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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설 동의보감(상) [이은성 저]
작성자 이종운 (ip:)
  • 작성일 2017-01-21 15: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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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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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명: 소설 동의보감(상)
  저자명: 이은성
 

  [  서설 ]
  16세기 말!
  조선왕조 중엽의 두터운 신분차별 속에서 천첩의 자식이라는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에 양평군이라는 작호까지 받았던 인물! 무덤 속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고 이 나라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 사랑했던 사나이!
  한방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던 중국인에게까지 하늘의 손을 대신한 신인으로 숭앙받던 동의보감(전25권으로 된 의서, 1613년 간행)의 저자 허준. 이 소설은 그 불꽃보다 뜨거운 생애를 살다간 허준의 일대기다.
 
    [  1. 용천 탈출 ]
    1
  "잘 있게."
  과거를 보러 떠나는 들뜬 친구들이 말했다.
  과거 날짜에 두 달이나 여유를 두고 남은 공부를 한양에 가서 하리라는 팔자 좋은 친구들이었다.
  명종이 승하하고 조선의 14대 임금으로 선조가 즉위한 첫해(1568) 평안도 용천 오도곶의 큰나루.
  간간 싸락눈이 섞인 2월의 갯바람이 살을 에듯이 모질었다.
  그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해주로 떠날 배를 기다리던 허드레 선객들이 나루의 제일 앞자리에 선 허준과 그 친구들로 인해 더 나아가지 못하고 걸음을 세우고 있었다.
  반상이 유별하여 큰갓 쓰고 각자 하인을 거느린 그 호기 서린 양반댁 자제들, 더구나 과거 보러 가는 그들의 앞을 무엄하게 가로질러 먼저 뱃전에 오르기를 저어하여 그들의 작별인사가 빨리 끝나기를 흘낏거리며 기다렸다.
  "다녀오리."
  키가 제일 작은 심진사댁 사위가 허준의 손을 쥐었다 놓고 기찰포교의 안내를 받으며 뱃전에 걸친 널판대기로 올랐다. 그 4, 5보 뒤를 따라 상민이라 불리는 것들이 우우 널판대기를 오르기 시작했다.
  허준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솟기 시작했다. 어젯밤, 아니 어찌 어젯밤 만이랴 ...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천한 쪽에 속하는가는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수없이 보았었고 그 뼈저린 현실이 어머니의 경우만이 아닌 자기의 운명 위로도 굴러온 것을 확인하는 느낌이었다.
  애초 허준의 머리에 얹힌 큰갓은 그의 신분에는 가당치도 않은 가짜였다. 생부가 용천 군수이기에 덤으로 글방에 드나들며 양반가문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그들과 어울릴 때는 자기도 머리에 얹고 다니던 일종의 객기의 소산이었다.
  비록 아버지가 지경 내를 호령하는 군수일지라도 그건 아버지의 신분이요 허준은 그 아버지의 첩의 자식이었다. 첩도 그냥 첩이면 서자 신분이 되겠지만 허준의 생모 손씨는 인종 1년 윤임이 사사당한 을사사화에 그녀의 집안도 적몰되자 역적의 아내와 딸을 공신들에게 나누어주던 때의 제도에 따라 그녀 또한 하천되었다.
  이어 그녀는 대감댁 따님이 시집갈 때 비녀가 되어 가마를 따라갔고 새아씨의 성미를 거슬러 팔려가는 신세로 전전하다가 해미(충청도에 있는 해양 방어의 요지) 군관 허륜의 첩이 된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법적 신분은 양가 출신의 첩에도 미치지 못하는 천첩인 것이다.
  그 천첩은 무언가, 간단히 말하여 양반 상놈이라 불리던 양민 즉 농군들에도 미치지 못한 천것들에 대한 신분제도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가혹한 것이었다.
  공천이란 관부에 종사하던 종들을 일컫는 것으로 관청 소속의 기생, 나인, 관노비, 역졸 등이 이에 속했고 그 문건은 장례원에서 관장했는데 3년마다 조사하여 속안을 작성, 동태를 감시하고 20년마다 정안을 작성하여 그들의 신분을 재확인하는 등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높고 높은 장벽이었다. 또 팔반사천이라 불리던 상여꾼, 중, 백정, 무당, 광대, 공장, 일반기생, 사노비 ... 개개인의 종인 사노비란 그 가문의 재산으로 간주 상속했고 종모법, 종부법을 시행, 아비나 어미가 종이면 그 소생 또한 어김없이 종이어야 한다는 비인간적인 제도가 엄연하니 같은 팔천에 속해도 상전에게 예속되지 않았던 무당, 백정, 중, 옥졸, 배꾼, 장사꾼 등은 사노비에 비해 자유 하나는 누린 셈이었다.
  그 자유도 없는 사노비.
  자자손손 세습하여 주인댁 문전 안에 종의 꼬리표를 달고 살다가 다음 대의 종을 낳아주고 또 낳아주며 또 낳고 낳으며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 사노비의 신세.
  허준의 이마에 사라졌던 힘줄이 다시 불끈 솟았다.
  떠나는 배를 보며 그의 무릎이 결코 추위 때문이 아닌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떨기 시작했다.
  과거 날짜가 다가옴에 따라 친구들 입에서 한양 얘기며 장차 획득하고 싶은 관직에 대한 화제가 부쩍 많아졌고 허준 또한 어린 날 어머니에게 들은 한양에 관한 얄팍한 지식으로 열을 올려 그 화제에 끼여들고 했었지만 그 자신 자기는 과거를 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오늘 25리 먼 길을 전송나온 것은 친구로서의 정리에 의한 가벼운 마음이었거늘 ...
  '어쩐 일이란 말인가! 골백번 단념한 신분에의 자각을 지금에 와서 또 캐묻고 안달하는 것은 ...'  물길을 잡아 멀어지기 시작하는 황포 쌍돛대가 한껏 해풍에 부푼 것이 보였다.
  허준이 뇌까렸다.
  '나하고는 다른 사람들 ... 나하고는 다른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
  이마의 파란 힘줄이 약해갔다.
  코끝이 시큰 울더니 머리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갈비뼈가 산산이 부서져 명치끝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눈물을 지우고 시선을 들자 기암괴석 바위가 가파른 오도곶 해안을 돌아 황포 쌍돛대가 마악 하나로 겹친 채 서해의 격랑 속으로 멀어가고 있었다.
  "개 같은 새끼들!"
  문득 허준의 입에서 배를 타고 멀어가는 그 양반 친구들 외 또 한 무리 그가 사귀는 천한 태생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쓰는 된소리가 뱉어졌다.
  애써 비웃으려던 허준의 입이 씰룩였다.
  "더러운 새끼들!"
  허준의 입이 그의 진짜 모습인 상놈의 소리를 냈다.
  물론 그 말들은 배를 타고 멀어지는 친구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친구들을 태생에서부터 갈라놓은 세상의 제도와 거기 높다랗게 다리를 꼬고 앉아 내노라 하는 세상 모든 양반들을 향한 욕지거리였다.
  "이따위 세상! 사그리 불태워버려!"
  말끝에 허준의 호흡이 폭발했다. 머리의 갓을 벗겨 움켜쥔 순간 발기발기 찢고 뜯으며 내팽개쳤다. 달리면 멈추지 못하는 것이 그의 태생이었다.
  "쌍놈들!"
  맨상투의 허준이 바닷가 자갈밭으로 내달으며 뒹굴었다.
  쓰러지는가 했더니 떨리는 그 손이 돌멩이를 움켜쥐고 일어나며 멀어져가는 배를 향해 팔매질했다.
  바다는 허준의 돌멩이를 삼키고 찰랑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싸락눈이 굵은 눈발로 변하고 있었다. 벌겋게 눈물이 번진 허준의 눈자위로 그 눈발들이 써늘하게 와닿았다.
  그 머리 위로 때묻은 갈매기 한 마리가 허준을 비웃듯이 기웃기웃거리다가 문득 바람에 날리며 높게 낮게 한껏 자유롭게 바다 위로 떠갔다.
  "죽일 놈들, 모조리 싹 죽여버려야 돼."
  뒷날 무덤 속의 생명을 끌어내고 한 마리 갯지렁이조차 밟으려 않던, 온 세상의 병고를 구하려 애쓰던 그와 전혀 반대의 무서운 말이 뱉어졌다.
  "씨--팔놈들. 네미랄 자식들."
  표현에 비해 그의 마지막 욕설은 기운이 다 빠진 씨부림에 지나지 못했다.
  못박혀선 그의 발치로 문득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허준이 찢어발긴 갓 조각이 거기 떠 있었다. 갑자기 멍청해진 허준의 맨상투 위로 눈발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2
  친구들을 태운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 ... 허준은 아직도 텅 빈 나루의 눈발 속에 서 있었다.
  배꾼들이 선객들을 위해 피워놓은 통장작더미 모닥불이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아침 한나절은 더 이상 원행 떠날 큰 배는 닿지 않을 모양이었다.
  " ..."
  뜨거운 머리가 식어가고 갯바람에 목덜미와 발이 시려오자 허준이 자문했다.
  "어떡할 건가 ..."
  오도곶에서 용천읍까지 25리.
  오늘 같은 날 집에 돌아가봤자 어머니의 한숨이나 눈물을 볼 게 뻔하다.
  허준은 군서산 봉수군에 말똥창고지기로 있는 술친구 양패놈을 생각해내고서야 못박혀 있던 오도곶 해안에서 발길을 돌렸다.
  봉은 홰에 불을 켜는 야간 신호용이요 수는 싸리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로 신호를 삼는 주간용 신호인데 그 연기를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게 올리기 위해선 불길에 말똥을 섞어 태우는 게 비방이다. 때문에 각 봉화대의 말똥창고지기는 제법 완력을 앞세워 말발이 서는 자가 맡았고 욕 잘하고 주먹질이 날랜 양태놈은 최적임자였다. 특히 허준과는 용천 관내를 쓸고다니는 호가 난 왈패 한짝이기도 했다.
  "양태놈이나 끌고 사위포 퇴기년이 벌이고 있는 술집에나 파 묻혀서!"
  그 뒤는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술이나 퍼마시고 잡년의 허리나 끌어안고 만사 잊어버리고 싶을 뿐이다.
  생부를 남편이라거나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그들 모자지만 그래도 '사또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며 때마다 한사코 타이르는 어머니의 말도 오늘의 허준에게는 염두에 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신세가 아닌가. 아니면 차라리 묵묵히 논밭이나 일궈먹는 농사꾼의 신세 정도로라도 태어났던가."
  국법에 매인 태생은 미천할지라도 사람으로서의 행동은 천하지 말라며 정실 추씨 몰래 한사코 글을 배우게 찬 어머니의 눈물도 지금은 가소로울 뿐이다.
  북으로는 의주, 삭주로 이어지는 인산, 도산 봉화대를 바라보고 남으로는 철산의 웅골산 봉화대와 호응하는 용천 군서산 날망에 위치한 봉화대는 산세가 험준했다. 발 밑에 밟히는 건 눈이 아니고 겨우내 녹지 않은 얼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산비탈을 기어오르는 허준의 격정은, 핑계는 말친구인 양태놈이요 소위포 잡년의 허리요 술이요 하면서도 기실 그건 어머니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어쩌면 그 반대인 어머니의 비극을 짐짓 한번 찔러보는 의식적인 가학행위인지도 몰랐다.
  저지르면 괴로워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저지른 후면 더 많이 감싸려 들고 서러워하고 위로하려 드는 어머니의 설움 속에서 또 한번 허준은 어머니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어두운 숙명을 지그시 확인하고 싶은 아련한 쾌감 같은 것인지도 ...
  "불쌍한 어머니."
  어릴 적 정실 추씨에게 곧잘 저고리섶이 뜯기고 안채 높은 마루에서 툇돌 아래로 떠밀려 떨어지는 모습을 담 너머에서 지게를 받쳐놓고 올라서 들여다보았었다.
  감히 뛰어들어 말릴 권리도 없던 천첩의 아들은 그 어머니의 비명을 속절없이 들으며 담벼락에 이마를 박고 울기가 일쑤였다.
  그런 밤.
  어린 허준은 '종년' 어머니의 멍든 곳을 어루만지며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어머니로 여겼었다.
  그러나 자라오면서 허준은 어머니를 '불쌍한 어머니'에서 '불쌍한 여자'로 여기게 되는 두어 가치 사건을 겪었다.
  허준의 생모 손씨에 대한 정실 추씨의 오만가지 투기를 보다못한 아버지가 허준의 나이 아홉이 되던 핸가 ... 그녀를 천적에서 뽑아 자유로이 떠나보내려 했음에도 남편에 대한 정을 끊을 수 없었던지 그 보호를 떠나서는 현실 만한 의지처도 없다고 보았는지 어머니는 떠나지 않았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신분이야 어쨌든 사랑에 빠진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그칠 수 없는 정염이었을까. 아니면 장성하기까지 자식을 보호하려는 모정이었을까.
  추씨가 부리는 종년들에게 걸핏하면 머리끄덩일 들려 안채 샛문으로 끌려들어가 마침내 발가벗기우고 안채 육간대청에서 툇돌 아래로 굴러떨어져서야 닦달이 끝나는 그 지독한 박해를 감수하면서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허준은 어머니를 '불쌍한 어머니'에서 '불쌍한 여자'로 바꾸어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 있다.
  연전에 정실 추씨가 깊은 병이 들었을 때 밤을 꼴딱 새워가며 팔다리를 주무르고 그래도 끝내 "자네, 수고허네." 소리 한마디 않던 20여 넌을 마주보던 연적에 대한 헌신. 뿐이랴. 그녀의 죽음 앞에서 대성통곡해 울어야 하던 여자.
  내가 어른이 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호강을 시켜 드리겠노라고 마음에 되뇌던 맹세도, 어른만 되면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힘있고 온갖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여긴 어린 소년의 순진한 소망이었을 뿐 ...
  '어른이 된 지금 오늘 겪었던 친구들과의 이별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쌍한 여자'의 불행까지 떠맡을 주제는 고사하고 자기 또한 자기 한 몸조차 주체하지 못하는 무력한 '천것'의 아들일 뿐이 아닌가.
  '나의 운명은 끝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훨씬 이전 어머니가 종의 신분이 된 그 순간부터 ...'
  우물가 아녀자들 앞에 바지를 걷어내리고 나타나기나 해야 풍속을 해친 놈쯤으로 몰려 관아의 문턱을 넘어볼까 자신의 운명 속에서 내가 누구노라며 세상에 외쳐댈 문벌도 희망을 가질 신분도 없다.
  그렇다면 뻔하다. 자기 또한 어머니가 겪는 저 고통을 일생 벗어날 길이 없으리라 ...
  천것이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자기가 보았던 저 수많은 눈물과 마소처럼 부림을 받으며 사는 저 허드레 인간들의 처량한 모습들이 허준의 걸음을 또 멈추게 했다.
  추씨의 죽음 후에도 안채 육간대청 위에 서보기는커녕 그 정실부인이 생활하던 안채엔 여전히 발길도 못하며 그녀가 거느리던 종년들조차 함부로 부리지 못하는 천첩의 질곡.
  "죽어도 하나 아깝지 않은 목숨이야. 숨만 쉬고 있지 이미 나는 죽은 목숨인즉 ..."
  울창한 닥나무숲을 지나자 봉화대의 불꽃이 날아 산불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다섯 칸 너비의 방화벽이 꾸불꾸불 나타났고 그 한쪽 바위가 사태나듯 무너진 길 아닌 비탈을 오르며 허준이 또 생각했다.
  '살았되 인간답기는 아예 바라볼 수도 없는 어머니와 나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행복은 무엇일가.'
  "행복? 내가?"
  코방귀부터 뀌어졌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청년'의 행복을 골똘히 생각해내려 했다.
  " ..."
  허준이 어린 날 ...
  어머니가 아직 젊고 아리따웠을 때 어머니의 몸종 삼월이에게 손을 잡혀 아침 문안차 어머니의 방에 들르면 어머니는 늘 무언가 한 가지씩 군것질할 것을 쥐어주었고 그런 어느날 허준은 문득 느꼈었다.
  곱게 개켜놓은 이불단 속에서 살풋 피어나 소년의 꼬끝에 맡아지던 비밀스러운 꽃내음 같기도 한 성의 향기를 ...
  그리고 때로 삼월이의 방에 내처진 채 오늘은 들어가자 말라고 타이름을 받던 밤 몰래 숨어들어가 들여다본 방안에 선녀처럼 아름다운 얼굴의 어머니가 기척도 모르고 분단장에 열중하던 그 기다림도 첩년의 행복이었을까.
  산성 봉수대에는 분명 오늘 직숙일 터인데도 양태놈은 직처에 없었고 사또의 자제 허준의 출현에 오장 한 놈이 다가와 아첨기 어린 말을 걸다가 사라졌다. 허준은 봉수대 북쪽 비탈 말똥창고 앞에 서서 눈 아래 올망졸망 크고 작은 산봉우리와 저 아래 철산과 의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큰길을 따라 번화한 용천읍이 백설에 덮여가는 것을 언제까지나 보고 서 있었다.
  눈발이 허준의 맨상투 위로 엉겨붙고 옷자락이 깃발같이 펄럭였다.
  "열길 백길 천길 이까짓 세상 모조리 파묻어버려!"
  파랗게 얼어가던 허준의 입이 다시 들끓기 시작하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절망에 찬 파란 불덩이를 내뱉었다.
  주먹만한 북국의 눈발들이 그 허준의 주변에서 생물 떼처럼 소란하게. 맴돌았다.
  봄을 맞이하는 마지막 대설이 될 모양이었다.

    3
  그날 허준이 봉수대에서 내려온 건 밤이 이슥해서였다.
  기다리던 양태놈을 못 만나 서운했으나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자신의 온갖 설움과 욕설을 퍼부은 탓에 산을 오르던 때의 답답하고 뻑뻑한 감정들이 쓸려나가 심정은 한결 개운해 있었다.
  눈이 한 자 가웃은 실히 쌓인 미끄러운 내리막길도 수백 번 오르내린 허준에게는 익숙했다.
  눈에 빠진 옷자락이 일변 또 체온에 녹아 가삭가삭 소리가 나도록 얼어붙어 있었으나 하늘엔 언제 눈보라가 쳤었느냐는 듯이 구름이 벗겨지고 열이렛달이 휘영청 밝았다.
  골짜기를 건널 때 들으면 결코 기분이 좋지 않은 부엉이 소리가 서너 번 따라왔고 컹컹 메마른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리다갈 멀어졌다.
  가파른 골짜기를 벗어나자 허준은 지름길을 택하여 용천군민의 원찰인 용호사의 경내로 들어섰다.
  그 길은 허준에게는 익숙한 길이었다.
  '이런 버릇도 고쳐야 해.'
  걸핏하면 술냄새를 풍기면서 고성방가의 방자한 모습으로 양태놈들과 함께 때아닌 시각에 경내를 가로질러가면 잠자던 중들이 뛰어나오기 마련이고 더러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중들도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닌 허준의 그런 행동이 자연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고 부처님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그녀는 다시는 스님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허준은 한마디 말대꾸도 없는 부처에게 그렇게 온갖 소원을 의지해 사는 어머니가 때론 애처로워 다시는 용호사의 경내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허준은 실소했다.
  쥐죽은 듯한 경내 그 눈 위로 경내를 침범해온 자신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는 걸 본 것이다.
  그러나 허준의 기분은 상쾌했다.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보다 마치 자기가 이 세상을 제일 앞장서 혼자 새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기분이었다.
  허준의 발자국은 대웅전 높다란 돌축대 위로 뛰어오르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허준이 대웅전 높다란 추녀 밑을 돌아 딸랑거리는 풍경 밑으로 뛰어내렸을 때였다.
  이 세상 자기 혼자 새 길을 열며 가고 있다는 허준의 오만한 착각을 비웃듯 그가 향하는 대웅전 널따란 마당엔 이미 한 사람의 가로질러간 발자국이 나타나 있었다.
  "웬 땡추중이 남의 길을 가로막아."
  스님이라 하여 욕할 원한이 없는데도 양태놈의 말버릇을 따라 허준의 입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유독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던 그 욕 잘하는 늙은 중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준은 혼자 빙긋이 웃었다. 만나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런 시각에 미처 몽둥이도 못 들었을 그 늙은 중과 딱 마주서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했다.
  허준은 그 발자국을 쫓아 잰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발자국은 경내를 빠져나가며 길게 이어져 있었다.
  염불에 송불에 수양도 급한 터에 그 되알진 욕지거리하며 여차직하면 몽둥이부터 들고 보는 노스님이 반드시 이 발자국의 주인공일 보장이 없는데도 허준은 좀더 빠른 걸음으로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곡차 생각이 나서 내려갔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런 밤중이니 숨겨놓은 과부라도 있어서 찾아가든가.'
  그 망상도 언젠가 몽둥이에 쫓기며 산비탈로 뛰어올라 양태가 그 노승을 약올려주던 소리였다.
  허준은 혼자 웃어댔다.
  경내에 침범한 줄만 알지 아들이 그 망나니 양태놈들과 노승에게 그런 욕지거리까지 하며 놀린 줄을 어머니가 알았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나서였다.
  웃던 허준이 문득 걸음을 세웠다.
  이제야 보니 그 발자국은 남자의 커다란 발자국이 아닌 여자의 작은 발자국이라는 것과 발자국 따라 치마가 쓸고 간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계집이라구?'
  "이 시각에 계집이 이 눈 속을 왜 혼자서 다닌단 말인가?"
  허준의 관심에 또 다른 불이 붙었다. 시선을 들자 발자국은 이미 주위에 나타나기 시작한 마을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허준은 달리기 시작했다. 만나서 어쩌잔 말인가. 누군지 알 리도 없고 알아봤자다. 아마도 그 행동은 여자를 쫓는다는 심정보다 눈구덩이 속에 얼어붙은 발등 때문인지도 몰랐다.
  인적도 없는 그 눈길을 허준의 하얀 입김이 계속 달렸다. 이어 허준이 나아가던 몸을 세웠다.
  너무 달려왔던 때문인가 갑자기 여자의 모습이 20여 보 앞을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 ...!"
  문득 여자가 허준을 돌아보았다.
  허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인상을 알 만한 거리는 아니였으나 젊은 여자였다.
  아! 댕기가 허리 밑으로 처진 처녀였다.
  " ...!"
  잠시 허준은 서 있었다.
  돌아보았던 처녀가 이미 주위에 촘촘히 박힌 민가를 의식했는지 잠시 놀란 듯한 모습을 보였다가 다시 서둘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이상해진 건 허준이었다.
  조용히 멀어져가는 처녀를 보며 서 있던 허준도 마치 뒤나 밟듯이 거리를 두어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닌밤에 인적을 느꼈는지 어느 삽짝 안에서 요란히 똥개가 짖어댔고 그 소리에 호응한 개 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장옷을 쓴 품하며 걷는 맵시가 허드레계집 같진 않군.'
  허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만치 역참이 보이는 지점에서 처녀가 뒤돌아보았다.
  허준이 자기도 모르게 따라붙어 처녀와의 거리는 십여 보 앞으로 좁혀져 있었다.
  허준이 자기도 모르게 밭은기침을 했다. 처녀는 내외를 하는지 몸을 곁으로 세워 비켜섰다.
  앞서 지나가란 뜻이었다.
  허준은 지금까지 밟아오던 처녀의 발자국을 벗어나 성큼성큼 다가갔다.
  외면해 선 처녀의 태깔이 어딘지 모르게 고와 보였다.
  곁을 지나며 허준이 흘긋 처녀를 돌아보았다.
  장옷을 여며쥔 위로 눈길을 내리깐 처녀의 음전한 모습과 희고 반듯한 이마가 보였다.
  지나쳐가는 허준의 가슴이 문득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십여 보 지나자 허준은 자기도 몰래 돌아보았다.
  마악 뒤따라오며 걸음을 떼놓던 처녀가 주춤 섰다.
  허준이 짧게 망설이다가 처녀에게로 다가갔다.
  처녀가 굳어진 듯이 다가서는 허준을 보았다.
  가까이 본 처녀는 여전히 장옷을 꼬옥 여민 모습이었으나 놀란 듯이 상큼 돌린 눈이 양가에서 교육받은 싸늘한 기품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시각에 부리는 것들도 데리지 않고 어찌 혼자 다니시오?"
  맨상투의 자기야말로 행색이 엉망이면서 허준이 말을 걸었다.

    4
  가로막은 사내를 보며 낭자의 눈이 일순 경계의 빛을 띠었으나 당황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머리에 갓이 없는, 맨상투이긴 했으나 사내의 몸에 걸친 사대부의 복식을 신뢰한 건지도 몰랐다.
  "시각이 야심한 줄 알면 어찌 아녀자의 가는 길을 함부로 막으시오니까."
  내외하여 조금 시선을 비키긴 하였으나 낭자의 목소리는 파란 빛깔을 띤 듯이 맑았다.
  "비켜주소서."
  말없는 허준에게 낭자가 다시 한번 채근했다.
  "가로막자고 막은 것이 아니오. 때아닌 시각에 깊은 산속에서 양가의 규수가 비녀 하나 데리지 않고 나타나니 혹 무슨 몹쓸 패거리들에게 행패나 당하여 쫓겨오는 게 아닌가 하여 말을 걸었을 뿐."
  용호사에서 나온 것을 알면서도 허준은 자기도 모르게 변명을 했다.
  " ..."
  "또 나는 남자라 밤중에 나다닌들 큰 허물 될 것이 없으나 보아하니 지체있는 집안의 낭자인 듯한데 이런 시각에 산속을 오르내리는 걸 알면 좋은 소문 안 나리다."
  허준이 턱도 없이 권력의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올시다. 위중한 병자의 쾌유를 빌고자 용호사에서 소원을 드리는 중에 폭설에 길이 막혀 있다가 이제 돌아오는 길일 뿐 ..."
  "병자의 쾌유를 빌고자 절에?"
  "그러합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구려. 하나 험한 산길을 낭자 혼자서 오갔단 말이오?"
  묻지 않아도 될 말을 묻자 낭자가 그제야 차갑게 응수했다.
  "비켜주소서."
  '이토록 태깔 고운 처녀가 용천땅 어디에 여직 숨어 있었던가 ...'
  문득 입안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허준이 또 한번 상큼 돌린 낭자의 눈을 지켜보았다.
  "나도 마침 읍내로 가는 길이오이다. 댁이 어디쯤이오니까."
  허준이 한 남자의 목소리로 비위 좋게 말을 끌었다.
  대답 대신 낭자의 작은 주먹이 장옷자락을 다시 여며쥐는 것이 보였다.
  고집스런 모습이었다.
  허준이 비켜서자 그 가슴 앞으로 낭자는 더 이상 눈길을 듬이 없이 총총히 걸음을 재어갔다.
  갑자기 낭자가 멀어져가는 만큼 허준의 가슴속이 허전해왔다.
  '누굴까?'
  민호가 4백여 호 인구 1천7백 명도 못되는 손바닥만한 용천군내에서 비록 조석으로 얼굴을 마주치는 얼굴이 아니요 남녀가 유별하여 서로 고개를 외면해 다닌다 할지라도 상대가 자기를 알든 자신이 상대를 짐작하든 위로는 제법 지체를 갖춘 집안에서부터 아래로는 상것들에 이르기까지 용천군내엔 웬만치 모를 사람은 없다고 여기는 허준이었다.
  '생부가 누굴까.'
  '자주댕기를 물린 치렁치렁한 머리가 필시 아직은 혼전의 아가씬데 병자란 혹 정혼한 사내일까.'
  엉뚱한 상상이었다.
  자기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허준은 다시 낭자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낭자는 다시 한 마장 길을 달빛과 눈길을 걸어 중품 자기를 구워내는 한전골 도공들이 모여 사는 10여 호 초라한 민가의 그늘로 접어들어갔다.
  허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공도 상것이다. 상것의 딸로 저런 기품을 지닌 아이가 있을 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쌓인 눈이 그녀가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가를 쉽게 알려주었다.
  돌각담을 둘렀으되 사립문조차 이어붙일 지체가 못되는 황토로 빛은 도공들의 기다란 토담집 하나가 다닥다닥한 다른 도공들의 집과 외따로 떨어져 산더미 같은 소나무 장작더미 사이로 끼여붙어 있었다.
  집안엔 아무도 없는 듯이 보였다. 적어도 눈이 내린 시각 후론 마당에 아무도 나다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돌각담을 돌아온 낭자의 발자국만 희미한 호롱불이 비치는 방문 앞으로 이어져 있었다.
  "식구도 별로 없는 모양이로군."
  담 밖에 서서 허준이 혼자 뇌까렸을 때 돌연 방안에서 신음이 섞인 늙은 남자의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 ...!"
  "아버님!"
  낭자가 짧게 외치는 소리가 났다.
  허준이 자기도 모르게 마당에 뛰어들었을 때 방안에서 낭자의 조용한 음성이 새나왔다.
  "다희 돌아왔습니다. 제 얼굴이 보이시옵니까?"
  그 대답과 관계없이 늙은 사내가 갑자기 허물어지듯 약한 소리를 뇌는 것이 들렸다.
  "잘못 왔어. 정녕 잘못 온 길이야."
  "눈을 떠보소서, 아버님."
  "지금쯤 북청에서는 적소가 오래 빈 걸 보고 귀양 온 죄인이 사라졌다 하여 난리가 났으리."
  허준의 하얀 입김이 들이마셔졌다.
  늙은 사내의 탄식이 다시 이어나왔다.
  "조정에 죄를 지었으면 적소에서 목숨을 떨군들 그 또한 사대부의 본분이어늘 병든 몸 고쳐보겠다 몰래 지경을 벗어나 이 먼곳까지 와 쓰러지다니."
  "아버님."
  "살아 무슨 영화를 더 보겠노라 예까지 왔노 ..."
  "마음 편히 가지소서, 아버님."
  "사행길 오가던 적이 이미 세월이 암만인데 ... 그런 큰 명의가 서북의 이런 벽지에 오래 머물 리 없단 생각을 왜 미리 못하고 서."
  "심화를 끄시고 몸을 추스르신 후 배소로 돌아가 계시면 죄명이 풀리어 다시 한양에 돌아가실 날이 계실 것이옵고 그때 소녀가 한사코 그 의인을 찾아 아버님 병환을 낫도록 ... 그 의원은 찾을 길 없어도 고장마다 고을마다 의원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의원도 의원 나름."
  늙은이의 탄식 속에 미련이 비쳤다.
  "사신 행차 따라 명나라 오가며 얻은 이 병을 모두 병이름조차 종잡지 못할 때 의주땅에서 그 의원만이 내 병세를 알아 오늘까지 내 명을 이어 줬거늘 ... 그만치 덤으로 더 살았다 생각은 못하고 한 살이라도 더 살아보려 배소조차 버리고 바득바득 예까지 온 내가 가소로워."
  기운이 진한 듯 늙은 사내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딸도 그 기진한 아비의 머리맡에서 뜬눈으로 앉아 있을 참인 듯 더 이상 말소리가 나지 않았다.
  바람이 일며 밤기운이 급속도로 냉각해왔다. 코끝과 얼굴이 계속 따가웠다.
  허준은 그제야 부녀가 왜 도공들이 버려둔 토담집 구석에 있는지 그 연유를 알았다.
  아비가 몸을 추스르면 낭자는 그 아비를 부축해 새벽길이라도 나서 북청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 허준은 이미 안달하지 않았다. 처음 본 순간 상것의 딸이 아니랄 걸 직감했으나 방안에서 들려온 부녀의 대화 속에서 낭자가 양반의 딸이란 걸 알았을 때, 아비가 조정에 무슨 죄를 진 인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본 낭자가 양반의 딸이라는 그 사실이 새삼 그녀에게로 다가서 려는 허준의 호기심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 허준은 알고 있었다. 자기의 신분은 양반의 딸과 혼인도 사랑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천인이 사족의 딸과 혼인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며 천인이 양녀와 혼인을 해도 이를 주선한 자와 천인의 주인이 모두 처벌되고 강제 이혼케 하는 것이 태종조 이후의 법이 아닌가.
  이성으로 자연스럽게 달아올라 다희라는 낭자에게 쏠렸던 허준의 관심이 급속도로 식어갔다.
  허준은 또 한번 자기가 뛰어넘을 수 없는 높고 높은 담이 도처에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디서 새벽 첫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
  "다희 ..."
  돌아서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준이 방안에서 들려왔던 낭자의 이름을 문득 뇌었다.
  '성은 무얼까? 무슨 자 무슨 글자의 다희일까!'
  바람이 허준의 발치를 휘감고 지나갔다.
  이웃 도공의 토담집에서도 닭이 울었다.
  허준이 힘없이 발길을 돌려가기 시작했다.
  허준이 읍내 집 골목에 돌아왔을 때 눈앞 관아 쪽에서 사경인지 오경인지 시각을 알리는 바라소리가 들려왔다.
  허준은 높은 담 너머로 동헌 처마가 건너뵈는 별채 담 밑을 돌아가다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담을 넘었다.
  어머니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늘 익숙하게 내려앉는 담 안에서 허준은 그만 엉덩방아를 찧었다. 쌓인 눈 탓이었다.
  낮게 혀를 차며 허준이 자기 방 쪽으로 향했을 때 등뒤에서 나직이 방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불도 없는 방문 앞에 어머니가 서 있었다. 그렇게 나타날 자식을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어머니의 눈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아들을 바라보았다.

    5
  "들어오너라."
  어머니의 음성은 조용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거두어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었군.'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허준은 그런 걸 읽었다.
  어머니는 잔소리가 거의 없는 여자였다.
  아들로 인해 서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여느 여자들처럼 대놓고 함부로 퍼붓는 법이 없었다. 지금은 천한 신분이되 지난날 번듯했던 가문에서 보고 배운 바가 있는 그런 교양을 그녀는 지니고 있었다.
  허준은 자신의 형편없는 몰골을 돌아보았다. 맨상투에 흐트러진 머리카락하며 눈길 속에서 거침없이 돌아다닌 추한 옷자락하며 버선발은 흙투성이였다.
  허준은 옷자락만 털고 어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허준이 웃목에 자리를 정해 앉자 어머니가 말했다. 여전히 조용한 말씨 였다.
  "사또께서 초저녁부터 너를 기다리셨다."
  허준이 시선을 들었다. 첩의 신분이라 살을 섞고 사는 남자임에도 그녀가 사또라 부르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이요 허준의 아버지 허륜이었다.
  "사또가 왜오니가."
  "어제 오도곶 큰나루에 갔었다구?"
  "그랬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또께서 아시는 눈치시다."
  '그랬군.'
  국경이 가까운 의주의 관문은 엄중하고 까다롭다. 그러니 자연대륙을 오가는 밀무역꾼들이 용천지경의 해안선을 이용하고, 그 국금을 어기는 무리를 적발하고자 오도곶에 닿는 크고 작은 배의 짐이며 그 선객들의 동태에 대한 기찰은 늘 엄했다.
  더구나 해주로 가는 큰배이고 보면 어느 구석엔가 변복한 기찰포교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을 것이 상상이 갔고 사또의 자제인 허준의 다른 때 같지 않은 행동들이 눈에 안 띄었을 리 없다.
  " ..."
  "두 번이나 사람을 건너보내셨어. 밤이 늦더라도 네가 들어오는 길로 들여보내랍시는 영이시다. "
  " ..."
  "의관을 새로 정제하고 가 뵈어."
  허준이 침묵을 깼다.
  "날이 곧 밝습니다. 여직 기침해 계실 리 없습니다. 날이 밝은 후에 건너가죠."
  "양탠가 하는 봉수대에 있는 네 친구 그 아이가 방금 또 다녀갔어."
  "양태가?"
  "분부가 지엄한데 사방으로 네 행방을 찾아도 네 모습이 보이지 않으매 혹 또 봉수대에 올라갔나 하고 사람을 시켜 올려보냈더니 그 아이가 대신 불려내려온 모양이다. 봉수대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대체 어딜 돌아 다녔더냐?"
  몸부터 일으킨 후에 허준이 대답했다.
  "가뵙고 오겠습니다."
  의관을 새로 갖춘 허준이 동헌 높다란 뜰 아래 나타났을 때 사또의 영에 초저녁부터 주눅이 든 모습의 낯익은 이방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아니 이제야 나타나면 어쩌는가! 대관절 어디에 숨어 있었던가."
  "내가 왜 무엇이 두려워서 숨어."
  허준이 차갑게 대꾸하자 이방이 몸을 움츠리며 눈알을 희번덕 굴렸다.
  "양태놈은?"
  "또 그대를 찾으러 어디론가 달려갔어. 속히 오르게."
  이방이 앞장서 댓돌 위로 올랐다. 동헌 뒤쪽 사또가 공무 중에 더러 쉬기도 하는 사처에 밝혀진 환한 불빛이 허준의 눈에 들어왔다.
  사또의 눈이 방문 밖에 달린 것도 아닌데 이방의 허리가 휘며 방안을 향해 나직이 아뢰었다.
  "사또께선 아직 기침해 계시오니까."
  대답 대신 아버지의 기침소리가 났다. 이방이 허준에게 어서 들어가라고 눈짓했다.
  허준은 한번 심호흡을 하고 아버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닫힌 방문을 향해 이번에는 이방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너흰 물렀거라."
  방안에서 허륜의 목소리가 쩌렁하고 났다.
  이방이 발소리를 죽이며 어둠 속으로 내뺐다.
  "소인 사또의 부르심을 받자와 대령했사옵니다."
  허준이 아버지의 안색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며 아뢰었다.
  소인이라고 법도 따라 자신을 낮추어 표현하고 있으나 그런 때 아버지를 보는 허준의 눈빛은 소심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곁의 사람들이 당황하도록 대담했다. 그 눈빛은 늘 나는 당신의 아들이노라 주장하고 책임을 묻는 듯한 무엄한 눈빛이어서 죽은 추씨는 항상 허준의 그런 눈을 향해 "저 눈빛! 저 눈! 저 사람 잡을 눈" 하며 동동거렸었다.
  침묵이 길었다.
  그 침묵을 깨고 생부가 입을 열었다.
  "그 갓은 또 어디서 났느냐."
  오도곶에서 찢어 팽개친 갓 얘기를 생략한 물음이었다.
  "여벌로 있던 것올시다."
  "그 갓, 앞으로 머리에 얹지 마라."
  " ..."
  "애초 갓은 머리를 보호하고자만 쓰는 것이 아니요 신분을 내세우는 표적인즉 그것을 알 게다. 너 또한 오늘 네 머리에 얹힌 갓을 팽개친 것이 아니리."
  " ... 사또"
  "그리고 오늘은 사또란 말은 하지 아니해도 되리."
  " ...!"
  "난 지금 네 생부로서 너와 마주앉아 있는 것인즉슨 ..."
  " ...!"
  허준의 눈이 번쩍 들렸다.
  '생부라니?'
  적어도 아버지는 한번도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적이 없다.
  "생부로서오니까?"
  허준이 들뜬 듯이 다짐했다.
  그 아들을 허륜이 지그시 건너다보고 있었다.
  "사또 아닌 생부로서오니까?"
  허준이 다시 또 다짐하는 소리를 했다.
  "그러니라."
  안면을 덮은 거친 수염 속에서 허륜의 음성이 부드러웠다.
  "새삼 왜오니까?"
  "이제 너의 모자와 헤어질 때가 온 듯하므로."
  "헤어지다니요?"
  " ..."
  "누가 말씀이오니까? 저와 아버님과? 헤어지오니까?"
  "왜오니까! 어째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그건 네 어미의 오랜 소원이었은즉 ..."
  "어머니의 ..."
  "몰랐더란 말이냐, 네 어미의 소원을."
  "비록 네가 머리에 큰갓을 쓰는 양반은 될 수 없으되 천적에서 몸을 뽑아 상민의 작은 신분이라도 지니어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 그게 네 어미의 소원인 걸 몰랐더냐."
  "하오나 어머니의 소원일 뿐 이미 천적에 떨어진 몸이온데 국법에 저촉됨이 없이 천적에서 몸을 뽑을 수가 없겠지요. 소자도 그쯤은 아옵니다."
  허준의 조소 어린 듯한 억양을 생부는 말없이 건너보고 있었다.
  "어미도 저도 천적에서 몸을 뺄 수 있는 것은 적몰된 어미의 집안이 다시 회복되기 이전에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일일 터인데 우리 모자가 정녕 천적에서 몸을 뽑을 길이 있사오니까."
  "조정의 정치적인 변동이나 성쇠는 변방의 한낱 작은 무반인 애비로서 짐작할 길이 없다. 하나 너희 모자와 나와의 오랜 인연을 생각하고 장차 너의 일생을 생각하여 애비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정을 쓰는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네 나이 스물둘, 국법에 따라 신분은 미천할지라도 내가 보는 안목에 이젠 능히 제 어미 하나는 건사하리라 여기어 떠나보내려는 것이다."
  " ... 떠나보내신다면 어디로?"
  "네 태생 네 신분을 아예 단념하여 이대로 조용히 내 그늘에서 살고파 한다면 그도 말리지 않을 것이요, 내 슬하를 벗어나 새 세상을 찾아나서겠다면 기회는 지금일 것이야."
  "기회?"
  "수년 동안 각지에 대흉이 들어 각처에 고향 떠난 유랑의 무리가 넘치고 있어 각도에서 그 백성들을 본고장으로 되돌려보내려 하고 있으나 떠나온 고향을 순순히 돌아갈 유민이 어디 있겠느냐? 또 매번 이런 일이 있고 나면 흉년을 맞는 곳과 풍년을 맞은 고장과 인구가 뒤섞이기 마련이고 특히 흉년을 맞아 유민을 많이 낸 관장은 문책이 따르기 마련이라 타관에서 흘러드는 유민에게 관대하기 마련이라 ..."
  "떠난 후 죄를 짓거나 풍속을 해치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따위, 또 입길에 오르내리는 망나니짓만 안한다면 그 고장에 뿌리를 내릴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 꿈 같은 일이 ..."
  "마침 새 상감 즉위하시어 관리들이 덕을 펴기에 애쓰고 있으니 그 또한 길 떠나는 사람에게는 기회라 할 것이요 만일 피치 못하도록 궁지에 몰릴 경우 그땐 애비의 이름을 빙자해도 되리라."
  허준의 입에서 예기치 않던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아버님!"
  "너희 모자 떠날 것을 결심한다면 너희가 잠시 의지할 곳이 있는 고장을 정해주마. 남쪽 경상도 땅에 산음현(산청)이라는 곳이 있고 그곳 현감이 애비와는 호형호제하는 사람으로 애비의 서찰을 보이면 가히 너희 모자가 호구할 생업쯤은 주선해줄 것이다."
  신분에의 탈출, 그걸 아버지가 주선할 줄이야!
  허준의 목이 잠겨갔다.
  "아버님!"
  벌겋게 달아오른 허준이 방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6
  허준이 아버지 방을 나왔을 때 붐하니 동이 터오고 있었고 관졸들이 동헌 넓은 마당의 눈을 치느라 떠들썩했다.
  "경상도 산음현이라 하시더냐?"
  아버지와 있었던 얘기를 자초지종 전하자 어머니는 다시 한번 다짐하듯 되물었다.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혹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사오니까?"
  "없다. 남도 쪽에는 가본 적이 없으므로 ... 허나 ..."
  " ...?"
  "서찰을 써주마 하시는 사또의 그 죽마고우라는 분의 함자도 말씀하시더냐."
  "그 말씀은 안 계셨습니다."
  "그분인 게로구나."
  어머니가 나직하게 어떤 추억을 담아 혼자 뇌었다.
  "그분? 누구오니까?"
  아들의 의문을 무시하고 어머니가 되물었다.
  "그래 네 작심은 어떻게 아뢰었느냐."
  "가야지요."
  "간다고?"
  "잘 압니다. 세상천지 어딜 간들 신분을 뒤바꿀 그런 어수룩한 땅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 그러나 저자가 허준이노라 날 속속들이 아는 이 용천땅에서만은 떠나고 싶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누가 뒷배를 보아 줄 것이다 하시는 그 누구를 의탁해서가 아니라, 설령 ..."
  "설령?"
  "낯선 고장에 숨어들어 화전을 일구어먹을지언정 일단은 이곳을 떠나 새로 태어나는 기분으로 살고 싶다는 것이 오늘까지 감추어온 소자의 본심올시다."
  "그건 네 본심일 뿐, 또 그 본심이 아무리 절실하달지라도 기분만으로 어찌 새로 태어날 수 있느냐."
  " ..."
  "이승의 네 목숨이 죽은 후 새로 다시 어떤 양반 문벌 안에 정실 자식으로 환생하지 아니하는 한 네 이름 그대로는 이 세상 어딜 가건 넌 허준일 뿐."
  " ..."
  "모르느냐, 에미 말?"
  "압니다."
  "아는 얼굴이 아니야."
  "너무도 익히 아오나 ... 하오나 어머님! 허준이 됐건 김준이 됐건 황차 그런 성씨가 지금의 내게 무슨 의지가 되오리까. 차라리 성도 이름도 없을지라도 누구의 압제 받지 않고 누구의 눈치 개의할 바 없이 머리를 하늘로 두고 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떳떳이 살 수 있다면."
  "그런 세상은 없다, 적어도 우리 모자에겐."
  "그러니 찾아가자는 것올시다. 그곳이 산속 짐승의 가죽을 벗겨먹고 사는 사냥꾼의 생활이건 바닷가 그물로 고기를 잡아먹고 사는 어부의 신세가 됐건, 이곳에서의 이름과 신분을 버리고 떠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소자의 소원은 족합니다."
  " ..."
  "오히려 저는 지금 어머니의 결심을 알고자 합니다. 소자 따라 새 세상을 향해 떠날 수 있사온지? 가신다 하면 그건 이 용천땅뿐 아니라 아버님과는 영이별이 되오리다."
  허준은 어머니의 어둡고 난감한 눈을 보았다.
  "사또와 영이별은 못해. 그분은 ..."
  하고 어머니가 남편의 얘기를 덧붙이려 했을 때 아들이 그 말을 막았다.
  "이 자식과 헤어질지라도 말씀이오니까?"
  "준아!"
  어머니가 비명처럼 외쳤다.
  "소자는 떠나기로 이미 아버님께 다짐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새 길이 보이는 이상 가다가 쓰러질지언정 떠나옵니다."
  "어밀 버리고서라도 말이냐?"
  "어머님!"
  "그러한 게냐?"
  "기왕, 새삼 이곳에 남아 있다 한들 듣기 좋아 사또의 자제일 뿐, 기실 아버지와 우리 모자는 사는 길이 서로 다르옵니다. 모르시오니까."
  "아무리 그렇기로 ... 준아!"
  "만인 환시중에 아버지요 남편이노라 부를 수 없는 신세를 생각하소서. 그 사정을 알고 인정을 써주시는 이 기회를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딴때없이 강하게 빛나는 아들의 눈을 어머니가 망연해서 보았다.
  허준이 결론처럼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종단에는 헤어지는 것이옵니다. 부자지간도, 제 살을 베어먹일 듯이 사랑하던 사일지라도 조만간 이별은 있는 것올시다. 남으려거든 남으소서."
  항변하려는 어머니를 무시하여 아들이 말을 이어갔다.
  "떠나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소자는 잊지 않으오리다. 잊지는 않을 것이나 다시 한지붕 아래 사는 인연은 바랄 수 없지요."
  "나와 헤어질 수 있느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목안에서 갈라졌다. 아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녕 그러하냐?"
  "보내주소서."
  아들의 메마른 음성이 어머니의 귓전을 울렸다.
  "아버님 곁에 끝내 남기를 원하신다면 소자 더 채근하진 않겠습니다.
하오나 함께 떠나지 않으신다면 소자만이라도 보내주소서."
  어머니의 안색은 해쓱하니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그 참담한 그리고 애원하듯한 어머니의 숨소리를 들으며 아들은 미동도 않았다. 문득 허준의 눈속에 작은 연민의 정이 지나갔을 때 끝내 어머니가 무너졌고 어머니의 어깨에 아들의 손이 조용히 놓여졌을 뿐이었다.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모자를 비추고 있던 등가 위 연꽃을 닳은 촛대에서 촛농이 심지를 태우며 떼구루루 한 방울 굴러내리다 멎었다.

  "어찌 대답이 그렇게 싱겁소?"
  허준이 어머니의 방에서 물러나와 자기의 방에 돌아와 누웠을 때 사또의 영에 쫓겨 허준을 찾아 헤맨 양태놈이 돌아왔고 간밤의 허준의 행적을 캐묻다가 미지의 처녀에 대한 얘기에 이르자 앉음새를 고치며 바짝 흥미가 움직이는 얼굴을 했다.
  "행동거지하며 말씨가 어엿한 양반가문의 규수임에 분명해."
  "양반도 양반 나름이우. 끈 떨어진 양반 있고 날개 달린 양반 있지 않겠수."
  허준이 맥없이 웃자 양태가 말했다.
  "어엿한 가문의 양반이라면 무엇이 답답해서 하필이면 이 평안도 북쪽까지 발길을 했을라고. 사신 행차 따라 오가는 떨거지가 아니라면 말요."
  "양반보고 떨거지라니."
  "핫핫핫, 즈희가 우릴 우습게 아는 거나 내가 즈희를 우습게 아는 거나."
  "할 얘기도 있을 법하고 나 눈 좀 붙인 후 해질녘에나 다시 만나지 않겠느냐."
  "도공들의 마을이라면 그릇때기 사러 가는 길이 아니면 상것들도 발길이 잦은 곳이 아닌데 그래 명색이 양반이라면 왜 그런 후미진 곳에 거처를 정했답디까."
  "내 알 바 아니야."
  "내 알 바 아닌 사람이 한밤중에 거기까진 왜 쫓아갔소?"
  양태놈이 느글느글 웃었다.
  "더구나 아랫것들도 안 거느리고 부녀 단둘이라면 ..."
  "뭐란 말이냐?"
  "무언가 광명천지에 얼굴 못 들고 다니는 죄진 것들이 분명하우. 내 짐작이 틀림없을 게요."
  "죄를 지고?"
  "그런 저희들 사정이야 아무튼 형님이 자기도 몰래 뒤쫓아갔다면 제법 태깔이 고운 아이 같은데 아 하룻밤쯤 잠을 못 잤기로 꼭 구들장 짊어지고 눈을 붙여야 하우? 가봅시다, 한번."
  "가서?"
  "심심턴 차 어쨌든 하루 소일거리는 된다 싶은데. 행색도 미심쩍고 혹 아오. 정말 세상의 눈을 피해다니는 자들이라면 어디 그 양반이라는 것들 잡아 꿇려놓고 큰소리 한번 내지르는 것도 재밌겠고 말요."
  양태놈이 오기 전에 쏟아지던 잠이 날아가고 있었다.

    7
  "병자 어쩌고 하더니 병자가 숨을 떨군 게 아니오?"
  허준이 그 양태의 흥미있어 하는 얼굴에 손을 들어 막았다. 남의 집에 뛰어든 분수로는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아니나다를까 낭자의 "아버님!" 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삼켜지며 방안이 조용해 졌다.
  이어 방문이 떠밀어지며 어둑한 방안에서 다희라 불리던 낭자의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 ...!"
  " ...?"
  양태가 숨을 삼켰다. 밤새 간병한 초췌한 모습이었으나 몇 올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에서 낭자의 눈이 서늘하도록 아름다웠다. 적어도 녀석에게는 처음 보는 미인이었다. 양태가 허준의 옆구리를 찔벅했다.
  " ..."
  낭자가 방문을 열고 나와 봉당에 내려서며 방문을 가로막듯 서서 허준에게 물어왔다.
  "뉘시오니까?"
  허준이 젖어 있는 그 낭자의 눈을 보았다.
  "어떤 연고로 찾아오신 분들이온지?"
  "우연히 지나던 길에 통곡소리가 들리기로 부지불식간에 뛰어들었소이다."
  새벽내 뒤따라왔던 그 발자국의 사내를 다희는 보았다. 외로움 끝에 잠사 떠올려보았던 사내 ... 그런데 분명 맨상투였던 사내는 지금 의관을 정제하고 있었다. 우연히 지나던 길이란 핑계일시 분명했다.
  그러라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죽어가는 아버지를 모시고 북청 배소로 한시바삐 돌아가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상황 외에는 ...
  "병자와 동행이란 말은 새벽녘에 들은 듯하오나 보아하니 수발을 드는 사람은 낭자뿐인 듯한데 혹 우리 두 사람 도움 될 일이 없으리까?"
  낭자의 눈빛이 짧게 갈등을 느끼는 걸 보자 양태가 끼여들었다.
  "우린 의심스러운 사람이 아니우.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용천고을 사또님의 자제시우."
  "용천 군수의 자제 ..."
  낭자가 자신의 신분을 뇌자 오히려 허준이 당혹했다. 사또 자제라는 걸 코끝에 걸고 그걸 위세삼아 여자에게 다가서는 따위는 허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왜 믿기지 않으시우? 성씨는 허씨, 이름은 삼수변에 이렇게 어떻게 어떻게 쓰는 준자요."
  "무슨 소릴 늘어놓는 게냐."
  "사또의 자제라는데 눈썹도 까딱 않으니 기가 차서 하는 소리요. 근데 대관절 댁들은 어디서 오는 사람들이오?"
  "물러나 있어."
  "분명 이 고장 사람은 아닌데 어째서 관아나 민가의 눈이 닿지 않는 이런 산비탈에 와서 머물고 있소. 방안에 있는 건 누구요?"
  "사또의 자제라는 건 소녀와 상관이 없는 일이오. 관명을 띠고 온 길이 아니라면 소녀를 희롱코자 마시고 돌아가 주소서."
  "무어라고, 희롱이라니. 어럽쇼? 아니 그럼 관명을 띠고 왔다면 볼일이 있단 말 같은데?"
  재빨리 어떤 약점을 맡았는지 양태의 억양이 불량기를 띠었다.
  "넌 물렀거라."
  "가만 좀 기셔보시우."
  더 가로막으려는 양태를 밀어내고 허준이 그녀를 향하자 이번에는 양태가 뻥해졌다.
  장난 겸 심심풀이 겸 끌고 온 건 자긴데 여자를 향한 허준의 눈빛은 장난기가 아니었다.
  "우연히 지나치던 길이라던 건 애초 꾸며낸 말, 부인치 않으리다. 물론 관명을 띠고 찾아들어선 것도 아니고 ... 허나."
  " ...!"
  "새벽녘 우연히 낭자를 만났을 때 어딘가 곤경에 처한 사람처럼 보이어 돌아가서도 자꾸 마음에 걸리기로 다시 찾아와 봤을 뿐 ... 물론 이런 마음도 주제넘은 일임엔 틀림없소만."
  " ..."
  "다행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없다면 이러쿵저러쿵 낭자의 사정을 캐물을 까닭도 없겠지요."
  " ..."
  "가자."
  허준이 양태에게 말했다.
  양태가 그 허준을 불만스레 돌아보았다. 허준이 앞장서 토담 밖으로 나섰을 때 낭자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났으나 허준은 돌아보지 않았다.
  양반의 딸!
  명문의 규수!
  정말 명문일지 어떨지 알 순 없어도 다희라는 처녀의 오만하도록 차가운 기품.
  그 양반가문에 묻어 있는 인간들의 겉모습. 그것이 설사 허식에 찬 오만이요 교만일지라도 허준은 그 양반의 존재 앞에 꺾이는 자신을 지그시 느꼈다. 꺾지 못할 꽃이라는 결론이 먼저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론과 명분과는 달리 허준의 가슴은 점점 뜨거워왔다.
  '새벽, 난 잘못 본 것이 아니야.'
  낮에 지척에서 정면으로 바라본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장옷을 벗은 그래서 드러난 가녀린 어깨의 선이며 하얀 저고리의 동정위로 추워보이는 뿌연 목, 그리고 높지는 않으나 옷고름을 단정하게 여민 낭자의 가슴이 여자의 가슴을 처음 보는 듯이 눈부셨다. 그 가슴 앞에 시린 주먹을 감싸고 선 그 손마디 위에 오목하게 작게 패이는 손등도 왠지 허준의 눈에 눈부셨다.
  문득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나란 존재가 그녀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어 잠시라도 더 곁에 있고 싶었다.
  허준이 저도 몰래 걸음을 세우자 양태가 그 허준의 팔을 잡으며 불만에 찬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디로 갈 셈이오?"
  "근본도 알지 못하는 계집 앞에 인정스레 굴어본들이오. 체면치레 다 차리구 ... 왜 그러시우, 갑자기."
  " ..."
  "소위포 퇴기년들 다루듯 하란 말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아니면 대수요?"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게냐."
  "방문 차고 들어가서 정체를 까발겨봅시다."
  "그러지 마라."
  "형님!"
  양태의 우악스러운 손이 허준의 소매를 챘다. 그 형님이란 표현은 무언가 일을 저지를 때 꺼내는 양태놈의 말버릇이었다.
  순간 허준의 입에서 뜻밖에도 격한 말이 나왔다.
  "장난칠 여자가 아니야!"
  "그럼 여기까지 왜 왔소?"
  "돌아가자."
  양태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내일이면 헤어질 계집이오. 아니 오늘 당장 어디론가 사라질지도 몰라. 양반이 그토록 밉다고 했지 않소. 더구나 세상 이목 피해다니는 양반 나부랑이 평소의 분풀이 좀 하면 어떻소!"
  "미쳤느냐."
  순간 두 사람은 홱 뒤돌아보았다.
  토담 너머로 낭자의 "아버님 아버님" 외치는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고 몸부림치듯한 울음소리가 뒤이었다.
  "기어이 죽었군."
  양태가 뇌까리자 허준이 몸을 돌려 달렸다.
  양태가 뒤따랐다.
  허준이 토담집 마당으로 뛰어들자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낭자가 경황없이 굴러나오며 절규했다.
  "살려주소서, 우리 아버님 살려주소서!"
  허준이 낭자를 밀치고 그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낭자가 뒤쫓아 들어왔다.
  이미 낭자도 체면을 잃은 모습이었다. 허준은 그 낭자가 쓸어안는 아랫목의 싸리가지처럼 메마른 늙은이를 보았다.
  양태도 뛰어들었다.
  "살려주소서, 의원 좀 불러주소서."
  늙은이를 안은 채 돌아보는 낭자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이미 죽었소."
  낭자의 울부짖음과는 관계없이 양태의 음성은 낮고 메말랐다.
  허준이 저도 몰래 낭자의 품에서 늙은이를 받아안으며 그 저고리를 헤치고 귀를 갖다댔다,
  야위고 얄팍한 가슴에 탱자알만한 온기가 남아 있으나 잡아보는 손목은 이미 차가웠다.
  까뒤집은 눈속에는 이미 검은 동자가 눈귀퉁이로 밀려가 있었다.
  "대체 어째서 이런 위중한 병잘 두고 ..."
  허준이 낭자에게 소리쳤다. 낭자가 다시 그 아버지를 뺏듯이 쓸어안고 무너지며 몸부림쳤다.
  "아버님 눈뜨소서, 아버님."
  허준이 양태에게 소리쳤다.
  "달려가거라. 속히 의원을 불러! 어서!"

    8
  달려나간 양태가 늙은 의원을 데리고 나타난 건 한식경이나 지나서였다.
  마당에 그 양태의 걸걸한 소리가 나자 오열하고 있던 낭자가 뛰어나가 의원을 맞았으나 허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의술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었으나 낭자의 아비는 이미 병자가 아니고 사체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낭자가 엎어질 듯이 의원을 끌고 방안에 들어왔다.
  그러나 과연 늙은 의원은 사체의 맥을 짚다 말고 흠칫 시선을 들더니 금세 자리를 물러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숨이 떨어진 지 이미 오래 됐어!"
  "아직 온기가 계시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봐주소서."
  의원이 다시 사자에게 다가앉으며 죽은 이의 눈꺼풀을 뒤집고 들여다보았다.
  이어 사자의 가슴 밑을 더듬었다.
  "이미 저승길 절반은 갔네. 이건 병자의 신체에 남은 온기가 아니여, 군불에 익은 훈기일 뿐이여."
  "방법이 없으리까?"
  허준이 무너질 듯한 낭자를 대신하여 물었다.
  "온 김에 침이라도 놔보란 말이오. 혹 ..."
  "혹이라니?"
  의원이 양태를 같잖다는 듯이 흘기더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제 몸에 기운이 남았어야 침을 놓든지 무얼 놓든지 할 것이지 숨 떨어진 송장이야 의원 아니라 천하없는 재주라도 어찌 살려? 차라리 그런 부탁이면 삼신할매를 잡고 빌 일이지."
  의원이 미련없이 의구 보따리를 들고 일어섰다.
  나가는 의원의 의구를 낭자가 붙들었다.
  "살려주소서, 부디 우리 아버님을 살려주소서."
  무어라 더 외치며 낭자가 마당으로 따라나갔고 대꾸 대신 의원이 탁 가래를 긁어 내뱉는 소리가 났다. 눈길에 달려온 것만이 억울한 모양이었다.
  "살려주소서!"
  낭자의 울음이 의원을 쫓아 토담 밖을 달리는 것이 들렸다. 양태가 허준의 턱밑에 다가앉았다.
  "재미보러 왔다가 송장칠 일을 만날 줄이야. 재수 옴붙었어."
  " ..."
  "나갑시다."
  "어디로?"
  "예서 더 뭘 할 참이오? 아무리 ... 친상 만난 계집을 상대로 노닥거릴 순 없잖소."
  "애초 노닥거릴 생각은 없었어."
  이번엔 허준이 화난 소리로 내뱉었다. 무너질 듯한 모습으로 낭자가 방안으로 되돌아왔다.
  양태가 눈짓했으나 허준은 양태를 상대 않고 물었다.
  "고향이 어디시오?"
  아버지의 죽음 앞에 고개를 떨구던 낭자가 정시했다.
  "보아하니 타관인 것 같은데 속히 고향에 사람을 보내어 상고를 기별해야 하지 않겠소?"
  일순 허준을 돌아보았던 낭자의 눈이 난감하게 배회했다.
  "낭자는 이 자리를 떠날 수 없을 게고 혹 내 도움이라도 개의치 않는다면 발빠른 방자 하나쯤 구할 수 있으리다."
  "고향 ...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모습이 어엿이 사대부의 차림이신데 고향이 없다니?"
  "아버님께서는 남달리 관운이 비색했던 분올시다. 새삼 고향이라 일컬을 만한 곳도 그리고 이제 와서 아버님의 불행을 기별할 만한 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 ..."
  허준의 수작을 흘겨보고 있던 양태의 눈길도 의아해졌다.
  낭자가 다시 아버지의 주검 위로 무너졌다.
  양태를 토담 밖으로 데리고 나온 허준이 이미 준비한 듯한 부탁을 차곡차곡 늘어놓자 그만 말허리를 끊으며 양태가 곱지 않은 눈을 떴다.
  "대체 미쳤소!"
  " ..."
  "항차 저 계집이 뭐요? 오다가다 마주친 생판 남 아니오? 그리고 난 싫어도 오늘쯤은 봉수대 직처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오."
  "네가 못 오면 다른 아이편에 보내. 죽은 이를 쌀 벳가지와 관도 하나 ..."
  "관? 허허허, 아니 형님."
  "그리고 죽은 이 앞에 밝힐 초도 몇 자루. 그 사람이 살아온 길이야 내 알 바 아니로되 저승길 떠나는 길에 촛불도 하나 못 밝힌다면 빈소가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
  "협기도 좋지만 생각해보시우. 죽은 자의 정체가 무언지 알지도 못한 채 섣불리 끼어들었다가 만일 저 죽은 이가 조정에 죄라도 얻어서 도피 중인 인물이라도 할 양이면 ..."
  " ...?"
  "장사까지 지내준 우린 발명의 여지 없이 금방 한패거리로 몰릴 텐데 그땐 어쩌려우?"
  " ..."
  "양반들이 짓고 다니는 죄는 곤장 몇 대로 끝나는 상놈의 죄하곤 다른 법이우. 알았거든 어서 갑시다."
  허준이 그대로 버티고 선 채 말했다.
  "내가 시킨 것 다 가져오도록 해. 네가 못 오면 다른 놈을 시켜서라도."
  툴툴거리며 양태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허준이 다시 토담 안으로 들어섰을 때 마당엔 그 허준을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 모습으로 낭자가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허준은 보았다. 낭자의 눈이 자기에게 절실한 구원을 청하고 있음을.
  " ..."
  허준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보냈소. 관곽도 부탁했고 장례를 치를 몇 사람 인력도 해 안으로 당도할 게요."
  "이 은혜를 어찌 갚으올지."
  낭자가 사나이를 정시하며 조용한 음성을 냈다. 친상을 겪고도 그 설움을 넘어선 의지어린 모습이었다.
  "돌아가신 이 곁에 계시오. 장례 치를 일은 내가 서툰 대로 지휘하리다."
  "집안의 성씨는 이씨이며 소녀의 이름은 많을 다에 기쁠 희자 다희라 부르옵니다."
  "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희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닫히지 않은 방문을 보며 허준이 따라들어갔다.
  죽은 이의 창백한 얼굴 앞에서 다희의 침묵이 길었다.
  "아까 동행과 밖에서 하신 얘기 들었습니다."
  " ...!"
  "그러합니다. 소녀의 아버지는 조정에 죄를 얻어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계시던 분으로 관직에 계실 제 명나라에 사행차 오가시는 길에 의주에서 우연히 어떤 명의를 만나 지병을 쾌유하신 바가 계시옵는데, 이제 다시 배소에서 그 병이 재발하시어 옛 그 의원을 만날 양으로 의주까지 갔다가 허행을 하고 배소로 돌아가던 길이올시다."
  "허행을 하고?"
  "관의 허락도 없이 배소를 빠져나와 어렵사리 의주에 당도는 했으나 그 의원을 만날 길은 없었고 백방으로 수소문 끝에 알아낸 바로는 그 의원은 본시 의주 사람이 아니요, 중국에서 넘어오는 약재를 구하고자 잠시 의주에 머물며 아버님을 만났을 뿐, 사는 곳이 경상도 산음이란 것만 들었습니다."
  "가만. 경상도 산음?"
  "소녀 또한 처음 듣는 고장으로 가본 적이 없습니다. 경상도 산음이란 곳을 아시옵는지?"
  안다고 할 수 없다. 용천을 떠나면 찾아가라시던 아버지가 일러준 고장이라는 것 외.
  "아직 가본 적은 없소만 얼핏 들은 듯도 한 고장 이름이라서 ..."
  "그래서 찾아온 그 용타는 의원은 경상도 산음 사람이란 말이오?"
  "그걸 의주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당시 아버님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위중한 병자들을 수없이 살려낸 탓에 유의태라는 그 함자를 여러 사람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유의태?"
  "거들 유 옳을 의 클 태의 유의태라는 함자이옵니다."
  '유의태 ...'
  장차 허준의 생애의 스승으로서 마주칠 그 커다란 인물이, 그러나 지금은 별뜻 없이 허준의 입안에 뇌어진다.
  아니 그런 생면부지의 이름보다 자기가 찾아갈 새 세상일 경상도 산음현이라는 고장의 이름이 하필 다희의 입에서 나옴으로써 허준은 그녀와의 만남이 어떤 운명적인 것으로 가슴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9
  양태가 돌아오기까지 허준은 자신이 어디에 앉아 있어야 할지 망설였다. 방안에는 죽은 이와 낭자뿐이었다.
  한참 지그시 낭자의 비탄을 건너보던 허준이 마당으로 나왔다.
  등뒤에서 방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낭자가 다가서는 기척이 났다.
  허준이 돌아보았다.
  사오 보 떨어져 선 채 잠시 시선을 떨구었던 낭자가 자기보다 거의 한 뼘이나 키가 큰 허준이란 사내를 정면으로 보았다.
  "외람된 물음이나 몇 가지 알고자 합니다."
  "하시지요."
  "유배된 이가 관장의 허락 없이 적소를 떠났다가 이렇게 타도에서 운명을 하시면 그 죽음을 유배지의 관장에게 알리는 것이 법도가 아니온지?"
  법도 ... 양반들이 즐겨 쓰는 그 말,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아 생전의 죄목도 억울타 하셨사온데 만일 이대로 장사를 치러 아버님의 운명을 관에서 모르는 바가 된다면 아버님께서는 유배살이가 무서워 잠적한 인물로 치부되는 게 아닌지 ... 자식으로서 그 점이 저어되어 물어봅니다."
  "자세히는 모르나 유배지의 관장에게 허락 없이 떠난 분이라면 의당 유배지의 관장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긴 해야겠지요."
  그 점을 짐작했는지 낭자의 표정이 막막해졌다.
  "하나 ..."
  허준이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이미 사람이 죽었으므로 관아를 찾아가 돌아가신 이의 신분과 연유를 밝히고 하여 이 고장 사또가 죄인의 죽음을 확인하면."
  "아버지는 죄인이 아니올시다."
  낭자가 짧게 외쳤으나 허준이 말을 이었다.
  "이곳 사또가 문서로서 북청의 관장께 기별하면 돌아가신 분께 분외의 의심을 살 일은 없다 여기오만 ..."
  잠시 말없던 낭자가 아버지의 신상을 나직이 밝히기 시작했다.
  "지난해 유월의 일올시다. 대행(임금의 죽음)하오신 상감께오서 병환이 위중하셨을 제 숱한 내의원 의관들이 시탕에 힘썼음에도 차도가 아니 계시므로 중전마마께오서 정원에 명하시어 상감마마의 시탕을 전담할 시약청을 설치했다 합니다."
  어의니 내의원이니 시약청이니 더구나 상감마마니 중전마마니 듣도 보도 못한 어려운 말들을 허준은 의아한 눈으로 듣고 있었다.
  "이에 종친부 부령으로 곕시던 아버님께서도 시약청에 파송되셨는데 이는 내의원 의원들이 비록 의술에는 정통하나 의원이란 거개가 출신들이 미천하므로 상감마마의 시탕을 둘러싸고 서로 공을 다투어 자신의 처방을 고집하는 사례가 많아 이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는데 불행히도 아버님이 입직하시던 날 상감마마께서 붕어하시고 말았습니다."
  " ..."
  "물론 아버님께서는 의관들이 처방한 탕제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으셔도 상감마마께서 승하하시면 그 탕제를 처방한 의관은 직무에 대한 도의적인 죄를 자처하고 귀양을 떠나기도 한다 하옵니다."
  "허나 아버님께서는 의관이 아니랬지 않소."
  "그러합니다. 허나 그런 큰일을 당하면 약방 제조나 또 탕제를 호송한 관원들도 죄를 자처하는 것이 관습이온데 또 이를 기화로 평소 권세있는 사람의 미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정말 큰 죄목을 덮어쓰게 마련이라."
  " ...?"
  "특히 평소 지병이 계시던 아버지께서 어의 연수담이란 사람과 사사로이 가까웠다는 것도 아버님을 미워하던 사람들에겐 아버지를 내쫓는 또 하나의 구실이 되었겠지요."
  " ..."
  멀리 한양.
  평생 자기와는 인연도 없을 조정이란 곳에서 벼슬아치들의 추잡한 싸움 따위 허준은 관심없다.
  낭자의 눈가에 물기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이 고장 사또의 자제분이라 하시니 혹 이 고장의 관원이 아버님의 죽음을 확인하고 돌아가신 분께 더 이상 욕됨이 없도록 ... 그런 방법을 강구해주실 수 없사올지."
  그 애원하는 낭자를 향해 허준이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사또, 사또, 그 사또의 자제 운운은 듣기에 민망하오."
  " ...?"
  "아버님이 이 용천 군수이심을 부정치는 않으나 난 정실자식이 아니외다."
  " ...!"
  문득 낭자의 시선이 똑바로 향해왔다.
  "허나 다른 건 모르나 낭자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일이라면 알아볼 수는 있으리다."
  그날 양태놈이 해질녘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더 기다리다 못한 허준은 다희에게 그녀가 궁금해하는 걸 알아본 후 함 안으로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기고 읍내로 돌아왔다.
  곧장 사또의 처소로 들어섰다. 군민들의 자잘구레한 송사거리 중 미진 한 것들이 남았는지 형방과 이방을 불러들여 대여섯 두루말이를 펼쳐보고 있던 허륜이 아들이 찾아든 연유를 몇 마디 묻다가 유배된 죄인이 자신의 관할지경 내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눈꼬리를 치켜떴다. 이어 그 아들의 입에서 여자의 이름이 나오자 이방과 형방을 내보낸 후 정색하고 부자가 마주앉았다.
  "여부가 있을 리 없다. 의당 검시를 해야고말고."
  "검시를 하여 죄인의 죽음을 확인하면 그 가족들은 북청까지 압송되지 아니하여도 되오니까."
  "딸도 죄인이 아니라면 개의할 바 없으나 한낱 그 인연만으로 어찌 남의 장사를 도맡고 나서는고?"
  "모르옵니다."
  "스스로 행하는 일이언만 자신이 몰라?"
  " ..."
  "남의 불행을 도와준다 함은 있을 법한 협기다만은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여자면 장례를 치른 후엔 어쩔 생각인구?"
  " ... 떠나겠지요."
  "어디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 ..."
  " ..."
  "너 또한 이미 이곳을 떠나기로 한 터에 네가 미장가전이란 것이 내 심중에 걸려 있던 터라 아침나절에 어미하고도 혹 떠나기 전에 짝지을 처자가 없을 것인가 의논했다만 허나 그 낭자도 너와 맺어질 시람이 아닌 듯하구나."
  " ..."
  "종친부의 부령이면 종오품 관원으로 결코 만만치 않는 벼슬일뿐더러 더구나 네 신분으론 양반의 딸과 혼인할 수 없다. 신분이 틀리는 혼사는 국법이 엄중히 금하는 일이므로."
  허준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혼인까지 생각한 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냉정하게 그 앞을 되받았다.
  "나도 네가 그쯤은 익히 안다고 믿어 더 다짐하진 않으리라."
  부자의 침묵은 길었다.
  그때 아버지가 입을 열어 의외의 한마디를 보탰다.
  "세상의 법도가 그렇게 지엄한 것이기는 하다마는 신분을 올려 처신하는 것도 아니요 당산자가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다면, 세상에 그렇게 근본을 감추고 사는 사람도 없진 않지."
  " ...!"
  사또의 영을 받아 시체를 검시할 형방과 군교들이 공방의 왈패 두 놈에게 관을 지우고 허준을 따라 한전동 도공마을에 들어섰을 제는 짧은 겨울해가 거의 기운 시간이었고 그 앞장선 허준이 다희가 있는 토담 골목으로 굽어들자 토담벽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며 허준을 기다리던 모습의 낭자가 내닫듯하다가 우뚝 섰다.

    10
  눈비탈을 오르기란 용이하지 않았다. 멜빵하여 진 관 속 죽은 이의 무게가 자꾸 허준의 발목을 미끄러뜨렸다. 그 기우뚱거리는 허준의 좌우에서 다희와 양태가 부축했다.
  이미 양태도 허준의 눈빛하며 언동이 딴 때처럼 장난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사또의 영을 받아 이방과 형방이 달려나왔다는 데 좀 긴장하고 있는 눈치였다.
  허준이 미끄러질 적마다 다희가 "이 은혜를 어찌 갚사올지 ..."를 자꾸 뇌었다.
  산소를 모르게 정하지 말라며 형방이 눈어림으로 정해준 닥나무 비탈 좀은 양지가 발라 눈발 사이로 마른 잡초가 둠쑥듬쑥 솟아난 곳에 다다랐을 때 허준의 이마엔 찬바람 속에서도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허준이 관을 내리고 다희를 돌아보았다. 다희의 눈이 한결 정을 담아 가까이 있었다.
  "아까 형방이 하는 말을 들었겠소만 행려자이고 보니 관에서 지정하는 곳에 산소를 써야 하는 모양이오. 상주로서 욕심이 없을 수 없겠으나 내 보기 그런 대로 양지바른 땅 같소."
  "이토록 애써주시니 무어라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 할지."
  "인사를 듣자는 게 아니니 주위 산세와 지형을 익혀두었다가 훗날이라도 다시 찾을 때 잊지 않도록 하시오. 이쯤 괜치 않으리까."
  다희가 대답 대신 횃불에 어리는 허준의 눈을 똑바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땅은 꽤나 얼어 있었다. 옥사정과 왈패 둘 그리고 도포를 벗어붙인 허준까지 돌아가며 곡괭이를 찍어댔으나 겨우내 얼어붙은 땅은 곡괭이 날과 자루를 번갈아 부러뜨린 채 채 두어 자도 파지지 않았다.
  삭정이를 끌어모아 날렵하게 부시를 쳐 화톳불을 피우고 다희에게 권하던 양태가 객기도 섞어 웃통 벗어붙인 훈 남은 곡괭이질을 두어 식경이나 하고서야 사람 허리가 빠질 만찬 묘혈이 만들어졌다.
  "아주 명당자리우. 땅속도 큰 잡석 없이 토질이 곱소."
  옥사정이 사또의 자제에게 공치사하듯 한마디 했다.
  하관하자 그때가지 애써 자신을 지탱하던 다희가 촛불이 펄럭이는 제물 위에 엎드러졌다. 띠어 묘혈 속에 내려앉은 관을 향해 '아버님'을 외쳐대다가 횃불을 든 허준에게 뛰어들며 혼절했다.
  두 발을 버티고 허준은 그녀를 안았다. 한삽 한삽 힘들게 파내던 좀전까지의 역사에 분풀이라도 하듯 옥사정과 왈패들이 묘혈 주위의 얼음 섞인 흙더미를 와르르와르르 관 위로 쓸어내리며 묘혈을 메우기 시작했다.
  품에 안긴 그녀의 얼굴은 뜨거웠다. 그녀의 하염없는 눈물이 허준의 가슴에 배어들었다.
  묘혈을 돌아보려는 그녀를 허준이 쓸어안았다.
  부풀어오르는 봉분을 옥사정과 왈패들이 밟아댔고 양태가 꺼져가는 화톳불을 다시 일구어 죽은 이의 망건이며 갓과 옷가지와 지팡이를 태우자 바람이 죽은 이의 체취가 밴 옷에서 매캐한 내음과 불꽃을 싣고 흩어졌다.
  돌아오는 길 그 비탈진 눈길을 그녀는 거의 몸을 못 가누고 허준의 팔굽에 자신의 팔을 걸고 의지했다. 눈을 강은 채 그녀는 이 뜻하지 않은 허준이란 사내가 짚어가는 대로 허공을 딛듯이 따라왔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멀찌감치 뒤따라오던 양태와 옥사정들이 어느 샛길로 접어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허준의 팔에서 자기의 팔을 뽑아 걸음을 세운 건 골짜기 입구였다.
  헤어져야 할 지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건 서로가 남남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었다.
  허준이 가야 할 읍내로 향한 달구지길이 논밭뙈기 사이로 길게 뻗어 있었고 한전골 도공마을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반대쪽 달빛 어린 산그늘로 꼬부라져 있었다.
  " ..."
  " ..."
  "오늘 베풀어주신 은혜를 소녀가 죽는 날까지 잊지 않도록 성함을 일러주시고 가소서."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족하오이다. 나란 사람 천한 태생으로서 남에게 알릴 만한 이름도 아니 가졌소."
  "태생은 유별한 건지 모르오나 생면부지의 사람, 더구나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다 함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올시다."
  허준이 좀 웃었다.
  "이 용천바닥에서 온갖 못난 짓 거리낌없이 행하고 다니는 망나니로 호가 난 자요. 곤경에 처한 이를 도왔다 하나 글쎄 ... 상대가 낭자가 아니었다면 내 스스로 과연 자진하여 도우려 했을지! 자꾸 물으니 내 얼굴이 뜨겁소."
  낭자가 허준의 그 자조를 무시하고 조용히 채근했다.
  "허 무엇이라 했사오니까?"
  허준이 눈길에 젖고 산소에서 흙범벅이 된 옆구리가 터진 낭자의 짚신 보았다.
  "돌아가 얼은 발을 녹이시오. 사내들의 발도 돌덩이처럼 얼었거늘 여자의 발이 어떻겠소."
  "밝히지 않으심은 소녀가 죄인의 딸이기 때문이옵니까?"
  " ...!"
  "그러하시오니까?"
  "아니오."
  허준이 부정했다.
  "결코 아니오."
  허준이 되풀이 부정했다.
  다희가 그 허준을 보았으나 허준은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이름을 밝힌 순간 지금까치의 그녀와의 인연이 끝난다는 아쉬움이 허준의 가슴을 죄어오고 있었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한 채 그러나 헤어지면 영영 서로 다시 만날 길이 없으리라.'
  허준은 하산하면서 줄곧 자기의 팔에 매달려 있던 그녀를 보았다. 쓰러질 듯한 순간순간 기대오던 그녀의 가슴이 따스했었다.
  "허준이라 하오. 준자는 일 준자."
  "일 준자 ..."
  "돌아가신 이의 죄가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얼핏 들었소만 그런 세상의 됨됨이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소. 내 앞에서조차 죄인의 딸이니 어쩌니는 듣기 민망하오."
  허준이 사이를 두어 말을 이었다.
  "그래 수삼일 산소에 치제한 후 어디로 향할 생각이시오?"
  산을 내려오며 줄곧 그 궁금함에 마음 죄던 한마디를 허준이 물었다.
  "아무래도 벼슬하던 집안에서 그토록 오갈 곳이 없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아니하오만."
  다희의 침묵이 길었다.
  "어차피 세상을 향해선 죄인의 .딸이니 천지간에 누가 쉬이 용납한 리가 없을뿐더러 혹 댁에는 몸종이라도 원하는 노마님이라도 계시지 아니 하옵는지?"
  "몸종이라니, 누가 몸종 노릇을 한단 말이오?"
  " ..."
  "없소. 내겐 나만치나 천한 어머니뿐."
  " ..."
  무언가 항변하려던 다희가 입을 다물었다. 천한 남자가 아니었다. 무언가 한이 맺히어 천하다  천하다 말하고 있으나 그녀는 허준이란 사나이에게서 외로움은 보았으되 한마디 천한 말도 행동도 보지 못했다.
  오히려 낯선 사람인 자기 아버지의 시신을 자진하여 짊어져 준 남자, 그리고 자기의 절망을 가슴에 품어준 허준이란 이 사내는 그녀가 새로 보는 남자였다.
  다희 그녀가 외간남자로서 가까이 바라본 남자는 과거 한 사람 있었다.
  집안이 떳떳할 제 정혼했던 사헌부 감찰인 김철헌의 자제 김상기.
  아버지가 죄로 몰리자 어느날 찾아들어 후원 별당 그늘에서 손을 잡아 위로의 말을 되풀이해 주던 남자. 옥같이 창백하고 나직나직한 말투며 그리고 주위에서 그의 학문을 촉망하던 남자.
  귀양 가는 아버지의 수발을 들고자 따라간달 때 귀양의 죄목이 크지 않으니 멀잖아 죄가 풀릴 것이라 위로하며 꼭 자주 오가리라 다짐하던 남자.
  그러나 김상기는 오지 않았었다. 몸은 못 와도 지체나 집안의 여유로 보아 하인 시켜 일자 서신쯤을 넉히 보낼 수 있었을 터인데도 다희가 마음속 시가라 여긴 그 집에서는 북청의 귀양살이 죄인과는 일체의 음신을 끊었다.
  다희가 일점 혈육이었음에서 북청의 죄인은 자주 정신을 가다듬어 내정한 사돈께 벽지의 딸을 거두어 가주길 간청하는 서신을 보냈고 딸은 그 서신을 엮는 아버지 맡에서 먹을 갈았었다. 그런 어느날 한양으로부터 기별이 당도했으나 그 인편은 얼굴도 비치지 않고 관내의 역졸에게 서신을 대신 들려보내고 그 길로 되돌아간 걸 알았고 서신의 내용은 파혼의 통지였다.
  딸에 대한 후고와 우정을 함께 끊긴 병자는 그 충격에서 병세를 더해갔고 날로 위중해지는 병세를 알던 그녀는 설사 유의태라는 의원이 천하의 명의라 할지라도 이미 아버지의 체력으로 의주까지 가는 건 무리라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 어려운 노정을 말리지 못하고 따라나서던 다희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병환을 고쳐야 한다는 일념에 모쪼록 아버지 병이 쾌차되고 하루빨리 청천백일의 몸이 되시어 다시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 자기와 김상기의 인연이 회복될지 모른다는 한가닥 간절한 소망도 있었던 것을 숨길 수 없다.
  하나 이제 아버님 돌아가시고 김상기와의 인연이 끝난 걸 그녀는 안다.
  고담준론에, 그 아름다운 명분에 얽힌 양반세계에서 있었던 처절한 배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에겐 허준이 말하는 신분이니 문벌의 격차 따위 하나도 귀에 들어오는 얘기가 아니었고 그가 낯선 자기에게 보여준 정과 의협심이 오히려 세상 어떤 명분보다 미더운 인간적인 신뢰였다.
  차마 말은 못하나마 그가 이끌어만 준다면 그의 가슴에 의지하여 천민들의 세상일지라도 거리낌없이 걸어들어갈 수 있는 심정이었다.
  이때 요란한 발소리가 나며 낯선 사내들이 헐떡이며 달려왔다. 낯선 사내가 아니라 초저녁 달려간 이방과 아버지의 사처에 붙박이로 대령하는 장번사령이었다.
  "마님께서 오시오."
  마님이라는 호칭이 맞지 않는데도 장번사령이 허준에게 듣기 좋은 소리를 고른답시고 너스레를 쳤다.
  허준이 의아한 눈길을 들었다. 가마조차 탈 신분이 못되는 어머니가 어둡지도 않은 길을 몸종에게 등불을 들려 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로?"
  허준이 장번사령을 돌아보자 이방이 대답을 가로맡았다.
  "우리가 여길 다녀가 자초지종 하회를 고하자 두 분께서 긴한 의논을 하신 듯한데 이때나 저때나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이 시각에라도 기어이 뵈러 오시겠다 하기에 모셔왔소."
  "뵈러 오다니 누굴?"
  등불 앞세워 다가온 손씨가 의아한 아들에겐 눈길도 없이 조용히 다희를 건너보았다.

    11
  생면부지의 처자임에도 그 다희를 보는 손씨의 마음이 설레었다.
  비천하게 태어난 그 한을 삭이지 못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던 아들이었다.
  천민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에 질곡을 느낄 적마다 아들은 글방의 서탁을 걷어차고 뛰쳐나가기 일쑤였고 그런 날 사람 놓아 알아본 아들의 행방은 사위포 퇴기년들의 술집이나 큰나루 색주가의 골방에서 봉수대 그 왈패들과 술에 젖어 쓰러져 있곤 하기 몇 번이던가, 하여 그 격하기 쉬운 아들의 심성을 가라앉히고자 일찍부터 사또께 간청하여 아들의 혼처를 수소문도 했었으나 그런 어머니의 배려에 대하여 아들은 술이 깬 후에도 한번도 탐탁한 얼굴을 보이지 않았었다.
  제법 참한 처자가 신부 후보로 나섰어도 끝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건 아들의 오기였다.
  아들의 신분에 걸맞는 처자들이란 뻔했다. 그쪽 또한 버젓한 전실 태생일 수가 없었고 그러나 아들에게 허락된 짝은 그런 속에서 찾는 길뿐이었다.
  아들이 비록 다른 '천것'들과 달리 부지런히 글을 익히고 제법 남아의 호연지기를 길러왔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도 종당엔 팽개쳐야 할 것들이 뻔한 이상 아들이 하루빨리 자기도 다른 천것들과 한치도 다를 바 없는 천것임을 자각하고 넓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고 자신의 신분과 걸맞는
여자와 맺어지길 바랐었다.
  더구나 멀잖아 새 세상을 찾아 멀리 경상도 산음현으로 떠나는 아들이 살아서는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없는 생부의 눈앞에 착하고 바지런한 성품을 지닌 아내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인 연후에 남편과 하직하고 싶었다. 하여 떠나기 전 누구를 택할 것이며 또 어떻게 아들을 설득할 것인 지 난감하던 차에 아들이 스스로 벌여놓은 이번 일의 전말을 전해듣자 너무나 놀랍고 기뻐 달려온 손씨였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다희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허준이란 사내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도 은혜려니와 자기를 대신하여 관아에 오가며 아버지의 죽음을 신고할 제 낯선 토담집에 혼자 남은 다희의 가슴에 오간 건 아버지의 죽음이 어찌 처리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 못지않게 묵묵히 자기를 도와준 허준이란 사내의 미더운 정이었고 혹 그의 행동이 강짜 심한 부인의 귀에 들리는 바 되어 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 초조함이요 그조차 눈앞에 없고선 이젠 이 세상 어디에도 기댈 수 없다는 외로움이었었다.
  거의 손씨가 앞장서다시피 하여 다희와 허준이 토담집 마당에 들어섰을 때 아들을 눈짓으로 말린 후 다희와 함께 손씨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허준도 어머니의 눈빛과 움직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허준은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결혼문제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고 가슴이 뛰었다.
  "친상을 당한 터에 당장 이런 말을 꺼냄이 정녕 예에 어긋나고 당돌한 소청인 줄을 익히 아는 터이긴 합니다만 지금 얘기한 바와 같이 밖의 저 아이와 나 우리 모자의 사정이 더 이상 이 고장에서 차일피일 시일을 지체할 사정이 못 되므로 하는 얘기올시다."
  손씨가 허준의 당면한 여러 사정을 간략하나마 숨김없이 들려준 끝에 완곡한 청혼의 말을 꺼내자 다희는 다소곳 이마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허준이란 남자가 스스로 밝힌 그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실감으로 오지 않았을뿐더러 이제 또 눈앞에 보는 생모 또한 행동거지하며 어투가 어느 한 곳 비천한 구석이 없는 사람임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아니 그 놀라움보다 더 크게 가슴이 뛰는 것은 한가닥 가슴 속에 오가던 의문--허준이란 남자가 미장가전의 어엿한 총각임을 확인한 때문이요, 지난날의 허혼자에게 절연당한 지금 천애고아나 진배없는 자기에게 마치 보이지 않는 운명의 어떤 커다란 손이 주재하는 은혜처럼 느껴졌다.
  "소녀의 소원은 이 고장 어디에 제 한몸 의탁할 곳을 구하여 하녀살이라도 하면서 아버님의 탈상까지 산소를 지켜 드리는 ... 그밖의 일은 아직 아무 경황이 없사와 ..."
  손씨가 조용히 끄덕였다. 곱되 어느 한 구석에도 자만심이 없는 자태 못지 않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 마음씨가 또한 손을 잡아주고 싶도륵 아름다웠다. 다희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는 물론 자식으로서의 소녀의 간절한 소망이옵고 결코 저를 도와주신 분의 은고를 허술히 알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소서."
  "자식으로서 어버이의 산소를 버리고 떠나기를 난들 어찌 권하오리까마는 저 아이가 행한 일들을 새삼 짚어보건대 평소 없던 너무도 절실한 행동이라서 정녕 반상의 격차를 의중에 아니 두신다면 혹 저 아이의 진정이 용납될까 하여 에미로서 대신하여 말씀드리는 것올시다."
  손씨가 자꾸만 망설여지던 대목--서로의 신분에 대해 입을 열자 그러나 다희의 대답은 조용하고 명료했다.
  "사람의 귀천은 행실이 가늠하는 것이옵지 신분의 고하에 구애되는 건 아닌 줄 아옵니다."
  "하오면 아버지의 시묘가 끝나면 저 아이를 맞아줄 수 있사올지?"
  다희의 작고 하얀 손이 꼭 마주 쥔 채 한창 말없다가 시선을 들었다. 숙였을 때 보이지 않았으나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소녀 또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가련한 처지이옵니다. 지닌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몸이오나 남자 되는 분의 부모와 집안이 허락하시는 인연이면 탈상을 마친 후 감히 권하시는 바를 따를까 하옵니다."
  손씨가 다희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그러리다. 저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꼭 허락을 받으오리다."
  친상을 당한 노심초사로 인해 해쓱하니 핏기라곤 비치지 못하던 다희의 양볼에 처음으로 한가닥 홍조가 어리며 다소곳 아미를 숙였다.
  붐하니 새오는 새벽하늘을 향해 방안의 정경을 알지 못하는 허준의 목젖이 또 한번 오르내렸다.
  그때 어머니가 방에서 나왔고 등불을 들려 데려왔던 몸종에게 토담집에 남아 다희를 시중들 것을 일렀고 아들에게는 서둘러 돌아가기를 권했다.
  아들이 영문도 결과도 모두 알고 싶었으나 어머니는 부드러운 눈빛을 한번 보냈을 뿐 더 이상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허준은 어머니를 따라나온 다희의 눈길이 자신에게서 한참 머물렀다가 시선이 향해 가자 다희의 귓불이 빨갛게 물드는 걸 얼핏 본 듯했다.
  허준이, 방안에서 어머니가 다희와 주고받은 얘기를 들은 것은 읍내로 돌아오는 장천 구름다리에서였다.
  "내 천한 신분을 밝혔는데도 용납을 하더이까?"
  같은 말을 거푸 묻는 허준의 안색이 딴때없이 빛났다.
  한전골에서 돌아온 그들 모자가 다희에게 다녀온 자초지종을 아뢰려 장번사령 시켜 사또의 심기를 살펴주길 부탁했으나 이른 새벽부터 닥친 외부의 손님으로 인해 좀처럼 여가가 나지 않는다는 전갈이 두어 번 전해졌고 거의 해가 중천이 되었을 때 허륜이 직접 건너왔다. 그리고 손씨로부터 다희와의 사이에 오간 얘기를 묵묵히 들은 후 그 첫마디를 허준을 향해 꺼냈다.
  "한양으로부터 사람이 찾아왔다. 찾는 사람은 바로 그 부녀일시 분명해."
  "한양에서 부녀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어떤 관계의 사람이온지?"
  긴장한 아버지를 의아해하며 허준이 오히려 반기는 투로 물었다.
  "낭자의 말로는 이미 한양에도 어디에도 자기들을 찾아올 법한 사람이 없다 들었습니다만.."
  "죽은 이가 죄인으로 몰리기 전에 그 낭자에겐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었어."
  "정혼한 사람! 정혼이라 했사오니까?"
  손씨가 물었다.
  "소상히 얘기하려 않는다마는 아무래도 관련이 있다 싶어 물어보니 낭자의 집안이 죄로 몰리자 남자의 집안에서 여자의 집으로 일차 파혼을 통지했다 하나 그 집안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젊은이는 그 낭자를 잊지 못하여 북청으로 찾아나섰다가 어찌어찌 수소문하여 다시 또 의주까지 와서 다시 부녀의 행색을 탐문한 끝에 부녀가 이 용천지경으로 향했다는 얘기를 연도 주막거리에서 주워듣고 나타난 게 틀림없다."
  허준이 숨을 삼켰다.
  입이 떼지지 않는 손씨가 그 아들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하여 ... 아직 죄인의 죽음에 대한 문건은 꾸미기 전이라 난 알지 못 하는 일로 대꾸도 했다만 ... 또 사사로이 찾는 일이니 일일이 내가 나서서 대답할 거리는 아니나 ..."
  "사또 ..."
  "아버님 ..."
  "이미 파혼한 처지요 그 낭자 또한 너의 모자에게 그런 언약을 한 바라면 하나도 겁낼 일은 아니로되 천리길 멀다 않고 찾아나선 그 사람에게도 당연히 할 말이 있으리라."
  " ..."
  "하오나 파혼한 처지면 장차 혼사의 향방은 낭자의 의향에 있지 아니 하오니까."
  " ..."
  "말은 그러할지나 세상의 귀천이 엄연한 터에 너희가 혼인한다 함은 세상의 이목을 속이는 일이요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니 어찌 문제가 없다하리."
  "아버님 ... 하오면 소자는 어찌하오니까."
  "헤어지겠느냐."
  "못하옵니다, 결코."
  무엄하게 아비의 말허리를 끊는 아들을 지그시 보던 생부가 말을 뱉었다.
  "죽은 이는 곧이곧대로 위에 알리면 될 것이요, 그 딸의 행방까지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단 ..."
  "단 무엇이오니까."
  "헤어질 수 없는 사람이거든 하루 속히 데리고 이 고장을 떠나는 길뿐 ..."
  "낭자는 삼 년 시묘를 마치고 떠난다 하옵니다."
  "삼 년은커녕 사흘도 늦어 ..."
  허준이 결의에 찬 눈빛을 들었다.
  "소자가 설득하여 해 안으로 떠나겠습니다."
  " ..."
  "해 안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손씨가 아들을 돌아보았다.
  "하오니 전일 마련해주시마 하오신 산음 현감께 보일 서찰을 하나 꾸며주옵소서."
  생부가 20여 년 인연이 있었던 그 모자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끄덕였다. 허락이었다.
  아니 부자의 영이별이었다.

  산소의 위치는 그런 대로 잘 잡은 듯했다.
  수일 전 이루어놓은 봉분 주위에 거의 뼘 가웃이나 쌓였던 눈들이 그 동안의 햇살에 녹아 잡초의 순들이 듬성듬성 내비치고 있었고 마른 뗏장으로 덮은 봉분의 응달에만 새벽녘 잠시 날린 싸락눈들이 엷게 덮여 있었다.
  죽어서 장인이 된 그 초라한 봉분을 향해 허준이 마지막 절을 드렸다. 그 곁에서 다희가 함께 아버지께 이별의 긴 절을 올렸다.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나 밤새 못다 운 부엉이놈이 아직 부엉부엉 울고 있었고 그 메마른 소리가 산속의 냉랭한 공기를 한층 더 느끼게 했다.
  상황이 급했던만큼 서로 맹세 하나로 남편과 아내가 된 두 사람이었다. 허준이 아직 신방도 치르지 않은 그 아내의 손을 잡았다.
  수없이 눈물을 닦아내던 그녀의 옷고름은 새벽냉기 속에서 서걱거리도록 얼어 있었고 그 옷고름을 또 한번 얼굴로 가져가다가 산소 앞에 주저앉을 듯 휘청거리는 다희를 허준이 부축하며 그녀의 여린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서로 열을 앓는 아이처럼 뜨거웠다.
  이불짐도 지울 겸 원행을 하는 모자에게 아버지가 딸려보낸 장번사령이 기물도 생략하고 산소 앞에 벌여놓은 마른 음식들을 주섬주섬 쌌다. 그것들은 일행이 가다가 주막을 못 만나는 사이사이 허기를 때울 떡과 생선포, 강엿 따위였다.
  이만큼 조용히 물러서 있던 남바위를 쓴 손씨가 다가와 다희가 벗어놓은 장옷을 집어 며느리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남행을 하는 데는 여러 길이 있으나 역시 역로가 뚫린 철산, 평양으로 뻗은 큰길이 보행에 편했다.
  애초 허준이 내심에 작정한 노정은 육로였다. 그건 용천을 탈출한다는 당장의 궁리 외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갑자기 부부가 된 다희와 좀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고 또 다희를 찾아온 김상기의 일행도 필시 택할 해로를 뒤따라간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천수백 리나 되는 경상도 산음까지의 먼길을 신혼의 며느리가 행보할 것이 가엾게 느껴졌던지, 살아서 다시 만날 기약 없는 그들 모자에게 이별의 정이 쓰렸던지 하직인사를 할 때까지도 묵연히 눈을 감고 고개만 끄덕이던 아버지가 그들 부부가 산소에 오른 사이 가마 두 채를 뒤딸려보내며 서찰을 동봉해왔다.
  내용인즉 갑자기 생각난 것이라며 마침 오늘 서북의 물산을 싣고 한양의 삼개로 향하는 장삿배가 출항하니 그 편을 이용토록 손을 써주마는 것과 그 삼개에 당도하여 수소문하면 서해와 남해를 돌아 경상도 고성으로 왕래하는 세곡선이 있을 것이요, 세곡선을 부리는 선군들이란 그 오가는 길에 으레 선객을 모아 술값 따위 마련해 쓰는 무리라 그들을 찾아 편의를 도모하라는 지난날의 수군 군관다운 지식을 자상히 적고, 그 배가 닿을 고성과 너희가 찾아갈 산음현이 지호지간이노라며 글을 맺고 있었다.
  온통 붉게 물든 서해바다 저쪽으로 용천의 산하가 멀어져갔다.

    [  2. 명의 유의태 ]
    1
  해가 치솟고 바다가 황금빛으로 바뀌다가 검푸른 제 빛깔로 돌아왔을 때 용천땅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가죽처럼 질긴 두 개의 크고 낡은 황포돛대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삭풍을 안고 있었다.
  배를 이어꿴 거대한 기둥감 돛이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를 타넘으며 요란하게 삐걱거렸다.
  찬수백 리 그 먼길 이불보따리 메고 허위허위 걸어갈 악몽에 잔뜩 굳어 있던 장번사령놈이 육로가 해로로 변경되머 뱃전에 편안히 앉아서 가는 신세가 되자 사위포 주막에서 잽싸게 꿰찼던 술병과 짐 속의 마른포를 꺼내놓고 허준의 턱밑에 앉아 아양을 떨다가 말수 적은 허준이 재미가 없는지 어느 사이 '너' '내' 하며 친해진 선군들과 웃고 떠들며 갑판위로 사라져버렸다.
  갑판 밑 간막이도 없이 듬성듬성 기둥뿌리만 받친 넓은 곳간 속은 배 생기고 난 후 온갖 이름의 물건들이 남기고 간 시큼한 냄새와 바닷물에 전 짠 냄새가 범벅이 되어 그것만으로 속이 메슥거릴 만한데도 다희는 용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텄고 어머니는 배가 대동강 하구의 삼각파도에 휘몰린 어간부터 토기를 느끼는 눈치더니 기어이 이불보따리에 의지해 늘어져 눈을 뜨려 않았다.
  "용하게 참는구료."
  배에 오른 후 허준이 아내에게 처음으로 말을 붙였다. 잠시 말없던 다희가 자리를 옮겨 허준의 곁으로 와 앉았다.
  허준이 어깨를 안아주자 그 오른 어깨에 다희의 체중이 실려왔다.
  "배는 처음이오?"
  허준이 다시 물었을 때 그의 가슴 속에서 다희의 고개가 조그맣게 끄덕였다. 허준은 자신의 턱밑에 있는 다희의 머릿결을 가만히 쓸었다.
  어머니의 주장으로 머리는 올렸으나 아직 허준의 손으로 풀어본 적이 없는 그 머리에서 동백기름의 향기가 맡아졌다.
  모든 게 꿈 같았다. 허준은 지금의 뱃길이 비천한 신분으로부터 새 세상을 향한 탈출이라는 감격보다 첫눈에 빠져들어 뒤돌아서자마자 그리움을 느낀 다희라는 이 여인과 부부가 되어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는 감동이 더 컸다.
  "아까는 정말 견디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아까 멀미에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등을 쓸어주던 아내의 하얀 손을 떠올렸던 허준이 다른 손으로 그 아내의 작은 손을 조용히 쥐었다.
  " ..."
  "난 바다를 좋아하는 성미요. 산이나 바다, 그 말없고 큰 걸 좋아하오"
  다희가 또 작게 끄덕였다.
  "한때는 세상만사 잊고 어부가 될 생각도 골똘히 한 적 있고."
  "아까 겪은 그런 큰 파도 치는 바다가 무섭지 아니합니까?"
  "어찌 무섭지 않겠소. 그러나."
  " ..."
  "육지에 박혀 살며 엮는 이 생각 저 생각에 비하면 그래도 누구 보는 이 없는 넓은 바다로 노를 저어가면 가슴이 트이고 그렇게 정신없이 배를 저어 다니면 어느새 응어리진 것들이 후련히 씻겨나가기도 하고."
  다희가 자세를 바로했다.
  "노를 저을 줄 아시옵니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고 산음현으로 가 아버님이 만나보라시는 그분을 만나 아무 방법이 아니 날 경우, 내가 내세울 재주란 어느 강둑에서 노젓는 사공질이나 어디 바닷가 고기잡는 일뿐이지 않는가 하고 ..."
  " ..."
  "떼를 쓰듯이 부부가 됐소만 그리고 고작 그런 재주뿐인 내가 미안한 노릇이나, 춥고 배곯으며 살게 하지 딴을 자신은 있소."
  허준을 향한 다회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 ...?"
  "제가 보기에 서방님은 강둑에서 한낱 사공 노릇이나 하거나 갯바위 뒤지며 고기나 잡을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또 장부의 꿈이 그래서는 아니 되는 일이고요."
  "무슨 소리요? 장부의 꿈이라니?"
  대답 대신 다희가 빤히 허준을 보았다.
  "서방님께서 말머리나 말꼬리에 걸핏하면 타고난 천한 신분 운운하시오나 국법으로 정한 신분은 어쩔 수 먼다 해도 저희 부녀에게 보였던 남다른 의리나 그리고 그 동안 과거까지 볼 양으로 글을 배우신 그 심지가 결코 그렇게 작은 사람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허준이 웃었다.
  "과거를 볼 양으로 글공부했다는 건 부풀린 얘기요. 십여 세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난 내가 어디까지 자랄 사람인가를 알고 있었고 그래도 손맡에 책을 치우지 못하고 노닥거린 건 어설픈 미련이지 앞날을 꾸려갈 무슨 준비는 아니었소. 다시 말을 하오만 네게는 다른 앞날이란 있을 수 없은즉 ..."
  "없는 걸 있도록 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올시다."
  " ...?"
  "그리고 배를 곯느니 헐벗느니 저에 대한 상심은 마소서. 제가 비록 속좁은 아녀자라 하오나 제 일생을 의탁하는 것은 허준이라 일컫는 남자에 대한 신심이지 호의호식을 기대해서는 아니옵니다."
  " ...?"
  "그토록 호의호식이 그립다면 사람 생김 쳐다볼 까닭 어디 있습니까. 젊은 여잘 원할 돈많은 후취자리라도 찾아갈 일이지요."
  " ..."
  "제 말이 너무 당돌한 건 용서하소서."
  "당돌하다는 게 아니라 ..."
  허준이 말을 끊고 아내를 새삼 보았다.
  "그동안 내 장래는 누구 못지 않게 수백 턴 생각해온 나요. 하나 평생 부부로서 동고동락 해로할 맹세는 서슴없이 하오만 그러나 다른 기대는 마오. 난 누가 날 기대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므로 ..."
  정색하는 남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희는 더 이상 거스르려 않았다.
  장번사령이 꺼떡거리며 나타나 신난 듯이 떠들었다.
  "곧 강줄기 따라 한양길로 들어선다 합니다. 핫핫 ..."
  손씨가 몸을 일으켰다.
  "자 다들 한번 바깥바람 좀 쐬시지요."
  세 사람이 일어섰다.
  갑판으로 오르는 세 사람에게 한참 들리지 않던 갈매기들이 비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2
  한양성 밖 서쪽으로 십리허에 질펀하게 널린 삼개와 서강은 황해도와 경기, 충청, 전라도의 조운이 끝나는 종착지였다. 소금에 전 물동네들이 한 나라의 수도에 턱을 받치고 형성되어 있었다. 8백 리를 흘러와 널따랗게 괴진 강폭의 좌우 언덕과 골짜기에 크고 작은 선창과 마을이 촘촘히 박혀서 해가 떨어지자 그 불빛들이 제법 불야성을 이루어 강물 위에 일렁거렸다.
  그건 해가 떨어지면 의주로 뻗은 큰길목 역참 앞에 관솔불을 피운 것 외 칠흑 같은 어둠에 묻히는 용천읍에서는 보지 못하는 대처다운 장관이었다.
  마을과 선창의 불빛깔만이 아니었다. 밤이 이미 이슥한 시각인데도 검은 강물 위로 형체가 큰 판옥선이며 조운선, 염선 등 관에 적을 둔 각종 배들과 사선인 나룻배와 크고 작은 어선들이 저마다 매단 등불을 달랑거리며 저어가고 저어오고 ...
  그리고 도성과의 통금이 풀리는 파루(5경 3점)의 시각까지 서둘러가야 할 객들이 많은지 강의 이쪽 저쪽 어둠 속 나루에서 선객을 모으는 징소리가 이따금 요란히 강의 정적을 깨뜨렸다.
  허준의 눈에는 모두가 이국의 풍경이였고 자라던 고장을 떠나 낯선 타관에 서 있다는 실감이었다. 등뒤에 살얼음을 밟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자 다희가 다가와 있었다.
  길 안내를 맡은 장번사령이 경상도에 적을 둔 배를 수소문하여 그들이 잠시 엉덩이를 붙인 주막을 떠난 지 두 시각도 넘어 있었다.
  "너무 늦는군. 아직 줄을 찾아 한참 돌아다니는 모양이오."
  "어머님은 잠시 눈을 붙이고 계십니다."
  다희가 신방도 치르지 않은 남편에게 시어머니의 동정부터 전했다.
  허준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탄 배가 강줄기 따라 한양의 외곽을 돌아 이 서강에 다다를 때까지 그녀의 눈이 등성이 너머 펼쳐졌을 한양의 하늘을 향해 수없이 착잡하게 맴돌던 것을 ...
  생각하면 한양은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일 것이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온갖 추억이 일어 당연할 것이요, 더구나 이제 그 지척의 고향을 건너본 채 낯설었던 남자의 아내가 되어 경상도 그 먼 타관으로 떠날 신세로 어찌 만감이 없을 것이랴.
  허준이 말없이 그 아내의 손을 잡아 자기의 체온을 건네주었다.
  "이 사람이 만일 배를 쉬 구하지 못하거든 내일쯤 도성 내를 한 바퀴 돌려오?"
  "왜오니까?"
  남편의 위로하는 말에 비해 그녀의 음성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허준이 아내를 돌아보았다.
  "도성 구경하시길 소원하시오니까."
  "나하고 상관없는 고장이오만 미상불 한번쯤 구경하고 싶지 않은 바도 아니오."
  "하오면 저는 어머님 모시고 객사에 남겠사오니 혼자 돌아보고 오소서."
  "평생을 살던 고장 아니오. 앞으로 올래야 다시 못 올 걸 생각하면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싶을 듯도 하오만."
  대답없는 그녀가 남은 한손으로 장옷을 여며쥐는 것이 보였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고향이란다면 저 하늘 아래 있을 것이 고향일 터이지만 그 고향은 제 마음속에 있는 고향만으로 족하옵니다."
  강물 속에 반짝이는 것들이 떠내려갔다. 유빙들이었다.
  "그리고."
  "하오."
  "어머님께서 배멀미에서 회복하지 못하신 듯하여 다시 뱃길 따라 원행을 하실 수 있으실지 말씀드렸더니 어려워도 서둘러 가셔야겠다 하옵니다."
  " ..."
  "경상도에 간들 반드시 반겨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바도 아니옵고 오로지 아버님께서 지어주신 그 서간 하나 믿고 가는 길이온데 자꾸 마음이 놓이시지 아니하신다 하시며."
  "의지하지 못할 사람이면 아버지가 하필 그분을 찾아가라 했으리까? 어머니의 잔걱정일 뿐이오. 하나 나도 알고 있소. 우리가 지금 산천 경개 유람하러 떠나온 길이 아니란 것을. 한양 얘기를 꺼낸 건 내 욕심이기보담 당신에게 한을 주지 않기 위해서요."
  잡혀 있는 다희의 손에 땀이 배고 있었으나 아내의 모습은 추워 보였다. 허준이 아내를 안았다. 그 허준의 가슴속에서 그녀는 다소곳했다.
  그들의 발 아래 검은 강물 속에서 또 빤짝하고 유빙 조각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일은 터진 듯했다.
  허준과 다희가 새우젓 냄새가 진동하는 선창 주막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 시각.
  나루터에서 치는 징소리가 다시 또 여러 차례 울렸는데도 장번사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사또의 영 따라 그 장번사령이 무던히도 애쓴다 대견해하고 고마워하던 심정들이 차츰 의아심을 품어갔으나 차마 어머니도 허준도 자기들의 불안한 마음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허준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자 써준 서간 속에는 아들이 그 땅에 뿌리를 내릴 동안의 신분적 보호를 당부한 것이고 산음에 도착하여 혼인을 치를 비용과 두어 칸짜리 집을 구하고 일가가 호구할 땅뙈기를 살 돈은 따로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 돈냥을 온몸에 감고 있는 건 장번사령이었다.
  잠이 달아난 허준이 주막마당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나루터 언덕으로 나갔을 때는 강변 여기저기에서 새벽닭들이 울어댔고 강건너에서 나룻배가 서너 차례 건너왔다.
  다희도 어머니도 초조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날이 밝았다. 해가 솟고 선창은 법석을 더해갔으나 잇따라 건너오는 거룻배엔 끝내 장번사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안 오는 게다. 어디로 가버린 게야."
  어머니가 목소리를 떨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짐작은 아까부터 하고 있었다. 허준의 목줄기에 힘줄이 자꾸만 뻗어났다.
  "어쩌면 좋으냐 ... 돌아올 사람이면 여태도록 안 나타날 리 있느냐 ... 더구나 한양의 지리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아노라 자처하던 사람인데."
  허준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지난밤 한숨도 눈을 못 붙인 그 탓만이 아니었다. 그들 일행이 왜 떠나는지 너무도 잘 아는 자였다. 함부로 관아에 고변하거나 의지가지 없는 타관에서 유장하게 사람 놓아 달아난 자를 찾을 처지가 못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아는 자였다. 그 배신이 허준 의 가슴속에 뼈저리게 저며들었다.
  "찾아야지요."
  허준이 번성하고 있는 강변의 잡다한 풍경을 향해 내뱉었다.
  손씨의 말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달아난 게 사실이면 미리 온갖 궁리 다했을 게 틀림없는데 동서남북 길도 모르는 네가 어디에 가서 ..."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서리까. 빈손 맨주먹으로 경상도 아니라 어딜 간들 누가 밥을 거저 먹여줍니까"?
  손씨와 다희가 허준의 충혈된 눈을 보았다.
  "도성 안을 한번 뒤지기다. 성안 지리를 웬만치 짐작할 터이니 함께 가오."
  "십중팔구 헛걸음일 듯하옵니다."
  "알지만 견딜 수 없어."
  "혹 불의의 변고일지 모르오니 사람을 믿고 하루 해 더 기다리든가 잊어 버리든가."
  "잊다니, 무어라고."
  "그 사람 떠난 지 이미 거의 하루 해올시다. 정녕 달아났다면 손닿지 않는 곳까지 갔겠지요."
  "찾겠소, 나는."
  이미 그 눈은 아무도 말리지 못하는 눈이었다.
  "어머니는 주막에 머물러 계시오. 못 찾아도 쫓아는 보아야지 이대로 빈털터리로 우리가 갈 곳이 어디오니까. 경상도건 뭐건 당장 뱃삯도 지닌 게 없습니다. 도성 안을 다 뒤집어서라도 찾아야 해."
  발끝에 허준이 벌써 나루 쪽으로 종종걸음쳤다. 다희를 돌아본 건 쫓아오라는 명령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다희가 손씨에게 아뢰고 허준을 따라 나루로 향했다.
  떨리던 손씨의 입에선 절망적인 울음이 새나왔다.
  처음 보는 한양 그 남쪽 출입구인 숭례문(남대문) 밑은 감히 도성 안에 살 것을 꿈꾸지 못하는 성밖 무지렁이 백성들이 난장판 같은 시장을 벌여놓았고 그건 그것대로 구경거리였으나 지금의 허준의 눈엔 길을 가로막는 방해꾼들일 뿐이었다. 갑자기 때로 벽제소리 요란하게 귀인들의 행차가 웃고 떠들고 외치는 잡인들을 내흩으며 다가왔다.
  허준의 급한 걸음도 구종의 고함소리에 쫓겨 잠시 숨을 죽인 인파 속으로 밀려났다.
  요란한 벽제소리에 비해 행차는 느릿느릿했다. 남여 위에 높직이 앉은 귀인을 향해 허준이 눈을 치떴다.
  이윽고 행차가 지나자 저자바닥은 갑자기 다시 벙어리가 입이 터진 양 소란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허준이 문득 돌아보았다.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아 ... 그 아내가 저만치 망건전 앞에서 큰갓 쓴 사내들 앞에 말뚝처럼 박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준수한 젊은이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아내에게 무어라 반가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 또한 여며 쥔 장옷을 어깨 위에 떨군 채 망연히 그 젊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범상한 만남이 아닌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3
  먼발치로 봐도 아내와 마주 선 청년은 훤칠한 키며 단아한 용모에 큰 갓이 잘 어울렸다.
  허준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사헌부 감찰 김철헌의 아들 김상기.'
  시묘는 못하나마 산소를 모시고 한번 삭망의 곡이나 파 올린 후에 떠나려는 그녀를 설득할 제 아내의 입에서 나왔던 옛 정혼했던 남자의 성명.
  그리고 무슨 연유론가 북청에 나타나고 다희를 찾아 의주, 용천까지 나타난 인물.
  그를 퍼하고자 서둘러 용천을 떠나온 터에 이제 낯선 한양 성문 앞에서 마주칠 줄이야.
  김상기가 틀림없다는 건 직감이었다. 웃고 있던 청년이 다희의 쪽진 비녀를 향해 순식간에 핏기가 가신 것을 보아도 틀림이 없었다.
  다가서는 허준의 귀엔 이미 주위 저자의 소음은 들어오지 않았다.
  다희가 청년에게 향한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다가온 허준의 곁에 섰다.
  "뉘요, 이잔?"
  다희도 허준도 대답이 없자 청년은 다시 다희의 비녀가 꽂힌 머리와 양반들의 나들이옷과는 거리가 먼 두툼하게 솜을 놓아 누빈 상것들의 의복에 패랭이를 머리에 얹은 허준을 쏘아보았다.
  "어디 사는 자인지 성명을 밝히거라."
  "무슨 연유로오니까?"
  허준이 조용히 김상기의 시선을 맞받았다.
  "나서지 마소서. 서방님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옵니다."
  "먼길 떠나느라 짐짓 행인들의 이목을 피하자는 꾸밈이 아니고 정녕 이자가 서방님이라고?"
  허준의 몰골을 발끝까지 훑어내린 김상기의 눈이 다시 허준이의 패랭이에 머물 땐 질투가 일고 있었다.
  "지난날 설사 양가에 어떤 인연이 있었다 한들 그건 이미 흘러간 인연이옵니다."
  "흘러도 될 일이면 그 먼길 왜 네가 북청땅에까지 갔단 말이오."
  " ..."
  김상기의 동행들의 눈빛이 허준을 향해 험악해지고 있었다. 행인들이 차츰 걸음을 세워 그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비켜주소서."
  "까닭을 말하오."
  "아무 까닭 없습니다. 우리 두 사람 혼인했다는 것 외에는."
  "대체 왜 그랬단 말이오. 그리고 보아하니 이잔 양반의 차림도 아닐뿐더러!"
  "양반이 아닐지 모르오나 죄인의 딸보담은 떳떳한 신분올시다."
  "그대는 이미 죄인의 딸이 아니오. 조만간 장인어른의 죄목이 풀린다는 소식을 알았기에 그 소식을 전해주고자 밤을 도와 달려갔단 나외다. 왜겠소?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길 소원해서였소."
  일순 홍조가 떠오르던 다희가 조용히 김상기에게 입을 열었다.
  "기쁜 소식 전해주어 고맙습니다. 지하에 차신 아버님도 이젠 편안히 눈을 감으시겠지요."
  "지하에 계신?"
  다희가 눈을 감았다.
  '불쌍한 아버님 ...'
  "대체 언제 ...?"
  "사람 시켜 우리의 파혼이 통지돼온 날 그 내용 보시며 이미 아버님은 반쯤 돌아가신 분이었습니다."
  " ..."
  "아버님뿐 아니올시다. 여자에게 있어 파혼이 무엇이오니까. 그 또한 여자의 죽음이옵니다."
  눈을 질끈 감는 김상기를 허준이 보았다. 김상기의 지성이 자신의 격정을 껴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희가 날카롭게 외쳤다.
  "장인이라니요. 누가 말씀이오니까!"
  " ..."
  "유배지의 외로움을 아시오니까? 밤이면 산짐승의 울음소리. 파도소리 그리고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그 칠혹 같은 어둠 속에서 세상으로 향한 희망은 오직 아는 이들로부터의 위로와 격려의 목소리뿐이었습니다? 그런 우리 부녀에게 ..."
  청년이 뜨거운 한숨을 뱉으며 다희의 말을 막았다.
  "그 파혼통지는 당시의 조정의 사세로 보아 우리 집안을 지키려는 아버님의 보신책이었지 내 의사와는 다르오. 내게는 묻지도 않고 내리신 결정이셨소! 그걸 알고 나 또한 그후로도 숱한 혼처를 물리치며 오로지 ..."
  다희가 미소를 지으려 했다. 처절한 노력이었다.
  "그날 이후 아버님은 하루하루 쇠약해갔습니다. 저 또한 하루하루 죽은 여자였습니다."
  "다희 ..."
  "옛날의 다희는 죽었습니다."
  그 차가운 반응을 안타까이 바라보던 김상기가 못견딜 듯 소리쳤다.
  "그래서 우리는 끝났단 말이오! 난 그렇게 할 수 없소."
  그 김상기를 무시하고 허준이 아내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인파를 헤치고 성문을 뒤로했다. 김상기가 쫓아오며 다시 다희를 부르는 소리가 났으나 다희도 허준도 돌아보지 않았다.
  서강, 그 오후의 햇살이 비낀 나루에 초주검이 되어 아들과 며느리를 기다리고 있던 손씨가 나룻배에서 내리는 부부를 향해 내달아왔으나 아들의 안색을 발견하자 말을 삼킨 채 자기의 명주 목도리를 벗어 발갛게 언 며느리의 손을 감싸주었다.
  세 사람은 서로 더 이상 장번사령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부부 또한 중도에서 김상기를 만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씨는 주막에 이르러 늦은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뜻밖에도 한 뼘쯤 될 돈꾸러미를 내어 아들의 무릎맡에 밀어놓았다.
  "웬 돈이오니까."
  "주인 아낙에게 부탁하여 마침 지녔던 패물을 없앴어."
  "패물이라니요?"
  "옛적에 사또께서 구해주신 건데 요긴하게 쓰인 셈이다."
  허준이 더 묻지 않고 한참 그 돈을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몸에 지녔다.
  손씨가 짐짓 며느리에게 밝은 안색을 지었다.
  "앞으로 패물 달고 살아갈 그런 신세일 순 없을 게고 아쉬운 대로 우선 산음까지 가 닿으면 살길이 열리지 않으리. 생고생을 하게 되었으나 참고 가야지 어쩌겠느냐."
  말끝에 손씨가 며느리의 손을 다독거렸다.
  그 고마움을 느끼며 다희가 입을 열었다.
  "하옵고."
  "그래."
  "이곳 서강은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의 배만 닿는 곳이라 하옵고 경상도의 배는 여기서 세 마장쯤 올라간 용산강에 닿는다 하옵니다. 오던 길에 서방님께서 늙은 사공을 만나 새삼 알아보았습니다."
  "타고 갈 배도 쉬 구할 수 있다 하더냐?"
  손씨가 아들에게 물었다.
  "마악 지난 달에 강화의 손돌목에서 8백 섬 실은 세곡선이 난파했는데 익사자 중엔 남녀 선객도 다수 발견되어 논란이 일어나 특히 근자엔 조운에 대한 규칙이 엄중하다 하옵니다. 이에 각 조창마다 감관과 수운판관들이 파송나와 기찰하는 바람에 사사로운 행색으로 관선을 타고 가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옵니다."
  " ...!"
  "경상도 고성까진 충청도의 안흥량과 전라도의 법성포창을 거쳐야 하는데 만일 발각되면 군율로 다스린다던가요."
  "하면 해로로는 갈 길이 없단 말이냐?"
  "세곡선 중에도 더러 관에 적을 두지 않은 사인의 배도 있다 하니 그런 배편을 찾아봐야겠지요. 그 배도 전라도 영산포창까지만 가고 거기서 경상도 땅으로는 또 다른 배를 갈아타야 한다고 합니다만."
  "노자는 그걸 가지고 되겠느냐?"
  "흥정을 해봐야지요. 어쨌든 이 엄동에 일일이 육로로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배멀미며 특히 어머님의 고생이 심할 줄 압니다만 하루 속히 산음에까지 당도하는 길은 역시 뱃길이 빠르다 여기옵니다."
  "내 걱정은 염두에 두지 마라. 중도에 겪을 고생이 문제가 아니라 그나마 노자가 떨어지기 전에 하루 속히 산음에 가닿는 길 택해야지."
  "미리 요기를 든든히 하시지요. 어쨌든 용산강으로 가서 배편을 수소문하겠습니다."
  사흘 후 허준 일가는 경상도 마산포로 향하는 사선을 구해 타고 다시 바닷길로 나섰다.
  각처와 장사꾼들과 행객들을 싣고 그리고 술주정이 심한 선주의 탓도 있고 하여 배는 삼도의 크고 작은 포구를 들르며 늑장을 부렸고 정작 허준 일가가 고성에 다다른 것은 용산강을 떠날 제 보였던 초승달이 그믐달로 바뀐 때였다.
  아들과 며느리를 격려코자 그 오랜 선창생활파 배멀미에도 타박없이 견디던 손씨는 새벽안개 자욱한 고성땅의 뭍에 내려섰을 때는 거의 탈진 상태였고, 어머니와 초췌한 아내를 좌우에 부축하여 내린 허준 또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한가지 구원은, 북국과 서해의 혹독한 추위가 남해의 다도해를 돌아오는 사이 사라지고 바닷가 방풍림 사이로 잡다한 꽃나무들이 마악 꽃망울을 터뜨리며 봄을 맞이하는 광경이었다.

    4
  고성서 진주까지 60여 리. 그 진주에서 산음까지는 다시 60여 리를 가야하리라는 말을 지리산을 드나들며 약종상을 한다는 늙은이로부터 전해 들은 허준 일가는 그 갯가 주막을 떠나 당일로 진주를 향해 길을 나섰다.
  해로에 수십 일씩 시달려온 몸들이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나 서강에서 어머니가 쥐어준 노리개값은 뱃삯과 밥값을 떨고 다시 미투리와 짚신을 갈아신고 나니 겨우 한 냥이 남았을 뿐이라 단 하루도 천연덕스레 주막방에서 몸을 쉴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첫날 60여 리를 걸어 진주 어간 어디서 주막을 정하고 내일은 새벽에 발정하여 해 안으로 목적지인 산음 관아에 닿아 이젠 일가의 목줄이 된 아버지의 서찰을 현감에게 전하면 솟아날 길이 있으리라 믿지만 그 목적지까지 과연 몇 개의 나루를 건너야 할지 그 나루에서마다 또박또박 치러야 하는 뱃삯도 한 냥의 노자로는 불안했다.
  "네 고생이 정말 말이 아니로구나. 하나 하룻길만 더 고생하면 큰 고생은 끝나지 않으리."
  다음날 아침 진주성 밖 두치나루의 주막에서 주모가 말아주는 국밥으로 요기를 때우고 떠날 준비를 할 제 며느리가 아궁이에서 말려온 미투리를 받아 신으며 손씨가 치사의 말을 했다. 한양에서 김상기를 만났다는 일, 멀지 않아 가문이 회복될 것이라는 말을 배 안에서 전해 들은 손씨는 자신들의 신분으로 과분한 집안의 며느리를 맞아 바라볼수록 대견한지 자주 그런 인사를 했다.
  진주에서 산음으로 가는 길은 추웠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동서로 갈라 내리지른 지리산의 완강한 산세는 고성 바닷가에서 본 봄기운과는 거리가 먼 아직 눈과 얼음을 뒤집어쓴 찬겨울이었고 그 줄기에서 뻗은 둔철산, 월명산, 보암산, 척지산 등이 잇따라 일행의 지친 걸음을 가로막았고 인가도 없는 그 험준한 골짜기의 나루에선 사공들이 얼음을 깨며 뱃길을 트고 있었다.
  벙어리처럼 아니꼬운 눈만 희번덕거리던 늙은 사공이 손씨가 뱃삯 대신 버선 두 켤레를 내놓자 갑자기 감지덕지하며 말을 걸어왔고 목적지가 산음이라 이르자 또 하나 저 멀리 가로막은 산이름 이 유산이라는 것과 그 유산서 산음은 10리라고 일러주었다.
  골이 깊으니 해가 짧았다.
  사공이 허준의 짐 속에 서너 가지 옷가지들이 든 걸 눈치챈 듯 자꾸 헌옷가지라도 좋으니 팔아주기를 애걸했고 그 움막 같은 집에 어렵게 사는 모습이 불쌍하여 허준이 솜 누빈 옷 한 벌을 내주자 그 사공 부부는 애써 일행을 방으로 인도한 후 새삼 군불을 지피며 시래깃국을 끓이기에 법석을 떨다가 밥 두 상을 차려내었고 그 대접을 받고 허준들이 떠날 때는 해가 떨어지고 강바람소리가 한결 스산했다.
  유산을 넘자 사공이 배웅차 따라나오며 누누이 일러주던 장선나루가 나타났고 나루 건너에도 산음 현내의 불빛들이 가득히 널려 있었다.
  한양까지 8백40리, 한양서 용천이 1천1백여 리. 허우적허우적 2천 리를 찾아온 그 목적의 땅이 눈앞에 펼쳐 있었다.
  "저기가 산음올시다."
  품안에 둔 아버지의 서간을 할인하면서 허준이 읍내의 불빛이 가장 밀집한 지점을 향해 감개를 담아 말했다.
  "저쯤이 아마 관아인 듯싶습니다."
  허준이 다시 말을 잇자 자신의 고생은 젖혀놓고 손씨가 새삼 며느리의 손을 잡고 눈물겹게 웃음지었고 다희가 그 시어머니의 한 팔을 부축하며 허준의 뒤를 따랐다.
  산음.
  민호 3백60여 호, 인구 2천2백여. 논이 7분의 3으로 배합된 간전이 2천 결(조세를 셈하는 논밭의 넓이의 단위로 1결은 100짐).
  그 외롭고 한적한 내륙의 소읍은 적어도 허준에게 있어서는 그냥 낯선 고장이 아니라 자기의 제이의 인생을 살아갈 새 천지 새 세상이었다.
  앞서 가던 허준이 걸음을 세우고 뒤쫓아오는 아내와 어머니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그 얼굴에 희망이 터질 듯이 넘치고 있었다.

  "이곳을 떠난 지 오래라니 누가 말씀이오!"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전임 사또의 함자를 묻지 않았소?"
  "전임 사또?!"
  "함자가 조상두라면 내가 모시던 분인데 모를 리 있소? 이미 두어 달 되었소이다. 벼슬 그만둔 지."
  "그만둔 지 두어 달 ..."
  허준의 입속이 순식간에 메말라갔다.
  "그럼 지금 이곳에는 아니 계신단 말씀입니까?"
  "당연하잖소. 벼슬 그만둔 사람이 궁벽진 땅에 뭣하러!"
  "그만둔 까닭이 무엇이오니까."
  까닭은 필요없었다. 그러나 허준이 매달리듯이 물었다.
  "노모께서 병환이 위중하시어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의 도리나 다하겠노라시며 벼슬을 버린 줄 아오만 ..."
  용천땅이 어디 붙었는지 알 리 없으되 말로 듣던 평안도 그 멀고 먼 땅에서 찾아왔다가 허행을 한 허준을 산음현 이방은 동정을 담아 건너보았다.
  "대체 그분과는 어떤 연고오니까?"
  "꼭 만나야 할 사람올시다. 안 만나면 아니 되는 ..."
  "그럼 다시 한양으로 가야지 ..."
  "한양?"
  "오는 길에 한양 댁에 들르지 아니했었소?"
  이방이 그제야 좀 의아한 투로 허준을 보았다.
  허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절망이었다.
  새 옷 꺼내 주막에서 다리미 빌어 다려주며 희망에 차 있던 어머니와 문밖까지 따라나서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허준의 무릎이 떨려왔다. 오금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어서 나간들 갈 곳이 없었다.
  "보아하니 무척 간절한 사연인 듯하오만 한양 댁을 모르시오?"
  " ..."
  허준의 귀엔 다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양에 갈 기력은 없었다. 한양에 살기 위하여 용천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의 신분으론 한양에서 자유와 새 천지를 찾을 수 있을 리 만무인 걸 알고 있었다.
  자기의 희망은 이 산음뿐이었다. 용천서 한양까지 한양서 다시 고성까지 고성서 다시 여기까지 그 험한 물길과 첩첩한 산을 넘어오면서 그 길이 험하고 첩첩할수록 허준은 이 세상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진다는 해방감을 느꼈다.
  다른 일도 아닌 신분에의 탈출이 아닌가.
  이 지독한 흉년을 기화로 평생 쫓아다닐 천민의 딱지를 떼어던지고 타도로 유랑하는 유민으로 탈바꿈하여 이 땅에 뿌리를 박아 농사지으며 자식 낳아 기르는 최소한 사람다운 자격, 그 양민이 되련다는 꿈이 소리내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처음 찾아들 제 사또를 뵈러 왔노란 말에 제법 은근히 행랑으로 안내했던 이방이 이젠 행랑 문턱을 쓰러질 듯이 넘어가는 허준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임 사또가 혹 생부인지도 모르지. 어디다 몰래 싸질러놨던."
  처음 인사를 당겼을 때의 허준의 성씨를 깜빡 잊고 이방이 허준의 절망을 멋대로 해석하는 말을 뇌까렸다.
  저만큼 주막의 돌각담이 보이는 곳에서 허준은 걸음을 세웠다.
  화톳불을 뒤집어쓴 듯이 머리속이 뜨거웠다. 주막방에 앉아 하회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다희에게 무슨 말로 이 사실을 알릴 것인가 아득했다.
  허준은 주막담을 지나쳐 아무데로나 걷기 시작했다.
  산속 소읍은 특별하게 바쁜 생업의 광경이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걸음이 한가로웠다.
  집집마다 산에서 캔 약재의 건조장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할 뿐 고을은 외래객인 허준의 절망과는 아무 상관없이 평화로웠다.
  바람은 차가워도 겨울의 얼음은 녹고 있는 듯 아낙들이 빨갛게 언 손으로 물방망이를 두들겨대는 소리가 개울을 따라 한참 따라왔다.
  '도망칠 길은 없어.'
  허준이 걸음을 세우며 자신에게 일렀다.
  어떤 절망 어떤 고난이 되었건 어머니와 그리고 아내는 자기가 맡아야 할 사람이었다.
  허준이 주막집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맞은편에서 한 채의 가마가 오는 것이 보였다.
  지나쳐가는 그 허준에게 가마를 따라오던 큰갓 쓴 중년의 사내가 가로막았다. 가마꾼들이 신발을 발등에 잡아 싸맨 걸로 보아 가마는 제법 멀리서 달려온 듯 보였다. 가마 속 늙은 남자가 신음소리와 함께 처절하게 아들의 이름을 거푸 불렀다.
  "말 좀 묻네. 여기 유의원댁이 어딘가."
  "모르오."
  허준이 냉랭하게 대꾸하고 가려 하자 큰갓 쓴 사내가 허준의 소매를 잡아챘다.
  "모르다니, 산음 사람이 유의원 집을 몰라? 유의태 말일세, 유의태."
  그 손을 뿌리치며 허준이 다시 차가운 눈을 돌렸다.
  "모른다지 않습니까."
  일순 머리의 패랭이하며 신분 낮은 허준의 태도가 노여운지 사내가 눈을 치떴다.
  그러나 병자를 대동한 급한 마음에서 막 나타난 약초를 한 짐 진 늙은이에게 내달았다.
  약초 진 늙은이가 손가락을 놀리며 방향을 가리켜주자 가마가 다시 달려갔다.
  그 가마를 쫓아가는 사내를 보며 문득 허준은 '유의태'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다고 생각했다. 곧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용천 한전동에서 다희의 입에서였다. 다희의 아버지, 그 죽은 장인이 북청서 의주까지 찾아나섰던 의원의 이름이 유의태였다.
  '하나 그 의원의 존재가 자기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
  가마가 멀리 산비탈로 달려가는 것을 보면서 허준은 어머니와 아내가 기다리는 주막으로 향했다.

    5
  아들이 어렵사리 얘기를 꺼내어 말을 마치기까지 사색이 되어 아들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조용해졌다.
  상큼 긴장된 눈빛을 들어 남편을 지켜보던 다희도 그 시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이윽고 조용해졌다.
  허준도 사태를 더 부연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세 사람 앞에 아버지가 애써 꾸며준 서간이 받아볼 주인을 잃고 놓여 있었다.
  북쪽 용천서 이 남쪽 지리산록의 산음까지 허우적허우적 2천 리 길, 그 세 사람의 유일한 희망이요 목숨줄이던 서간은 이젠 한낱 종이쪽지에 불과한 무용지물이었다.
  침묵이 길었다.
  맨먼저 다희가 시어머니의 손을 쥐는 것이 보였고 이어 어머니가 그 며느리의 손을 마주잡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와 아내의 울음소리와 절망 어린 모습을 예상했던 허준에게 아내와 어머니의 그 참을성 있는 모습은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손씨가 입을 열었다.
  "허둥거려서 방도가 나설 일도 아니고 오늘 하루 차분하게 너희끼리도 의논을 정해보아. 이럴 때일수록 기운을 내야지. 아무러면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리 ..."
  "방도는 세 가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이 서찰을 들고 한양으로 돌아간 그분을 찾아 매달려보는 일이요, 둘은 다시 용천으로 돌아가는 길올시다."
  "다시 용천으로?"
  "그밖에 앞의 두 길을 단념하고 죽기살기로 이 고장 어디에 남아 버티는 길뿐올시다."
  "네 뜻부터 정해보아. 일이 이리 된 이상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결심뿐이지 않느냐."
  " ... 어머님"
  " ... 말해라"
  허준이 아내에게도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어머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용천으로 돌아가면 다시 아버님 그늘에서 평생 면고생은 하오리다. 하나 소자는 용천을 떠나올 제 용천을 버렸습니다. 몸은 편했을지언정 그곳은 하루하루 내 마음이 지옥이었던 곳이므로 ..."
  "아느리라."
  "전 결단코 용천으로는 돌아갈 마음 없습니다. 그곳에 다시 간다 함은 양민이 되련다는 소망을 버리고 옛 편한 신분으로 되돌아가련다는 것 외 무엇이오니까."
  허준이 아버지의 서간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분을 찾아온 뜻은 이분이 이 고장의 현감이셨을 때 그 비호를 받자는 것이옵지 이제 벼슬 버리고 낙향한 분임을 알면서까지 아버님과의 인연을 빌미삼아 찾아간다는 것은 그건 부탁이 아니고 구걸올시다."
  두 여자는 말이 없었다.
  "물론 구걸 아니라 더한 짓을 해서라도 그것으로 우리 세 사람 편안히 뿌리박을 길이 있다면 소자는 그 구걸 열 번도 백 번도 서슴지 않으오리다. 하나 애초부터 방법이 없는 이에게 무릎 꿇고 머리 조아려 노자나 동정받는 그런 구걸만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올시다!"
  남편의 말 속에 힘이 불어나는 것을 깨달은 다희가 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소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옛날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허울 좋은 용천 사또의 자제로 사느니 차라리 산비탈에 움막을 파고 초근 목피로 연명하며 들짐승처럼 살지언정 내 남은 인생 천민이다 앙반이다 또 무엇이다 무엇이다 그런 세상 떠나 자유로이 사는 게 소원올시다."
  손씨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에미도 산비탈 움막 아니라 더한 곳에 살지라도 네가 하늘 아래 거리낌없는 신분으로 사늘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다. 하나 우리 모자의 뜻은 그렇다 할지라도 평생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랐을 이 아이는 어찌하는냐."
  허준이 다희를 돌아보았다.
  다희가 입을 열었다.
  "제 짐 속에 꾸며놓고 아직 입지 않은 두어 가지 옷가지가 있습니다. 그걸 팔아 좀더 생각을 가다듬을 여유를 지니소서."
  "고마운 말이나 이곳에 남기로 작정한다면 급한 것은 호구지책이 아니라 신분상의 보장을 받는 일이오."
  "신분의 보장이라 하오면?"
  "어느 고장에 간들 타관 사람이 찾아들면 무슨 죄를 짓고 숨어다니는 인간이 아닌가 의당 관원으로부터의 심문과 추궁이 있게 마련이고 거기에 대처할 길은 어떤 신분으로 어디에 살다가 왜 왔노라 떳떳이 밝힐 호패뿐인데 지금 내 몸에 지닌 호패는 양민의 것이 아닌 천민의 것이오."
  손씨가 조심스럽게 끼여들었다.
  "아버님 말씀이 지난날의 그 천적 호팰랑 없애고 흉년을 맞아 살길을 찾아 헤매는 유민이라 우기라 않으시더냐."
  "압니다. 그러셨지요. 그래서 흉년이 심하여 호구가 빈 고장에 숨어들어가 한사코 우기고 버티면 유민을 많이 낸 관장은 조정의 문책을 밭기 마련이라 그걸 겁낸 관장들이 타처에서 흘러드는 유민을 잡아다가 자기의 부내에 억지로 안주시키고 새 호패를 발급한다는데 지금 내가 믿을 건 그 요행수뿐올시다."
  다희가 새 긴장을 느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요행수도 발급받을 때 둘러댄 거짓말이 드러나면 죽음으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일이오만."
  "죽음이라니요?"
  " ..."
  다희가 재차 물었다.
  "요행수로 호패를 발급받아도 뒤가 드러나면 죽음이라니 ... 그토록 두려운 것이면 왜 애써 그걸 가지려 하시오니까?"
  "그나마 양민의 것을 갖지 않으면 난 죽도록 천민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래서 목숨을 걸면서까지오니까?"
  "내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장차 우리가 낳을 아이도 영원히 천민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오. 당대의 자식뿐이 아니오. 그 자식이 낳은 아이 그 아이가 낳은 ... 그 다음 아이 다시 또 그 다음 아이, 대대손손 천민이오. 그게 가슴 아프다면 자식을 낳지 말든가 정해진 대로 천하게 살든가."
  허준은 떠는 아내를 보았다. 허나 허준은 동정하지 않았다. 아마 몰랐을 것이다. 벗으려 벗으려 해도 벗을 길 없는 천민들의 신분의 제약까지는.
  손씨가 눈물을 감추며 방을 나섰다.
  방문이 닫혔다.
  "나와 만난 것이 이젠 후회스러울 게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무서운 법이 ... 믿기지 않습니다. 전 믿기지 ..."
  "자기가 낳은 자식들이 대대손손 남의 종살이를 찬다는 걸 알면서도 왜 세상 천것들은 미치고 날뛰지 않는지 혼자 날뛰는 내가 의아하오?"
  다희가 그 허준의 가슴에 뛰어들어 오히려 남편을 쓸어안았다.
  당시의 신분법.
  당시의 신분에 관한 천민들의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는가를 알리는 사건이 있으니, 임진왜란 당시 왜군 15만이 한양을 덮치자 도성 내의 노예와 천민들이 들고일어나 왜병보다 앞질러 대궐로 달렸고 제일 먼저 전국 천민과 노예들의 문건을 쌓아놓은 장례원과 그걸 관장하는 형조를 불질렀다. 그리고 그 불길이 번져 마침내 대궐도 잿더미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임진왜란은 지금의 파락호 허준이 선조의 어의로서 "동의보감" 찬집에 전념할 때인 장차 24년 후의 얘기이다.
  포옹을 푼 다희가 남편의 보잘것없는 호패를 집어 가슴에 안고 외쳤다.
  "이까짓 나무토막 이까짓 호패가 항차 무엇이기에 ..."
  그 다희를 이번에는 허준이 안았다.
  본래 호패이나 일명 호패.
  애초 고려의 공민왕 때부터 원의 제도를 모방하여 실시된 것이지만 조선왕조에 이르러 그 사용이 본격화되었는데, 그 목적은 나라 안 호구 및 군정을 파악하고 아울러 백성의 직업과 계급을 구분함과 동시에 백성들이 타도로 임의 유동하는 것을 방지코자 제도화된 철의 규율이 이것이었다.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 13년 9월부터 실시된 이 신분규정법은 나라 안 16세 이상의 모든 신분의 남자는 너나없이 소지해야 했던 것으로 길이 3치 7푼, 폭 1치 3푼, 두께 2푼으로 된 것으로 그 겉면에는 관원은 관직, 성명, 거주지 등을 적었으며 서인은 그 인적사항 외 그 뒷면에 얼굴빛, 수염의 유무를 적었고 공사천 노비의 경우는 위의 내용 외 다시 더 주인의 성명과 나이와 신장을 추가로 적은 세밀한 것이었다.
  또 그 시행에 있어선 내용의 위조자는 사형, 소지하지 않고 다니는 자와 남의 것을 훔쳐서 사칭한 자 또한 제서유위율에 의거 사형, 빌려 차는 자나 빌려준 자는 누적률에 적용 장 1백에 3년간 도형에 처하는 등 본인이 죽어 호패를 반납하기 전까지는 신분의 고하간 그 누구도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문득 다희에게도 그 호패의 기억이 떠올랐다.
  용천 그 산비탈에서 관뚜껑을 열고 형방이 아버지의 시신에서 어김없이 거두어가던 황양목, 그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호패는 4품 이상의 양반관원이 지닌 것이요, 지금 남편이 움켜쥐고 있는 호패는 잡목으로 깎아 만든, 그러나 관의 육중한 철인이 찍힌 것이었다.
  다희의 가슴이 찢길 듯이 아파왔다. 남편의 호패에 찍힌 철인이 그걸 찍을 때의 벌겋게 단 것으로 바뀌어 자신의 맨살 위로 박혀오는 아픔이었다.
  '요행히 요행히 들키지만 않는다면.'
  다희가 다시 기도하듯이 마음속에 남편의 행운을 빌었을 때 방 밖에 두런거리는 소리가 났고 놀라 돌아보았을 때 기척도 없이 문을 벌컥 열며 방문 앞에 나타난 건 전임 현관이 낙향했음을 알려주던 그 이방이었다.
  그리고 그 이방 뒤로 험상궂은 관졸 셋이 따라와 있었다.

    6
  이방을 따라 나타난 험상궂은 사내는 인상과는 달리 허준에게는 뜻밖에도 반가워해야 할 사람이었다.
  꽤나 정색을 내는 이방이 앞장서 주막의 봉놋방에 둘러앉자 그 사내는 자신의 성명을 구일서라고 밝혔고 이방이 덧붙여 소개하기를 오랫동안 전임 사또 조상두를 따라다니던 하졸이었는데 조현감이 벼슬을 버리게 되자 산음의 공방으로 주저앉게 된 인물이라고 했다.
  이에 이미 전임 사또의 도움을 포기한 허준이지만 반색해 손을 잡았고 구일서 역시 깨끗한 생김새에 비해 극진히 허리를 굽히는 허준의 태도에 금시 호감이 갔던지 곧 스스럼없이 굴었다. 곧 허준은 천출임은 감추고 자신은 전임 사또 조현감과 막역한 친분이 있는 용천 현감 허륜의 서출 로서 새 세상을 찾아 솔가하여 이곳까지 왔노란 소개와 함께 아버지의 친서를 내놓자 구일서 또한 면전에 조현감의 심부름으로 용천도 다녀온 일이 있었노란 의외의 말과 함께 소리쳐 중노미를 불러 술상을 청한 후 가득 술잔을 권해왔다. 잔이 거듭되는 사이 구일서가 의외로 심지가 부드럽고 소탈한 인물임을 알자 허준은 죽으나사나 이젠 이 구일서를 의지하여 이 산음에 남으리라는 작심을 하기 시작했다.
  오지의 한낱 공방이 신분에 관한 커다란 죄를 안고 있는 허준을 비호할 무슨 큰 힘이 되랴마는 이 낯선 고장, 지푸라기라도 잡고 의지하려는 외로운 허준의 처지에서 구일서의 존재는 장차 비비고 딛고 설 커다란 언덕만큼이나 미더운 존재로 비친 것이다.
  술이 거나해진 구일서는 전임 조현감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은인인가를 뇌까리기 시작했고 허준 또한 떠나오던 길에 한양 언저리에서 장번사령에게 정착할 돈을 떼었다는 얘길 꺼내자 구일서는 허준보다 더 분해하며 그 박살할 놈 박살할 놈 하고 뇌었다.
  이어 그는 이 산음땅이 비록 첩첩이 산에 막혀 대처와는 외진 고장이나 인심 후하고 없는 사람이 살기엔 얼마나 편안한 곳인가를 누누이 주장했다.
  "없는 사람이 살기에 편안한 곳이란 어떤 뜻이오니까?"
  허준이 자기의 말을 귀담아듣는 눈치이자 구일서는 기분이 좋다는 듯이 껄껄 웃음부터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본시 이 산음땅에는 한 가지 전해오는 말이 있습지요. 사람만 게으르지 않다면 가뭄이나 홍수에 관계없이 이 산음땅에 빈손으로 들어온 사람도 3년만 꿈지럭거리면 3년 먹을 걸 들고 나간다는 것이 그것올시다."
  "오면서 살펴보니 논밭뙈기 넓지 않고 큰 물산이 움직이는 고장 같지는 아니하오만?"
  "굳이 농사를 지어야 사는 게 아닙지요. 이 고장의 특산은 보혈에 좋다는 당귀, 해수, 갈증 따위에 특효라는 오미자 그리고 인삼 등인데 인삼은 굳이 이 고장 것을 내세우진 않으나 당귀, 오미자는 그 약효가 뛰어나 이 고장 것이 금새를 타지방의 것보다 세 곱절이나 받는 최상품입지요."
  " ... 약초."
  허준이 뇌자,
  "아, 코앞이 지리산인데 지리산이야 어디로 도망갑니까. 제철이 되면 자생한 약초가 골짜기마다 나고 또 약초를 딸 철이 아닐 땐 마연동 사철광에 가면 그 품값 또한 두세 식구 먹고 사는 데는 모자라지 않는 벌이올시다."
  "이 고장에 철이 난단 말씀이오?"
  "마연동이라고 북쪽 산인데 거기서 나는 쇠는 이 산음의 유명한 세공품올시다. 하하하, 그리고 또 혹시 운이 의고 신령이 돌봐주면 산삼이라도 캐어 팔자 제대로 고치는 사람도 혹간 있고 ..."
  산삼을 캐는 엄청난 행운까지야 바랄 수 있으랴마는 약초꾼이나 사철광의 노동 그 어느 쪽도 빈주먹뿐인 허준이에겐 못할 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늙은 주모가 손수 새 술상을 들고 나타났다.
  "뭔가?"
  구일서가 묻자,
  ."아랫방에 유해 계시는 이 손님의 어머님께서 따로 술상 보아 들여놓아 주라시기 봐왔소."
  무엇이 흡족한지 연신 히죽거리며 주모가 지금까지 먹던 술상과는 격이 다른 깔끔한 새 안주와 새 술병을 눈짓했다.
  "자당께서 아랫방에 계십니까요?"
  허준이 끄덕였다.
  허준은 짐작했다. 신분에 관한 근심이 태산 같던 터에 느닷없이 닥친 관원들이 불안하지 않을 리 없는 어머니와 다희가 아마도 이 봉놋방의 화제를 엿들었을 게고 그러나 뜻밖에 은혜로운 사람임을 알고 인사의 술상을 들여보냈을 것이다.
  그 술상을 비우며 구일서는 다시 허준의 신상을 제 일처럼 근심하다가 당장 오갈 데가 마땅찮으면 자기 집 뒤꼍 허드렛방을 하나 치워 자리가 잡히기까지 임시로 거처하면 어떠냐고 제의했다. 놀란 허준에게 구일서는 자기는 상처한 후 새로 맞은 아내와 그 아내에게서 난 아직 젖먹이 아이와 눈이 어두운 노모가 한 사람 있노라 부연하며 사뭇 진정이었다.
  그 날 밤 허준의 운명에 상징적인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허준과 유의태의 만남이 그것이다. 그 전말은 이랬다. 허준과의 작별이 아쉬운지 중노미를 시켜 몇 번 관아의 동정을 전해 듣던 구일서가 이윽고 자릴 일어나 오늘은 직숙이라 집에 돌아가지 못하나 내일 일이 끝나 집에 돌아가는 길로 당장 자기네 뒤꼍방을 비워두겠노라 일방적으로 정하고 돌아간 뒤 아랫방으로 건너간 허준은 어머니가 보내준 새 술상이 아내가 내놓은 새옷 한 벌을 주모에게 건네주어 마련된 것임을 알았고 입이 벌어진 주모가 밤참이라는 걸 들여왔었다.
  그러나 그걸 먹고 난 어머니가 배탈이 났던 것이다. 당황하는 허준과 다희에게 달려나온 주모가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을 마우. 이 산음땅에선 제 명수 다하는 이 아니고서야 유의원께서 다 고쳐주시니까요."
  "유의원?"
  "예, 유의태란 분이시오."
  "유의태?"
  괴로워하는 손씨를 부축해 섰던 다희가 문득 되뇌며 기억을 되살렸다.
  귀양의 땅 북청서 의주까지 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찾아나섰던 인물의 이름이 유의태였지 않은가.
  다희의 의문을 무시하고 주모가 중노미에게 소리쳤다.
  "아, 뭘해여. 어서 앞장서 댕겨오지."
  그제야 중노미가 주막집 마루 기둥에 매달렸던 주자 쓰인 사방등을 들고 서둘렀고 허준도 그 등불 따라 어머니를 들추어업고 달렸다.
  그 뒤로 다희도 쫓아나섰다.
  유의태의 집은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읍내 불빛이 굽어뵈는 산비탈 제법 높직한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었다.
  "보통 의원댁하곤 다른 의원댁올시다. 지난날 아버님이 그토록 만나고자 소원하시던 것도 무언가 짐작이 갑니다."
  마당과 마루에 몰려 있는 사람들을 보고 곱게 차례를 지키기에는 틀렸다고 중얼대던 중노미가 누굴 찾아 사라진 후 다희가 남편의 어깨 곁으로 다가서며 조용히 한 말이었다.
  "어떠합니까, 지금."
  허준이 역시 잠잠해진 어머니에게 병세를 물었다.
  "이상하구나. 한참 네가 출렁이며 달려와 준 탓인지 한결 가라앉았어."
  "조금만 참고 견디소서. 기왕 왔으니 혹 압니까. 제법 용한 의원이라면 어머님의 오래 된 가슴앓이병도 낫게 할 수 있을지."
  손씨가 쓸쓸히 미소짓자 다희가 아직도 어떤 감회를 담아 한마디 보탰다.
  "그냥 허명만 난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왠지 제 짐작이 그러합니다."
  이때 중노미가 슬그머니 나타나 허준에게 손때 묻은 나무패 하나를 내밀었다.
  "뭐요, 이건?"
  "순번을 기다리는 패올시다. 유의원의 의술을 배운답시고 자칭 제자란 것들 두셋을 제가 잘 아는데 벼슬 높은 몇 사람이 와 있다고 오늘은 새치긴 안된다고 떠드는군입쇼."
  병자를 데리고 온 처지에 마음 급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과연 주변은 무시로 "나 좀 봐주소"를 연발하고 신음하는 애처로운 병자들이 멍석 우에 줄을 이어 있었고 몇몇 중병인 병자를 보며 허준은 새치기 할 염치는 없었다.
  "이 집이 늘 이렇게 붐비오?"
  허준이 묻자,
  "유의원께서 늘 집에 안 계시기 때문올시다. 좀 괴팍한 양반이라서 새벽에 계시다가두 아침엔 없구 또 어쩌다 집을 떠나면 한 달은커녕 두 달 석 달씩 안 계시기두 하구 그러니 아파두 그 양반이 집에 돌아와 계실때 아파야지요. 또 돌아오셨다 하면 소문이 하룻밤 만에 나서 이 모양이오"
  "대체 어딜 다니기에?"
  "모릅죠. 소문은 가지가지지만 좌우간 웬 술 잘 먹는 중하고 함께 돌아다니는 건 자주 봤습죠. "
  "술 마시는 중? 중이 어떻게 술을 마시오."
  "글쎕쇼. 그러나 언젠가 우리 집에서도 두 분이 술을 자신 적이 있는데 황구 한 마리하구 술 두 동이를 밤새 내리 싹 쓸어 자신 것을 이 눈으로 봤습죠."
  "기행이 심한 사람인가 보구나."
  손씨가 고통은 많이 가신 얼굴이 되어 말했을 때 갑자기 사람들이 병사의 넷째 방으로 몰리며 全란해졌다. 순간 중노미가 외쳤다.
  "이리 옵쇼, 쫓아옵쇼."
  허준이 얼결에 어머니의 손을 끌고 그 뒤를 쫓았다. 중노미가 사람들을 밀치고 헤집으며 허준을 잡아끌었다.
  "열어라."
  낮고 짤막한 그리고 어딘가 단호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제자 두 녀석이 좌우로 방문을 열었다. 방문은 병풍처럼 이단으로 접어져 온 방안이 들여다보였다.
  방안에는 밖의 제자들보다 좀더 연조가 들어뵈는 제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팔뚝만한 촛불을 들었고 또 한 사람은 수십 개의 수건을 담은 쟁반을 들었으며 남은 하나가 붓과 병부를 들고 서 있었다.
  문득 유의태가 웃방에서 건너와 마당쪽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저마다 굽실거렸으나 무표정했다.
  의원이 지닐 법한 인자함이나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오히려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 뵈는 중키에 몸도 마큰 볼품없는 사내가 허준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7
  마당 뒤쪽으로 밀려난 누군가가 병사 앞으로 다가앉은 앞자리의 허준들에게 차례가 틀렸다고 되알진 욕을 퍼붓는 것이 들렸다. 그러나 이미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허준들은 뒷자리의 불평 따위쯤엔 뒤돌아보지 않았고 오히려 자칭 제자로 일컫는 마당쇠들이 불평하는 뒤쪽으로 향해 손가락질을 섞어 눈을 부라렸다.
  다섯 사람의 병자와 가족들이 방안에 한 줄로 늘어 있기까지 촛불과 손수건들과 붓과 벼루가 담긴 나무판을 든 제자들을 거느린 채 유의태는 한마디 입도 열지 않고 서 있었다.
  허준의 눈에 유의태의 그 모습은 마치 필요없이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않고, 반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운 인간의 일면을 느끼게 했다.
  문득 제자들의 고개가 또 한번 숙여지더니 중병자들이 있는 윗방 쪽에서 이십을 넘었을까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건너와서 유의태의 곁에 섰다.
  허준이 누구냐는 듯이 곁의 중노미를 돌아보자,
  "유의원의 아드님이시우. 이름은 도지라구 하는데 부전자전으로 재주가 아버지 못지 않다오." 하고 중노미가 허준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귀뜸해 주었다.
  허준은 아버지보다 화사한 옷차림에 비단을 입힌 침통을 든 유의태의 아들을 보았다.
  어디까지가 상이고 어디가 하인지 의술의 정도는 알지 못하나 그 도지라는 젊은이의 모습은 허준의 눈에 침묵하고 있는 아버지와 격이 다른 치기만만한 모습으로 비쳤다. 유의태가 움직였다.
  순간 재빨리 제자가 손수건 쟁반을 내밀었고 유의태가 그 부드러운 명주수건을 오른손에 감고 병자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두번째 제자가 촛불로 병자의 눈과 안색을 비추었고 도지가 세번째 제자가 내미는 왜 두툼한 장기를 받아들었고 다른 손으로 붓을 잡아 세번째 제자가 내밀고 있는 벼루에 먹물을 찍었다.
  유의태가 한 무릎 꿇며 손수건이 감긴 손으로 병자의 눈을 까뒤집었다.
  아들이 먼저 물었다.
  "어디 사는 뉜가?"
  나이에 맞지 않은 오연한 반말이었다.
  "밤골 사는 진돌석입네다."
  한 눈이 까뒤집혀진 머슴 같은 병자가 대답했을 때 유의태의 첫마디가 열렸다.
  "황달일세. 간이 상했어. 뱃속엔 더러운 물이 찼구."
  "간이 상함 어찌 됩니까?"
  유의태가 간단히 대꾸했다.
  "십중팔구 못 살지."
  "못 산다구요?"
  "혀 내보게."
  병자가 노랗게 변색하고 백태 낀 혀를 내밀었다.
  "장갈 갔던가?"
  "아직 ..."
  "그렇다면 일찍 죽어도 큰 죄는 없어. "
  유의태를 따라 아들과 제자들이 다음 사람에게로 이동했다.
  "그대는 어찌 왔나?"
  "두엄을 퍼나르다가 논꼬에서 발목이 삐끗하더니만 ... 금시 이렇게 퉁퉁 부어올라선 ..."
  유의태가 그 발목을 움켜잡았다. 사내가 비명을 내질렀다.
  손을 놓으며 유의태가 아들에게 명령했다.
  "침 놓아라. 호침을 쓰되 취할 곳은 신유와 좌측 팔요다."
  아들 도지가 침통을 열다 말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소자의 눈에는 발을 삐었을 뿐으로 보입니다."
  "발 삔 것쯤은 차가운 물수건에 싸두면 대엿새면 낫는다. 하나 이 사람은 평소 신이 온전치 않아 걸핏하면 넘어지는 병이니라."
  "신이라니요?"
  부자의 말을 듣고 있던 병자가 끼여들자 유의태가 웃지도 않고 대꾸했다.
  "신도 몰라, 사내면 다 차고 다니는 게 신이지. 자네."
  "예에 ..."
  "두 쪽 매달린 게 남들보다 반 쪽도 못되는 작은 걸 차고 있어."
  " ... 예 ... 음, 마 ... 맞습니다."
  "약도 지어주어라. 팔미환."
  붓을 든 제자가 새삼 병자의 사는 고장과 성명을 물었고 스승의 처방도 잇따라 써갈기는 사이 손의 수건을 갈아 싼 유의태가 다음 병자에게 다가앉았고 발이 삐었다는 사내는 수건을 대령한 제자와 도지에게 부축되어 웃방으로 옳겨지며 숨차게 소리쳤다.
  "죽지는 않을 병인지 말해줍쇼."
  "죽진 않아. 하나 행여 장가들 생각은 말아. 자식도 낳지 못할 게고 어차피 지집은 도망치고 말 터인즉슨 ..."
  기대를 걸고 필사적으로 바라보던 병자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며 목 안을 메어오는 울음을 틀어내며 웃방으로 옳겨졌다.
  허준이 감탄과 신비함을 느끼며 마른침을 삼키자 곁에서 함께 유의태를 주시하던 다희가 속삭였다.
  "마치 사람의 몸속을 꿰뚫어보는 사람 같습니다."
  온 마당 사람과 차례가 끝난 병자도 차례를 기다리는 병자들도 유의태의 다음 움직임에 숨을 삼키고 있었다.
  다음 병자의 맥을 짚던 유의태가 이번에는 말도 없이 일어섰다.
  "내겐 왜 말이 없는가?"
  큰갓 쓰고 양반의 위엄은 차렸으나 푸르뎅뎅한 늙은이가 허세를 했다. 돌아보는 유의태의 눈이 동정도 없이 차가웠다.
  "송장이 걸어들어왔어."
  "무어라? 송장이라니 누가."
  병자를 부축해서 함께 방으로 들어왔던 역시 큰갓 쓴 일행들이 벌떡벌떡 몸을 일으켰다.
  "송장?"
  "백약이 무효인 듯하외다. 돌아가 자손들에게 물려줄 말들이나 꾸며주시오. 다음 사람을 들여보내거라."
  떨던 병자가 돌연 손가락질하며 고함쳤다.
  "네 이노옴! 두 눈 시퍼렇게 쫀 날더러 송장이라니 ... 이놈, 어서 내 병 고쳐라. 차근차근 다시 진맥이라도 해."
  "난 살아날 사람에게 약을 지어주는 의원이지 목숨까지 파는 사람 아니오 ..."
  "이 돌팔이 같은 의원놈이 공연한 허명만 요란해가지고 ... 어서 진맥하지 못하느냐. 이놈이 관찰사의 탕을 고쳤다더니 관찰사를 믿고 유세를 부리느냐. 어서 내 병도 고쳐내라. 이놈, 이놈!"
  그 호통치는 큰갓을 향해 중인의 작은 갓을 쓴 유의태가 마주 삿대질을 했다.
  "의술은 이미 형장과는 상관이 없소. 한 가지 길은 ..."
  "그래 한 가지 길은 ..."
  그 부들부들 떠는 병자에게 유의태가 냉랭하게 내뱉었다.
  "객사하지 말고 서둘러 집에 가 편안히 아랫목에 눕기나 하시오."
  마당쇠들이 다음 차례인 허준을 포함한 다섯 가족을 방으로 들어가란 눈짓을 했다. 허준들이 방안에 들어앉는 사이 호통치던 큰갓이 갑자기 가슴을 부여안으며 심하게 쿨룩거렸다.
  이어 그 동행자들이 유의태에게 멱살을 잡을 듯이 벼르다가 욕을 퍼부으며 병자를 부축해 나가자 인절미만 먹어도 낫는다는 변비의 병자가 고마워서 그대로는 못 가겠다는 듯이 유의태 앞에 새삼 조아렸다.
  "제 병은 찹쌀죽과 인절미만으로 낫는다 하셨지요. 한데 진맥료는 얼마온지 ..."
  "진맥한 적 없으니 걸리적거리지 말고 썩 물러가기나 하게."
  변비병자가 허리를 있는 대로 구부리며 물러가자 차례는 손씨였다.
  유의태가 새 수건으로 손을 감싸고 손씨를 보았다.
  " ..."
  이어 유의태의 눈이 손씨에게서 다시 그 시어머니를 부축해 앉은 다희에게 그리고 허준에게 멎었다.
  짧은 긴장이 허준 일가에게 흘러갔다. 유의태의 눈이 병자인 손씨 아닌 허준에게 계속 멎어 있었다. 이윽고 그 유의태가 입을 열었다.
  "성명이 뭔가?"
  "병자는 내가 아니라 어머님올시다."
  허준이 아내가 부축해 앉은 어머니를 가리켰다.
  그러나 유의태의 시선은 계속 허준에게 박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허준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왜 그러시오니까, 말 못할 중증의 병이오니까?"
  "난 자네 성명을 묻고 있어."
  "허준올시다."
  " ..."
  "어머님의 병을 보아주소서, 저녁 나절에 진지를 드시다가 갑자기 ..."
  허준이 말을 맺기 전에 이미 시선을 거둔 유의태가 다음 병자에게 옮겨가며 툭 말을 뱉었다.
  "먼길 배멀미에 속이 뒤꼬인 채 굳은 음식을 먹은 탓뿐 병도 아니야. 돌아가 뜨신 물에 한 시간마다 발이나 서너 차례 씻으면 편안해질 거야."
  놀란 건 허준뿐이 아니고 다희도 손씨도 마찬가지였다.
  돌연 허준 자신도 모르는 거짓말이 어떤 반항처럼 튀어나왔다.
  "어머니는 배를 타고 오신 적이 없소."
  순간 유의태가 천천히 그 허준을 돌아보았다. 차갑고 꿰뚫듯한 눈이었다. 허준이 또 한번 그 유의태에게 되물었다.
  "당신이 우리가 배를 타고 오는 것을 보았소?"
  "아들 하나 총명한 자식 나았군."
  쏘아보는 허준을 무시한 채 유의태의 눈길이 손씨에게 머물며 뇌었다. 그리고 더는 돌아보지 않았다.
  방안의 눈이 허준과 손씨에게 쏠리고 있었다.
  "여긴 발 씻을 물까지 끓여주진 않아."
  어서 돌아가란 말이다.
  아버지와의 눈싸움을 보고 있던 따들 도지가 자기 아버지를 쏘아보는 허준에게 아랫것들에게 하듯 말을 던지며 지나갔다.
  허준은 더 이상 상대 않는 유의태의 그 뒷모습에 맥이 풀려갔다. 자기가 왜 갑자기 그에게 반감을 느꼈는지 알 수 없었다.
  손씨가 그 아들의 손을 더듬어잡고 돌아가자는 눈짓을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방문 밖에 구일서가 서 있었고 허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무언가 좋은 일이 있는지 빨리 나오라고 손짓했다.

    8
  유의태의 집에서 돌아온 그날 허준은 다희로 하여금 한결 몸을 추스른 어머니를 모시고 주막으로 돌아가게 한 후 주막까지 다시 나타난 구일서를 따라나섰다.
  그들이 간 곳은 옥사에 갇힌 죄수들의 조석밥을 해대는 밥집이었고 그 납작한 초가는 산음 관아의 아전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친숙한 집인 듯했다. 떠드는 품이 오늘이 정청의 직숙들인 듯 영리 두엇과 서리 하나가 밥상과 술상을 차고 앉았다가 구일서를 향해 "말하던 사람이 이 사람인가? "하고 허준에게 관심을 보이며 뜯어보았다.
  허준은 구일서가 권하는 대로 동관들에게 선 자리에서 자기 성명을 밝히고 다시 구일서를 따라 건넌방 쪽 마루로 올라섰다.
  방안엔 조식과 햇볕에 쪼그라든 중년의 사내 세 사람이 뜨악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다가 구일서를 따라 들어서는 허준에게 얼핏 눈길을 향해왔을 뿐 일어나 맞이할 반가움은 없다는 투였다. 통성명이 끝나자 허준은 또 한번 자신에 대한 구일서의 호의를 실감했다.
  구일서는 당장 내일서부터의 허준의 생업을 걱정하다가 빈손의 허준이 해볼 만한 직업 중에서 자기가 아는 인물들을 불러모은 것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쪽이 자신의 생업을 사냥꾼이라고 소개했고 남은 둘은 약초 캐는 게 업이노라고 했다.
  이어 몇 순배 걸쭉한 모주잔들이 돌아가자 그들은 오가다 안면이 있을 뿐 통교도 없는 관아의 공방에게 언감생심 공술을 얻어마시고 있는 이유를 갑자기 깨달았는지 허준을 향해 뒤죽박죽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요약을 하건대 늙은 사냥꾼은 자기는 활솜씨보다 주로 덫을 놓아 곰과 여우를 잡는데 곰의 쓸개가 간이 나쁜 안질 환자에게 얼마나 비싼 금새로 팔리는 것이며 여우털 또한 얼마나 값이 비싸게 팔리는 것인지를 자랑한 후 그러나 여우란 놈이 하도 약아서 처음 이 길에 들어서는 사람은 사나운 곰이나 여우까지는 바랄 수 없으나 약을 뿌려 꿩이나 토끼만 부지런히 잡아도 가을과 겨울 두 철 벌이로 한해 계량은 너끈하노라 주장했다. 그러고도 돈냥이 더 아쉬우면 봄 여름으로 마연동 사철광에 나가서 남의 부역을 대신해주면 가히 그 벌이는 쏠쏠하노라 떠들었다.
  다소곳이 듣고 있는 허준을 보자 각시 또 신명인 난 그는 덫의 종류에도 짐승의 목이나 발목을 옭아매는 코류와 틀에 치도록 하는 틀류 두 가지가 있다며 물코, 지게코, 하늘코, 함정코, 쇠붙이로 만든 찰코 등등 허준이 듣도 보도 못한 덫 이름을 꿰어갔다.
  그 다변과 장황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냥꾼의 큰소리를 시종 비아냥거리는 눈으로 건너보던 약초꾼들의 주장은 또 이러했다.
  그들의 주장인즉 아무리 살자고 하는 노릇이지만 왜 하필 살아 있는 짐승을 무작스레 살생하여 생업을 삼을까 보냐며 그건 온갖 짐승을 키우시는 산신령의 노여움을 건드리는 일이노라 사냥꾼의 비위를 건드리고 나서 약초 따고 캐는 일이야맡로 물려받은 땅뙈기 한 뼘도 못 가진 자들에게는 가장 쉽게 해볼 만한 생업이라고 역설했다.
  저 드넓은 지리산 백여든네 군데 골짜기와 능선에 무진장하게 자생하는 오만가지 초근목피가 저마다 자라고 시드는 철이 있어서 제 눈만 밝으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어느 철에도 망태기가 비어서 내려오는 날은 없다고 전제한 후 그리고 그 수백 가지 초근목피가 저마다 신기한 약효를 지녀서 병든 사람 고쳐주고 허약한 사람 보해주는 일이니 얼마나 보람이 있는 일이냐 자랑한 후 덧붙여 말하기를 그렇게 살생 없이 병든 이들에게 공덕을 쌓노라면 언젠가는 산신령님이 감응하사 '마당심'(산삼이 무더기로 자라고 있는 장소) 한 군데를 점지해 주시는 날이 꼭 온다고 말을 맺었다.
  사냥꾼과 약초관. 어느 쪽도 꾼자가 붙도록 미천한 직업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일푼인 허준에게 당장 선택할 수 있는 생업은 그 둘 중 하나 일 뿐이리라. 그건 뜻아니한 구일서란 고마운 인간을 만나 그가 권하는 인간적인 호의를 뿌리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또 둘 중 그 어느쪽도 산속을 돌아다니며 남의 눈에 많이 띄지 않는 생업이라는 데 마음 이 움직였다.
  '그러나 ...'
  지금의 자기의 처지에서 더 이상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허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그의 결심을 가로막았다.
  그건 무언가?
  골짜기를 달리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용천에서 술친구 앙태놈을 만나고자 저 험준한 군서산 봉수대에 무시로 오르내리던 체력이다. 자기를 감싸줄 사람들을 서서히 다 사귀기까지 인가와 떨어진 산속에서 생업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기가 바랄 만한 생업일 것이다.
  '그러나 ...'
  다시 허준의 마음속에 우뚝 강렬한 영상이 비껴가며 허준의 결단을 방해했다.
  '그자와 대체 어떤 인연이 되려는 건가 ...'
  영상의 주인공은 유의태였다. 그 도도함, 교만에 가까운 오연함, 그리고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 속에 번뜩이던 자신감. 의원이 되련다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는 허준이다. 그러나 그때 허준의 눈에 비친 유의태는 허준이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본 하나의 완성된 인간의 모습이었다.
  의원도 신분은 한낱 중인의 범주다. 더러 유의라 하여 양반 신분 속에서 의원 노릇을 하는 이가 없는 바는 아니로되 의술은 학문의 경지에서 평가되지 않는 시대이고 보면 어엿한 양반으로서는 업으로 삼을 순 없는 천직이라는 것이 사회의 통념이었다.
  "그럼 유의태도 유의일까?"
  아닐 것이다. 밝혀본 바는 없되 허준은 그렇게 단정했다.
  원로에 찾아온 큰갓 쓴 병자를 향해 너는 이미 죽은 송장이노라며 일언지하에 내쳤을 때 큰갓 쓴 병자가 양반에게 이럴 수 있으냐고 대든 것도 유의태가 그와 동등한 신분의 양반이 아니란 걸 말하는 증거일 것이다.
  "어떻소?"
  사냥꾼과 약초꾼들이 돌아간 후 주막까지 배웅나오면서 시종 묵묵한 허준에게 구일서가 물어왔다.
  "만일 약초꾼으로 풀린다면 그 약초는 어디다 내다 파오? 유의원댁이오?"
  허준의 말끝에 걸음을 세우며 구일서가 돌아보았다.
  "그 집에서는 남의 약초는 사지 않소. 소용되는 약초는 그 댁의 마당쇠놈들이 제철 따라 캐오곤 하니까. 왜, 일껏 캔 약초 팔 데가 없어 썩힐까봐 미리 걱정이오?"
  "기왕사 약초 캐는 일로 접어들려면 유의태 그 사람 밑에 있고 싶어서."
  "유의원 밑에?"
  "그러합니다."
  "그 사람하곤 아까 다퉈놓고? 두 번씩이나 말대꾸하는 걸 나도 보았소"
  "모르겠소, 왜 그랬는지. 그러나 기왕 약초꾼이 되려면 그 사람 밑에 있고 싶소."
  "의술을 배우려는 욕심인지는 모르나 그 사람 제자는 키우지 않소."
  "그러나 병사에 있는 건 제자들 아니오."
  "그렇지. 이놈 저놈 행여나 그 사람의 비방의 일부라도 전수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으로 그렇게 몇 년씩 그 집에 붙어 있소만 대개는 빈손으로 떠나오."
  "비방?"
  "그런 게 있기에 병을 그렇게 잘 보는 거 아니오. 그러나 아마 그 비방은 제 자식한테나 물려주지 다른 사람에겐 어림도 없을 거요. 내 알기에도 근 십 년이나 버티다가 끝내 아무것도 못 배우고 욕을 퍼부으며 떠난 제잘 여러 사람 봤으니까 ..."
  "십 년 ..."
  "방안에 촛불이나 병부를 들고 조석으로 가까이 붙어 있는 자는 모두 5년, 7년 남은 자들이고 마당에서 설치는 자들도 3년, 4년씩은 넘은 자들이오. 그러나 병사의 피고름 묻은 것 빨래질까지 온갖 심부름 다해주고 붙어 있어 봤자 그저 먹고 자는 것 왼 저 혼자 배우려면 배우라는 식이지 유의원 스스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말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오."
  허준이 다시 말했다.
  "날 그 집에 있도록 주선을 해줄 수 없으리까?"
  "내 말이 곧이 안 믿기는 모양이오만."
  "믿소. 믿지만 어쨌든 날 그 집에 주선을 해줄 수 없으리까?"
  구일서가 잠시 어안이 벙벙해서 그 허준의 고집스러운 눈매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다시 딱한 듯이 말했다.
  "오라고 부르지도 않고 간다고 잡지도 않는 그런 차가운 사람인데 가서 시키는 약초 캐오고 군불 지피고 병자들 온갖 시중 다 들어도 고작 제 입 하나 건사해주는 것뿐인데 만일 그 집에 찾아들어간다면 그럼 어머니와 안식구의 생계는 어쩔 생각이시오?"
  허준은 잠시 말이 막혔다.
  "잘 생각하오. 저만한 경지에 이른 사람을 보면 사람 누구나 자기도 그럴 수 있을 것처럼 욕심내기 쉬우나 구름잡는 얘기요."
  이어 구일서가 허준을 보며 부드럽게 웃음지었다.
  "좌우간 그 얘긴 잠시 미루고, 참 내 집에는 기별해 놨소. 내일 아침 함께 우리 집으로 옮깁시다."
  "내일?"
  "외로운 처진지 마누라도 좋아하고 어머니도 말친구 될 만한 분이 오신다니 아주 반깁디다."
  "말은 고마우나 ..."
  "다른 대답은 마오. 아니, 그럼 젊은 부부가 마냥 주막방에서 지낼 참이오."
  감사에 눈이 뜨거워지는 허준을 향해 구일서가 껄껄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부부가 마냥 주막방에서 ...'
  순간 구일서의 그 무심한 말이 허준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왔다.
  부부의 행세이지만 기실 다희 그녀는 이 못난 사내 의지한 채 아직 머리도 안 푼 처녀가 아닌가.
  어머니 또한 헌신적인 그녀를 보며 어디든 잠시만 안정하면 신방을 치르리라 얼마나 뇌시던가.

    9
  허준이 구일서와 헤어져 주막에 이르자 기척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희미한 초롱불이 내비치는 주모의 방에서 다희가 나와서 다소곳이 맞았다.
  이어 그 주모의 방에서 나오는 어머니의 안색도 아들의 등에 업혀 유의태의 집에 달려가던 때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진 환한 얼굴이었다.
  "차도가 계시오니까?"
  "오냐 다 나았어. 여태 유의원 얘기를 듣느라 ..."
  "유의원 얘길 누구에게 말입니까?"
  대답 대신 손씨가 다희와 함께 쓰는 주모의 곁방으로 들어갔다.
  "유의원 얘기라니 누구에게 무슨 얘길 들었습니까?"
  방에 둘러앉은 뒤 허준은 다시 어머니가 주모에게 들었다는 유의태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냄새를 맡다니요?"
  "주모의 말인즉 유의원 그분이 배를 타고 멀리서 온 걸 알아맞힌 건 무슨 점장이 같은 예언이 아니라 유의원이 우리가 오랫동안 해로를 거쳐오며 몸에 밴 바다냄새를 맡아낸 것이라는구나."
  "이미 하륙하여 여러 날이 지났는데 어찌 아직 우리 옷자락에 바다냄새가 남아 있습니까."
  "저도 어머님도 그런 말을 했더니 주모가 웃으면서 그 양반 코는 유별나서 아무리 옷을 갈아입고 와도 대엿새 전 장례를 치르고 온 상주의 몸에서 송장 냄새까지 맡아낸다 합니다."
  " ...!"
  "우리 일을 알아맞춘 것말고도 그 유의태란 의원은 남이 흉내내지 못할 기행이 많은 의원이라는구나."
  "대체 무슨 얘길 또 들었습니까?"
  다희가 어머니 대신 대답했다.
  "어떤 때는 병이 깊어 찾아온 사람에게 약을 지어주는 대신 돈 닷 냥을 건네주며 가서 맘놓고 쓰라고 하더랍니다."
  "약 대신 돈을 주어?"
  "예."
  "자세히 들은 대로 얘기해보오."
  "그 병자는 주모도 잘 아는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그 병자에겐 팔십 노부가 한 분 계셨는데 시름시름 앓으며 아들에게 고깃국을 실컷 잡숫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조르시는데 아들은 마음은 있지만 어려운 살림에 도저히 그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해 생긴 생병이었답니다."
  " ...?"
  "그래서 유의원이 내준 닷 냥으로 그 병자가 노부에게 마음껏 고기도 사 드리고 새옷도 마련해 드려서 몇 해나 더 천수를 누리시다가 편안히 눈을 감으셨답니다."
  " ..."
  "그쯤 사람 속을 꿰뚫어본다면 우리가 여러 날 배를 타고 온 것쯤 알아맞추긴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허준이 그 어머니를 보았다. 그 허준의 뇌리에 또 한번 유의태의 도도한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듯한 안광이 떠올라 압도하듯이 다가왔다.
  "유의태, 유의태."
  이날 밤 허준은 지금까지 구일서와 만난 얘기를 어머니와 다희에게 털어놓았다. 그의 소개로 사냥꾼과 약초꾼을 만난 얘기, 그리고 짐승의 피를 묻히며 사냥꾼으로 생업을 삼기보다는 약초꾼이 되는 쪽을 택했다는 것과 기왕사 약초를 만질 바에야 유의태 밑에 일고 싶은 생각이나 그 유 의태가 제자를 자원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냉랭한 인간인가도 구일서에게 들은 그대로 들려주었다.
  "하오면 장차 의원으로 입신하실 생각이오니까?"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약초와 의원은 상관관계가 많으리라. 그러나 그 의원의 의자도 약초의 약자도 겨우 오늘 알았을 뿐이잖은가.
  "좋은 생각이다. 잘 생각한 게야."
  아들의 침묵을 말없는 긍정으로 안 손씨가 사뭇 감격 어린 소리로 찬성했다. 그러자 허준은 자신의 뇌리에 버티고 선 유의태의 강렬한 인상에 자신도 모르게 한발 물러나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누구처럼 온갖 냄새를 맡아낼 유별난 코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 밑에서 5년, 7년, 10년씩 허송세월할 생각은 없소. 단 지금 당장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는 사정이니 약초꾼이 됐건 그 집 마당이나 쓰는 마당쇠가 됐건 잠시 의탁해볼 생각이나 ..."
  "무엇이냐?"
  "큰 기대 갖지 마십시오. 제가 그 집에 몸담을 경우 보장되는 건 저 혼자의 입뿐입니다. 일 부지런히 한다 하여 그 딸린 식구에게 따로 쌀밥을 퍼주는 예도 없고 봄 가을에 옷이나 한 벌 해주는 것이 고작이라니 가서 잠시 몸을 의탁해 있어 보다가 이도 저도 아니다 할 땐 다시 나와야지요."
  침묵 끝에 손씨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무엇인가 이루고자 할 때 애초 뜻이 굳세어도 종단에 이루지 못하는 일이 많다 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잠시 몸을 의탁하는 그런 마음으로야 어찌 네 뜻만큼 이를 수 있느냐. 혹 우리 둘의 호구 때문이라면 그건 에미가 무슨 짓을 하여서라도 꾸려나갈 것이다."
  "무슨 짓이라니요.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남정네처럼 마연동 사철광에 가서 남 대신 부역을 할 수 없을 게구요."
  이번에는 다희가 입을 열었다.
  "서툰 솜씨라 누가 알아줄진 모르오나 서방님께서 뜻을 세우신다면 제가 바느질 솜씨를 팔아서라도 어머님을 모시겠습니다."

  구일서의 집은 산음 관아에서 동쪽 정곡역으로 가는 한 마장 거리의 속칭 감골이라는 마을에 있었다. 주위에 널린 척박한 땅이며 마을의 살림이 유족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벌판에 부는 쌀쌀한 바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온 동리가 초봄의 햇살이 가득하여 따사로웠다.
  전날 기별을 받아선지 퇴청하는 구일서를 따라 허준 일가가 앞 개울의 건너 언덕배기에 올라서자 마을 앞 우물가에서 몇 마을아낙들 속에서 반찬거리를 씻고 있던 구일서의 아내가 아이를 엉덩이에 업은 채 종종걸음으로 다가왔고 이렇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허리 굽히는 손씨와 다희에게 마주 허리를 굽히며 짐보따리를 받으려 했다. 살갗이 희고 눈가에 주근깨 자국이 많은 그러나 심성이 퍽 따뜻해 보이는 여자였다.
  구일서의 집은 그 마을 꼭대기 집이었고 일행이 삽짝을 들어서자 봄볕이 가득 내리쬐는 쪽마루에 앉아 시래기를 다듬던 구일서의 노모가 기척을 듣고도 보이는 듯이 흰자위가 많은 눈을 휘번덕이며 반색해 내달았다.
  이날 허준은 구일서와 그의 방에 함께 누워 밤을 새우며 앞으로 유의태의 집에 들어가겠노라며 다시 그의 도움을 청했다.
  "제자라니?"
  유의태는 출타중이었고 허준을 소개하고자 함께 왔던 구일서가 관아로 돌아가자 전날 낯익은 마당쇠 중에서 장쇠라 불리는 털보가 갑자기 허준을 뒤꼍 헛간으로 끌고 가더니 대뜸 눈을 치뜨며 물었다.
  스승이 없는 틈을 차 마을에 내려가 낮술 몇 잔을 걸쳤는지 감 썩는 냄새를 풍기며 녀석의 말은 처음부터 시비조였다.
  "그렇소. 나도 유의원 밑에서 의술을 배워보고자 ..."
  허준은 사람이 없다 하여 돌변한 그 세 녀석의 험악스러운 눈빛을 향해 나직이 대꾸했다.
  "누구 맘대로?"
  장쇠가 또 물어왔다.
  "그건 유의원님께 허락을 받을 참이외다."
  "이 집에 제자로 들어올 놈은 유의원님한테보다 우리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해."
  "어째서 그렇소?"
  허준이 되묻자,
  "어따, 이자가 제법 말 높이하네! 유의원님이라니 황차 네가 무엇이기에 유의원 밑에 님자를 뽑아.?"
  저희끼리 영달이라고 불리는 작달만한 마당쇠가 갑자기 핑계를 찾아냈다는 듯이 허준의 어깨를 탁 쳤다.
  "우리도 제자가 될지 말진데 왜 엉뚱한 놈이 또 끼여들어?"
  "우리하고 재주를 겨뤄보려는 수작이여."
  "그게 아니오. 나는 ..."
  그 허준의 변명하는 턱을 장쇠의 삿대질이 건드렸다.
  " ..."
  "보아하니 먹물깨나 먹은 얼굴인데 ..."
  "형님은 가만 기슈."
  키가 작달만한 녀석이 가로막고 나섰다.
  "허우대 히여멀끔한 놈이 어디서 빌어먹을 데가 없어서 우리 밥을 뺏어먹으려 들어?"
  " ..."
  "눈치 없는 놈에게 말귀 가지고 됩니까. 담박 알아듣도록 해줘야지."
  갑자기 허준의 입에서 피가 터졌다.
  이어 세 녀석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잇따랐다.
  사람 치는 데는 이력이 난 자들인 듯했다. 사람이 달려왔다. 놈들보다 고참인 방안에서 촛불과 손수건과 병부를 들고 유의태를 시종하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녀석들은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들도 빙글거리며 나뒹구는 허준을 보고 있었다.
  일어나려던 허준은 또 한번 뜨거운 통증을 허리에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10
  시각이 얼마나 지났을까.
  허준은 멀지 않은 곳에서 낮닭이 한가로이 우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이어 자기의 몸뚱이 위로 물이 쏟아부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떴다.
  저희끼리 영달이라고 불리는 키가 땅딸막한 자칭 제자 중의 나이 제일 어린 사내가 헛간 처마 밑 빗물을 받아놓은 깨진 항아리를 안고 서 있었고 막 눈이 떠진 허준의 머리 위로 남은 물을 다시 들이부었다.
  온몸 곳곳이 터지고 부어오른 상처들이 그 차가운 물벼락에 이상하게 상쾌했다. 둘러서 있던 남은 다섯 녀석이 마음놓고 웃는 것이 보였다. 허준의 피가 터진 눈이 그 때가 낀 누런 이 두엇을 지그시 보았다.
  그 웃음들은 폭력의 쾌감이라기보다 저희들 말마따나 어딘가 먹물깨나 먹음직한 허준의 존재에 무식한 자가 느끼는 본능적인 협위를 뭉뚱그리려는 비굴함이 섞인 그런 웃음이었다.
  순간 허준의 뇌리에 한가닥 칼날 같은 타산이 스치고 지나갔다. 뭇매를 당한 분함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장차 이 유의태의 집에 눌러있지 않을 양이면 모르되 여기 붙어있을 양이면 이 기회에 자신의 존재를 저들의 머리속에 똑똑히 박아주지 않고서는 앞으로 마치 한바탕 군불거리 장작이나 패듯한 이들의 오늘 같은 폭력이 끊임없으리라는 직감이었다.
  ' ... 원하는 바는 아니로되 ... 그렇다면 ...'
  걸어온 싸움 피할 이유는 없다고 허준은 마음속에 뇌었다.
  용천바닥에서 파락호로 손가락질받던 한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사위포 퇴기년들이 몰려사는 색주가 골목에서 양태놈과 짝이 되어 낯선 뱃놈들과 무시로 벌인 쌈질 속에서 인체의 급소가 어디라는 것쯤 아는 허준이었다.
  완강하고 뚝심이 밴 신체는 아니었으나 양태놈에게 배운 그 태껸의 솜씨는 곰처럼 우람한 사내도 급소를 맞으면 별수없이 나가떨어져 피거품을 뿜기 마련이었다.
  또 패쌈이란 웬만치 독한 자들이 아니고선 저들이 믿는 가장 센 자가 쓰러지면 나머지는 도망치는 생리도 알고 있었다.
  '이 자를 쳐야 해.'
  허준은 자기에게 제일 먼저 을러 딱딱거리던 장쇠라 불리는 털보가 그 중 신체가 완강한 걸 보았다.
  그도 제법 이골이 난 주먹질이었으나 녀석은 자신이 지닌 힘에 비해 골수가 울리는 그런 타격 솜씨는 아니었다.
  빙글거리고 있는 그 장쇠라는 사내를 향해 허준이 일어섰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무지막지하게 짓밟혔던 허리 탓인지 잠시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쇠가 그 허준을 향해 뒷문을 손짓했다.
  "나가는 문은 저쪽이야."
  대꾸 없이 허준이가 그 장쇠의 앞에 버티고 나직이 말했다.
  "날 칠 수는 있어도 맘대로 내보내진 못하지."
  "제법 이놈이 겁이 없네. 핫핫, 그럼 내 손으로 끌어 내쳐주지."
  장쇠가 또 웃었다.
  동시에 장쇠의 우악스런 손이 덥석 허준의 목덜미를 움켰다. 아니 그 손이 닿기 전에 허준의 주먹이 장쇠의 수구(인중)를 쳤다.
  순간 장쇠의 커다란 몸뚱이가 허공을 떠서 두어 칸 저만치 곤두박질해 나뒹굴었다.
  무언가 소란한 소리가 났으나 허준이 다시 장쇠에게 다가갔다. 잠시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모르던 장쇠가 싸쥔 입가에서 피를 발견하자 눈알이 퍼렇게 빛을 뿜었다.
  이어 피묻은 침을 되알지게 탁 내뱉더니 불침 맞은 소처럼 튕겨 일어났다. 그러자 허준의 발이 가차없이 그 장쇠의 허리 뒤 혼문을 내지른 후 오른발 복사뼈 안쪽 조해를 걷어찼다.
  황소 같은 뚝심으로 일어나려던 장쇠가 악 소리와 함께 모로 넘어가더니 이어 일어서려는 그 오른발이 힘을 쓰지 못하고 버르적거렸다.
  영달이가 무어라 고함치며 내뺐고 나머지 세 놈도 제물에 어푸거리며 도망쳐갔다.
  앞마당 쪽으로 내달아가는 그들이 무어라 다급하게 고함지르는 소리들이 들렸다.
  "날 다시 내쫓을 건가."
  허준이 장쇠에게 나직이 되물었다. 장쇠가 한손을 내젓고 고개까지 내젓는 것 보며 허준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혼자 뒤에 남아 있던 노란 눈이 그 8년짜리 제자 황초잡이가 처마 밑에 쌓인 장작개비를 집어 허준을 후려팬 것이다.
  뒤이어 병사 쪽에서 병자의 가족들과 일단 도망쳤던 제자와 마당쇠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도지가 허준을 부축하여 병사로 갔다.
  해질녘 출타했던 유의태가 돌아와 아들 도지로부터 허준의 출현과 집안에서 있었던 소동을 들었으나 그 도지 뒤에 꿇어앉은 허준을 향해 흘깃 눈길을 한번 던졌을 뿐 가타부타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안채로 건너 가버렸다. 자기의 이름을 캐묻던 관심을 씻은 듯이 지운 차가운 태도였다.
  그날 밤 도지의 중재로 허준은 장쇠와 황초잡이 임오근 등 서로 주먹질이 오간 제자 일동과 술상을 마주하고 화해의 술자리를 가졌으나 기가 죽은 건 영달이뿐 장쇠는 다시 한번 으르려는 감정이 역연했고 임오근을 비롯 병사를 맡은 제자들도 허준이 두 손으로 건네는 술잔을 본체만체 냉랭했다.
  유독 도지가 작은주인 행세를 담아 제법 호기를 부리며 내일서부터 와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린 건 그 어색한 술자리가 파할 무렵이었다.
  그날 밤.
  터진 머리를 싸매고 집으로 돌아온 허준에게 어머니와 구일서가 거푸 영문을 물었고 허준은 징검다리에서 발을 헛딛고 개울 속에 넘어졌노라 얼버무렸다.
  두 번씩이나 물을 뒤집어쓰고 미처 안 마른 옷자락 탓에 유의태 집에서 있었던 제자들과의 텃새소동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고 내일서부터 제자로 유의원 밑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으며 환영의 뜻으로 그 아들에게 술대접까지 받았다는 허준의 말에 어머니는 사뭇 감격한 얼굴이었다.
  이어 어머니가 좋은 일이 있으려니 거푸 있구나 하며 시종 웃고 있는 구일서와 눈을 마주쳤다.
  "좋은 일이 거푸 있다니요?"
  허준이 되묻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염두에 두어, 한 사람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왜 찾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다희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습니까?"
  "뒷방에 신방을 마련해놨어."
  손씨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허준이 놀라서 어머니와 구일서의 웃는 얼굴을 돌아보았다.
  "난 아직 그 사정을 몰랐었네."
  구일서가 새삼 말문을 열었고 어머니가 의아한 아들에게 털어놨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너희들의 얘기를 꺼내자 금시 그 얘기가 이 양반 귀에까지 들어가구, 그리구 아무리 어려운 처지지로 어찌 명색만의 부부로 있을 수 있냐며 그 방을 아예 너희 둘 방으로 내놓으셨어."
  "방을 내놓다니요?"
  "두 분 노인분들은 말동무하시며 아랫방에 함께 거쳐하셔도 될 듯싶고 그밖에야 찬물 한 그릇 떠놓고도 맹세만 굳으면 부부다 싶어서 자당님과 의논해서 내가 서둘렀소."
  " ...!"
  "혼사란 인륜지대산데 사람들도 모아 술잔이라도 돌리며 이웃간에 알리고도 싶었으나 서로의 사정이 구차한 터이고 또 이미 내외간으로 알고 있는 터에 새삼 구설에 오르내리는 건 그대도 원하는 바가 아니다 싶어 그냥 정갈하게 상만 하나 차렸어. 다행히 꾸며놓고 사용 않던 이불이 한 채 있어서 그걸 옮겨다 놓았고 ..."
  "평생에 한번 있는 일이니 조금은 격식을 차리고 싶다마는 서글퍼하지 말고 그대로 따르거라. 형편을 따지자니 셈이 풀릴 때가 언젤지 그건 너무 난감한 일이고 하여 ... 너도 너려니와 저 아일 위해서도."
  구일서를 향한 허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허준이 말없이 자세를 바로한 후 구일서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 잊지 않으리다. 결코 잊지 않으리다."
  구일서가 당황하여 그 허준을 잡아일으키며 말했다.
  "내 사정일랑 차츰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오만 전임 사또 조현감은 내 재생의 은인이시오. 그분이 아니 계시나 이런 일이 그분에 대한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일이거든 나 또한 정말 기쁘오이다."
  그밤 허준이 구일서와 그 가족과 어머니의 재촉을 받으며 신방에 든 건 열아흐레 늦은 달이 동산 위에 한참 솟아오른 제법 밤이 이슥한 시각이었다.
  비록 육례를 갖추지 못한 채 명색뿐인 초례상 앞에서 구일서를 집사삼아 교배례와 진찬만으로 생략한 혼인절차였으나 그 신랑을 맞아준 다희의 가슴은 따뜻했다.
  분첩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그녀의 살결들이 허준의 거센 숨결 앞에서 때때로 경련했다.
  어디선가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듯이 조용히 봄밤이 깊어갔다.

    [  3. 出사람 7년 ]
  지리산의 3월 초.
  마을의 돌각담 사이로 비어져나온 개나리의 노란 빛깔들이 가지마다 화사하게 피어나고 마을 근처 야산의 양지바른 비탈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무리무리 어우러져 벌떼를 부르건만.
  그 등성이와 골짜기 너머 지리산의 중턱 위로는 진달래가 겨우 꽃눈만 튼 앙상한 맨가지인 채 거센 바람 속에 떨고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택한 직업 약초꾼의 모습으로 치장한 허준이 그 냉혹한 산속 기후를 새삼 느끼며 진달래의 마른가지를 꺾어 들여다보자 입버릇처럼 유의태의 2년 제자임을 내세우는 꺽새가 이 고산지대에서 그것들이 꽃망울을 맺으려면 적어도 하순경은 돼야 하리라고 뇌까리며 그 황량한 산속 풍경이 원수와 같다는 듯이 잇사이로 찍 침을 내깔겼다.
  초행이고 첫 등정이라 허준은 아내가 곱게 접어 내준 솜누비옷에 유의태의 아들 도지가 던져준 댕댕이덩굴로 엮은 약초망태에 잿간에 굴러다니던 흡사 갈고리 같기도 한 호미를 들었을 뿐이었으나 약초꾼 경력 2년인 꺽새의 행색은 요란했다.
  낡고 수십 번이나 꿰맨 그리고 더러 가죽조각까지 갖다 붙인 더덕더덕한 옷에 허준의 호미보다 한 뼘이나 더 긴 갈고리호미를 든 외에도 허리에는 키가 다른 호미를 두 가지나 더 차고 허리의 좌우로는 크고 작은 뚜껑 달린 대나무통을 매달았는데 작은 대통은 산지네를 잡아넣는 통이고 오른쪽 큰 대나무통은 녀석이 때로 뒤로 처져서 혼자 마시는 품이 술통일시 분명했다.
  그밖에 그는 한 발은 실히 될 갈참나무로 손잡이를 한 쌍발창을 들었는데 그건 산속에서 짐승과 맞닥뜨렸을 때 쓰는 무기인 동시에 그 자루는 흩어진 동행들을 불러모을 때 주위의 나뭇등걸이나 바위를 두들겨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용으로 쓰노라 일러주었다.
  산에 오른 건 꺽새, 허준 둘뿐이었다.
 유의태가 그 철 그 달에 사용할 약재 이름을 도지에게 일러주면 도지가 병사를 뒷바라지하는 장쇠, 영달, 꺽새 세 녀석에게 지시할 뿐 유의태는 내다보지도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 도지로부터 오늘 캐오도록 지시를 받은 것은 쑥, 도라지, 호장, 석남채, 으름덩굴 네 가지였으나 엊그제 허준에게 맞은 분을 다 못 삭인 그 감정인지 4년짜리 제자 장쇠도 3년짜리 제자 영달이도 우린 쑥을 맡겠노라며 산비탈 오르기도 전에 아지랑이 낀 들판으로 사라졌고 2년짜리 꺽새가 "오뉴월 하루볕이 원수다" 어쩌고 투덜거리며 허준을 끌고 산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런 대로 녀석은 2년 동안 수없이 드나든 소로를 타고 골짜기를 건너고 가파른 비탈을 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말문을 열기 시작했고 지금 자기들이 캐러 가는 약재에 관해서 그동안 귀동냥한 지식을 자랑삼아 얘기했다.
  도라지는 늦가을에서 이듬해 봄까지의 기간에 캐내어 잘 씻어서 말린 후 담 삭이는 데와 폐를 앓은 병자에게 쓰는 눈친데 말리는 방법은 햇볕과 응달에 말리는 두 가지가 있노라는 것과 호장은 오줌싸개와 여자들의 월경불순에 쓰이는 특효약이며 으름덩굴은 채집기간이 늦겨울과 초봄 것을 써야 약효가 있는데 안질을 앓는 사람에게 쓴다는 것과 속명이 만병초인 석남채는 일년 내내 그 잎사귀를 따 모으니 제일 쉬운 작업인데 이게 또 기가 막힌 약으로 이 석남채 잎새 한 바가지를 반 바가지의 물로 다섯 종지가 되도록 순한 불에 달인 후 벌꿀 두 종지를 섞은 다음 다시 세 종지가 되도록 달여서 저녁으로 사흘만 여자들에게 먹이면 나흘째 저녁부터는 여자가 잠자리가 시끄럽도록 방사를 졸라대는 최음의 묘약이라며 연신 히죽히죽 웃었다.
  이날 두 사람의 수확은 형편없었다. 처음 꺽새는 그것도 먼저 배운 지식이랍시고 오늘 목표로 한 약재의 생김새며 빛깔 그리고 그것들이 무리 지어 자라는 지점을 알아내는 방법 등을 건성건성 일러줬으나 그건 그야말로 건성이었고 허준이 다시 한번 설명해주길 부탁했지만 대꾸도 않았고 간다 소리도 않고 저 가고 실은 쪽으로 가고 말았다. 첫날이니 자상하게 손잡아주라는 도지의 명령을 이행할 뿐이라는 냉담한 태도가 분명했다.
  꺽새의 그 심중을 읽자 허준은 혼자 떨어져 이 비탈 저 비탈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생전 처음 하는 일에 약이름조차 생소한 터라 눈을 부릅뜨고 뒤지다가도 녀석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행여 길을 잃지나 않을까 사라진 꺽새의 모습을 찾아 허둥거려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 후에 문득 건너 비탈길에서 물통을 기울이는 꺽새를 발견하고 건너가보면 그의 망태기 안에는 허준이 그토록 눈을 씻고 봐도 찾지 못하던 것들이 수북수북 들어 있곤 했다.
  허준이 다시 그 꺽새의 망태기 속에서 견본 하나씩을 얻어 들고 그제서부터는 멋대로 돌아다니는 꺽새의 행방을 개의치 않고 차라리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꺽새의 반만큼이나 캐고 말리란 독한 마음으로 마음이 짚이는 쪽마다 부지런히 헤매고 다녔으나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골짜기에 산그림자가 길게 누워올 때까지 허준의 망태기 속엔 도라지 대여섯 뿌리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낙엽 속에서 바위를 헛딛고 삔 그 발목은 뱀에게나 물린 듯이 부어올라 있었다.
  그러나 허준에게는 그 아픔을 일일이 느낄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이 발로 마을에 다다르자면 해가 지고 말리라는 낙담과 허망을 씹으며 그제야 병사에서 병자들의 미음을 끓여내는 유월이가 싸서 안겨주던 차가운 주먹밥을 깨물고 있을 때였다.
  문득 머리 위에서 막대가 바위를 치는 소리가 울려 올려보니 어디 있다가 나타났는지 꺽새가 허준을 굽어보며 쌍발창을 거꾸로 든 채 빙글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 망태기 좀 벌려봐."
  "없소."
  "아무것도?"
  "도라지 몇 뿌리뿐."
  "그까짓 건 내버려."
  "내버리라고? 어째?"
  "그 정도 것을 가져가봤자 스승님이 받아줄 성싶은가? 스승님은 캐간다구 다 받아주시는 분이 아니야. 약광에 들여놓기 전에 일차 서방님이 감별하고 그리구 다시 스승님이 감별하지. 그리구 얼마나 야멸찬지 찾는 물건이 아니다 싶으면 온종일 고생한 사람 심정쯤 애당초 염두에도 안 두고 내버린다 그 말이여."
  " ...?"
  "아예 그 정도 물건은 서방님이 스승님한테까진 내보이지도 않는다고. 핫핫핫. 괜히 욕이나 한마디 얻어먹을 뿐이지."
  허준은 꺽새가 유의태이기나 한 듯이 쏘아보았다.
  순간 녀석이 훌쩍 그 두세 길 바위에서 뛰어내렸다.
  2년 동안 산을 타고 다닌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장쇠형님들 주막거리에서 기다리고 기실 게야. 올 땐 뿔뿔이라로 갈 땐 같이 들어가야 군소릴 덜 들으니까."
  그는 다시 하하 웃었다.
  허준은 추웠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며 산속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노루떼가 천천히 비탈을 올라 잡목이 우거진 황량한 등성이를 넘어가고 있었다.
  문득 꺽새가 자기의 망태기 속에서 제가 캔 약초를 두 손 가득 퍼내어 허준의 망태기 속에 집어넣었다.
  "왜 이러오?"
  못들은 체 꺽새가 두번째 가득히 자기의 약초를 집어내어 허준의 망태기에 집어넣었다.
  "고맙소만 내 걱정보다 노형 사정이 곤란해지지 않소."
  툭툭 손을 터는 꺽새에게 허준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허준과 꺽새가 주막에서 두 망태기 가득 쑥을 캔 장치, 영달과 합류하여 유의태의 집에 도착한 건 이미 땅거미가 지고 멀리 마을의 지붕 위로 저녁 짓는 연기들이 자욱이 안개처럼 퍼진 시각이었다.
  허준들이 도착하자 허준의 첫날 수확을 화제삼고 있었는지 황초잡이 임오근과 병부잡이 그리고 쟁반잡이 그 세 제자도 나와서 저마다 허준의 망태기 속을 들여다보고 저희끼리 눈길을 맞추며 키득거렸다. 그 조롱 섞인 웃음을 지그시 참고 허준은 저녁상을 받고 있다는 도지가 저녁상을 물리고 나타나길 기다렸다.
  집안에 불이 켜지고 그리고 도지와 함께 허준이 처음 보는 유의태의 부인 오씨가 안채 하녀 상금이에게 등불 들려 약초광에 나타났다.
  황초잡이 임오근이가 상금이의 등불을 뺏어 장쇠와 영달이가 캐온 쑥을 비추었다.
  도지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나 그대로 통과하고 임오근이 꺽새의 망태기에 등불을 들이댔다.
  통과했다.
  오씨가 수고했구먼 하고 치사의 말까지 보탰을 때 이번에는 허준이 자기의 망태기를 벌렸다. 도지가 그 속의 것들을 꺼내보다 말고 눈꼬리를 치떴다.
  "이걸 누가 캤나?"
  "내가 캤소."
  허준이 꺽새가 집어준 약초라 자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다음 순간 도지는 꺽새가 준 그 약초들을 마구 집어내 팽개쳤다.
  이어 그 입에서 터져나온 건 욕이었다.
  "이런 얼간이 같은 놈! 이자야, 이건 닮았을 뿐이지 캐오란 약초가 아니야."
  동시에 둘러싼 일동의 입에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웃음을 제일 먼저 터뜨린 건 다른 사람 아닌 꺽새였다.
  허준이 무언가 깨달으며 홱 꺽새를 보자 그 꺽새도 장쇠도 영달이도 데굴데굴 구를 듯이 계속 웃어댔다. 임오근도 웃어댔다.
  "제법 눈썰미가 있는 잔 줄 알았더니 순 청맹과니로군."
  허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어 주먹을 꺽새를 향해 불끈 쥔 순간 갑자기 모두 웃음을 그쳤다.
  나타난 유의태가 조용히 서 있었다.

    2
  "영문을 말씀 올리겠습니다요. 이 신출내기놈이 제가 가르친 대론 하려 들지 않고선 제멋대로 이 비탈 저 비탈 호미질하고 다니면서 ..."
  불의에 나타난 유의태를 향해 떼꺽 웃음을 그친 꺽새가 장황히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변명할 필요 없다. 너희놈들이 하는 행위는 아니 봐도 익히 아는 터인즉슨."
  유의태는 말끝에 허준의 망태기에서 쏟아져나온 도라지 두어 뿌리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그걸 아들 도지에게 내밀었다.
  "못 찾았으면 모르되 찾았거든 단 한 뿌리라도 이런 정성으로 캐야 하느니."
  제자들의 눈이 의아해졌고 도지가 이의를 달았다.
  "하나 물건이 너무 작아서 약재로 쓸 거리는 전혀 못됩니다."
  "초행부터 제대로 된 물건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하나 도라지를 찾더라도 산삼이라도 보듯 이렇게 실낱 같은 작은 뿌리 하나하나까지 다치지 않도록 애써 캔 그 정성을 말함이야."
  말끝에 유의태의 시선이 허준에게 향해왔다.
  "가상한 일이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이어 허준이 고개를 숙이자 한마디 더 보탰다.
  "약초를 대함에 있어 네가 과연 이런 정성을 언제까지 지닐지 그건 내 알 바 아니다만 ..."
  허준의 가슴이 뜨거워왔다. 자기를 편들어준 데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다. 아니 그 말투 그 눈이 유의태가 자기를 따로 편들고 있지 않은 건 분명했다.
  유의태란 의원이 지리산의 백여든네 군데 골짜기와 벼랑과 능선에 자라는 수천만 뿌리 도라지, 그 도라지 한 뿌리에도 얼마나 깊은 외경을 지닌 사람인가를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차츰 높은 의원의 세계를 처음 절하는 그런 신선한 충격으로 바뀌어갔다.
  몇 발 돌아서 가던 유의태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그 눈이 허준이 아닌 아들을 보며 나직이 일렀다.
  "이 아이로 하여금 약재창고를 맡게 하거라."
  도지와 제자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허준도 자기 귀를 의심했다.
  겨우 오늘 입문한 자기에게 약재창고를 맡게 하다니 ... 장쇠 이하 마당쇠들의 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부어올랐다.
  도지가 얼른 그들을 대변하였다.
  "하오나 이잔 아직 몇 가지 약초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겨우 오늘 처음으로 산에 올라간 신출내기올시다."
  "염소뿔 오래 묵힌다 해서 사슴뿔이 되더냐? 햇수 오래 된 게 무슨 소용인고. 쑥맥이 아니라면 약초 이름 따위는 사나흘 보고 익히면 알게 돼!"
  "그럼 여태 약재창고를 맡아보던 저는 병사 마루 위로 올라섭니까요.?"
  장쇠가 다급하게 허준의 새 직책은 자기의 좌천인지 영전인지 그 의미 확인하려 들었다.
  "병사 마루에는 왜?"
  장쇠가 두 손을 비비며 잔뜩 애교 어린 웃음을 꾸며 스승을 보았다.
  "소인도 스승님 슬하에서 밥을 먹기가 이미 4년째올시다요."
  "그래서?"
  "예, 그 동안 뼈빠지게 일했습지요 ..."
  갑자기 장쇠는 유의태의 동정을 애원하듯 우거지상을 치어 보이며 눈물 콧물 빠지는 소리로 늘어놓았다.
  "처음 1년은 병자들 탕약에 쓸 생수를 길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새벽마다 물지게 지고 왕산 골짜기까지 오가며 이십 리 길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오락거렸굽쇼, 낮이면 지리산 골짜기 약초 캐러 다니느라 지리산 골짜기 제 호미자국 안 란 곳이 없도록 헤매고 다녔사옵고요, 3년째 작년서부터야 겨우 약재창고 출납을 소관 맡아서, 그러고도 밤이면 밤마다 또 약재를 써느라 이 손바닥 군살이 박히고 박혀서 ..."
  " ..."
  "그러니 이젠 저도 병사 마루로 올라서서 촛불도 들고 병부도 들고 다니며 스승님이 회진하시는 양을 더 가까이서 보는 것이 소원이올시다."
  " ..."
  오늘까지 유의태는 이 정도의 시간이나마 제자들과 마주선 적이 없었다. '해라' '하지 말아라' 그 두 말뿐이던 스승과의 이 모처럼의 긴 얘기로 대면하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영달이도 끼여들었다.
  "소인도 이미 스승님 슬하에서 3년째오나 장쇠형님이 병사로 올라서면 건재창고를 소인이 맡아보는 것이 순서라 여기옵고 그리고 ..."
  꺽새도 생침을 넘기고 끼여드는데 유의태가 말했다.
  "연기로 따져 누가 오래 되고 덜 되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니로되 생수 가지러 첫새벽 왕산 골짜기 오르내린 것이 억울타면 그건 해명하리. 의원이 약효가 있는 약을 지음에 있어 그 비결은 정성이 반이다."
  허준의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하여 약을 짓는 정성을 배우라. 왕산 골짜기 새댁 첫물을 떠오라 한 것을 깨우치지 못하고 그걸 오로지 고생으로만 여겼다면 그건 의원의 마음가짐일 수 없다."
  장쇠의 어깨가 처지거나 말거나 유의태가 말을 이었다.
  "지리산 골짜기에 너희의 호미질이 안 찍힌 데가 없다 우긴다만 백 번 아니라 만 번을 오르내린들 아직 난 너희들 중 아무도 이런 정성 어린 손길로 캐온 뿌리를 본 바 없어."
  유의태가 말끝에 아들의 손에서 다시 허준이가 캔 실날 같은 뿌리들이 달린 도라지를 집어 장쇠의 가슴에 던졌다.
  " ..."
  " ..."
  "또 너희가 내 밑에 오래 머문 것만 내세우나 아직 첫새벽 물 길러 다니는 진정한 뜻을 모른다니 오늘 한 가지 물에 대해 일러주지. 물이란 무엇이냐?"
  "물이 무엇이냐니요? 소세하고 발씻고 목마를 때 마시는 물이 물이지요."
  불만이 맺힌 장쇠의 반격이었다.
  "물도 물 나름, 의원이 가리고 써야 하는 물의 가짓수는 서른세 가지가 있다. 그중 네가 아는 가짓수는 몇 가진고 ..."
  '물의 가짓수가 서른세 가지?'
  허준이 숨을 죽였다.
  대답없는 장쇠에게 유의태가 가차없이 말을 이었다.
  "물을 그토록 자세히 나눈 것은 물이란 마셔서 이로운 물과 마셔서 해로운 물이 있기 때문이며 특히 의원이란 물의 질을 제대로 알고서야 제가 짓는 약에 약효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야. 알아듣느냐?"
  도지가 얼른 아는 체 뽐내는 얼굴로 허준들을 돌아보았다.
  "제일 상등의 물은 가장 먼 지맥으로부터 발하여 오는 것을 치는데 그 이유인즉 더러운 강물이 가깝거나 인구가 조밀한 곳에 판 샘은 온갖 오수가 스미기 마련일 뿐 아니라 그 기와 맛이 죽기 때문이야. 그런 물을 써서는 차나 술도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법인데 항차 약효를 내는 데 쓰는 물인데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하하."
  그 아들에게 유의태가 물었다.
  "그밖에 더 소상히 말할 수 있느냐?"
  "더 소상히라니요?"
  "이는 멀잖아 네가 한양으로 취재(국가의 의원시험)차 가면 반드시 출제되는 것일 터인즉 너 또한 새삼 귀담아 들어야 하리."
  "전 뭐 그 정돈 이미 외운 지 오래올시다, 핫핫."
  "저희들은 좀 자세히 알고자 합니다."
  병부잡이가 생침을 삼키며 유의태를 쳐다보았고 허준도 물었다.
  "서른세 가지 물은 의원이 직접 맛을 판별하옵니까, 그 모두 이름이 따로 있습니까?"
  "물의 첫째는 정화수를 친다. 그건 성이 평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기 때문이며 하루의 새벽을 여는 천일진정이 이슬이 되어 수면에 맺혔기 때문이다. 하여 병자의 음을 보하는 약을 달일 때는 정한 의원은 굳이 이 물을 쓴다. 둘째가 한천수로 여름에 차고 겨울에 온한 물이 이것으로 그러나 그 진짜는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의 것이어야 한다. 너희가 왕산에서 떠오는 물이 이것이다. 감히 이 물은 장복하면 반위를 다스린다.
  셋째가 국화수, 일명 국영수로 불리는 이 물은 풍비를 다스리며 넷째가 엽설수, 간이 병들어도 이 물이면 낫는다. 다음이 춘우수 즉 정월의 빗물이니 양기가 쇠한 것을 북돋게 하나 청명 무렵과 곡우 때는 물맛이 변하니 이를 가려 써야 하며, 다음 추로수는 해돋기 전의 것이어야 하되 뱃속의 균을 없애는 약을 짓고자 할 전 오로지 이 물뿐이며, 다음 창독을 씻는 데는 매우수, 허로를 낫게 하는 데는 감란수, 가려움증을 고치는 데는 벽해수로 벽해수란 곧 바닷물로서 이 바닷물을 崙여서 몸을 씻는다. 뼈마디와 근육이 쑤시는 데는 온천수이되 유황내음이 나는 물을 쓰며, 편두통을 다스리는 데는 냉천수를 사용하나 그 냉천의 바닥에는 반드시 백반이 있으니 목욕하는 철은 해가 져도 아직 땅기운이 더운 유월과 칠월에 한 하고 그러나 밤에 목욕하면 편두통은 고치되 실어증을 얻거나 목숨을 잃는다."
  다음 다음 다음 유의태의 입에서는 계속 막힘 없이 하빙, 반천 하수, 천리를 흘러온 천리수, 역류수, 요수, 그리고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자라며 머리카락 색이 검어지며 윤이 난다는 시루 뚜껑에 맺힌 물을 가리키는 증기수에 이르기까지 물과 의약에 관한 유의태의 현하의 웅변이 계속되었다.
  모두 코가 빠져 있었으나 허준의 가슴은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아니 그건 전율과 같은 감동이었다.
  유의태에게 느끼고 있었던 그 오만과 도도함에 대한 저항이 눈처럼 녹고 있었다.
  유의태의 존재가 허준의 눈에 이제는 태산처럼 비치고 있었다.

    3
  그날 물 하나를 서른세 가지로 분류하는 유의태의 의원으로서의 해박한 지식에 압도되어 집으로 돌아오던 날 아들과 남편의 첫 출사의 결과가 궁금한지 어머니 손씨와 아내 다희가 초승달이 비낀 동구 밖 개울가에 초조한 모습으로 마중나와 있었다.
  이어 집에 들어섰을 때 쪽마루에서 노모와 무언가 우스갯소리를 하며 함께 웃고 있던 구일서가 달려나와 허준을 자기네 안방으로 끌어들였다.
  안방에는 남자 여자로 나뉘어 양가의 저녁상이 두 상 차려져 있었고 이어 구일서의 아내와 다희가 사람 수대로 몇 방을 노란 기름이 뜬 닭곰탕 뚝배기를 들여왔다.
  비록 밥은 쌀알이 보이지 않는 보리와 조를 섞은 잡곡이었으나 오나가나 흉년 타령인데 특히 허준의 앞에 놓인 고봉 밥그릇은 그의 약초꾼으로서의 출발을 격려하는 의미가 분명했다.
  그리고 밥상 위에 털이 뽑힌 채 두 다리를 벌리고 나자빠진 삶은 닭은 아침까지 잿간을 뒤지고 다니던 낯익은 서너 마리 닭 중의 한 마리일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손씨가 고마움을 가득 담아 순금이 아버지(구일서)가 너를 위하여 기르던 닭을 두 마리나 잡았다는 얘기를 했고 그러자 '윤월'이라는 아명 외 성씨도 모른다는 구일서의 노모가 외로운 집안끼리 모처럼 형제간처럼 지내게 됐는데 그깟 기르던 닭 두 마리 잡는 게 무에 그리 아까울까 보냐고 오히려 앞 못보는 자기의 손을 잡고 함께 동네 여기저기 거닐어주고 말동무가 돼주니 고맙다며 손씨의 손을 더듬어 잡았다.
  양가의 풍속을 따진다면 남녀가 한방에서 끼니를 나눈다 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러나 이날 양가는 아랫목에 남자 여자로 나뉘어 앉아 내외를 파탈한 채 식사를 끝내고 허준의 지리산 초행의 성과를 화제삼았다.
  허준은 함께 동행한 꺽새가 자기를 일부러 험한 길로 이끌고 다닌 뒤늦게 깨달은 그 훼방질과 약초가 아닌 잡물을 자기의 망태기 속에 쓸어 넣고 유의태 일가에게 자기를 밉보이게 하려던 선배란 자들의 사악한 짓거리 등은 입다문 채 온종일 보잘것없는 도라지 다섯 뿌리를 캔 것뿐이나 뜻밖에 유의태의 눈에 들어 내일서부터 약재의 출납과 간수를 맡게 되었노란 새 사실만 얘기했다. 그리고 창고지기가 돼봤자 옷 한 벌이라도 더 해주는 특별한 직책도 아니요 산행은 산행대로 하고 돌아와서는 창고의 책임까지 맡아 몸이 더 고단할 뿐이지만 그러나 약재에 관한 지식은 남보다 빨리 깨우치게 되리란 희망도 피력했다.
  어머니가 가장 기뻐했고 남편의 그 삐어서 퉁퉁 부슬 다리를 시종 근심스레 보던 다희도 그제야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하오면 앞으로는 늘 유의원님 댁에서 숙식을 하시옵니까?"
  저녁상이 파하고 뒤꼍 그들의 방으로 돌아온 후 허준이 칡뿌리로 싸묶은 다리를 풀자 대야에 물을 담아온 다희가 남편의 다친 다리를 대야물에 담그게 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래라 저래라 말을 걸어주지도 않고 반드시 지켜야 할 무엇도 없는 모양입니다. 지금 있는 사람들의 하는 양을 보건대 더러 짬을 내어 주막거리에 나가 퍼질고 앉아 마냥 흥청거리는 걸 보면 나도 짬보아 더러 집에 오갈 수야 없겠소."
  " ..."
  "새 직책을 맡았으니 빨리 익히고 손에 익을 동안 가급적 유의원 댁에 붙어 있을 생각이오만 당신 보고 싶을 땐 오가고 하리다."
  농담 같은 말을 허준이 웃지도 않고 말했고 다희 혼자 얼굴을 붉혔다.
  "흥청거리다니요? 먹고 자고 봄 가을에 옷을 해주는 외 양식을 나눠 주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렇소. "
  " ...?"
  "함께 오늘 산에 오른 그 사람 말에 의하면 병사에 오래 묵게 될 중한 병자들이나 돈냥이나 지닌 듯한 병자들이 오면 온갖 아첨짓 떨어 술값으로 뜯어내고 또 약을 대신 달여주어 그 수고비를 얻어내어 저희끼리 나눠 쓰는 눈칩데다."
  "벙자의 가족에게 돈을 얻어쓰다니요?"
  "나도 아직 본 적 없으니 대놓고 옮길 얘긴 아니오만."
  " ..."
  "전에 있던 사람 중에 내쫓긴 사람들의 경우에 약초 캐러 나섰다가 희귀한 약재를 캐거나 하면 따로 빼돌려 팔다가 들킨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씨로서야 어찌 남의 집에 있을 수 있으리까."
  "하나 이 사람들은 저들의 소망을 말하기를 산에 드나드는 동안 행여 산삼이라도 캐어 한밑천 거머잡는 게 소원인 듯하오. 물론 그게 아무의 눈에나 쉬 띌 그런 게 아닐 테지만."
  "하나 너무 낙심일랑 마오. 난 산삼이 어찌 생겼나 눈앞에 있어도 모르는 사람이오만, 하나 4, 5년 병자를 대하고 다루는 법을 배우고 약재의 약효와 성질을 깨치고 그밖에 의원으로서의 문리가 터질 때쯤이면 유의원이 직접 병사에서 자길 거들도록 지명을 하는 모양이오."
  "어머님 모시고 우리가 갔을 때 유의원 곁에서 촛불도 들고 병세를 적기도 하던 그 사람들이 일차 유의원께 지명을 받은 사람이오니까?"
  "그렇소. 모두 5년은 넘은 사람들이라 합디다."
  한참 말없던 다희가 대야에 담긴 남편의 다리의 부기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며 다시 물었다.
  "사람들 심술궂지는 아니하온지?"
  " ...?"
  "새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투기부리거나 하지 않고 정겨웁게 손잡아 가르쳐주기도 하옵는지요. 어머닌 종일 그걸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허준이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뒷문을 가리키며 어서 나가버리라고 악을 쓰던 장쇠의 얼굴이 뇌리에 스쳐갔다. 그리고 자기의 등뒤에서 죽어라 하고 장작개비로 후려갈겨 기절케 했던 임오근과 또 오늘 짐짓 험한 길로 끌고 다니며 끝내는 자기를 그 집의 작은주인 도지의 눈에 웃음거리로 만들려 기도했던 꺽새의 독한 눈빛도 떠올랐다.
  그러나 허준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 모두 친절하오."
  다희가 환히 웃었다.
  "천만다행올시다. 어머님 말씀도 그러하시고 제 요량에도 서방님이 남달리 붙임성 있는 분이 아니신데 혹 다정하게 손잡아주는 이가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 하긴 인명을 다루는 의원을 지망하는 사람들이온데 새 사람이라 하여 턱없이 질시할 리 없다 여깁니다만 ..."
  허준이 조금 웃었다.
  '그래, 당신은 이 험한 세상을 다 알 것 없어. 당신은 당신이 믿듯이 세상 모든 사람 다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 여기고 살면 되오.'
  "왜 웃습니까?"
  '온갖 추악한 세상의 바람일랑 내가 막아나갈 것인즉.'
  대야에서 다리를 뽑은 허준이 그 아내의 환한 얼굴을 가슴에 안았다.
  방문 밖 멀리 언제부턴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이슥히 깊어가는 밤을 알리고 있었다.

  허준이 약재창고의 전모를 대충이나마 파악한 것은 유의태로부터 곳간 출납을 명령받은 지 근 두 달도 좋이 지나서였다.
  사면 벽에 층층이로 시렁을 걸치고 거기 수백 종의 크고 작은 약재들이 두름째 엮여 매달리기도 하고 종이봉지에 담겨 빽빽이 대롱거리고 그밖에 창고안 곳곳에 층층이 선반을 달아내고 또 버텨놓은 건초대며 바닥엔 바닥대로 망태기와 삼태기, 오지그릇통까지가 뒤죽박죽으로 발디딜 틈도 없이 벌여놓아 있는데 심지어 지네를 수백 마리 잡아 처넣은 푹 삭은 오줌통의 냄새까지 엉켜 처음 들어서는 사람에겐 함부로 맡을 냄새가 못 되도록 역겨웠다.
  하나 허준이 애를 먹은 건 썩고 삭고 마르는 온갖 약재들이 자아내는 냄새가 아니었다. 그 수백 가지 약재의 생김새를 외우는 것부터가 진땀이 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낮이면 산행을 하고 그 고단한 몸으로 돌아온 저녁에 다시 그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는 창고 안에 등불을 밝혀놓고 도지가 건네준 물목장부 따라 품목을 찾고 그 생김새를 기억한 다음 다시 그 채집한 시기와 양을 확인하는 등의 작업은 더구나 선임자인 장쇠들의 철저한 비협력과 외면 속에서 좀체 진척이 되지 않았다. 또 이곳을 맡으라 영만 내렸을 뿐 그 두 달여를 유의태는 단 한번도 약재창고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모르는 것이 있어 한밤중 도지에게 찾아가 기척을 낼 적이면 과거 공부에 방해된다며 도지는 도지대로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 두 달 동안 거의 밤을 꼴딱 새우면서 악착스레 붙어앉아 파고든 보람이 있어 처음 너무도 막막하게 보이던 중국식 약이름을 자신의 생활 속에서 흔히 대할 수 있던 실제의 것과 분별할 만큼 되었다.
  호마라고 써 있는 건 참깨, 백유마가 흰창깨, 안방이 기러기기름, 해마가 찰개구리, 도핵인이 복숭아씨, 행핵인이 살구씨, 고채가 씀바귀, 흔하게 듣던 시호탕의 시호는 묏미나리, 맥문동은 겨우살이 뿌리, 인동은 겨우살이 덩굴, 당귀는 승검초 뿌리, 그밖에 구기자는 괴좇나무, 같은 괴좇나무도 그 뿌리를 까발긴 껄질은 지골퍼, 심지어 대산, 소산, 야산 중에서 대산이 큰 마늘, 소산이 원래 씨가 작은 마늘, 야산이 달래라는 걸 알아내고 일일이 맛을 씹어보며 지내는 동안 허준의 몸에서는 이젠 씻어도 씻어도 지을 수 없는 지리산 약초 냄새가 깊이 배어버리고 말았다.
  그 어느날이었다.
  멀리 논배미에서 철늦은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달포 이상 헤어져 있는 아내가 무시로 그리워 오늘쯤 집으로 잠시 들어가리라 여기며 창고에서 나와 작은 사랑채 도지의 글방 앞을 지날 때였다.
  이미 세상 모두 잠든 시간이라고 여겼는데 그 도지의 방에서 도지가 도도히 글 읽는 소리가 났고 사이 사이에 독서를 정지시키고 다잡아주는 유의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보니 그 댓돌 위에는 부자의 신발 외 오씨의 신발도 놓여 있었다.
  일상적으로 읽는 책 귀절이 아닌 어딘가 긴장된 책 내용이었고 그건 의학에 관한 내용인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걸음을 세운 허준은 자신도 모르게 불이 환한 그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유의태와 도지가 입버릇처럼 뇌는 과거 시험. 중인이니 과거일 리 없는, 그러나 나라 안 의원들인 하늘의 별처럼 선망하여 과거라 일컫는 그 의원 취재에 응시하는 아들을 밤새워 독려하는 모습일시 분명했다. 아직 그 경지가 아님에도 허준의 온몸에 뜨거운 긴장이 팽팽히 뻗어왔다

    4
  방안에서 새나오는 유의태의 음성은 병사에서 듣던 그 위엄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부정을 담은, 허준이 처음 듣는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의학이란 실제의 학문이다. 비록 세상에서 학으로 높이려 들지 않고 한낱 술이라 부르는 것이되 세상에서 무어라 부르건 말건 의술은 다른 학문처럼 귀로 들어서만 아는 것이 아니요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으로 익혀서만 쓸 수 있는 증험의 학문이다."
  "압니다."
  아버지의 진지한 설명에 비해 아들의 대답은 좀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 더 명심해야 할 일은 세상에서 의원으로 종사하는 사람을 높이 알아주건 아니 알아주건간에 의원의 소임은 생명을 다루는 것임에서 세상 그 어느 생업보다도 고귀한 직업이다."
  도지가 대꾸하는 기척이 없이 한참 방안이 잠잠한 속에서 "꿀차는 식으면 맛이 없어. 어서 이것부터 마셔라." 하는 유의태의 부인 오씨의 목소리와 쟁반 위에서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시 유의태의 음성이 들렸다.
  "그러나 생명을 다룬다 함에서 아무리 귀하다 한들 의원 스스로 생명의 막중함을 아는 겸손한 인격을 지니지 않고야 무슨 소용이리 ..."
  다시 침묵이 있다가 유의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 하여 의원이 의원이고자 하는 공부의 시초는 1천5백92가지 약재의 이름을 외우고 오미의 맛과 그것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며 희노우사비경공 그 칠정의 신의 허실을 다 알았다 한들 마지막 한 가지를 알지 않고서는 진실로 의원일 수 없다."
  " ..."
  "마지막 한 가지라니요?"
  한 손에 꿀차 찻잔을 들었는지 도지의 말끝에 입안의 꿀차 넘기는 소리가 났다.
  "하하하 ..."
  도지가 싱겁게 웃는 소리가 났다.
  "천오백아흔두 가지 약재로 이름 붙은 초근목피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어찌 범상한 재줍니까. 게다가 오미의 맛과 품을 알고 더더구나 희노우사비경공, 그 칠정의 허실을 알았다 하면 그거야말로 인간사의 소원인 불로장생의 도와 술을 넘볼 경지이온데 그밖에 더 무엇을 보탠단 말씀이오니까?"
  이번에는 유의태가 말이 없었고 아들이 따져들었다.
  "그래 아버님이 늘 강조하시는 의원이 의원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란 무엇이오니까. 어느 책에 적힌 글이오니까?"
  "그건 어느 의서에도 적힌 바가 없다. 하나 그것 없이는 고금의 의서를 무불통지하고 보하고 사하는 온갖 의술을 통달했다 한들 참된 의원이라 일컬을 수 없다."
  "고금의 의서에 무불통지하고 보하고 사하는 의술을 통달하고도 의원으로서 더 이상 갖출 무엇이 있단 말씀이온지 ...?"
  "사랑이다."
  유의태의 대답이 짧았다.
  "사랑이라니요?"
  "과거공부를 시키다가 말고 웬 사랑타령이오니까."
  오씨의 목소리가 끼여들었을 때,
  "병들어 앓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
  어미에 단호한 울림이 느껴졌다.
  "위엄 세우지 않고 다정하게 굴면 종당에는 약값을 깎으려 기어붙는 것이 병자들의 심성올시다."
  "의원의 신세를 지면 아무리 독하고 가난한 이라도 밥 한술은 먹여주는 터이니 병자의 빈부를 왜 굳이 따지려들꼬."
  잠시 도지가 방만하게 웃는 소리가 났고,
  "그럼 의원은 흙 파먹고 삽니까." 하는 오씨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유의태 앞에 술상이라도 놓여 있었는지 돌연 탕! 손바닥으로 술상을 치는 소리가 났다.
  "의원도 의원 나름. 고을마다 의원을 자처하는 자가 별처럼 깔렸으되 병자를 긍휼히 여기는 의원도 많지 않아."
  "긍휼?"
  "병들어 앓는 이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
  허준의 뇌리에 유의태의 시퍼런 눈빛이 손에 잡힐 듯이 보였다. 이미 목소리가 자식을 공부시키는 부정을 담은 게 아니었다.
  "의원으로 자처하는 허구많은 부류 중에도 여덟 가지 의원이 있다. 능히 네가 그 여덟 가지 의원의 부류를 알 수 있느냐."
  "모릅니다."
  "붓을 들어라."
  "왜오니까?"
  "적으랄밖에!"
  "그것도 취재 시험에 나오는 문답이온지?"
  "나오지 않아도 의원이라면 평생 가슴속에 담아두어야 할 조목인즉."
  허준이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붓도 종이도 있을 수 없는 남의 방문 앞일 뿐이었다.
  약재창고에 지필묵이 있었으나 달려갈 여유가 없는 걸 깨닫자 허준은 귀를 바짝 방문 쪽으로 열었다.
  "여덟 가지 의원 중 그 제일을 심의로 친다. 심의란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늘 마음이 편안케 하는 인격을 지닌 인물로 병자가 그 의원의 눈빛만 보고도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경지로서 그건 의원이 병자에 대하여 진실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가짐이 있고서야 가능한 품격이다."
  "마음 심자 심의오니까."
  방안의 도지가 기록하며 묻는 소리가 났고 허준도 심의라는 글자를 입안에 뇌었다.
  "둘째가 먹을 식자 식의, 병자의 병세를 판단함에 항상 정성이 모자라며 병자가 말하는 병명만 기억하고 약을 지어먹이는 자다."
  허준이 또 뇌었다.
  '식의.'
  "셋째가 약 약자 약의, 이 부류도 스스로 병자의 성색을 판단하여 병의 경중을 찾아내려 않고 병자가 구술하는 대로 약방문에 의지해 약을 짓되 병이 조석으로 성쇠가 있는 법과 병자의 근력과 내장의 허실까지를 비교하지 않고 병자가 아프다고 호소하는 부위의 약만 마냥 먹이며 차도를 기다리는 자다."
  '심의, 식의, 약의.'
  허준이 마른침을 삼키며 유의태의 한마디 한마디를 뇌리에 새겨갔다.
  "넷째는 또 무슨 의원이오니까?"
  "넷째가 어두울 혼자 혼의, 병자가 위급해하면 저도 덩달아 허둥대고 병자가 쓰러져 잠들면 저도 궁둥이 붙이고 앉아 눈만 뒤룩거리며 오로지 비싼 약 팔 궁리만 일삼는 자다."
  도지가 무엇이 연상되는지 혼자 깔깔거리는 소리가 났고 유의태가 가차없이 말을 이었다.
  "다음이 미칠 광자 광의로, 병자란 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항상 과장된다는 걸 모르고 오로지 병자의 말만 듣고 매운 약을 함부로 지어먹이는 자다. 다음이 망의라 부르는 자로 병자의 고통보다 병자의 의복을 보아 약값을 많이 내는 인가 아닌가에 더 관심이 있고 또한 밤중에 찾아오면 문구멍으로 내다보고 행색이 가난하면 따돌리기 일쑤인 자로 낮에 찾아가도 병자의 마르고 부한 것조차 보지 않으며 오로지 전에 누굴 무슨 약으로 고쳤다는 것만 증험삼아서 비싼 약이 잘 낫는다고 우기는 자다. 다음이 사의, 이 속일 사자 사의는 오로지 의원의 행색만 흉내내며 스스로 안 아픈 이도 찾아다니며 병을 보는 체 하다가 그저 제가 꾸미는 한 가지 약으로 만병통치라 우기는 자이다."
  "그런 놈 많지요. 마지막은 무슨 의오니까?"
  "마지막이 죽일 살자 살의다. 춘하추동 계절이 바뀌는 이치와 생명이 살고 죽는 이치를 알지 못하며 하물며 아파 고통받는 이를 보고도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고 나아가 남이 지은 약방문에 일일이 이다 아니다 요란을 떨어 제 이름만 파는 자다."
  "결국 본받을 만한 의원은 심의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마다 의원이노라 행세할지라도 이 세상이 진실로 기다리고 바라는 의원은 오로지 한 부류 심의뿐이다."
  방안이 조용해졌다.
  허준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유의태가 아들 도지에게 들려주고 있는 의원의 자격들은 아들에게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하는 말 같았다.
  오로지 생업의 수단으로 의원을 지망하여 유의태의 집에 머물기로 한 허준의 가슴속을 다잡아 유의태의 팔의론이 칼날처럼 섬뜩섬뜩 그어오고 있었다.

  돌연 귓전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튕겨일어나니 장쇠놈이 허준이 베고 있던 목침을 걷어찬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해가 똥구멍까지 솟았는데 우리가 네놈 잠자리까지 일일이 깨워야 하느냐 그 말이다!"
  보니 방안에 뛰어든 장쇠뿐이 아니고 마당엔 이미 산행 차림을 갖춘 영달이와 꺽새도 곱지 않은 눈으로 허준을 흘겨보고 있었다.
  약재창고의 출납직을 빼앗긴 후부터 녀석들은 일제히 허준을 적으로 돌린 듯했고 그런 험한 눈으로 한상에서 밥도 함께 먹으려 들지 않았는데 잠을 깨우는 건 오늘따라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오늘은 무슨 약재를 캐라는 영이신가?"
  목침을 걷어차인 감정은 내색 않고 허준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며 묻자,
  "저놈의 중놈만 나타나면 고생은 우리가 해야 한다니까."
  장쇠놈이 허준의 말엔 대답 않고 혼자 중얼거리며 방을 나갔다.
  허준이 따라나와 마당에 서자 햇살을 보는 눈알이 삼눈이 박힌 듯이 따가웠다.
  밤새 유의태의 팔이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전도에 대해서 이 생각 저 생각에 거의 잠을 못 이루었던 것이다.
  "씨발놈 떨어진 마누라 생각하며 밤새 용두질이라도 쳤나, 자빠져 자란 밤은 무얼 하구 눈이 새빨개."
  더 뒤도 안 돌아보고 병사 쪽으로 돌아가는 꺽새의 욕설이 들렸다.
  허준이 서둘러 안채로 들어가 점심밥을 받아들고 장비를 둔 약재창고로 가려고 큰사랑채 앞을 지날 때였다.
  장쇠놈이 욕을 퍼부은 남루한 중이 정자 위에 올라앉아 유의태와 담소하고 있었다.
  남루하고 몸이 장대한 그리고 송충이 같은 짙고 굵은 눈썹 아래 눈이 부리부리하기 고리눈 같아 한눈에 어딘가 기승 같은 인상의 중이 유의태와 술상을 마주하고 낄낄거리고 있었다.

    5
  남루하긴 했으나 중의 행색치고는 그 거한의 웃음소리가 거침없고 방자했다.
  얼마 전 주막의 중노미에게 들은 유의태가 사귀는 유일한 벗이라는, 중개 한 마리를 안주삼아  동이술을 비우더라는 그 중일시 분명했다.
  승려의 차림으로 언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치는 짓거리가 있을 법이나 할까마는 유유상종이라 유의태가 친구로 교재하는 그도 유의태처럼 시속을 아랑곳함이 없이 제 주장대로 사는 인간인 듯 나직나직한 유의태의 언성을 향해 자주 큰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그 사이사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꾸 내 그릇에만 붓는가."
  "송엽줄세."
  "냄새로 봐선 곡차 같은걸."
  "맞소, 곡차 좀 드시게."
  "곡차에 떡이라, 그 떡 먹음직하다."
  중이 떡이라 칭한 닭다리를 잡아찢자 유의태가 맞장구쳤다.
  "암, 떡이지 떡, 많이 드오. 핫핫."
  "왜 웃으시는가. 빈도의 꼴이 불쌍해 뵈오?"
  "허겁지겁 먹는 품이 끼니도 못 얻어먹은 얼굴이라서."
  "지난달 두류산에서 휴정 그분을 뵈었더니 내 미친 꼴을 경계하며 한마디 하시더군."
  "휴정이라면 판선종사로 계시는 분 아니요?"
  "그 일도 내놓고 보우 큰스님의 후임으로 봉은사 주지로 계시오만. 훗훗."
  "그래 벗님께 무어라고 경계를 하셨소?"
  "가사를 입은 자들은 사바대중으로부터 좁쌀 한 알도 빚지지 말라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늘 악식의 유혹에서 못 벗어나는가 하고!"
  "핫핫, 그래서 예까지 오는 동안 좁쌀 한 알도 못 얻어자셨소?"
  "눈앞에 보이면 먹는 것이고 없으면 아니 먹는 게지. 나야 그분처럼 도가 우람한 쪽이 아니니 어쩌오. 헛헛. 어쨌건 전조 고려 때엔 중이 거리에 나서면 임금도 길을 비켜주었다는데 지금은 중의 복색으론 시골 소 모는 아이들조차 길을 비켜주지 않소그려. 그러니 좁쌀 한 알 얻어먹긴들 쉽소? 더구나 이런 흉년에야."
  중이 남은 닭다리의 한쪽도 잡아뜯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이 허준의 마음에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었으나 어서 따라나서라고 눈을 부라리던 장쇠들이 생각나 마악 자리를 뜨려던 때였다.
  도지가 나타나 정자 앞에 이르러 그 중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 ...?"
  "올라오게."
  중이 자기 자식에게처럼 스스럼없이 말했고 도지가 정자에 올라 공손히 무릎을 모아 꿇어 앉자 유의태가
  "네 취재를 앞두고 애비가 특히 청하여 오시라 했다. 소관이 바쁜 분이고 여러 날 계실 형편이 아니나 마냥 애비자식간에 오가던 문답만으로는 네 학문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다 여기어 모신 것이니 애비에게서 배운 바를 마지막 점검하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아라."
  "네."
  떠나려던 허준이 다시 정자 쪽을 보며 귀를 기울였다.
  도지가 공손히 물었다.
  "대사께서는 며칠쯤 계실 수 있사온지요."
  "의술에 관해선 내가 자네 아버지보다 빼어난 게 없는 사람인데 굳이 자네 아버지가 나를 청하여 자네의 의원으로서의 지식을 떠보란 것은 아마도 내가 지난날 내의원에 몸담고 있었던 인연을 드는 것뿐. 나야 이젠 옛 내의원 적 일은 잊었고 지금 아는 건 불경뿐일세. 핫핫 ..."
  웃음을 물며 중이 돌아보자 유의태가
  "삼적께선 나와의 구정을 떠나 내 자식으로 하여금 의원이 되는 여러 지침을 일러주오. 그건 또 이 유의태의 소원이기도 한즉."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저 어수룩한 복색을 한 중이 유의태가 한가닥 비원을 당아 부탁하도록 의원으로서의 높은 경지를 지닌 인물이라니 ...
  "병이 생기는 원인을 아는가?"
  삼적이라 불리는 중이 문득 도지에게 물었다.
  도지가 웃었다.
  "쉬운 얘기는 젖혀두시고 지난날 내의원에 계실 제 시관 노릇도 하셨다니 시험에 나올 법한 어려운 문젤 물어주십시오."
  "그럼세."
  중이 순순히 대답하더니 불콰하니 술기가 돌았을 뿐 웃지도 않는 얼굴인 채 다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병이 왜 생기는가? 이유와 원인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말해보시게."
  도지는 아직 웃으며 자신만만한 어조로 대답했다.
  "한 가지는 입을 통하여 이물이 몸속에 숨어들어간 것이 이유이고 또 하나 원인은 신체의 음양이 조화를 잃은 때문올시다."
  "음양이란 뭔가?"
  "양은 해의 기운으로 형체는 없으나 하늘로 솟는 뜨거운 기를 이르는 것으로 만물을 기르는 성이며 음은 땅의 기운에 속한 것으로 만물을 배고 태어나게 하는 성을 이릅니다. 사람으로 치면 남자와 여자올시다."
  "그럼 사람의 신체 속에서 어디가 양이고 어디가 음인가?"
  "사람의 신체 속에서 음양의 구별 말씀이오니까?"
  허준이 귀를 기울였다.
  도지가 대답했다.
  "의원이 보는 사람 신체의 음양은 허리 위가 양, 뱃속 음, 피부는 양, 그 살가죽 속은 음으로 봅니다."
  "더 자세한 구별을 일러준 바 있느니라."
  유의태가 아들의 대답이 미진한 듯 곁에서 뚱겼다.
  "사람 몸 안의 오장과 육부를 음양으로 나눈 그 말씀이오니까?"
  유의태는 더 이상 뚱겨주지 않았고 중에게 술을 쳤다.
  "사람 내장 속에서 오장에 속하는 간, 심, 비, 폐, 신이 음이며 육부인 담, 소장, 위, 대장, 방광과 삼초는 양올시다."
  유의태도 중도 대답이 없자 눈알을 굴려 두 사람의 안색을 살피던 도지가 얼른 정정했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오장이 양이며 육부가 음올시다."
  중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착각이 아닐세. 먼저 한 말이 정답일세."
  " ...?"
  "어려운 문제에만 집착하고 만병과 연관이 있는 오장육부의 성질에 대해 즉답이 못 나온다면 공부가 모자라."
  도지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 아들에게 유의태가 가차없이 내뱉었다.
  "실망할 것 없다. 사람 누구나 한꺼번에 다 가질 순 없는 법이요 취재의 기회는 차후로도 있을 것인즉."
  "시험에 한둘 틀리는 건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실수올시다."
  "목수가 자기의 실수를 알면 설사 새 집을 헐어 대들보라도 갈아끼워 다시 지을 수가 있다. 하나 인명을 다루는 의원은 작은 실수도 용납이 아니 돼. 죽은 후에는 임금의 권력으로도 되살려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목숨인즉슨."
  아들의 눈빛이 대드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이제야 대사님을 불러온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다 하시면서 그래서 이 양반을 불러와서 저의 한양행을 단념케 하고자."
  "애비가 말리는 건 널 더 큰 의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깊은 뜻인 걸 모르느냐."
  "저는 갑니다."
  "오가며 허송세월일 뿐."
  도지가 참을성 없이 정자 아래로 내려서서 신을 꿸 때야 잠자코 있던 중이 한마디 보탰다. 말투가 차가웠다.
  "정 가려거든 보내게. 방에는 못 붙어도 취재가 무엇인가 하는 경험 하나라도 남겠지."
  "경험차 가는 게 아니라 난 붙으러 갑니다."
  "그렇거든 이거 한 가진 머리에 담아 가게. 어느 해 어느 취재에도 반드시 나오는 문제인즉."
  " ..."
  허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의 인체를 음양과 관련지어 매번 이 한 가지 문제는 꼭 나오네. 사람이 겨울에 쌀을 먹으면 보양이 되는 까닭과 여름엔 쌀밥보다 보리를 먹어야 보양이 되는 이유를 말할 수 있겠는가?"
  "겨울에 쌀을 먹고 여름에 보리를 먹는 이유?"
  도지가 조소했다.
  "그거야 그 양식이 그 철에 나기 때문이지요."
  "적어도 의원의 대답은 그래선 아니돼."
  유의태가 끼여들었고 도지가 맞받았다.
  "그럼 의원의 대답은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유의태가 삼적대사의 잔에 술을 쳤다.
  술이 다하여 잔이 차지 않았다.
  그 잔을 들고 중이 말했다.
  "사람에게 엄동에 굳이 쌀밥을 권하는 것은 천지가 음기에 든 그 겨울에 한여름 따가운 땡볕 속에서 양기를 띠고 영근 쌀 속에 담긴 여름의 양기를 취하여 음양의 조화를 지니려는 것이오."
  " ...!"
  허준이 눈을 크게 떴다.
  "또 한여름 만물이 불볕 더위에 허덕일 때 쌀밥보다 보리밥이 소화가 되는 까닭은 그 보리가 한겨울 눈구덩 속에서 가득 음기를 배고 생육된 곡식이라 온통 양기(陽氣)로 찬 삼복더위 때일수록 그 보리 속에 담긴 겨울의 음기를 취하여 신체의 음양을 지탱하는 때문일세."
  '한겨울에는 삼복더위 속에서 영근 쌀을 취하여 겨울에 모자란 양기를 취하고 한여름엔 저 엄동의 눈밭에서 자란 보리의 냉기를 취하여 여름에 모자란 음기를 보한다.'
  하늘과 땅을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양과 음으로 나누는 말을 들었으나 허구한날 먹는 일상의 음식 속에서조차 음양의 이치가 숨어 있는 걸 허준은 이날 처음 알았다.
  그 오묘한 천지운행의 이치를 귀동냥하며 허준은 처음 임시변통의 생업으로 택했던 의원의 세계로 자신도 모르게 한발 한발 빠져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6
  "어서 오게."
  손씨가 방문 밖에 나타난 구일서의 아내 윤씨를 발견하고 환하게 말했다.
  다희도 한지에 깨알같이 적은 글자의 내용을 시어머님께 읽어 드리고 있다가 구일서의 아내를 보자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윤씨는 방안에 어른이 계셔서 조심스러운지 선뜻 들어오려 않고 다희에게 말했다.
  "홍진사댁 노마님께서 사람을 건너보내셨수. 새댁 바느질 솜씨 어디서 소문 들으시고 새 옷 한 벌 새로 지으시려나 보우."
  "아이구, 이제 겨우 몇 벌이나 지었다고 소문이 났을라구. 다 이웃간에서 괜한 소문을 내준 탓이지."
  손씨가 함빡 감사를 담아 대신 대답하자 아낙은 주근깨가 퍼진 콧등에 주름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괜한 소문은 왜 괜한 소문입니까요. 핑계대어 새 옷 해입는 사람들이 모두 보통 집안 사람들인가요. 다 이 고장에서는 내노라 하는 댁 안식구들인데 소문만 냈다가 솜씨가 안 따르고야 바느질삯은 고사하고 머리끄덩이 잡히기 십상이죠."
  "지금 건너오라는 영이신가요."
  다희가 묻자,
  "집이 어딘 줄 자세히 얘기하고 사람은 돌아갔수. 박초시댁 별당마님 저고리감은 어찌 됐수."
  "다 꾸미고 다림질만 남았습니다."
  "그럼 이따 그거 전해주러 갈 때 홍진사댁에 거쳐오면 되겠네."
  "좀 쉬어 쉬어 해야지. 홀몸도 아닌 터에 ..."
  손씨가 며느리를 향해 애처로운 얼굴을 향하자 다희가 얼굴을 붉히며 문밖 구일서의 아낙에게 시선을 향했다.
  "잠시 올라오셔요."
  "그러게. 난 아들이 적어온 이거나 한번 들어보고 곧 나갈 터인즉."
  그제야 아낙이 마지못한 체 들어와 앉으며 부러운 얼굴을 했다.
  "새벽에 잠시 기척이 나더니 서방님께서 또 무얼 적어오셨나부지 ..."
  "그랬어."
  손씨가 대신 대답하며 불현듯 한숨 쉬었다.
  "근자 유의원님께서 의원 시험차 한양에 가는 자제분께 여러 가질 가르치시는데 우리 이 사람이 더러 방문 밖에서 귀동냥하다간 이렇게 무얼 적어오군 한다우. 난 그 신기한 얘기들을, 이 아이가 읽어주는 걸 듣는게 요즘 낙이구."
  "병을 낫게 하는 무슨 비방 같은 걸 적어오시나 부지요?"
  "비방이 아니라 의원이 되려는 이가 알아놔야 할 그런 여러가지 얘기올시다."
  "난 뭐 언문 몇 개도 모르는 까막눈이 돼서 ... 아무튼 새댁은 하늘에서 복받은 사람이우."
  "제가요?"
  "그렇잖구요. 여잔 삼씨 중에 한 씨만 타구나두 남편 사랑을 잃지 않는댔는데 새댁이야말루 삼씨 다 타구나구 어려운 글까지 다 아니."
  "이런 진서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냥 ... 조금 뜻만 알 정도지요."
  "삼씨라니 무슨 씨?"
  손씨가 며느리 칭찬에 흐뭇해서 묻자,
  "여자에게 씨가 따로 있나요. 후후. 마음씨, 솜씨, 맵시가 여자의 삼씨라구 한다던데요. 전 그중 하나도 못 가지고 태어난 쪽이구요. 어쨌든 전 새댁이 한땀 한땀 바느질하는 솜씨를 보면 마냥 황홀합니다."
  "아이구 남의 소리 할 것 없어 ... 내 알기에 누구도 삼씨 갖춘 걸 아는 터니까는. 후후."
  아낙이 극구 사양하는 소릴 했고 다희도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어디까지 들었누?"
  손씨가 웃음 거두고 아낙이 나타나기 전까지 오가던, 새벽에 아들이 가져다놓은 한지의 내용을 채근했다.
  유의태가 손잡아 자기 아들에게 직접 가르치는 그 의원 공부의 내용들을 기다리는 건 손씨만이 아니었다. 다희도 손씨 못지 않게 남편이 적어오는 그 내용들을 기다렸다.
  모두 처음 듣는 얘기고 다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이었으나 그 남편이 몰래 적어오는 한지가 열 장 스무 장 서른 장으로 불어나는 만큼 다희의 가슴에도 희망이 쌓여갔고 또 한편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도지의 공부방 밖 처마 밑에서 엿들어 적어오는 지식들이라는 데서 남편의 그 고군분투의 모습이 눈물겹고 감사했다.
  어젯밤, 이미 4경이 지나 행여나 오실까 기다리던 남편이 오늘도 못 오시나보다 단념했을 때 밤길을 달려온 남편이 마당에서 기척을 냈다.
  날 밝기 전에 다시 유의원 집에 돌아가야 할 그 남편과 뜨거운 포옹이 끝났을 때 그녀 또한 갈망해 마지않던 남편의 사랑 못지 않게 그녀의 가슴속에 방망이질친 건 오늘은 무엇을 적어 왔을까, 어서 그 내용을 보고 싶은 기대였다.
  첫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남편이 돌아간 후 이미 세 번 네 번 읽은 내용을 다희가 시어머님께 다시 읽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우주와 인체를 비교한 신형장부론과 인간에게 의료라는 행위가 생기게 된 시원에 관한 것들이었다.
  인간과 우주를 비긴 대목은 인간은 우주에서 가장 영귀한 존재로 보며 인간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닳은 것이요 발이 모난 것은 땅을 닳은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으며 하늘에 육극이 있듯이 인간에게는 육부가 있다.
  또 하늘에 구성이 존재하듯 인간에게는 구규(일명 구혈로 눈, 코, 입, 귀, 오줌구멍, 항문)가 있고 하늘에 십이시가 있듯 인간의 몸안에는 십이경맥이 뻗쳤으며 하늘에 이십사절기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이십사유가 있고 하늘이 삼백육십오도이듯이 인간에게는 삼백육십다섯골절이 있다 등이고.
  의료의 시원에 대하여 적은 내용에서는,
  의료란 애초 인간의 본능적 자구행위로서 제 몸에 가시가 박히면 그걸 손톱으로 집어뽑는 행위도 의료행위이며 그래서 신체의 부분이 저리면 주무르는 일 부패한 음식을 먹고 속이 안 좋으면 토해내는 행위도 의료행위라는 것과, 그런 단순한 치료행위와 지혜가 점차 축적되는 속에서 인간들은 외상으로 다치는 일 외의 내부로부터의 병을 앓게 되는 원인은 입을 통한 음식행위 속에서 병이 몸속으로 묻어들어왔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 고통 속에서 애초 적절한 치료의 방법을 몰랐던 인간들은 어느덧 병의 침입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그 몸안의 역신을 몰아내기 위한 푸닥거리를 통해 빌어보다가 그도 효력이 미미하자 점차 그 귀신 따위보다 휠씬 위대하리라 믿는 신령이나 부처 심지어 또다른 힘을 지닌 귀신의 힘까지 동원하여 병의 접근을 예방하는 부적을 제 몸에 지니게 되었다는 것과, 이 무엇인가 몸에 걸치거나 지닌다는 행위를 복이라 하는데 그래서 약을 먹는 행위를 복약, 복용, 내복이라 이른다는 것하며, 또 약의 발생에 대해서는 그런 병고와 싸우던 인간들이 어느날 특수한 식물을 먹으면 그 작용으로 병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후 그래서 풀을 먹으면 즐거워진다 편해진다는 뜻에서 약 약자가 만들어졌노란 그런 내용이었다.
  유의태의 가르침에 비해 도지의 의원 공부는 적어도 아버지 유의태가 만족하거나 촉망하는 정도는 못 된 듯했다.
  그래선지 한양에 올라만 가면 금방 입격할 듯이 서두르고 부추기는 어머니의 성화 속에 몸종삼아 장쇠를 데리고 상경하던 날 하직차 큰사랑에 나타난 그 아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격려의 말 대신 "정 가려거든 세상구경이나 제대로 하고 오도록 해" 하는 차가운 한마디였다.
  그리고 석 달, 유의태는 삼적대사와 함께 온다간다 말없이 집을 떠나 달포가 넘도록 집과 소식을 끊었다. 그러나 허준은 그 스승이 없건 있건 하루같이 지리산에 드나들었다.
  유의태가 아들에게 가르치던 그 창밖에서 주야로 엿듣던 오묘한 의원의 세계에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한 탓인지 약재창고 속에 찬 그 퀴퀴한 냄새가 이젠 허준에게 아내의 체온처럼 정다운 것이 되어갔고 이젠 허준 스스로 양질의 약재와 하질의 약재를 구분할 만큼 되었다. 그리고 그 욕심은 스스로 양질의 약재를 손수 캐고 싶다는 의욕으로 발전, 허준의 발자국은 당일치기 산행이 아닌 사흘, 닷새, 길어서 이레의 노정으로 늘어갔다.
  남쪽의 주봉인 노고단에서 최북단의 천왕봉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헤매고 다니는 허준의 발자국은 직전 계곡(피아골), 반야봉, 불일폭포 등에까지 이르렀고 약재를 구하는 데는 큰 수확이 없어도 그 열성이 점차 오씨의 귀에 들어갔다.
  스승이 안 계신다고 그 해방감에서 살판난 듯이 주막에서 외상술에 취해 게걸거리는 꺽새, 영달들에 비해 스스로 산속을 헤매며 약초의 생생한 모습을 익히고 다니는 허준의 열성은 다른 사람 아닌 허준의 뒤통수를 장작개비로 갈기던 황초잡이 임오근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 어느날, 석 달 허락받아 떠난 도지가 넉 달째 접어들어도 소식이 없던 늦가을의 어느날 허준이 약재창고를 맡은 지 실로 7개월이나 되어서 처음으로 유의태가 약재창고에 나타난 것이다.
  아! 나타난 것이 아니라 허준이 지리산 산행에서 돌아오자 약재창고 안에 뜻밖에 유의태가 허준이 정리한 물목장부를 뒤적이고 있었다.

    7
  기척이 났음에도 유의태는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허준은 약초가 담긴 바랑과 연장들을 한쪽에 내리고 유의태에게 가까이 다가가 읍해 서다가 "앗!" 하고 놀란 눈을 떴다.
  유의태가 호롱불 아래서 뒤적이고 있는 것은 물목장부 아닌 병부였다.
  그 병부란 유의태가 집에 있는 동안 단방약을 가르쳐주어 돌려보낸 가벼운 병자 이외에 병사에 머물며 조석으로 유의태가 직접 병세의 진행을 지켜보며 탕제를 지정하거나 투약의 요령과 시각을 지시하고 그 병의 소장과 추세를 낱낱이 기록한 병상일지였다.
  유의태의 문하에 들어와 7년이 되었으며 출신이 부산포라 하여 성명 대신 부산포라 불리는 그 과묵한 병부잡이 부산포와 도지가 함께 관장하는 그 병상일지는 병사의 최고참 임오근과 쟁반잡이들 외 4년 짜리 장쇠들도 병을 알기 전에 약이름부터 외운다고 감히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문건에 속했다.
  아니나다를까 유의태의 얼굴이 향해왔다. 제자를 자처하는 허준을 향한 유의태의 눈이 야멸차도록 차가웠다.
  "이것들이 왜 이 곳간에까지 굴러다니느냐?"
  읍해 선 허준이 미처 대답을 못한 채 손바닥에는 땀이 괴기 시작했다.
  "누가 가져다놓은 것이냐는 걸 묻고 있는 게다."
  유의태의 언성은 아직 낮았으나 일우의 동정도 어리지 않은 음성이었다.
  "소인이 가져다놓았습니다."
  "왜!"
  " ..."
  "이것들은 근자의 병자들을 다룬 것들이 아니라 이미 지난해의 병부요 그 병부라면 모두 내 방에 쌓여 있을 터인데."
  말끝에 유의태의 손가락이 허준의 눈을 향해 창날처럼 뻗어왔다.
  "그렇다면 이제 보니 네놈은 나 몰래 무시로 내 방에 드나든다는 게 아니냐!"
  "언감생심 소인이 어찌 무단히 스승님 방에 드나드오리까. 그것이 아니오라 십여 일 전 ..." 하고 허준이 변명의 서두를 꺼냈다.
  "십여 일 전이라니."
  유의태가 재차 물어왔고 허준이 사실대로 고백했다.
  십여 일 전--
  .유의태가 삼적대사와 출타하여 여러 날 집을 비운 어느날 병사에 기거하는 병자들의 아침 약탕관을 달이고 난 꺽새들이 병사의 가족들로부터 땡전 몇 닢씩을 얻어들고 주막으로 사라지고 부산포가 지시한 약재를 다 썰고 난 허준이 몇 가지 바닥이 난 약재를 보충하고자 단신 산행을 떠나려던 때였다. 막 도지가 거처하는 작은사랑 앞을 지나는데 취재차 한양에 간 아들이 소식을 끊은 후 조석으로 심란한 모습으로 걸핏하면 그 아들의 방문 앞을 오락거리던 오씨가 그날도 아들의 방문 앞에 서성이다 말고 산행 떠나는 허준을 발견하자 "자네 이 방에 걸레질 좀 하고 가게." 하고 분부를 내렸고 이에 허준이 산행 차림을 푼 후 물걸레를 짜들고 도지의 방에 들어갔다가 방구석에 휴지뭉치처럼 쌓였던 병부를 발견하고 서너 권 몰래 집어들고 나왔던 것이다.
  물론 그건 감히 훔치려는 발심이 아니라 스승 유의태가 무슨 병에는 무슨 약, 무슨 증에는 무슨 약을 몇 냥 몇 푼씩 어떻게 섞어 썼는가를 궁금히 여겼던 탓이고 도지가 돌아오기 전에 제자리에 도로 가져다놓을 작정이었으나 내용을 읽는 것만이 아니요 수많은 대목들을 베껴 적느라 미처 가져다놓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베껴쓴 것들은 어디에 있느냐?"
  자기 방에 드나들지 않았다는 그 혐의만 풀었을 뿐 유의태의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허준이 유의태가 깔고 앉은 상자를 두 손으로 가리켰다.
  허준이 이 약재창고를 맡은 뒤 스스로 짠 깔고 앉으면 의자요 열면 상자가 되기도 하는 궤짝이었다.
  몸을 일으킨 유의태가 궤짝 속에서 필사한 수많은 종이들을 집어냈다.
  순간 허준의 가슴에 한가닥 기대가 솟으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의태 문하에 들어와서 허준은 은연중 하나 자부하는 것이 있었다.
  연치만 내세웠을 뿐 그리고 유의태의 제자임을 자처할 뿐 병자들의 가족들에게 아첨 떨고 을러대며 용돈이나 타쓰는 장쇠 따위들은 자기가 긴장하며 경쟁할 상대로 보지 않았고 또 그중 글솜씨가 유식하다는 부산포의 실력도 병부에 적힌 필력들로 보건대 대단한 경쟁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용천서 한때 내노라 하는 양반댁 자제들과 함께 글공부에 매진하던 그 문장실력이 유의태의 눈에 띄어 어쩌면 병부잡이 부산포를 젖히고 갑자기 병사 근무의 특명을 받을지 모른다는 자만 어린 기대였다.
  그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지금 왔다고 생각했다.
  "이 다 누가 쓴 필첸고?"
  과연 이것 저것 뒤적여가던 유의태의 손이 멎으며 물어왔다.
  허준이 한껏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소인의 서툰 필적이올시다."
  유의태의 눈이 그 허준에게 머물며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 ..."
  허준의 입 속에 침이 자꾸 말라갔다. 적어도 자기의 필체나 문장력은 취재차 떠난 도지의 글씨 솜씨보다 달필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윽고 시선을 거두어가는 유의태의 눈 속에 조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럴 테지." 하고 유의태가 낮게 뇌까렸다.
  "무슨 뜻이온지? ..."
  허준이 조심스레 묻자 유의태가 내뱉었다.
  "필적이나 문장을 자랑하는 것은 양반이라 일컫는 부류들의 도락이고 생업인 게다. 의원이란 문장이나 필체가 서툰 것 따윈 조금도 부끄러울 까닭 없어."
  허준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 ...!"
  "차라리 한 자 한 획 이토록 오만기가 가득찬 붓재주보담 서툰 언문일지라도 약이름 또박또박 쓸 줄 알면 그게 진짜 약방문인 게지."
  말끝에 유의태가 허준의 글이 적힌 종이뭉치를 허준의 얼굴에 내던졌다.
  그 약방문들이 허준의 모습 위에 수백 마리 나비떼처럼 나부끼고 흩날리다가 그 발치로 어지럽게 떨어졌다.
  백랍처럼 굳어버린 허준을 향해 또 한번 유의채의 손가락이 뻗어오며 내뱉었다.
  "그 따위 약방문 수천 번을 적고 수만 번을 외운들 그게 무슨 소용이리. 같은 약이되 먹는 이의 신체가 뚱뚱하고 수척한지에 따라 약효가 다르고 여자와 남자면 또 약이 다르며 철이 여름과 겨울이면 또 약을 달리 쓰는 터인데 병명과 약의 용량만 가득 적어놓고 그걸 자랑삼아?"
  "증과 험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인 걸 모르고 입으로 외고 머리에 기억만 하여 의원인 양 들어? 가증한 것들."
  자기 말을 마친 유의태는 더 이상 시선도 주지 않고 병부를 움켜들고 약재 창고 밖으로 사라졌다.
  버티고 있던 허준의 어깨가 처지며 발 아래 어지러이 널린 약방문들을 모았다.
  갑자기 무안했다. 약재창고를 맡은 후 자기를 특별히 어여삐 보아주고 있다고 믿은 마음속 한가닥 의타심이 산산이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부끄러움과 함께 아쉬움도 밀려왔다.
  그 고단한 산행에서 돌아와 동패들이 너나없이 곯아떨어져 잠을 청할 때 그것이 의원이 되는 길로 믿고 밤을 새우며 적고 기억하던 그 수백 장 약방문이 새삼 깨닫고 보면 이젠 아무 쓸모없는 낙서의 종이 부스러기에 불과하다니 ... 갑자기 허준은 그 사문화한 약방문들을 걷어차며 주저앉아 골을 쌌다.
  그날 밤.
  한양으로 취재차 떠난 후 소식이 없던 도지가 홀연히 돌아왔다. 그러나 집안에 들어서는 그 도지는 술이 잔뜩 취해 장쇠의 부축 속에서 건들건들 가까스로 몸을 가누어 아버지의 방문 앞에 섰고 허준과 제자들이 달려나와 불을 밝혔을 때 그 모습은 떠날 때의 그 양양하던 기개는커녕 입고 갔던 입성도 때묻고 구겨진 초췌할 대로 초췌한 낙백의 모습이었다.
  전갈을 듣고 안채에서 달려나온 도지의 아내는 남편의 그 모습을 발견하자 중문간에 주저앉았고 이어서 행여나 장원하여 돌아오려나 한가닥 미련을 두었단 오씨가 굴러나오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아들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마당이 소란한 한참 후에야 방안에 불을 밝히고 대청 너머로 굽어보는 유의태는 "미련한 것!" 툭 그 한마디를 던지고 도로 방문을 닫아버렸다.
  그 남편이 서운하여 오씨가 무어라 패악을 부렸으나 잠시 밝혔던 유의태의 방안에선 다시 불이 꺼지고 말았다.
  허준이 산음에 온 첫해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낙방의 충격인지 도지의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고 장쇠의 날이 저물 줄 모르고 계속되던 난생 처음 그 '감격의 한양 구경'기 화제도 시든 그해 동짓날 스승과의 독대 이후 늘 우울했던 허준에게 한가지 경사가 있었으니 아내의 순산과 득남이었다.

    8
  한양 의원취재에서 낙방해 돌아온 토지는 그 실패의 충격이 꽤나 깊었던 듯 다음해 봄 한 철은 병사 쪽은 내다보려고도 않고 아예 아버지하고도 얼굴을 마주치는 게 싫었는지 뒷문을 통하여 출입을 일삼았다.
  그러고는 깊은 밤중이나 새벽녘에 술에 만취하여 돌아와선 빗장을 지르지도 않은 뒷문을 걷어차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집안 사람들을 들깨워놓곤 했다.
  유의태는 달다 쓰다 말 한마디 없이 늘 조용하고 냉랭했다. 그건 허준들이 도시 이해할 수 없도록 차가운 모습으로, 정말 그들 사이가 부자지간인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오로지 그런 아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건 오씨뿐으로, 그 한밤중의 소동이 일어날라치면 으레 도지의 아내보다 오씨가 먼저 굴러나와서는 아들의 온갖 게걸거림과 추태를 받아주었다.
  그러고는 다음날이면 또 으레 오씨가 큰사랑에 나타나 남편 유의태에게 갖은 말로 행악을 부리는데, 그 내용은 당신이 제대로 손잡아주지 아니하셨기에 하나뿐인 아들이 그토록 소원하는 의원취재에 낙방이 되었노란 원망과 당신 혼자 명의란 소문이 난들 뭐가 자랑스러우냐, 당신인들 천년 백년 사는 것 아니며 죽을 때 그 재주를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닌데 다른 것들은 몰라도 왜 아들조차 소 닭 보듯 하느냐 윽박지르다가 이미 닫혀버린 방문 너머의 남편에게 내 팔자가 기박하여 저런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내에게 시집을 왔다는 등 넋두리와 푸념을 늘어놓고 제풀에 눈물 한바가지를 쏟아놓고 나서야 지쳐서 안채로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더러는 그 아내와의 싸움중에 병사 쪽에 급한 병자가 이르렀다는 전갈이 오면 유의태는 닫힌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런 때 아내를 보는 유의태의 눈은 아내에 대한 분노보담 "이 불쌍한 사람아." 하는 듯한 연민의 눈길이었다.
  언제부터 부부의 정분이 그토록 메말라 있었는지 짐작할 길은 없으나 그러나 오씨 또한 깊은 오기까지 지니진 아니한 여자로 남편에게 그렇게 퍼부은 며칠 후면 며느리나 아랫것들을 시키지 않고 손수 밥상이나 술상을 남편의 사랑으로 나르는 것이 눈에 피기도 했다.
  어쨌든 그 우울한 겨울이 지나 허준의 아들 겸이의 백일잔치가 지난 초봄의 어느날이었다.
  다시 불쑥 찾아든 삼적대사와 함께 유의태가 급한 병자들의 처방을 지시한 후 아마도 한 달포 집을 비울 것이다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그날.
  그 동안 한결 우정을 회복한 황초잡이 임오근의 지시대로 약재를 썰고 있는 허준에게 도지가 나타나 장쇠들의 행방을 묻다가 허준에게 자기의 사랑을 깨끗이 걸레질할 것과 특히 방안에 있는 책들의 먼지를 털 걸 명령한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 몇 달 동안의 낙백 속에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시 의원 취재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우선 그 눈이 지난날의 좌절을 딛고 일어선 훨씬 성숙함과 침착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허준이 도지의 방에 들어가 놀란 건 유의태나 도지의 독서량이었다.
  아버지의 방에서 옮겨온 대부분 필사본인 그 의학서들은 지금까지 허준이 듣도 보도 못한 제목의 방대한 분량들이었다.
  그 책들은 군데군데 결장이 돼 있었으나 또박또박 필사한 그 자체가 분명 유의태의 것이었고 제목들은 동군의 소저 채약별록, 이윤의 탕액본초, 후한 사람 장중경의 상한론, 서진 사람 황보밀의 침경, 또 그 같은 시대 사람 진나라 포박자의 금궤약방, 후주 요승원의 집험방, 송나라 주굉의 활인서, 원나라 왕호고의 의가대법, 명나라 왕륜의 명의잠저 등 외서 외 조선 세종조에 찬집된 의방유취, 역시 세종조에 찬집된 향약집성방 등에 이르기까지 방대했다.
  남보다 맥을 정성들여 짚고 침을 잘 놓아서, 그리고 약초의 이름과 효험을 외우고 그밖에 양생에 관한 조목과 지식을 익히는 정도로 의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출발이 되는 게 아닌가 여겼었던 그에게 고금의 이토록 많은 의서를 통달하고서야 아니 통달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아니할지라도 이 책자들을 머리맡에 놓고 한없이 뒤적이며 날이면 날마다 직접 아버지가 치르는 임상의 지식을 지켜보았을, 그리고 다시 아버지에게 직접 특훈도 받은 도지가 그러고도 낙방해 돌아와야 했던 의원의 자격과 경지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별의별 놈이 다 많더군."
  도지가 내심 충격을 받고 있는 허준은 무시하고 몰려든 일동에게 자조 어린 말투로 말했다.
  "나라 안 방방곡곡에서 의원으로서는 저마다 내노라 하는 자들만 모이니 그 어렵기가 차라리 양반자제로 진짜 과거 못지않게, 오히려 어려우면 어려웠지 결코 쉽지 않아."
  "모여든 인물들의 나잇살들은 대개 어느 정도더이까?"
  "나는 젊은 쪽에 속하던걸. 심지어 오십이 넘은 백발이 성성한 자들도 많았으니까."
  "오십 이 넘은 ..."
  사십을 바라보는 병부잡이가 그래도 좀은 위안이 되는 얼굴을 했고 아직 취재의 취자도 넘볼 처지가 아닌 영달이가 물었다.
  "대충 몇 사람을 뽑고 몇 사람이 떨어졌는지요?"
  "구백 몇십 명이 왔는데 방에 붙은 건 네 사람뿐이었어."
  "네 사람?"
  "겨우 네 사람이오?"
  "뽑는 데 사람수를 애초부터 정하진 않는다 합디다."
  허준이 문득 그 도지를 보았다. 지난날 깔보며 턱으로 부리던 아랫것들에게 합디다 하고 반쯤 높임말을 쓴 것도 이번 낙방에서 떨어져 일어난 도지의 변화였다.
  갑자기 허준의 눈에 도지가 지난날의 치기에서 벗어난 성숙한 사내처럼 비치고 있었다.
  "애초부터 뽑는 인원을 정하지 않다니."
  "취재 과목이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다섯 과목인데 처음부터 내의원에서 정한 수준이 있어서 그 수준을 뛰어넘는 자와 거기 이른 자를 둘씩 뽑는다던가 ... 하나 내의원서 정한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단 한 사람도 안 뽑고."
  "그건 무슨 뜻이오?"
  "우수한 사람이 많을 때에 한해서 수석과 차석 둘만 뽑고."
  "그럼 구백 몇십 명이 달려들어 다섯 과에 수석 차석 합해 겨우 열 명만 뽑는단 말 아니오."
  "그런 인재가 있을 경우에 그렇고 없으면 안 뽑아."
  "단 한 사람도 말씀이오?"
  "이번에도 탕액과 잡병 쪽에서만 수석이 하나씩 나왔고 내경과 탕액 쪽에는 차석이 하나씩, 침구 쪽은 아예 수석도 차석도 뽑히지 못했지."
  허준이 물었다.
  "그럼 이번에 안 뽑힌 과는 내년에 다시 뽑는다 하더이까?"
  "그렇지도 않다네."
  " ...?"
  "잠시 뽑다가도 몇 년씩 안 뽑기도 하고 대중이 없다는 게야. 어쨌든 이번에 시관께 들은 바는 내의원 의원을 충당하는 일은 5년을 내다보고 하는 일이라 앞으로 5년 동안 특별히 결원이 생기지 않고서는 언제 다시 취재가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립디다."
  "넨장할 ..."
  처음에 보이지 않던 장쇠가 나타나 끼여 있다가 뇌까렸다. 그러자 쟁반잡이가 처음부터 기가 죽어 있는 모습이다가.
  "그러게 우릴랑은 취재 기다릴 것 없지. 웬만치 그저 스승님께 가르침 받아 어디 부자 동네 근처에 자리잡아 의원 노릇하면 그걸로 되는 거지. 굳이 나라에서 주는 첩지를 받아야 해여?"
  "그러나 그 취재에서 방에만 오르면 대궐 안에서만 산다 합디다."
  "흥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지."
  "쌍것이 대궐 안에서 산다고 무슨 흥이여? 간도 크게 꼴에 대궐 안에 살 꿈은 꾸고 싶은가베."
  "그밖에 여러 가지 자세히 얘기해보소."
  임오근이 다시 도지에게 답답하다는 얼굴을 하자 그 임오근을 무시하고 도지의 눈이 허준에게 박혔다.
  "엊그제 자네가 산행할 때 약재창고에서 자네가 적어놓은 물목장부들을 보았어. 그 글들을 어디서 배웠던가?"
  " ..."
  "모두 이 사람만치는 글을 배워놔야 할걸."
  "글을 배우다니, 의원취재에 솜씨 보면 됐지 글은 왜요?"
  영달이 따지듯이 묻자,
  "첫날 시관이 처음 재주를 떠보는 일이 뭔지 아오. 단상에 올라서 모두에게 먹을 갈고 붓을 들게 한 다음 소리부터 치오. 무슨 소린고 하니 마구 약 이름을 한 서른 가지 소리쳐 그 약 이름을 받아쓰게 하는 거지. 두 번도 안 부르고 제멋대로 서른댓 가지 약 이름을 주르르 꿰어 소리치고는 그냥 내려가버리오."
  " ...?  ...!"
  "그리군 다른 놈들이 나타나 적은 사람 안 적은 사람 종이를 거둬가는데 제일 확실하게 받아쓴 사람이 다음날 본시험을 받게 되오. 받아쓰기는 했되 획이 틀리거나 약방문이나 약재 이름을 잘못 적은 자들은 다음 날 시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예 의원의 솜씨는 떠보려고도 않고?"
  임오근이 긴장해서 물었다.
  "그렇소. 한자의 유무식을 재보는데 무슨 시를 짓거나 글을 짓는 건 아니구. 아무튼 약 이름을 제대로 쓰는 정돈가 아닌갈 확인합디다."
  "한자로 ..."
  꺽새와 영달이 신음하듯 동시에 뇌까렸고 얼굴에서 하나둘 희망이 지워지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쟁반잡이가 "씨발 ..." 소리를 허두에 놓고 떠들어댔다.
  "코빠진 얼굴 할 것 없다고 넨장할. 반드시 취재에 올라 방에 오르는 높은 의원만 소원인가? 그건 애초 아무나 넘볼 경지가 아니고 우리에겐 그저 스승님 솜씨 따라 배우면 그걸로 한평생 손에 흙 안 묻히고 살 수 있을 거라고."
  그제야 영달들이 다시 생기를 되찾아 한양 높은 사람들을 항해 욕지거리를 해 댔다.
  '의원도 학문이 있어야 한다.'
  도지의 그 말은 유의태와의 독대 이후 갈팡질팡하던 허준의 가슴에 작은 희망이 되어 타올랐다.
  자기가 남보다 의원이 될 조건을 뚜렷이 갖추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 것이다.
  허준은 새삼 방안에 쌓여 있는 고금의 의서들을 보았다.
  그 의서들이 자기를 손짓해 부르는 것 같았다.
  그날 밤 허준은 도지의 그 작은사랑에 불이 꺼지고 도지가 안채로 건너가는 걸 확인하자 그 도지의 방으로 숨어들어갔다.

    9
  허준이 몰래 도지의 방에 들어가 책을 꺼내보기 몇 달, 그 낯선 지식으로 가득찬 책장을 한장 한장 넘겨가는 허준의 의식 속에는 그 책들이 도지의 책이 아니라 유의태의 저 불 같은 눈이 거쳐간 책장이라는 생각에 더욱 깊은 감개가 솟곤 했다.
  그 초여름의 어느날 밤.
  병부잡이 부산포가 이르는 대로 다음날 병사에 붙박이로 있는 장기환자들이 쓸 약재를 챙겨 도지의 감별을 받기 위해 그의 방에 갔을 때였다. 뜻밖에도 도지는 "들어오게" 하고 딴때없이 허준을 자기의 방으로 들어오도록 권했다.
  평소 같으면 허준이 그 방 앞에 이르러 기척을 내면 말없이 방문이 열리고 그 방문 앞에 마치 우물 정자처럼 칸을 지른 약재가 담긴 널빤지 상자를 밀어놓고 도지가 잘 볼 수 있도록 마루기둥에 걸려 있는 등을 내려 밝혀주면 되었다. 그러면 도지는 부산포가 유의태의 분부 받아 적어온 처방전과 병부를 들고 허준이 썰어온 그 약재를 대조한 다음 "갖구가." 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등불을 다시 기둥에 걸고 병사의 한모퉁이에 기거하는 임오근에게 전해주면 되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도지가 말도 한층 높여 자기 방에까지 들어오라 권하는 건 정말 뜻밖이었다. 허준이 찔리는 바도 있어 그의 거동을 보며 서 있자, "왜?"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길 재촉했다.
  허준이 속으로 각오를 하며 방에 들어서자 그 방안엔 작은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앉게."
  도지가 다시 허준에게 말했다. 허준이 보니 누구하고 마시다 물린 술상이 아니었다. 술상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새 술상이었고 술잔도 두 개였다. 마치 허준이 오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무슨 일이오니까?"
  허준이 아직 긴장을 못 풀고 낮은 소리로 되묻자 도지가 술병을 들며 말했다.
  "술을 좀 하던가?"
  "합니다."
  "다행이군. 다른 뜻 없으니 한잔 들게, 취재 떨어진 뒤 울적하여 몇 달 술을 가까이 했더니 이젠 인이 백였는지 해질녘이면 으례 술생각이 나거든 그러나 그 동안 많이 참았는데 핫핫 ..."
  허준이 보니 도지의 그 얼굴은 지난날의 방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취재의 실패를 딛고 한결 의연하게 숙성한 도지의 얼굴이 허준에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허준이 잔을 들자 도지가 따랐고 자기 잔에도 자작했다.
  허준이 잔을 비우자 도지가 다시 술을 쳤고 곧 술병을 건네며 말했다.
  "내게도 한잔 따르게."
  허준이 두 손으로 도지의 술잔을 채웠다. 적어도 지난날의 도지는 아버지의 제자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그 나이에 관계없이 두 손으로 술을 따르고 깍듯이 존대하는 그런 대우를 바라던 인간이었다.
  허준이 다시 반 잔쯤 비우고 잔을 내려놓자 불쑥 도지가 물어왔다.
  "글을 어디서 그토록 배웠던가? "
  허준이 퍼뜩 눈길을 들자 도지의 강렬한 호기심을 지닌 눈이 허준에게 향해 있었다.
  " ...?"
  "내실이 없어도 흉내내는 솜씨로 글자만 잘 쓰는 인간도 많아. 무덤에 세울 비석 따윌 쪼아대는 석수들처럼 말이오. 애초 그대가 약재창고에서 적어낸 장부를 보고 나도 그대의 학식을 그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
  " ..."
  "그리고 내 방에 몰래 들어와 책을 집어내가는 것도 장쇠니 영달이 그자들처럼 새겨 읽을 실력도 없이 호기심 삼아 가져가 뒤적거리는 줄 알았었소."
  " ..."
  "하나 지켜보니 그대는 좀 다른 듯해. 벌써 여러 권째 가져가고 있어."
  " ..."
  "뜻을 모르고서야 밤마다 도둑고양이처럼 그렇게 집어가진 않을 텐데. 핫핫 ..."
  "글을 어디까지 배웠소?"
  "내가 책을 가져다 보고 있는 것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더이까?"
  "두어 달 전부터."
  '두 달 전 ...'
  "전날 해질녘까지 분명 보던 책인데 다음날 새벽에 와서 찾으니 없어졌어."
   " ..."
  "쥐가 물어갈 리도 없고 ... 병사 쪽에서 누가 가져갔는가 하고 건너 가 보았지만 아무래도 병사 쪽에서 그만한 책을 읽을 인물은 부산포와 임오근뿐인데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날 속일 사람들이 아니고 ... 그래서 아버지 방에 가서 여쭤보면 가져가신 일 없다 하시고 ...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는데 그런 며칠 후엔 사라진 책이 제자리에 놓여 있고 ..."
  "볼낯이 없습니다. 스승님도 서방님도 아끼시는 책인 줄 알기에 감히 빌려주십사 말을 못했습니다. 사죄하오리다."
  허준이 진심으로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용서하소서."
  "천만에."
  도지가 부정했다. 흔쾌한 얼굴이었다.
  "지금 그대가 보고 있는 침경은 나도 막히는 데가 많아 여러 번 손에 들었다간 놓은 책인데 가져간 지 엿새째가 되도록 아직 제자리에 가져다놓지 않은 건 계속 열심히 읽고 있는 게 아니오? "
  "나 또한 이 길에 들어선 지 일천하고, 그래서 더더욱 생소한 글들이라 읽는다고 다 새기지 못하여 거푸 다시 한번 읽느라 그냥 붙들고 있으나 내일 아침엔 꼭 제자리에 돌려놓으리다."
  도지가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보아도 되오. 그리고 앞으로는 몰래 가져다 볼 까닭도 없소."
  허준이 정시했다.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하오면 ...?"
  "아마도 그대도 의원의 길로 들어서기로 작심한 사람인 듯하고 지켜본 즉 서로 웬만큼 말동무가 될 수도 있다 싶은데 그대의 의향은 어떻소?"
  허준이 놀라 그 도지를 보았다.
  도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의원 공부가 상대보다 몇 수 위라는 자부심과 여유가 엿보이는 얼굴이긴 하나 그 표정 속엔 분명 우정도 함께 띠어져 있었다.
  허준이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그 동년배의 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감히 스승님의 자제분의 벗이 될 수 있으리까. 그저 후학인 이 사람을 인도해주신다면 그 은혜는 백골난망올시다."
  도지가 그 허준의 손을 잡아 술잔을 쥐어주었다.
  두 사람 사이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도지의 호의 속에서 마음놓고 유의태의 소장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허준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외아들로 태어나 달리 친한 친구도 없이 자란 도지 또한 뒤늦게 얻은 허준이라는 동년배의 친구를 발견하고 한결 명랑한 성격을 드러내었다.
  그는 공부에 지칠 때면 으레 자기 방으로 허준을 불러들였고, 허준이 새로 읽을 책에 대해서 미리 읽은 자랑을 섞어 이런저런 자기의 의견을 내고 허준의 의견도 물어오곤 했다.
  때로 그런 토론에 부산포와 임오근도 끼는데 연치를 넘어 그 선배들과 얼리게 된 허준에게 대해 도지의 하인 노릇도 자청하던 장쇠와 그 하인 노릇도 차례가 못 되어 하지 못하던 꺽새는 허준이가 마치 자기들에게 향한 도지의 사랑을 가로챈 연적이나 되는 듯이 이를 갈고 미워했다.
  하여 장쇠, 꺽새, 영달 들은 청하지도 않았는데 도지의 방에서 무슨 토론이 벌어질라치면 비집고 들어와 끼여앉곤 하는데, 약을 달이는 재주 외에는 천자문도 제대로 못 깨친 저들의 학식으론 끼여들 화제가 아니었는지 어느덧 그들은 허준이가 어서 병사로 옳겨가 그 약재창고의 권리나 자기에게 떨어지길 바라는 눈치가 역연했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아침 나절 급한 병자들을 돌본 유의태가 출타하여 도지가 가벼운 부인병을 다루고 있을 때였다.
  허준도 선배들의 호의 속에 병자를 다루는 도지의 솜씨를 보고 있는데 뜻밖에 아내 다희가 나타나 남편을 불러냈다.
  허준이 그 숨찬 아내에게 영문을 묻자, 어서 집으로 가보라고 사뭇 다급한 모습이었다.
  아내를 진정시켜 물어보니 낯선 인물들이 몰려와 구일서를 찾는데 그들의 말로는 구일서가 지난날 큰 죄를 짓고 변성명하여 도망다니는 인물로서, 포교들과 함께 온 반가의 인물로 보이는 이들의 노성과 추궁으로 보건대,
  "죄명이 ..."
  "그래 죄명이 무어란 말이오!"
  도대체 현직 공방이며 그토록 다정한 구일서가 변성명하여 잠행하는 중죄인이라니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채 허준이 다그치듯 물었다.
  "어느 세도가댁 산소를 파헤친 죄라 합니다."
  "무덤을?"
  "예."
  "무덤을 왜?"
  허준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자세한 까닭은 모르오나 서방님께서 속히 가시어 그분의 힘이 돼주소서. 관아에 있다가 그 사람들이 닥치면서 뒷담을 넘어 나갔다는데."
  "뒷담을 넘었다면 일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포교들이 쫓는 죄명을 인정하는 게 아니오."
  "직접 들은 바는 아니지만 아무튼 관아에서 놓친 그 인물들이 집에 또 들이닥쳤는데 ... 아마도 숨어 있는 곳을 아는 눈치올시다."
  "누가? 그 사람 부인이?"
  다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날 밤 허준은 구일서를 만났다.
  구일서는 마을이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건넛산 중턱 숲속에 숨어 있다가 계곡을 쫓아오르는 허준을 불러세웠다.
  그 구일서가 허준을 보는 눈은 형처럼 다정하던 그 눈이 아니요, 쫓기고 쫓기던 끝에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갇힌 절박한 그리고 핏발선 눈은 살기조차 띠고 있었다.
  "우시느라 말씀을 다 못하시나 어머님께 대략 듣고 왔소. 대체 저들이 추궁하는 죄목이 사실이오?"
  "그렇소."
  "뭐라고? 아니 남의 무덤을 파헤쳐서 대체 무슨 득이 있다고 그런 일에 어울렸단 말이오."
  "어느 의원한테 의리를 지키고자."
  "의원? 의원이 라니?"
  "난 태생이 백정이오. 구일서니 뭐니 성도 주워다 붙였소. 얘기하자면 기오."
  허준은 구일서의 눈 속에 한가닥 자조의 빛이 스치는 걸 보았다.
  "무덤을 파헤치는 일과 의리가 무슨 상관이 있소? 그리고 의원이라니 무슨 의원이기에 무덤을 파헤쳐 달라 부탁을 하더란 말이오?"

    10
  "이제 와서 그 사람 이름 따위 뇌어본들 무슨 소용인가 ..."
  "기억이 안 나오? 분명 그 사람 생업이 의원이라 하더이까?"
  허준이 다그쳐 묻자,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의 성명은 안광익이오."
  "어디 사람이라 하더이까?"
  "그건 묻지 않았소. 어쨌든 내 고향 사람은 아니었소."
  대답하는 구일서의 안색이 처참해지고 있었다.
  허준은 구일서의 다음 말이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골짜기에 덮여 있던 땅거미가 두 사람의 주위에도 몰려왔다. 멀리 산비탈 마을에서 하나 둘 등불빛이 내비치기 시작했고 멀지 않은 곳에 절간이 있는지 산사의 저녁종 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울리다가 꺼졌다.
  이윽고 구일서가 띄엄띄엄 자신의 지난날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충청도의 대덕이었다. 그의 집은 일반 민가와 멀리 떨어진 새여울이라 불리는 나룻가로 아버지의 대에서야 어디선가로부터 흘러와 정착했다. 생업은 가축의 도살, 제혁, 수육 판매 그밖에 초를 만들고 강변 버들가지들을 재료로 고리짝이며 그릇들을 만드는데, 자기 집안의 생업이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천시당하는지는 그가 일고여덟 살이 되어서야 뼈아프게 깨달았다.
  백정이라 불리는 그의 가족은 일반 평민들과 한마을에 섞여 살지 못했으며 남의 집 아이들처럼 성도 없었다. 또 이때 그가 안 건 성 없이 이름만 짓는다 하여도 그 이름에 인, 의, 효, 충 같은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여 돌, 석, 개 따위 천덕스러운 표현을 해야 했고 심지어 죄를 지어 관가에 끌려가 매를 맞을 때도 일반 평민들처럼 태 위에서 맞을 자격도 없이 맨땅 위에서 매를 맞는 천민 중에도 천한 인간으로 괄시를 받았다.
  마을을 떠나 외출을 할 때에도 머리에 갓이나 망건을 써서는 아니 되었고 자신들이 생산한 가죽신도 자기들이 신어서는 안되는 신세로, 그의 조부도 그의 아비도 항시 머리는 봉두난발에 다만 패랭이를 써 한눈에 백정의 태가 나도록 하고 다녔는데, 그뿐 아니라 일반 민간인 앞에서는 술을 마셔서도 건방지다 하여 뭇매를 당하는데, 살아서의 그 차별은 죽어서도 풀리지 아니하여 죽은 후 그 시신은 상여를 쓰지 못하며 무덤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외진 곳에 쓰도록 되어 있으니 철두철미 서러운 대우뿐이었다.
  그런 그가 스물두 살이 되던 해 겨울이었다.
  관가의 잔치에 불려갔던 아버지가 잡으려던 소의 뿔에 받혀 가슴뼈가 부러지고 창자가 터지는 중상을 입고 집으로 실려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 어느날 밤--
  해가 떨어지면 일반인들은 일부러 발길도 않는 그의 마을에 어엿이 중갓을 쓴 안광익이 나타나 사경을 헤매는 아버지의 치료를 자청했다.
  돈을 챙겨다 사정을 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인근의 의원들의 매정함에 이를 갈고 있던 구일서는 그 안광익에게 감지덕지하며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였다.
  안광익의 의술은 한눈에 신묘했다.
  환자를 죽이는 것이 아닌가 싶도록 거친 솜씨로 아버지의 부러진 뼈를 잇고, 터진 창자와 거죽살을 꿰매고 묶어 근 보름 동안 기거를 함께 하며 돌보더니, 마침내 아버지를 걸어다니는 정도로까지 낫게 해놓은 것이다.
  이에 일가가 모아둔 돈을 담아 재생의 은혜에 머리를 조아리던 탈 뜻밖에도 안광익은 일가가 내미는 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히려 두 손 짚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아닌가?
  놀란 일가에게 안광익은 자기의 평생의 소원이 한 가지 있노라며 소청을 들어줄 것을 거듭 간청했다. 사연인즉 자기는 의업에 몰두하는 사람으로 만병이 드나드는 인간의 살아 있는 오장육부와 침구술의 요체인 경혈의 생김을 보게 해달라는 거였다.
  "살아 있는 사람의 오장육부와 경혈을 보여달라니?"
  허준이 불현듯 소리쳤다.
  "더 들어보오."
  "도시 있을 법이나 한 소리요? 그건 살아 있는 사람의 배를 갈라보고 그 사지조차 갈기갈기 찢어발겨 보겠다는 게 아니오."
  "그렇소 ... 그래서 나도 아버지도 그리고 함께 와 있던 우리 이웃들도 그렇게 소리치며 분격했소."
  "그랬더니!"
  주위는 이미 어두웠고 별빛뿐이었다. 골짜기의 물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돋우며 한참이나 들리다가 꺼졌다.
  구일서가 얘기를 계속했다.
  구일서 일가의 분노에도 안광익은 막무가내였다.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살아 있는 인간이라 표현은 했으나 정말 살아 있는 자를 살해하자는 것이 아니라 제 명이 다하여 죽은 인간의 초상날을 기다렸다가 그날 묻은 송장으로 대신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시신을 장기별로 헤쳐볼 재주는 도저히 다른 사람의 재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니 굳이 그들 일가의 조력을 비노라 간청했다.
  그건 시신의 주인인 상주나 세상이 알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일 것이로되, 하나 일생을 의업에 정진하고자 하는 자기로서는 꼭 한번 치러보고자 하는 소원이요 그로써 배울 것을 얻는다면 그 지식을 살아 있는 모든 병자에게 베푼다고 맹세하며 병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미 죽은 송장 한번 더 칼질한다는 게 무슨 큰 죄냐고 그들 일가를 끈질기게 달랬다.
  세상의 윤리나 도덕과는 딴 세상에 사는 그들이로되 생각하면 안광익은 아버지의 재생의 은인이었다. 이리하여 완강히 거절해 마지않던 구일서의 아비는 마침내 그로부터 얼마 후 안광익이 지정한 모댁의 무덤을 파헤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날 땅속 관곽이 드러나기도 전에 산지기의 눈에 띄는 바 되어 도주했으나 구일서는 후환을 두려워하는 아버지의 재촉에 못이겨 노모와 함께 유랑의 길로 나선 것이었다.
  건너 어두운 산비탈에서 컹컹 짖어대는 여우 소리가 들려왔고 옷깃 사이로 야심한 산속의 냉기가 한층 느껴왔으나 심호흡을 하는 구일서를 보며 허준의 온몸은 알지 못할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의원이라는 생업이요 아무리 그 의업에 정진하려는 간절한 소원이기로 서니 남의 집 산소를 파헤쳐가면서까지 인체의 비밀을 캐내려는 안광익이라는 사내의 불타는 듯한 눈빛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안광익, 안광익 ...'
  허준이 입안에서 그 얼굴도 모르는 사내의 이름을 뇐 후 다시 물었다.
  "그 뒤 그 사람 소식을 아오? 안광익이라는 인물 ..."
  "모르오. 처음부터 우리 고장 사람은 아니었단 생각이 드오."
  " ..."
  "어쨌든 그후 무덤을 훼손당한 그 집에서는 그 사건을 관가에 고발하는 일방 온 문중 사람을 풀어 범인을 찾다가 그날 산중에서 아버지가 흘리고 온 우리 부족이 쓰는 연장을 발견하고 곧장 내 집으로 닥쳤고 그 길로 끌려간 아버지는 끝내 안광익의 성명은 입을 다물고 그 집 문중의 매질 아래 낙명하였다는 뒷소문만 들었소."
  "왜 그 사람의 이름을 대지 않고 죄를 다 썼단 말이오?"
  "그건 ..."
  구일서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이어 내뱉듯이 대꾸했다.
  " ... 그건 평생 저들에게 천대받으며 살아온 아버지의 당신 나름대로의 마지막 반항이고 복수였을 게요."
  "복수? 양반들에 대한?"
  "어쨌든 나는 그 뒤 어금니와 앞니 아랫니를 깨뜨려 뽑아 얼굴 모습을 바꾸고 어느 장터에서 주워 들은 구씨 성으로 내 성을 만든 뒤 해미(충청도) 바닷가로 흘러가 때마침 관아의 선군으로 뽑혔다가 우연히 조현감의 눈에 드는 바 되어 이 고장까지 따라와 이젠 새 세상을 맞이했다고 믿고 있었는데 ..."
  "지금 얼굴 모습이 옛모습과 다르다면 그자들이 어떻게 이제 와서 알아보았소?"
  "이빨쯤 뽑은 걸론 옛모습을 다 지우진 못한 듯하오. 어쨌든 그자와 마주친 건 우연이오. 엊그제 ..."
  "얘기하오."
  "창녕이 고향인 시임 참판이 친상을 만나 내려오다가 우리 경내를 거쳐간단 기별이 있어 현감을 모시고 지경까지 마중 나갔던 길에 그 성대감을 수행해온 자 중에 이상한 눈이 나를 자꾸 바라보지 않겠소?"
  "그래서?"
  "처음에는 무심히 지나쳤소. 한데 아무래도 눈빛이 달라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그들이 떠난 후 꺼림칙하던 마음을 털어버렸는데 창녕으로 떠났을 그자가 어제 아침 우리 관아로 들어가는 걸 보았소. 그잔 어렴풋이 나마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소. 그래서 동관을 시켜 그자가 현감을 찾아온 사연을 염탐했더니 과연 내 뒤를 꼬치꼬치 묻더라는 거였소 ..."
  골짜기에 바람이 이는 소리가 났다. 때늦은 하현달이 어두운 동녘 하늘에 나타나 붉은 빛으로 떠 있었다.
  "그래 앞으로 어떡할 생각이오?"
  "모르겠소."
  " ..."
  "한가지 분명한 건 내 정체가 드러난 이상 어차피 다시 어느 고장으로 떠나야겠지. 하나 ..."
  "하나?"
  "어머니와 처자식이 어찌 될지 ... 그들이 무슨 죄요!"
  본명이 돌석이라는 구일서의 억양에 뜨거운 핏발이 뻗으며 허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부탁이 있소. 꼭 들어줘야 하오."
  "도움이 될 일이면 무엇이든 도우리다."
  "저들이 나를 잡고자 허둥대는 동안 내 노모와 처자식을 어디로 빼돌려주오."
  " ..."
  "그들이 나를 잡지 못하면 끝내는 노모나 처자를 족칠 게 뻔하니 그 이전에 손을 써서 ... 내가 이곳 산음에 와서 어느 누구에게도 척지고 살지 않았소. 비록 내게 죄명이 있다 하나 관아 사람들이 이제 와서 내게 박하게 굴진 아니한다 여기오."
  "그러리다. 내 꼭 낙자없이 손쓰리다. 하나 그 동안 어디에 숨어 있을 생각이오?"
  구일서가 막막한 눈으로 붉은 하현달을 보았다. 그 눈이 핏발이 서서 이글거리는 것을 허준은 보았다.
  허준의 가슴에 뜨거운 감정이 괴기 시작했다. 구일서, 아니 본명이 돌석이라는 그는 자기를 이 고장에 안주시켜 준 은인이었다. 아니 그 한때의 은고를 떠나 그 돌석이가 자기 못지않게 태생으로부터 신분의 오랏줄에 묶인 인간이라는 발견이 반갑고 눈물겨웠다.
  허준이 갑자기 돌석을 쓸어안으며 포옹을 한참 동안 풀지 않았다.
  그 가슴속에서 구일서가 오열했다.
  이윽고 그 울음은 통곡이 되어 어두운 산속에 울려퍼졌다.

    [  4. 아들의 눈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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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한 출신임을 감추고 구일서라는 변성명으로 세상을 잠행하던 산음현 공방 본명 변돌석이가 허준의 도움으로 노모와 처자를 이끌고 산음땅에서 종적을 감춘 지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변돌석이가 사라진 처음 몇 달 동안 추적자들은 달포 이상이나 인근 산속의 암자를 뒤지고 타도로 뻗는 나루와 길목에 용모파기를 게시하는 등 계속 살기등등했으나 산음 관아의 아전들은 누구 하나 그들을 도우려 않았다.
  그때 허준은 돈냥으로 바꿀 수 있는 가족들의 마지막 옷가지를 없애 얼마간의 노자를 만들어 주위의 눈을 피하여 척지산 숯굴에 숨어 있는 변돌석 일가를 찾아가 만났었다.
  허준의 그 후의를 시종 눈물을 흘리며 감사한 변돌석은 장차 자기들은 아내의 생가가 있는 나로도라는 여수 밖 백여 리에 위치한 외딴 섬으로 떠나리라는 얘기를 했고 덧붙여 말하기를 "만일 훗날 그대 또한 의원으로 입신하여 정녕 그대도 생물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다 하면 자기는 언제든지 섬을 떠나와 그대의 도움이 되겠노라." 사뭇 진정 어린 말로 작별인사를 했었다.
  그 변돌석이의 집에서 태어났던 허준의 아들 겸이가 일곱 살이 되었고 중간에 딸이 하나 태어나 이름은 숙영이라 지었다.
  가족은 늘어났으나 허준 일가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허준의 나이 스물여덟 ... 여전히 유의태의 집에서 병자들의 치다꺼리와 도지가 읽다 남은 의서의 뒤적거림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이젠 웬만치 이론을 쌓았으나 유의태가 끝내 임상의 경험을 허락지 않음에서 몇 번이나 유의태의 문하에서 뛰쳐나갈 생각을 했는지 몰랐다.
  세월이 6년이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거든 쳐다보지도 말랬다고 그 동안 의원의 꿈을 버리고 차라리 임자없는 산비탈이나 강변 황무지를 그토록 열심히 일구었다 한들 지금 아내의 저 연약한 손 그 삯바느질로 지탱하는 가족의 고생만은 면케 해줬으리라는 생각에 미칠 때면 허준은 며칠 씩이나 의원에 나가지 않고 집구석에 박혀 앉아 자신의 장래를 곰곰 생각하며 무슨 결단을 내야지 내야지를 주문처럼 뇌었다.
  그런 남편을 한사코 의원으로 내보내는 건 아내였다. 그 동안 식구들이 무병하게 지내는 것도 당신이 유의원 밑에서 배워오는 의약과 양생에 대한 지식 덕분이라는 농담 섞은 격려의 말과 함께.
  그러나 그 아내가 밤낮으로 손가락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골무와 바늘을 보며 또 새벽마다 부뚜막 앞에 꿇고 앉아 정화수 떠놓고 아들의 성공을 비는 어머니의 모습이 허준에게는 고통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며느리를 도울 양으로, 그러나 핑계인즉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 손자의 먹값이나 벌겠노란 말로 행상 떡장수로 나선 것도 거의 1년 남짓 되었다.
  병사에도 변화가 없지 않았다.
  약초 캐러 산에 올랐던 장쇠가 백사보다 약효가 영험하다는 오사 두 마리를 잡았는데 그 미물은 가느다랄 꼬리에 동전 백 개를 꿸 수 있는 진품으로 그 길로 장쇠는 그 미물을 팔러 전라도 남원 땅으로 넘어간 후 돌아오지 않은 것이 3년쯤 되었다.
  그 돈덩어리를 먼저 발견한 건 자기였노라며 장쇠가 한마리 자기 몫을 가져올 날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꺽새가 약재창고의 장이 된 것도 2년전.
  또 도지의 영향으로 한때 너도 나도 취재 바람이 불어 그후 밤낮없이 천자문을 끼고 앉아 있던 영달이는 끝내 장기말에 쓰인 포, 차, 상, 졸, 사 따위 한자 이상은 외울 재주가 없는지 요즘엔 취재시험 때려치우고 새로 제자로 들어온 병문, 병덕 형제와 상화 세 놈을 수족처럼 호령하며 산행의 왕초 노릇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그밖에 큰 사건은 병부잡이를 하던 부산포가 제 나이 서른넷이 된다는 생일날 못 먹는다던 술에 만취, 유의태의 욕을 버럭버럭 떠들고 자기는 이제 이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겠노라며 비틀거리며 안채 오씨께 찾아들어 11년 동안 머슴질한 새경을 내놓으라고 악을 쓰다가 마침내 도지의  주먹질에 코피가 터진 후 오씨가 욕바가지와 함께 던져준 얼마간의 돈냥을 주워들자 처녀가 입덧을 한다는 소문이던 병사 하녀 유월이를 이끌고 떠나버린 일이었다.
  그 뒤 부산포는 약초꾼 서넛을 부리는 건재약상으로 풀려 제법 돈냥을 모아 거창 장터에서 의원 간판을 내걸고 살고 있노란 솔깃한 풍문이 유의태 문하의 제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10여 년간 배운 것 하나 없이 머슴살이처럼 부림만 받았노라 핏대를 세우면서도 역시 떠나선 그 동안 유의태에게서 보고 배운 것을 밑천으로 생업을 꾸려갈 수 있다는 걸 알자 부산포의 격이나 의술의 정도를 누구보다 잘 아는 허준도 자기도 부지하세월로 유의태의 촉망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하고 곰곰이 따지는 날이 많았다.
  도대체 뱀 두 마리를 잡아들고 미련없이 그 문하를 떠난 제자나 11년 동안을 참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삿대질하여 덤벼들고 제 집 문간에 침을 뱉고 돌아서 간 제자의 원한을 그도 사람이면 한번쯤 되새겨봄직할 터인데도 가타부타 한마디 참견도 않는 그 유의태라는 인간에게 허준의 인내력도 점차 한계에 이른 어느 날이었다.
  그날 유의태가 모댁에서 새벽같이 보낸 가마를 타고 어린 상화 녀석에 게 약재함을 들려 떠나고 병사에는 도지와 임오근, 허준과 영달, 꺽새들이 안채 하녀 상금이가 들고 나온 햇과일을 먹으며 병문, 병덕 신출나기 제자가 피아골 근처에서 만난 땅꾼의 모습이 아무래도 지난날 이 집에 있었다는 장쇠라는 사람을 닮았다는 바람에 안 그래도 뱀 얘기만 나오면 며칠씩 생병을 앓는 꺽새가 금방이라도 쫓아갈 듯이 흥분하고 있을 때였다.
  어기적거리며 두 사람의 치질 환자가 찾아든 것이다.
  다른 큰 병도 아니요 만만한 치질환자라는 걸 알자 불쑥 임오근이가 나서며 올라와 봐라, 바지를 벗고 엎드려라 등 제가 의원인 양 나설 것이다. 그러고보면 부산포의 사건 이후 그 임오근도 전과 같지 않고 유의태가 눈앞에 있을 때면 모르되 없을 때는 가벼운 병자는 제가 가로맡아볼 듯이 은연한 반항이 엿보이던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도지가 어디 사는 뉜가 하고 의원이 으레 시작하는 질문을 꺼내, 이 집의 의원은 아버지가 안 계시면 자기라는 암시를 내세웠는데도 임오근은 짐짓 그 도지를 무시, 치질에 관해서는 제가 제일 잘 아는 양 제 지식을 벌여놓기 시작했다. 항문의 항자는 그 형상이 수레바퀴 돌아가는 쇠와 같은 데서 생겼다는 유래설부터 치질의 종류엔 암치질, 수치질, 맥치, 혈치, 장치 등이 있으며 심한 증세는 닭볏 같은 모양이요 그 다음 심한 모양은 연꽃 모양이요 또 그 다음이 복숭아 형태의 것이고 덜한 증세로는 형태가 솔방울 같은 것이며 그 다음이 소 젖꼭지 같은 것이요 그리고 더 초기의 것은 쥐 젖 같기도 하고 앵두 같은 것인데 마땅히 치질은 이 시기에 고쳐야 한다고 단정을 했다.
  이에 도지가 손부터 내저으며 임오근의 이론을 내친 후, "자네가 병자를 보았다면 얼마나 봤다고 가로막고 나서는가, 도대체 겉으로 난 형체가 무슨 상관인가." 하고 핀잔을 주었다.

    2
  "아니 그럼 내가 누구만치 병자를 많이 못본 사람이오? 괜한 일로 무안을 주려 드는구만." 하고 임오근도 질 기세가 아니었고 "무엇이!" 도지도 정색으로 그 임오근을 흘겨보았다.
  "글쎄 뒷구멍병이라면 나도 웬만치 주르르 꿰니까 하는 소리 아니오."
  "구슬이 서 말이면 무슨 소용이오. 꿰어야 보배지. 말로만 안다고 그게 곧 약인가 그 말이야."
  "그렇지만 나도 이 집에서 병잘 대하기 벌써 십몇 년이오. 이만한 질병자 따위 못 고칠 쑥맥으로 뵈오?"
  허준도 작은 병은 스스로 다뤄보고 싶은 욕망이 굴뚝 같은지라 무언가 의견을 내려고 하는데 도지가 말을 이었다.
  "겉으로 난 형체를 보면 그 형체보담 병이 생긴 원인부터 파악하는 것 이 순설세. 순서도 모르면서 왜 나서나!"
 이어 도지의 말이 격해지며 다시 치명적인 한마디를 했다.
  "허락 없이 병자를 다루지 말란 아버님 말씀 벌써 잊었던가!"
  너무나 아픈 말이었다. 침묵이 길었다. 그 말은 임오근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 허준의 가슴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침묵한 임오근에게 도지가 다시 가차없이 한마디 했다.
  "아버지에게 반할 생각이거든 부산포처럼 이 집을 떠나면 돼. 그대가 없다고 이 집 문닫는 일은 없을 터인즉!"
  너희가 아니면 이 집이 문을 닫을 줄 아느냐고 한 도지의 그 고만한 말은 임오근뿐 아니라 허준의 가슴에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찔러오는 모멸의 말로 들렸다.
  물론 허준은 일변 이해하려 들었다. 도지의 말이 거기까지 나온 것은 내의원 시험 낙방 후 5, 6년씩이나 계속 취재시험이 없는 무료함과 초조함, 또 형제처럼 믿고 사귀었던 부산포가 자기뿐 아니라 자기 집에 욕을 퍼부으며 떠난 데 대한 실망 이후 제자들에 대한 경계심, 그리고 아버지 가 출타해 계실 때면 의당 이 집을 대표하는 것은 유의태의 아들인 자기요 자신의 의술일 터인데도 근자 특히 아버지가 없을 때면 눈앞에 있는 자기쯤 무시하듯 양해도 없이 가벼운 병자들은 저희가 가로막고 보려 드는 임오근의 행위에 잔뜩 자존심이 상해 있던 그런 소소한 감정들을 뭉뚱그린 경고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병자를 가로맡고 나서는 행위는 잘했느냐 못했느냐 따질 얘기가 될 것이로되 그 제자들의 존재를 그런 말로 무시하려는 도지의 그 말은 임오근을 한참 흥분케 했다.
  물론 임오근도 허준도 잘 알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이 집에서 떠난다 한들 유의태의 의원이 문을 닫을 리 없고 그 제자들이 약초를 캐오고 썰고 달이고 또 병자들의 치다꺼리를 하지 않아도 그 정도 대신할 사람은 많다는 것쯤. 더 확실한 것은 제자 따위 백 명이건 수천 명이건 있으나 없으나 이 집에 오는 병자들이 유의태의 의술을 의지하여 찾아드는 이상 여타의 자질구레한 인간들의 거듦이야 누가 대신해도 되는 일임도. 하나 비록 오라 소리 듣기 전에 스스로 자청하여 온 그들일지라도 돈벌이를 목적하여 이 집에 있는 것이 아니요 오로지 유의태의 의술의 한가닥이라도 배우거나 물려받고자 일구월심 이 집에 붙어 기거하고 있는 그 소심한 자기들에게 도지의 그 모진 말은 그의 어떤 심경의 배경에서 터져나왔건 허준의 가슴속에 박혀 마치 살아 있는 송곳날처럼 가슴을 찔러댔다.
  임오근도 마찬가지로 이 날만은 도지의 위엄에 꿀리지 않고 십여 년 동안 제자 노릇으로 배운 지식 무화과 잎새 처방을 내세우는데, 도지가 치질 환자와 탈항 환자를 가로막고 다시 한번 강조하여,
  "대저 치질의 원인은 술 마시고 과도하게 행방하는 일, 그리고 맵고 짜거나 기름진 것을 탐하거나 과식이 원인이오." 했고,
  두 병자가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 게 없도록 가난한 우리네가 무슨 수로 기름진 것을 먹었기에 그게 원인일까 보냐고 못미덥다는 얼굴을 하자,
  "여편네 끼고 자는 데 가난 부자가 따로 있소. 좌우간 너무 밝히면 이 병은 못 면해." 하고 아까 한 말을 또 짜증스레 되풀이했는데 허준의 말리는 눈빛을 무시하고 임오근도 그런 도지에게 대항하듯 조금 전 꺼낸 자기의 처방을 또 고집하였다.
  "넨장, 없이 사는 것들이 허구한날 뼈빠지게 일하면서 사는 재미라곤 그짓말고 뭐가 또 있을라고. 세끼 밥은 걸러도 그짓은 해야 사는 것들인 걸 ... 그러니 돈 아니 들고 낫게 하는 단방향은 내 말대로 무화과 잎새를 진하게 달여서 그 김을 하루 세 번씩 쐬라고. 그러면 보름 안으로 데꺽 나을 테니까."
  이에 "헝!" 하고 도지가 코웃음부터 쳤다.
  "증상에 따라 약도 가지가진데 꼭 무화과 잎새라야 하다니, 원! 자네들 이 말 저 말 들을 것 없이 내 말대로 하게. 이 길로 당장 달려가 강변 버드나무뿌리에서 수염처럼 가느다란 뿌리를 서너 줌 캐어 그걸 진하게 달여 그 김을 환부에 쐬고, 일면 또 질경이가 장독과 하혈에 특효가 있으니 그 질경이 뿌리에 생강 한 덩이를 저며 썰어 달인 후 아침 저녁 한 종지씩 마셔. 그러면 이 정도 치질이나 탈항은 고생거리도 아니니까."
  이어 붉으락푸르락하는 임오근을 무시, 붓을 들어 죽죽 써갈겨 병자들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무엇입니까. 글자라곤 읽을 재주가 없는 것들이 돼서 ... 말로 일러줍쇼."
  탈항환자가 도지의 종이쪽을 받아들고 묻자,
  "그 병을 낫게 하는 데 가려야 할 음식을 적은걸세. 좀 전에 한 얘기 그대로."
  "아 ... 예 녹두나 메밀로 만든 음식하고 특히 닭고기를 조심하라는 그 말인갑쇼. 좀 전에 말씀하신 게." 하고 치질환자가 물었으나 이미 병자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도지가 허준을 향해 말했다..
  "물론 이런 단방약은 초기 증상이면 낫게도 하고 가라앉히기도 하나 그 병의 뿌리를 뽑을 양이면 침을 써야 해. 그 침을 어디 어디 놓는지 알던가?" 하고 이제야 노골적으로 임오근보다 훨씬 우월한 자기의 지식을 내세웠다.
  침묵하고 있었으나 탈항이나 치질의 근치술은 침뿐이라는 것을 허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허준은 끼여들지 않기로 했다.
  아는 체 나서서 '작은 유의태'인 양 하는 도지의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도 없었고 단방약을 우기는 임오근을 무안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족태양과 독맥을 취해야 해."
  도지가 자신만만 말했을 때였다.
  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유의태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 되풀이 떠들며 다툰 임오근과 도지의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본 눈이었다.
  허준과 임오근이 얼른 병사 밑으로 내려서 허리를 굽히는데 유의태가 병사 위로 올라서며 병자들에게 말했다.
  "허리띠를 풀고 보이게."
  탈항과 치질 환자가 다시 바지를 까내리고 두 팔을 방바닥에 짚은 후 엉덩이를 치켜올렸다.
  흘긋 본 유의태가 아들이 환자들에게 써준 금식 조항을 받아들어 훑어본 후 다시 내주더니 "돌아가 시키는 대로 하되 그래도 뒤가 개운치 않거든 오게." 하고 말했다.
 이어 고의춤을 추스른 병자들이 사례가 얼만가 하고 저희끼리 작은 소리로 숙덕거렸으나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자 탈항환자가 들고 왔던 달걀 꾸러미를 잘 보이는 마루 끝으로 밀어놓으며 눈치를 살피다가 사라지는데, 유의태의 눈길이 아들에게 향했다.
  "탈항이 된 쪽은 다 못 낫우고 다시 올 것이다. 그때는 침을 놓아 병의 뿌리를 뽑아주되, 족태양 방광경의 좌우에 혈이 몇 군덴지 아느냐."
  '백이십육 혈올시다.' 하고 허준이 대답하려 했으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하고 있지 않음에 섣불리 입을 열지 않고 도지를 보았다.
  "백이십육 혈올시다." 하고 도지가 곧 확실한 대답을 냈다.
  "침은 무슨 침을 쓰던고?"
  "침요?"
  봉침이었다. 그것도 허준은 알고 있었다. 그간 침경을 읽기 스무 차례도 넘었다. 특히 침의 이론이라면 허준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대담할 수 없었다. 유의태의 시선은 여전히 아들을 향해 있었기에 ...
  "부하고 마른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특히 밥을 먹은 후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했는지를 미리 안 후 맥을 확인하고 사용하는 침은 봉침올시다.."
  도지의 대답은 허준이 하려던 대답보다 훨씬 상세했다.
  "찌르는 깊이는?"
  도지의 대답이 잠시 막혔다.
  임오근은 침 얘기가 나오면서 이미 난감해진 얼굴이었다.
  "그냥 찌르면 낫는 게 침이더냐?"
  유의태가 아들을 향해 조소했다.
  허준이 기다리지 못하고 기어이 입을 열었다. 의술에 관한 모처럼의 스승의 질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제가 대답해도 되올지요?"
  "해보아."
  유의태가 돌아보았고 허준이 입을 여는데 도지가 먼저 말했다.
  "처음 세푼을 찔러 사(열을 내리는 침술)하고 환자가 세 번 호흡하기를 기다려 다시 두 푼을 찔러 한 번 더 사하고 반 시각 후에 뽑습니다."
  허준도 입을 열었다면 도지와 대답이 꼭 같았다. 그런데 유의태가 이의를 붙였다.
  "반드시 반 시각 후에 뽑으라는 법은 없다. 그건 병자의 환부의 정도와 기력을 살펴 의원의 재량으로 정하는 것이다."

    3
  "애초 의원이 병세를 제대로 짚었다 할지라도 그 병세는 제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요 수시로 변동하고 움직이고 있는데 몇 푼을 찌르고 몇 호흡을 더 기다리는가에 일일이 책장에 적힌 데로 구애될 까닭이 어디 있느냐."
  허준이 멍해졌고 이번엔 도지가 이의를 달았다.
  "그러나 '침경'에 쓰인 바에 의하면 ..."
  "무엇이냐?"
  "침을 놓되 사하고 보하는 것과 병자의 호흡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책장 어디에도 반드시란 말은 없다."
  "예?"
   " ...?"
  "한마디로 병자의 증세가 책에 일일이 다 적혀 있는 건 아니다. 대강의 병세를 적었을 뿐인데 그 대강의 병세에 대한 처치를 어찌 곧이곧대로 모든 병자에게 쓴단 말이냐?"
  " ...?"
  "더구나 그 침경을 지은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며 기후도 음식도 다른 나라 사람을 다룬 걸 안다면 책장에 쓰인 것이 곧 금과옥조란 보장도 없다."
  허준의 가슴속에 또 한번 신선한 충격이 와 닿고 눈이 또 한번 뜨이고 있었다.
  "책이란 읽는 것으로 지식은 아니다. 읽되 깊이 생각하고 참뜻을 알지 않고서는 더구나 바로 알았다고 할 수 얼다. 특히 의에 관한 책은 그러하다. 쓰는 모든 이의 안목이 각각이기 때문이다. 패독산이나 쌍화탕 물로 감기병자를 낫게 할 수 없는 이치이다."
  그날 허준이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뜻밖에도 유의원집을 떨치고 뛰쳐나가 거창 장터에서 의원 간판을 달고 독립했다 소문난 부산포가 찾아와 있다가 들어서는 허준을 보자 반색을 하며 내달았다.
  찾아올 객식구가 없는 집이었다.
  변돌석이와 함께 살 제는 더러 산청 관아의 아전들이 드나들며 마침 허준이 있으면 함께 술타작을 할 때도 있었으나 그가 나로도로 자취를 감춘 후로는 거의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외부로부터의 내왕이 없는 집에 뜻밖에 찾아든 부산포의 존재를 가장의 손님으로 대접하고자 고부가 함께 부엌에 들어 이윽고 차려낸 술상은 부산포가 들고 온 닭 한 마리가 아니더라도 양념에 무친 산나물과 두어 가지 들기름에 지진 전들이 정성스러웠다.
  적어도 기름에 지지고 볶은 음식은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허준의 밥상 위에도 잘 올라오지 않는 것들이었다.
  갑자기 찾아든 손님에 관심을 기울이던 고부가 안방으로 물러가고 혹 심부름거리가 없나 겸이만 방문 밖 툇마루에 대령해 남았을 때였다.
  두어 순배 술잔을 바꾸며 소주를 털어넣고 난 부산포가 갑자기 유의태의 욕을 꺼내기 시작했고 이어 자기가 팔자 고칠 모종의 궁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 계획에는 그대의 조력이 꼭 필요하노라고 했다.
  "팔자를 고치다니?"
  의아해하는 허준의 물음에 대답 대신 부산포는 그대 같은 재사가 왜 아직도 이런 구차한 생활에 시달리며 유의태의 문하에 매어 있느냐, 그 집에는 백 년 있어 봤자 결국은 배울 것도 없이 자기처럼 제 발로 뛰쳐나오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었다.
  "자기 같은 신세라니? 우리가 듣기론 거창 읍내서 제법 한밑천 꾸려서 산다는 소문이었소만?"
  "살기야 어찌 살 건 아무리 유의태 그놈아 밑에 살 때 같을라고."
  "나한테는 아직 스승이오. 내 앞에서 이놈아 저놈아 하는 건 듣기 거북하오."
  "하이고, 아직도 그 영감태기한테 의리 세울라카요? 내처럼 십 년을 채워서 허송세월해야 정신 채릴랑교? 으잉?"
  " ... 할 얘기부터 들어봅시다."
  "벌써 한 6년 안 됐소? 그 6년 동안 억울하다 생각한 적 한번도 없다카모 사람도 아니제. 들어보니까 자당님이 떡장수한단 말도 있던데.".
  "팔자 고친다는 얘기는 뭐요. 그 얘기나 들읍시다."
  "하모, 자 한잔 더 하소."
  술잔을 받아놓기만 한 채 허준이 그 부산포를 건너보자 부산포가 품속에서 부스럭거리며 비단으로 싼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 ...?"
  "한번 자세히 보소. 천하의 보물인기라."
  허준이 부산포가 내미는 비단을 벗기고 두루마리를 펴들었다. 허준이 의아해졌다.
  그건 한눈에 알 수 있는 부산포의 필체였다.
  해서, 행서, 초서, 예서 등 그것이 유식의 증명이나 되는 양 하나의 문장 속에 기분 따라 이 자체 저 자체를 뒤죽박죽 써넣은 그의 한문 실력은 지난날 허준이 수없이 보았던 터였다.
  "전녀위남법?"
  "득효방에 엄연히 적힌 믿을 만한 내용이제."
  "그건 아오만, 한데?"
  "자세히 새겨 읽어보소. 앞으로 우리 팔잘 고쳐줄 대목이니까예."
  허준이 부산포의 그 난삽한 필체의 기록을 읽어갔다.
  '득효방'
  "종진삼월명단시태 혈돈불류상형이변 봉시흑여미정 고복약방술전영생남야."
  (임신 석 달째를 시태라 이르는데 혈맥이 흐르지 않고 형체를 이루는 데 이때엔 아직 남녀 성별이 미정한 고로 복약과 방술로서 사내를 만들어 낳을 수 있다.)
  "이걸 왜 싸들고 다니오?"
  "그 뒤를 또 하나 보소."
  다른 종이에 이번에는 의학입문와 한구절이 적혀 있었다.
  "시각유계 이부치권부상하 물영지지 약불신대계지난 이권감안하 칙일기증시웅계가험."
  (처음으로 임신한 것을 깨달을 때에 도끼를 임신부와 침상 밑에 두되 임신부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면 여자아이도 아들로 태어나니 만일 이 방술을 못 믿는다면 닭이 알을 품고 있을 때에 도끼를 둥우리 밑에 달아놓으면 그 속의 알이 모두 수평아리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허준이 시선을 들자 싱글거리던 부산포가 또 채근한다.
  "의감이라카나 그것도 내가 적어논긴데 그만 지은 사람의 성명을 빠뜨린기라, 사람들한테 믿게 할라카모 책을 지은이 이름가지 대야 권위가 있어 믿는긴데 ... 의감을 지은이가 누구라카던가?"
  "나도 얼른 기억이 안 나오만."
  "좌우간 마저 읽어보소."
  '변남여호'
  "부인유진 좌유방유핵 시흑 우유방유핵 시여야."(의감)
  (부인이 임신하여 달이 차갈 때 왼쪽 젖에 멍울이 생기면 사내아이요 오른쪽 젖에 멍울이 생기면 여자아이다.)
  "뒤에 또 두어 장 적은 게 있을기라."
  분산포가 허준이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가 마시며 말했다.
  뒤에 적힌 건 맥경의 대목들이었다.
  '변남여남'
  "부입유율영인모지 여복잔자칙남야 여재두참차기자여야."(맥각)
  (부인이 아이를 가졌는데 손으로 어루만져 보아 술잔을 엎어놓은 것 같으면 남자요 팔목을 만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여자다.)
  "부인접진사월욕지남여법 좌질위남 호질위여 구질위생이자 위구활이질타."
  (부인이 임신 넉 달째 남녀를 아는 법, 왼쪽 맥박이 빠르면 사내아이요 오른쪽이 빠르면 여자아이며 좌우가 다같이 빠르면 쌍동이를 낳는다.)
  허준이 읽기를 마치자 부산포가 마시던 술잔을 놓더니 정말 그것들이 천하의 보물이나 되는 듯이 주섬주섬 싸서 품속에 간직했다.
  "이젠 좀 눈치를 알겠지러?"
  허준이 입을 다문 채 있자 아예 술상도 밀어놓고 부산포가 자기의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세상 어느 집안 어느 여자고 아이를 뱄다 하면 너나없이 사내아이를 낳기를 갈망하는 사실부터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서 자기는 오래 전부터 이 사실에 주목 유의태의 장서 속에서 그 유관한 대목들을 베껴놓고 있었는데 그동안 제 마누라에게 그 방술을 적용해보니 낙자없이 성공하였다는 것과 이에 자식이 셋인데 끝애가 여자아이로 태어날 때 마누라의 배도 어루만져보고 어느쪽 젖에 멍울이 서는가도 제 손으로 확인을 끝냈으니 이젠 이 방법으로 큰돈 벌 일만 남았다고 사뭇 흥분에 겨워서 강조했다.
  "의서에 있는 얘기니 의원을 지망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명심하고 새겨둘 일이긴 하나 그러나 그 방술이 그토록 백발백중의 영험이 있는 것인지는 자신할 수 없지 않소. 만일 그토록 낙자없이 들어맞는 것이라면 세상에 아들 못 둔 사람이 없었을 테니."
  허준의 뜨악한 말에 부산포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길게 떠벌렸다.
  그의 얘긴즉 뱃속에 든 아이가 사내아이냐 계집아이냐 짐작해보는 따위로 돈벌이일 수 없다.
  그러나 '득효방'에 적힌 바대로 여자아이를 사내아이로 바꾸는 방술이 정녕 실효가 있는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돈벌이이노라 재삼 강조한 후 자기의 경우에는 틀림없이 맞아떨어졌으나 만에 하나 빗나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어차피 세상은 남녀가 반반씩 태어나는 섭리이고 보면 아들이라고 예언한 말에 반의 확률은 애초부터 있다는 것이다.
  하여 이미 자기는 지난해부터 소소한 벌이밖에 안되는 의원의 문을 닫고 이 방술의 시험차 아이 밴 여자만 찾아 헤맸는데 특히 돈 많고 악착같이 아들 낳기만 소원하는 부자집을 찾아다니며 "아들 낳게 해주겠노라." 장담하고 다녔으며 그 결과 제법 목돈도 얻어 썼노라는 자랑이었다.

    4
  "그래서 하나같이 다 효험이 있었단 말이오?"
  "한 군데는 내 뜻대로 안돼버리고 나머진 다 맞았다이까네."
  "사실이오?"
  부산포가 실패한 집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그가 진주에 이르러 수소문 끝에 내리 독자만 낳는 집안을 물색, 아들 낳게 해준다고 자청해 들어가 임부인 새며느리의 맥을 짚어봤는데 아무래도 맥이 뛰는 모습이 사내아이의 징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집이 천석꾼지기 부자집인 것이 아쉬워 요행히 방술이 들어맞으면 한밑천 얻어쓴다 싶어서 '득효방' 대로 방술을 썼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긴데 석 달 이전에 방술을 쓰라고 그리 돼 있는데 내가 찾아갔을 때 아메 ... 너댓 달 경과한 후라 그래도 미련두고 혹시나 하고 그 집 행랑서 방 하나 차지하고 해산달을 기둘렀지."
  "아들입디까?"
  부산포가 대답 대신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지지바라."
  "그래서 어쨌소."
  "눈치 딱 짚이길래 꼭두새벽인데 내뺐지 머 ..."
  "핫핫 ..."
  "우야노. 조석으로 진수성찬에 대접받을 거 다 받아가모 대여섯 달 진치고 있었고 곧 죽을값에 큰소리 탕탕 치고 있었는데 삐지나온 기 지지바모 내 다리몽갱이부터 뿌러질 게 뻔하니가."
  "그런데 그 짓을 또 한단 말이오?"
  "그 집은 애초부터 운때가 안 맞은기라. 그러니 앞으로는 미리 수소문을 단단히 해갖고 석 달 이전짜리 애밴 여자만 찾으모 틀림없다카이. 난 자신이 깍 있는기라."
  "그렇게 자신있는데 날 찾은 건 왜요? 날랑 아이 밴 여잘 수소문해 찾는 역할이소?"
  "하하하 ... 그런 일은 헹씨 아니라도 할 놈 수두룩하이까 그런 걱정은 할 것 없고 그것보다 헹씨가 맡을 일은 거 왜 음양이 이러쿵저러쿵 하멘시로 문자 써가며 아이가 태어나고 뱃속에서 커가는 모양새를 의서에 적힌 대로 얘기해주는 그 역할을 맡는기라. 내 하도 깨까다로바서 그 대목을 외울라다 외울라다 말았지만 헹씨는 마 줄줄이 월 수 있을끼라."
  '아들 낳는 비방이라 ...'
  허준은 부산포의 그 기발한 제의를 입안에 뇌었다.
  늙어 이 집 문간 저 집 문간 떡장수를 하는 어머니나 삯바느질에 여념이 없는 아내의 처지가 자꾸만 눈에 밟히는 요즘이었다.
  의원이 되어 팔자 고치는 데까진 바란 바 없다. 그러나 확률이 반이고 밑져야 본전이요 여차직하면 줄행랑만 치는 일이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즉답이 없는 허준에게 부산포가 재차 유의태의 집에 더 머물러 있어야 생길 게 뭐냐고 충동질했다.
  부산포의 욕지거리가 아니더라도 세월이 아까운 건 허준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더 기다리고 기다려서 의원이 된다 한들 그 소망은 무엇일 것인가 ... 어머니와 처자식과 이름없이 단란하게 사는 그 이상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다면 ...
  아들을 소원하는 이에게 아들을 낳게 해주는 비방이 있다면 그것을 코끝에 걸고 의원을 자처한들 부끄러울 까닭이 없다 싶었다.
  부산포가 돌아간 것은 밤이 이슥해서였다.
  헤어지기 직전까지 턱밑에 다가들며 부산포는 다짜고짜 동업의 확답을 채근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허준은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식구들의 계량에 도움이 될 땅뙈기가 한 뼘 있는 바도 아니요 유의태의 문하에서 6년을 버텨왔되 그 지루한 기다림이 10년을 채운대서 뜻이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는 바에야 부산포가 자기의 아내에게 확실히 실험을 해본 바라 자신있게 장담을 하는 일이요 또 그 방술의 내용이 허준이 신뢰하는 의서 속에 어엿이 적힌 것들임에서 떼돈 버는 것까지는 모르되 확실하게 생업의 방편이 된다면 그길로 못 나설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자칫 쉬운 대답을 꺼내려는 자기 자신을 허준은 억제했었다.
  "생업은 되고도 남으리라."
  세상 아들 낳고자 안달하는 여자가 얼마나 많으며 그 소원이 얼마나 치열한 것인가를 허준도 안다.
  확실하게 아들을 낳는 방법이라면 서낭당 돌귀신에도 빌고 무당들의 푸닥거리도 마다 않는 아이 밴 여자들이 의원의 이름을 내걸고 장담해 나선다면 누가 따르지 않겠으며 솔깃해하지 않으랴.
  설사 방술대로 지시하여 실패한다 할지라도 부산포의 말처럼 어차피 세상에 태어나는 모습은 반이 남자요 반이 여자일진대 덮어놓고 사내아이라 우긴들 크게 밑지는 확률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맞아떨어지면 저들의 공인 양 한밑천 받아내는 것이고 빗나갔다 싶을 전 뒷담 넘어 줄행랑을 치거나 욕설과 손가락질 속에서 뒤돌아 설 뿐이다. 또 더러는 사람을 속였느니 어쩌니 내끌려 멍석말이 몰매질을 당하는 적도 없진 않을 것이로되 그러나 그땐들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어엿이 의서에 적혀 있는 방술대로 행했노라 의서를 들이밀고 오히려 입심좋게 당신 팔자에는 아들이 언다고 덮어씌우거나 혹은 식구들의 정성이 모자란 탓이노라 우겨대면 그 또한 못 통할 어거지도 아닐 터이다.
  "그럼 왜 함께 그 길로 나서자고 흔쾌하게 대답해주지 아니했습니까?"
  이어 어머니에게 일장 설명을 한 남편의 대답을 들은지라 자기들 방으로 돌아온 아내는 다소 놀리듯이 웃음 띠어 물었다.
  "흔쾌하계 대답은 않았으나 도와주마고는 약속을 했소.".
  "도와주다니요?"
  "유식한 의원인 체하려면 뱃속 딸을 아들로 바꾸는 그 방술을 믿게끔 사전에 설득해야 할 여러 얘기들이 있소. 남녀의 교합 끝에 생명이 태어나는 이치며 그 생명이 여자의 뱃속에서 다달이 영글어져가는 모습들을 세세하게 설파할 대목들이지."
  아내가 질화로 속에서 부젓가락으로 불씨를 집어내어 입김으로 불꽃을 일구어 등잔의 심지에 갖다 댔다.
  방안의 어둠이 벽구석으로 물러났다.
  아내도 더 묻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이부자리를 내렸다.
  뱃속에서 생명이 날로 커가는 모습은 딸 숙영이의 임신 때 남편의 입으로 밀어처럼 소상히 들은 바였다.
  "그 사람은 유의원 밑에서 더구나 서방님보다는 연기가 오래 된 분인데 그 정도 내용을 왜 서방님께 의지하려 듭니까?"
  이부자리에 남편이 누운 후 그 머리맡에 한 무릎 세워 앉은 아내가 다시 물었다.
  "제법 길고 어려운 대목이라선지 세세히 외워두진 않은 모양이오. 그래서 그 대목들을 내가 베껴다주마 했소."
  " ... 함께 손잡고 나서지 않을 바에야 그 대목은 왜요?"
  "불을 끄지 그러오. 또 바쁜 일감이 있소?"
  아내가 문득 윗목에 놓인 삯바느질감들을 보았다.
  그 일감들은 그녀가 허준에게 시집온 후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비단 옷감들이었다.
  "동정만 새로 달아 내일 해질녘 안으로 전해 드리면 됩니다."
  "밤이 늦었소. 잡시다."
  방안이 다시 어두워졌다.
  문득 뒷산에서 접동새 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아내가 곁에 눕자 남편은 팔을 뻗어 베개를 만들어주었다.
  안겨오는 아내의 머리에서 동백기름 냄새가 살포시 맡아졌다.
  남편의 턱수염을 이마에 느끼며 아내가 다시 나직이 속삭였다.
  "엿들을래서가 아니라 방안에서 오가던 말씀 어머님과 함께 부엌에서 대충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어머님도 혹시나 서방님이 함께 따라나서지나 않을까 마음을 죄었습니다. 저보담도 어머님이 더 그런 눈치시고요."
  " ..."
  "지난 기다린 세월이 어떤 세월인데 저런 점쟁이 같은 허황한 일로 나서려니 하시면서."
  "한마디로 허황한 일이라고만 할 수 없소. 의원이 되려는 사람이 의서에 적힌 얘기를 믿지 않고 어쩌겠소. 오히려 내가 당장 확답을 안한 것은 그때 두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기 때문인지도 몰라."
  "두 사람이라니요?"
  "의술은 증험을 첫째로 한다고 자기 아들에게 거듭 다짐하던 ..."
  "유의태 그분 말씀이오니까?"
  "또 한 사람 있소."
  "누구오니까?"
  "자신의 의술의 완성을 위하여 무덤 속 송장조차 캐내려 했던 안광익이라는 그 사람 얼굴이 내 눈앞을 가로막았소."
  " ..."
  "한번도 못 본 사람인데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그리고 한밤중 남의 묘지를 파헤치는 그 새파란 불꽃이 일렁이는 두 눈 ..."
  "어쨌든 이번 일은 그 부산포를 도와주며 의서가 다 그토록 믿을 만한 것인지 지켜볼 생각이오."
  "아무리 의서에 적힌 바일지라도 태어나는 아이를 마음대로 남녀로 바꿀 수 있다는 것만은 다 믿기가 어렵습니다 ..."
  접동새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아내가 대답 없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안광익의 영상을 쫓는 남편의 눈빛이 어둠속에서도 불을 뿜듯이 뜨거웠다. 아내가 그 남편의 가슴에 자기 입술과 얼굴을 묻었다.
  그날 새벽이었다.
  두세 홰 닭이 울면 으레 아내가 깨워서 잠투정 끝에 일어난 겸이의 새벽글 읽는 천자문 소리와 함께 어머니가 떡장사로 나선 후 늘 들리는 디딜방아의 쿵덕거리는 소리를 귓결에 들으며 허준이 잠을 깨가고 있는데 갑자기 사립문 쪽에서 소란한 소리가 났다.
  이어 낯선 인간의 외침과 함께 아내가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튕겨일어난 허준이 방문을 열자 아내가 떡가루 물은 손인 채 다급한 소리를 냈다.

    5
  "속히 나와보세요."
  "무슨 일이오?"
  "윗동네 사는 분들이라는데 웬 노인이 병자를 업고 왔습니다."
  "병자라니?"
  "이 집이 의원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면서 막무가내로 서방님을 불러 달랍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났단 말이오."
  "하여 저도 어머님도 의원집에 다니기는 하나 아직 병자를 보지 않는다고 얘길 했는데도, 어쨌든 속히 나와보소서."
  허준이 황황히 옷을 입고 방을 나을 때였다. 아직 동도 터오지 않고 어둠이 깔린 채인 그 마당을 가로질러 웬 늙은이가 이팔이 넘었을까 한 낭자를 들쳐업었고 뒤따라 그 낭자의 어머니인 듯한 노파가 등을 받든 채 허준이 앞으로 엎어질 듯이 내달았다.
  "뉘시오니까!"
  "어서 이 아일 봐주시오.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잠깐 고정하십시오. 전 아직 병자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올시다만."
  순간 늙은이가 곱지 않게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아니 꼭두새벽에 왔다고 의원이 문전박대하는 게요?"
  허준이 늙은이의 등에서 신음하는 낭자를 보자 다급하게 자기의 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좌우간 이리 드러눕히시오."
  아내와 노파가 낭자를 부축했다.
  뒤쫓아온 손씨와 글 읽다가 쫓아온 겸이 녀석도 뜻밖의 집안의 소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준에게 생애 처음으로 병자가 찾아든 기억할 만한 날이 밝고 있었다.
  밖은 훤히 밝았으나 허준의 방에 시체처럼 누운 낭자의 머리맡에는 미처 초를 준비하지 못하여 안방의 작은 등잔불까지 옳겨져 참기름을 빨아들인 심지가 바지직바지직 고소한 냄새를 피워내고 있었다.
  평소라면 등잔용은 들기름이요 참기름은 아까워서 쓰지 않는 터였으나 아들을 의원으로 지목하여 찾아온 첫병자임에 감격한 손씨가 등잔을 새로 닦고 손질하여 참기름을 부어 내온 것이었다.
  이제 갓스물이 넘은 낭자는 지병을 비관한 끝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음의 길을 떠났다가 한식경이나 후에 어미의 눈에 띄는 바 된, 거의 저승길을 절반이나 간 송장이었다.
  방안에 촛불이 마련되고 이북자리가 깔리는 소동 속에서 늙은 아비 어미가 들려준 경황은 이랬다.
  순득이라 불리는 낭자는 현 서쪽 3리 소나루에서 사공질하는 노부부의 외동딸이었다. 하나 가세가 빈곤하여 나이 스물이 차도록 혼사길이 트이지 않다가 금년 봄에야 마연동 사는 모 입자공집에서 통혼을 받아 올 가을 성례를 치르기로 작정이 되어 딸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그런데 혼삿날이 다가옴에 따랴 점차 딸이 말이 없어지고 마침내 앓아 누워버린 것이다. 놀란 노부부가 영물을 알고 본즉 딸에게는 부모도 몰랐던 지병이 있었으니 그건 액기라는 병으로 옷을 벗으면 겨드랑이서 악취가 돋는 병이었다. 이에 늙은 애비는 인근에 소문이 날세라 타지방으로 나다니며 딸의 병을 고칠 여러 약을 지어왔으나 끝내 근치를 못하던 중 시집간 첫날에 냄새나는 겨드랑이를 신랑 앞에 보일 걸 고민하던 딸은 마침내 오늘 새벽 집 뒤 감나무 가지에 치마끈으로 목을 매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찌 내내 눈도 못 뜨고 이 모양이오? 이러고만 있으면 참말로 숨을 새로 돌리는 건 틀림없소?"
  좀체 숨이 안 뚫리는 딸 못지않게 병색이 짙은 늙은 아비가 낭자가 덮은 이불 속에 손을 넣고 있는 허준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그 이불 속 낭자의 상반신은 옷이 벗겨져 있었고 낭자의 어미도 허준이 시키는 대로 수건 감은 손으로 딸의 옥문과 항문을 틀어막고 있었으나 그 어미도 이제야 어딘가 자신없어 보이는 젊은 의원을 곱지않은 눈으로 치떠보고 있었다.
  아무리 의원이라 하나 그리고 목맨 사람의 숨을 돌이키는 방법이라곤 하나 젊디젊은 외간 사내의 손이 상반신 알몸이 된 딸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쓸어올리고 하는 양이 자꾸 신경에 걸리고 있었다.
  딸이 숨을 돌이킨다 한들 남달리 부끄럼을 많이 타는 딸이 자신의 이 꼴을 알면 당장 혀를 깨물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웠다.
  허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불안하고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는 건 낭자의 부모보다 오히려 허준 쪽이었다.
  처녀의 맨살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화려한 감정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나간 그 6년이라는 세월 스승 유의태가 다루는 병자와 환자들을 지켜보기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이었다. 그러나 그 유의태의 치료행위를 볼 때 느끼지 못하던 감정 ...
  하나의 생명이 바로 자기의 책임 아래 내맡겨졌다는 절박한 긴장이 온통 허준을 쇠사슬처럼 옥죄고 있었다.
  과연 자기가 행한 처치는 정당했는지 자꾸만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고 있었다.
  그 아들의 목덜미에 구르는 땀방울을 발견한 손씨가 안타까운 얼굴로 수건을 집어, 며느리에게 주었고 남편 곁에서 낭자의 팔다리를 주무르던 아내가 그 수건을 받아 허준의 얼굴에 맺힌 진땀을 닦았다.
  이윽고 허준은 낭자의 이불 속에서 손을 뽑아 아내의 손수건을 받아 자기의 땀보다 낭자의 입가에 남은 핏자국을 닦았다. 고건 사람의 피가 아니고 수탉의 볏에서 짜낸 닭의 피였다.
  목매 죽은 이의 의식을 되돌리려 할 때 살아 있는 수탉(죽은 이가 남자일 때는 암탉)의 볏에서 뜨거운 피를 뽑아 죽은이의 입에 쏟아넣어 주는 건 본초강목에 지시하고 있는 일종의 구급방의 한 행위이다.
  '또 하나 ...'
  대추알만한 닭의똥을 술에 풀어 콧구멍으로 대롱을 통해 불어넣는 것도 급히 닭을 찾지 못찰 때의 방편이노라 의서에 적혀 있다.
  '그밖에 빠진 건 없는가 ...'
  허준이 지난 세월 외어두었던 이런 경우의 여러 비방을 떠올리려 애쓰며 다시 낭자의 이불 속에 손을 넣었을 때 참고 있던 늙은 아비가 그 허준의 손을 떨치며 눈을 부릅떴다.
  "이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이냐니 도대체 당신이 하는 짓은 무엇이오. 누운 아이는 숨소리도 없는데 저 혼자 숨을 헐떡거리고 앉았으니 의원이란 호만 났지 우리가 잘못 찾아온 게 틀림없어."
  "비켜나오!"
  허준이 마주 눈을 부릅떴다.
  늙은 아비가 삿대질했다.
  "마냥 이러고 앉아서 언제까지 기다리자는 거요."
  "애초 난 의원이노라 자청한 적 없소. 하나 이런 때 어찌해야 되는가는 알기 때문에 맡은 거요."
  "그래 어찌해야 안다는 자가 벌써 한식경이나 남도록 손바닥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단 말인가 !"
  마주 외치려는 허준을 손씨가 울상이 되어 말리려 들었고 벌떡 일어난 늙은 아비에게 다희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이이가 의술이 있다 없다 다툰들 때늦은 일올시다. 정성껏 배운 대로 시행하고 있다 믿으시어 고정하시고 하회를 보소서."
  허준이 그 늙은이에게 쏘아보며 말했다.
  "의원이라고 병자에게 목숨을 나누어주는 건 아니오."
  "무어라?"
  "더구나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사람을 의원이라고 다 살려내는 건 아니다 그 말이오."
  "이자가 이제 와서 발뺌을 하려들어."
  "그러나 다행히 당신 딸은 되살아날 모양이오."
  늙은이가 이불을 젖혔다. 자기 딸의 갓 피어난 상반신이 두 등잔 아래 하얗게 드러났다. 순간 그 낭자의 심장을 수축시키고 있던 허준의 손이 늙은이의 손을 내쳤다.
  "무슨 짓이오!"
  "살다니, 살았다구?"
  "믿기 싫어도 만져보시오. 심장에 온기가 되살아났소. 숨을 돌이켰어."
  딸의 가슴으로 뻗으려던 아비의 손이 정지했다.
  "찬바람은 해롭소. 다시 딸을 죽일 셈이 아니거든 덮으시오."
  늙은 아비가 다시 이불을 덮었다.
  이때 잠자듯 움직이지 않던 낭자의 입이 문득 꿈을 깬 듯이 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살아났어! 살아났어!"
  손씨가 거푸 소리쳤고 다희가 "여보!" 하고 땀투성이가 된 허준에게 외쳤다.
  이어 낭자의 어머니가 울음을 터치며 딸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날 해질녘--
  완전히 숨을 돌린 낭자에게 묽은 죽에 달걀을 풀어 치마끈에 졸렸던 목구멍의 기를 트게 한 후 죽어도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낭자에게 허준은 액기를 근절하는 방법으로 단계심법과 만병회춘 속에 있는 두 처방을 일러주었다.
  새벽 오경에 돼지고기를 겨드랑이 털을 덮을 만큼 썰어 겨드랑이 밑에 끼고 있다가 날이 새면 감초를 한 냥쭝을 끓여 마시기를 매일 반복하는 일과 또 한 방법으로는 논고동을 잡아다가 살아 있는 채로 깨끗한 그릇에 서너 마리씩 기르면서 그 물 속에 파두(버들옷과에 딸린 상록 관목) 한 톨을 넣어 여름철에는 하룻밤을 재우고 겨울에는 대엿새 밤을 재우면 전체가 물로 변하는데 그 물을 겨드랑이에 바르면 능히 근절되리라 권하자 그제야 왜 다시 살렸느냐고 울던 낭자와 노부부는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약값 대신 은비녀 하나를 내놓았다.
  그러나 첫병자를 무사히 치른 감격이 더 큰 허준은 일체의 사례를 사양하여 생애의 첫 병자를 돌려보냈다.
  다시 달포가 지났다.
  그러자 허준의 집엔 하나의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건 죽은 사람을 살렸고 또 약방문을 지어주고도 사례도 받지 않았으며 또 허준의 처방에 의해 딸의 겨드랑이 냄새를 치유한 그 감사를 누르지 못한 늙은 사공 부부가 오는 데 가는 데마다 허준의 이름을 들먹인 탓으로 허준의 집엔 심심치 않게 병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찾아오는 병자들은 웬만한 병은 참고 견디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허준 또한 재어놓은 약도 없고 아직 침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기도 어려워 그저 책에서 배우고 아는 바대로 굳이 의원 신세를 빌지 않아도 효험을 보는 단방약 이름을 적어주곤 했는데 그 중에서 더러는 제법 큰 병으로 치는 소갈병(당뇨병) 병자도 있어 그 단방약인 푸른 대잎을 달여서 마시면 특효가 있다든가 갈근을 즙을 내어 마시면 효력을 본다든가 그 밖에 홍시나 배 또한 소갈병에 효험이 있다는 등을 일러준 것이 어느덧 입과 입으로 퍼져나간 탓이었다.
  그런 어느날.
  허준이 유의태의 출타를 틈타 겸이의 글공부도 봐줄 겸 집에 돌아와 있을 때였다.
  평생 발길을 않던 꺽새와 영달이 사뭇 숨찬 모습으로 찾아들어 유의태가 찾는다고 득달같이 굴었다.
  식구들의 인사도 아는 체 않는 꺽새들의 품이 미심쩍었으나 이에 허준이 유의태의 집에 이르렀을 때였다.
  부른다는 유의태는 보이지 않고 허준은 곧장 안채 오씨 앞으로 끌려갔고 그 허준을 향해 오씨가 대뜸 대청을 굴러대며 삿대질과 함께 욕바가지를 퍼부었다.

    6
  "네가 지금 왜 불려왔는지를 모른다곤 말 못할 게다. 배은망덕한 놈."
  어깨로 숨을 쉬던 오씨가 또 한번 허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매도했다.
  "짐작합니다."
  "짐작한다면 됐다. 오늘까지 나 몰래 챙겨들인 돈이 얼마인지 말하거라."
  "몰래 챙겨들인 돈이라구요?"
  그 많은 병자들을 네 집으로 끌어들였으니 의당 돈을 받았을 게 아니냐 하는 게다.
  "제 발로 찾아온 병자들께 제 아는 대로 몇 가지 처방을 일러줬을 뿐 손벌려 돈 받은 적은 없습니다."
  "이 뻔뻔한 놈. 내가 이미 사람을 시켜 여러 날을 너의 집을 지켜보았는데 잡아떼려 들어? 영달이 자네가 나서서 말하게."
  영달이가 오씨에게 충성할 기회는 이때라는 듯이 나섰다.
  "안방마님 분부가 계셔서 벌써 여러 날째 이 사람하고 내가 자네 집 문간을 밤낮으로 지켜봤어."
  "그렇다면 내가 굳이 대답할 필요없이 다 알겠소그려."
  "내가 본 병자가 하루에 7, 8명 되니 줄잡아 그 동안 몇백 명 되겠지."
  "몇백 명?"
  "아, 네가 의원한다는 소문난 지 언젠데 그 정도도 안될라고 ... 왜 눈은 치떠? 아, 네놈도 본대로 마님 앞에서 얘기해여."
  "내가 지켜보던 날도 아침 나절 한때만 줄잡아 10여 명 됐어. 그중에는 대가댁 큰 가마도 두어 채 드나들었고."
  허준이 어안이 벙벙해졌다. 후배인 자기가 저들의 진로를 앞질러, 영달의 질투나 꺽새의 앙심을 짐작 못한 바 아니지만 그들이 주절대는 숫자에는 실소부터 앞섰다.
  "내 집은 동네 복판에 있는 집도 아니고 마을 밖에서도 출입인 뻔히 내다보이는 집이오. 어디서 언제 어떻게 지켜봤나 모르나 하루에 10여 명이 드나들다니. 도대체 나도 모르는 10여 명을 누가 보았다는 거며 더구나 내가 구경도 못한 대가댁 가마는 누가 보았다는 겐가."
  "시치미 떼지 마라, 이자야."
  "내가 봤다, 이 눈으로!"
  영달이가 오씨에게 공치사하듯 강변했다.
  "긴말 할 것 없다. 이제 와서 네놈 발명 들을 사람 없으니 그간에 몰래 벌어들인 돈이 얼만지 그것부터 밝혀라."
  돈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찾아온 병자들은 그 동안 통틀어 열서너 명일 뿐이었다.
  그 중에는 허준의 단발처방을 고맙게 여기고 뭉쳐온 돈을 꺼내는 이도 있었으나 아직 어엿하게 의원이라 할 수 없는 처지인 아들을 의원으로 지목하여 찾아와 준 것만도 감격하여 어머니도 아내도 한사코 돈을 사양했고 그러면 고마워서 어찌하오 중얼거리며 정말 그대로 돌아간 사람이 칠팔 명이었고 두어 사람이 침값과 약을 가르쳐준 대가로 참외 몇 개와 참기름을 부엌에 들여놔주고 갔었고 ...
  그리고 한동리 육손이 할매란 노파가 영감의 어혈 요통을 따주자 그냥 되돌아간 다음날 아들 겸이 앞으로 갓난 강아지 한 마리를 바구니에 담아 전해주었었고 그밖에 서너 사람이 한사코 몇 푼 돈을 마루 끝에 두고 갔단 말을 아내에게 들은 듯했다.
  그러고는 늙은 아비에게 업혀 제일 처음 허준을 찾아왔던 병자. 결혼날을 받아놓고 심한 액기에 번민하다가 목을 맸다가 업혀온 처녀의 정신을 돌이키고자 수탉볏의 피를 내느라 닭을 한 마리 잡은 그 용약으로 쓴 수탉값을 내놓고 간 것을 받은 것 외 손을 내밀어 약값을 챙긴 일은 없다.
  이에 허준이 굳이 변명하려 않고 입을 다문 채 있자 오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놈이 돈을 너무 받아 미처 다 못 대는 모양이로구나. 어서 돈 액수를 대지 못하느냐."
  "돈 돈 하시오나 내 집에 찾아온 병자의 수는 통틀어 열서넛이며 그중 돈 몇푼 내놓고 간 이가 서넛이 있을 뿐올시다."
  "닥쳐라, 이 뻔뻔한 놈."
  "뻔뻔이라니요?"
  "그럼 뻔뻔이 아니고 무엇이냐. 명색은 내 집 사람으로 소문난 터에 주인 몰래 중간에 병자를 가로채 뒷구멍으로 돈을 버는 것이 도둑놈이나 하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냐."
  "도둑놈이라구요."
  "아니고 무엇이냐, 만일 네 멋대로 병잘 대하다 병자에게 무슨 변이 생기면 그 혐의가 너에게 쏟아지느냐 우리 집 이 양반이 뒤집어쓰느냐!"
  "맞습니다. 바로 그거올시다요."
  꺽새가 때를 놓치지 않고 오씨를 거들었고 영달이도 나섰다.
  "그리고 무슨 병에도 대충 얼마 얼마의 돈이 정해진 터인데 스승님을 조롱하려는 게 아니라면 어째서 장마철에 참외장수 파장 떨이하듯 반에 반값도 안 받고 병자를 보느냐 그거올시다."
  "그거야 뻔한 일이 아니겠어. 그 정도 재주로 의원 노릇을 해보겠다 미리미리 인심을 끌어모으려는 수작이지. 아, 왜 넌 아랫것들의 이런 꼴을 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게야."
  오씨가 혼자 발을 구르다가 곁에서 묵묵한 도지에게 소리쳤다.
  "놔두시지요."
  "놔두다니? 아니 지가 이 집 사람이면 한 사람의 병자라도 찾아서 끌고 와야 밥값을 하는 것이지 내 집에 올 병자를 가로채 제 주머닐 불리는 꼴을 보고도 그냥 놔둬?"
  "들어보니 큰 병자들은 아니올시다."
  "큰 병자 작은 병자 떠나 난 알고는 그냥 못둔다. 이놈 듣거라."
  허준이 고갤 들었다.
  "예."
  "이러니저러니 긴말할 것 없다. 네가 의원의 재줄 배웠다면 다 뉘 집에서 배운 것이냐. 그걸 알거든 돈일랑 당장 내 집으로 들여놓고 내 집에선 썩 나가거라."
  "소란하게 굴 것 없소!"
  등뒤에서 유의태의 소리가 난 건 이때였다.
  등불을 든 어린 제자 상화를 곁에 세우고 유의태가 서 있었다.
  "글쎄 여보?"
  "얘긴 듣고 있었네."
  유의태가 아내의 말을 끊고 그 눈이 허준에게 향해왔다.
  "긴 발명 필요없다. 당장 집에 달려가 네가 대한 병자들에게 무슨 증세에 어떤 처방을 했는지 적어둔 것들을 가지고 오너라."
  " ..."
  "늦어도 기다릴 것인즉 ... 모두들 흩어지거라!"
  허준이 그제야 꿇었던 무릎을 펴며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보는 유의태의 집은 병사 쪽 어두운 마당에 병자의 가족들이 피워놓은 모깃불이 피어오를 깍 남편이 사라진 큰사랑 쪽은 수목에 가려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찌 하고 있는고 ..."
  며느리 따라 달려온 손씨가 안타까이 중얼거렸다.
  때아닌 시각에 남편이 불려간 것하며 다시 황급하게 돌아와 병자들을 상대할 때 적어둔 종이들하며 병자 두엇이 약값으로 놓고 갔던 돈과 또 한참 망설이다가 강아지까지 담아 들고 나가는 남편을 보자 아내도 어머니도 무언가 큰 탈이 났다는 걸 직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허준은 "다녀와서 말하리다." 그 말뿐 동구 밖까지 쫓아나서는 아내와 어머니에게 걱정 말고 들어가라 이르고 총총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불안한 아내가 기어이 쫓아나섰고 손씨도 그 며느리를 쫓아와 이미 유의원댁 문전에서 한식경이나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제야 아내도 어머니도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가를 직감했다.
  제자의 단독적인 의료행위가 스승을 거역하고 능멸하는 행위인 걸 이제야 알았다.
  "필시 사단은 그 때문이다. 아비가 세상의 인정을 받았구나 싶어 앞뒤 생각도 없이 허둥거린 내 잘못이야. 미리 막았어야 하는 일을 ... 왜 하필 우리 집으로 병잘 업고 들어왔노."
  "어머님보다 기뻐했던 건 저올시다. 제 허물입니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 왜 이리 기척이 없노."
  그 한숨 쉬는 시어머니에게 말했다.
  "뒷담 쪽으로 돌아가면 혹 무슨 기척을 들을 수 있을까요."

  "여긴 왜 병자의 나이가 안 적혔느냐."
  일곱 장까지 허준의 처방지를 묵묵히 넘기고 있던 유의태가 여덟 장째 처방지를 훑어가다가 침묵을 깼다.
  허준이 돌아오기까지 상화가 안채에서 차려온 저녁상을 들고 유의태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왔고 그 상화뿐 아니라 허준의 처방전이라는 것에 불같은 호기심을 지닌 임오근 그리고 허준의 처방지 자체보다 저들의 진급을 가로막고 있는 허준이라는 자가 유의태에게 눈알이 빠지도록 혼쭐이나 이 집에서 쫓겨나가는 현장을 지켜볼 양으로 꺽새도 영달이도 마른침을 삼키고 중문간에 몰려 서 있다가 허준을 따라 큰사랑으로 들어와 숨을 삼키던 중이었다.
  "기억납니다. 금년에 진갑을 치른 인물로 거름을 지고 개울로 건너다 넘어져 허리에 어혈이 뭉친 환자올시다."
  "의원이 하루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느냐. 다음부턴 낱낱이 적도록 하거라. 특히 병자의 나이를 빠뜨린 건 처방지일 수 없다."
  '다음부터?'
  책상이 걷어채며 처방지로 허준의 얼굴을 후려칠 걸 기대하던 꺽새와 영달이 자기 귀를 의심했다.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유의태를 쳐다보았다.
  "명심하겠습니다."
  다시 서너 장의 처방지가 지나가고 유의태가 마지막 처방지를 들어 눈살을 모으며 촛불 가까이 비춰들었다.
  "이건 소갈병자가 아니냐?"
  "그러했습니다."
  "팔미원에 오미자를 가해? 네가.지어주었느냐?"
  "집안에 약이 있을 리 없사와 처방만 일러주었습니다."
  "소갈을 앓는 이들의 오줌은 달다. 그 맛이 왜 단지 알고 있느냐. 약을 적어주었으면 내용도 모른다 할 수 없을 터이다."
  허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내용도 모르면서 약을 지시해주었단 말이냐! 소갈병자의 오줌이 단 이유를 아느냐 모르느냐!"

    7
  유의태의 눈이 허준에게 불화살처럼 꽂혀 있었다. 그 눈은 좀전 다음부터는 처방지에 병자의 나이를 빠뜨리지 말라던 그 온화한 눈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혹은 무서워하고 혹은 정나미 떨어져 하는 그 냉엄한 눈이었다.
  "소갈병을 앓는 병자의 소피가 맛이 단 이유를 아느냐 모르느냐?"
  허준이 필사적으로 기억을 짜냈다.
  "소갈병을 앓는 이의 오줌이 단맛이 나는 것은 신이 허한 까닭올시다."
  "그리고!"
  "사람의 입 속에 들어간 음식은 위 속에 들어가 모두 단맛으로 변하는데 그것들이 방광으로 흘러내려가면 요와 신의 기가 성해져서 그 훈기의 더운 기운은 정기로 변하여 골수로 들어가며 남은 기운이 기름이 되고 그 기름의 알짜들이 피와 살로 보태지며 그 나머지들이 오줌이 핍니다."
  "또!"
  "하여 오줌의 빛이 누런 것은 피의 나머지이기 때문인데 만일 요와 신이 허하고 냉하면 처음부터 음식을 쪄내지 못하여 곡기의 단맛이 그대로 오줌 속에 섞여 내리기 때문올시다."
  "또 ..."
  "하여 소갈병자의 오줌빛은 맑고 냉하며 음식을 취하되 영양을 거르지 못한 채 병자는 날로 살이 마르게 됩니다."
  "한 가지 또 있다. 소갈병자는 각기와 병인은 같은 것인데 그 증세는 상반된다. 네가 능히 소갈병과 각기병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느냐?"
  "각기병 또한 소갈과 같이 신허로 말미암은 병이긴 하나."
  "병세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는 게다."
  방문 밖에서 허준이 담아온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다. 허준의 눈앞에 아이들이 서로 귀여워 앙탈하던 모습이 비껴갔다.
  "소갈과 각기의 모든 원인은 신허에서 오는 것이나 그 병증은 반대되는데 각기는 해동하는 2, 3월에 시발하고 5, 6월에 성하며 7, 8월에 쇠하는 것이 특징이며,"
  " ..."
  "소갈은 7, 8월께에 시발하기 쉬우며 11, 12월에 성하여 2, 3월에 쇠하는 것이 차이올시다."
  "그 원인."
  유의태가 가차없는 어조로 채근했다.
  방안의 분위기가 답답한지 중도에 자기 방으로 건너갔던 도지의 목소리가 방문 밖에 다가서며 "아버님" 하고 불렀다. 그러나 유의태의 눈은 계속 허준을 향하고 있었다.
  강아지가 또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다.
  허준이 유의태에게 대항하듯 무엄한 눈을 떴다.
  날이 밝으면 툇마루 아래 없어진 강아지를 보고 소스라칠 겸이와 아마도 울음을 터뜨릴 딸 숙영이의 모습이 비껴가고 있었다.
  "그 원인은?" 하고 허준이 그 유의태를 바라보았다.
  " ...?"
  "그 원인은 대개 각기병은 굳어지는 병이요 소갈은 허물어지는 병으로서 봄 여름에는 양기가 상승하는 고로 굳어지는 병이 발하면 풀어지는 병은 낫고 가을과 겨울은 양기가 하강하는 까닭에 풀어지는 병이 발하면 굳어지는 병이 낫습니다."
  유의태의 표정에는 가타부타 변화가 없었고 허준의 이마에는 진땀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만하면 네가 제법 그 동안 노심초사한 흔적이 보인다."
  모두가 놀랐다. 그건 지금까지 아무도 스승으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유의태가 제자에게 한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걸 깨닫자 불시에 허준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유의태! 이 유의태에게 얼마만에 들어보는 칭찬인가 ...
  "내 너에게 하나만 더 물으리라."
  허준의 발치에 눈물이 한 방을 떨어지고 있었다.
  "소갈병의 통치약엔 그 증상에 따라 수십 종 약이 있는데 팔미원에 오미자를 굳이 지시한 건 무슨 까닭이더냐?"
  "생활이 곤궁해 보이는 병자였기로 구하기 쉽고 값싼 것을 권했습니다."
  "소갈병에 꼭 삼가야 할 세 가지 금기도 일러주었느냐?"
  또 한번 아버지를 부르던 도지가 방안에 들어와 서며 허준의 붉게 젖어 있는 눈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일러주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말 일, 힘든 일과 색을 삼가는 일, 그리고 짠 음식과 밀가루 음식을 삼간다면 스스로 병의 반은 고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가려야 할 음식 중에 한 가지 더 있느니라. 아느냐?"
  " ... 모르옵니다."
  "기름진 음식을 삼가는 외 방초와 석약은 먹지 못한다."
  "석약이라 하오면 광물질로 된 약을 말씀하시오니까?"
  "그러니라."
  처음으로 유의태의 표정이 부드러웠다.
  "하오면 방초라 함은 어떤 약을 이르옵니까?"
  "모른다 하여 어찌 다 물어보려 하노 ... 알고자 하거든 스스로 애써 찾을 일이어늘!"
  유의태가 허준의 젖은 눈을 무시하고 다시 차가운 눈으로 바뀌고 있었다.
  "물러가거라."
  유의태가 명령했고 꺽새와 영달이 후두둑 일어섰다.
  그 속에서 허준이 유의태에게 절을 드렸다. 그 허준의 절이 끝나기 전이었다. 종전까지 재처 부른 아들을 유의태가 돌아보았다.
  "웬 거지 같은 자가 허락도 없이 중문가지 찾아들어 아버님의 함자를 함부로 입에 올립니다."
  "누구라더냐?"
  "어디서 왔느냐 물어도 대답도 않고 괴나리봇짐에 서너 켤레 미투리를 매단 품하며 멀리서 온 자임엔 틀림없는데 성명이 안광익이라 합니다."
  "안광익?"
  유의태의 눈이 번쩍 들렸다.
  순간 무심코 문지방을 넘던 허준도 굳어졌다.
  '안광익?'
  "다리를 절더냐?"
  "그렇습니다. 아는 사람이옵니까?"
  이미 일어선 유의태가 급히 나갔다.
  도지가 멍해졌고 뒤따라 허준도 나갔다.
  방문 밖에 나선 허준의 눈에 밤눈에도 장한인 사내가 낡은 방갓을 쓰고 굵은 지팡이를 짚은 채 중문 안에 서 있었다.
  유의태가 소리쳤다.
  "광익인가!"
  장한이 천천히 방갓을 벗어들더니 대답 대신 수염투성이 얼굴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냈다. 웃는 것 같았다.
  "맞소. 안광익이오이다. 벗님은 별래무양하시오."
  대답 대신 유의태가 마당으로 뛰어내려 달려가 그 장한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 사람!"
  유의태의 입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감격 어린 한마디가 튀어나왔고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안광익, 일찍이 사람의 오장육부를 보고자 백정 마을을 찾아가 낱의 무덤을 파헤친 그 안광익인가, 동명이인인가?
  "얼굴 좀 보세."
  유의태가 장한을 사랑 불 앞으로 끌어들이며 또 소리쳤고 이어 자기보다 배나 될 사내를 쓸어안았다.
  그 광경을 영달, 꺽새들도 도지도 보고 있었고 허준 자신도 불 앞으로 달려갈 듯이 그 장한을 보고 있었다.
  기골이 큰 신체에 광대뼈가 불어져나온 얼굴하며 털북숭이 얼굴이 흡사 산적 같은 인상의 사내였다.
  산적이 따로 인상이 있으랴만 비록 다리도 절고 있었으나 범상한 인상은 아니었다.
  "죽은 줄 알고 있었네."
  유의태가 말했고.
  "밤마다 죽었다가 아침마다 살아나네."
  사내가 고승의 법언같이 알쏭달쏭한 대꾸를 하고 웃음을 물었다.
  "저지난해 삼적한테 직처가 내의원에서 왕비궁으로 옮겼단 소릴 들었네만 ..."
  "그 중놈은 여직 벗님한테 오락가락하나 보군."
  사내가 메기 같은 입으로 하하 웃었다.
  그 사내를 유의태가 자기 방으로 끌다시피 하여 올라가고 방문이 닫혔다.
  이미 흥미 없어진 영달과 꺽새와 임오근은 방으로 사라졌고 도지도 허준에게 "강아질랑 도로 가지고 가게." 하며 중문 밖으로 사라졌다.
  하나 허준은 강아지보다 사내가 벗어던져 놓은 마루 위의 해진 방갓과 방안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구일서의 말론 안광익이란 인물이 다리를 전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 그럼 정말 동명이인인가?'
  "어디서 오는 길인가?"
  마주 앉은 듯한 분위기 속에서 유의태가 조금 가라앉은 소리로 묻는 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
  허준이 귀를 바싹 세웠다.
  "한데 천하의 왕비궁 의원의 이 행색이 뭔가. 그리고 어딜 어찌 달려왔기에 다리는 저는가?"
  "당장 배가 고프오. 시간이 뭣한 시간이오만 사흘째 창자를 채우지 못했소."
  "알았네."
  이어 방문 밖으로 유의태의 소리가 커다랗게 넘어왔다.
  "밖에 누구 없느냐?"
  허준이 얼른 강아지를 들며 대답했다.
  "소인 여기 있습니다."
  "안채 아이를 깨워 먹고 마실 걸 장만하라 이르거라."
  "예."
  허준이 움직이는데 다시 사내의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방도 하나 치워주오, 여자가 있을 방을."
  "여자라니?"
  "함께 온 여자가 문 밖에 기다리기에. 까닭이야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고."
  곧 방문이 열리고 유의태가 나왔다.
  중문간으로 향하던 허준이 돌아보자,
  "내 잠시 안채에 건너간다 일러라."
  허준이 허리 굽혀 대답한 후 중문을 나서는데 임오근, 도지가 함께 장옷으로 잔뜩 얼굴을 가린 여인을 데리고 들어서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사흘 굶은 남자와 동행한 여자치고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고 눈매가 고운 여자였다.

    8
  안광익이가 데려온 여인을 자기 아내를 시켜 안채로 인도해 보낸 도지가 다시 안채 하녀들에게 주안상을 들려 큰사랑으로 건너오자 그사이 안광익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유의태의 방 앞을 서성이던 허준은 도지를 거드는 형국으로 얼른 하녀가 들고 온 두 개의 술병을 받아들고 도지를 따라 유의태의 방으로 따라들어갔다.
  그 방안에는 몸에 걸치고 나타난 땟국이 꾀죄죄한 자기의 옷가지들을 윗목에 벗어던진 안광익이 마치 자기의 집인 양 횃대에 걸려 있던 유의태의 새 옷을 털북숭이 몸에 꿰입은 채 사뭇 느긋한 얼굴로 아랫목 차지를 하고 앉아 있었다.
  사람의 오장육부 그 생김새를 들여다보겠노라 턱도 없이 남의 집 무덤 속 송장을 캐내는 것도 불사할 만큼 의술에 그토록 집념 어린 사내!
  그 하수인이 되어 구일서, 아니 변돌석이를 오늘의 운명으로 떨군 수범인 사내가 허준의 눈앞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하긴 그건 미리서 점쳐볼 수 없는 뭇 인간들의 현란한 운명의 개막일 것이었다.
  이 수수께끼의 사내 안광익.
  만일 변돌석이 이 안광익을 만나지 않았거나 만났다 한들 저 굴총사건에 가담만 하지 않았다면 비록 백정이라는 천업에 매여서일망정 변돌석이의 일생은 새여울의 백정마을에서 평화로웠을 것이다.
  적어도 변돌석으로 하여금 뒷날(선조 22년, 1589년) 이른바 정여립의 모반거병에 적극 호응한 민란 주동자로서의 그의 운명이 마련되지는 아니했을 것이기에 ...
  물론 허준인들 먼 훗날 자신에게 끼쳐올 그 운명의 소용돌이를 미리 넘볼 수는 없었으리. 자신과 가족을 이 산청에 안주케 한 은인이며 형제와 같았던 변돌석을 이 광명천지에서 원양의 고도로 쫓겨가게 한 그 타인의 운명쯤 지금의 안광익은 도시 아랑곳없는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 안광익은 다시 아무리 보아도 도시 의원 같지가 않았다.
  타인의 생명이나 병고에 연민을 느끼는 그런 지적인 우수의 그림자는커녕 대장간 뜨거운 풀무 앞에서 윗도리 벗어부치고 쇠망치를 휘두르는 오로지 완력에나 의지하는 그런 무지한 사내 같았다.
  한가지 그 이상하게 이글거리는 뜨거운 눈빛만 뺀다면 ...
  "이 밤중에 얼렁뚱땅 차린 상이 이 정돈 걸 보니 제법 돈냥깨나 쌓아놓고 사는 형편 같으이, 핫핫. 우리 두 목숨 2, 3년 파먹고 있어도 속탈이 없겠는걸, 핫핫 ..."
  딴때없이 유의태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그를 만난 기쁨과 그를 감싸려는 우정이 넘친 눈이었다.
  "인사 올리거라. 내 미거한 자식일세." 하며 도지를 눈짓했다.
  도지가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굽혔다.
  "선성은 익히 들었사옵니다. 아까는 창졸간이오라 미처 못 알아 뵌 걸 용서하소서 ... 도지라 부르옵니다."
  "애비는 상것인데 자식은 양반네 말투를 닳았군, 핫핫. 누구의 훈돈가?"
  안광익의 거침없는 말에 유의태는 개의함이 없이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내 이름을 이미 듣고 있다니 어디서 누구에게."
  "아버님께올시다."
  유의태가 부연했다.
  "삼적 그 사람이 찾아와 더러 그대 얘길 나눌 때 술상머리 시중을 들다가 이름을 들었다는 말이겠지."
  "그래 핫핫."
  웃는 안광익의 치아가 쥐이빨처럼 작고 가지런했다.
  "소인은 허준이라 하옵니다. 의술을 배우고자 이 댁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안광익은 그런 두 사람쯤은 안중에 없는 듯이, "수고했네. 따라먹는 거야 우리가 할 테니 가서들 쉬게." 하며 술상머리에 다가앉았다.
  "됐다. 더 부를 일 없을 테니 한잔 따라올리고 물러가 쉬어라."
  도지가 다시 무릎을 꿇어 공손하게 술을 쳤으나 술잔만 내민 채 안광익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래, 한양 떠난 건 언제고 내의원에 매인 사람이 어찌 예까지 내려왔나?"
  유의태가 아들이 자기 잔에도 따르는 술잔을 들며 안광익을 건너보았다.
  "얘기하면 길다고 않는가. 우선 속부터 채우고 천천히 얘기함세."
  도지가 안광익이 벗어던진 옷가지를 치켜들었고 허준도 뒤따라 방을 나오는데 그 등뒤에서 안광익의 소리가 났다.
  "안채에도 상이 하나 마련이 됐겠지?"
  "그렇게 일렀네. 참 한데 뉜가? 얼핏 보니 여염의 여자 같진 않아 뵈던데."
  "궁안에 살던 여자지."
  안광익의 대답은 간단했다.
  "궁안에 살던 여자?"
  "대궐."
  안광익의 대답은 역시 또 간단했다.
  "그럼 궁녀란 말인가?"
  "그렇게들 부르지."
  마루를 내려서던 도지와 허준이 방쪽을 향해 멈칫 섰다.
  "놀라긴 왜 ? 잔이나 비우게."
  안광익의 음성이었고.
  "내 알기 궁녀라면 궁밖 출입은 금기일 터인데 어찌 그런 여자를 함부로 데리고 예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인가?"
  "한 여자 살리는 셈치고 데리고 나왔어."
  "살리는 셈치고?"
  "사람의 모습이란 게 둘밖에 더 있는가? 살았든가, 죽었든가 핫핫,"
  "금부의 눈을 피해서 데리고 나왔다는 말처럼 들리네만?"
  "대궐담을 넘었지."
  "무어라? 대귈담을 넘어?"
  "상궁이 웃전의 영 없이 세상 구경을 하려면 대궐담을 넘는 길밖에 없잖은가?"
  도지의 눈이 휘둥그래 있었다. 허준도 못박힌 채였다.
  닫혀 있는 유의태의 방안에서 알지 못할 찬바람이 느껴졌다.
  유의태의 조용한 음성이 들렸다.
  "안 그래도 삼적이 날 만날 적이면 자네 얘길 하네. 도시 자넨 평소의 언동이 과격하다고 말일세. 취재 거쳐 내의원에 들어간 건 의원으로서일 터인데 쓰잘데없는 소릴 자주 떠든다고."
  "그래서 그놈은 나한테 연루되어 제 명만큼 못 살까 봐 남 먼저 내의원을 뛰쳐나왔던가?"
  침묵 끝에 유의태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나왔다.
  "이 세상 그댈 아끼는 건 나보담도 민세(김민세: 삼적대사의 속명) 그 사람일세."
  "제 성명 젖혀놓고 가명 쓰고 다니는 자를 난 우습게 알지."
  "삼적이란 김민세의 가명이 아니고 법명일세."
  "세상 숨어 살기엔 편리한 방법이지, 핫핫."
  "민세가 세상 숨어살 까닭이 뭐 있는데?"
  "하긴 그잔 부처에게 미친 자니 더불어 세상일을 의논할 상대도 못되지, 훗훗."
  "자네가 말하는 세상 일이란 건 나도 관심 없네."
  "알고 있어."
  "내가 관심하는 건 자네의 의원으로서의 재줄세"
  "그것도 알고 있고, 핫핫."
  안광익의 그 호탕한 웃음소리가 돌연 삼켜지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도지도 허준도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그 내다보는 안광익의 이글거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가서들 자지."
  쏘듯이 건너보던 그 눈이 꺼낸 소리는 조용했다.
  도지와 허준이 당황하여 허리를 굽혀 보이고 큰사랑 밖으로 사라져서야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광익의 눈이 다시 방안으로 사라지며 방문이 닫혔다.
  그러자 도지가 문득 피식 웃었다.
  " ...?"
  "하여튼 우스운 사람들이야. 상것이 됐건 무슨 것이 됐건 의원의 체면 세상 거리낄 게 없는데 아버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으레 비분강개조가 많아 신분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설익은 선비가 저 안 알아주는 걸 세상 탓으로만 돌리는 것처럼 말일세."
  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광익이란 인물이 뿜어내는 스승 유의태와는 또 다른 알지 못할 박력이 자신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세상의 생김새에 대해 어떤 충격처럼 그의 가슴에 와닿고 있었다.
  '좀더 알아보리라. 안광익이라는 인물에 관해 좀더 알아보리라.'
  애타게 기다리던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새벽이 가까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허준이 거푸 마음속에 뇌었다.

    9
  그날 허준 일가에는 밤이 깊도록 웃음과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스승 몰래 의원 행세를 한 사실이 드러난 이상 더구나 제자들에겐 일호의 사정도 두지 않는 냉엄한 유의태로부터 아들이 파문을 당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가슴 죄던 어머니와 아내는 허준으로부터 스승 유의태가 자기가 의원 행세한 행위 따위는 한마디 문책도 없었다는 것과 오히려 자기가 병자들에게 적어준 처방전의 내용을 보고 격려의 말을 하시더라는 것과 또 스승이 물어오는 난문에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여 스승의 눈속에 괸 흡족한 눈빛을 보았다는 얘기를 하자 감격한 손씨가 와락 아들의 손을 잡고 울음을 울었다.
  그후 자기들 방으로 돌아온 뒤 아내 또한 남편에게 그 유의태와 대좌했던 장면들을 재삼재사 캐물으며 일면 미소짓고 일면 눈물지었다.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다더니 정말정말 감축하옵니다."
  허준이 그 아내의 눈속에 일렁이는 눈물을 보며 삯바느질로 구덕살이 배긴 작은 손을 잡아주었다.
  "그 격려의 말씀은 스승님이 문도들 아무에게나 내리는 그런 흔한 것이라곤 생각지 않소만, 하나."
  "무엇이옵니까?"
  " ..."
  "생각하면 명색이 가장인 내가 6, 7년씩 가사를 돌봄이 없이 마음놓고 의서에 파묻히고 그 집 문도로서의 일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도 어머님이시려니와 어렵사리 집안을 건사해준 당신의 덕인 줄 아오."
  "저로서는 고생이라 여긴 적 없습니다. 어머님에서야 몸이 성치 않으신 날에도 몸 괴로우신 것 애써 감추시며 추우나 더우나 떡목판 이고 다니시며 저희가 짐작 못할 고생들이 오죽하셨을까요."
  " ..."
  "하지만 저야 집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침선에나 매달린 일뿐인데 어찌 어머님 고생과 견주옵니까."
  허준의 코끝이 찡 울려왔다.
  그 동안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아내에 얽힌 사연을 보고도 못본 체 지나쳐야 했던 가난에 전 일들이 새삼 소리내어 눈앞을 어른거리고 있었다.
  지난해 어느날이던가 ...
  10년 작정하고 유의태의 문하에 버터보리라 챘으나 3, 5년 거들떠보아 주지 않는 유의태에게 원망을 키우며 의원에도 나가지 않고 병을 칭탁해 자기 방에 누워 있었던 적이 있었다.
  마침 아내는 품을 받은 통지기네 딸 혼수감 옷들을 끝내고 그걸 전해주러 가 집에는 여섯 살박이 겸이 녀석뿐이었다.
  그 아들 또한 근래 웃음을 잃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천자문을 웅얼거리고 있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집안은 8월의 늦더위에 매미소리만 소란스러웠다.
  그때 문득 집안에 인기척을 느끼고 허준이 바깥마당을 나갔을 때였다.
  그 허준의 눈에 뛴 것은 행상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장독대 앞에서 냉수에 간장을 풀어 요기삼아 마시고 있는 모습이었다.
  허준은 그때의 그 처절했던 심정을 잊지 못했다.
  어른도 아이도 으레 점심은 거르는 생활이었다. 또 저녁은 죽을 쑤어 먹을 수밖에 더 이상의 호사는 있을 수 없도록 떡 행상과 삯바느질로 꾸리는 살림은 셈이 펼 날이 없었다.
  꿈이 있는 어른들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고생이라 할지라도 여섯 살박이 아들과 세 살짜리 숙영은 날로 계속되는 조식과 허기에 물배만 늘어 앙상한 어깻죽지에 배만 빵그라니 튀어나온 처참한 몰골이 되어 눈비가 쏟아져 할머니가 떡을 다 못 팔고.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한 뼘 곡식을 심을 땅뙈기가 있는 것도 아니요 아내의 삯바느질품인들 달이면 달마다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크지도 않은 고을에 지체 있는 집안에서는 며느리며 딸네들이 웬만한 옷은 지어 입기 마련이고 아내에게 삯바느질을 시켜오는 집들은 한정돼 있었다.
  하여 허준에게는 비밀로 하는 눈치였으나 아내는 언제부턴가 잔칫집을 찾아가 음식 만드는 것을 거들며 남은 음식들을 품삯 대신 싸오곤 했고, 별식을 기다리는 아이들은 때도 없이 제 어미에게 잔칫집에 가길 졸랐다.
  그러나 아이들이 기다리는 잔칫집도 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있을 리 없었고 잔칫집이라 한들 타잔에서 흘러온 허준 일가에게 다정히 불러주는 것도 아니었다.
  '삯바느질집' '떡장수집'으로 불리면서 아내는 남편의 눈을 피해 그 여린 몸으로 농사철의 몸품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내는 반가의 여자였다. 지난날 양반의 딸이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선 몸을 사리지 않고 그 노동을 견디곤 했다.
  그런 그녀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필사적인 몸짓이었고 남편을 위해서라는 인고의 받침대가 없었던들 단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나날이었다.
  그 증거로 어느날인간 아내는 그 체력의 한계의 갈림길에서 새벽 물 길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가 그토록 아끼는 물동이와 함께 쓰러져 반 식경이나 정신을 되살리지 못했던 사건이 있었던 것도 겸이 녀석의 고자질로 알게 된 바였다.
  그러나 허준은 그런 밤이면 아내를 조용히 쓸어안았을 뿐 힘든 일을 하지 말아라 어쩌라 말리려곤 않았다.
  그런 아내의 고생, 어머니의 고생을 지켜보면서 자칫 자기 또한 무너지려는 의원으로서 입지의 의지를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허준은 그 아내가 겪은 더 심한 굴욕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있었다. 누가 퍼뜨린 악담인지 몰랐으나 이웃 마을의 여자들은 저희들과 언동이 틀리는 아내를 두고 평안도 어디 역참에서 공무로 오가는 관리들의 잠자리 시중을 들던 관기 출신의 여자노라 소문을 냈다.
  그건 화장기 없고 해져 기운 옷을 입어도 아름다운 그녀의 미모를 질시하는 누군가의 악의에 찬 상상일 테지만 아무튼 아내에게 얽힌 그 터무니없는 풍문으로 하여 공연히 고개를 돌리고 침을 내뱉는 사내며 또는 불쑥 길을 가로막고 더럽고 허잡스러운 말로 유혹의 말을 던져오는 사내 들도 있음을, 그건 같은 유의태 문하에 막내로 입문한 상화가 우연히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는 귀띔으로 알고 있었다.
  참고 있던 허준도 그 소문만은 견딜 수가 없어 그날 밤 아내를 잡고 그 자가 어디 사는 누군가고 다그쳤으나 아내는 조용히 미소지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런 소문 이후 아내는 삽짝 밖을 나설 때는 늘 으레 숙영이를 업거나 겸이를 앞장세워 데리고 다니는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걸 보았고 그런 세상 인심을 향해 분노와 절망을 느끼는 건 허준 쪽이었고 정작 아내는 세상을 향해 꾸준히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 아내의 새 희망을 아내와 아들의 대화에서 보고 가슴 뜨끔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지난해 여름의 일이었다.
  세상은 날이 가물어 파종한 논농사를 온통 밭작물로 바꾸는 등 근년에 없던 흉년이 예상되어 인심이 소연했다.
  마을 생기고 한번도 마른 적이 없다던 마을 앞 공동우물도 바닥을 드러냈고 식수를 찾아 사람들은 읍내에서 동으로 5리 떨어진 수다곡까지 이른 새벽 열을 지어 물동이의 행렬을 짓곤 했다. 식수까지 말려버린 하늘을 향해 성급한 사람들은 천지개벽이라며 두려워했다. 그런 혹독한 가뭄 끝에 장마가 갑자기 닥쳤다.
  앞내에 물이 넘치고 제방이 무너지고 산사태가 나고 갑자기 세상은 또 물난리에 허우적거리며 하늘을 원망했다. 하나 그런 어른들의 세상에 끼여들 이유도 없는 아이들은 모처럼 앞내를 가득 메우며 흘러가는 흙탕물 속에서 미꾸라지를 잡네 고기를 잡네 하여 개울섶이 시끌벅적했다.
  그 동무들의 고기잡이에 끼여 겸이 녀석도 풀섶을 밟아대며 희희낙락하는 중에 방해가 된다며 물방앗간집 절름발이 머슴놈의 우악스런 손찌검을 맞고 개울물 속에 나자빠진 것이다.
  흙탕물을 켜고 일어난 겸이는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고도 분이 남아 이미 쳐다보지도 않는 그 머슴을 향해 '별 진 잘 숙'할 그의 불구의 다리를 놀려대며 내뺐고 자기의 병신 된 몸을 놀림을 받자 머슴은 반두를 내던지고 그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겸이를 향해 쫓았고 그런 시각에야 아들이 안 보이는 걸 발견한 아내가 물이 불어난 냇가로 쫓아나오다가 마악 도망쳐오는 아들을 쓸어안은 것이다.
  토박이 동리 사람들에게야 이놈 저놈 하대를 받는 데 익숙해 있어도 그 머슴의 눈에 비치는 타관서 흘러온 떡장수집 삯바늘집 식구 따위는 별것 아닌 존재들이었다.
  가로막는 허준의 아내에게 되알진 욕을 내뱉고 돌아서 갔고 그러자 갑자기 겸이가 울움을 터뜨리며 떼를 쓰는 것이었다.
  난 저놈들과 놀기 싫으니 나도 고기 잡는 그물을 사주든가 또 그 눈에는 그게 무척이나 부러웠던 듯 동리 몇 집 아이들의 경우처럼 자기도 소 먹이는 일을 하고 싶으니 송아지 한 마리를 사내라는 억지였다.
  그 아들을 달래며 집안으로 들어서며 하던 아내의 말을 허준은 그때 들었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고기 잡고 소먹이는 일보다 훨씬 재미난 데로 널 보내줄 테니." 했고.
  "그곳이 어디요?" 하고 아들이 묻자 아내는 희망에 차서 아들의 귓가에 들려주었다.
  "서당이야. 집안 형편 조금만 피면 꼭 보내주려 언제 적부터 마음먹고 있었던걸."
  울음을 뚝 그친 겸이가 희망에 반짝대는 눈을 하고 소리치듯 되물었다.
  "참말 서당에 보내주십니까, 참말이지요."
  말끝에 아버지를 발견한 아들이 그 아버지를 향해서도 다짐받으려 했다.
  "아버님, 저를 정말 서당에 보내주시는 거지요 예, 아버님?"

    10
  지난날의 그 기억들.
  그때 허준은 서당에 보내줄 것을 거듭거듭 조르는 여섯 살박이 아들에게 대답도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겸이 녀석은 제가 멀잖아 양반집 아들처럼 고운 옷 입고 서당에 다닐 것이라고 확신한 것 같았으며 그래서 이를 마을의 제 또래 동무들에게 자랑스레 선전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 마을 동무들은 그런 겸이를 오히려 이단시하여 겸이를 더욱 따돌려놓는 결과를 낳았다.
  그 외로운 겸이가 맨처음 다닌 서당은 윗마을 제법 양반댁 기와집이 서너 채 몰려 있는 밤골이라는 동리였다.
  그 계기는 그 마을의 제일 큰 어른인 박초시댁 노마님이 자기의 두루마기를 삯바느질했던 허준의 아내에게 지어온 옷에 대한 솜씨 칭찬을 해준 후 마침 데리고 온 숙영이의 마른버짐이 핀 얼굴을 가엾이 보았던지 아랫것들 시켜 어린것이 군것질할 걸 내오게 한 후 아내에게 이것저것 정다운 말을 걸어준 것이다.
  이에 아까부터 사랑 쪽에서 동리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에 정신을 팔고 있던 아내가 노마님의 후덕한 인정에 기대어 자기의 아이도 오가며 글을 배울 수 없겠는지를 간청드린 것이다.
  이에 노마님의 바깥어른인 평생 초시(일명 향시로 복시에 응시할 자격자를 뽑는 과거의 제1차 시험)로 그쳤던 늙은 영감마님이 파적삼아 문중의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 서당 아닌 서당에 겸이가 끼인 것이다.
  하나 '서당'에 다니는 소원을 이루었으나 처음 의기양양 오가던 겸이는 점점 열성이 식더니 마침내 다른 서당으로 보내주길 조르기 시작했다.
  이유를 물어보니 서당 아이들이 어느새 소문이 나 떡장수의 아들이라는 겸이를 얕잡아 툭하면 쥐어박고 신발짝을 감추는 등 괴롭힌다는 것이었다.
  이에 아내는 심술맞은 서당아이들을 달래는 방편이 될까 하여 아이들 숫자대로 엿을 사서 겸이에게 들려보내 서로 친구가 되도록 달래도 보고 손씨는 손씨대로 매일 서당에까지 그 손자를 데리고 나가 아이들과 나눠먹으라며 떡을 싸주기도 했으나 그로서 겸이의 외로움은 해결이 나지 않
았다.
  오히려 녀석들은 겸이가 할머니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나타나기를 대문 안에서부터 기다렸다가 떡을 더 가져오너라, 오늘은 왜 엿을 안 가져왔느냐며 윽박질렀다.
  결국 그 등쌀 속에서 겸이의 코가 터지고 옷이 찢기며 혹은 짚신 한쪽을 잃어버린 채 도망쳐오는 빈도가 많아지며 겸이의 짧은 서당생활은 끝나버린 것이다.
  어머니도 아내도 아들에게 있은 그 사건들을 굳이 허준에게 고하지 않았으나 서당에 다니노라 우쭐거리던 아들이 어느날서부턴가 시무룩하니 집안에 남아 턱도 없이 동생을 울리고 동리 상것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것을 보면서 어느날 허준은 아들을 데리고 함께 소세하러 간 개울가에서 그 '서당사건'을 알았었다. 그 울먹이는 아들의 슬픔을 허준은 달래지 않았다.
  달래서 될 일도 아니었다.
  글을 배워도 소용이 없는 신분인 것을 여섯 살짜리 아들에게 이해시킬 방법은 없었다. 또 서당에서 의기투합하는 친구를 사귄다 한들 그 우정 또한 서로의 신분이 달라 중도 이별로 끝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여섯 살짜리 어린 아들이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날 허준이 그 아들의 눈물을 그치게 한 말은 언젠가 집에 외양간도 짓고 꼭 송아지 한 마리를 사주리라는 약속이었다.
  그리고 좋아 깡충거리며 집으로 달려가는 아들의 조그마한 뒷모습을 보면서 그 갯가 수양버들에 머리를 처박고 허준이 혼자 황소 같은 울음을 터뜨린 건 아들도 아내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미 새벽이었다.
  허준이 비몽사몽간에 안광익의 안광이 뇌리에 보여 잠을 깼다.
  첫닭이 우는 걸로 보아 이제 의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었다. 병사에 있는 병자들의 용태를 살피는 건 임오근의 소임이었으나 간을 앓는 병자 중 그 병세의 추이를 허준이 개인적으로 관심할 이가 있기도 했고 밝은 날 안광익의 모습을 더 좀 자세히 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때 잠든 줄 알았던 아내가 나직이 말을 걸어왔다.
  "왜 잠을 이루지 못하시옵니까?"
  "난 한숨 잤소. 왜 깼소?"
  아내가 허준의 맨가슴 속에서 머리카락을 쓸었다.
  "제가 한껏 게으른 여자입지요?"
  "무슨 소리요? 당신이 왜 게으르단 말이오."
  "남의 아내가 되어 새벽 머리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는 건 서방님께 미움받는 일이라는데 이러고 있는 걸 보면요."
  허준이 어둠 속에서 미소지었다.
  '부스러지지 않는 여자 ...'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된 오늘까지도 남편의 시선 앞에서 한번도 방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는 아내였다.
  부부생활 7년 ... 그 세월을 여자와 남자로 살면서 알몸이 되어 서로를 탐하는 적이 많았다. 그러나 아내는 서로의 체위가 갈라진 후에도 남편의 눈앞으로 불쑥불쑥 알몸을 내비치는 행동은 삼갔다. 그대로 그렇게 남편의 가슴에 안겨 남편의 숨이 가라앉고 잠이 든 걸 확인한 후에야 부끄러움 담아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다시 남편의 곁에 눕곤 했다.
  그런 깍듯한 몸가짐새는 시어머니의 봉양에서도 그랬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겸상을 종용해도 자신의 밥그릇은 상 아래 놓고 가족들의 식사가 끝나기까지 시중드는 것을 지켰다.
  밑반찬 두어 가지, 그리곤 으레 나물국과 죽 혹은 잡곡밥인, 분주할 것 하나도 없는 식사인데도 그녀는 그녀가 배운 여자의 태도에서 벗어나려 않았다.
  '부스러지지 않는 여자 ...'
  허준은 그 아내를 사랑했다. 그런 비유를 하면서도 허준은 아이들보다 아내의 건강을 더욱 염려했다.
  아내가 입을 열었다.
  "잠이 다 깨셨습니까?"
  "곧 가봐야지, 왜 그러오?"
  "가시기 전 한가지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하오."
  "겸이를 다시 서당에 보내려고 합니다."
  " ...?"
  서당이라는 말에서부터 허준의 가슴이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 ..."
  대답없는 남편에게 아내가 속삭였다.
  "겸이의 나이 이젠 일곱 살올시다."
  허준은 그래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 여잔 모르리라. 겸이의 서당 문제로 하여 냇가 버들가지에 이마를 처박고 통곡해 울어야 했던 내 심정을 ...'
  "고산성 가는 쪽 지릴 잘 아시옵니까?"
  "잘은 모르나 몇 번 오가긴 한 길이오. 한데?"
  "거기 하풍이라는 마을에 조그만 서당이 있답니다. 양반자제들이 모이는 그런 격이 높은 서당은 아니고 중인 지체의 집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는데 학자는 한 철에 보리 너 말을 내면 된다 합니다."
  허준이 모두 듣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좀은 이른 시각이나 의원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말문이 막힐 듯하던 아내가 마저 얘기를 했다.
  "고산성이래야 겨우 5리 길올시다. 크게 먼 길도 아니오니 허락해주소서."
  아내는 환하게 웃으려 하고 있었다.
  허준이 대님을 매다가 돌아보았다.
  "새삼 왜 서당 얘기가 나와야 하오?"
  "새삼이라니요?"
  "전 자나깨나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난 안 했소."
  "지체있는 집안에서는 아이들 나이 다섯 살에 접어들 때면 벌써 천자문을 가르칩니다. 하나 경이의 나이 이미 ..."
  "맞소. 하나 그건 나 같은 신분에서 태어난 자식의 얘기가 아니라 당신 말대로 지체가 있는 집안의 풍속이겠지."
  아내는 곧 남편의 말귀를 알아들은 듯했다. 슬픈 얼굴이 되었다.
  "보내지 않도록 하오." 하고 허준이 말했다.
  " ..."
  "만일 서당에 보냈다가 겸이가 그저 문리나 트고 기성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참말 공부에 재미를 들이면 어쩔 셈이오?"
  " ... 압니다. 그러나!"
  "서운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오. 어차피 우리 신분으로는 글을 많이 배울수록 종당에는 눈물을 더 짜야 돼. 그냥 눈물도 아니고 피눈물을 말이오."
  " ..."
  "그런 경험은 나 하나로 됐잖소. 자식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소."
  "서방님 말씀은 짐작합니다. 하지만 자식들에게 눈은 터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눈은 지금 저대로면 충분하오 ... 겸이는 지금 잘 알고 있어. 배가 고파도 하인이 먹을 걸 대령하지도 않으며 철따라 새옷을 해입는 처지도 아니며 아비가 세상을 향해 호령하는 벼슬아치가 아니라는 것도 ..."
  "저대로 두면 까막눈올시다. 자식을 까막눈으로 키우려 하시오니까!"
  "그것이 자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그렇소."
  "전 싫습니다."
  "싫다 좋다의 문제가 아니라지 않소! 보낼 생각 마오."
  "전 보내겠습니다."
  뜻밖에 아내의 눈에 고집이 비쳤다. 마저 대님을 매던 허준의 눈도 거칠게 그 아내를 쏘아보았다.
  "철마다 보리 너 말, 그건 제가 밥을 굶어서라도 구변할 것이옵니다. 전 제 자식을 까막눈에 무지렁이로 키우진 않겠습니다. 어머님께는 제가 따로 허락을 받겠습니다."
  "난 허락 안 해!"
  "자식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려는 것이 어찌 욕심이오니까?"
  "정녕 천자문까지라고 누가 장담하리! 만일 잘못 서당에 보냈다가 천자문 뗀 후 동몽선습도 읽으려 하고 명심보감도 떼려 하고 논어, 시경도 읽고자 하면 그건 자식을 죽이는 길이오."
  "그렇기로 ..."
  아내의 눈 속에 눈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허준의 뇌리에는 과거 보러 가는 친구들을 떠나보내고 저 용천 군서산 삭풍 불어치던 봉수대에서 밤새워 방황하던 아픔들이 생생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허준이 치받아오는 뜨거운 숨을 한숨처럼 깨물며 일어섰다.
  "자식에 대해 욕심내지 마오. 기대도 말고 ... 우리 상것들에겐 금지된 일인즉."
  아내가 방바닥에 울음과 함께 무너졌다.
  방을 나온 허준이 그 아내에게 말했다.
  "될성부르지도 않는 일은 미리 끊어야 해. 그것이 겸이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오."
  아내의 오열을 뒤로 허준은 이슬이 반짝이는 새벽길로 조용히 나섰다.

    [  5. 야인 ]
    1
  "끙 ..." 하고 임오근이가 또 한번 신음소리를 틀어냈다.
  동창이 이미 훤했다.
  여느날 같으면 이미 병사를 한 바퀴 돌아보며 몇 사람 남아 있는 병자들의 용태를 간심할 시각이었다. 그러나 임오근은 목침을 세웠다 뉘었다 하며 자리에 누운 채였다.
  '허준 ...'
  자기의 소임이 아님에도 으레 새벽같이 나타나는 그의 모습에 병자들도 이젠 자기나 도지보다 허준에게 신뢰의 정을 보이는 것을 임오근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임오근은 병자의 간밤의 병세를 묻고 그 대화중에도 병자의 등을 쓸어주는 따위 '수작'은 않았다.
  허준이 약재창고로부터 병사의 근무를 명받고부터 시작된 그 풍경을 보고 임오근은 아차 했다.
  병자에 대한 그 작은 성의는 기실 병자에 대한 인심을 얻는다기보담 유의태의 눈에 들 첩경이라는 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
  하나 그걸 깨달은 뒤에도 임오근은 허준의 흉내를 내지 않았다. 허준의 그런 행동을 임오근은 동료 선배들을 젖혀놓고 저 혼자 유의태의 눈에 들고자 일부러 꾸미는 간기처럼 보았다.
  그러나 허준이 병부를 적는 솜씨며 때로 드러나는 지력이 자기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허준의 존재는 그에게 조석으로 불편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상이 어젯밤 기어이 눈앞에 나타나고 만 것이다.
  자기가 허준에 비해 8년 선배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허준보다 8년을 더 보고 배워왔다는 그 자신감이 여지없이 무너진 하루였다.
  그의 소망--
  그의 절절한 소망--
  영남 일대에 관향을 둔 내노라 하는 명문거족들로부터 보내오는 사인교를 타고 유유히 불려다니는 유의태와 같은 도도한 명의까지는 못 되더라도 제 고향 김해 그 부내에서는 임오근이란 이름 하나로 존경받는 의원이 되리라는 오직 그 소원만으로 유의태의 문하에서 14년을 버텨온 터였다.
  그리고 내심 유의태의 의발을 전수받을 사람은 스승의 아들인 도지 이외에는 자기뿐이노라 믿고 있었는데 그의 자부심과 소망은 끝장난 것이다.
  도지의 방에 의원이 되려는 자가 기필코 보아야 할 그 요긴한 서책들이 쌓여 있는 건 너나없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읽고 쓰는 데 자신이 없는 영달이나 꺽새 같은 자들은 일찌감치 포기를 했고 허준이 나타나기 전까지 그 책을 빌려보는 건 부산포와 자기뿐이었었다.
  그러나 그 부산포는 유의태의 독서량이기도 한 그 도지의 방대한 책을 다 뒤적일 의지는 애초부터 없어 보였다.
  그는 그까짓 것 모두 꿰어봤자 잡병 따위로 분주하기만 할 뿐이라며 돈이 벌리는 부인병과 소아병 쪽을 주로 뒤적이고 필요한 대목들만 베끼는 쪽이었다. 하나 그 부산포가 장쇠들과 작당, 병자의 가족들에게 잔돈푼을 뜯어쓰는 꼴을 보자 임오근은 일찌감치 부산포는 자기의 경쟁대열에서 제해에 놨었다.
  "한데, 저 허준."
  더듬거리기는 했으나 그 허준이 어젯밤 스승 유의태의 벼락치기 질문의 대목대목에 대답해간 내용들은 내가 후계자노라 여기던 임오근의 자부심을 여지없이 깨뜨린 완벽한 대답들이었다.
  '허준이 띠자가 내 앞길을 가로막았어!'
  임오근은 신음 대신 어금니를 악물었다. 허준에 대한 오기로 꼬박 밤을 지샌 그 임오근의 핏발 선 눈에 파란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의안군?" 하고 아침상을 물린 뒤부터 주안상을 명해 들인 방에서 유의태가 안광익에게 물었다.
  "금상전하의 셋째아들이지. 저경궁 인빈 김씨의 소생이시고."
  "한데?"
  "벗님 같으면 어쩌겠소? 농액(고름)이 골수에 스미고 있는데 환부를 째지 않고 어찌해."
  "그래서?"
  "한데 환자의 지체가 금지옥엽인 왕자이고 보니 송학규 이자가 차일피일 미루고 감춘 게지."
  "왕자의 병을 감추어?"
  "왕자의 병을 떠맡는다 함이 어찌 아무에게나 좀처럼 있는 기횐가. 다행히 병을 낫우면 정하고 제 이름이 드러날 기횐데 그래서 아직 덜 곪았다 아직 덜 곪았다 하며 늦춘 게야."
  "좀 알겠구먼 ... 한데 그 송학규란 뉜가?"
  "양예수의 졸개지."
  "졸개라? 하긴 전조 때부터 어의를 맡아 내려오는 양예수가 제 사람 곳곳에 박아놨음직하지. 핫핫, 그래서?"
  "하루 불려갔어."
  "송학규란 자에게?"
  "그잔 나보다 후학일세. 양예수가 부른다기에 갔어."
  "양예수와는 사이가 그만하던가?"
  "웬걸, 그자와 나하곤 또 얘기가 있지. 그 얘기부터 할까? 핫핫, 언젠가 정명공주(선조의 첫째딸)가 미령(병환이라는 뜻)할 제 저희가 받아온 처방이 내 눈에는 아니야. 그렇다고 이의를 달다가는 어의 양예수의 권위를 내리깎는 꼴이라 말없이 받아들고 와서 내 나름대로의 약재를 섞었네."
  "내의원에서 의정한 이외의 약재를 쓰는 게 발각되면 목이 다섯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렇다고 나도 내 의술이 있는데 남이 지시하는 방법대로 하긴 싫었어. 그래서 내 고집대로 했어. 마침 약국(왕실 전용 약재 출납소)에 나와 친한 인물이 있어서 다른 약을 타냈네."
  " ..."
  "해서 공주의 병을 낫웠는데 약재를 변동한 사실이 양예수의 귀에 들어가 다리가 이 꼴로 병신이 됐었지."
  "그 짓을 들키고도 다리병신 된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건 고마운 일이로군."
  "일이 밖으로 새나가 시끄러워지거나 내의원 제조(내의원을 총관리하는 명예직으로 좌의정이나 우의정 등이 겸임)의 귀에 들어가면 터져야 할 내의원 치부가 한둘인가? 그래서 쉬쉬 내의원 입들을 봉해놓고는 내 다리에다가 실컷 분풀이를 하더구만. 헛헛."
  "한데 처음 얘기한 왕자의 농부는 어찌 됐고?"
  "쨌네."
  "터뜨리지 않고 쨌단 말인가."
  "터뜨리는 구멍으로야 뼈까지 볼 수 없으니."
  "그렇기로 왕실에서 왕자의 몸에 칼을 대게 할 리는 만무일 터인데?"
  "잘 아는구먼. 핫핫 ..."
  방안의 얘기를 들으며 방밖에 서 있는 허준의 등줄기에 또 한번 소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방안에서 유의태가 탄식 같기도 하고 감동 같기도 한 한숨과 함께 다시 묻는 소리가 났다.
  "겨우 돌 지난 핏덩이에게 칼을 대 ..."
  "난 빨리 낫는 법을 택했어. 하여 독한 고름을 다 짜내고 뼈에 침식한 사기를 긁어냈지. 한데 누구의 기별을 들었는지 양예수들이 벼락같이 닥치더구먼, 송학규 등 나부랭이 서너 명을 달고서."
  "흠."
  "알고 보니 내 약함을 들고 졸졸 따라다니던 부봉사(내의원 정9품직) 녀석도 나를 감시하는 양예수의 눈이고 귀였던 걸 몰랐던 거지. 해서 그 길로 오라에 묶어 금부로 넘기더구먼. 의국에서 의정하지 않은 방법인데 자의로 왕자의 몸에 칼을 댄 대역부도라는 거지."
  "대역부도?"
  "나도 그동안 인물이 컸던 게지. 제법 내 성명 위에 대역부도의 죄목도 써보고. 깔깔깔 ..."
  허준의 입속에 침이 마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안광익의 웃음소리가 계속 났다.
  유의태의 한숨 쉬는 소리가 났다.
  안광익에 대한 애정인 듯했다.
  "그래, 금부에까지 끌려간 사람이 어찌 빠져나왔나?"
  "금부에 가둬둔 이틀 후에 꺼내주더구만. 왕자의 환부가 씻은 듯이 나은 덕분이지. 태어나면서부터 그 태독으로 인해 내내 눕지도 앉지도 못하던 생명이 말일세."
  유의태가 안광익이 비운 잔에 술을 쳤다.
  "하나 내의원에 돌아온즉 송학규 그자가 기어이 내 시술을 문제삼고 시끄럽게 구니 왕자의 보모로 있던 저 여자도 책임을 추궁받게 됐지. 밤이나 낮이나 왕자의 안부를 책임지는 것이 저 여자의 소임이었거든."
  "보모라면 그렇겠지."
  "그러나 저 여잔 내 시술을 믿고 눈감았던 걸세. 그 이전에 사사로이 저 여자의 생가 조모의 위급한 병을 낫게 해준 일이 있는데 그 이후론 저 여잔 내 시술을 믿는 여자가 돼 있었네."
  "그래서 그 뒤?"
  "그러나 대궐이란 데는 말이 많은 데거든. 병을 낫운 공은 가상하나 칼을 쓴 행동은 용서가 안된다는 거지. 특히 저 여자는 내 의술을 믿는다 안 믿는다 판단할 자리에 있지 않고 오로지 왕자를 보호할 의무만 있는데 임의로 광인의 칼 앞에 왕자를 내놓은 죄는 벗어날 수 없다는 걸세. 결국 저 여잔 약을 먹었어. 제 목숨 끊어 죽음으로 책임을 진다는 뜻으로."
  " ..."
  "하나 서로 인연이 되려는 건지 약국 한직으로 내쫓긴 내 귀에 저 여자의 소문이 들렸어. 해서 그길로 달려가 저승길 절반이나 갔던 여잘 살린 후 그 밤으로 업고 나온 걸세."
  "마치 남의 말 하듯 하는군."
  "팔자에 없는 대궐 안에 살면서 느낀 게 있었지. 대궐에는 사람 수에 비해서 의원이 너무 많다는 걸, 그리고 탕약이나 지시하고 침이나 놓는 술보다 부술에 뜻이 있는 나 같은 존잰 대궐 안에 있어 봤자다 싶고. 하나 나오고 보니 내 몸 의탁할 데라곤 그대밖에 없다 싶었네."
  "그건 잘했네. 하나 앞으로 저 여자와는 어쩔 셈인가? 궁실에 속했던 여잘 마음놓고 데리고 살도록 세상이 너그럽진 않을 터인데."
  "여기 술이 다했는걸."
  친구 유의태의 걱정을 남의 말처럼 흘려넘기고 안광익은 자기 잔에 기울이던 빈 술병을 흔들었다.
  "밖에 뉜고."
  유의태가 문득 드리워진 발 너머로 누구의 기척을 느낀 듯 물었다.
  발 너머로 나타난 허준이 허리를 굽혔다.

    2
  허준이 안채에서 술을 받아 사랑으로 돌아오자 유의태와 안광익의 화제는 허준이 처음 듣는 낯선 인물들의 근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는 놀랍게도 어의 누구누구니 당상의원이니 또 내의원이니 하는 허준의 흥미를 돋우는 소리가 섞여나오고 있었다.
  허준이 다시 마루 끝으로 다가가 섰다.
  병사 쪽에서는 밤새 몰려왔을 병자들이 유의태의 회진을 기다릴 시각이었고 허준도 나가 그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하나 허준은 안광익의 화제에 막힘없이 대꾸하고 있는 유의태가 오늘 따라 또 궁금했다.
  안광익이 나타나면서 부쩍 내의원에 관한 화제가 오르내렸고 안광익은 그곳에 몸을 담다 온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도대체 이 벽지의 유의태는 그 내의원의 우두머리들인 어의며 당상의원들과 어떤 인연이 있기에 이름 아래 존칭 하나 붙임이 없이 함부로 이름들을 내뱉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의라면 누군가.
  임금의 시탕을 책임진 사람이요 내의원에서도 의술에 정통함과 그 권능에 있어 최고의 인물일 터이다.
  또 내의원이란 곳은 어떤 곳인가.
  위로는 임금과 그에 딸린 왕족들의 건강을 지키고 심병을 맡은 막중한 소임의 관청일뿐더러 그곳에 모여 있는 인물들 또한 뉜가.
  나라 안에서 저마다 내노라 하는 의원들이 다시 수백 대 일의 경쟁을 거쳐 발탁된 응시분야(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에서는 나라 안 최고의 솜씨를 지닌 인물들의 집단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에게조차 유의태의 말투는 싸늘했다.
  방안의 두 사람의 말소리가 멀어갔고 잠시 허준의 뇌리에 도지에게 들은 내의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팔도의 젊은 의원들이 너나없이 한번쯤 꿈을 꾸어보는 내의원 취재시험. 그 경쟁의 수에서 그리고 치열함의 양상에서 반가의 자제들의 과거에의 등방보다 훨씬 어렵다는 건, 과거란 나라 안 양반 가문들로 하여금 출세 의욕을 북돋워주고 국정에 참여할 새 인재를 끊임없이 발탁한다는 그런 정책적인 배려가 깔려 있는 것이나 중인계급과 상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원취재란 그런 정책적인 배려와는 거리가 멀다.
  왕가의 시탕을 전담하는 게 목적인 만큼 도대체 많은 인원이 필요없는 것이다.
  내의원 전체를 지휘 감독하는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각 1명씩 임명하고 있으나 부제조는 승지(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소임)가 자동적으로 맡는 것이고 도제조니 제조도 대신 속에서 명예직으로 겸하는 것이요, 그 밑에 실무직인 첨정(종4품), 판관(종5품), 주부(종6품)를 1명씩 두었고 어의라 해도 대개 이 정도의 품계를 받는데, 그것도 천출들에게 오품 이상의 관직이 주어질 적마다 조정은 으레 무엄한 관직이라고 반대가 시끄럽기 마련이다.
  아무튼 여기까지가 의술로 뽑힌 실무자로서의 3명이고 그 아래로 직장(종7품) 3명, 봉사(종8품) 2명, 부봉사(정7품) 2명, 그리고 벼슬의 최말단직인 참봉(종9품) 1명 등 8명, 도합 11명에다 따로 혜민서(특히 가난한 백성들의 질병을 돌보는 곳으로 요즘의 국립의료원 같은 곳)에 배치하는 인원이 직장, 봉사, 의학훈도(정9품) 각 1명씩과 참봉 4명 등 7명, 모두 합해 18명에 여의라 불리우는 의녀들 22명이 궐내의 상궁, 나인 들을 대상으로 가벼운 침 정도를 놓고 혹은 간병의 소임을 맡아 적시에 배치되는 것이 내의원의 인적 구성인 것이다.
  그러니 의녀들을 제한 18명의 내의원 직속 의원들은 그 자리에 버티고 끈질기기가 호두알 같고 칡뿌리 같아서 임금이나 왕족이 죽어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는 때나 나라 안에 돌림병이 크게 번져 의원들이 산지사방으로 불려다니며 동분서주할 적이 아니고서는 좀체 충원이 없다. 하나 그 하늘의 별따기처럼이나 어려운 내의원 의원에 취재 끝에 발탁이 되면 그건 곧 미천한 출신들로서는 꿈도 못 꾸어볼 입신출세의 보장이기도 했으니, 양반의 큰갓만 보면 눈 내리깔고 허리부터 휘어야 하는 미천한 신분인 의원들에게 취재에 합격했다는 첩지만 거머쥐는 날이면 평생을 두고 팔도 어디를 가도 성궁 임금을 시탕했다는 의술의 높은 경지를 인정받아 가난한 병자 따위 상대 않고 명문거족들에게 불려다니는 영화와 명예의 보장을 받는 것이다.
  그 내의원을 우습게 보는 투의 유의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의술의 본 모습이란 결코 화려한 것은 아닌데 시속은 의업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알거나 입신출세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어."
  "앞뒤가 안 맞는 소리로세."
  안광익의 목소리에 조소가 어렸다.
  "의원의 본 모습이 그런 것이거든 그대는 왜 자식에게는 내의원에 보내는 공부를 시키고 있나?"
  "그 아이가 무슨 얘기를 하던가?"
  "안 봐도 알지. 어줍잖이 양반 자제네 말투 흉내내는 것하며 제 태어난 출신도 모르고 먹물깨나 먹고 나면 공연스레 한양 쪽을 향해 발돋움하는 것, 가업을 잇겠다는 그런 정성스러운 아이 같진 않네."
  "잘 봤군."
  유의태의 말이 남의 얘기하듯 퉁명스러웠다.
  술잔을 옮기는 소리와 함께 안광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왜 자식의 고삐를 휘어잡지 않나? 혹 재주가 있다 보거든 병들어도 아픈 체 못하고 끙끙거리는 불쌍한 것들을 보라 하게."
  허준이 귀를 기울였으나 유의태의 대답은 들리지 않고 술잔 채우는 소리만 났다. 안광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난 애초 내의원 따윈 목표하지 않았네. 내가 한번 그 취재에 응한 건 시하 의술의 경지가 어느 정돈지 내 재주로 부딪쳐보고 싶었고 더 큰 소원은 혹 관의 위광을 업으면 옥사에서 죽어나가는 송장들이나 헤쳐볼 그런 특권을 누릴까 해서였어."
  유의태의 침묵이 길었다.
  "하나 그것도 여의치 않은 걸 안 후 진작 뛰쳐나오려고 하고 있었지. 내가 정진하고자 하는 건 부술인데 그걸 써먹지 못할 바에야 게딱지 같은 내의원의 의원이란 명예에 연연하여 허송세월하기 싫었거든. 차라리 민간에 돌아다니며 수의 노릇이나 하는 것이 백 번 낫지."
  "하나 그건 나이 먹은 우리들의 경지지 젊은 아이들의 안목은 아닐세."
  " ..."
  "아마 내 집이 의업을 가업으로 하는 건 내 대에서 끝나겠지."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자식이 제법 재주는 있네, 총기도 있고. 하나 심지가 모자라."
  당당한 유의태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나는 걸 허준이 긴장을 느끼며 듣고 있었다.
  그건 밤새워 아들의 공부를 손잡아주던 유의태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그건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었던 오뇌를 지닌 유의태의 진짜 모습 같았다.
  "내가 바라는 그릇은 아니야. 그리고 그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
  "작은 재주거든 작은 재주대로 다듬어주는 게지. 백성들인야 작은 재주일지라도 감지덕지 의지해 마지않지만 대궐에는 손재주 많은 자들이 많아. 굳이 자네 자식까지 보내지 않아도."
  "그 말도 했네. 내의원의 됨됨이에 관해서도 일러줬고. "
  "양예수와의 관계도 얘기해줬던가?"
  "그건 왜?"
  양예수란 어의라는 직위와 함께 처음부터 화제의 중심에 오르내린 이름이었다.
  "그건 나와 양예수와의 관계지 자식에까지 일러줄 이윤 없어."
  "어째서."
  "이미 아득한 옛날 얘길세. 20년 전 ..."
  "그댄 그렇게 치부하나 몰라도 양예수는 그댈 잊지 않았어. 어떻게 잊을 수 있나. 그때도 그는 명종대왕의 어의였었네. 내의원에 취재 있을 적마다 시관을 도맡아하는 것도 요즘과 마찬가지. 한데 그댄 그 양예수를 어쨌나? 더구나 만인 환시중에."
  유의태의 대답이 없었다.
  "만인 환시중은 아닐지라도 차라리 만인 환시중보다 더한 장소였지. 그의 수하 관원들 모두 보는 앞에서 닭의 몸통 속에 아홉 개 침을 박아가는 재주겨루기를 하며 양예수를 어쨌나."
  "소소한 일은 잊었어."
  "그댄 양예수의 입을 열게 하고자 앙다문 어의의 입을 부젓가락으로 지졌지."
  "부젓가락은 있지도 않았어."
  "그럼 그건 비수였나!"
  "젊은 날의 객기였을 뿐."
  "그때 그대는 양예수를 죽였던 걸세. 아홉 개의 침으로 닭을 죽였듯이 그가 지금 살아남아 있는 건 겉껍데기일 뿐."
  허준의 목구멍에 뜨거운 침이 넘어갔다.
  그가 처음 듣는 스승 유의태의 과거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3
  방안에서는 유의태의 과거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 그대가 그 자리에 참여했던 터도 아니요 부젓가락이니 비수니 하는 건 부풀린 얘기로세."
  "물론 나도 소문으로만 알았던 얘기지. 하나 언젠가 그대를 다시 만나면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직접 듣고 싶었거든. 당시 이미 명종임금의 어의요 내의원의 실력자이던 그를 무명의 시골 의원이 덜미를 잡아 무릎을 꿇린 얘기가 어찌 흔한 얘기리."
  "젊은 날의 객기였을 뿐."
  "그대에게는 객기였을지라도 그대의 그 객기 앞에 서야 했던 양예수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었어. 의원에게 있어 재주겨루기란 뭔가? 차라리 그때 그댄 아홉 개의 침을 닭의 몸뚱이에 꽃은 게 아니라 양예수의 심장에 꽃은 걸세. 그 아홉 개의 침을 심장에 꽂은 채 양예수는 지금 살아 있는 걸세. 어찌 그가 유의태를 잊을 수 있겠나! 함에도 그의 휘하에 자식을 보낼 수 있나?"
  "자식이 택하는 길이라 막고 싶지 않네. 자식에게는 자식의 길이 있겠지."
  "물론 난 그때 그 자리에 없었어. 그러나 경향간에 퍼졌던 그 희한한 소문을 확인하고자 그대들이 내기 장소로 택했던 그 기생집을 찾아가 죽은 닭과 산 닭을 직접 보았지. 아홉 침을 꽃은 채 그대가 택한 닭은 반 년째 성하게 살고 있었어."
  "반 년씩이나 소문을 쫓아다니다니. 그댄 그때서부터 꽤나 호사가였던게군."
  "내가 알고자 했던 건 유의태란 인물의 재주에 질투를 느꼈다는 게 옳은 얘기가 되겠지. 나도 누구 못지않게 생물의 몸 속을 들여다본 쪽이지만 유의태는 어디서 그런 재주를 익혔는가 하고 그것이 무시로 궁금했네."
  "생물에 대한 부술은 그대가 나보다 위겠지."
  "공연한 칭찬은 원치 않네."
  "그댄 구침으로 맹호를 잡은 솜씨가 아닌가."
  "그건 기지지 의술은 아닐세."
  그 안광익의 말소리가 들리자 허준은 방안을 향해 눈길을 들었다.
  침으로 호랑이를 잡았다는 그 믿기지 않는 수수께끼와 같은 얘기의 주인공 또한 바로 안광익 이 사람의 소행이었단 말인가.
  우선 그 얘기부터 하자면 허준이 그 장렬한 얘기를 들은 건 부산포가 유의태의 문하를 떠나기 얼마 전의 겨울밤 어느날이었다.
  그때 유의태에게 삼적대사라 불리는 그 중이 찾아왔을 때였는데 우연히 두 사람의 시중에 끼여든 부산포가 돌아와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를 마구 흥분해서 떠들었던 것이다.
  넓은 세상이긴 하나 세상에는 침으로 호랑이를 잡은 굉장한 의원도 있다는 얘기를 ...
  제자들을 흥분시킨 부산포가 들어온 그때의 얘긴즉 이랬다.
  스승 유의태와 안면이 있다는 그 의원이 지난해 자기의 고향인 정선으로 가기 위해 영월땅 운적산 밑 외룡리라는 마을에 이르니 온마을이 줄초상이 나 있었다 한다.
  영문을 물으니 근자 운적산에 황소만한 호랑이가 나타났는데 처음 이 맹수는 길가는 행인을 해치다가 이어 동구 밖 밭가는 소들을 해치더니 이젠 밤이면 마을로 뛰어들어 잠자는 사람까지도 해친다는 것이었다.
  하여 인근의 난다 하는 사냥꾼과 관에서 파송된 맹수잡이들이 곳곳에서 길목을 지켰는데 오늘 새벽 다시 마을로 뛰어들어 사냥꾼 둘을 물어 죽이고 잠자는 노파와 어린아이를 물어갔는데 벌써 마을의 여러 집이 이 호환을 당했다는 호소였다.
  이에 그 의원이 하룻밤 잠자리를 청한 후 내 방법대로 호랑이를 잡아 보겠노라며 마을에 남아 있는 닭을 한 마리 구해다가 자기가 지니고 있던 침을 닭비 온몸에 찔러넣어 마을 밖 우물가에 황구 두 마리와 매어놓으니 과연 다음날 호랑이가 나타나 새벽 울음을 우는 닭과 개들을 한입에 물어삼킨 후 산으로 돌아갔는데 곧이어 구침을 삼킨 호랑이가 고통을 못이겨 연 사흘을 울부짖으며 산속을 뛰다가 마침내 죽었다는 얘기였다.
  이에 관에서 그 호피를 벗겨 나라에 바치고 그 가상한 의원의 행적을 찾았으나 친상을 당하여 갈 길이 바쁘노라며 정선땅으로 떠나버렸다는 얘기였다.
  그때 부산포의 얘기를 들은 제자들은 그 아흡 침의 길이와 생김새를 저마다 떠들며 천하의 맹수도 뱃속에 아흡 침을 삼켜서야 살 리 없다는 등 그런 큰일을 해냈으먼 상을 타도 큰 상을 탈 텐데 뒤도 안 돌아보고 더구나 호랑이 가죽이 얼마나 비싼 건데 그것도 거들떠보지 않고 가버렸다는 건 아무래도 보통 의원이 아니라 산신령이 아니냐는 등 구름잡는 얘기로 입에 거품을 물며 떠들어댔었다.
  '하나 ...'
  허준의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건 산신령도 아니었고 바로 저 사람 안광익이었다.'
  밖에 있는 허준의 뜨거운 관심에 상관없이 역시 구침과 관련 있는 유의태의 과거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구침으로 호랑이를 잡은 건 잠시 나의 기지였을 뿐이나 세상에서 나 못지않게 침을 잘 쓰는 유의태란 인물에 대해 보통 궁금한 게 아니었지. 해서 난 그대와 양예수의 내기에 입회한 인물을 수소문했네. 하나 내의원의 권위에 온통 똥물을 뒤집어씌운 그 사건을 덮어버리고자 만나본 내의원 의원마다 서로 쉬쉬하며 입을 열지 않더군. 결국 소문의 자초지종을 들은 건 내가 내의원에 들어간 후 민세에게서지. 민세는 당시 양예수와 함께 내의원 시관이었다면서?"
  "참 민세에게 사람을 보냈네, 그대도 왔으니 모처럼 셋이 만나 어디 바람이나 쐬러 갈 겸 하여."
  안광익의 말투가 집요했다. 그 속엔 본인의 입에서 직접 당시의 사건을 확인하려는 강한 경쟁심도 배어 있었다.
  유의태는 대꾸가 없었고 술이 두어 순배 더 돌아가는 소리가 난 후 이윽고 유의태가 직접 그 당시 사건의 전모와 자신이 침술에 기울게 된 지난 얘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대로 의업을 물려온 집안이었으나 유의태의 윗대는 비전된 유가고약을 만들어 행상을 겸해 팔며 그저 인근 고을에서나 알아줄 정도의 미미한 의원들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유의태는 5대 독자로 태어났는데 부조의 가업을 무심코 전수받은 그런 평범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날 아버지가 만든 고약이 자기의 상처도 제대로 못 낫구는 걸 알자 비전된 고약 제조의 방법을 개선코자 노력하면서 연구를 거듭, 점차 의술의 깊은 경지로 빠져들어갔다. 이때 특히 그가 심취한 건 침술이었고 그의 나이 삼십을 넘을 때는 유가고약집 아들이라기보다 젊고 용한 침술사 유의태로 제법 그 이름이 영남 일대에 퍼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유의태는 밤낮없는 정진을 거듭하며 보다 많은 의서와 중국에서 흘러드는 새로운 의서를 구해보고자 한양 그 왕복 1천6백여리를 매년 오가도록 열성이었다.
  그런 그가 서른하나가 되던 이십 년 전 유의태는 그의 윗대에서는 감히 꿈도 못 꾸던 내의원 취재에 응시코자 한양으로 뛰쳐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낙방이었다.
  유의태는 자기 이름이 빠져 있는 그 방을 눈을 씻고 보고 또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오십 가지의 각 병명 아래 각각 취해야 할 점혈의 부위를 적고 각 침의 효용에 의한 천심과 보사를 기재하는 일이었다.
  유의태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그때 그의 눈앞을 지나간 건 늙은 아비의 초췌한 모습이었다.
  누대 벼슬의 벼자도 모르고 살아온 아비는 감히 아들이 취재에 붙어서 관복을 입고 왕족의 시탕을 받드는 내의원 의원이 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한 일대 사건이었기에 떠나올 제 수십 리 길을 따라오며 "네가 되겠느냐. 네가 되겠느냐."며 안타까운 기대를 걸던 것이었다.
  그러나 ...
  그 자신만만 써넣은 해답에도 불구, 유의태는 자기가 떨어진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서는 함께 낙방한 자들의 입에서, 시관 중에도 어의를 겸한 양예수가 다른 분야는 몰라도 자신의 주소임인 침술 분야에 대해서는 경쟁자가 될 만한 인물을 일부러 떨군다는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나 유의태는 과장에서 자기의 시험지가 시관의 실수로 어딘가 떨어뜨린 게 아닌가 생각하고 시관을 찾아갔다. 그 시관이 지금은 사문에 출가했지만 한때 혜민서 의학훈도였던 김민세였다.
  김민세는 시험지가 중도에 분실되는 따위 자기들의 실수를 인정치 않았다. 그러면 자기의 시험지가 제대로 접수되었는지를 확인해달라는 유의태의 청도 거절했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정답자가 많을 때 누구를 쁩고 누가 떨어지는 데 있어 재량은 판관 양예수에게 있노라고 했다. 이에 참다 못한 유의태가 그러면 시장에 나도는 양예수의 더러운 소문이 사실이냐고 따지고 들었을 때였다.
  그 유의태의 등뒤에 바로 양예수의 일행이 서 있었다. 그러자 그가 또 누군지도 알 리 없는 유의태는 오히려 관원이 나타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이번에 뽑힌 자와 자기의 시험지를 함께 내 눈앞에 보여주든가 양예수를 만나 소문의 진부를 확인하겠다고 떠들었다. 한마디로 내칠 듯하던 양예수는 그도 또한 자기를 향한 과장의 수군댐을 아는 듯했다. 양예수가 물었다.
  "내가 양예수니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유의태의 눈 속에 적의가 불타올랐다.
  "내 이름은 유의태요."

    4
  스스로 내가 양예수라 밝힌 후 그 시험지를 보여줄 이유도 또 과장에서 떠드는 낙방한 자들의 불평불만을 다 귀담아들을 까닭도 없으나 너희 같은 자들에게 내 명예가 운위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며 손가락질을 했던 것이다.
  "항차 너 따위 촌구석 의원놈이 침술의 어디까지를 알기에 감히 내의원 문전을 소란치 구는 게냐."
  "내 침술이 어디까지인가는 과장에 내민 내가 쓴 내용을 보면 알 터가 아니오."
  "네 정도 재주는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더니라."
  그 양예수의 말에,
  "내가 묻고 있는 건 나으리의 재주도 그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은 재주에 속하는지 알고 싶소."
  이것이 유의태의 대거리였다.
  그 무례한 말에 양예수를 수행하던 내의인 관원들이 팔을 걷어붙이는데 오히려 그들을 말린 건 양예수였다.
  "유의태라 ... 암, 네가 써낸 걸 보았지."
  "긴 얘기가 필요없소. 내가 원하는 건 나으리 또한 침술의 대가라니 우리 두 사람 구침지희로 상하수를 겨루길 원하오이다."
  "구침지희?"
  일동의 안색에서 핏기가 가셔가고 있었다. 마주 지켜보는 유의태와 양예수의 눈 속에 살기가 감돌았다.
  "내가 듣고 있던 바와는 그 대목이 틀리는군. 그럼 구침지희를 먼저 꺼낸 건 양예수가 아니고 그대가 먼저였단 말인가?"
  "그랬어."
  과거의 얘기여서인지 방안의 유의태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안광익이 '끄응' 신음하는 소리가 났다.
  "서른하나에 감히 구침지희를 꺼낼 정도라니 역시 그대가 나보다 몇 년 빨랐어. 난 그 나잇살 땐 온갖 미물에서부터 목숨 붙은 가축들의 배나 째보는 따위로 세월을 보냈는데, 아무튼 마저 듣세. 계속하게."
  " ..."
  "내가 구침을 닭의 몸통에 무리없이 꽃게 된 건 서른대여섯 되어서였어, 마저 얘기를 들어보자니까."
  구침지희.
  아흡 개의 침술이 펼치는 재주
  그건 의원으로서는 목숨을 건 내기에 해당하는 무서운 재주겨루기였다. 그 연원은 후한 시대의 명의 화타에게서 비롯되는데 화타는 조제를 알 수 없는 마불산이라는 마취제를 만들어 이를 술에 타 병자에게 먹인 후 개복과 뇌수술까지 했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이 화타에게 묻어 있는 전설의 또 하나가 구침지희와 오금희로서 오금희란 화타가 오금(호, 비, 원, 태, 조)의 자세와 동작을 본떠 창안한 독특한 체조인데 이를 실행한 제자들은 나이 90세에 이르도록 청년 같은 기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 오금희와 함께 구침지희는 살아 있는 닭의 몸 안에 아흡 개의 각종 침을 침머리가 보이지 않도록 찔러넣되 닭띠 아파하거나 죽어서는 안되는 고도의 침술 경지를 제자들에게 시범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그건 닭의 내장과 근육 등 각 기능을 거울 들여다보듯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경지로서 다섯 침까지가 범의, 여섯 침이 교의, 일곱 침이 명의로 이 명의의 경지에 이르러야 제자들로 하여금 병자를 보게 했으며, 여덟번째 침은 대의, 마지막 아홉 침을 다 쓸 수 있으면 이미 침 하나로 모든 병을 다 볼 수 있는 태의라 하는 것이다.
  하나 화타의 제자들이 침술연마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 방법은 오히려 항간의 재주없는 자들까지도 자기의 침술을 과대선전하고자 걸핏하면 닭에게 침을 놓는 재주겨루기로 타락했고 특히 화타보다 한 시대 앞이었던 창공(본명이 순우의로 신선계 의술의 대가)의 의술을 좇는 쪽과는 서로 의 명예를 걸어 목숨을 건 내기의 수단으로 타락한 채 남아 있는 무서운 놀이이기도 했다.
  그날 양예수와 유의태는 서로의 의원으로서의 명예를 건 그 구침지희를 위해 남산골 어느 기방에 마주앉았다.
  현직이 어의요 관직이 내의원 판관인 양예수는 자신만만 내의원 관원들을 5, 6명 대동했고 유의태는 혼자였다.
  그 두 사람 앞에서 입회자 겸 증인삼아 양예수를 수행해온 관원이 들고 온 닭 두 마리가 다리가 묶인 채 요란히 날개를 퍼덕였다.
  "닭을 먼저 골라잡되 내기에 지면 네가 내놓는 것은 무엇이냐?"
  "내 눈 하나를 파내주리라."
  "그까짓 술안주거리도 못 되는 네 눈을 뽑아서 어디다 쓰라는 게냐. 하나."
  양예수가 나직이 웃었다.
  "네가 걸어온 싸움이니 마다는 않으리라."
  "대신!"
  "말해라."
  "내가 이기면 나도 원할 게 있소."
  "그럴 테지."
  "내 버선코에 이마를 조아리고 내 이름을 세 번 부르시오. 그리고 술 한상 차려내오."
  "좋고말고."
  양예수가 웃었고 수행자들도, "해변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하며 마음놓고 웃어댔다.
  "방에 불 더 밝혀라!"
  양예수가 위엄 담아 일렀고 굵은 황초의 촛불이 각자의 손맡에 하나씩 놓여졌다.
  그 앞에서 유의태와 양예수가 각자의 침갑을 꺼내 손맡에 놓았다.
  침통의 겉포장은 서로가 달라도 내용의 침은 서로가 꼭같은 아홉 가지 침이 반짝였다.
  영문을 모르는 닭들이 그 긴장된 침묵 속에서 구구거리며 퍼득였다.
  "시작하거라."
  양예수가 명령했고.
  유의태가 사양 않고 첫번째 참침을 집었다. 길이가 한 치 여섯 푼, 끝이 날카롭고 본디는 사람의 양기를 사하는 데 쓰는 침이었다.
  촛불에 반짝이며 그 첫 침은 닭의 가슴팍에 찔러넣어졌다.
  "후에 일일이 검증해볼 것이다. 쓰다듬어보아 침머리가 만져지면 아니 되리."
  양예수의 수행자가 으름장을 놓았으나 유의태의 눈은 초로지 양예수에게만 향하고 있었다.
  "나으리의 차례오이다."
  유의태의 재촉이 있기 전에 양예수도 역시 참침을 닭의 등줄기에 깊숙이 꽂았다.
  그리고 턱으로 유의태를 가리켰다.
  "두번째!"
  유의태 역시 재촉이 오기 전에 두번째 원침을 집어 닭의 등줄기에 꽂았다.
  역시 길이가 한 치 여섯 푼, 끝이 달걀형으로 뭉툭한 침이었다.
  양예수도 뒤따라 원침을 닭의 다리 쪽에 찔러넣었다.
  셋째침은 시침으로 길이가 세 치 반, 끝이 좁쌀알처럼 생겨 맥기가 허한 데 쓰나 인체에는 그 끝만 사용할 뿐인 긴 침이었다.
  양예수와 유의태가 다른 날개 밑을 찔러넣었다.
  아직 닭들은 어느 쪽도 고통을 모르고 묶인 다리만 불편해 퍼득거렸다. 수행자들의 숨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았고 그 긴장된 방안에 기생들이 보기만도 끔찍하다는 듯이 감히 두 사람을 바로 보지 못했다.
  네번째 봉침은 한 치 여섯 푼, 날이 세모꼴로 생긴 고질을 터주는 데 쓰는 침이었다.
  아직 닭들이 무사했다.
  "다음 지침."
  하고 유의태가 일명 파침이라고도 부르는 길이 네 치에 너비가 두 푼의 인간의 고름 상처를 쨀 때 쓰는 커다란 침을 닭의 등줄기에 내리꽃아 갔다.
  양예수의 지침도 유의태와 역순으로 닭을 찔러갔다.
  "원리침!"
  한 치 여섯 푼 짧고 가늘기가 털과 같은 침이 다시 두 마리의 닭의 몸 통 속으로 찔려들어갔다.
  수행자의 누군가 거푸 목젖을 울렸고 기생들와 목이 자라목처럼 움츠러들고 있었다.
  "어디서 배운 솜씬지 제법이로고."
  양예수가 뇌까렸으나 유의태의 대꾸는 조소였다.
  "이번에는 호침."
  하고 유의태가 길이 세 치 여섯 푼짜리 끝이 모기 주둥이처럼 날카로운 침을 겨누어들었다.
  인체라면 경로를 고르고 통비를 달랠 때 쓰는 침이었다.
  그 호침 또한 닭의 몸뚱이 속으로 사라졌다.
  순간 유의태는 보았다.
  양예수의 이마에 땀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을 ...
  "순차대로 서로 겨끔내기로 하리까 내 먼저 다 마치리까?"
  유의태가 말했고 양예수가 호침을 든 손은 정지한 채 그 유의태를 보고 있었다. 증오에 찬 눈이었다. 그 이마에도 땀이 번쩍이도록 배어나오고 있었다.
  "내 차례가 아니올시다."
  " ... 뉘에게 배웠더냐."
  양예수의 신음 같은 소리를 유의태가 일축했다.
  "객담은 하고 싶지 않소이다. 그걸 찌르고도 아직 두 개가 남았소."
  그랬다.
  아직 남은 두 개는 장침과 대침으로 각각 무려 일곱 치와 네 치짜리 긴 것으로 뼛속을 긁어내는 커다란 침들이었다.
  "찌르시오."
  유의태가 재촉했고 수행원이 소리쳤다.
  "그만들 하지."
  "찌르란 말이오!"
  유의태가 가차없이 양예수를 쏘아보았다.
  "왜 못 찌르시오. 설마 닭이 불쌍해서 못 찌른다는 말은 않겠지요."
  "아무리 미물이기로 왜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러고서야 고슴도치지 닭입니까."
  기생이 끼여들었을 때 양예수의 호침이 닭의 몸뚱이를 가로질러 내려갔다. 닭이 마구 퍼득였다.
  "여덟번째 장침이외다."
  유의태가 자기의 장침을 양예수의 눈앞에 내보였고 양예수의 손은 자기의 장침을 못 집고 있었다.

    5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문간의 기생들 뒤로 집안에 술상 심부름하는 중노미놈하며 부엌데기들과 이웃간에서도 몰려온 여러 얼굴들이 방문 밖에 가득히 웅성거리며 살기 어린 방안의 광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례를 바꾸올지?"
  양예수의 이마의 진땀을 건너보며 유의태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호침까지의 경지의 의원이라면 나으리의 말대로 조선팔도 안에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을 거외다. 하나 나라 안 첫째 솜씨라면 마저 둘을 찔러야겠지요. 찔러도 닭이 아파하지 않는 곳, 이걸 몸안에 찔린 채로 닭이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어디서 어디로 찔러야 하오니까? "
  양예수의 핏기가 가셨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모르시오? 바로 여기외다."
  유의태의 장침이 닭의 꼬리 쪽에서 깊숙이 몸통 속으로 박혀갔다.
  순간 양예수가 "건방진!" 하며 신음 같은 원한을 뱉더니 자기의 남은 장침과 대침을 닭의 몸통에 꽃았다.
  그 양예수의 닭이 퍼덕거릴 뿐 방안은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유의태가 마지막 아홉번째 자기의 대침을 집어 닭의 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 유의태의 닭도 마구 화닥닥거렸다.
  이어 유의태가 양예수의 얼굴을 향한 채 기생들에게 소리쳤다.
  "비키거라, 모두!"
  마루와 마당에서 얼굴과 고개를 들이밀고 숨을 삼키고 있던 구경꾼들이 화닥닥 비켜나고 물러났다.
  그 허리와 다리 사이로 마당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는 이가 없는 속에서 양예수는 꼼짝도 않았고 서슬에 겁먹은 기생이 화당탕 방문을 열었다.
  유의태가 자기의 닭을 집어 묶은 새끼를 풀어내고 방문 밖으로 내던졌다.
  그 닭이 마루 위에 떨어졌다가 날개를 활짝 펴 퍼덕이며 마당으로 날았다가 요란히 구구거리며 도망쳐갔다.
  사람들이 탄성을 내는 소리가 일제히 났다.
  유의태가 양예수를 바라보았다.
  "나으리도 던져보시지요."
  양예수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 양예수를 수행해 있던 김민세가 대신 양예수의 닭을 마당으로 던졌다.
  그러나 철썩 던져진 양예수의 닭은 눈 내리는 마당에서 두어 번 마지막 날개를 퍼덕이고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로 어디로 사라졌던 유의태의 닭이 구구거리며 오가는 것이 보였다.
  침묵을 깨고 양예수가,
  "의원이 아니라 닭 백정을 하던 놈이로고." 했고,
  "가시지요."
  하고 수행자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튕겨일어난 유의태가 그 방문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약속 이행하오!"
  "비켜라!"
  두엇 수행자가 가로막고 나섰고 유의태도 마주 소리쳤다.
  "일구이언은 이부지자라 그 말뜻쯤은 아는 차림들이오만."
  "무에 어째!"
  그중 성급해 보이는 관원이 눈을 치떴을 때였다.
  순간 양예수가 지금까지의 이 일은 모두 잠시의 장난이었던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약조를 했지, 핫핫. 자네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던가?"
  "그렇소. 유의태란 이름을,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노라고."
  "하지 백 번이고 해주지, 헛헛.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네, 됐는가?"
  "두 번 더!"
  "비키거라!"
  "두 번 더 하시오."
  순간 농담으로 자존심을 버티려던 양예수의 얼굴이 유의태의 눈빛 앞에서 참담하게 바뀌어갔다.
  "두 번 더."
  유의태가 다시 가차없이 요구했고 수행자가 삿대질로 가로막고 나섰다.
  "중갓도 간신히 쓴 주제에 언감 큰갓 쓴 종5품 관원을 욕보일 셈이냐."
  "장부의 약속인데 갓의 크고 작은 것이 무슨 상관이오. 두 번 더 하시오. 어서!"
  이윽고 양예수의 입이 독약을 삼키듯이 유의태의 요구를 입밖으로 밀어냈다.
  "영남 산청 사는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외다."
  "마저 한 번."
  살기 어린 양예수의 눈이 유의태에게 박히더니 돌연 유의태를 밀어붙이며 방밖으로 나섰다.
  유의태가 그 뒤통수에 웃었다.
  "술상 내시오. 그것도 약속이었은즉슨 ! 핫핫핫."
  수행원이 기생의 발치에 한 뼘이나 될 돈꿰미를 던졌다.
  "차려내거라."
  이어 그 말과 함께 누군가의 주먹이 웃고 있는 유의태의 얼굴을 쳤다.
  유의태가 기생들의 발치에 나뒹굴었고 몇 사람이 그 유의태를 밟고 걷어찼다. 그러나 유의태의 입에서 터져나온 건 비명이 아니고 가가대소였다. 김민세가 동패들의 폭력을 떼어놓고 씩씩거리는 그들을 데리고 사라진 후에도 유의태의 웃음소리는 계속됐다.
  교만한 웃음이었다. 젊은 날 자신의 재주를 과신하고 물불을 모르는 좀은 패기도 있는.
  "그래서?"
  하고 안광익의 묻는 소리가 났다. 유의태의 20년 전 과거 얘기는 끝난 듯했다.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와 한양 쪽엔 발길도 않았어. 그리고 그걸 오히려 지금은 다행이다 여기네."
  "출세의 꿈이 꺾였는데도 다행이다?"
  "그날 밤중에 민세가 찾아와 우린 친구가 됐지. 민세와 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어."
  "친구 한 명과 출세와 바꿨단 얘긴가, 핫핫."
  "암튼."
  "그래 암튼?"
  "그 사건은 내게도 여러 가지 큰 교훈을 주었지. 내 행동이 지나쳤다는 스스로의 반성도 있었고 왜 굳이 조선 제일이어야 했는지 그런 허세에 매달린 내가 자다가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좌우간 그런 여러가지 느낌과 깨달음이 오히려 내가 그뒤로도 의업에 더 정진한 계기가 됐지."
  " ..."
  "만일 그때 내의원에 붙어 제법 궁내에서 알려지는 재주로 풀렸다면 난 그걸로 더 소원이 없는 한 교만한 내의원 의원으로 끝났을 테니까."
  이때 병사 쪽에서 황급히 들어오는 도지의 모습이 보였고 그가 허준을 보자 의아해서 소리쳤다.
  "아니 병사에선 그토록 찾았는데 예서 뭘하고 있었던가."
  "안 그래도 막 건너가려던 차오만."
  "병사의 바쁜 일은 끝났네. 그보다 집에서 아이가 달려와 그댈 찾는 눈치던걸."
  "아이라, 내 자식이 말씀이오?"
  "그렇네. 보아하니 눈물 콧물 흘린 모습이던데 나가 보게."
  허준이 중문을 나서는 등뒤에서 도지가 사랑 앞에 서서 "아버님, 회진 시간올시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겸이 녀석은 달려오며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무릎팍이 깨지고 앞섶도 흙투성이였다.
  영문을 물으니 할머니가 떡목판 이고 나가고 한참 지났을 때 방죽골 우진사댁 사람들이 몰려와 어머니를 잡아갔다는 얘기였다.
  "잡아가다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울음 그치고 찬찬히 말을 해."
  녀석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우진사집에서 엊그제 바느질품거리를 어머니가 받아왔는데 그 집에서 내준 옷감만 들고 온 아내에게 오늘 그 집 하인놈과 여자들이 몰려와 그 옷감 속에 함께 싸두었던 비단 한 감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고 아내가 그런 걸 가져온 적이 없다 하니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집도 비었고 우리들 밥을 차려주고 뒤따라간다카이까 막 어머니한테 도둑년이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데려갔습니다."
  "도둑년?"
  "내 귀로 들었습니다. 그래 지가 어머니하고 같이 갔더니 그 집 안방 할무이 방 앞으로 끌려가선 몸종애가 어머니 머리카락을 잡고 ..."
  허준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집으로 돌아가 있어."
  그 말을 내뱉고 허준은 머리끄덩이를 꺼들려 있다는 방죽골 우진사집을 향해 달렸다.
  그 입에서 참기 어려운 짐승 같은 신음이 자꾸만 터져나왔다.

    6
  달려온 허준이 우진사의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높다란 담안에서 여자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그 닦달질이 이미 한참 동안 계속된 듯 골목 안에는 마을 아낙들이 여기저기 몰려서서 숙덕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허준은 주먹이 깨어져라 거푸 대문을 쳐댔다. 곧이어 대문 안에서 인기척이 달려와 대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건 기골이 장대한 젊은 하인과 키가 큰 늙은 하인이었다.
  "이 댁이 감히 뉘 댁인 줄 알고 이토록 방자하게 소란을 떠는 게냐!"
  "나 유의원댁에 있는 허준이란 사람이오!"
  "한데!"
  집안에서 또 한번 여자의 까무라치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허준의 말씨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내 집사람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불려와 있는지 영문을 알고자 왔소."
  "영문?"
  젊은 하인이 우진사의 권세를 업고 눈을 치떴고 오히려 늙은 쪽이 더 나섰다.
  "누군지 알겠다. 안 그래도 우리가 너를 데리러 달려가려던 길이다. 썩 들어와, 이자야!"
  허준 정도는 마음놓고 해라를 해도 된다는 듯이 늙은 하인이 대뜸 허준의 어깻죽지를 잡아채어 대문 안으로 끌어들였고 젊은 녀석이 허준의 퇴로를 차단할 듯이 대문을 닫아걸었다.
  그때 무릎팍이 깨지면서 달려온 겸이가 아버지를 거푸 불러대며 닫힌 대문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집안은 내외도 없었다.
  상대가 미천한 출신이라고 보아서인지 큰사랑 앞 수석이 배치된 마당의 광경은 대물림을 한 낡은 형틀에 나이깨나 든 여종이 두 팔을 잡아묶인 채 엎드려져 난장을 맞으며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중이었고 아내 또한 머리끄덩이를 휘둘리고 저고리 앞섶도 터져나간 참담한 몰골인 채 댓돌 아래 내꿇려 늙은 진사의 고함소리를 듣고 있었다.
  허준은 눈이 뒤집혔다. 대뜸 우진사의 앞으로 뛰쳐나가 "영문을 대오!" 소리친 순간 형틀 주위에 늘어섰던 남은 하인들이 그 허준의 덜미를 잡아나꿔 꿇렸고 반항하는 허준에게 쏟아진 것 뭇매였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고 그 소란은 우진사의 호통소리에야 그쳤다.
  허준 일가에게 씌워진 혐의는 늙은 마누라가 저고리 한 감짜리 비단의 행방이었다.
  특히 그 동안 허준 일가가 살림이 쪼들릴 적마다 아끼던 옷가지를 하나씩 내다 판 것이 소문으로 나 있어 천한 것들의 집안에서 그런 상질의 옷가지가 나왔다는 것까지 의심받아 아내가 삯바느질 일감을 받으러 올 때 사람 빈 틈을 타 싸들고 갔다고 눈으로 본 듯이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당시의 상황 설명 따위는 귀담아듣기는커녕 기어이 아내를 앞장세우고 하인들을 딸려 집안뒤짐을 보내는 것이 아예 아랫것들은 모두 도둑놈으로 치부하는 말투가 역연했다.
  어쩌면 그건 또 소과 초장(진사의 자격)으로 끝나 벼슬길이 막힌 포한을 이럴 때 신분상 무저항일 수밖에 없는 아랫것들에게 마치 동헌 교의 위에 높다라니 앉아 진짜 죄인을 다스리는 양 권세의 쾌감을 즐기는 그런 모습이기도 했다.
  허준은 아내의 말에 맞추어 집안에서 나온 옷가지는 그 동안 더러 병을 보아준 이들로부터 사례받은 것이노라 애써 강변하고 신분을 바꾸고자 이 산청땅에까지 흘러온 과거사는 감추었으나 분하고 억울한 감정까지는 감추지 못하여 눈빛이 양반에게 무엄하다는 고함과 함께 코피가 터지고 입술도 터지고 말았다.
  집뒤짐을 하러 간 하인들이 허탕을 치고 다시 아내를 끌고 돌아온 뒤 결국 이 사건은 매질을 견디다 못한 몸종이 훔친 비단자락을 찬광 천장에 숨겼노라 자백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한껏 매질과 수모를 당하고 중문을 나서는 허준 부부에게 우진사도 그 늙은 아내도 한마디의 사과의 말이 없었다.
  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며 밤 깊은 우진사집 대문간을 나서자 골목 어귀에 숙영이를 데리고 서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며느리를 쓸어안았고 오히려 겸이 녀석이 피칠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옷자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고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녀석은 혼자 내내 울먹였다.
  그리고 비록 흑백은 가려졌으나 집뒤짐을 당한 도둑 누명이었음에서 이후 마을 사람들은 허준 일가를 경원했다. 자기의 아들딸이 허준의 자식들과 얼려 노는 걸 보면 큰일이나 날 듯이 자기 아이들을 부르고 또 그 손을 잡아 끌고 가곤 했다.
  '잊고 있었어 ...'
  허준은 그 마을 인심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기의 미천한 신분에 대한 한을 새삼 어금니로 지그시 되씹었다.
  허준 일가에게 씌워진 그 누명은 의원에도 퍼졌고 옳다구나 하고 소문을 더 찧고 까분 건 영달, 꺽새였고, 임오근 또한 허준에게 닥친 이 억울한 사건에 관해 위로의 말이 없었다.
  허준은 한 가지 깨달은 느낌이었다. 자기를 둘러싼 벽은 잘난 양반네 만이 아니고 같이 미천한 신세로 희노애락을 함께 해야 할 인간들도 기회만 있으면 서로 물고 뜯는 각박한 인심임을 ... 그런 밖에서의 분위기를 그녀 또한 마음에서 겪고 있는지 아내는 남편이 있는 날이면 애써 웃음을 만들고 집안 분위기를 추스르려 했으나 아내의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알면서도 허준은 점차 더 과묵한 인간으로 바뀌어갔다. 가슴속에 끓는 건 세상에 대한 적의뿐이었다. 아니 허준보다 더 말수가 적어진 건 아들 겸이었다.
  그리고 그 겸이가 어느날 아침 아비가 애써 써준 천자문을 아궁이 속에 태워버린 걸 알았다.
  그 어린것의 어린것답지 않은 결심에 허준의 피가 또 한번 부글거렸으나 허준은 그 얘기를 전하는 아내의 젖은 눈을 향해 살기 어린 눈을 치뜨다가 그만두었다.
  울어서 해결날 일이 아니잖은가.
  미천한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양반이 주는 수모 따위 아들 겸이도 조만간 겪어야 했던 사건이요 아내 또한 자기 같은 상것과 혼인한 이상 각오하고 있던 일이 아니던가.
  "내버려두오!"
  사건 후 엿새 만에 허준이 아내에게 내뱉은 유일한 한마디였다.
  겸이에게는 행동의 변화도 왔다.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한 녀석은 걸핏하면 의원에 나타났다. 그 의원 역시 제 말동무가 없는데도 때도 없이 병사 마당에 슬며시 나타나서는 더러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치면 맥없는 웃음을 씩 웃고 비척거렸다.
  그러나 허준은 아들의 그런 변화에 애써 아는 체하거나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더러 점심상을 받을 때 좀전에 병사 문간에 서성이던 아들이 저 밖 어디에서 혼자 자치기라도 하며 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녀석도 배고픈 걸 참는 것쯤 이력이 나 있었고 의원에 와서 밥이나 얻어먹는 따위 재미를 붙여주고 싶진 않아서였다.
  녀석의 외로움이나 나름대로의 마음고생 속에서 스스로 무엇을 찾아낼지 지켜보는 일뿐 잠시 입에 발린 위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싶은 것이다.
  하나 더러는 밤늦도록 병사 귀퉁이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아들의 조그만 모습을 발견하고 함께 집에 돌아올 때면 갑자기 말이 많아져서 종일 보고 들은 것들을 밑도 끝도 없이 떠드는 아들을 향해 허준은 혼자 코끝이 울 때가 있었다.
  허준은 아비로서 아들에게 자신있게 보여줄 그 무엇도 자기에게 없다는 것에 가슴이 저렸다.
  그 겸이에게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겨났다. 늘 할머니와 함께 자는 것으로 알고 있던 녀석이 어느날부턴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재빨리 제 베개를 집어들고 뒤꼍 아버지의 방으로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건 지난날 양반댁에 끌려가 매맞고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동정이 가는지 근래 한껏 말이 없어진 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어린 제 고민의 어떤 일체감을 느껴서 하는 행동인지는 알 수 없되, 그 방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방이노라고 할머니가 꾸짖어도 녀석은 건너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런 밤 허준은 그 잠든 아들을 가슴에 품고 이 아들에게만은 신분에의 질곡을 벗어나게 해줄 수 없을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곤 했다.
  하나 그건 아무리 간절한 염원이요 자신의 목숨하고라도 서슴없이 바꿔줄 소망이되 날이 밝으면 한가닥 희망도 남지 않는 덧없는 꿈임을 허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위덩이 같은 절망이었다.
  '혼인만 하지 않았다면 ... 이 아비밖에 쳐다볼 줄 모르는 저 자식들만 없다면 ... 그리고 어머님만 아니 계셨던들 ...'
  속에 끓는 이 한을 굳이 삭이려 애쓸 것 없이 이 시답잖은 세상 팽개치고 변돌석이가 가 있는 섬으로라도 건너가서 한세월 고기나 잡으며 보내고 싶다는 밑도 끝도 없는 탄식이 새벽 집을 떠나 의원으로 향하는 허준의 가슴속에 자꾸만 쌓이고 있었다.
  그 어느날이었다.
  유의태의 방으로 불려간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방안에는 병사 쪽에서 상화의 안내를 받아 건너온 큰갓 쓴 중년의 양반 두 사람이 유의태와 수인사를 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창녕 성대 감댁이라니요?"
  "그댁 마님이 중병이라 하시니 가서 용태를 살피고 오너라."
  "소인이 말씀이오니까?"
  "병세를 들으니 중풍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약재를 갖추어 이분들과 함께 떠나."
  "아니 유의원."
  하고 두 사람 중 연장자인 사십대의 큰갓이 안색을 바꾸며 유의태의 말을 제지했다.
  "아버님께선 꼭 그대를 데려오도록 특별히 당부하시어 우리가 달려왔는데 대체 이잔 뉘란 말이오!"
  "믿어볼 만한 아이외다."

    7
  유의태가 허준은 돌아보지도 않고 두 선비에게 말했다.
  '믿어볼 만한 아이!'
  허준의 목 안에서 침이 말라갔다.
  "보아하니 아직 이자는 신출내기가 아니오!"
  작은 선비의 따지듯한 말에,
  "굳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야 마음이 놓인단 말씀이오? 우선 이 아일 보내어 구완토록 한 후 4, 5일 후엔 내 스스로 건너가리다."
  "4, 5일 후에 떠날 걸 왜 지금은 못 가오."
  "병사에 당장 내가 없으면 아니 되는 중한 병자가 여럿 있소이다. 가면 여러 날 걸릴 노정이니 우선 이 아이와 함께 떠나오."
  "다른 사람은 필요없다지 않는가."
  연장자인 선비가 다시 엄한 눈을 치떴으나 그들을 무시한 채 유의태가 허준에게 명했다.
  "병증일랑 가면서 세세히 들어도 되리라. 채비 차려 속히 떠나거라."
  허준이 아직도 믿기지 아니하여 다시 물었다. 자기도 모를 긴장에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소인 혼자 가도 되오니까?"
  "떠나거라."
  유의태의 대답은 짧은 그 말뿐이었다.
  아버지의 의원으로부터 숨이 턱에 차서 집으로 달려들어온 겸이는 사립짝 안으로 뛰어들자 거푸 '어무이'와 '할무이'를 불러댔다. 지붕 위에 박이 하얗게 익어가는 추색이 무르익은 허준의 집은 쓰르라미 소리가 함빡 어우러진 채 빨간 잠자리만 마당의 빨랫줄 위에 매달려 졸고 있었다.
  안방을 열어젖히고 부엌문까지 열어젖히고 나서야 겸이는 할머니가 아직 떡장사 행상에서 돌아오지 않은 걸 깨달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에 계실 터이었다. 방죽골 우진사댁 사건 이후 어머니는 애써 출타를 삼가는 눈치셨고 제가 아침밥을 걷어먹고 사립짝을 나설 때 의원엘랑 가서 어정거리지 말고 집에서 동생 숙영이의 소꿉동무라도 해주고 놀아라 하실 때 오늘은 마을 어디에 품앗이라도 나가실 그럴 눈친 아니셨던 것이다. 겸이는 부엌을 지나 뒤꼍으로 내달았다.
  한시바삐 알려야 했다. 일곱 살 어린 그의 마음에도 이건 일대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병자들 뒤치다꺼리에 영일이 없던 아버지가 오늘따라 큰갓 쓴 양반이 인도하는 속에 더구나 척 가마까지 타시고 원행을 떠나는 모습은 아들도 생전 처음 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뒤꼍에도 담장 대신 박힌 감나무에 땡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을 뿐 어머니도 숙영이도 보이지 않았다.
  "어무이! 어무이요!"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안타까이 외치며 겸이는 다시 앞마당으로 내달았다. 그 사립짝 안으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어머니와 그 치마꼬리를 붙잡은 여동생 숙영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허준이 유의태의 영을 받아 병자를 보러 창령으로 떠난 사실에 긴장한 건 허준의 가족만이 아니고 꺽새, 영달 들이 더했다.
  스승의 회진이 끝나고 급한 병자의 처치도 끝난 터라 오늘쯤 주막거리 다홍이년네 술동이가 익었을 거라며 병사의 시답잖은 일거리를 상화와 병문이 들에게 떠맡기고 주막으로 몰려갔던 영달, 꺽새가 새 술에 불콰하니 콧등이 익어서 돌아온 저녁 나절 녀적들은 허준의 소식을 듣고 까무러칠 듯이 놀랐다.
  놀란 건 또 그들뿐이 아니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나 들을 겸 진주 부내에 나갔다가 연초에 내의원 취재가 있다는 고대해 마지않던 소식을 듣고 기고만장해서 돌아오던 도지와 임오근도 허준의 소식을 들은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도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고 임오근의 눈은 금세 질시로 인해 충혈되었다.
  우리가 모두 의원을 비웠기 때문에 허준이 대신 간 게 아닌가 하고 영달이가 자존심 하나라도 건질 듯이 사태를 풀이했으나 임오근은 병사 큰 마루에 주저앉아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도지 또한 다른 병자도 아닌 중풍환자를 아버지가 허준에게 맡겼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중풍처럼 무거운 병자는 오늘까지 아버지가 자기에게 허락한 적이 없었는데 왜 허준이는 쁩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제자들이 저마다 스승의 잘못된 조치를 떠드는 소리는 밤 늦게야 돌아온 아들을 맞으러 나왔던 오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대뜸 그 곱지 않은 눈빛은 상화에게 다가섰다.
  "네가 자초지종 아는 얼굴인데 분명히 말해라. 허준인지 그 아일 보낸 것이 스승님이 떠나기 앞서 약제나 먼저 들려보낸 그런 것이냐 정녕 병자를 직접 보아도 좋다는 뜻으로 보낸 것이냐!"
  오씨의 서슬에 어린 상화가 선뜻 대답을 못했고 도지가 대신 내뱉었다.
  "그냥 작은 심부름이라면 여직 상화 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셨지 언제 허준을 동행합디까."
  "그렇다면 더더구나 그렇지, 그런 대가집 병자를 왜 너를 젖혀두고 그놈을 보내. 난 그게 궁금한 게야."
  "궁금할 것 하나도 없소. 허준이 그 사람의 솜씨가 자식인 낼 솜씨보다 윗길이라고 본 탓이 아니고 뭘라고."
  도지가 딴때없이 되알지게 내뱉고 휭 안으로 사라졌다.
  오씨의 얼굴이 벌개졌고 영달이가 그 오씨를 꼬드겼다.
  "스승님이 무언가 귀신이 씐 거올시다. 아무리 재주로 말하면 허준이 그놈이 서방님의 위에 설 수 있습니까. 또 서방님이 아니면 그 다음 차례야 저 오근이형님도 있는 터에."
  "시끄럽다!"
  오씨가 소리쳤고 곧 덧붙였다.
  "안 그래도 내 허준인가 하는 그놈이 내 집서 배운 재주를 가지고 우리 몰래 병자를 보느니 어쩌니 소문날 때부터 바로 보지 않았는데."
  말끝에 오씨가 급히 안으로 향했다. 도지가 사라진 안채 쪽이 아니고 큰사랑 쪽이었다.
  제자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임오근 혼자 그대로 앉아서 한숨과 함께 지금쯤 가마에 흔들리며 창령으로 가고 있을 허준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가 생애를 두고 소원으로 삼는 광경이었다.
  '허준, 그자만 아니었다면 내가 가는 길이었어.'
  무섭게 앙다문 임오근의 입에서 신음 같은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코 고는 안광익 곁에서 책을 보고 있던 유의태가 시선을 들었다.
  중문 여는 소리가 요란하다고 느낀 순간 다가온 목소리는 아내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방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섰다.
  남편의 의원으로서의 재능 외에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는 여자였다. 이 남자와 만난 불행을 아들의 장성에만 위로를 삼는 그 아내의 모진 눈을 유의태 또한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왜 왔는지는 알고 있네. 하나 손이 있으니 잠시 후 내 건너가리다."
  대답 대신 오씨가 남편 앞에 주저앉았다.
  "허준인지 그 아이가 당신에게 무어요?"
  "무어라니?"
  "그 놈을 창녕 모모한 댁으로 떠나보낸 걸 다 알고 있소."
  "그게 무슨 감출 일이던가, 알고 맡고 하게.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려 들지 말고 건너가오."
  "쓸데없는 일? 자식의 장래에 얽힌 일인데 쓸데없는 일이란 말이오?"
  " ..."
  "왜 말 못하시오. 자식도 의원 아니오. 자식이 의원이람 아비란 사람이 의당 일부러 잘 낫는 병자를 골라주어 그 집 젊은 의원 병 잘 고친다는 소문이 나도록 해줘야 옳고 여기저기 대가집일랑 일부러라도 기횔 만들어 내 자식을 보내어 안면을 넓혀주고 이름이 드러나도록 해줘야 옳지."
  "부인 말이 일리가 있네."
  여전히 나직한 유의태의 대꾸에 참다 못한 오씨가 악을 썼다.
  "그놈 떠나보내고 나서 지금 와서 일리가 있다니 무슨 일이오. 나도 다 들었소. 지금 허준이가 간 집이 창녕에서는 모모한 대감댁이라는 걸 내가 모르는 줄 아오."
  " ...?"
  "그런 아까운 데를 자식을 젖혀놓고 다른 것들을 보낸 사유를 말하란 말이오."
  "돌아가시오."
  "대답해요."
  "중풍의 혈행을 다스리는 건 침이오. 그리고 그 침을 잡는 법은 도지의 분야가 아니고."
  "어째요?"
  "또 대가집 대가집 하나 그 대가집이란 일이 성공이 됐을 때는 사례가 후한 법이나 반면 실패했을 땐 그 추궁도 매운 법이외다."
  오씨의 눈이 껌벅였다.
  "아니 그럼?"
  "그럼 이라니?"
  "옳지 그럼, 허준이 그놈을 이 기회에 아예 죄를 씌워 내쫓을 셈으로?"
  "죄를 씌운다는 건 또 무슨 소린가?"
  "그놈은 애초부터 우리 집을 배반했던 놈 아니오."
  유의태가 실소했다.
  "죽도록 좋은 일만 골라서 해도 못다 하도록 사람의 일생이 짧은데 어찌 뻗어나는 싹을 짓밟는 악행을 하리."
  오씨가 다시 그 남편을 노려보았으나 유의태는 더 이상 아내를 돌아보지 않았다.
  병자가 꽤나 위독한 듯 허준의 가마가 창녕현의 서쪽 시오리에 상거한 물슬천 나루에 이르자 성대감댁 하인 서넛이 횃불을 들고 대기 하고 있다가 얼른 가마채를 대신 잡아 교대했다.
  동행하는 선비들도 병자의 안부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건지 이미 밤이 이슥한 시간인데도 요기 얘기를 꺼내는 이도 없이 가마는 다시 달려 허준이 현내의 성대감댁 솟을대문 앞에 당도했을 때는 밤 이경이나 된 시간인데도 노마님의 병을 고칠 의원이 온다는 기별을 받은 성대감댁 권속들이 등불을 들고 허준의 가마를 맞이했다. 한눈에 명문거족의 집임을 알 수 있었다.

    8
  3백여 호 자잘한 현내의 민가를 굽어보듯 동내리 높은 언덕에 자리한 아흔아홉 칸 유독 기와로 덮인 거대한 장원 같은 규모가 종루를 세운 저 아래 관아의 규모에 배는 되어 보였다.
  기다란 행랑을 지나 불을 대낮같이 밝힌 중문 안에 멎자 기다리고 있던 늙은 선비가 약제함을 안고 내리는 허준에게 첫 마디로 명령했다.
  "따라오게. 우선 대감께 인사 올리게."
허준은 늙은 선비를 따라 노소의 하인배들이 줄줄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중문을 통과했다.
  허준이 수석이 청아하게 어우러진 정원을 지나 큰사랑 앞에 이르자 다시 문중의 노소 선비들이 십여 명 대청마루에 미리 나와 서 있는 속에 오랜 관록이 몸에 밴 혈색 좋은 오십대 후반의 남자가 얼핏 보기에도 성대감인 듯한데 거동이 침착하고 내려보는 눈빛이 서늘하도록 차가웠다.
  허준이 허리를 굽히자, "원로에 수고했네. 한데 듣기보다 젊구먼." 했다.
  나직하나 위엄을 지닌 음성이었다.
  "이 사람은 유의태가 아니옵고 그 문도라 하옵니다. "
  "무어라 ? "
  순간 잠시 부드럽던 성대감의 눈꼬리가 치켜올랐다.
  "문도?"
  "예."
  동행해온 아들의 대답에 겹쳐 쩌렁하고 성대감의 노성이 터졌다.
  "유의태가 아니라면 그깐 의원이 어디에는 없어서 산음까지 사람이 갔더란 말이냐."
  순식간에 주위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다시 가서 권하되 내 영이라 이르고 즉시 일어설 기색이 아니거든 잡아끌어서라도 대령시키라밖에!"
  바라보는 허준 따위에는 더 눈길도 않고 함께 다녀온 두 아들에게 혀를 찼다.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허준을 중문에서 안내해온 백발의 선비도, 그밖에 분명 성대감보다는 연상일 문중의 늙은 선비들도 성대감의 비위를 거슬릴 용기는 없는 듯했다. 결국 고개를 떨구고 있던 허준을 동행해온 큰아들이 나서서 조신하게 아뢰었다.
  "유의태의 말이 우선 이자로 하여금 잠시 어머님의 수발을 들게 하노라면 수일 내로 ..."
  "병자의 용태가 조석으로 악화하거늘 수일이라니! 제 어미의 병이거늘 어찌 이리 무심한고! 즉시 밤을 도와 달려가 그잘 데려오란 말이다!"
  말끝에 사랑으로 사라지는 성대감을 향해 허준이 소리쳤다.
  "저를 아니 받아주신다면 물러갈 뿐이오나 저 또한 의원올시다!"
  성대감이 돌아서자 중문서 안내해온 백발의 선비가 허준에게 눈을 부릅떴다.
  "이자가 언감생심, 이 어른이 뉘신 줄 알고 함부로 언성을 높이느냐?".
  "대감께서 어떤 분이시건 병은 의원이 고치는 것이지 벼슬 높은 위세로 고치는 것은 아니오이다."
  "어째?"
  "이자가 감히."
  둘러선 문중의 선비들이 그제야 눈을 치떴다.
  대청 위의 성대감이 몇 발 허준 쪽으로 향해왔다.
  "너 지금 무어라 했느냐?"
  " ... 병은 이름 드러난 의원만이 고치는 건 아니올시다."
  "그 말은 네 재주가 네 스승의 의술을 능가한단 말이렷다."
  허준이 심호흡했다.
  "소인 또한 의원이라는 말씀을 올렸을 뿐 스승님을 욕보이는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성대감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하오면 돌아가오리다."
  허리를 굽혀보인 허준이 문간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 등뒤에 성대감의 소리가 났다.
  "게 서라!"
  돌아보니 조소는 사라졌으나 그 눈빛은 아직 차가웠다.
  " ..."
  "어서 다가서라지 않느냐. 이자가 고개를 뻣뻣이 영 예를 모르는 자로고."
  안내해온 백발의 선비가 거푸 소리쳤다.
  "어서 허리를 굽혀라."
  "난 이 집에 병을 고치러 온 것이지 굴신하러 온 건 아니올시다."
  순간 주위가 앗 하고 그 허준을 보며 숨을 삼켰다.
  "다가오너라."
  성대감의 한마디가 다시 떨어졌다.
  허준이 그 성대감 앞으로 다가섰다.
  꿰뚫듯한 성대감의 눈빛이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허준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허준 자신도 몰랐다.
  대감(종2품 이상의 문무관)이라 불리는 양반 중에서도 양반인 그 권세 어린 사람 앞에 사회적으로 하등직업인 의원 따위가 왜 굴신을 않는단 말인가.
  굴신은 커녕 죽으라면 죽는 시늉인들 마다할 수 없으리라.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허준의 눈길이 발치로 꺾였다.
  그 허준의 모습 위로 둘러선 큰갓 쓴 양반들의 위세 어린 눈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허준의 입속이 메말라갔다.
  오면서 허준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자기에게 주어진 이번 기회의 뜻을 생각했었다. 7년 동안 갈고 배운 정성을 이 기회에 펼쳐 스승 유의태의 기대에 보답하리라는 그 기대가 한마디로 내쳐진 데 대한 비분의 한마디였는지도 몰랐다.
  이미 주워 담을 수 없는 그 절망의 한마디 ...
  하나 다음 순간 성대감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의 명령이었다.
  "병자를 보여주어라."
  그 성대감을 바라보던 허준의 고개가 다시 떨어졌다.
  의료함을 들고 있는 그 허준의 손은 온통 땀투성이였다.
  결국 허준의 반항 어린 한마디는 대감의 위엄에 도전한 한마디가 아니라 허준이 스스로의 운명에 도전한 한마디로 바뀐 것이었다. 문병 온 마님들과 아낙들이 새로 나타난 젊은 의원에 대해 숙덕거렸다.
  호사스러운 치장으로 메운 방안에 성대감의 아내 정경부인 심씨가 누워 있었다. 오래 기동을 못하여 몸이 부은 듯했고 얼굴에 땀이 배있지 않았다면 시체로 착각하리만큼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 기가 돌았다.
  그리고 동자조차 가까스로 굴리는 그 몸은 오른쪽이 반신불수였다. 허준은 병자를 본 순간 오면서 상상했던 상태에 비해 병세가 더 침중할 걸 깨달았다.
  그 암담해진 허준을 향해 성대감 이하 가족들의 눈길이 따갑게 꽂힌 채 주시했다.
  특히 어머니의 주야의 간병을 맡은 혼전의 막내딸이 남달리 수척한 모습으로 그 묵연히 앉아 움직이지 않는 허준을 향해 눈물을 떨어뜨렸다.
  "전신에서 몸 반쪽을 쪼개어놓은 듯이 오른쪽은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하네."
하고 산청서 함께 온 큰아들이 새삼 자기 어머니의 병세를 설명했다.
  "한다하는 의원들을 모두 끌어대 보았네만 며칠 용태를 보다가 모두 그냥 돌아가버렸네."
  성대감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 허준은 의연히 눈을 감은 채였다.
  병자의 성한 손의 맥을 짚은 자세로 허준의 감은 눈은 병자의 몸속에 숨은 병균을 보고자 애썼다.
  그 허준의 침묵이 반 식경이나 지나 주시해 앉은 식구들의 눈이 모두 의아하고 의혹에 차갈 때야 차츰 병자의 병든 구석구석과 마디마디들이 허준의 마음의 눈에 비치어왔다.
  그리고 그 마음의 귀에도 병자의 가냘프게 투닥거리던 맥이 차츰 살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커다랗고 처절한 맥박소리로 허준의 가슴속으로 전해왔다.
  "가망이 없다는 겐가?"
  허준의 침묵을 참다 못한 성대감이 이 무명의 젊은 의원의 옆얼굴을 쏘아보았다.
  허준의 입이 처음으로 열렸다.
  "꼭 심부름할 사람 외는 안채 마당에 인기척을 없애주소서."
  "건 왠가?"
  성대감의 그 질문은 허준의 다음 말로 묵살되었다.
  "베개가 높습니다. 반의반으로 낮추어주시오."
  "다음 또 뭔가?"
  성대감이 아직 반신반의의 눈으로 물어왔다.
  "방안의 공기가 탁합니다. 요강을 비워주소서."
  "대소변을 받아낸다 함은 병자가 가장 수치스럽게 여기는 터입니다. 그러니 사용할 때 외는 방안에 병자의 냄새가 아니 나도록 해주소서."
  딸이 대신 일어나 요강을 찾아 들었고 그때 필사적으로 입을 실룩이던 마님이 허준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너무 환한 불은 병자의 눈을 쓸데없이 피로하게 할 뿐올시다."
  마당에서 큰아들이 문병 온 대소가 마님들을 돌려보내는 소리가 나직이 나고 있었고 요강을 들고 나갔던 처자가 젖먹이나 벨 작은 베개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만하면 되올지?" 하고 허준에게 베개의 높이를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준 허준은 말없이 방을 나섰다.
  좀전까지 보이지 않게 북적거리던 마당엔 아마도 정경부인의 몸종인 듯한 나이 든 여종이 조신하게 손을 맞잡고 서 있다가 홀로 마당 가운데로 와 서는 초췌해 보이는 젊은 의원을 건너보았다.
  허준은 야심한 객지의 밤공기를 거푸 폐부 깊이 들이마셨다.
  다섯 번 ... 여섯 번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하수가 비친 맑은 밤하늘에는 새벽을 맞이하는 삼태성이 유난히 반짝였다.
  그 차가운 야기 속에서도 허준의 얼굴에는 자꾸만 뜨거운 혈기가 확확 느껴지고 있었다.
  평범한 양민의 신분, 오로지 그것만 소망하며 용천을 떠나 7년 ... . 드디어 자기의 운명에 도전하는 가장 큰 고비에 섰다는 긴장이 팽팽하게 온몸을 죄고 있었다.

    9
  "기다리면 뻔한 일 애걸복걸 너무 속태우지 마시오."
하고 영달이가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임오근에게 잠이 덜 깬 소리로 말했다. 코고는 재자들 속에서 혼자 술추렴을 하고 있던 임오근이 그 영달을 돌아보았다.
  "속을 태우다니?"
  "형님이 잠 못 이루는 건 허준인지 그놈 때문이 아니겠소."
  " ..."
  임오근은 부정하지 않고 침묵한 채였다.
  "세상에 풍병 앓는 병자 한둘 보았소. 허준 따위의 재주로 낫굴 리 만무요."
  " ..."
  "두고 보시오. 그놈이 병을 고쳐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질 테니까."
  " ..."
  "아까 상화놈한테 다시 자세히 물어보니 저도 들은 말이라곤 합디다만 아예 온몸 다 비틀려 돌아가는 상병신이라던데 뭘. 하긴 그 정도 병자니까 여기까지 의원을 찾아오지 창녕엔 의원이 없어서 사람 보내왔겠소, 그렇잖우."
  " ..."
  "흥, 이번에 그놈이 딱 죽을 구덩이에 빠진 거라고."
  "죽을 구덩이?"
  "그렇다니까."
  제물에 신이 나 발딱 일어나 앉은 영달이가 계속했다.
  "나도 내 나름대로 허준이란 놈을 아는데, 아 스승님 몰래 뒤로 병자를 받아보는 놈 아뉴. 그런 놈이 이번 기회를 마다하겠소? 뻔하다구. 그새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하고 넓죽 달려드어 침을 찌르네 어쩌네 날뛸 게 뻔하지. 수일 후 스승님 오시기까지 팔짱 끼고 기다리겠소."
  "그래서 뻔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그러니 지 재주에 맞지도 않는 병자를 쑤셨다가 다리깽이 부러져 도망쳐올 게 내 눈엔 선하다고."
  "물론 나도 허준이 풍병환자를 낫굴 그런 경지의 재주가 아닌 걸 알아. 하나 낫구고 안 낫구고 이전에 스승님한테 허준이 뽑혔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게야."
  밤새 세 병째 술을 퍼마셨는데도 임오근의 머리는 술이 취하치 않고 있었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이번 일 하회를 본 후 유의태가 정녕 자기의 서열을 허준의 밑에 둔다면 이 집을 청산할 생각이었다. 그 청산에 앞서 유의태와 단독면담을 할 용기를 자신에게 북돋우려 그는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수제자라는 확증을 유의태가 거부할 경우 ...'
  미련없이 유의태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미련이라는 것에 조건이 있었다. 허준이나 유의태가 잘 되라고 말없이 떠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억울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갈 순 없어.'
  그는 안광익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데려온 여인이 궁녀라는 사실도 ...
  그런다면 안광익을 보호하고 있는 유의태는 누구의 입에서건 관에 고변 한마디면 집안은 쑥대밭이 될 게 뻔했다.
  임오근의 마음속엔 허준에 대한 미움이 유의태의 파멸에까지 치닫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기다린 세월인데!'
  마을 안에 낭자하게 울어대는 새벽 닭소리를 한 귀로 들으며 임오근은 반도 안 차는 마지막 소주잔을 목 안에 탁 털어넣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새벽은 늘 허전했다. 그러나 오늘 새벽만은 허전하지 않았다.
  그녀도 남편의 이번 창녕갈이 남편의 운명을 거는 길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모른다. 의술의 어느 정도가 사람의 병을 맘놓고 다루는 경지인지. 또 남편의 의술의 경지가 남편이 들려준 유의태나 안광익이 펼친 그 구침지희에 달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하나 얼마 전 본의 아니게 병자들을 받아들이고 그 병자들을 낫우었을 때 남편의 의술도 웬만치 틀이 잡힌 지식의 바탕 위에 섰다는 걸 확인했었다.
  더구나 그 일로 불려간 남편이 스승 유의태에게 오히려 그 처방의 정확함을 크게 칭찬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쩌면 지난 7년 동안 남편의 저 불철주야 각고의 정진은 가족인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적어도 유의태라는 거목이 촉망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도 짐작한 것이다.
  그 증명이 이번의 단독 창녕행이 아니겠는가?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 그러나 그 기쁨이 큰 만큼 그 만큼 큰 불안이 밤새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처음이라는 사실에 남편은 서둘지나 않을까? 더구나 가마에 모셔져 간 대가댁 병자요, 그 멀리서 찾아올 정도였다면 범상한 경지 이상의 의술을 요구하는 병자일 것이다.
  행여 병자가 죽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건 남편 허준의 끝장이요 자기의 끝장이요 가족의 끝장일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망상을 떨어낼 듯 마구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이 업게 해주소서. 지난 7년 동안 남편의 저 엄청난 마음고생이 이번 기회에 말끔히 씻겨지는 그런 기회가 되어주소서.'
  그러자 불안한 생각은 다시 머릿속에서 고개를 들고 꿈틀거렸다.
  그녀는 방을 나서 새벽 찬 공기 속에서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그 의원 어떡하고 있느냐?"
  첫새벽 기척을 내고 들어온 큰아들에게 성대감이 물었다.
  "만석이놈에게 길을 물어 물을 길러 가더니 좀 전에 돌아왔습니다."
  "물을 길러 가다니, 무슨 물?"
  "정화수를 뜨러 갔던 모양올시다."
  "그런 일이야 사람을 시켜도 될 일이어늘 병자의 머리맡을 비우고 나다닌단 말이냐."
  아들이 잠시 후에 말했다.
  "저도 같은 말을 했더니 어머님이 무척 허해 계시어 우선 몇 첩 약을 드신 연후에 침을 쓴다 합니다."
  "약재 이름을 물어보았느냐?"
  "태도가 근엄하여 차마 묻지 못했사온데 약재는 준비해온 것인 듯하옵고 약도 손수 달일 모양올시다. 불피우는 일에까지 매사 제 손으로 하며 무얼 도울 일이 없느냐 물어도 묵묵부답올시다."
  "내가 약재를 보아야겠어. 유의태란 말은 들었으되 그 밑에 누가 있다는 소리는 들은 바가 없어. 유심히 살펴 일이 추호라도 서툰 듯하면 유의태를 재촉해 데려와야 하리."
  "예."
  방안의 기척을 안 늙은 하인이 기둥의 등불을 벗겨들고 대령했고 대청에 성대감과 아들이 나왔다.
  안채 마당에 나타난 성대감은 약탕관의 김을 요량하고 있다가 몸을 일으켜 인사에 대신하는 초췌한 허준에겐 시선도 줌이 없이 곧장 안방으로 사라졌다.
 그 안방에 들어선 성대감은 어미의 곁에서 꼬박 밤을 지새운 모습의 딸에게 말했다.
  "오라비들더러 대신 있으라 하고 넌 건너가 잠시 한숨 눈 붙이거라."
  "저보담도 의원이 한숨도 눈을 못 붙였습니다."
  "그런 건 개의할 바 없다. 의원이 눈을 안 붙인다고 병이 낫는 것은 아닌즉 의원이라는 것들이 대가집에 오면 병은 못 고칠 바에 공연히 부지런한 걸로 공을 메우려 굴기도 하는 것들인즉."
  "하나 이분은 밤새 어머님의 머리맡에서 숨소리 하나하나 귀기울이고 그 정성이."
  "정성 얘기도 할 것 없다. 정성으로 낫구는 병이면 네 어미 병은 벌써 나았어, 병을 낫구기 전에 의원을 의원으로 볼 필요 없어."
  그 성대감의 등뒤에서 허준의 소리가 났다.
  "두 분께서 나가주시지요."
  돌아보니 허준이었다.
  "나가라니, 누구보고 하는 소린가?"
  "병자는 밤새 고통에 시달리다가 좀 전에야 눈을 붙이는 중올시다. 머리맡에서 수선스레 굴지 말아주소서."
  "밖에 약을 달이는 모양인데 그 처방은 유의태의 것인가?"
  "왜오니까?"
  "묻는 말에만 대답하거라."
  "제가 조제했습니다."
  "임의로?"
  "스승님도 병세를 들어 짐작할 뿐 아직 병자를 못 보고 계십니다."
  "무슨 뜻인고?"
  "보지 않고서는 약을 지을 수 없다는 뜻올시다."
  "네가 혼자 미리 온 것은 네 스승이 오기 전까지 간병차 온 것으로 아는데 함부로 네가 약을 지을 수 있느냐."
  "제가 아는 병이므로 짓습니다."
  " ..."
  "네가 아는 병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만은 그건 낫굴 자신이 있다는 말이냐?"
  " ..."
  "그간 모모라 하는 의원들이 저마다 찾아와 모두 큰소리치며 병자에게 다투어 독한 약을 먹이는 걸 보았다. 병자가 애처로워하는 소리니라. 정녕 밖에 달이고 있는 약은 분명 병잘 낫굴 자신이 있는 약이더냐?"
  "의원은 병을 두고 다짐을 하지 않습니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란밖에 ... 낫굴 자신 있느냐?"
  "없습니다."
  " ..."
  " ..."
  "하나 병자의 고통을 생각하면 배운 바 의술과 정성을 다하여 낫우고자 애쓰는 것이 의원의 소임일 뿐 반드시 낫운다 못 낫운다의 다짐은 아니합니다."
  " ... 그래?"
  "나가주시지요."
  " ...!"
  "나가시오!"
  허준이 대감처럼 소리쳤고 성대감이 그 만만치 않은 무명의 의원을 마주 쏘아보았다.
  밖으로부터 방문을 벌컥 열고 작은아들이 뛰어들었고 그 앞으로 성대감과 큰아들이 나가며 방문이 다시 닫혔다.
  방안은 다시 고즈넉이 조용해졌다.
  " ..."

    10
  읍내서 시각을 알리는 바라 소리가 들려왔다. 허준이 와서 사흘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온 문중과 집안 식구들이 하늘처럼 높이 보며 언동을 삼가는 대감에게 조차 의원으로서의 요구가 거침없는 허준의 태도로 인해 이제는 대감도 아들들도 병자가 있는 안채에의 출입을 조심하고 삼가는 분위기가 돼 있었다.
  첫날은 하녀를 시켜 개다리소반에 두어 가지 반찬으로 청지기의 받으로 차려내오던 식사와 행랑채에 마련했던 잠자리가 이틀 후부터 잠자리는 큰아들이 기거하는 작은사랑으로 바뀌었고 밥상 또한 며느리들이 중문 밖까지 지휘하여 나이 든 여종 둘이가 통영산 소반에 넘치는 음식과 곁들여 작은 번상에도 따로 만든 반찬을 올려 들여보내었다.
  허준은 사흘 동안의 보약으로 병자의 체력을 웬만치 회복시켰다고 보자 시술의 시각을 동이 트는 시각으로 정했다. 특히 동이 트는 시각으로 정한 것은 밤 사이 천지에 덮여 있던 음기가 개이고 일출과 함께 천지에 퍼지는 양기의 정, 그 생육의 기운을 병자에게 도입한다는 유의태의 침술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시술 시각이 묘시(새벽 5시부터 7시)임을 전해 들은 성대감과 두 아들도 의관을 정제하고 건너왔다.
  성대감은 좀은 놀라고 있었다.
  그 재주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젊은 의원은 도착 후 사홀 동안 거의 잠을 이루지 않고 병자와 주야의 고통을 함께 하며 병자가 먹고 마시는 음식을 일일이 스스로 간심한 점이며 약제를 달이는 숯불의 과하고 덜한 점도 일일이 자신의 손으로 조절하고 딸이 대소변을 받아내는 짬 이외엔 병자의 머리맡에서 촌시도 떠나지 않는 근직함을 보였다.
  게다가 정승 반열인 자신에게조차 의원으로서의 요구를 거침없이 하는 패기가 하루하루 겪으면서 상쾌하게 느껴지던 것이다.
  이윽고 목욕재계한 허준이 들어와 병자의 곁에 앉아 처음으로 그 침통을 풀었다.
  딸이 곧 등잔을 들어 허준의 손 밑을 밝혔다.
  이 사흘 사이 성대감의 딸은 허준의 눈길 하나만으로 그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를 알도록 마음이 통하고 있었다.
  그 등잔의 불빛 속에서 허준의 손이 병자의 머리 꼭대기를 헤집기 시작했다. 성대감과 아들들의 목젖이 똑같이 마른침을 삼키며 오르내리다가 멎었다.
  허준의 손에 들린 참침이 조용히 병자의 머리의 한복판을 겨누며 반짝였다.
  '여기가 백회혈 정신을 맑게 하고 양기를 움직이는 곳.'
  허준의 침머리가 그 병자의 정수리의 숫구멍을 찾아 박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머릿속에는 일찍이 유의태가 아들 도지에게 침술의 정수를 가르치며 한 말이 비껴가고 있었다.
  "신체에 이름붙은 각 혈은 좁쌀 알갱이만하다. 그러나 그 좁쌀 알갱이만한 면적 속에서도 가장 정한 곳은 오직 한 군데 머리카락을 뽑으면 생기는 그런 작은 구멍 하나뿐이다."
  그때 도지가 물었었다.
  "왜 그러하오니까?"
  "이치를 들으리라."
  물꼬가 막혀 종당에는 커다란 수로가 온갖 잡물로 뒤덮여 거기 괸 물이 온통 썩어가는데 물꼬의 아무 곳이나 작대기로 쑤신대서 물꼬가 트이지 않는다.
  안 쑤시는 것보단 변화는 줄 수 있되 전체의 물꼬를 확실히 열어주는 길은 애초 물꼬를 가로막은 한 개의 이물질을 들어내는 길이다. 그 한 개의 이물질의 위치가 곧 머리카락 뽑은 듯한 침혈이다.
  그때 도지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었다.
  "살가죽에 싸인 사람의 몸통 속에 숨은 그 구멍을 그토록 정밀하게 찾을 수 있으리까?"
  "어려운 것이고말고. 하나 실망할 것은 없는 것이 그 위치가 없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있다는 사실이다."
  "하오면 그걸 보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으리까?"
  "육안으로 더듬되 심안으로 보는 길뿐."
  그때 도지가 절망처럼 뇌었었다.
  "심안 심안." 하고.
  "병자의 가슴을 풀어주시지요."
  성대감과 아들들이 잠시 그 말뜻을 모르다가 벌겋게 상기되었다.
  "가슴이라니, 가슴 어디를 말인가?"
  허준이 성대감에게 다시 말했다.
  "병자는 예를 차리지 않는 것올시다. 두 젖가슴의 그 바로 아래 상완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피해가지 못할 곳올시다."
  "풀거라."
  하고 성대감이 딸에게 말했다.
  그 다음 허준이 요구한 곳은 음교였다. 부인병에서 특히 지나칠 수 없는 배꼽 아래 한 치에 위치한 지점이었다. 혈의 위치가 설명되자 침착했던 성대감도 안색이 변했고 죽은 듯 누웠던 병자가 무어라 외치려 들었다.
  허준이 강하게 병자에게 말했다.
  "숱한 부인들이 죽을 병에 들었으면서도 부끄러운 곳을 보이지 않으려 목숨조차 잃는 일이 허다합니다. 하나 세상에 아직 의원 중에 여자가 없습니다. 참고 견디소서."
  "그곳을 취하지 아니하면 병자가 죽는다고 말하고 있는 겐가!"
  새삼 설대감이 노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허준의 소매를 쳤다.
  "죽지는 않사오나, 하나 병을 낫운다는 희망은 버려야 하오리다."
  "싫소."
  하고 병자가 외쳤다.
  "차라리 못 나아도 싫소."
  하고 노마님이 다시 소리쳤고 딸이 울음을 터뜨렸다.
  허준이 말없이 다른 손에 감긴 명주수건으로 그 노마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윽고 성대감이 "너흰 나가거라." 하고 조용히 말했다. 허락이었다.
  두 아들이 나가자 허준은 딸을 보았다. 촛대를 든 딸의 손은 떨릴 뿐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허준이 노마님의 치마를 젖히고 다가든 성대감이 손수 늙은 아내의 하반신을 노출시켰다. 허준은 외면한 채 노마님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허준의 시술이 끝났을 때는 날이 훤히 밝은 시각이었고 풍부(뒤통수 아래), 지기(무릎 안쪽 뼈), 중봉(다리의 복숭아뼈), 후정(뒷머리 꼭대기) 등 또 한 차례 침머리가 박혔다 뽑혀 노마님은 병고보다 울음으로 탈진하여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만 뒤였다.
  잠든 노마님의 숨결을 살피다가 물러나온 허준 또한 큰사랑에 성대감이 손수 밥상을 받아놓고 겸상하기를 기다린다는 전갈을 받았으나 소세를 마치자 그대로 방에 들어 깊은 잠 속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한나절이나 되어서 잠을 깨자 그 머리맡에는 갈아 입을 새 옷 한 벌이 조신한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급한 병을 대강 마치고 곧 오리라 하던 스승 유의태는 닷새째가 되는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여드레째 되는 날 하오에 산청에서 달려온 건 다른 사람 아닌 임오근이었다. 그리고 그 임오근은 사랑채로 안내를 하는 청지기로부터 마님의 환후가 한결 가벼워졌다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또 그 임오근을 만난 성대감이 스승 유의태가 생사의 어간에 처한 병자를 만나 달려오지 못하고 있다는 전갈을 드렸는데도 아쉬운 빛을 보이지 않는 데서 또 놀라고 말았다.
  허준이 유의태 밑에 자기와 함께 있는 문도노라 정중히 소개를 하는데도 노마님은 그저 잠시 시선이 왔을 뿐이고 어설프게 맨 매듭을 허준에게 보이며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는가?"
  "힘드시거든 누워서라도 좋으니 쉬어 쉬어 하소서, 매듭을 꼭 매지 말고 풀었다 매었다 생각날 적마다 자주 손마디를 움직여 버릇하소서."
  "그러리."
  하고 다시 노마님이 한쪽 입가를 씰룩이며 임오근의 가슴을 도려내는 소리를 했다.
  "내 평생에도 숱한 의원을 겪었지만 큰소리치고 약이나 달여주고 뒷짐지고 차도나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인데 젊은이는 대견한 데가 있네."
  "스승님이 행하시는 일을 닮으려 할 뿐 소인의 재주는 아니올시다."
  허준의 대답이었다. 이어 들어온 규수가 일어서는 임오근에게는 시선도 줌이 없이,
  "건넌방에 진지 차려놓았습니다."
  하는데 허준을 향한 눈매가 마치 일가 오라버니 보듯 다정한 것도 임오근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광경이었다.
  허준이 성대감댁에 와서 열흘째 되는 날 새벽이었다.
  행랑방에서 잠들고 있던 임오근은 때아닌 시각에 큰사랑 쪽에서 터져 나오는 청지기의 고함소리에 튕겨일어났다.
  무어라 거푸 다급하게 소리치는 속에서 임오근이 들은 건 "큰일났사옵니다. 큰일났사옵니다. 대감마님 대감마님."
  그 소리였고 자다가 뛰어나온 성대감의 영문을 묻는 노성에 "정경부인 마님께서 정경부인 만님께서 ..."하고 경황없이 안방 병자를 지칭한 외침이었다.
  임오근이 뛰쳐나가자 성대감들이 안채로 달려가고 있었고 안채 쪽이 왁자했다. 그 북새통에 끼여 달려간 임오근은 그 안채 병자의 방에서 터져나오는 고함소리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성대감이 열어젖힌 그 방안에는 반신불수에서 가까스로 자리에 일어나 부축받은 채 매듭이나 맺다 풀었다 하던 노마님께서 허준이 야차같은 모습으로 "일어서시오."를 연호하고 있는 그 앞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있었다.
  부축하려는 딸을 허준이 고함쳐 내치자 이윽고 노마님은 허준의 유도를 따라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두 다리를 후들거리며 대청 마루로 나서고 있었다.
  "손 내리지 마시오. 무릎을 드시오. 더 더 무릎을 드시오. 고개를 드시오."
  허준의 고함과 자기 눈을 의심하는 그 경악에 찬 가족들의 눈길 속에서 반신불수였던 마님이 허준을 따라 육간대청을 한바퀴 돌며 마구 눈물을 쏟고 있었다.
  감격한 아들과 딸이 어머니를 외쳐댔고 성대감이 "허의원, 허의원!" 하고 체모도 잊은 채 허준을 쓸어안았다.

    [  6. 비인부전 ]
  정경부인 심씨의 병세가 현저하게 호전됐다. 표현 그대로 신체의 오른쪽이 돌덩이처럼 반신불수이던 그녀의 몸이 확실히 성한 손처럼 되살아나 딸의 부축을 받으며 아침 저녁 마당으로 걸어내려와 몸종이 대령하는 놋대야에서 스스로 소세를 할 만큼 된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의 눈길은 수년 동안 병상에서 기동 못하던 정경부인이 위태로운 걸음으로 마당을 거니는 그 모습 못지않게 말수 적은 모습으로 서 있는 허준이란 젊은 의원을 마치 약사여래불의 재림을 보듯 외경의 눈으로 지켜보며 떠들썩했다.
  그 정경부인이 다시 딸의 부축을 물리치고 당신 스스로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빗기 시작한 것은 허준이 성대감집에 온 지 보름이 되던 날이었다.
  병세가 호전의 증후에서 완치로 이행한 걸 확인한 그날 이윽고 허준은 병자와 가족들 앞에서 앞으로 병자를 간병할 제 명심할 조목들을 적어 내주고 산청으로 돌아갈 뜻을 비쳤다.
  "더 이상 침술을 시행함이 없어도 괜치않겠는가?"
  성대감의 말씨는 처음의 냉정한 하대에서 이젠 반공대로 바뀌어 있었다.
  "소인의 판단은 그러합니다. 하오나 ..."
  "기탄없이 무슨 말이고 다 말해주게. 그대가 하라는 말이면 내 무엇이건 하리."
  "그런 뜻이 아니오라 소인의 재주는 다 했사옵고 일차 스승님이 다녀가시어 간심하실 일이 남았다 여기옵니다. 다른 걱정은 끝났다고 여기옵니다."
  "정말 고마우이."
  성대감이 지극한 신뢰를 담아 그 허준을 바라보았고 곁에 있던 정경부인이 허준의 한 손을 두 손으로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스승이 그 누구든 다른 사람 다 필요없으니 허의원이 몸소 다만 며칠이라도 내 곁에 있다 가오. 내 결코 쉬이 이대로 헤어질 순 없소."
  그 어머니의 말에 지난 보름 사이 함께 병자를 간병한 딸이 환히 웃으며 역시 간청했다.
  오랜만에 새 옷 입고 몸단장도 한 딸은 그 지극한 효심이 아니더라도 백옥같이 눈부신 피부와 상큼상큼 드는 눈매가 딴 사람처럼 아리따웠다.
  "의원님은 비단 우리 어머님의 재생의 은인이실 뿐 아니라 저희 집안의 은인이시기도 하십니다. 어머님 청대로 며칠만 더 유하고 가소서."
  이어 아들들과 문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리는 말을 했고 이에 허준이 이곳에서의 결과를 한시바삐 스승께 알려야 할 의무와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가족들의 초조해할 정경을 얘기하고 권유에 못이겨 그럼 오늘 하루만 머물고 내일 아침에 떠날 것을 말했다.
  그날 낮 허준의 점심상은 큰사랑 성대감과 겸상이 되어 차려져 있었고 그 자리에 함께 초대된 임오근이가 자기들 방에 정경부인과 아들네와 며느리들이 각각 들여놓는 피륙선물들이 거의 한 짐이나 된다고 귀띔하며 이런 사례는 일찍이 스승님도 받은 적이 없노라고 사뭇 흥분된 얼굴을 했다.
  호사한 그 주안상 앞에서 성대감은 손수 허준에게 술 한잔을 따라준 후 이제야 허준의 의력에 관해 여러모로 물어왔다.
  "스승님 밑에서 7년을 수업했사옵고 제 손으로는 그간 십여 명의 병자를 돌본 적이 있습니다."
  "겨우 십여 명의 병자를 본 끝에 이 집에 왔단 말인가?"
  저만큼 딴 상을 받고 있던 문중의 늙은 선비 서넛이 새삼 놀란 눈길을 보내왔다.
  허준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 허준에게 성대감이 말을 이었다.
  "유의태란 이름을 처음부터 몇 사람이 천거를 했으나 인근에도 이름깨나 내세우는 의원들이 수두룩하여 굳이 산청에까지는 사람을 보내지 아니했던 것인데 아무튼 뒤늦게나마 내가 그대를 알게 된 건 하나의 인연일세."
  "황감하옵니다."
  "그대의 의술의 정예함을 보니 과시 유의태의 의술도 짐작이 가. 하나 난 그대가 마음에 드네. 내가 겪은 의원들은 작은 공도 크게 부풀려 내세우는 것들뿐이었는데 그댄 젊은 나이에 갸륵한 데가 있어."
  "과분한 칭찬이시옵니다."
  "몇이던가, 지금 나이가?"
  "스물여덟이 되옵니다."
  "장가는 들었던가?"
  "예 ..."
  "양친은 구존해 계시고?"
  "편모 슬하올시다."
  "자식은?"
  "남매가 있사옵니다."
  "다섯 식구라 ..."
  성대감이 혼자 뇌며 끄덕이다가 다시 허준을 바라보았다.
  "사는 집은 마련을 했던가?"
  허준이 시선을 들어 그 성대감을 바라보았다.
  "집이라 하오시면?"
  "아직 남의 수하에 있다 하면 자네의 기량이 어떻다 할지라도 살림에 큰 여축은 없이 사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묻네. 장만을 했던가, 집은?"
  허준이 얼른 대답을 못했다.
  "내가 그대에게 꼭 무엇인가 하나 해주고 싶은데 집을 한 채 지어주면 어떻겠나?"
  국을 떠 입으로 가져가던 임오근의 숟가락이 정지했고 허준은 멍해졌다.
  "이미 포기했던 사람을 살려준 은혜인데 물질로 논한다 함이 되바라진 일이긴 하나 내 정이 또한 그렇지 아니하니 응낙하도록 하게."
  임오근의 국숟가락이 허공에서 후들후들 떨었다. 허준이 대답했다.
  "오두막이나마 식구가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집에 살고 있사옵고 병자를 구했다 함은 소인의 재주가 아니라 스승님의 가르침 때문이오니 혹 치사를 주실 양이면 스승님 앞으로 보내주소서."
  "허어."
  하고 성대감이 탄식 같은 감탄의 소리를 냈다.
  "공을 윗사람께 돌리는 건 기특한 일이네마는 그대를 지목해 보내준 유의태에게는 따로 또 내가 사의를 전할 터이고 이건 내가 그대에게 따로 내리는 사읠세."
  임오근의 목젖이 오르내렸다. 허준도 침묵했다. 자기와 식구들이 몸담고 있는 집은 자기 집이 아니고 변돌석의 집이었다.
  7년 동안 춘추로 옷 한벌씩 얻어 입는 외 한푼의 보수도 없이 7년을 버텨오는 자기가 아닌가.
  추우나 더우나 떡목판을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헤매는 어머니와 삯바늘 끝에 우진사댁에서 도둑의 누명을 쓰고 머리끄덩이를 휘둘리던 아내의 고생을 생각하면, 그 어머니와 아내의 뒷바라지 속에 키운 자신의 의술에 대한 보상을 받은들 어떠랴 하는 충동이 허준의 가슴속을 서서히 가로질러갔다.
  이윽고 허준의 입이 열렸다.
  "듣자오니 이미 정경부인께오서 몇 가지 피륙을 싸주셨다 하시니 소인은 그것으로 고마워하옵고 분외의 사례 일랑은 퇴해주소서."
  "허어."
  하고 성대감이 또 탄식하며 그 허준을 바라보았으나 허준은 거절하는 까닭을 부연하지 않았다
.
  그건 언제던가?
  어느날 행색이 가난한 병자를 데려온 낯선 얼굴이 예의 유의태의 말대로 들고 온 몇푼의 돈을 다래끼에 넣었는데 흘긋 그 액수를 짚어본 도지가 발칵 화를 내며 돌아서는 병자의 팔을 잡아채며 "사람이 어찌 이리 뻔뻔해!" 하고 핀잔주어 내보냈는데 또 이런 때야말로 저들의 결백을 내세올 절호의 기회로 여긴 꺽새, 영달 들이 병사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병자 가족들에게 우르르 쫓아가 "야 이자야, 우린 흙 파먹고 사는 줄 알아! 손발이 닳도록 지리산 골짜기 헤매며 그 약재를 지은 거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면박과 욕을 퍼부은 사건이 있었다.
  '그날이었어!'
  그날 부산했던 병사가 조용해지자 유의태는 도지를 불러앉히고 엄히 타일렀었다.
  "의원의 즐거움은 병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데 두어야지 돈을 탐내선 안되느니."
  했고 도지가 그 성깔 있는 얼굴로 맞받아,
  "남정네는 침을 두 대 맞았고 그 여편네한테는 가슴앓이 약 세 첩을 싸주었는데 겨우 한푼 내놓는 눈치올시다. 그건 의원짓 하는 우릴 숫제 깔보는 심보올시다."
  하나 유의태는 "같은 병이라 할지라도 없는 이가 한푼 내놓는 거나 가진 이가 열 냥을 내는 거나 같은 이치가 아니리! 아무튼 의술로 돈이 벌린다는 재미를 맛들이면 큰 의원이 되지 못해." 했다.
  '돈에 맛들이면 큰 의원이 되지 못해 ...'
  아들에게 내뱉던 유의태의 훈도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가슴에 언제적부터 자리잡고 있었던가. 성대감의 집 한 채의 제의를 간단히 거절할 수 있는 자신에게 허준은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그건 절망적이던 정경부인의 병을 고쳐낸 자신의 의술이 바로 스승 유의태에게서 왔다는 감사가 새삼스러운 탓인지도 몰랐다.
  "유의태가 제법 인물이로고. 문도들에게 그런 기백과 품성도 심어준 걸 보니."
  성대감이 좀은 서운한 얼굴로 집 한 채의 제의를 철회했고 오히려 임오근이 바늘방석에나 앉은 듯이 몸을 자꾸 비틀며 허준에게 어떤 눈짓을 계속 보내고 있었으나 허준은 묵묵히 오랜만에 평화로운 점심밥을 마지막까지 비웠다. 갑자기 스승 유의태가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허준의 코끝이 울고 있었다.
  점심상이 물려나가고 허준이 안채 정경부인의 차도를 살피러 건너가자 한 방 가득히 몰려와 병자와 웃음꽃을 피우고 있던 귀부인들이 다시 일일이 허준의 의술을 칭찬하며 문중에 몇 사람 병자가 있으니 보아주고 가도록 부탁을 했고 그러자 정경부인이 그동안 자기로 인해 연일 잠도 못 자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런 사소한 병자로 이 사람을 괴롭히려 말게, 하며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그 밝은 모습은 이미 병자가 아닌 완쾌한 모습이었다.

    2
  정경부인 방에서 십여 명 여인들의 체취와 진동하는 지분 냄새 속에서 허준이 가까스로 해방되어 안채 중문 밖을 나서자 허준을 기다리고 있던 청지기와 임오근이가 이번에는 성대감의 아들 형제와 그 항렬의 문중 선비들이 따로 술상을 마련해 놓았노라며 기어이 작은사랑으로 데리고 갔다.
  이 사람 저 사람 권해오는 미주 속에서 이날 허준은 대취했다. 보름 동안을 옥죄어 있던 긴장으로부터의 해방감, 그리고 형제가 솔선하여 반상을 파탈하여 스스럼없는 분위기를 만들어준 탓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자기 손으로 위중한 병자를 살려냈다는 자부심과 가슴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의원으로서의 보람 때문이었다.
  해가 져서야 그 주연은 끝났고 마련된 비단 이부자리 속에 쓰러진 뒤 허준은 자꾸만 자기를 흔들어 깨우는 임오근의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귓전에 속삭이는 그 얘기는 성대감댁의 작은댁 누군가가 노자라는 명색으로 두어 뼘이나 될 돈똬리를 가져왔는데 아무래도 동전이 아니고 은전 같다는 소리였으나 잠속으로 떨어져가는 허준의 어렴풋한 의식에는 내일은 산청으로 달려 스승 유의태를 만난다는 기대와 어머니와 아내와 그리고 아이들을 만나리라는 기쁨뿐이었다.
  허준은 꿈을 꾸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자꾸만 믿기지 않아서 새삼 불안에 떨고 또 갑자기 기뻐 날뛰는 가족들과 함께 웃고 있는 자기의 모습들이, 또 제자들에게 냉담하기가 얼음장 같은 유의태에게선 더 이상 기대를 버리고 돈버는 길로 나서자 유혹해 마지않던 부산포의 얼굴들이 두서없이 그의 꿈속을 비껴가곤 했다.
  그 비몽사몽 속에서 허준이 심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뜨자 그 머리맡에는 은제 쌍첩촛대가 켜지고 그 아래 뚜껑 덮인 꿀물 한 사발이 놓여있었다.
  그것이 자기는 지금 꿈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을 깨어가는 허준의 머릿속은 스승 유의태가 이번에 왜 하필 자기를 이곳에 보내주었는지 새삼 그것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다.
  모시러 왔던 성대감의 아들 형제에게 병자의 위중한 증세를 들은 그 유의태는 그때 '믿어볼 만한 아이'라는 한마디로 성대감 아들 형제에게 자기를 데려가도록 이르면서 분명히 자기에게도 수삼 일 후에 뒤따라가마 했었던 것이었다.
  '한데도 임오근을 보내어 하회를 알아오라며 스승님은 오지 않았어 ... 왤까?'
  결과는 성공이다. 그러나 일이 실패했을 경우, 뒤따라오마 해놓고 아니 오는 유의태 또한 문책을 못 벗어날 것은 자명한 일인데 유의태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냉랭한 사내는 이번 일에 허준 자기의 침술이 성공할 것을 미리 꿰뚫어보고 있었단 얘기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수제자'
  친아들인 도지를 젖혀놓을 수야 없을 테지만 이번 일의 성공으로 허준 자기는 임오근을 젖혀놓고 수제자의 상징인 병부잡이가 될지 모른다.
  그건 그냥 병부의 정리가 아니다. 유의태가 출타할 때면 도지와 함께 직접 병자들을 다루어도 되는 권한의 위임도 뜻하는 것이다.
  순간 허준의 귓속에서는 과거 유의태가 한 또 한마디가 왕왕 울리기 시작했다.
  "비인부전이랄밖에!"
  옛날 부산포가 십여 년 허송세월을 억울해하여 이젠 자기도 나이로 보아서도 더 이상 제자 노릇을 할 수 없으니 고약이 됐든 무엇이 됐든 의원으로서 한 가지 살길이 될 확실한 재주를 전수해주십사 애걸했을 때 유의태는 이 말 한마디를 내뱉고 방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부산포도 다른 제자들도 처음 그 뜻을 몰라 쑥덕거리는데 그 부산포를 달래러 술상을 차려낸 자리에서 도지가 그 말 뜻을 설명해줬던 것이다.
  '비인부전'이란 중국의 서성 왕희지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했던 말로서 스승의 안목으로 사정하여 딱 합당한 인물이 아니면 함부로 예나 도를 전해줄 수 없다는 사제간의 냉엄한 도리를 일컫는 경구임을.
  '그건 곧 그 적임자이면 수업 기간의 다과에 구애됨이 없이 수제자로 발탁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눈앞에 임오근의 처절한 눈빛이 다가들었으나 그러나 허준은 스승의 허락하에 마음놓고 병자를 볼 수 있는 수제자의 자리를 뜨겁게 갈망하는 자기를 깨달았다.
  '비인부전'
  허준이 다시 그 말을 뇌는데 방문 밖에 인기척이 났고 만석이라 불리는 안채 늙은 하인이 들어와 정경부인께서 안채에 저녁 진지상을 차리시고 그가 잠 깨기를 기다리고 계시노라는 전갈이었다.
  식욕은 당기지 않았으나 거절할 수도 없는 허준이 소세를 마쳤을 때 아직 술이 덜 깬 임오근이가 나타나 가외로 자꾸 짐이 늘어나 짐을 새로 두 보따리로 쌌노라고 묻지도 않은 말을 했고 그도 허준을 따라 안채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밀양과 고령으로 출가해 있던 이십대 중반의 정경부인의 두 딸이 친정어머니의 쾌차 소식을 듣고 달려와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허준을 보자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예를 표했고 큰딸은 합장까지 해보이며 감사와 은혜란 얘기를 거듭하여 오히려 허준이 몸둘 바를 몰라했다.
  이어 그 딸들이 스스로 움직여 들여오는 나주 호족반 위에 놓인 그릇들은 흔히 쓰지 않는 새 그릇 새 접시인 듯했고 그 맛깔스러운 찬과 안주에 술병도 하나 곁들여졌는데 정경부인이 손수 허준에게 한잔을 따랐다.
  저녁상이 끝나갈 때 성대감과 작은아들이 건너와 화제가 다시 허준의 신상에 미쳤을 때였다. 정경부인은 낮에 집 한 채를 마련해주마는 대감의 제의를 받아주면 자기도 고맙게 여기겠노라며 새삼 허준에게 권했다.
  허준이 다시 고사하자 정경부인은 "그럼 대체 자네의 소원이 뭔가? 웬 고집이 그리 억센가." 하고 사뭇 서운한 얼굴로 허준을 건너보았다.
  "큰 소원 없사옵니다. 미천한 몸으로 태어나 의원으로 생업을 세우려 결심했사오니 작심한 10년 수업 중 아직 남은 3년을 더욱 정진하여 혹 기회가 닿는다면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것이 큰 소원이옵고."
  "자넨 결코 미천한 심지가 아닐세. 나도 제법 사람 가릴 줄 알아."
하고 정경부인이 얼른 부정했을 때 술잔을 들었던 성대감의 손이 멎었다.
  "내의원이라니? 궐내에 있는 내의원 말인가?"
  "그러합니다."
  "한데 취재란 뭔가?"
  하고 생소한 말을 듣는 듯이 허준을 건너보았다.
  이에 말참견할 기회를 못 갖고 어깨가 처져 있던 임오근이 자기들 의원으로 입신하려는 자들에게 내의원 취재야말로 양반가문의 자제들이 알성급제(왕이 임어한 자리에서의 과거 합격)만큼이나 바라고 바라는 출세의 길이라는 것과 내년 3월에도 내의원 취재가 있다고 도지와 함께 진주에서 들어온 소식도 부연했다.)
  그러자 조용히 임오근의 설명을 듣고 있던 성대감이,
  "그래 ..."
  하며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그럼 자네 내년에라도 그 내의원 취재에 응하는 게 어떤고." 했다.
  "무슨 뜻이온지?"
  "자네가 뜻만 세운다면 내가 내의원 취재에 자네가 입격이 되도록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하이."
  허준이 뻥해졌고 임오근의 눈이 화경처럼 떠졌다.
  "대감께 이 사람을 도와줄 그럴 무슨 방도가 계시오니까?"
  정경부인의 말이었고.
  "내의원이라면 내게 낯선 곳도 아니오. 내의원을 관장하는 것은 도제조인데 소재 그 사람이 혹 맡아 있는 게 아닌가 여기는데 ..."
  "소재란 뉘시오니까?"
  작은아들의 물음에,
  "우의정 노대감의 호니라. 지난날 그 사람이 대사헌으로 있을 제 나와 교분이 두터웠느니라."
  " ...!"
  허준은 숨을 삼켰다.
  "나하고는 임의로운 사이일뿐더러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재주 없는 사람을 억지로 천거하는 것이 아니요 마땅히 재주 있는 사람을 천거한다함은, 어떤가 자네의 뜻은?"
  허준의 입이 얼른 떨어지지 못했다. 시임 우의정이며 내의원을 총괄하는 도제조에의 소개장이라면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는 내의원 취재 합격을 이미 반이나 따놓은 것이나 같을지 모른다. 아니 반이 아니라 합격이 보장되는 것인지도 ...
  이때 허준의 침묵을 답답하게 여긴 정경부인이,
  "대감께선 말씀 함부로 하시는 분 아니시네. 또 평생을 환로에 계시며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분이시니 내 소견으로도 그 글월을 받아가면 큰 도움이 되리라 믿네." 했다.
  임오근이가 여부가 있습니까. 도움뿐 아니라 내의원 도제조께서 밀어 주시면 합격은 틀림없습니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이어 성대감을 향해 입을 여는 허준의 목소리도 떨려나왔다.
  "대감마님께서 감히 그러한 소개의 글을 써주시면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집 한 채를 주마 해도 외눈 하나 꿈쩍도 않더니 그까짓 글 몇 자 적어준다니 고개를 숙이는가."
  하고 성대감이 흡족한 웃음을 터뜨렸을 때였다. 임오근이 무릎걸음으로 성대감에게 다가들며 이마가 방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소인 또한 그 내의원 취재에 평생의 소망을 걸고 있는 자이오니 감히 소인에게도 한 자 천거의 말씀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러나 성대감의 시선은 그 임오근에게 가 있지 않고 허준에게 말했다.
  "자리가 파하거든 건너오게."
  하더니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임오근에게 말했다.
  "자네의 의술은 내가 지켜본 바가 없으니 함부로 천거의 글을 써줄 수 없네."
  그날 밤 허준은 큰사랑으로 건너가 성대감이 초서로 적은 석 장짜리 소개의 글을 지켜보았고 그 서찰의 말미에서 성대감의 호가 온재라는 것을 알았다.

    3
  다음날 이른 새벽 허준은 성대감댁을 하직했다.
  평소 같으면 아직 기침하기 전 시각일 터인데도 성대감은 이미 방에 불을 밝히고 일어나 앉아 허준의 작별인사를 받은 다음 대청으로 따라나와 전도에 대한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 성대감에게 허준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간 은혜가 있다면 자기야말로 그 성대감으로부터 정말 꿈에도 상상치 않던 커다란 은혜를 받은 느낌이었다.
  양반들의 벼슬길에 연결된 시임 우의정이라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 우의정 노수신이 내의원 도제조라는 것이 태산처럼 미더운 것이다.
  내의원 도제조에의 소개장은 장차 자신의 앞길을 열어갈 천금보다 더 값진 보물일 것이었다.
  솟을대문 밖까지 나와 전별해주는 정경부인과 그 가족들에게도 허준은 정말 은인의 가족에게 대하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 허준에게 성대감댁에서 사례의 뜻으로 꾸려준 피륙과 "따로 안식구에게 전하게." 하며 싸준 짐들이 합하여 두 짐이었고 정경부인이 "너희가 나루까지 지고 가거라"하여 등불을 든 늙은 하인 만석이가 두 사람 장정을 지휘하여 창녕 서쪽 시오 리 밖 물슬천 나루에까지 따라와 짐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무거울수록 신이 날 그 묵직한 짐을 건네받은 임오근은 안녕히 가시라는 하인들의 인사에 한마디 대꾸도 없이 묵묵했다.
  인적도 없이 동녘이 밝아오는 그 강변에는 간간이 물새가 앙칼진 울음을 흘리며 비껴갔고 그 희미한 강변 모래톱과 갈대밭 사이로 밤 사이의 냉기가 구름 같은 물안개가 되어 피어올라 넓은 강폭의 줄기를 따라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허준이 임오근에게 말을 던졌다.
  "강폭이 넓어 소리쳐 불러야 사공의 잠을 깨울 수 있을지 모르겠소. 혹 이 근처 어디 깨진 징이라도 매달아놨음직 하오만!"
  그러나 임오근은 여전히 대꾸를 않았다. 허준은 소개장을 받아들고 어젯밤 거의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서찰이 발이 달린 물건이 아닌데도 자기가 잠든 사이 어디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어린아이 같은 조바심을 했고 자신의 앞길을 확실하게 열어줄 품속의 서찰에서 연상되는 자기의 앞날에 대한 온갖 가슴 설레는 환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자기의 곁에서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리쉬며 쭈그리고 있는 임오근의 심정도 알 수 있었다.
  '하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
  그 소개장은 남과 나눠가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다행히 성대감댁에서 꾸려준 사례물이 많으니 산음에 돌아가면 임오근을 비롯 다른 문도들에게도 사례물을 고루 나누어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 있소."
  혼자 안개 속을 오가던 허준이 나루의 언덕 위 구부러진 노송 가지에 매달린 징을 발견하고 저만치 임오근 쪽에 소리쳤다.
  임오근은 여전히 일어설 기척이 아니었다. 허준이 함께 매달려 있는 솜방망이로 그 징을 거푸 울려댔다.
  그 깨진 징소리가 제법 우람하게 안개 속으로 울려퍼졌고 그 때아닌 소리에 갈대밭 속에서 수십 마리의 물새떼가 또 한번 요란하게 솟아올랐다.
  "과앙 ... 과앙 ... 과아앙 ..."
  허준이 치는 징소리가 건너 사공의 오두막으로 울려퍼졌을 때였다. 퍼뜩 허준은 자기의 등뒤에서 거친 숨소리를 들었고 돌아보니 임오근의 붉게 충혈된 두 눈이 다가와 있었다.
  "할 말이 있네."
하고 대뜸 그 임오근이가 말했다.
  "할 말이라니?"
  " ..."
  " ... 얘기하오."
  허준이 지난 밤의 침묵과 지금 핏발이 선 그 임오근의 눈을 조금 경계하며 마주보았다.
  돌연 임오근이 허준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무슨 일이오!"
  놀란 허준이 일으키려는 손을 임오근이가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내 소원을 들어주오. 그 은혜 결초보은할 것인즉 ..."
  "대체 왜 이러시오. 갑자기 은혜는 뭐고 결초보은은 뭐요."
  "밤새 생각했소. 날 살려줄 수 있는 건 유의태도 아니고 당신뿐이오."
  " ...?"
  "나를 위해 이 길로 성대감에게 돌아가 내 앞으로도 소개장을 하나 얻어주오."
  " ..."
  "그 은혜는 평생을 두고 잊지 않을 테요."
  이어 그 임오근은 허준의 다리 하나를 얼싸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우리는 ... 저 유의태 밑에서 7년 동안이나 한솥밥을 먹던 친동기 같은 사이 아니오. 그리고 난 거진 15년이나 저 사람 밑에서 종노릇하며 아직도 기를 못 펴는 불쌍한 놈이오. 그러니 제발 부탁이오. 날 도와 성대감댁에 달려가주오. 그대의 청이라면 성대감도 끝내는 마다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사정하오. 이렇게 비오."
  임오근이 허준의 발치에 이마를 박고 오열했다.
  " ..."
  연극에 가깝던 그 과장된 행동은 문득 자신의 피지 않는 신세타령 속에서 진짜 설움으로 번지며 임오근의 입에서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러나 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대감이 그런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닌 걸 허준은 알았다. 집을 한 채 지어주마 한 것은 인정이 아니고 불치로 여긴 아내의 병을 낫운 감사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대감이 자기에게 써준 서찰은 성대감의 지체로 보아 밥먹듯이 쉬운 호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허준 자기에게 한한 호의이지 자기의 간청이라 한들 제3자의 소개장까지 써줄 그런 녹록한 사람은 아닌 걸 안다.
  처음 자기를 거절할 때의 그 냉혹한 눈빛, 또 어제 임오근이 직접 그 청을 드렸을 때 '내 눈으로 보지 않은 너의 재주를 천거할 순 없다'고 냉연히 거절한 사람이지 않은가.
  "가야 소용없소."
  하고 허준이 결론부터 말하고 자기의 의견을 누누이 말했다.
  그러자 이윽고 울음을 추스른 임오근의 눈은 단념이 아니고 살기였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않나  내가 이토록 애걸하는데 가보지도 않고 이렇게 냉정히 굴긴가."
  "가망도 없는 일에 추한 꼴까지 보이고 싶진 않기 때문이오."
  "이런 박정한 자 같으니, 일생의 운이 트이느냐 마느냐 하는 판에 추하고 깨끗한 게 그리 문젠가."
  임오근의 말꼬리가 갑자기 치켜올랐다.
  "한솥밥 먹으며 함께 고생하던 것끼린데 이제 와서 너 혼자 단꿀을 먹겠단 말인가?"
  "나 혼자 단꿀이라니?"
  허준의 눈도 임오근의 살기띤 눈을 맞받자 임오근이가 튕겨일어섰다.
  "단꿀이 아니구 무엇이냐 말이야. 바른말로 이번 일 너에게 기회가 주어진 건 그날 의원에 내가 자리를 비었기 때문이라고!"
  "사실이 그렇다면 당신에게도 장차 이번 나 같은 기회가 있으리라 믿소만."
  순간 임오근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갈지 안 갈지 그 대답만 해라. 만일 안 간다면 너 혼자 잘되라 가만 둘 성싶으냐, 그놈의 서찰을 찢어발기고 말지."
  "무어라? 누구 맘대로. 흥, 뺏어봤자 다른 사람에겐 소용없는 내용이야."
  허준이 소리쳤다.
  안개 속에서 나룻배를 저어오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 나룻배를 향해 허준이 눈길을 돌렸을 때였다.
  돌멩이를 움켜쥔 임오근의 주먹이 무어라 고함소리와 함께 허준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돌멩이는 허준의 귀를 찢으며 금세 허준의 얼굴을 피로 물들게 했다.
두 사내가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언덕을 굴러 모래톱으로 처박혔다.
  허준을 향한 질투와 증오가 임오근으로 하여금 황소와 같은 힘을 내게 하고 있었다.
  그 난투 속으로 길손이 강도를 만났는가 여겼는지 사공이 배가 뭍에 닿기도 전에 노를 거머잡고 "네 이놈!" 고함치며 뱃전에서 뛰어내려 왔다. 늙었으나 건장한 신체를 지닌 사공이 사정도 없이 후려치는 노에 두어 대씩 얻어맞고야 두 사람의 싸움은 끝났고, 그제야 사공을 노려보고 흘겨보는 두 사람이 동행인 걸 안 듯했다.
  하나 터진 상처를 씻고 찢어진 옷을 여민 두 사람은 짐과 함께 배에 오른 후에도 배의 앞머리와 뒷전에 따로 앉아 화해의 말을 않았다.
  그리고 배가 건너 언덕에 닿았을 때였다. 임오근은 자기의 짐을 걸머 메더니 뒤따라 내리는 허준에게는 눈길 한번 줌이 없이 혼자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허준이 의령 경내의 자굴산 아래 주막에 이르러 미투리를 갈아 신을 때였다. 묻지도 않는데 주모가 허준의 행색과 보따리를 보고,
  "좀전에 꼭같은 보따리를 진 사람이 지나갔는데."
  하며 고갤 갸웃했다.
  그건 임오근일 것이었다.
  물슬천에서의 싸움에도 불구하고 품안에 성대감의 서찰을 지닌 허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나 자기보다 곱절의 세월을 지냈으면서 아직 자기와 같은 희망도 발견 못한 그 임오근이 어떤 처절한 심정을 깨물며 이 길을 지나갔을지 알 듯했다. 허준은 산음에 이르거든 시비야 여하간에 자기가 먼저 화해의 말을 걸어 임오근의 아픈 가슴을 위로해주리라고 마음먹었다.

    4
  허준이 저녁도 거른 채 산음현 남쪽 2리 장선나루를 건넌 건 창녕을 떠난 그 하루가 지나고 야경 두 점이나 된 깊은 밤중이었다.
  드디어 산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1백 30리 쉬지도 않고 달려온 하룻길이었다.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짊어진 짐은 자기의 성공의 상징이요, 특히 오는 동안 꿈이 아닐지 수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 내의원 도제조에 향한 서찰은 장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걸 어서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그 의미를 설명할 제 환희작약할 아이들, 고생만 해온 어머니와 아내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젠 고생이 끝났소. 작정한 10년을 채울 것도 없게 되었소. 나도 내년 3월 내의원 취재에 응하겠소. 이 서찰이면 합격은 떼어놓은 당상인 즉, 하하하.'
  척지산 골짜기를 단숨에 가로질러 장선나루 갈대밭에 이르러 임자도 모를 고깃배를 저어 건너 산음땅을 밟을 때 땀투성이 허준의 발길은 구름을 타고 가듯 가벼웠다.
  산음 읍내의 불빛이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지점이었다.
  '자고 있겠지, 아니 아내는 깨어 있을까?'
  코앞으로 다가오는 집을 바라보면서 허준이 다시 자문자답했다.
  '그리고 어제 임오근을 만나 내 성공의 얘기를 들었겠지.'
  아니 임오근은 해가 질 임시까지 당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자기처럼 1백 30리 길을 서둘러 달려올 의욕도 없이 자기가 지나쳤을 중도의 어느 주막집가에 주저앉아 내일 날이 밝을녘에야 의원에 당도할지도 ...
  '그렇다면 아내도 어머니도 나의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땀이 밴 허준의 얼굴이 문득 웃었다.
  으스름 달빛 아래 밤이슬을 흠뻑 쓴 자기 집이 보인 것이다.
  그때였다.
  고요한 집안에서 돌연 인기척이 달려나왔고 그건 아내였다.
  "서방님이 아니시온지?"
  보름 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목소리는 비명과 같은 외침이었고 허준이 "나요." 하고 마주 소리쳤을 때 그 아내가 다시 집안으로 돌아서며 외쳤다.
  "어머님 어머님! 겸이 아범이 돌아왔습니다."
  이어 "어디 어디!" 하는 어머니의 다급한 소리와 함께 두 여자가 오히려 뻥해져버린 허준 앞으로 내달아왔다.
  엎어질 듯이 달려온 어머니가 섰다.
  "애비구나, 애비야!"
  "예, 저올시다."
  오면서 수없이 예행연습한 감격의 상봉을 잠시 잊고 허준이 맥빠진 대답을 했을 때 다가든 어머니와 아내가 주춤 걸음을 세우더니 그 아들과 남편을 바라보았다. 길도 아닌 길을 달려온 허준의 하반신은 이슬과 풀잎에 젖어 엉망이었고 미투리 또한 흙투성이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두 여자는 말 이전에 눈대중으로 아들과 남편의 이번 길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려 드는 것 같았다.
  허준이 저도 몰래 만면에 웃음이 번졌다. 두 사람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었다. 동시에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 아들을 얼싸안았고 역시 한 발 더 다가든 아내가 눈물이 글썽한 채 그러나 얼굴은 활짝 웃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쓸어안는 허준의 눈에 저만치 장독 뒤에 치성을 드리던 가물거리는 촛불과 정안수 한 사발이 보였다. 놓으려던 허준은 어머니를 다시 한번 쓸어안았다.
  온 방안이 난장판이 되었다.
  "그러니 그건 ..."
  하고 어머니가 이 꿈 같은 현실 앞에서 아들이 들고 온 성대감의 서찰을 다시 보았다. 정경부인의 병이 얼마나 위중했었으며 그러나 이젠 깨끗이 나았다는 얘기, 이에 온 문중이 자기를 축하해주고 특히 성대감이 자기의 앞길을 위해 이걸 써주었노라 허준이 세세히 설명한 끝이었다.
  "이것이 과연 내게 무엇인지 어머니도 채 모르십니다. 생각해보소서. 누구 하나 아는 이 없는 한양에서 그런 대단한 사람들의 후원을 받는다함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오니까? 이것만 있으면 저는 이미 취재에 붙은 거나 마찬가지올시다."
  "애썼다, 정말 대견해."
  "저두 좋은 일만 겹치어 꿈만 같습니다."
  허준이 벙글거리며 마악 아내가 차려들고 들어오는 밥상을 받으며 자랑스레 일렀다.
  "당신이 오늘까지 맨날 손톱이 갈라지도록 남의 옷만 지었소만 이젠 우리 식구들을 위한 옷도 지으시오. 핫핫. 솜씨내어 우선 어머님 옷을 지어 드리고 당신 것도 짓구려. 겸이 저 녀석 것도 새로 지어 입히고."
  "아버님, 저는요."
  하고 숙영이가 말했고 허준이 웃었다.
  "여부가 있느냐. 암 너도 해 입어야지."
  숙영이가 좋아서 할머니의 목에 매달렸고 그 손녀를 돌려안으며 어머니가 다시 눈물이 글썽했다.
  "고맙다, 잘했어 ... 그 숱한 고생 견뎌내어 참말 보람이 있었 ... 어 ..."
  이날 아내의 몸은 혼인을 맺던 그날 밤처럼 뜨거웠다.
  그 아내를 허준 또한 지난날의 그녀의 고생을 한꺼번에 풀어줄 듯이 뜨겁게 안았다.
  이미 첫닭이 여러 차례 우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 밤도 허준은 잠이 들지 않았다.
  감미로운 피로가 겹겹이 허준을 감싸고 있었으나 눈은 자꾸만 멀뚱거릴 뿐이었다.
  지리산 험준한 비탈과 골짜기를 약초를 찾아 들짐승처럼 후비고 헤매고 다니던 지난 7년 고생이 꿈결만 같았다.
  '꿈에까지 본 한양.'
  잠 안오는 눈을 천정에 말똥거리며 허준은 아직 바라본 바도 없는 대궐 속 내의원의 정경들을 분방하게 상상하기에 바빴다.
  "'상놈이다 천것이다' 하고 온갖 수모받고 살던 내가 상감이 계시는 대귈에서 활보하고 ... 기쁘지 않으오."
  "서방님."
  하고 허준의 품속에서 아내가 입을 열었다.
  "음."
  아내가 문득 일어나 앉아 손으로 머리를 간추렸다.
  "일어나지 말고 더 좀 있소."
  대답 대신 아내가 윗목 질화로에 꽂힌 인두로 불씨를 헤치더니 유황개비에 불을 옮겨 호롱 심지에 달았다.
  그리고 새삼 자세를 바로하여 남편을 건너보았다.
  "한마디 제 소견을 꺼내도 되올지?"
  "하오. 우리 사이 새삼 못할 말 무어요. 왜 그 동안 집에 무슨 일 있었소?"
  "집안일이 아니고 서방님 얘기올시다."
  "내 얘기라니?"
  "이번 창녕의 병자 서방님의 재주로 고친 것이옵지요?"
  "물론이오. 사례로 받아온 짐을 보았지 않소. 더구나 이렇게 소개의 서찰까지 받아왔는데, 핫핫. 그래도 믿기지 않으오."
  허준이 베개 밑에 있던 성대감의 서찰을 툭툭 쳤다.
  "믿사옵니다. 하오나 그렇다면 ..."
  "그렇다면이라니?"
  "매사 사람에게는 시작이 중요한 것 아니온지? 그렇다면 그 시작을 자신의 재줄 미뤄놓고 왜 남을 의지해 시작하려 하시옵니까?"
  "남을 의지 ... 라니?"
  허준이 아내의 차가워진 눈을 보며 일어나 앉았다.
  "서방님이 의원으로 입신하려 하시는 이상 서방님의 꿈도 내의원 취재에 계시는 건 당연하옵니다. 하오나 그 일은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야 떳떳한 게 아니올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난 또 무슨 소리라고, 헛헛."
  "그래야만 장차 매사에 자신과 용기가 생기는 것이옵지, 남의 도움으로 시작을 한다면 ..."
  뻥해졌던 허준이 문득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에게 짜증이 섞였다.
  "물론 난 자신이 있소. 이번 길에 난 내 재주를 확인했소. 하나 내의원 취재가 자신만으로 되는 건 아니잖소. 수백 수천 명 몰려드는 각자 내노라 하는 의원 속에서 아차 작은 실수로 떨어질지 누가 장담하오?"
  "저도 그걸 생각했습니다. 하오나 ..."
  "왜 이러오, 당신!"
  "서방님."
  "당신 말뜻은 알아. 하나 이 일만은 우선 붙어놓고 봐야겠소."
  "그건 자신없는 행동올시다."
  외면해 무시하려던 허준의 눈꼬리가 치켜올랐다.
  "어째? 못할 소리가 없네. 당신이 세상일을 어찌 알기로 말을 함부로 ..."
  "넓은 세상일은 다 모르오나 사람이 어찌 살아야 하는가는 아옵니다."
  "건방진 소리 마오!"
  "좀만 더 들어주소서!"
  "닥치란 말이오! 잠이나 자오."
  "기왕 나온 얘기 마저 하게 해주소서."
  "듣기 싫다는데! 내의원 취재가 매년 있는 줄 아오? 매년 있다가도 10년 동안 없을 수도 있고 5년 동안 안 뽑는 수 수도 있소. 게다가 그 모처럼의 기회 한번 삐끗하는 적엔 평생을 기횔 못 잡는 수도 있다 그 말이오! 긴 말이 무슨 소용이오. 스승님의 아들 도지가 그 증거요. 그런데 이 기회를 놓치란 말이오?"
  " ..."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소. 나도 신이 아닌 바에야 아차 한번 실수를 안 저지른다 누가 장담하오."
  아내 이씨가 심호흡을 하더니 대답했다.
  "아차 실수로 떨어진다 하면 역시 그건 아차 실수할 만큼 서방님의 기량이 아직은 ..."
  "듣자듣자 하니 이젠 못할 말이 없구나! 무어 어째!"
  "서방님 ..."
  아내의 얼굴에 허준의 주먹이 떨며 고함쳤다.
  "누군 밸이 없어서 이걸 받아온 줄 알아. 참고 듣자니 이 계집이 제 사낼 어찌 알고."
  주먹이 날아갈 듯한 허준의 귀에 방문 밖에서 문득 기척이 났다.
  " ... 나니라."
  손씨의 음성이었다.

    5
  때아닌 어머니의 기척에 허준은 아내를 겨눈 주먹을 거두었다.
  이어 아내가 급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두 사람의 언쟁인 아무래도 안채에까지 들렸던 듯 들어온 손씨는 그런 아들 내외를 의식한 채 잠시 말이 없다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미 말 다 들었다. 그리고 그건 에미 말이 옳다."
  "무어라구요?"
  "에민 하던 말 마저 하거라. 애비가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이 하도 기뻐서 내가 잠시 넋이 나간 탓으로 미처 깊은 생각까진 못했다만 에미 말이 백번 옳고말고."
  "왜들 이러시오니까? 더 이상 듣기 싫습니다."
  "듣기 싫어도 들을 말 들어야 해!"
  어머니의 딴때없이 강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고 허준이 성대감의 서찰을 집어들고 발딱 일어섰다.
  "어머님이 무어라 하시건 이 일만은 어머님 말씀대론 못 하오리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당당히 시험을 쳐서 붙으면 그야 통쾌는 하오리다. 하나 대여섯 사람 뽑는데 나라 안에서 몰려드는 의원이 자그만치 천 명도 넘을 때가 많소이다. 한데 고집대로 살잔 말이오! 난 못해요. 다시 말하오만 이 서찰은 내가 꾸민 것도 아니요 자청한 것도 아니요 성대감이 자진하여 꾸며준 게요. 상대가 누군지 아오. 시임 우의정에 현재 내의원 도제조란 말이외다. 어림도 없는 소리. 차라리 내 목숨을 나눠줄지언정 이건 못 버려!"
  고함과 외침이 끝나자 허준은 자기의 관을 떼어들고 방문을 차고 나갔다.
  그러나 방안의 두 여자는 부르지도 따라나오지도 않았다.
  아니 그 방안에서 아내가 얼굴을 휩싸며 울음을 터뜨렸고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한숨 더 자거라. 자고 나면 속상한 일은 잊어버려지는 거니."
  집을 뛰쳐나온 허준은 속이 뒤집히는 심정이었다.
  늦가을 배추잎에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가 온몸에 시렸으나 아내의 뜻밖의 고집을 본 허준의 분한 숨결은 의원에 도착하는 동안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의원 앞 개울에 이르러 이윽고 허준은 소세를 하며 하늘도 보고 한숨도 쉬고 하다가 언덕 비탈을 올랐다.
  불빛이 내걸린 의원 마당은 오늘도 새로운 병자와 그 가족들로 복닥거렸으나 이런 시각 아버지의 회진에 앞서 초진을 맡아보는 도지나 임오근의 모습이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임오근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나 보다 여기며 허준이 몇 사람 안면이 있는 병자 가족들과 인사를 하는데 그 마당에 비질을 하던 꺽새와 저도 고명한 의원인 양 병자의 환부를 짚어보던 영달이가 허준을 발견하고 무엇에 찔린 사람들처럼 튕겨일어났다.
  허준이 선배인 영달과 꺽새에게 웃음을 보이며 인사했다.
  "그 동안 수고가 많소이다. 난 간밤에야 당도했소."
  "흥."
  하고 꺽새가 코방귀로 허준의 인사를 일축했고 돌연 두 손으로 허리를 재며 영달이가 허준의 발치까지 훑어보는 눈이 야멸찼다.
  "왜 그러오."
  허준이 의아했으나 침묵 속에 돌아온 건 증오와 질투에 일그러진 눈빛뿐이었다.
  허준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 그들의 자기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었고 달랜다 하여 고분고분해지는 자들도 아니었기에.
  그 허준의 앞으로 사랑 쪽에서 달려나온 어린 제자 상화가 처음으로 웃음을 지으며 반색했다.
  "오셨군요. 이번 일 감축합니다."
  "소식을 듣고 있었는가!"
  허준이 묻자 상화가 다시 활짝 웃었다.
  "그럼요. 어젯밤 임의원님이 당도하시어 모두 허의원님 얘기로 밤을 지샜던걸요."
  "그래 스승님은 기침해 계신가?"
  "예, 안 그래도 마악 허의원댁으로 부르러 가던 차올시다."
  허준이 상화와 큰사랑으로 향해 가자 영달이와 꺽새가 저희끼리 눈을 맞추더니 얼른 그 허준의 뒤를 따라왔다. 큰사랑 앞에 이른 허준이 불이 환한 스승의 방문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소인 준 지난밤에 당도하여 이제 문후 올리옵니다."
  유의태의 기침소리 대신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건 임오근이었고 방안에는 유의태와 도지의 쏘는 듯한 눈빛이 허준을 향해 있었다.
  그 방안의 눈빛과 자기의 등뒤에 닥치는 영달, 꺽새 들의 조소와 이상하게 긴장된 얼굴을 발견하며 허준이 방으로 들어가자 딴때없이 영달과 꺽새가 그 방으로 쫓아들어왔다.
  방 한구석에는 임오근이가 나누어 지고 온 성대감댁에서 꾸려준 사례품들이 쌓여 있는 걸로 보아 유의태는 임오근으로부터 허준의 성공 소식을 들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일을 성공하고 돌아온 제자를 맞이하는 그런 따뜻한 눈빛이 아니었다.
  "밤이 늦어서야 당도했사와 스승님께서 주무시리라 여기어 소인의 집에부터 들렀다가 왔습니다."
  다음 순간 그 허준에게 유의태의 얼음장 같은 첫마디가 떨어졌다.
  "창녕서 받아온 것 내놓아라."
  " ...?"
  "얘긴 이미 다 들었어!"
  하고 도지도 딴때없이 반말지거리를 뱉었다.
  지난날 서책을 빌려주며 내의원 얘기를 들려주던 다정한 얼굴은 간 곳이 없었다.
  허준이 대답했다.
  "성대감댁에서 사례라 하여 몇 가지 물목들을 꾸려주었사온데 그건 집에 두고 미처 가져오지 아니했습니다. 밝는 길로 가져오겠습니다."
  "누가 그 따위 비단조각이나 돈냥을 묻는 줄 아나!"
  도지가 소리쳤고 유의태가 손을 내밀었다.
  "어서!"
  "그 서찰 말이다"
  하고 임오근이 말했다.
  허준이 '앗!' 하는 얼굴로 임오근의 조롱 어린 얼굴을 보고 품안의 서찰을 꺼내 유의태 손 위에 놓았다.
  "누구에게 가는 무슨 내용인지 말해보아."
  하고 도지가 입을 씰룩이는데,
  "내용은 알 것 없다."
  유의태가 냉연히 말했고 그 서찰은 곧장 촛불에 당겨졌다. 허준이 벌떡 일어났으나 마주 보는 유의태의 눈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스스승님?"
  허준이 불꽃이 되는 성대감의 서찰을 뺏으려 한 것도 잠깐, 유의태는 이미 잿더미가 된 그 서찰을 놋화로 속에 내던지며 말했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공과 사가 애매한 풍속이기로서니 인명을 다루는 의원은 사사로운 인정으로 자격을 얻을 수 없다."
  "하 ... 하오나."
  허준의 핏기 가신 얼굴이 한줌 잿더미로 변한 서찰을 향해 신음소리를 냈으나 그 서찰은 화로 속에서 마지막 불꽃이 되어 푸식거리고 있었다. 쩡! 하고 유의태의 다음 말이 잇따랐다.
  "또 하나 그런 나약한 자가 내 문하에서 나왔다는 것은 나로선 참을 수 없는 수치인즉!"
  "그러나 스승님!"
  "돌아가되 내일부터는 내 집에 다신 얼굴을 비칠 것도 없다!"
  "예?"
  "네가 내게서 배운 재주로 기량을 키우려 않고 벼슬 높은 자의 서찰 따위로 네 앞날을 열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너는 이미 나를 배신한 것, 너와 나의 인연은 끝났더니라. 나가거라!"
  "스승님!"
  다시 몸을 일으킨 허준의 면상에 유의태의 창날 같은 손가락이 뻗어왔다.
  "이잘 썩 내치거라!"
  "용서를 ... 한번만 ..."
  그러나 이 순간을 기다린 듯 영달이와 꺽새가 허준의 팔목을 잡아젖혔고 튕겨일어난 임오근이 함께 허준의 목덜미를 잡아채 방문 밖으로 끌었다.
  허준이 두 발을 문지방에 버티며 또 스승님을 절규했으나 "닫아라, 문!" 하는 유의태의 고함이 터지고 도지가 방문을 닫았다.
  이어 허준의 몸은 임오근 등의 완력에 이끌려 마당으로 굴러떨어졌고 몸을 다시 일으킬 사이도 없이 사랑 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의원 마당으로 끌려가며 허준이 필사적으로 다시 스승님을 울부짖었으나 그 면상에 터진 건 임오근, 영달, 꺽새 들의 주먹질과 욕지거러였다.
  얼굴이 피범벅이 된 허준은 의원 밖 비탈에 내굴리며 정신을 잃었다.

    6
  허준이 유의태의 문하에서 파문당한 지 두 달이 되었다.
  세상은 선조 7년 원단을 맞이하고 있었다.
  동지를 지나면서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는 겨울이었고 허준이 사는 황량한 산음의 산과 들도 내내 눈에 쌓인 채 얼어붙어 있었다.
  그 두 달 허준은 일체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방안에 들어앉은 채였고 가장의 그 깊은 시름을 아는 어머니도 아내도 그리고 아이들도 누구 하나 큰소리 내는 이 없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이는 요즘의 집안 분위기였다.
  때로 허준이 집을 나설 때가 있어서 가족들은 스승 유의태에게 사죄차 가는 것이 아닌가 기대를 걸었으나 허준은 뒷산에 올라 삭정이며 썩은 나무뿌리 따위 군불거리 한 짐을 해 지고 내려와서는 다시 자기 방에 드러누우며 바깥세상을 내다보려 않았다.
  그런 남편을 보며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은 아내였다.
  처음 창녕서 성공해 돌아온 그 남편께 더 좀 알뜰히 조언한다는 것이 뜻밖의 말다툼이 되었고 남편이 유의태에게 떨려난 그 문제의 성대감의 서찰건은 자기가 일러바친 것이 아니요 임오근의 고자질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나 어쨌든 그날 이후 남편은 자기와도 어머니와도 일체의 말을 끊었다.
  일이 터진 그날 점심 나절쯤 영달이와 꺽새가 마님의 영이라 하며 나타나 허준이 따로 성대감댁에서 사례로 지고 왔던 그 짐짝을 내놓으라고 했고 고부는 그 짐 속에 스승댁에 가는 다른 짐도 있는가 여기어 윗목에 밀쳐뒀던 짐을 순순히 쪽마루 끝으로 내놓자 이런 사례를 받은 것도 다 유의원 밑에서 배운 의술 덕분이니 출문을 당해도 사례의 짐은 유의원댁에 들여놔야 옳다고 떠들며 대뜸 멜빵에 어깨를 꿰며 일어섰던 것이다.
  도착하며 허준이 식구들의 설빔이라도 하라며 내놓았던 그 옷감까지도 마저 꾸려넣자 그제야 그들의 이상한 거동에 고부가 영문을 물었으나 짐을 진 두 사람은 그건 내 설빔할 옷감이라고 울먹해서 따라붙는 남매를 뿌리치며 도망치듯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에 심상치 않은 사태를 느낀 고부가 의원으로 달려갔으나 방금 짐을 지고 온 영달이나 꺽새는 거푸 캐묻는 고부를 거들떠보려고도 않았고 유독 상화가 다가와 안쓰러운 얼굴로 그날 새벽에 있었던 사건을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이에 두 여자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허준이 돌아오면 함께 유의태에게 사죄하고자 기다렸으나 정작 허준이 집에 나타난 것은 그날 한밤중이나 되어서였고 그 눈은 삼눈을 앓는 사람처럼 핏발져 있었다.
  만취한 남편을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서자 그때 허준이 말했었다.
  "당분간 나 혼자 생각할 것이 있으니 당신일랑 어머님 방에서 함께 지내오."
  그리고 두 달이었다.
  누워 있지 않으면 짚세기나 삼고 있는 그를 보며 그건 아마도 행여나 스승 유의태로부터의 사면의 소식을 기다리는 괴로운 침묵이려니 여기고 아내도 어머니도 애써 그의 심경을 건드리려 않았다.
  그리고 오늘 설날이었다.
  내쫓긴 뒤 여러 차례 찾아가 빌었어도 만나주지 않던 유의태였으나 해가 바뀐 오늘 사죄를 떠나서 새해 문안을 드리며 얼굴을 마주 대하면 행여 목매 기다리는 사면의 분부가 계실지 모른다 기대하며 어머니도 아내도 어젯밤부터 옷을 다려놓고 초조해하건만 여전히 허준은 방에서 나오는 기척이 없었다.
  "어쩌고 있느냐?"
  하고 또 한번 뒤꼍 남편의 기척을 살피고 돌아온 며느리의 파리한 기색을 향해 손씨가 물었다.
  "소세하고 있습니다."
  "어디 출타할 기색이더냐?"
  "아이들을 부르고 하는 걸 보니 어머님께 세배 올릴 생각인가 봅니다."
  "누가 내 세배 받자고 기다린다더냐. 유의원댁에 가는지 안 가는지 그게 궁금해 묻는 게지."
  "암튼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말문이 열린 걸 보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나 봅니다. 건너오면 어머님이 물어봐주소서."
  허준의 아내 얼굴에 오랜만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고집도 고집도 ... 내 그 고집 모르는 바 아니지만. 뭘 하누, 어서 너희가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오너라."
  손씨가 아랫목 요때기 속에 발을 뻗고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는 남매를 돌아보았다.
  "소자올시다."
  하고 허준의 소리가 방 밖에서 났다.
  아내가 일어나 방문을 열었고 그 방 밖에 아버지를 발견한 숙영이가 딸깍 울음을 그쳤다.
  한때 무등도 태워주던 아버지가 근자 말도 않고 찾아가도 쳐다보지도 않음에서 어린 마음에도 그 아버지가 요즘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아버지 오셨어."
  하고 손씨가 일깨우자 겸이도 그제야 이불 속에서 기어나와 어머니의 눈치를 받아 방 밖으로 따라나섰다.
  허준이 방문 밖 쪽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 뒤로 남매와 아내가 꿇었다.
  "어머니 새해 절 받으십시오."
  하고 허준이 절을 올렸고,
  "건너와주니 반갑구나."
  하며 손씨가 매무새와 앉음새를 고쳤다.
  뒤이어 겸인가 작년에도 했듯이 아버지 따라 절을 올렸고 다시 아내와 숙영이가 큰절을 드렸다.
  이어 방에 들어와 앉는 허준에게 남매가 절을 했을 때였다. 문간에 기척이 나서 내다보니 뜻밖에 상화였다. 정작 허준은 담담한데 아내와 손씨가 튕겨나듯이 일어서며 반가운 낯색을 했다.
  그리고 허준의 아내 또한 그가 다른 많은 문도들 속에서 유의태가 종자처럼 항시 데리고 다니는 유일한 제자임에서 새해 첫 아침에 찾아온 상화가 행여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온 게 아닌가 기대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식석죽도 어려운 살림에 그러나 정초의 귀밝이술 삼아 몇 종지 술을 마련했는지 아내가 조그만 술상을 차렸고 그 앞에 마주 앉은 상화의 입에서 나온 얘기들은 가족의 기대와는 하나도 맞지 않는 것들이었다.
  손씨와 아내가 가장 궁금히 여기는 대목에 대해서도 너무도 실망의 말을 들려주었다.
  허의원을 내보낸 후 스승님은 단 한번도 허의원의 근황을 궁금해하거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한 가지 새 소식이라고 전하는 말은 요즘 더러 창녕 성대감댁의 소개를 받은 모모한 타처 사람들이 여러 사람 허의원을 의원으로 찾아왔으나 임오근도 도지도 또 영달, 꺽새 들도 그 허준이란 자는 창녕에서 돌아온 후 곧 한양으로 솔가해 떠나 이미 산청땅에는 살지 않노라 따돌렸다는 말과 함께 지난 섣달 초순께 역시 허의원을 찾아온 병자 가족을 따라 도지가 대신 의령으로 가서 오래 묵은 해소병 환자를 낫우고 돌아와 그 도지의 성망이 크게 떨치고 있다는 그런 말도 했다.
  "당신의 아들인데 유의태 그분이 오죽 잘 가르쳤을까요."
  하고 손씨가 탄식 어린 말끝에 이어,
  "아무리 세상 인심이 어떻다 하기로서니 이 사람도 우리들도 오로지 유의태 그 어른이 다시 불러주실 날만 기다리며 근신하고 있는 터에 일가 솔가해서 한양으로 떠났다니 대체 왜 그런 모진 말을 꾸며댑니까. 혹 그래서 유의원께서 이 사람이 정말 떠난 줄 알고 더 찾지 않는 게 아닐지요?"
  상화가 말을 않았고 의외로 허준은 담담했다.
  그 침묵을 향해 손씨가 반은 달래듯이,
  "암튼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 않느냐. 잘잘못 떠나서 웃어른을 찾아뵙기 무난한 날이니 속히 건너가보아."
  " ..."
  허준이 말이 없는데 상화가,
  "유의원께선 지금 집에 안 계삽니다. 4, 5일 전 진주에서 사람이 와 모셔갔는데 아마 여러 날 후에야 돌아오실 겁니다."
  "여러 날이면 언제쯤 ..."
  하고 손씨가 더 안타까이 묻자,
  "글쎄요. 병자가 위중한 모양올시다. 함께 모시고 갔던 병문이가 밤을 도와 달려오더니 임오근 그 사람에게 여러 약을 꾸리게 하고 어제 아침 함께 다시 달려갔으니까."
  기대도 긴장도 무너진 방안에 손씨의 한숨소리가 다시 들렸고 그러자 상화가 새삼 허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스승님에 대한 기대는 버리시지요."
  "저보다 허의원이 더 스승님을 겪어보셨지만 제가 보기에도 스승님은 다시 허의원을 부르진 않을 겁니다 "
  "알고 있네."
  "아신다면 미련 두지 마십시오."
  " ..."
  "지난번 창녕서 있었던 일 그건 허의원의 의술의 경지가 어디에 이르렀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오니까. 그렇거든 차제에 독립을 하십시오."
  "다른 사람 다 몰라도 허의원은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창녕 성대감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분을 다시 찾아갈 생각을 안 하십니까. 찾아가서 내의원 도제조에게 보내는 그 소개장이 어찌어찌 허실되었다는 얘길드리고 다시 한번 써달라면 안 써줄 리가 없습니다. 그 실력에 그 소개장을 들면 우리 의원 출신으로 내의원 취재에 첫째로 붙는 건 바로 허의원일 겁니다."
  " ..."
  "그래서 붙기만 하면 그 뒤에야 탄탄대로올시다. 그렇게 일단 성사를 이룬 후에 스승님을 찾아 인사를 올리면 분명 용서도 되실 터이고요."
  "말인즉 고마우이."
  허준이 처음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 여러모로 생각해봤어. 그리고 마음을 굳혔네."
  상화도 손씨도 아내도 허준을 돌아보았다.
  "그분이 나를 잊었듯이 나도 유의태란 사람을 잊었어."

    7
  상화가 돌아간 뒤 어머니와 아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허준을 불러앉히고 다시 마주앉았다.
  유의태가 자기를 잊었듯이 자기 또한 유의태를 잊었노란 말에 가슴이 아파서였다.
  "그래도 기다려야지. 단 한번 실순데 지성으로 기다리노라면 용서해주시마 기별이 오지 않겠어, "
  "아니옵니다."
  "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느냐. 그래도 수많은 제자 중에 더구나 당신의 자식까지 젖혀놓고 너를 창녕에 보냈을 적에는 너의 재주를 인정한 다는 것 못지않게 네게 유별한 사랑이 계셔서 지목한 게 아니리."
  " ..."
  "아무튼 ..."
  하고 아내가 조용히 끼여들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올시다. 따로 깊은 인연이 없다 하더라도 웃어른들이나 평소 도와주신 분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리는 것이 도리올시다."
  "그래서?"
  "하오니 유의원님을 찾아뵙고 ..."
  "사죄하란 말이오?"
  "왜 못하느냐. 잘잘못 떠나 웃분에게 사죄하는 건 아랫사람의 도리요 허물이 아니지 않느냐,"
  "건너가겠습니다."
  허준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만 앉아 보아."
  " ..."
  "마침 스승님이 아니 계신다 하오니 내방마님께라도 세배를 드리시면 유의원님께서 돌아오신 후 다녀갔다는 전갈은 되지 않으오리까."
  "무얼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
  하고 허준이 비웃었다.
  " ..."
  "내가 그 집에서 쫓겨나온 날 영달이와 꺽새 시켜 내 집에 와서 가져간 짐들, 그게 누구의 행윈지 아오? 바로 그 내방 마님이 시킨 일이오."
  "그까짓 피륙이나 돈냥이 문제오니까."
  "나도 돈냥이나 피륙을 말하는 게 아니오. 하나 그건 분명히 성대감댁에서 내게 따로 내려준 내 짐이란 말이오."
  "그까짓것 잊어라. 사람 헐벗는다고 부끄러운 거 아니다."
  " ... 다른 건 다 좋아. 하나 베 한 조각이면 될 어린것들 옷감마저 쓸어가야 해. 그런 여자에게 내가 고맙습니다 하고 인살 하라고?"
  "그도 찾아뵙는 것이 도리."
  "더 이상 그 집 얘기 마소서. 앞으로 유의태의 유자도 제 앞에선 마소서."
  거칠게 방문을 열고 나가는 아들을 손씨가 다시 불러세웠다.
  "그럼 앞으로 대체 어찌할 셈이냐?"
  " ..."
  "7년 공들인 의원생활을 정녕 걷어치울 생각이냐? 이제 와서 중도 파기할 생각이냐 그 말이다. "
  "다른 길을 찾지요. 애초 의원 노릇 하고자 이 산음땅에 찾아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 누구나 누구에겐가 고개 숙여 살기 마련이다. 하늘처럼 높은 정승도 상감 앞에선 머리를 조아려 살기 마련이고 그 임금도 천지신명껜 고개 숙여 산다지 않느냐. 왜 제 분수를 생각 않고 고개 숙여 살 줄을 모르는고 ..."
  "말씀 잘 하셨습니다. 앞으로는 내 분수대로 고개 숙여 살 겁니다."
  "앞으로는?"
  " ...?"
  "한두 달 어딜 다녀오겠습니다."
  "어딜?"
  "고흥 나로도라는 곳에."
  "나로도라면 변돌석 그분이 가 있는 섬이 아니오니까."
  "그렇소."
  " ...!"
  "거긴 왜오니까?"
  "오히려 여기보다 자유롭고 편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일 테니 무언가 살 길이 있겠지요. 이도 저도 없으면 그 사람과 얼려 어부 노릇을 하든가 "
  " ...!"
  "그래도 서로 호형호제하던 사람이오. 찾아가면 박대는 않겠지요."
  "넓은 세상 두고 왜 자꾸 좁은 세상으로 찾아가려 하십니까. 더 좀 생각하소서."
  "더 좀 생각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고 당신이오. 우리의 신분이 뻔한 터에 내가 보내지 말라 했음에도 왜 아직도 겸이놈을 서당에 보내고 있소!"
  " ..."
  "무슨 영하를 보겠다고?"
  "자식의 눈을 뜨게 해주려는 거지 영화를 기대하여 보낸 적 없습니다."
  "그 얘기도 내가 누누이 한 바요. 천하게 태어난 놈이 섣불리 세상에 대해 눈을 떠서 그 눈에 쳐다보이는 게 뭐요!"
  " ..."
  "모르면 몰라서 지나가되 세상 됨됨일 알면 고작 할 수 있는 건 이것저것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밖에 더 있소?"
  "전 그렇게 생각지 아니합니다."
  "당신 말은 항상 나하고 반대요."
  "서방님이 그 동안 유의원님댁에서 다른 문도들보다 의술에 대해 일찍이 숙달하신 건 다른 이들보담 글을 더 많이 아셨기 때문이라 여기옵니다. 그렇다면 서방님이 의업으로 입신하시면 겸이가 그 가업을 이을 것이라 여기어 미리 서당에 보내고 있었던 것올시다."
  "나도 에미하고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겸이를 서당에 보내는 건 나와 의논도 했던 바이고 ..."
  " ..."
  " ..."
  " ..."
  "좋소. 하나 앞으론 그런 기대 버리시오. 유의태와 인연이 끊어진 지금에 와서까지 장차 의업에 기대어 살 생각 없은즉 ... 나로도에는 내일 새벽에 떠나겠소. "
  "애비야?"
  손씨가 튕겨일어나 말릴 듯했으나 그 어머니를 향해서도 허준의 눈은 차가웠다.
  "손바닥만한 섬이 아니라 합디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고기도 잡히는 넓은 섬이라 하니 이미 자리잡은 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러운 세상 꼴 보지 않고 거기가 천국일지 모르지요."
  "좀더 앉으소서. 그리고 더 의논을 한 연후에 ..."
  "노자는 내 나름대로 마련할 궁리가 있소. 집에 있어도 생활에 도움도 못 됐던 사람이니 기다리지 말고 한 두어 달 후면 돌아오리다."
  그날 밤 아내는 애써 허준의 곁에 누웠다.
  어떻게든 남편이 나로도행을 단념하길 애원하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유의태가 돌아오는 날을 알아다가 그집 문간에 거적을 깔고 부부가 몇날 며칠을 꿇어앉아서라도 스승의 가르침보다 성대감의 서찰에 의지하여 출세를 꿈꾸었던 지난날의 잘못을 함께 빌고 그리고 지난 7년 동안 쌓아온 의술공부를 계속할 허락을 받자는 그 얘길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 상화가 들고 왔던 술병을 혼자 비운 허준은 끝내 아내를 돌아보지 않은 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새벽 집을 나설 때 허준은 가족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깊은 실망을 알고 있었고 그건 새삼 말로 달래질 것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쩌랴 ... 의원 생활을 계속하겠다면 아내도 어머니도 기뻐는 할 것이로되 부산포와 같은 얼치기로 독립한다는 것은 허준의 자존심이 움직이지 않았다.
  허준은 자기의 의술의 목표를 유의태에게 두었다. 유의태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없고선 내가 의원이노라 소리치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출세를 위해서라면 상화의 말처럼 다시 성대감을 찾아가 소개장을 못 받아낼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태의 문하에서 떨려난 순간부터 소개장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넌 그 정도의 인간이야!'
  자기가 창녕에 다시 가면 그렇게 조소할 유의태의 일굴이 떠올랐고 비록 그와 인연을 끊었어도 유의태의 그런 식의 비웃음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유의태에 대한 의리가 아니었다.
  오기에 가까운 자존심이었다.
  스승이라는 존경 너머로 자신이 언제부터 유의태에게 그런 경쟁심을 품고 있었는지, 허준은 유의태와 헤어지고 나서야 그걸 알았다.
  그 갚음이란 자기 또한 철저히 유의태를 잊어버리는 길이라고 믿었다.
  당신에게 배운 의술로는 생업은커녕 한그릇의 밥 한잔의 술도 벌어먹지 않겠다는 그것이 요 두 달 허준이 찾아낸 자기 앞길에 대한 각오요 결심이었던 것이다.
  지난날 변돌석이와의 얘기를 상기해보건대 나로도로 가는 포구는 여수였고 그 여수로 가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다.
  큰길 따라 남으로 진주, 사천 해안으로 뱃길을 찾아나서는 길과 남서로 뚫린 하정 창촌 거쳐 하동으로 나가 섬진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소금배를 타는 길. 남은 길은 하동서 길머릴 돌려 백운산록을 거쳐 동곡 운평 광양만으로 빠지는 길이었다.
  허준은 그 백운산록으로 접어들었다.
  쌓인 눈과 드문드문 노루떼의 발자국이 있는 능선을 불어치는 삭풍이 콧등을 베어갈 듯이 모질었으나 허준은 지름길도 아닌 이 험로를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7년 공무가 수포가 되고 장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은 그에겐 번거로운 주막길 따위보다 인적 먼는 산속길이 더 편했다. 그리고 7년 동안 지리산 골짜기를 들짐승처럼 헤매고 다닌 그의 하체에는 웬만치 가파른 산길 따위는 조금도 고통스러운 길이 아니었다.
  그 허준이 백운산 중턱 제법 양지바른 비탈에서 잠시 걸음을 쉴 때였다.
  눈발이 비껴간 바위 틈에 두어 잎 시든 풀줄기가 눈에 띄었고 그 마른 가지에 보송보송 말라 있는 붉은 열매가 도대체 이런 엄동에 볼 수 있는 예사 열매가 아니었다. 7년 약초꾼으로 산판을 헤맨 그 호기심으로 허준이 다가가 그 열매의 모습이며 메마른 줄기에 매달린 잎새의 모양을 들 여다보았을 때 돌연 허준은 숨을 삼켰다.
  그건 산삼이었다.
  "오 오 ..."
  하고 허준이 자기도 모르는 신음소리를 냈고 눈을 씻고 다시 보고 다시 또 그 풀잎과 열매를 보던 허준은 다음 순간 뛰쳐 일어나며 무인공산을 향해 소리쳤다.
  "심 봤다앗!"
  심은 산삼의 별칭이었고 그걸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 산삼이 자기의 것임을 온세상에 알릴 의무가 있다는 것이 약초꾼들의 불문율이었다.
  "심 봤다앗!"
  "심 봤다앗!"
  허준의 떨리듯 헷갈리는 소리가 백운산의 골짜기와 능선 위로 거푸거푸 퍼져나갔다.

    8
  산상의 세찬 바람이 벼랑 위에 선 허준의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 허준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심봤다! "라는 산신령에게 고한 외침 세 마디에 금세 목도 쉬어버렸다.
  "이 ... 이건 꿈이야. 이건 생시가 아니라구!"
  자기에게 닥친 행운이며 당장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는 현실이요 꿈에도 상상 않던 뜨거운 갈망일 터인데도 허준의 목쉰 소리가 거푸 또 부정했다.
  "꿈은 아니야. 그러나 이건 믿을 수가 없어!"
  산삼의 이파리 수를 세던 허준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하나는 잎이 여섯 잎으로 퍼진 심마니들의 은어로 '육구만달'이라 불리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역시 심마니들의 은어로 '칠구두루부치'라고 호칭되는 귀하디귀한 일곱 잎짜리 진품임에 틀림없었다.
  '꿈에도 생각 않던 내가 소망을 보게 되다니!'
  그 소망이란 말,
  전업인 심마니들뿐 아니라 방방곡곡 십 년을 하루같이 산판을 헤매고 다니는 수백 수천의 약초꾼들이 자신에게도 한 뿌리 태어나길 바라고 바라는 것이 산삼이었다.
  처음 유의태의 문하에 들어가 지리산의 골짜기와 산봉우리를 타고 다니던 약초꾼 시절 허준은 머리가 허옇다 못해 누렇게 변한 어인마니(채삼꾼의 우두머리)를 만나 하룻밤 바위굴에서 가을비를 퍼하며 밤을 지샌 적이 있었다.
  그는 평생을 산삼캐기에만 뜻을 둔 진짜 심마니였고 허준이 산삼에 관해 지식을 얻어들은 건 그의 입에서였다.
  한 냥을 넘는 산삼 한 뿌리면 팔자를 고친다는 신비의 영약, 그 산삼이 귀한 만치나 그걸 캐기 위해선 금기도 많아서 부정한 걸 본 적이면 아예 산에 오르지도 않는다는 말에서부터 산에 오를 적이면 1, 3, 5, 7, 9로 반드시 홀수로 동무를 짠다는 수수께끼 같은 미신과 산삼을 발견하면 여느 약초 따위 발견할 때 쓰는 캔다는 말 대신 '돋운다'고 경대한다는 것이며 온갖 잡풀이 살아 숨쉬는 여름에 캐는 건 효력이 없고 적어도 잡풀 따위는 모두 시들거나 죽어버리는 처서를 지난 늦가을부터 새로운 지력이 소생하는 이듬해 초봄까지에 돋우는 것이어야 진짜 산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삼들은 온갖 초근목피가 시드는 엄동일수록 바위 밑에 깔린 생생한 지력을 흡수하는데, 그 열기로 인해 산삼 주변에는 어떤 폭설이 와도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들려주었었다.
  그토록 존귀한 영약이고 보니 생성하는 곳 또한 그 지점을 '주무시는 곳'이라 존대하고 캐는 행위를 오히려 반대로 '돋운다'고 한다고 황발의 늙은 심마니는 탄식처럼 말했었다.
  또 한번 거센 산바람이 허준의 온몸을 휩쓸고 산삼이 솟아난 바위벽에 휘몰아쳤다.
  이미 허준의 머릿속에는 집을 나설 때의 목적인 나로도행은 없었다.
  그는 즉시 자기의 저고리를 산삼 앞에 깔고 주막에서 챙겨온 주먹밥과 술병을 올려 산신령에게 새삼 소망 본 인사를 올리고 나자 손톱을 세워 두 산삼을 돋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 돋우는 방법 또한 여느 약초뿌리를 캐는 것과는 달랐다.
  겨우내 언 땅이었다. 허준의 손가락의 살갗이 찢기고 손톱에 피가 뻗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준은 고통도 몰랐다.
  불빛은 없어도 족했다.
  백운산 큰 봉우리로 깨진 해골조각 같은 하현달이 거의 기울어 새벽이구나 여겼을 때는 수많은 돌쩌귀에 찢기고 뽑아내는 바위에 찍힌 허준의 열 손가락은 완전히 피투성이였다.
  이윽고 황소라도 한 마리 파묻을 만한 거대한 구덩이가 파졌을 때 허준은 그 첫 뿌리를 두 손으로 돋우며 허공에 쳐들었다.
  그건 완연히 동녀를 닮은 진품이었다.
  '한 냥이 넘으면 부르는 값이 없다고? 이건 두 냥은 돼!'
  허준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남은 한 뿌리는 흙더미째 통째로 들어 안고 제물을 모셔놨던 저고리에 쌌다.
  허준은 비탈을 들짐승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달려왔건만 지금 그가 달리는 곳은 길도 아니었다.
  '집으로!'
  그 일념뿐이었다. 얼어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 산삼을 싼 저고리를 잡아맨 손이 펴지지 않았을 때 느낀 감정이었다.
  그러나 발이 말을 들어주었다.
  넘어지면 무릎으로 달리고 허준은 하룻길 떠나온 저 멀리 산음에 있는 집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산사의 종소리가 들렸다. 저 아득히 마을에 몇 개의 불빛이 굽어보였고 첫닭들이 홰를 치고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갑자기 허준은 자기가 죽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번 넘어지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땀이 흐르다 멎은 그의 얼굴은 얼어붙다 못해 자주빛으로 죽어가고 있었으나 그 자신은 그걸 알지 못했고 부둥켜안은 산삼보따리만이 머릿속에 가득찬 일념이었다.
  새벽밥을 짓는 하얀 연기가 마을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연기에 데워진 따스한 구들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허준이 그 마을을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준의 걸음은 그 동구 밖에서 멎었다.
  '가면 안돼!'
  추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나 길도 없는 산길을 달려오느라 갈가리 찢긴 옷이며 얼굴, 산삼을 싼 흙투성이 저고리는 금세 의심받을 것이 아닌가 ...
  허준은 마을에서 발길을 돌렸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가야 해. 집에 당도하기까지 그 누구와도 만나선 안돼 ...'
  허준은 날이 밝아옴에 따라 오히려 큰길을 피하여 샛길을 찾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리산 쪽으로!'
  샛길도 알고 지름길도 아는 곳은 지리산뿐이었다. 적어도 그 산길은 사람들의 왕래가 심한 큰길보다는 안전한 길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지리산에는 겨울 한철 사냥꾼들이 불의의 대설을 만나면 수삼 일씩 피신할 작은 움막들이 흩어져 있음을 허준은 알고 있었다.
  해가 돋자 허준은 밤 사이의 격정에서 깨어나 골짜기물에 소세를 하고 옷을 털고 산삼 보따리를 다시 싼 다음 등판에 매달려 쫓아온 패랭이도 상투 위로 반듯이 고쳐 썼다.
  그리고 피멍이 든 두 손을 여벌인 버선을 꺼내 감쌌다.
  그러나 허준은 행복했다. 한 뿌리면 집 한 채. 또 한 뿌리가 제 식구 계량할 논밭쯤 너끈히 마련하고도 남을 진품 산삼 두 뿌리가 자기의 가슴에 있지 않은가.
  고생은 끝났다. 이제 20리하고 두어 마장 더 하룻밤 하루낮을 내리달려 현 서쪽 27리에 있는 독녀성의 허물어진 석축을 저만치 황혼 속에 발견하며 허준이 뇌었고 다시
  "이젠 기어서라도 갈 수 있어?"
  하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외쳤을 때였다.
  "두 다리가 땅에 붙은 걸 보니 사람은 사람인 모양인데."
  하는 낯선 소리가 등뒤에서 났다.
  허준이 소스라치며 돌아보자 한눈에 심마니태로 알 수 있는 다섯 명의 장정들이 바로 등뒤에 서 있었다.
  " ...!"
  "산에서 내려오는 걸 이쪽 등성이에서 보고 있었는데 어디서 무얼 하다 내려오는 잔가?"
  허준이 대답 대신 산삼 보따리를 끌어안으며 물러섰다.
  "난 약초꾼일세."
  "무슨 대단한 약초를 캤기에 저고리에 싸고 다니나 따라오며 아무리 봐도 그게 수상쩍어."
  이어 한 사내가,
  "펴봐 한번." 하며 이미 허준의 퇴로를 막듯이 등뒤로 돌았다.
  허준은 그들의 손에 각각 들린 키가 넘는 다섯 개의 작대기를 보았다.
  약초꾼도 그렇거니와 심마니들도 깊은 산중에서 각자 흩어져 일을 보다가 바위나 나뭇등걸을 두드려 동패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그 작대기였다. 또 그건 불의에 숲속에서 뛰쳐나오는 맹수의 골통을 부수는 무기삼아 쓰는 '마대'라 불리는 황백나무 몽둥이였다.
  허준이 몸을 날려 뛰었다. 그러나 의욕뿐이었다. 허준은 어깻죽지에 무서운 충격을 느끼며 곤두박혔다.
  "안돼!"
  허준이 고함치며 튕겨일어나려 했으나 또 한번 몸 위에 몽둥이인지 발길질인지 알 수 없는 충격이 왔다.
  그러나 허준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산삼 보따리를 끌어안고 버퉁겨 일어나려 했다.
  그 불안은 허준의 팔목을 흙투성이의 짚세기가 한 번 두 번 짓밟았다. 그리고 채뜨려 가는 산삼보따리를 보며 무어라 절규하던 허준은 이마로 땅을 찍으며 의식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깨어가는 허준의 의식이 무슨 소리를 들은 듯했다.
  "아직 숨은 붙었고 어디서 본 얼굴이야."
  하는 한가한 소리에 이어 역시 같은 목소리가,
  "짐승이 덮친 것 같진 않고 도둑떼가 덮친 듯하이. 핫, 이 산속에 도둑떼라니."
  "도심은 인간의 무리나 지닌 것이지 산을 핑계대지 말게. 나무 관세음보살."
  "이제 알겠군, 유의태 밑에 오가던 그 아일세, 보게."
  "들쳐업게나."
  "이 아이가 이런 시각에 혼자 웬일인구."
  "내가 이 아이 집을 짐작을 해. 어서 업으라니까는."
  "하필 왜 이쪽 길로 왔던가."
  처음의 목소리가 웃음과 함께 하는 소리 끝에 허준은 자신의 몸이 완강한 힘에 쳐들리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 목소리의 임자가 안광익 바로 그 사람의 음성인 걸 깨달으며 허준의 의식은 다시 멀어졌다.

    9
  의식이 깨어감에 따라 허준은 등등 구름 위를 떠가는 듯한 자신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꾸만 처지는 자신의 엉덩짝을 추슬러올리는 커다란 손바닥이 의식되었고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이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안광익!'
  왕자의 병을 고치느라 자기의 부술만 믿고 왕가에서 금기로 하는 것임에도 왕자의 상처에 칼을 댄 것이 발각되어 의금부로 끌려가 장살 직전에 왕자의 상처가 나아 다리병신만으로 용서가 된 사내. 그리고 사랑하는 궁녀 정씨를 들쳐업고 왕궁 높은 담을 뛰어넘어 도주한 사내, 또 호환에 떠는 마을에 이르러 닭의 몸에 구침을 꽂아 호랑이를 잡은 후 마을 사람들의 사례 따윈 거들떠도 안 보고 사라진 대가 큰 의원.
  그러나 허준은 그대로 업혀가며 정신이 돌아온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이 깬 만큼이나 뭇매에 짓밟힌 온몸의 고통이 들쑤시기 시작했고 안광익의 어깻죽지를 끌어잡은 오른손은 산삼을 안 뺏기려다 짚세기들에 짓밟힌 손목이 소가 씹어놓은 듯이 피투성이인 채 손가락도 맘대로 펴지지 않았다.
  새삼 허준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자 걸음을 세우는 기척도 없이 서너 발 앞서가는 중의 복색을 한 사내가 흘리는 말이 들려왔다.
  "신음소릴 내는 걸 보니 점차 살아나는 모양이로군."
  허준이 고통을 이기려 또 이를 악물었다.
  허준은 알 듯했다. 1년에 두어 번씩 유의태를 찾아오는 중. 곡차란 핑계로 술도 마시고 닭고기며 개고기조차 떡이란 이름으로 게걸스레 집어먹던 안광익 못지않게 기골이 장대하고 유의태가 유일하게 사귄다는 김민세인가 하는 그 중일시 분명했다.
  "어디쯤인가, 이 아이 집이?"
  안광익의 말이었고.
  "다 왔어. 두어 마장 더 가면 돼."
  하고 대신 업어줄 기색도 없는 중의 대거리였다.
  허준은 내려달랄까 얘길 하려 했으나 허리의 통증하며 도저히 제 힘으로 걸을 자신은 없을 것 같았다.
  고통을 견디고 있는데 안광익의 소리가 다시 났다.
  "아까 어디까지 얘길 했던가."
  "무슨 얘길."
  "사행 다녀온 남응명인가 들어왔다는 얘기, 그 명나라 의원 이름이 뭐? 이시진(1518~1773)? 책이름은 본초강목?"
  "분명 그렇게 들었네. 본초강목. 각 분야를 16개 종목으로 분류하고 동물, 식물, 광물에 관한 1890여 종의 것을 망라해서 기재했다면 한두 해에 이뤘음직한 일도 아닐 터이고."
  "종류를 고루 다뤘다는게 놀라운 게 아니라 이 사람이 전래돼오던 종래의 여러 설을 불신하고 그 하나하날 일일이 약효를 징험해 봤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게지."
  "한번 만나보고 싶군 ... 그밖에 더 들어온 얘긴 없던가?"
  "종래 이것이다 하던 의서를 무시하고 제가 징험해본 바만 토대로 해서 새로 책을 쓰고 있다는 걸세."
  " ... 본초강목이라 ..."
  불현듯이 뇌는 안광익의 말 속에 작은 감동과 향수가 섞였다.
  "기주가 어디 붙은 땅인지는 모르나 아파도 호북 어디쯤 있는 땅이름이 아닌가 싶은데 이시진이란 것도 본명이고 자를 동벽이라고도 하고 빈호라고도 한다는 것까지가 남응명이 들어온 소식의 전불세."
  "흥 의원치고 제법 자까지 지니고 사는 걸 보니 땅덩어리도 넓지만 그놈의 나란 우리처럼 천하다고 의원 구박은 안하는 모양이로군."
  두 사람의 얘기가 계속 귀에 들려오고 있었으나 허준은 무심했다.
  더구나 지금 그 얘기들이 이시진의 "본초강목"이란 이름으로 뒷날 허준 자신이 찬저할 "동의보감"과 어깨를 겨루는 동양의학의 쌍벽의 얘긴 줄은 꿈에도 알 리 없었다.
  세 사람의 옷자락이 기폭 날리는 소리를 내도록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 바람소리뿐인 정적 속에서 이번엔 김민세의 탄식하듯한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란 정말 오묘하고 오묘해."
  "갑자기 또 뭘 설법할 생각인가?"
  "부처님의 설법 가지고도 안된다고 하면 죄가 될 소리지만 그러나 세월처럼 신기한 게 없어."
  "세월이 신기하다?"
  "남응명이에게 그런 남의 나라 얘길 듣기 그 훨씬 전 내가 내의원에 들어서기도 이전에 나 또한 내 나라 의서들을 새로 정릴 해야 한다고 골똘히 생각한 적이 있었지."
  "이 친구 똥집이 왜 이리 무겁나."
  하며 안광익이 허준을 한번 추슬러올렸다.
  독백 같은 중의 소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의원이 된 후 선인들의 처방을 수없이 시험해보면서 나 역시 선인들이 남긴 문적에 대해 실망을 맛본 적이 한두 번이라 여러 수십 번만이 아닐세."
  "그래서?"
  "그래서 이 일은 내가 나서서 내 나라 산천을 두루 헤매며 내 나라에서 약재로 쓰는 초근목피며 그 열매들을 일일이 맛보고 실험하고픈 생각으로 몇 년을 번민했었지."
  "그거야 자네뿐이 아니지."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더란 말인가?"
  "당연하지 않는가. 나도 멍청이가 아닌 바에야 이 나라에 전래된 의서 의 거의 반이 중국 것이지 내 나라의 것이 아니라는 것쯤 아는 사람일 세. 또 ..."
  "또 ..."
  "풀 한 포기 나무 열매 하나도 그 고장의 기후 따라 맛도 생김새도 각각 다른 터에 중국 의서에 적혀 있는 이름 하나만 믿고 내 나라 물건을 따라 쓴다고 그게 다 효험이 제대로일 턱이 만무지. 만무고말고."
  "내 뜻과 어찌 그리 마음이 맞는 소리를 하나!"
  "하나 그 고생 누가 지원해서 할 수 있나. 이 땅에 자라는 수천 가지 초근목피를 일일이 새로 맛보고 병자에게 징후를 실험하고 그래서 설사 종래의 약방문이 잘못인 걸 알았다 하세. 그건 틀렸소 하면 제 명에 못살 걸. 뻔한 일 아닌가. 안 그래도 돈이나 밝히고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사는 나라 안 의원놈들이 가만두겠는가? 저들 게으른 건 뒷전이고 저 돌팔이 의원놈 때려죽이라고 길길이 뛸 게 눈에 선하이."
  마을이 가까워졌는지 개짖는 소리가 콩콩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령 그게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언젠간 기어이 누군가 해야 할 일이야."
  중의 말이었고 안광익이 냉소했다.
  "어느 놈이? 어느 어리석은 놈이 수십 년도 걸릴 그런 일을 자청한단 말인가? 잘못하다 독초라도 씹어서 혓바닥이 썩거나 벙어리가 되는 것 따윈 약과야."
  " ..."
  "급하면 땡전 한닢 들고 와 의원님 살려주소 어째 주소 죽는 시늉 하지만 돌아서면 피고름이나 짜고 남이 아프거나 병나길 기다리고 그걸 기화로 먹고 사는 의원놈 하고 손가락질하는 게 세상의 인심인 걸 모르나."
  "저기 저 집일세."
  하고 중이 저만치 불 꺼진 허준의 오두막집을 가리켰다.
  안광익의 소리가 계속됐다.
  "그게 아무리 세상에 필요한 것이건 진작 그 길을 단념하길 잘했지. 만일 이시진인가 하는 그 명나라 의원처럼 그 일에 미쳤다면 지금쯤 이런 한가한 얘기도 못하고 처자식 버리고 도망다니기 바쁜 신세가 돼 있을걸."
  "암튼."
  "암튼이고 뭐고 없어. '본초강목'이고 이시진이고 그게 중국땅에 태어난 놈이기에 그런 일을 해낸 게지 그놈도 이 조선땅에 태어났어 보게, 목 좋은 곳에 의원 간판 내달고 저부터도 잘 안 처먹는 어중간한 약이나 지어주며 돈냥 챙기기 바쁘지."
  "암튼."
  하고 중이 고집스레 또 자기 말을 꺼냈다.
  "세월이란 기묘한 것이고말고. 의원에 대한 우리 사정과 중국의 사정이야 여하간에 그런 일은 여간한 고집센 자가 아니면 해내지 못하는 일인 것만은 분명한데, 세월은 항상 엉뚱한 인간을 한 세월에 한둘씩 끼워서 태어나게 하거든."
  "이 집인가?"
  중이 자기 말을 계속했다.
  "그게 우리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게 정말 아쉬운 일이긴 하나 ..."
  "소리 좀 치게."
  하고 안광익이 이제야 숨찬 소리를 냈고 그러자 한 발 나선 중이 소리치는 대신 불 꺼진 허준의 집 방문을 향해 조용한 염불과 함께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0
  아닌밤중에 갑자기 방문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목탁소리와 염불소리에 누구 못지않게 불심 깊은 손씨도 손자 겸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이게 귀신 소리냐 사람 소리냐.!"
  하고 겨우 떨리는 소리를 냈고 허준의 아내는 방문 밖의 소리가 분명히 환청이 아니란 걸 깨닫자 재빨리 떼어 입은 저고리 안섶의 은장도를 확인한 다음 그 시어머니를 가로막으며 방문 밖을 향해 물었다.
  "뉘시오니까?"
  대답 대신 방문 밖의 목탁 치는 소리와 염불소리가 멎으며 쪽마루 위에 쿵 하고 무거운 물체가 내려지는 소리가 난 후 사내의 고통 어린 신음소리가 터졌다.
  경황중에 그것이 남편의 소리인 걸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여러 사람의 인기척임을 확인한 허준의 아내는 곧 질화로 속에서 불씨를 찾아 유황개비로 불을 옮겨 등잔에 당기고 나서 시어머니의 떠는 손을 잡았다.
  "분명 귀신의 장난이 아니고 누군가 왔나 봅니다. 하오나 설사 도둑이라 해도 무엇 하나 가져갈 것이 없는 집이요 인명이야 해치리까."
  이어 한결 침착해진 소리로 방문 밖을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밖에 와 계신 분들이 뉘시오니까?"
  그러자 이제야 집안에 명색이나마 사내는 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겸이가 다듬이방망이를 찾아들고 튕겨일어났고 역시 새 정신을 차린 손씨가 그 손자와 며느리를 오히려 다시 가로막고 나서며 방문을 열어 젖혔다.
  업혀와 쓰러진 피투성이의 사나이가 타관으로 출분했던 아들이요 남편임을 안 집안은 딸 숙영이까지 깨어 울음판 난리판이 되었고 그 경황 속에서 두 여자와 힘을 합해 허준을 안방으로 들여다 눕힌 김민세로부터 백운산 자락에 묻힌 효곡리 성불사에 다녀오던 중 우연히 독녀성 어간에서 이 사람의 빈사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마침 아는 얼굴이었으므로 업어왔노란 얘기와 전신에 심한 타박이긴 하나 술과 엿을 고아먹이며 한 보름 눕혀두고 수발을 들어주면 무사히 기동을 하리란 얘길 듣고서야 집안의 울음소리가 가라앉았다.
  이에 일변 아내가 물을 데워 남편의 상처를 닦아내고 어린 아들의 조력을 받아 찢긴 의복들을 갈아 입히는 동안 손씨는 냉수부터 청해 마시는 두 사람에게 이 엄동에 두 분을 만나지 아니했으면 자식이 필시 얼어죽었을 거라며 거푸 은혜를 치사했다. 그런 손씨에게 안광익은 껄껄 호탕한 웃음과 함께 은혜니 뭐니 공치사보다 시장기나 달래주시오 하고 요구하여 그제야 손씨는 허둥거리며 두 사람을 윗방으로 모신 후 요기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밥상은 돼지감자가 반은 섞인 조밥 두 그릇과 묵은 인절미를 구워 담은 접시며 김치도 없이 시래깃국과 마늘장아찌 한 종지였다.
  그 밥상에 기가 차 있는 안광익에게 "갑자기라 아무것도 차리지 못하오니 용서하십시오." 하고 미안해하는 손씨에게 대꾸도 없던 안광익은 뒤이어 할머니 대신 숭늉을 받쳐들고 온 겸이에게 물었다.
  "아니 너희 집은 조상 중에 죽은 사람도 없느냐. 어찌 설날 이튿날의 음식이 제사상에 오른 것도 없이 고작 이렇단 말이냐."
  겸이가 제법 부끄러운 얼굴이 되어 대답을 못했고 그러나 남 먼저 밥 서너 숟가락을 시래깃국에 말아먹고 난 김민세가 팽이치느라 새카맣게 터진 겸이의 작은 손을 다독거리며 미소부터 보여준 뒤,
  "먹긴 잘 먹었다만 웬 인절미더냐. 구워낸 걸 보니 설날 해먹은 떡은 아닌 듯한데? 혹 할머니가 떡장사를 하시느냐."
  "예, 할머니가 떡장사를 하시고 혹 못다 파시는 날은 식구들이 저녁삼아 먹곤 합니다."
  하며 다시 시선을 떨구자 안광익이,
  "그럼 모주나 소주라도 몇 잔 먹게 해달라 청해도 소용이 없는 소리겠군."
  하자 김민세가 말했다.
  "시장기 달랬으면 됐지 이 집 살림 구박하지 말게."
  "노파가 미안해하는 걸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나 원근의 돈을 다래끼로 쓸어모으는 유의탠데 명색이 그 유의태의 제자란 아이의 집안 살림이 이토록 구차하다니 유의태가 언제부터 이렇게 돈을 밝혔나 하고 나오는 소릴세."
  "그 사람 욕할 것도 없네. 그 사람은 의술이 돈이 된다는 걸 경계하고자 일부러 문도들에게 저 혼자의 의식 외는 못본 체하는 줄 알고 있어. 그밖의 돈일랑 그 집 안방에서 간추리는 눈치고 ..."
  "그렇다면 그 집 안방구석도 곧 썩는 냄새가 나겠구먼."
  "친구 부인께 거 무슨 악담인가?"
  "악담은 무슨 악담, 돈이란 뭔가. 본시 그건 똥무더기와 같은 것이라서 세상에 고루 흩어주면 천하가 윤택할 거름이 되는 법이지만 혼자 끼고 앉아 쌓아두면 악취밖에 안 나는 오물일 뿐이라고. 훗훗, 자고로 돈에 미쳐서 안 썩은 놈이 있던가."
  "돈타령을 별난 데다 갖다붙이는군. 하하."
  이어 웃음을 거둔 김민세가 방구석에 쌓인 것들을 가리키며 겸에게 물었다.
  "한데 저것들은 무엇이냐?"
  겸이가 기가 죽어서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논어니 그런 어려운 책은 옛날에 아버지가 과거공부 하실 적에 보시던 거구 동몽선습은 어머님이 구해주신 제 책올시다."
  "그리구 저 가득 쌓인 것들은?"
  "그건 아버님이 유의원님댁에 계실 제 틈틈이 적어오시던 약방문이랑 그밖의 의서를 필사하신 것들인데 몇 달 전에 불쏘시개나 하라며 부엌에 내다버린 것을 어머님이 도로 들여다놓은 것들올시다 ..."
  안광익이 냉소했다.
  "시건방지긴, 진짜 의원이 되려면 의서를 똥소칸에 걸어놓고까지 외우고 또 외워도 모자라는데 제놈 머리를 얼마나 믿기로 한번 읽고 쓰곤 불쏘시개로 내던진단 말인가."
  두 사람은 아직 허준이 유의태의 문하에서 쫓겨난 사실을 모르는 듯했고 그래선지 겸이가 좀은 항의 어린 눈으로 그 안광익에게 말했다.
  "그래서가 아니라 아버님 말씀이 우린 양반도 아니고 천한 출신들이라 아무리 공불 해도 소용이 없고 앞으론 책 따윌 뒤적거릴 필요도 없다고 내다버리신 것올시다."
  "상것이 의원이면 됐지 과거는 무슨 얼어죽을 놈의 과거, 왓핫핫 ..."
  그때였다.
  돌연 아랫방에서 흥분한 허준의 외침이 들려왔고 뒤이어 애써 달래는 아내와 손씨의 안타까운 소리에 이어 허준의 고함소리가 잇따랐다.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빼앗긴 터에 그럼 이대로 가만히 주저앉아 있으란 말이오!"
  "그렇기로 이런 몸으로 찾아나서긴 어디로 찾아나선단 말씀이셔요. 사람이 살고 나서야 산삼이든 무엇이든 ..."
  "어서 버선짝하고 갈아 입을 옷들 내놓으시오. 난 그놈들의 얼굴을 똑똑히 보아두었다고. 그리고 그만한 산삼을 팔려면 결코 소문 없이는 못 팔아!"
  "제발 앉아, 애비야!"
  "한 뿌리도 아니고 두 뿌리올시다. 백 년, 이백 년은 실히 넘은 큰 놈 올시다. 그 한 뿌리만으로 배 한 척쯤 넉넉히 사고도 님을 ..."
  "또 그 뱃소리 ..."
  "그것만 가져왔음 이까짓 산음땅 이 밤으로라도 떠날 수 있는 거금이란 말이오."
  "난 그까짓 거금도 싫다. 왜 넌 아직도 너를 오늘만치 키워준 유의태 그분을 찾아갈 심정이 못 되느냔 말이다."
  "그 얘긴 이미 끝났습니다. 애초 유의태 따위 내게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갈 데 없으니 잠시 몸담아 있었을 뿐올시다."
  "그럼 한낱 뱃사공이나 어부가 되자고 수천 리 이 산음땅에 찾아왔더란 말이냐! 그리고 잡힌 고기도 놓아주라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거늘 왜 굳이 고기를 잡아 생업을 삼으려 들꼬, 왜 ..."
  겸이가 어물어물 윗방으로 건너갔다.
  "말씀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요? 어머니가 그토록 위하는 부처가 오늘날까지 어머님을 위해 해준 게 .무엇입니까. 말끝마다 부처님 부처님 ..."
  "우리 식구 무탈하게 이만치나 사는 것도 모두 부처님의 자비니라."
  "암요. 제가 천하게 태어난 것도 부처님의 자비지요."
  "무어라고?"
  "여보 ..."
  "흥, 낯선 고장에 가면 천한 놈도 기를 펴고 살 새 세상이 기다리고 있겠거니 ..."
  "오냐, 그래 하고픈 말 마저 해보아라. 나도 이번 식구들에게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서버린 너를 보고 돌아오면 꼭 할 얘기가 있다고 기다렸다."
  "백번 해봤자올시다. 나는 종살이 끝에 용천 현감 허사또의 첩실이 된 천첩 소생이고!"
  "당신 왜 ... 대체 이 ... 럽니 ... 까 ... 항차 그까짓 산삼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아버질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구 곤두박질 여우짓을 열번 스무번 해봤자 겨우 시골 관아의 아전이 되는 것쯤이 고작올시다! 그 아전이라도 될까요? 백성들 토색질하구 약한 놈 등이나 쳐먹는 아전이라도!"
  "아부지이 ... 할무이 ..."
  하고 다시 일어난 숙영이가 울음을 터뜨렸고 손씨도 울음이 터졌을 때,
  "아직도 흘릴 눈물 남았습니까. 왜 웁니까. 왜요 왜!"
  "서방님 ... 제발 뒤꼍방으로 건너가소서. 여보 ..."
  순간 허준의 목도 메었다.
  "의원이고 개나발이고 그 따위 꿈 버렸습니다. 발버둥질쳐 봤자올시다. 제 소망이 고작 의원이었으니까 ... 더 ... 이 ... 상 미련두어 이 세상 쳐다볼 생각 없다, 그 말올시다. 무슨 일 있어도 산삼을 찾아 배 한 척 마련하여 넓은 바다에 나가 그물이나 치구 ..."
  "난 싫다."
  "싫어도 난 정했습니다. 함께 살기 싫으면 아무도 따라오라 사정하지 않겠으니 그리 아소서."
  "그래 그토록 의원이 싫다 하면 의원은 마다 하자. 하나 아전도 ... 아전 나름 어려운 현민들 도와주며 정직하고 근실하게 사는 아전이 되리란 결심을 왜 못할꼬."
  "정직하고 근실한 게 통하는 세상인 줄 아십니까. 내 자리 차지하자고 있는 말 없는 말로 괴롭힌 놈들이 저 유의태의 집에만도 우글우글합니다. 흥 먹느냐 먹히느냐가 이 세상사올시다. 고기잡이 왜 못합니까. 항차 부친 따위가 무엇입니까 사람만 안 해치고 남의 것 도둑질만 않으면 세상천지 거리낄 게 무엇이냐, 그 말올시다!"
  "암 도둑질은 말아야지.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너야말로 도둑놈이니라!"
  뜻밖의 소리에 식구들이 놀라 숨을 삼켰고 허준이 획 아랫방을 돌아보았다.
  "도둑놈?"
  "도둑놈이고말고!"
  김민세의 목소리가 마당 쪽에서 났다.

    11
  격분한 허준이 마당으로 향한 방문을 왈카닥 열어젖혔다.
  마당에 길 떠날 모습의 안광익과 김민세가 서 있었고 내다본 허준의 얼굴을 향해 김민세가 손가락을 창날처럼 뻗어왔다.
  "당신 지금 무어라 했소!"
  "이 집안에 도둑놈이 너말고 누가 있느냐!"
  "어째?"
  허준이 굴러나왔다.
  그들이 자기를 구해준 고마움은 안다. 또 그들의 의술을 우러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자기가 의술에 관심이 있었을 때의 얘기다.
  그 유의태와 인연을 끊은 이제 와서조차 그들에게 매도당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 땡추중 같은 놈이!"
  "애비야." "여보!" 하며 손씨와 아내가 달려나와 말리려 했으나 허준은 두 여자를 내치며 고함쳤다.
  "내 비록 오늘까지 이 모양으로 살지라도 남의 집 감나무 가지 하나 꺾은 적이 없는데 내가 도둑질하는 꼴을 네가 보았다고 말을 함부로 해."
  "꼭 남의 집 담을 넘어야 도둑이더냐? 유의태의 밥을 먹으며 약초를 식별하는 수업을 쌓지 않았다면 그 산삼인지 뭔지가 그토록 값나가는 것인 줄 네놈이 어찌 알았을까 보냐고 말하고 있는 게다! 그럼에도 유의태에 대해 고마워하는 말은커녕 저 혼자 팔자 고칠 궁리에 바빴으니 그건 도둑이 아니고 무엇이냐!"
  " ..."
  "욕심은 곧 도심인즉! 할 말이 있으면 해보아!"
  "이 넓은 세상에 그저 제 한몸이나 팔자 고칠 궁릴 하는 이깐 허접스러운 놈을 땀 뻘뻘 흘리며 업고 온 내가 오히려 한심투성일세. 가세."
  안광익이 김민세의 팔을 끌자 손씨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두 분께선 혹 유의태 그분을 잘 아시는 처지시온지?"
  "그게 무슨 상관이오. 저자가 이미 그 사람을 스승으로 보지 않는 터에 우리 또한 저런 망종을 아는 척하기 싫소이다."
  "기실 사연은 그것이 아니오라."
  "그만두오. 일일이 구차한 넋두리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한 몸들은 아니오. 아니 안 갈 셈인가?"
  안광익이 허준을 지켜보는 김민세를 다시 잡아끄는데 그 손을 물린 김민세가 허준의 앞으로 다가서며 잠시 눈싸움을 하는가 했더니 뜻밖에도 방금까지의 언쟁을 의식하지 않는 나직한 한마디를 했다.
  "면천시켜주랴?"
  "어째?"
  "제법 논어도 읽고 의서도 베껴낸 자가 면천도 몰라?"
  "더불어 말하고 싶지도 않으니 어서들 가버리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무언가 한 가지 들은 바가 기억이 나서 하는 소리다. 창녕 뉘 집엔가 가서 제법 중한 병 잘 낫우었다는 얘길."
  "그깐 작은 재주 따위 뭐 그리 대단한가! 그대는 다심해서 탈일세. 이잔 인두겁만 썼지 제 어미의 눈에서 피눈물도 예사로 뽑는 살모사 같은 잘세. 좀 아까 보지 못했던가!"
  "무엇이야!"
  뛰어들 듯한 허준을 아내가 잡았고 그 허준에게 김민세가 또 나직하게 말했다.
  "면천시켜주랴?"
  "흥."
  "천하게 태어난 것이 억울하다면서? 그러니 면천시켜 줄까를 묻고 있는 게다."
  "면천 너나 해라."
  "이자가 도시 아래위도 가리지 못하고 말본새도 배운 게 없구만."
  안광익이 씨근거리는 허준을 같잖은 듯이 보다가 어이없이 웃었고 허준이 아직도 자기를 지켜보는 김민세에게 삿대질을 놓았다.
  "너야말로 면천의 뜻을 제대로 아느냐! 중도 여덟 가지 천한 신분의 하나 아니냐. 그렇다면 네 신세나 내 신세나 마찬가지! 면천이 되고픔 너부터나 되란밖에!"
  김민세가 눈도 깜박 않고 다시 한번 나직이 말했다.
  "면천시켜 주랴?"
  손씨가 얼른 사이에 뛰어들었다.
  "대사님께선 어느 가람에 계시는 분이시온지요."
  김민세가 그 손씨를 밀어내고 여전히 허준에게 말했다.
  "암,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바에야 이 세상 살 재미 없는 세상이고 말고. 양반이 아니거든 그 양반의 수족이 되어 꺼덕거리는 중인쯤으로라도 되든가 그도 못 되거든 태어난 고장에 농사라도 마음놓고 짓고 살 평민쯤이라도 돼야 사람 신세라 할 수 있지."
  허준이 어느덧 숨을 삼킨 채 그 김민세의 눈빛에 압도당해 가는데 김민세가 어머니의 치마꼬리 잡고 훌쩍이고 있는 숙영을 가리켰다.
  "이 아이가 귀여우냐?"
  이어 이번에도 역시 콧물 눈물이 빠진 겸이를 가리켰다.
  "이 네 자식이 귀여우냐, 그 말이다."
  " ...?"
  "암 귀여울 테지. 항차 지각이 없는 들짐승이라 해도 제 자식은 귀여운 법인데 넌들 어찌 제 자식 귀여운 줄 모르랴. 하나."
  "그래, 하나 뭐란 말이냐."
  "듣자 하니 너는 사노비의 신센데도 관가의 눈을 속이며 떠다니는 잔 듯한데."
  " ...!"
  "숨어다니는 네 신세가 드러나는 날 그 화는 결코 네 한몸에 미치지 아니할 게다. 어느 상전 밑에 팔려가 대대손손 종노릇 하면서, 또 처자식 또한 제법 얼굴값을 하는 생김새면 어느 놈의 장난감이 될지 짐작이나 하랴? 종년 배 위에 올라타는 건 누운 소 등에 올라타는 만치 쉬운 노릇이라는 양반이란 자들의 농지거리쯤 너도 알 터인즉슨!"
  "이 중놈이! 어째!"
  그 뛰어드는 허준을 안광익이 우악스런 손으로 밀쳐냈다.
  "중 입에서라고 반드시 염불만 나오란 법 있느냐. 육두문자라도 들을 본새가 있거든 들어두어!"
  밀려난 허준에게 김민세가 다시 다가들었다.
  "암, 거기까지 알고 나서야 어찌 면천하고 싶지 않으리. 설사 제 간과 눈알을 빼주더라도 면천될 길이라면 암, 원할 놈 많지."
  "홍, 그래서 솔가하여 여진 땅으로라도 도망치란 그 말이로군."
  "천만에."
  "어째?"
  "면천하는 길도 확실히 두 길이 있으니."
  "두 길이 있다고?"
  "하나는 사내의 씨주머니를 부서뜨려 궁중에 뽑혀 내시가 되어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르면 종이품 상선에 이르는데 그 하는 일은 임금의 어명을 출납하며 임금의 수라상을 감독하는 일이다."
  "내시 ..."
  "일명 경사방대감이요 대전설리라고도 부르는 그 상선의 직책은 천한 인간으로 태어나 조선 천지에서 대감이라 불리는 하늘 아래 단 하나의 인물이다."
  " ...!"
  "하나 씨주머닐 잘라낸다고 반드시 궁에 뽑힌다는 보장은 없고 이미 뽑혀서 궐내에 버틴 내시의 숫자가 1백 40명, 아니 그것보다 이미 아내까지 거느린 너는 그 내시의 자격도 없다."
  " ..."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 어의가 되는 길뿐."
  "어의?"
  "어의 ... 왕족의 건강을 돌보고 임금의 시탕을 책임지는 직책인 어의 ..."
  "그 어의도 대감이다, 그런 말이오?"
  "천만에, 그 길도 오르고 올라서 양반들이 독차지하는 도제조, 부제조 아래 어의로서 의명을 떨치고 떨쳐 실무인 내의원정이 되고서야 정삼품이 되는 것이 고작이다."
  "하나 ..."
  하고 안광익이 냉소했다.
  "정삼품도 정삼품 나름, 대감이란 호칭은 옥당(임금이 있는 곳)에 오를 수 있는 문관 벼슬에 한하고 의술 따위 천직은 당하관 정삼품에 영감이 고작이지, 훗훗."
  허준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놀리고 있는 얘기 같았다. 될성부른 얘기들이 아니었다.
  "하나 어의의 직책만 찬다면 대대손손 종살이나 제 처자식과 본의 아닌 생이별 따윈 면하고 살리라."
  허준의 눈이 비웃으며 안광익을 향했다.
  "내 알기 당신이야말로 그 내의원 출신인데 왜 당신은 면천의 길을 마다하고 내게 떠드는 게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밥 한 상 차려준 네 모친과 네 자식들을 위해서지. 내 말은 그뿐!"
  안광익이 그 김민세의 법의자락을 끌었다.
  "가세."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 허준이 내뱉었다.
  "차라리 하늘의 별을 따라지, 미친놈들!"
  그 허준 따윈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김민세가 손씨에게 합장하며
  "나무관세음보살 ..."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득히 첫닭이 울고 있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김민세에게 마주 합장하던 손씨가 그래도 무언가 미련이 되어, 그러나 부르지도 못한 채 두 사람을 쫓아갔고 갑자기 얼어붙어 있는 허준에게 아내가 위로하듯이 말했다.
  "될성부른 일이 아니올시다. 우연히 그래본 거겠지요. 들어가소서."
  그 순간이었다.
  허준이 갑자기 마당을 뛰쳐나갔다.
  가족이 놀랄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으로 허준이 달려가고 있었다.
  바람속으로 달려 나루터 언덕비탈을 굴러내려온 허준은 엎어질 듯이 섰다.
  마악 강심으로 쪽배 하나가 떠가고 있었고 그 위로 배를 젖는 김민세가 보였다.
  허준이 외쳤다.
  "대사님, 나 좀 봅시다. 대사니임--"
  강바람이 그 소리의 반을 흐트러뜨렸다.
  허준은 멀어가는 배의 방향으로 모래톱을 달리며 다시 절규했다.
  "시키는 대로 하리다. 면천하는 길이면 무슨 짓이든 하리다앗! 날 좀 보고 ... 가 ... 오 ... 날 ... 좀!"