해졌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공기도 허준도 더 이상 접수구 곁에 서 있지 않고 등청하는 길로 각자의 병동으로 돌아가 순차대로 찾아들어온 병자들을 치료하는 나날이 다시 흘러갔다.
  그러나 혜민서 근무에 절망하고 환고향한 의원과 양예수에게 직소하여 혜민서를 빠져나간 황오복이로 인해 뚫린 결원은 곧 충원되리라는 소식만 날 뿐 그 가을이 다 가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세상 됨됨이라곤 ..."
  마지막 환자를 내보내고 퇴청 준비를 하던 이공기가 피고름이 밴 옷을 갈아입으며 아직 남아 있는 환자의 침 뽑을 시각을 기다리며 잠시 건너와 있는 허준에게 뇌까렸다.
  "왠가?"
  "새삼 의문을 가지려는 게 아니라 생각해보게. 궐내에서야 누구의 환후가 어떻다 병 하나 나면 어의를 비롯 오과 의원을 다 동원해 달려가 입진하기 바쁘면서 이곳에 오는 병자들은 다 무지렁이들이라는 건지 우리에게만 떠맡긴 채 빠져나간 결원을 충원도 안 해주니 몸뚱이가 무쇠가 아닌 터에야 이 생활을 언제까지나 버틸 것 같은가."
  "우리가 이놈의 데서 매일 수백 명씩 다루며 죽어나는 적에 궐내 각궁에 배치된 것들은 그 시각 뭘하고 있는지 알던가?"
  "침 뽑고 돌아오겠네."
  입구에 미사가 부르러 온 모습을 보며 허준이 이공기의 화제를 끊자 이공기가 내뱉었다.
  "윗전들의 방에서 물려나온 술상 기다리는 놈, 궐밖에 밤나들이 나가려 옷이나 다리는 놈, 또 제가 보약에 관해서는 대가인 양 환절기니 보약은 자셔야 합니다, 이러이러한 보약을 청하소서, 그걸 꼭 잡수셔야 내내 무병하옵니다, 아첨 떠는 놈."
  "돌아가다 술 한잔 하세."
  허준이 그 이공기를 달래듯 웃으며 미사와 함께 자기의 병동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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